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건물은 크림색의 신축건물이다. 오래되었어야 5년쯤?
그 건물을 떠나온 지가 3년은 되어가니 내가 거기에 살았을 때는 신축 된지 2년쯤 되었었겠다. 내가 그 건물로 이사를 들어간 건 우연이었다. 그 건물에 입주하기 전에 살던 곳은 열 평 짜리 독신자 아파트였다. 함께 살던 여동생이 막 결혼을 해서 나는 혼자 남아 나중에 '모여 있는 불빛'이란 제목을 붙여 준 단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여동생은 아침마다 흰 우유를 마시는 걸 좋아했고 나는 우유라면 질색을 했다. 우유를 마시는 여동생은 이제 그 방을 떠났는데 미처 끊지 못한 우유는 매일 아침 배달되었다. 나는 신문과 함께 우유를 안에 들여와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어느 날 밤이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여는데 우유 곽이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냉장고 안에서 오렌지색 불빛이 흘러나와 흩어진 우유 곽을 비추었다. 우유 곽은 내 맨발 위에도 쌓여 있었다. 흩어진 우유 곽을 내려다보고 있다니 이런 밤의 여동생의 채취가 생각났다. 나는 그 애를 베개처럼 껴안고 자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 앤 내가 우유를 질색하는 만큼이나 내가 그 애를 껴안는 걸 싫어했다. 잠든 그 앨 몰래 껴안고 자다가 보면 갑자기 내 손이 사납게 내팽개쳐지곤 했다. 그래도 그대가 잠들면 또 껴안았다. 그 애가 등을 돌리면 뒤에서 껴안았다. 나는 그 애의 목덜미나 머리카락에서 맡아지는 냄새가 좋았다. 그건 우리 가족의 냄새였다. 엄마가 쓰고 있는 때 절은 수건 냄새였고, 아버지의 엽총 냄새였으며, 옛집 마당의 미색 장미꽃 냄새였다. 사방으로 흩어진 우유 곽은 열린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 아래서 그대의 부재를 말해주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잡고있던 내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갑자기 눈물이 쑥 솟아 나왔다. 얼마나 울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흩어진 우유 곽 사이에서 자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 아래 흩어진 우유 곽들도 가만히 자고 있었다. 발을 뻗어 냉장고 문을 닫고 몸을 일으키려니 무릎이 휘청했다. 사방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나는 잠시 그 어둠 속에서 휘청 이는 무릎을 싸안고 있었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잡초가 무성한 길 위에 나를 남겨놓고 가버렸다는 생각. 불을 켜고 손거울을 집어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꺼풀이 사라질 만큼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세면장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려고 보니 내 얼굴이 세수 대야 만하게 느껴졌다. 우유 직매장에 전화를 걸어 우유배달을 중지시키고 그릇을 닦았다. 옷장 속에서 미처 동생이 가져가지 못한 동생의 옷가지들을 꺼내 빨아 널었다. 세면대를 오래오래 비누칠해서 닦아내고 신발장 속의 흙들을 쓸어내었다. 손톱을 깎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쓰고 있던 단편소설을 이어 쓰기 시작했다. 그 애의 부재를 견디기 위한 글쓰기였다. 이제는 그 집으로 퇴근할 동생이 아닌데도 밤이 되면 내 습관이 그 앨 기다렸다. 무심코 왜 이렇게 늦나 싶어 시계를 보았고, 또 무심코 식탁에 그 애 몫의 수저를 내려놓았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그 애가 언니, 하며 차가운 손을 내 목덜미 속으로 집어 놓는 것 같아 고개를 젖히곤 했다. 그렇게 모여 있는 불빛을 반쯤 써나갔을 때 주인이 방문을 했다. 주인은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미국에 나가 있던 후배에게 그 아파트를 팔았는데 그 후배가 귀국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파트를 비워달라는 얘기였다. 내게는 한 달의 기한이 주어졌다. 다음날로 이사할 곳을 알아보러 다녀야 했으니 나는 겨우 경비실로 내려가 그 아파트 내에서 새로 나온 곳이 없는가만 물어보았다. 비어 있는 곳이 없다고 했다. 그 아파트는 독신자용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어느 독신자가 춥디추운 일월에 이사를 가겠는지. 머리 속이 잠시 복잡했지만 나는 도로 책상 앞으로 와서 모여 있는 불빛을 쓰는 일에 매달렸다. 그때의 그 습기가 무엇이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깊은 또랑이 몸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나는 습했다. 그 단편소설을 완성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은 것처럼 나는 습했다. 그 단편소설을 완성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나 그 습기에 매몰되어 또 한번 익사했을 것이다. 허기 끝의 탐식처럼 눈을 부라리고 앉아 모여 있는 불빛을 완성했을 땐 이사 날짜가 겨우 일주일 남아 있었다. 그제서야 여기저기 복덕방엘 다녀왔으나 일 주일 뒤에 내가 들어가 살 곳을 찾기란 어려웠다. 그러나가 그 건물을 608호를 벼룩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언제든지 입주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에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구조를 묻는 내게 주인은 13평 원룸에 구석에 한 평 정도의 세면장이 있고, 도시가스 대신 전기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는 레인지가 달린 한 자 짜리 싱크대가 설치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건물을 한번도 보지 않고서 이사를 했다. 미리 가 볼 수도 있었지만 이삿날까지 가보지 않았던 것은 그 건물이 마음에 들지 않을까봐서였다. 이 도시의 어디에도 일 주일 안에 내가 이사를 할 수 있는 곳은 없었으니 마음에 드나 안 드나 이사를 해야 했던 것이다. 