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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묵상글 (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 무엇을 청할까?.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7:0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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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0.09 06:56
- 무엇을 청할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시고,
그렇게 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시는데 이번에는
‘무엇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청하고,
무엇을 찾고,
어떤 문을 두드려야 할 것인가?
예를 들어 아무 문이나 두드리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이런 식의 말을 하지 않습니까?
자신감과 확신을 갖고 무엇이든 하면 우리의 자신감과 확신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게 해줄 것이라고 말하는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요.
저도 종종 그렇게 얘기합니다.
‘안 돼’라고 하는 순간 이미 안 되게 되어있다고 말입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또 자신감과 확신으로 해야 최선을 다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청하라시는 것이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셔서 원하는 대로 되리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청할지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아무거나 다 들어주시지 않을 것 아닙니까?
좋으신 하느님이 좋은 것을 다 주실 것이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과연 무엇이 좋은 것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좋다고 하시는 것이 다를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마약 중독자에게는 마약이 좋은 것이니 그것을 주실 리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런데 내가 돈을 달라고, 건강을 달라고 하는데
하느님께서 성령을 주시면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는 성령을 고맙게 받을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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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간절하고 진실하고 항구한 기도
“기도와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40;5ㄱㄴ,시편1;2)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저절로 하느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인간은 인간의 정의입니다. 기도하라 직립인간에 어디서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기도없이 사람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날아
흰구름되네”
기도할 때 푸른 하늘에 흰구름처럼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기도가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 기도입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이 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둘중 하나입니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제가 평생 기도하는 수도자로 살지만 늘 한없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사랑에서처럼 기도에서도 늘 초보자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은 나중에 천국입장시 당신을 닮았는지 닮지 않았는지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기도할 때 날로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얼굴이 됩니다. 기도와 삶처럼 기도와 말도 함께 갑니다. 기도에서 참말이 나옵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기도의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한 번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 번 입에서 나온 말은 돌이킬 수 없다.”<다산>
“흰 옥구슬의 흠은 갈아 없앨수 있지만, 말의 흠은 없앨수 없다.”<시경>
침묵의 기도에서 참말이, 생명의 말이 나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 역시 훈련이요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기도의 복음이라 할 수 있는 루카복음은 어제 주님의 기도에 이어 오늘은 ‘기도의 자세’에 대해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바로 예수님은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참으로 겸손히 간절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청하라는 것이요 하느님은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 역시 올바른 기도와 믿음,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부단히 “청하고, 찾고, 두드리고...”, 그대로 좌절이나 포기가 없는, 끝없이 도전하는 지칠줄 모르는, 참으로 영적탄력이 좋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자세, 믿음의 자세, 삶의 자세를 말해줍니다. 참으로 좋으시고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기에 이런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성령이야 말로 만병통치약입니다. 성령은 ‘좋은 것’, ‘하느님의 은혜 그 자체’입니다. 정말 청해야 할 바 성령 하나뿐입니다. 성령안에 좋은 것 모두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마음에, 하느님 뜻에 일치하여 살게 하는 성령이요 성령에 따른, 성령충만한 삶이야말로 참으로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효소가 답이다” 하여 웃었는데 “성령의 효소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간절히, 항구히 청해야 할 바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마지막 말라기서 다음 말씀은 더욱 기도에 힘쓸 것을 가르쳐줍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이런 그날에 앞서 겸손히 회개하라 주어진 하루하루 선물의 날들임을 깨달아, 심기일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며 의로움의 태양인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말라기 예언은 그대로 루카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높은 곳에서 새벽이 우리에게 밝아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리라.”(루카1,78-79)
그렇습니다. 정의의 태양,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치유와 온전함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치유의 구원을 주시고,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게 하시며, 정의의 태양,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살게 하십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리라.”(시편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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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이어가시면서,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만큼 다 주시고”(루카 11,8 참조), “성령을 주시는 분”(루카 11,13 참조)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또한, ‘주님의 기도’의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청원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시면서, 동시에 ‘양식’을 주는 일과 그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 지를 보여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벗을 위한 양식’을 구합니다. 자신이 양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는 자신의 결핍과 부족과 무능과 한계를, 자신의 가난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겸손과 사랑으로 끈질기게 청합니다. 그러면,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청하여라’는 것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이요, 희망을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께 두고 겸손하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시고 먼저 우리에게 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찾아라.’는 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고, 믿는 바를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너희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말할 것이다.”(이사 65,24;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18)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충실하시고 신실하시고 항구하게 우리를 찾으시니, 그분을 반겨 맞으며, 우리 또한 그렇게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두드려라”는 것은 사랑의 가슴으로 “두드려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라고 하시며,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결국,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청하고 계시고, 우리를 찾고 계시며,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바로 ‘가난한 벗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청하고 두드리고 계십니다.
