아들의 방
이현자
빈방을 또 걸레질한다. 아들이 떠난 후 이 방은 시간이 멈춘 듯 옷장과 책장이 그대로 있다. 남은 가족은 아무것도 없이 휑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암묵적으로 아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하나, 둘 갖다 놓기도 한다. 남편은 늘 닫혀 있는 문이 단절(斷絕)처럼 느껴지는지 몇 가지 겉옷을 걸어 놓고는 일부러 드나든다. 나는 오늘도 볕드는 창문을 열고 이렇게 아들의 흔적을 더듬고 있다.
두 아이를 어릴 적부터 놀이방과 어린이집에 출퇴근 시간에 맞춰 번갈아 맡기고 데려오느라, 남편과 아침저녁으로 콩 튀듯 뛰어다녔다. 남보다 적은 살림으로 시작했지만 시골 계신 부모님께는 힘들다는 내색도 못하고 잘해 내려고 무던히도 애를썼다. 다섯 살 큰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집이 아니라, 돌 지난 동생이 있는 놀이방에 또다시 맡겨졌다. 하필이면 1층 놀이터 앞이어서 창가에 매달려 엄마 앞세우고 마음껏 뛰어노는 또래 아이들을 바라봐야만 했다. 두세살 아이들과 지내면서 가끔은 얼굴에 손톱자국도 있었고 동화책 모서리에 맞아 눈이 뻘건 적도 있었다. 동생들을 위해 참았던 것을 그냥 착한 아이로만 생각했다. 한번쯤 어리광도 부리고 칭얼대며 떼를 썼다면 마음에 남은 후회가 조금은 옅었을 텐데, 그 어린 속은 벌써부터 또래 아이보다 더 자라고 있었다.
몇 번째 걸레를 빨고 물기를 꼭 짜서 내 마음의 응어리를 닦아내듯 가장자리부터 다시 훔친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치유되지 않은 아픔 하나쯤은 품고 살겠지만 살아갈수록 잊히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감춰둔 흉터처럼 내보여질 때가 있다. 다시 돌릴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할수록 후회가 밀려오지만, 그마저 잘 지워지지 않는 자국으로 남아 자꾸 되돌아보게 된다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따듯한 봄날의 공기가 들어온다. 대여섯살 아이가 밖에 나가 맘껏 놀지 못하고 창문에 매달려 놀이터 아이들을 바라봐야 했던 마음은 어땠을까 나는 이렇게 포근한 바깥바람을 느끼게 해주지 못했고 어린아이가 누려야 할 엄마의 품을 많이 내주지 않았다. 우리 형제를 돌볼 새 없이 내 버려두고 뙤약볕 들판에 계셨던 어머니 심정이 이랬을까. 지나간 것은 그냥 잊으면 되는 것을 이렇게 마음속에서 없어지지 않고 앙금처럼 남는 것들이 있다. 이기적이게도 부모의 일이라면 잊고 살면서 내리사랑인지 자식에게 쓰이는 마음은 이렇게 방 한구석에 있는 얼룩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자라면서 외로웠을 아들의 마음을 내 욕심 덜어내고 조금 더 보듬어 주고 안아 줄 것을... 정작 아이와 나누어야 할 행복을 놓쳐 버렸다.
가지런히 꽂혀 있는 손때 묻은 책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속에 벌써부터 또 다른 세계를 만들고 어릴 적 놀이방 창문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었듯 큰 세상으로 가고팠던 걸까. 초중고 교과서가 꽂힌 책장에는 세계 문화탐험, 우주에서 살아남기, 세계여행지도 같은 그동안 보이지 않던 책들이 보인다. 스물에 대학 한 학기를 마치고 이제부터는 죽거나 다치는 것도 제 운명이라며 나를 위로해주고, DMZ 수색대에서 임무를 다한 뒤 곧바로 타국에 공부하러 간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날 때마다 만져 보던 작은 액자의 사진 속에서, 유난히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친구들과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오늘따라 더욱 마음이 아려온다. 며칠 후면 휴가 내고 다니러 온다는 소식에 자꾸 애꿎은 걸레질만 한다. 그때의 어린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기다림의 시간은 참으로 더디게만 간다. 그리움을 닦아낸 걸레는 아무렇게나 꺼부러져 있고 힘이 들어갔는지 팔목이 시큰하다. 아니 마음이 시큰하다.
말간 창을 멍하게 바라보자니 지나간 일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다섯 살 어린아이가 제 몸집만한 가방을 메고 방으로 들어와 무릎에 앉으려 하니, 그만 밀쳐내고 동생만 끌어안는다. 출근하는 길에 먼저 가야만 하는 나는 어린 아들을 집 출입구에 세워 놓고 어린이집 차에 타라고 일러준다. 그 아이는 엄마가 먼저 뒤돌아서는 것을 보고 사람 보내는 법을 배웠나 보다. 입대할 때도 타국에 갈 때도 우리가 보낸 것이 아니라 아들은 우리를 마음에서 먼저 보낸 것이다. 방은 닦을수록 말끔해졌지만 내 마음을 덮는 희미한 연막은 여전히 걷히지 않는다. 아니 일부러 걷어내지 않는다. 누구나 다 들춰 낼 수 없는 아픔과 상처의 모양은 다르지만, 이렇게 저마다의 방법으로 마음 지키며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들은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갔지만, 나는 지금 지난날의 후회를 방이 닳도록 닦아내고 창문 밖을 내다보며 아들을 기다린다. 느리게 가는 시간에 더욱 그리움이 스며들고 때 이른 뜨거운 봄 햇살만이 무심하다. 아들이 오는 날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보자마자 커다란 가방을 받아 들것이며, 나보다 더 훌쩍 자라버린 아이의 볼을 만져주고 힘주어 안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