미리 가보아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다른 대안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삿짐을 싣고 와보니 산이 아무 가까이에 있는 마음에 쏙 드는 건물이었다. 산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그 장소에서 한번은 머물러본 적이 있는 기분까지 느꼈다. 공기며 햇빛이며가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과 비슷했다. 건물이 도로변에 바짝 붙어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새 건물인 것도 싫지 않았다. 건물의 왼편으론 긴 터널이었고, 오른편으론 시내로 통하는 외길이 나 있었으며, 맞은편엔 이북5도청과 산으로 오르는 길이 길게 뻗어 있었고, 건물의 지하엔 터다란 목욕 창이 딸려 있었다. 내 처소가 된 608호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멀리 산을 행해서 큰 창이 나 있어 깜빡 감격하기까지 했다. 비록 먼 산이긴 했지만 이 도시에서 창 하나 가득 산이 내다보이는 처소를 갖게 되기가 어디 쉬운가. 그러나 그 감격은 하루만에 사라졌다. 그 건물에서의 첫날밤부터 그곳을 떠나올 때까지 나는 잠을,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토록 감격했던 창으로는 도로의 가로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와 실내등을 다 꺼도 대낮처럼 환했으며 건물 왼편의 터널을 빠져 나온 자동차들은 밤새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그 소음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차라리 한낮엔 소음이 덜 느껴졌다. 밤이 되면 사방이 조용해서인지 유독 차소리만 들렸다. 이 중직으로 된 두꺼운 커튼을 만들어 와 치는 것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차단했으나, 자동차 소음을 내 침으로 막을 도리는 없었다. 하룻밤에 네댓 번은 잠이 깨어야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룻밤에 네댓 번은 잠이 깨어야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소음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한밤에 터널을 빠져 나온 자동차들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소리는 그 건물을 떠나온 지가 3년이 되어 가는 지금도 내 귓전에 선명할 지경이다. 건너는 사람이 없어도 신호등은 밤새 딩동 소리를 내며 바뀌었고, 큰 트럭이 도로변을 내달릴 땐 건물 전체가 기우뚱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곳에서 살 적에 나는 종종 자동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하는 소리에 놀라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삼중사중 충돌로 인해 도로로 유리파편이 튀는 소리에도, 침대에서 떨어져 잠시 망연히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커튼을 젖히고 도로를 내다보면 밤 고양이의 시체가 내려다보이기도 했고, 사고를 낸 차량에서 내린 운전자들이 서로 멱살을 쥐고 싸우고 있기도 했다. 그 건물은 도시의 도로에서 한밤중에 벌어지는 그런 소동들을 고즈넉이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 건물에서 일 년 남짓을 살았고, 지금부터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그 건물에 사는 동안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어떤 밤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니, 그 밤, 그 건물에서 만난 소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니, 어쩌면 그라는 어떤 헛것을 잊어 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따금 다른 사람들은 삶 속에서 돌연히 발생하는 부재나 돌연한 사별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는지가 궁금하다. 여동생이 결혼을 해서 내 곁을 떠나간 것과 동시에 이따금 만나서 함께 밥을 먹고 강변으로 가서 강물을 쳐다보곤 했던 수화기 저편의 그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가까웠던 사람이 멀어져가는 걸 감당하는 일이 내겐 매번 힘겹다. 때로는 이제 내겐 가까웠던 사람과 작별할 힘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느낌도 든다. 그런데도 이렇게 또 살아지는 걸 보면 삶이 무섭기조차 하다. 한 사람이 멀어져갈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을 찾아 헤매는 대신 무엇인가를 반복적으로 했다. 똑같은 행동의 반복은 아니었다. 그때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행동의 반복이었다. 어떤 이별 앞에선 밤마다 외출을 해서 시내에서 집까지 걸어서 돌아왔고, 어떤 이별 앞에선 오후마다 수영장에서 헤엄을 쳤으며, 또 어떤 이별 앞에선 틈만 나면 기차를 타고 낯선 역에 도착했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러는 사이 고독은 단련되었다. 무슨 행동인가를 그렇게 반복적으로 계속하고 있으면 그 사람이 내게서 멀어졌다고 해서 이 세상에 없는 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곤 했다. 어디서든 살아 있으면 된다고. 그러나 매번 거기까지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의 힘겨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만약 내게 가까운 사람들의 돌연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었다면 내가 자연스레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기란 더 힘겨웠을 것이다. 나는 나하고 가깝게 지낸 사람들이 내게서 멀어지는 것보다 그들이 죽는 게 두렵다. 멀어져서 못 만나는 것하고 죽어서 못 만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 에서 그도 나처럼 걸어다니고 감기에 걸리고 옷을 갈아입고 목욕탕엘 간다고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가 달라진 건 없어, 내가 내게 속삭였다. 이젠 나와 함께가 아니고 다른 사람과 함께인 것 뿐이야, 라고.