<두 번째> 비유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양식’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 곧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 몸을 맡기는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이고, 뒷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이며,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마태 7,11), 곧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령한 양식’인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주님!
희망할 바를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당신을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저희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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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얼마 전 가끔 만나 식사하는 젊은 부부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집 축성도 하고, 차 축성도 했던 부부입니다. 그들은 이제 아이를 키울 집을 찾고 있었습니다. 수영장이 딸린 이층집과 마당이 넓은 단층집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층집은 멋있고 구조가 좋아 보이지만, 단층집은 생활이 편리하고 어르신들에게 적합합니다. 매사에 신중한 부부이니 결국 좋은 선택을 하리라 믿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우리는 B와 D 사이에서 살아가는데,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늘 C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B는 Birth(탄생), D는 Death(죽음), C는 Choice(선택)입니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며, 그 선택이 우리 존재를 규정합니다. 성경도 선택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의 선택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낙원의 모든 것을 맡겨 주시면서 단 한 가지, “선악과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창세 2,17)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었고, 그 결과 낙원에서 쫓겨나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리라”라는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판도라는 열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자를 열었고, 그 속에서 슬픔과 질병, 전쟁과 질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희망’이었습니다. 인간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고통을 맞이하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남겨주신 희망 안에서 다시 살아갈 길을 찾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번영,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어서 “너와 네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하라”라고 권고했습니다. 신앙의 길은 결국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세상의 영광을 따를 것인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우리 삶의 방향과 영원을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실패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용기로, 원망에서 감사로 변하였습니다. 성령의 힘을 받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파견 사명을 담대히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삶에서 매일 작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 선택이 하느님을 향한다면, 비록 지금은 좁은 길처럼 보여도 결국은 생명과 평화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신앙은 선택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이끌려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희망을 주시며 다시 선택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선택을 한다면, 우리 삶은 “시냇가에 심겨 제때 열매를 맺고, 그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처럼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하느님 안에서 복된 선택을 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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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부를 축적하는 시스템(Systems of Wealth)!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0월 8일 수요일- 마흔한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축적의 삶에서 풍요로움의 삶으로
돈과 관련된 문제를 다룰 때 우리의 도덕적 기준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는 사도 바오로가 말한 "세상, 육신, 그리고 악마’"는 개념을 통해, 악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 깊이 뿌리내린 체계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돈의 시스템도 포함됩니다.
