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후면 입학 50주년이란다. 믿기지 않지만 그게 세월인걸.
신년 행사를 마치고 올라온 김성한 동문과 소야소의 글에 올라온 답글들을 보며
20여년 전 30주면 행사를 치루던 그 날이 생각난다.
어쩌면 평생 마음에 멍울처럼 지워낼 수 없는 아픔의 하나이기도 하다.
엄창희는 30주년 행사가 있고 4일 후 수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행사 일정을 기억 하진 못하지만
토요일 행사 후 수요일이란 것 만은 기억하고 있다.
엄창희는 나와 특별히 친분이 두터웠던 친구는 아니다.
동문회 일을 시작하며 KBS에 근무하던 그 친구에게 동문회 관련된 부탁을 자주
하게됐고, 워낙 사람 좋은 그 친구는 동문회 일에 많은 도움을 줬고, 때로는 몇몇
친구들을 불러 밥을 사 주곤 했었다.
간경화가 깊어지며 직장을 고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투병중이라고 얘길 듣고 있던
어느날 전화가 왔다. 여름이었다. 거구장에서 점심을 살테니 친구와 나오란다.
같이 나오라는 그 친구는 나보다 엄창희와 훨씬 가까운 친구였다. 점심을 먹잔다고
친구에게 연락을 하니 나오고 싶지 않단다.
약속장소에 나갔을때, 엄창희는 병색이 더 짙어졌고, 얼굴은 까매지고, 복수가
차 온다며 고무줄을 넣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발이 부어 신발을 신을 수가 없어
쓰레빠를 신고 왔노라며 웃는다. 냉면이 너무 먹고 싶었다고, 다들 잘 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많이 외로왔구나, 병마와 싸우느라 얼마나 힘들까, 마음이 아팠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웃고, 얘기하고
이렇하고 나와도 되지요?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세요.
그리고는 헤어졌다.
몇달 후 상태가 안좋아져 다시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번쯤 병원을 찾아가야지, 미루고 미루다 30주년 행사가 다가왔다.
행사는 토요일이었고, 시간은 아마 오후 3시경쯤이 아니었던지.
나는 동문회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전화가 왔다.
아주 낮은 소리의 목소리가 얌전한 여자가 나인가를 확인하고 전화를 바꿔 줬다.
간병인인가보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엄창희다.
"김미자씨, 나 냉면이 먹고 싶어요. 신촌 시장 옆에 한일옥이란 냉면집 있어요.
거기가서 그 냉면좀 사다줘요."
오늘은 행사가 있어서 힘들고, 내일이라도 사다 드릴께요라고
말을 했었을 것이다. 그 날 행사는 무사히 끝났고, 냉면을 사다 주지 못한채
엄창희는 세상을 떠났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또 어쩌면 왜 하필이면 나야라는 황당한 마음에 미뤘던 것인데,
마지막 먹고 싶다는 그 소원을 들어 주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려 지워지질 않는다.
이제야 백골이 진토가 되 있을 그 친구에게 지금이라도 묻고 싶다.
왜 하필 나한테 전화를 했는데요. 동문회 사무실은 해결사 같은 곳이라서?
부인도 있잖아요. 더 친한 친구도 있잖아요.
아직도 내 마음은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지 못해 이렇게 미안해요.
오늘이 마지막인듯 살라고 하는 말,
맞아요. 내가 만일 그 친구가 그렇게 황망히 떠날 줄 알았다면
냉면 한그릇 사다 주는 일을 미뤘겠어요?
가슴에 뭉쳐진 옹이 없이 나누고 베풀고, 용서하고,
흐르는 물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누가 무슨 부탁을 하던 난 미루지 않을겁니다.
내가 살아갈 그 어느 날까지.
첫댓글 "장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거니와 창희는 말기에는 부인도 더 친한 친구도, 추측컨대, 이미 떠나버린 상황이었을 것.
아마 누구에게 말해도 들어 줄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간병인의 목소리가 너무 조심스러웠거든요. 알면서도 잊혀지질 않아요.
이제 더 이상 냉면 먹고 싶은 친구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미자씨의 아름다운 심성이 그데로 전해져 오는 아침입니다
네, 누구도 그런 간절한 소원을 말하지 않아도 될만큼 모두가 다 건강했으면 합니다.
50주년이 되는 그날 우리 모두가 회춘했으면 좋겠어요.
미자씨가 편하고 신촌시장과 가까운곳에 직장이 있었으니 냉면 부탁했을껏으로 생각이 듭니다.냉면 못사준것을 너무 오래 기억하지 않는것이 좋겠습니다.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란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살며 잊을 수 없는 일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창희와는 아스라한 추억이 있다. 68년 월남 파병 직전에 휴가인지 외출인지 나와서 모교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를 만났다. 우리는 왕자 다방에서 시간을 쪼갰다. 창희는 군대를 면제 받았는지 아직 민간인이었다. 자세한 사연은 기억할 수 없지만 영어 연극을 하는데 은사님과 협조가 잘 안된다는 호소를 나에게 했다: "신부님은 'Are you talking about personal problems?'하시는데 나는 personal은 아니고 심각하거든." 옆에서 1년 인가 2년 동문 후배가 일본인 관광객을 안내하다가 소통이 안되니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형, 상지대학생이라는데 일본식 영어라 도대체 못 알아듣겠어요."
상지 대학생은 영어가 유창했다. 일본식은 커녕 정통영어였다. 창희와 나는 그에게 별로 꿀리지 않는 영어로 유쾌하게 시간을 죽였다. 다방 마담은 "아이고! 이렇게 (이국의 젊은이들끼리) 영어로 대화를 나누니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하면서 공짜 커피를 여러 잔 덤으로 대접했다. 지금 후배들이라면 과도 다르고 기수도 다른 동문들끼리 어쩌면 그렇게 다정하게 회동할 수 있을까 의아스러울 것이다. 우리 시대의 서강은 과, 기수 구별 없이 형 아우처럼 친하게 지냈던 것이다.
맞아요. 오늘 몇 친구들과 산에 올랐었지요. 남녀 구별없이 이 나이에 함께 어울려 산을 오를 수 있다는 것,
행복한 일이예요. 안그래도 다른 대학 출신도 있던 그 자리에서 자랑스레 외쳤답니다. "그래서 노년을 위해
학교 선택을 잘 해야 한다니까."
그래요,,, 기록을 보니 30주년 행사의 날은 6월 4일 토요일이었다.. 기억력 대단하구나...
엄창희씨의 기억은 나에게도 제법 있지요... 밥도 여러번 사주었는데...
목동 집으로 병문안 간 일... 마지막으로 병원에 문안가려다가 뭔 일인가 있어 못갔는데
그 다음날 떠나버렸어요... 그래서 저도 엄창희씨 얘기만 나오면 항상 가슴이 찡~ 하답니다..
날자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몹시 후덥지근한 날이었던 것 만은 기억이 나는 구나. 그래, 6월초였구나.
때로 참 많이 살았구나 싶어. 추억할 수 있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쌓여있거든. 때로는 아프긴 하지만 예쁜 이야기들로. .
지난 날 가슴 아픈 이야기이네요. 창희씨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순수한 사람이었죠.
순수한 사람은 마음이 아프다던데...어느 노숙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