그가 부재하면 그가 남긴 사물들이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가 더 이상 내 집 앞에서 자동차를 세우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내 생일날 선물로 준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가 내 곁에 있을 땐 한번도 걸지 않았던 목걸이였다. 그때는 그가 있었으므로 대체물이 없어도 그를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쌕쌕 숨소리를 내는 목걸이를 목에 걸고 책상 앞에 앉아 더 이상 할말이 없어질 때까지 그에게 편지를 썼다. 어느 날은 두통도 쓰고 어느 날은 세 통도 썼다. 편지는 물론 부티지 않았다. 물론이라고 써놓고 보니 이상하다. 쓴 편지를 안 부치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한테 있어서는 처음부터 부치려고 썼던 편지는 아니었다. 냉랭해진 그의 목소리가 던져주는 슬픔을 견딜 방법이 달리 없어서 썼던 것 일뿐. 편지가 다 써지면 접어서 큼직한 노란 봉투에 담아놓았다.
소녀를 만난 건 그 건물에 입주한 지 석 달쯤 지난밤이었다. 예전에 함께 일하던 방송국 피디가 우편으로 보내온 초대권으로 첼리스트 요요마의 내한 공연에 다녀오는 귀가 길이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내가 탄 택시가 그 건물의 정문을 향해 턴을 하는 순간 내 몸이 약간 옆으로 기울어졌는데 내 눈 속으로 닭을 안고 있는 그 소녀가 비치었다. 그 건물의 자동으로 열리는 유리문 바로 앞이었다. 자정 근처가 아니었다면, 소녀가 안고 있는 게 닭이 아니고 꽃이었다면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다 크지도 않은 애가 이 밤에 웬 닭을?
얼른 몸을 바로 세우고 다시 보려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옆으로 기울어진 몸을 바로 세우는데 걸린 시간은 이 초이거나 삼 초일텐데 닭을 안고 있던 소녀는 별똥별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응? 나는 고갤 흔들고 눈을 반짝 다시 떴다. 소녀는 없고 유리문만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택시기사가 안 내리느냐고 다그치지 않았으면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잘못 보았나? 택시 비를 치르고 거스름돈을 받고 나서도 뭔가 좀 이상했다. 잘못 봤으면 잘못 본 대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 자리엔 아무 것도 없었다. 소녀가 서 있었다고 생각된 자리에 서자 건물 안으로 통하는 문이 스르르 열렸다. 나는 자꾸 뒤를 돌아가 보며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경비원이나를 향해 목례를 하며 무얼 찾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아니라고 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닭을 안고 서 있던 소녀의 모습이 너무 생생히 떠올랐다. 잘못 보았다고 하기엔 너무 선명한 모습이었다. 나는 내 앞에서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를 그냥 보내고 경비실로 가서 센 서식 유리문 바깥을 가리키며 방금 닭을 안고 있는 소녀가 저 앞에 서 있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경비원은 소녀보다도 닭을 안고, 라는 내 말이 이상했는지 그 글쎄요, 하더니 저는 못 봤는데요, 라며 웃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까지 오르는 동안 내 가슴 어딘가가 싸아하니 아파 왔다. 두 평도 안 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떤 마당이 떠올랐던 것이다. 언젠가 여섯 시 무렵에 조계사 앞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도 그랬었다. 스님이 치는 범종 소리에 그 마당이 떠올랐다. 우물도 있고 장미꽃도 있고 오리며 거위 따위가 있는 그런 마당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벽에 피로한 내 몸을 기대며 나를 잠식하고 있는 마당을 물리치려고 애를 썼으나 마당은 나를 모래로 생각하는지 파도처럼 나를 밀고 쳐들어오며 쉬익쉬익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만 엘리베이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백 평도 넘을 숨쉬는 마당을 두 평의 좁은 엘리베이터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마당은, 장미 밭을 휘젓고 있는 사나운 거위의 야생적인 긴 목을 주저앉은 내 무릎에 머리에 대어주며 속삭였다. 나를......
잊지 말아, 정신이 아득해지려는데 엘리베이터 종이 땡, 하고 울렸다. 나는 나를 점령해오는 마당의 거친 숨소리를 손을 휘저어 물리치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휘청 이며 걸어나왔다.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 나왔다. 나는 무엇에 매달리듯 가방 끈을 꽉 잡았다. 나는, 나를 잊지 말아. 낮 익은 숨결로 나를 붙잡은 마당을 밀어내며 나는 도시의 건물 속에 쪽, 차인 나의 처소를 향해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608호의 열쇠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을 때까지도 이마의 식은땀은 걷히지 않았다. 불시에 여기의 내 삶 속으로 습격하듯 찾아와서 내 마음을 휘저어놓고 가곤 하는 마당은, 내 마음의 저기에서 타박타박 걸어온 숨겨진 방죽인지도 몰랐다. 혼자 태어났다가 혼자 죽는다든가, 내가 받을 응보를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때에, 그 마당은 내 일상에서 떠오르지가 않았다. 보이는 얼굴과 들리는 말을 탐하고 있을 적엔.