역사를 거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악이 거의 전적으로 "나쁜 사람들"의 탓이라고 믿어왔고, 그들을 "좋은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실제로 효과가 있기도 했죠! 그렇지만 교황들과 많은 윤리 신학자가 "공동의 죄", "제도화된 악", "체계적인 폭력", 그리고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 자체가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낯선 개념이며, 특히 그 환상 속에서 이득을 얻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그 시스템의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을 인식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기도 합니다. [1]
저는 개인적인 악행이 비교적 자유롭게 저질러지는 이유가,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공익을 위해서는 어떤 악도 필요하다"는 합의 아래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을 구조적인 악이라고 칭합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진솔하다면, 우리는 이 문제 앞에서 깊은 내적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벌어지는 전쟁은 "선하고 필요한 것"이라 부르면서도, 다른 살인 행위들은 단호히 비난하지 않습니까?! 국가적 혹은 기업의 자부심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개인의 허영심은 나쁘다고 평가됩니다. 자본주의는 보상받지만, 개인의 탐식이나 탐욕은 비난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적어도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또한 교회, 정치 집단, 정부 같은 강력한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이나 은폐는 용인되지만, 개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비난받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제 가장 눈에 띄지 않고, 제도화되어 있으며, 깊이 뿌리내린 악의 폭정조차 인식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단계에 이른 악은 이제 우리에게 평범하게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이상화되고, 낭만적으로 포장되며, 심지어 ‘너무 거대해서 실패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악마’라고 부르는 것인데, 바오로는 이것을 '왕권과 주권, 권세, 그리고 권력'(콜로 1:16) 또는 '하늘에 있는 악령들'(에페 6:12)이라고 부릅니다. 바오로가 사용한 이러한 옛 표현들은 오늘날의 기업, 제도, 그리고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시대 정신 속에 숨어 있고, 비판을 초월한 존재로 여겨지는 모든 것은 결국—대개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아—악마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2]
돈과 악에 관해서 말하자면, 돈의 의미와 사용 방식은 복잡한 약관과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 용어들로 철저히 가려져 있습니다. 연금, 이자—과거에는 "고리대금업"이 중대한 죄였죠!—비신탁 계약, 역모기지 등등. 그렇습니다, 악마는 세세한 것들 속에 철저하게 숨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제 "시장이라는 절대 법칙"과 모든 것의 "손익 계산서"를 이해하는 새로운 의미에서의 소수의 성직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들만이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들은 종교와 초월성의 언어를 사용하여, 마치 객관성을 지닌 듯한 말투로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이런 것들은 오직 신학이나 강론대에서만 허용되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배 체제에는 책임을 묻지 않은 채, 도덕적 비난의 대부분을 탐욕스럽거나 야망에 찬 개인에게만 집중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변화시키려 애썼지만, 정작 그들이 시장의 권세와 지배 구조 앞에 무릎 꿇고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우리의 도덕적 나침반은 그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최근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족을 방문했을 때, 저는 판단, 좌절, 분노, 실망이라는 감정들과 씨름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상황이 제가 원했던 시간, 기대했던 모습은 아니었던 거죠. 그러던 중 “감정을 환영하되 집착하지 않기” (Welcoming but Not Clinging) 라는 명상 글을 읽게 되었고, 그 내용을 통해 감정을 배우고, 놓아주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대신,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 덕분에 가족들과 함께 있는 동안 어떤 감정이 올라오든 그 순간을 함께할 수 있었고, 결국 우리는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이었는지를 느끼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Christine A.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What Do We Do with Money?, unpublished notes, 2020.
[2] Adapted from Richard Rohr, What Do We Do with Evil? (CAC Publishing, 2019), 48–51. ]
[3] Rohr, What Do We Do with Money?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arón Blanco Tejedor, untitled (detail), 2017, photo, Finland,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사과를 내미는 열린 손은 탐욕에 대한 조용한 비판이 되며, 풍요를 쌓아두지 않고 나누는 ‘충분함’의 지혜와 영성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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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기도는 마음의 정화인데, 이 정화는 하느님의 따스하고 정겨운 마음을 보고 맛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설명하시면서, 한밤중에 친구에게 빵을 요청하는 장면을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이 친구는 처음에는 문을 열어주기를 꺼려하지만, 끈질긴 요청 때문에 결국 응답합니다. 이 모습은 겉으로 보기엔 하느님을 마지못해 응답하는 존재처럼 보일 수 있어 따뜻한 이미지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하느님을 그 이웃에 비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조하려는 것입니다. 즉, 인간조차도 마지못해 응답한다면, 하느님께서는 훨씬 더 기꺼이, 사랑으로 응답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친밀하게 사랑으로 응답해 주시는 이유는 우리 마음을 당신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좋은 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좋은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정화!
