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우의 노래
서정주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살과
물살 몰아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오, 우리들의 그리움을 위하여서는
푸른 은핫물이 있어야 하네.
돌아서는 갈 수 없는 오롯한 이 자리에
불타는 홀몸만이 있어야 하네
직녀여, 여기 번적이는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나는 세이고......
허이연 허이연 구름 속에서
그대는 베틀에 북을 놀리게
눈썹 같은 반달이 중천에 걸리는
칠월칠석이 돌아오기까지는
검을 암소를 나는 먹이고
직녀여, 그대는 비단을 짜세.
(시집 『귀촉도』, 1948)
[어휘풀이]
-은핫물 : 은하수(銀河水), 은하를 강에 비유하여 이른 말.
-오롯한 : 모자람이 없이 온전한
-북 : 베틀에서 날실의 틈으로 왔다 갔다 하며 씨실을 푸는 기구
[작품해설]
이 시는 전래 설화인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창작 모티프로 하여 사랑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남녀의 애절한 감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일 년 중 단 하루만 만날 수 있는 견우와 직녀의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 만남과 이별의 정서를 그려낸 이 작품은, 설화의 주인공인 ‘견우’를 시적 화자로, ‘직녀’를 시적 대상이자 청자로 설정하여 만남과 이별의 역설적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따. 이별은 일반적으로 사랑의 종말로 인식되지만, 이 시에서는 그것이 사랑을 위한 내적 성숙의 기간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화자는 이별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긍정한다.
맞닥뜨린 이별의 상황에 가슴 아파하는 연인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이 시는, 1연에서 이별의 시간이 바로 진정한 사랑을 위한 내적 성숙의 시간임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사랑과 이별은 상반되고 모순되는 상황이거나 정서임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여기서 사랑을 위해서는 이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이별을 통해서만 사랑음 성숙해진다는 의미이다. 2연과 3연에서는 화자의 정서가 이별의 장면, 이별 후의 기다림과 안타까움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따라서 ‘출렁이는 물살’ · ‘물살 몰아 갔다 오는 바람’ · ‘푸른 은핫물’은 성숙한 사랑을 위해 감당해야 할 장애물과 고난을 의미한다.
만남의 장애물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4~8연에 나타난 시적 화자와 시적 대상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그것이 바로 4연에서의 ‘불타는 홀몸’으로 남아 있는 ‘나’의 모습과, 5연에서의 ‘모래밭에 돋아나는 풀싹’을 세는 ‘나’의 모습이다. 또한 그것은 8연의 ‘검은 암소를 먹이’며 재회의 날을 기다리는 ‘나’의 모습이며, 6연과 8연에서의 ‘베틀로 비단을 짜는’ ‘그대’의 모습이다. 따라서 ‘번쩍이는 모래밭’과 ‘허이연 구름’은 견우와 직녀가 각각 처해 있는 시련의 공간을 의미하며, ‘풀싹을 네는’ 나의 모습은 간절한 그리움으로 보내는 막막한 세월을 상징한다. 모래밭은 풀이 쉽게 자랄 수 없으며, 풀이 자라나지 않으면 견우는 소를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4연에서의 ‘불타는 홀몸’은 고독 속에서 지펴지는 사랑의 불길과 인고의 시간이 형상화된 구절로, 직녀를 향한 견우의 사랑과 연결, 또는 그리움과 재회의 욕구에서 비롯된 그의 몸부림을 의미한다. 이 같은 불의 이미지는 2,3연의 물과 바람의 이미지와 대립됨으로써 이별의 상황에서 빚어지는 쓸쓸함과 그리움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속에서 더욱 뜨거워진 사랑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여 주게 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주어진 본분에 충실하면서 ‘눈썹’의 이미지만큼이나 아름답고 황홀한 ‘칠월칠석’의 재회를 기약하는 것이다. 결국 이 시는 이러한 고난을 딛고 홀로 설 수 있는 성숙한 사람만이 진정한 만남, 완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작가소개]
서정주(徐廷柱)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학, 자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
시 전문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 위원장직을 맡음
1950년 종군 위문단 결성
1954년 예술원 종신 위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55년 자유문학상 수상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2000년 사망
시집 : 『화사집』(1941), 『귀촉도』(1948), 『흑호반』(1953), 『서정주시선』(1956), 『신라초』 (1961), 『동천』(1969), 『서정주문학전집』(1972), 『국화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1976),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미당서정주시선집』 (1983),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시와 시인의 말』(1986), 『이런 나
라를 아시나요』(1987), 『팔할이 바람』(1988), 『연꽃 만나고 가는 사람아』(1989), 『피
는 꽃』(1991),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민들레꽃』(1994), 『미당시전집』(1994), 『견우의 노래』(1997),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