문을 따고 들어와 타월로 머리를 싸매고서 시간을 들여 샤워를 했다. 고정적인 일자리를 찾아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같고, 기교에 넘치던 첼로 앞의 요요마 생각을 했던 것도 같고, 서른이란 내 나이를 생각했던 것도 같다. 서른, 나는 청춘도 없이 이십대를 지나왔다. 하나의 사건도 없이, 문장이 될만한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나의 이십대는 침묵과 도보뿐이었다. 나는 말없이 그냥 여기저기를 걸어다녔다. 혹, 아직도 명동성당의 벤치나 남쪽 절 집으로 들어가는 전나무 그림자가 어룽대는 긴 산문에 나의 등 자국이나 발자국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대체 무엇하고 그렇게 지독한 이별을 했기에 그렇게 일찍 삶에 대해 겁을 내게 되었는지. 지금이나 에나 다름없이 내 마음속에 일렁이는 이 반딧불 같은 것은 누구하고도 헤어지기 싫다는 것이다. 헤어지기 싫어 만나지 조차 못했다면? 그랬다면? 병신 같은 이십대였다고 생각될 때면 눈이 부릅떠진다. 어느 거리에나 고갤 숙이고 다리를 절며 걷고 있는 내가 보인다. 그 속을 걸어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걷다가 몇몇을 잃고 몇몇을 얻고 그리고 지금은 다시 그를 잃어 가고 있는 중인가. 내게서 멀어져 가는 그를 생각하는 사이 내 마음에 떠올랐던 마당은 다시 방죽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날 밤, 나는 초인종 소리에 잠이 깨었다. 찻 소리나 전화벨 소리가 아니고 초인종 소리에 잠이 깨긴 처음이었다. 잠을 깨긴 했으나 잘못 들었나 해서 어둠 속에서 귀를 기울였다. 삐리리리 - 분명 초인종 소리였다. 누구지? 무심히 몸을 일으키려다가 새벽 한시도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는 생각이 났다. 마당이 다시 깊은 공동 속으로 가라앉은 뒤에도 먼 곳을 향해 소롯하게 뻗어 있는 길처럼 유리문 앞에서 만난 닭을 안은 소녀가 눈앞에서 어룽대서였다. 정말 헛것이었을까. 그러기엔 너무나 생생했던 소녀의 모습이 자꾸만 아로새겨져서 나는 그 모습과 헤어져보려고 캔 맥주를 따서 마시기까지 했다. 커튼을 치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금방 잠이 들질 않아 아는 침대 위에서 자꾸만 몸을 뒤집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헛것들일지도 모르지. 이 손으로 껴안고 만지고 체취를 아로새겼으나 곧 새벽빛처럼 사라졌던 당신. 그러나 깊은 밤중이거나 혹은 투명한 한낮의 적요 속에서 나는 당신이 나의 무의식 속으로 틈입 자처럼 걸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곤 했지. 나는 당신을 거부할 수가 없었어., 아니 어쩌면 당신으로 이루어진 게 나일지도 몰라. 그래서 두려웠던 거지. 곧 내가 되고 말 헛것이었기에. 그 헛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나는 늘 익사했을 거야. 두려워했기 때문에 나는 이따금 한번씩만 익사할 수 있었어.
문 가까이에 가지도 못하고 침대에 일어나 앉은 채로 누구세요? 하고 크게 물었다. 응답이 없었다. 나는 이불을 잡아당겨 목가지 덮으며 누구세요? 다시 물었다. 내 목소리만 공명 음으로 떠돌 뿐 아무 응답이 없었다. 한밤중에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만 우릉우릉 들려왔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다 덮었다. 현관문에서 침대가 바로 보이는 게 싫어 책장으로 칸막이를 쳐놓은 저편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아서. 여동생이 있었으면 그 앤 실내등을 켜고 슬리퍼를 끌고 탁탁탁 걸어나가 문을 열어보고 돌아왔을 것이었다. 그렇게 이십 분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나는 갑자기 이 선물 안에서 나 혼자 자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에 휘말렸다. 이 9층 짜리 건물 안에 나 혼자 자고 있으려니 생각하니 턱이 꽉 다물어졌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었다. 엄밀한 의미로 보면 그 건물은 사무실용이었다. 609호도 610호도 실제로 개인 사무실들이어서 그들은 아홉 시에 출근하고 여섯 시면 퇴근을 했다. 이 덩치 튼 건물에서 나 혼자 잘 수는 없다. 나는 일어나서 잠옷 위에 셔츠를 급하게 껴입었다. 이미 해버린 생각이었다. 나 혼자 자고 있는 것이 아님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생각은 끝날 것이었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나는 문 밖을 향해 누구세요? 라고 물었다. 응답이 없었다. 신발을 신고 문을 따고 빠끔히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주위는 지독히 적막했다. 614호까지 이어지는 긴 복도만이 어둠 속에서 괴괴했다. 나는 용기를 내서 현관을 탁 소리나게 닫고 슬리퍼를 착착 끌며 복도의 불을 켜는 스위치를 눌렀다. 어두웠던 복도가 순간적으로 환해질 때 나는 반사적으로 뭔가를 외면하기 위해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랬어도 빛이 들어오기 전 복도에 일렁이던 괴괴한 어둠 속으로 닭을 안은 소녀가 다급하게 첨벙 뛰어드는 보습을 본 것도 같다. 이 헛것들을 헤치고 나가야만 한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왔다. 경비실 아저씨는 탁자에 얼굴을 묻고 졸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건물 바깥으로 나와 신호등을 무시하고서 성큼 뛰어 길을 건넜다. 헤치고 나가지 않으면 나는 또 익사할 거야. 건물의 맞은편에 서서 크림색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안도의 깊은숨을 내쉬었다. 뛰엄뛰엄 이긴 했지만 건물의 여기저기 창문에서 은은한 불빛들이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이게 무슨 꼴이람. 자다 말고.