저는 가끔 방을 청소할 때 "한 번 청소해 놓으면 다시 청소하지 않아도 되는 늘 깨끗한 상태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이 한계가 있는 세상의 이치이겠지요?!
이런 이치는 우리의 마음 수양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냥 놓아두면 어질러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마음을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비로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기도는 우리 존재를 정화하는 것인데, 이 정화는 하느님의 따스하고 정겨운 마음을 보고 맛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피천득 작가의 [인연]이라는 수필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이 깊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피천득 작가의 이 말이 바로 관계성으로서의 기도를 잘 비유해 주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법정 스님도 [무소유]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맑은 샘 하나쯤은 지니고 있다. 그 샘이 마르지 않게 하려면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법정 스님의 글은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마음의 샘을 지켜주는 힘이 된다고 말합니다. 선한 관계가 마음을 맑게 유지시켜 준다는 메시지죠.
저는 선하고 좋으신 하느님과의 이런 만남이 바로 기도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만남을 통해 혼탁해지고 어질러진 마음을 정돈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지요!
어제 말씀드린 대로 기도는 관계성입니다. 그리고 참된 관계성은 서로를 따스하게 변화시켜 주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은 늘 충만한 따스함을 지니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그분을 변화시켜 드릴 필요도 없고 또 그럴 수도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따스한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기에 우리의 이런 마음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도 더 따스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저와 이 기도를 함께 바쳐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제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엄마이십니다.
제가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당신은 제 마음 깊은 곳을 아시고 성령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저는 당신께 성령을 청합니다.
저의 생각을 밝히시고, 저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저의 삶을 당신 뜻에 맞게 이끌어 주세요.
제가 원하는 것을 넘어서, 당신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겸손을 주세요.
당신의 성령으로 오늘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살아가게 해 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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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1-13)
생선, 달갈, 빵은 믿음, 희망, 사랑을 상징한다
사도가 높이 말한 세 가지 가운데 생선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시키고,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으니까요. 교활하게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믿지 않게 만드는 뱀은 그 반대를 나타냅니다. 달갈은 희망을 상징합니
다. 아직은 생겨나지 않았지만 병아리가 생겨날 것이고,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게 하기 때문이지요.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로마 8,24). 전갈은 희망의 반대입니다.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필리 3,13) 나아갑니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는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합니다. 빵은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 하였고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입니다. 돌은 그 반대입니다.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이것들이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분께서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이르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우리는 만유내재신론을 다룬 그의 설교에서 이런 말을 접한 적이 있다.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된다는 뜻이다." 이들 안에 있다는 것은 아들이 되거나 딸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실제 모습 그대로 뵈올(1요한 3,2) 때” 우리도 그분파 같은 사람이 될 것이고, 그분과 똑같은 존재가 될 것이고 그분과 똑같은 방법으로 알고 이해하며, 온통 그분과 똑같이 될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들 안에 있는 자녀들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을 벗어나거나 하느님의 아들이 지닌 것과 동일한 존재를 지니지 않고서는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이 공기 속에 스며들고, 하느님이 피조물에 스며들 듯이 하느님의 아들도 우리의 존재 속에 스며든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그러한 스며듬을 피하지 않는다. 바오로가 말한 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엑카르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한다.
복을 받고 싶거든 아들 안에 계십시오. 여러 아들이 아니라 한 아들 안에 계십시오. 여러분은 육체적인 탄생의 관점에서는 다르지만, 영원한 탄생의 관점에서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안에는 오직 하나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들의 탄생도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아들이 되려거든, 영원한 말씀과 함께 하나의 탄생만이 있게 하십시오.(483)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통고의 마리아
막이 열리다
루치아는 빌라르에서도 발현에 관련된 의혹으로 남모르게 괴로워하였다. ‘성모님께서 나같은 것에게 나타나시다니 •••••• 나같은 것을 선택하시다니 •••••• ’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런 상태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영혼의 사랑을 정화하기 위해 허락하시는 한 가지 시련이었다.
그러면셔도 이 의혹은 루치아의 굳은 확신을 조금도 흔들리게 하지는 못했다. 1924'년 조사원이 그녀에게,
“성모께서 그대에게 발현하셨다는 것이 정말 확실한가?"
하고 물었을 때 루치아는,
“그것은 확실합니다. 만일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 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라고 뚜렷이 대답했다.
그렴에도 불구하고 투이에서도 다시 의심이 생겼다. 그 당시는 파티마 사건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어서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 수가 없었던만큼 그 교통은 극심했다. 그리고 그녀는 장상께 대한 순명으로 고해 신부께 이야기를 해 볼까 생각도 했으나 고해 신부의 이해를 얻지 못하리라는 느낌에서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매사에 ‘다른 수녀와 꼭같이’ 하려는 노력 덕택으로 빌라르에서와 마찬가지로 ‘통고의 마리아’가 전국에서 유명한 파티마의 루치아가 아닌가 하고 의심쩍어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다른 지원자와 다름없는 지원자였고 디른 점이 아예 없는 수련자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묵상 기도나 미사 때 그녀의 검고 둥근 눈을 보았다면 그녀의 그 불가사의한 그리고 신비로운 표정을 볼 수 있었으리라…..
친구도 선생도 거의 모든 장상도 그녀의 참 이름을 몰랐다. 포르투갈에서는 파티마의 루치아는 먼 스페인 갈리스나 아스트리의 수도원에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었다.(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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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강화에 살 때, 철새의 이동 시기인 11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에 조류인플루엔자가 위험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강화도에 들어가는 다리에서부터 차량 방역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방역을 철저하게 하는 것은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닭, 오리 같은 가금류에서 고병원성 AI가 발생하면 치사율이 매우 높아 대량 폐사가 일어납니다. 때로는 드물지만, 사람에게도 전염될 수 있기에 강화도 입구에서부터 철저하게 방역하는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에 곧바로 가지 못하고 연옥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혼이 깨끗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한다면서도 왜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부르지 않는 이유입니다. 깨끗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기 영혼의 정화는 필수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자기 영혼의 정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미리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계속 정화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집중하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우리의 영혼은 더욱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지요. 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당연히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특별히 기도의 자세와 하느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요. 비유와 가르침을 통해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며,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십니다.
끈질긴 벗의 비유를 통해 기도하는 이의 절대 물러서지 않는 자세를 이야기하십니다. 한밤중에 벗을 찾아가 빵을 구하지요. 당시는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지 못하는 것이 주인에게 큰 수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빵을 구하러 간 사람은 단순히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라, 공동체의 명예와 의무를 지키기 위해 ‘줄곧 졸라대고’ 있습니다. 단순히 끈기나 성가심을 넘어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담함이라는 강한 의미를 보입니다. 자기 체면이나 상대방의 불편함보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필요성에 집중하여 물러서지 않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물러나지 않는 기도를 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최고의 선물, 모든 선물의 근원인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뜻을 깨닫고,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으면서, 우리의 영혼이 진정으로 깨끗하게 정화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 안에서 당신의 일부인 그 어떤 점을 발견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일부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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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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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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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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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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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fmkorea.org/ofmhomily
위 “작은형제회 홈페이지– 나눔방– 말씀 나눔.” 리스트에서 ‘김명겸요한’으로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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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09.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1,5-13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네 발로 기어다니던 아기는 어느 순간 갑자기 벌떡 일어나 걷게 되는 게 아닙니다. 두 발로 온전히 서기까지, 그리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까지 수 백, 수 천번 이상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지요.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고 괴롭지만, 어차피 또 넘어질 거 일어서면 뭐 하나 하고 자괴감이 들 법도 하지만, 아기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다리와 허리에 점점 힘이 붙고 요령이 생겨서 어느 순간 제 힘으로 일어서고 걸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성장하는 모습도 그와 비슷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기도를 청하는 즉시 이뤄주시지 않습니다. 또한 아무리 기다려도 바라는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지요. 