불빛들은 확인한 뒤에 맥이 쭉 빠져서 가로수 그늘 밑에 선 채로 내가 살고 있는 6층을 올려다봤다. 마치 타자의 공간을 바라보듯 방금 전까지 내 육신이 흘러나오는 창문이 내 창문뿐이었다. 내 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외부에서 올려다보는 마음은 기묘했다. 누군가 내 창안에 있다는 생각. 그 사람이 내 창안에서 이 거리의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 나는 내 창이 뿜어내는 불빛을 피해 터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련하고 비천한 인간. 나는 내가 지독하게 경멸스러워져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은 채로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손을 뻗어 정신없이 내 뺨을 후려쳤다. 나를 비껴 가는 그에 내해서 기껏 내가 뭘 잘못했어요? 라고 밖에 물을 줄 모르는 나약한 인간. 생이 송두리째 비껴간다고 해도 저 또한 한쪽으로 비껴 서서 신발로 땅바닥이나 콕콕 찧고 있겠지. 음악회에 가기 전에 끓여먹었던 수제비가 뒤늦게 반란을 일으킨 듯 목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내 손바닥에게 얻어맞아 얼얼해진 내 뺨을 나무둥치에 내고 서서 입을 꽉 다물었다. 너는 편안하게 토할 자격도 없어. 나는 더 세게 입을 다물었다. 꾸역꾸역 목을 거슬러 올라오는 토사 물을 꿀꺽 삼켰다. 속은 점점 더 거룩해지고 입안에서 역한 냄새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제 생의 정면을 늘 피하기만 하는 자들이 내뿜는 더러운 냄새. 입을 꽉 다물수록 토사 물도 꾸역꾸역 내부를 밀고 기어 나왔다. 이빨 사이사이로 속으로 올라온 토사 물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털썩 주저앉아서 가로수 나무 밑에 퉁퉁 불은 수제비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내 눈물 같지도 않은 굵은 누물방울이 부풀어오른 밀가루 반죽 위로 뚝뚝 떨어졌다. 내가 그러고 있건 말건 터널 위에 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 가지를 있는 대로 내려뜨리고 있었고, 내가 붙잡고 엎으려 있는 은행나무 속으로도 봄물이 흐르는지 싸한 냄새가 흘러나와 밥공기 속으로 퍼져나갔다. 시내 쪽에서 달려온 트럭 한 대도 터널 속으로 질주해 들어갔다. 속엣 것을 다 토해내고 길을 건너려고 은행나무에 기댄 몸을 추스르던 나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버렸다. 맞은편 건물 유리문 앞에 닭을 안고 서 있는 소녀가 또렷이 보였던 것이다. 소녀는 푸른빛을 받고 있어서 마치 연극무대 위의 마임배우 같았다. 나는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길을 건넜다. 소녀는 닭을 끌어안고서 여전히 마임 배우처럼 푸른빛에 싸여 서 있었다. 계절은 봄인데 소녀는 밤색과 흰빛이 섞인 체크무늬의 남자아이용 겨울잠바를 입고 있었다. 소녀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다. 나는 내 몸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고 작아진 내 몸이 그 잠바 안으로 쑥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내게도 저런 잠바가 있었다. 처음부터 내 잠바는 아니었다. 중학교 장학생 시험을 보러 가는 셋째오빠에게 어머니가 마음먹고 사 입혔던 잠바였다. 셋째 오빠는 그 잠바가 너무 따뜻해서 시험지를 들여다보다가 그만 잠들어버렸다며 화가 나서 다시는 그 잠바를 입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게 그 잠바를 물러주었다. 그러나 나는 남자아이가 입는 무뚝뚝하게 생긴 옷은 입기 싫었다. 수도 놓아지고 아기자기 하게 주머니가 달린 그런 옷을 입고 싶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는 잠바를 입고 나왔다. 대문만 나서면 벗어 들고 다니거나 어디다 숨겨놓았다가 집으로 들어갈 때만 입었지만, 바람이 불고 지독하게 추운 날 저 잠바를 입고 철로 변에 나갔던 적이 있었다. 얼마나 추웠던지 밉고 곱고 간에 자바를 벗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외려 잠바를 꼭꼭 여며 입은 채로 레일을 베고 누워 겨울 하늘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겨울 하늘 끝에 얼굴 하나가 아련히 실리었다. 언제가 걱정에 싸이면 맨 늦게 떠오르곤 하는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면 어린애가 벌써 표정에 애(哀)를 실었다고 역정을 내곤 했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서 꼭 우는 건 어머니였다. 나는 그 철길에서 저 잠바를 잃어버렸다. 찾을 생각도 없었던 잠바였으므로 잠바를 읽어버렸다는 것조차 잊었는데 소녀가 입고 있는걸 보니 다사롭고 정다운 느낌이 번갈아 들었다. 한 번 만져보고 싶을 것을 참느라고 애를 썼지만 벌써 내 손이 쑥 나가서 소녀의 어깨쯤을 쓰다듬고 있었다. 참으로 친숙한 감촉이었다. 소녀는 상고머리에 통통한 볼을 하고는 잠바 속으로 엿보이는 빨간 스웨터를 닭의 얼굴을 바싹 갖다 대주고 있었다. 한밤중에 도시의 최신식 건물 앞에서 닭을 안고 있는 게 닭이 아니고 꽃이었으면 괴이하지 않았을까. 한밤중에 도시의 최신식 건물 앞에서 닭을 안고 있는 소녀의 존재는 갑자기 그 건물에게서 도시의 일상성을 제거해버렸다. 일상성이 제거되 건물은 갑자기 비현실적이 되었고, 매일 드나드는 건물의 유리문이 갑자기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같아졌다. 나는 소녀가 입고 있는 잠바에서 흘러나오는 친밀감을 밀어내며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를 썼다. 만져서는 안 될 것을 만져버렸다는 생각.
언젠가도 그랬지. 보아서는 안 될 인간의 얼굴을 봐버린 적이 있었지. 구더기가 들끓고 있던 다정했던 얼굴. 썩어문드러진 노동에 절은 손. 생을 향해 남긴 유서 위로 스멀스멀 기어가던 구더기. 그 여름의 긴 장마. 그 얼굴을 사랑했던 죄로 나는 오랫동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회오리바람처럼 쳐들어오는 생의 정면들에 내가 얼마나 깜짝깜짝 놀랐는지. 나쁜 생. 청춘에 들어서기도 전에 미리 겁을 주다니.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수많은 아침들이 지나간 뒤로 나는 자신감을 잃었다. 분명한 대답들과 분명한 명분들이 무서워졌다. 숨어살아야겠다고 생각했지. 어디에도 얼굴을 내밀지 말아야겠다고. 다행히 나는 아름답지가 않아서 숨어 살 수가 있었다.
나는 점점 더 맥이 빠졌다. 손과 입에서는 토사 물 냄새가 역하게 나고 있었다. 나는 소녀에게 돌아가라. 고 말해 주고 싶었다. 이 건물에게 도시의 일상성을 돌려주고 돌아가라고. 그러나 나는 입을 달 싹도 못하고 일시에 건물에게서 일상성을 제거해버린 소녀를 지나쳐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경비원은 의자에 앉은 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놓고 잠에 빠진 경비원을 쳐다보자 어디선가 그는 내가 잠재웠어요. 라고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목소리의 야릇한 여운에 사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주변에 소녀뿐이었으나 그건 소녀가 낼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스물은 되었을 여자의 목소리였기에 나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사람으로 크림색 회벽만 보일 뿐이었다. 이상한 밤이야. 나는 내 앞에 멈춘 채 스르륵 문을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소녀 쪽을 바라보았다. 소녀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탁 닫혔다.
방으로 올라와서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겁을 잔뜩 먹고 있다고 썼다. 하찮은 일에도 놀라고 있다고. 음악회에 갔었다고도 썼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가 매일 아침 출근하는 길을 지나치게 되었다고. 그 길목에서 황폐하게 끊어진 다리를 보았다고. 철근이 드러나고 시멘트 덩어리가 뭉텅이로 흩어져 있었다고.
그 황폐한 풍경을 매일 보고 지나다녔을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어쩌면 그는 내게 짜증을 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저 무너진 다리를 매일 보고 지나다녀야 하는 것이 짜증을 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나는 편지에는 가슴이 저려왔다. 고 쓰진 않았다. 내게 새 힘이 생길 때까지 거리에서 당신을 보게 돼도 아는 척을 안 할거예요. 라고 써서 봉투에 던져놓고 뒤척뒤척 거리며 잠을 이루려고 애를 썼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가수면 상태에서 삐리리-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같이 자연스럽게 침대에서 스르륵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랫동안 꺼져 있던 내 심연의 불 하나가 탁 켜지는 소리도 들었다. 잠시 내게로 와서 쉬어 가고픈 여자 애를 너무 오래 문밖에 세워두었구나. 다시 초인종 소리가 길게 이어졌을 때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두시 이십분이었다. 실내등을 켜고 슬리퍼를 끌고 걸어나가 문을 땄다. 역시 닭을 안은 소녀가 서 있었다. 밤바람 속에 너무 오래 서 있었던 듯 소녀의 입술을 새파랬다. 나는 소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코코아를 컵 가득 타 가지고 왔을 때 소녀는 닭을 안은 채로 내 침대에 걸터앉아 발을 흔들고 있었다. 야위고 작은 발이었다.
"이걸 좀 마시렴. 몸이 따뜻해질 꺼야!"
소녀는 닭을 앉은 채로 커다란 컵의 코코아를 다 마셨다. 아주 맛있다. 나는 표정이었다. 나는 소녀에게 잠바를 벗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잠을 자려면 답답할 거리고. 소녀는 별 대답 없이 다 마신 코코아 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닭은 내려놓지 그러니?"
내가 다시 말하자. 소녀는 잊고 있었다는 듯 순순히 제 품 속에서 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닭은 바닥에 내려지자마자 다시 소녀의 품속으로 기어들었다. 소녀가 다시 내려놓으면 닭은 다시 소녀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겁을 먹어 그래요."
응응. 마치 터널 속에서 내지르는 소리 같은 목소리. 나는 흠칫 놀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새어나오는 소리였다.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가 잠재웠어요. 하던 이십대 여인의 그 목소리.
" 너 복화술을 하는구나."
" 복화술이 뭐예요?"
여전히 소녀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 지금 너처럼 입을 움직이지 않고도 말을 하는 거."
" 우리들은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어요."
우리. 라는 말에 나는 소녀가 안고 있는 닭을 쳐다보았다. 아무렴 어떠니. 나는 소녀가 서먹해져서 아예 말을 안 할까봐 싱긋 웃기까지 했다.
" 길을 잃었어요."
" 어딜 가는 길이었는데?"
" 나를 잊은 사람을 찾아가는 길이에요."
소녀는 갑자기 눈을 감으려다 말고 무슨 생각이 났는지 몸을 일으켰다. 소녀는 가만히 닭을 무릎에 내려놓고 잠자 주머니 속에서 종이를 꺼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 이 사람 알아요?"
소녀는 여전히 입을 벌리지 않고 말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닭이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소녀가 내민 종이에는 뜻밖에도 내게 냉랭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이 사람을 왜?"
" 그 사람은 나를 잊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
것 같아요."
"......"
" 나는 이란성 쌍둥이였어요 나와 같은 날에 태어난 남자아인 스물넷이 되었죠. 지금 군에 가 있어요. 엄마는 해마다 봄이면 병아리를 쉰 마리쯤 마당에 풀어놓고 길렀어요. 병아리만은 아니었죠. 오리며 거위도 있었어요. 돼지새끼도 있었고 토끼도 있었죠. 봄날. 마당의 병아리를 돌보는 일은 언니 몫이었어요. 언닌 마루 밑의 강아지나 오리들. 송아지나 염소들을 참 좋아했죠. 나는 그런 것들보다는 감자나 오이. 호박 같은 게 좋았는데. 그 집 우물 옆 꽃밭엔 덩굴장미가 자리고 있었어요. 둘째 오빠가 군대 가면서 심어놓고 간 장미였어요. 그 집에서 언니와 내가 둘 다 좋아하는 게 있었다면 그 장미나무였어요. 미색 꽃이 만발하면 언닌 장미꽃을 꺾어서 책가방 뒤에 달고 학교에 가곤 했죠. 그 해 봄날 장미나무에 거름을 주려고 장미나무 밑동을 팠죠. 그런데 땅속에서 손가락 굵기 만한 지렁이가 호미 끝에 잘렸어요. 자린 채로 꿈툴꿈툴거렸죠. 나는 놀라서 호미를 내팽개치고 방으로 뛰어들어갔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나는 겨우 일곱 살이었으니까요. 가슴을 졸이다가 나와보니 언니의 병아리 한 마리가 내가 놀라서 내던진 호미에 맞아 죽어 있었어요!
. 언니가 죽은 병아릴 내려다보며 막 야단을 쳤어요. 삐질삐질 울며 집을 나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어요."
"............"
" 봄볕이 좋아서 기찻길에서 레일을 베고 잠이 들어버렸거든요. 내 머리 위로 기차가 지나가 버렸어요."
"........."
" 나는 죽은 뒤에 줄곧 언니를 따라다녔어요. 언니는 헛간이나 다리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곤 했죠. 내가 아무리 언니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라고 해도 언니는 나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어느 겨울날 언니가 철로로 나가더니 레일을 베고 드러눕는 걸 봤어요. 장난으로 그러는 거였는지 어쨌는지 나는 몰라요. 어쩌면 내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저만 큼에서 기차가 사납게 기적을 울리며 다가왔어요 잠든 것 같진 않은데 언니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거예요. 내 머리가 박살났을 때의 고통을 언니에게까지 느끼게 할 수는 없었어요. 나는 언니를 철로에서 질질 끌어 밑으로 내려놓고선 언니의 잠바를 벗겨서 내가 입고 그 마을을 떠났어요. 내가 곁에 있는 한 언니가 나를 잊을 것 같지가 않았거든요. 떠돌다가 떠돌다가 여러 해 전에 내 호미에 맞아 죽은 닭을 만났어요. 그땐 병아리였는데 닭이 되어 있더군요. 우린 우연히 죽은목숨이라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요. 냄새도 느끼지요. 우리도 이제 다른 공기 속에서 가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시간이 되었어요. 언니를 한 번만 만나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길을 나섰는데 너무 오래!
헤어져 있어서 쉽게 찾을 수가 없어요. 언니가 있는 곳을 간신히 알아내면 그런 사람은 방금 전에 떠났다고 했어요. 떠났다고 해도 곧 다시 따라 갈 수 있었는데 이번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 바람 속에 흩어져 있는 냄새를 따라 다니다가 여기까지 왔어요."
나는 소녀의 입술에 묻어 있는 코코아 자국을 닦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행할 수가 없을 정도로 졸음이 엄습해왔다. 소녀는 잠바를 벗어 침대 머리맡에 올려놓고는 닭을 그 위에 내려놓았다. 잠바에 포옥 싸인 닭이 목을 갸웃거렸다. 나는 졸음에 겨워하며 소녀를 깊게 껴안아 침대에 눕혔다. 편안히 자고 가렴. 나는 손을 뻗어 소녀의 작고 야윈 발가락을 만져주었다. 닭이 잠바 속에서 목을 길게 빼내어 따뜻한 목덜미를 내 이마에 얹었다. 나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듯한 깊은 잠 속으로 빨려들면서 소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차디차고 습한 냄새. 어디서 있었니? 이렇게 차가운 몸을 하고. 소녀의 등뼈가 내 손바닥에 쓸릴 때 나는 침대 시트가 흥건하도록 울고 있었다. 이렇게 야위고 작은 몸으로 어디를 그렇게 헤매고 다녔니.
어렴풋이 이젠 갈 시간이에요. 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소녀가 다시 잠바를 입고 닭을 껴안는 모습이 눈에 비치는 것도 같았다. 오늘밤은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거예요. 라는 목소릴 들었던 것도 같다. 소녀가 몸을 깊숙이 숙여 내 얼굴에 제 뺨을 대었을 때 소녀의 눈에서 후드득. 빗방울 같은 눈물이 떨어졌던 것도 같다. 내 귀에 문 따는 소리가 딸칵. 하고 들렸을 때 나는 그만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했다. 떠나려는 이 아이를 붙잡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잠과 사투를 벌였지만 눈이 떠지지가 않았다. 사방이 이끼 낀 우물 안처럼 조용했다. 그토록 나의 수면을 방해하던 도로변의 온갖 소음이 뚝 끊겨 있었다. 일어나야 해. 나는 나를 점령하고. 있는 잠을 밀어내고 밀어냈다.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창가로 가서 커튼을 제치고서 도로변을 내려다보았다. 아, 나는 유리창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저절로 이마가 창에 가 닿았다. 밤낮 없이 자동차들이 질주하던 도로는 온데간데없고 수십 마리의 병아리가 큰 닭과 함께 섞여 두엄자리를 쪼고 있는 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오리가 꽉꽉 거리며 장미 밭 속으로 뒹뚱뒤뚱 걸어가다가 퐁당. 알을 낳아 마당에 떨어뜨리고 있었고. 거위가 강아지의 뒷다리를 긴 부리로 쪼며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무엇에 놀랐는지 닭이 푸더덕거리며 마당 한가운데로 몰려왔다. 가는 다시 서로 뒤섞여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우물 옆 꽃밭에 미색 장미가 만발했고 그 위로 봄볕이 따사롭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대문은 먼길을 항해 활짝 열려 있었으며 닭을 안은 소녀가 타박타박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밤 이후.
나는 냉장고 안의 식료품들이 거의 바닥이 날 때까지 침대 근처만을 맴돌았다. 같은 날들의 같은 되풀이가 열흘도 넘게 이어졌다.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어 등이 배기면 방바닥에 내려와 발을 꼬고 창을 향해 앉아 있다가 허리가 아파지면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멀거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KBS 제1에프엠에 맞춰놓은 아디로는 새벽 세시가 되면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 조용해졌다가 다섯시가 되면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베토벤의 '전원'이 귀에 잡힐 때도 있었고, 쇼팽의 야상곡이 흘러들기도 했다. 메모라도 해놓지 않으면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내일인지 구분이 안 가는 그런 단조로운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두 손바닥을 펼쳐 얼굴을 받쳐주었다. 내 몸 속에 숨어살고 있던 마당들이 일제히 수수수거리며 숨을 쉬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많은 마당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올랐다. 배꽃이 질 때의 봄 마당, 폭염이 쏟아지던 여름 마당, 감나무 잎새가 어지러이 휘날리던 가을 마당, 싸락눈이 사각사각 쌓여 가던 겨울 마당들이 또렷이 되살아났다. 침대에 누워 비바람과 눈보라가 치던 마당들을 기억하다가 등이 배기면 바닥으로 내려와 따사로운 봄볕이 쏟아지던 마당의 숨소릴 들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으면 마당의 흙들은 깜짝 놀라 돌돌돌 말려지며 흙 냄새를 풍겼어. 담장 저편으로부터 밀려온 마당의 싸아한 체취가 내 동생들의 어린 손가락이며 발가락들을 감싸주었지. 창밖엔 연일 비 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양말을 신은 채 잠을 잤고 세수를 하지 않은 채 며칠인가가 더 흘렀다. 마지막 남은 식료품들로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쟁반에 받쳐들고 침대에 올라가 먹을 때였다. 나는 비로소 그 또한 살아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나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살아 있으면 된다고.
나는 내 목의 목걸이를 풀어 편지들이 들어있는 봉투에 집어넣고 풀칠을 해서 봉투 입구를 막았다. 신발을 신고 나가 가게에서 분재용 삽을 하나 샀을 때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비를 맞으며 산의 능선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데까지 걸어갔다. 봄기운이 스민 폭삭폭삭한 땅을 파고 노란 봉투를 꽃나무 뿌리를 심듯이 묻었다. 묻혀라. 묻히고 묻혀서 다른 것이 되어라. 산을 내려올 때 빗속의 산비둘기들이 꾸루룩거려서 잠시 마음이 고즈넉해졌으나 뒤돌아보진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눈에 비질비질 물기가 어리긴 했다. 나는 분재용 삽을 공중으로 휙 던졌다가 두 손으로 받아내면서 소릴 쳤다. 살이 있으면 된다. 나와 함께가 아니더라도. 그때 내가 그를 잊기 위해 편지를 쓰고 또 썼던 그 건물은 이 도시 안에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 거리 안에, 이따금 그 건물 앞을 지날 때면 나는 자연걸음이 멈춰진다. 고독한 크림색 건물이 쌕쌕 숨을 쉬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 밤, 닭을 안고 서 있던 그 소녀는 저 건물의 정령이었으리, 나를 잊지 말아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리. 한밤 중 긴 복도에 쏟아지는 불빛은 여전히 괴괴할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땡, 신호음을 울리며 출발하고 멈출 것이다. 그러다가 이따금 누군가에게 아주 낯선 체취를 실어 나를 것이다. 나는 돌아서 오다가 꼭 다시 한번 몸을 돌려 그 건물을 담담히 올려다보곤 한다. 이제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문을 따고 걸레질을 하고 바깥을 내다볼 608호의 유리창을, 한때는 저 창이 나의 창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