그러나 그 인내와 좌절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강해지고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하느님을 향한 우리 믿음도 단단해지고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정성을 다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 마음과 영혼에 놀랍고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거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먼저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라’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며 겸손한 자세로 그분께 희망을 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청하는 그것을 주시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께서 주고자 하시는 그것을 우리 편에서 먼저 청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무분별한 탐욕을 절제하는 능력이,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식별하는 지혜가, 그것을 진정으로 바라는 간절함이 우리 마음에 생기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찾으라’고 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눈 앞이 캄캄해도,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듯한 느낌에 깊은 절망에 빠져도,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거두지 말고 끝까지 그분을 찾으며 간절히 매달리라는 뜻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그분은 우리를 되찾아 당신 품에 안으시는 순간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섣불리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우리가 써내려가는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의 스토리도 기쁨과 영광이라는 결말로 반전시킬 능력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두드리라’고 하시는 것은 먼저 받지 않아도 기꺼이 내어드리는 능동적인 사랑으로, 남의 눈치를 보거나 계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의 문을 두드리라는 뜻입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 하느님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만, 그분 뜻을 따르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다른 것보다 먼저 실행해야만 그럴 수 있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그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바로 열어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니,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걱정하지 말고, 그 문 너머에 있는 하느님 나라가 잘 안보인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두드려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성령을 가득히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눈을 활짝 열어 하느님과 그분 나라를 알아보고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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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71
10월9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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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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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김학수 바오로(대치2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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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저는 저 스스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저는 청원 기도와 관련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말씀이라 신중하고 진지한 해석이 요청됩니다.
예수님 말씀은 언제나 큰 틀에서 읽고 묵상해야 마땅합니다. 한 표현, 한 문장에만 혈안이 될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 9-10)
많은 분들이 제게 따지듯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굳은 확신을 갖고, 목숨을 다하여 간청했습니다. 십 년, 이십 년, 평생에 걸쳐 청했지만, 그러나 그 어떤 응답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거 말씀하고 틀리지 않습니까?
특히 너무나 절박한 상황 앞에서, 극도의 가난 앞에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간절히 청하고 또 청했지만, 끝내 주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불치병으로 앓던 아들은 세상을 떠났고, 안전한 귀향을 바랐던 남편은 전사했습니다. 결혼은 파국으로 마무리되었고, 정든 집과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기도하던 백성들은 박해를 당했고 교회는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이토록 무자비한 현실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너무나 대치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웃들이 겪는 이해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우리는 주님께 청할 것, 그리고 그분께서 주실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보다 폭넓고 보편적인 기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와서, 꽃같은 시절이 있었다면, 꽃이 지는 시절도 있는 것입니다. 막 출고된 신차처럼 건강미 철철 넘치는 젊은 시절이 있는가 하면, 노후된 중고차 처럼 여기 저기 아프고 골골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 존재로서, 대자연의 순환주기와 생로병사의 큰 흐름 안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치유의 은사를 선물로 받은 분,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치유했던 한 영성가의 쩌렁쩌렁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저는 저 스스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 주님께 내어 맡깁니다. 저는 평생토록 저 자신의 치유를 위해서는 단 한번도 청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주님께 청할 것,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실 것은 세상에서의 복락이나 승승장구가 아니라 오직‘성령’이십니다. 간절히 청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댓가로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은총이 뒤따릅니다.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비극적인 현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억울한 사건들도 수용하게 됩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것, 고통과 십자가, 죽음마저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께서 친히 우리 마음의 문을 여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정착하십니다.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보게 됩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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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50년간에 걸친 바빌로니아에서의 유배를 끝내고, 꿈에도 그리웠던 고국으로 귀환하던 유배자들의 마음은 참으로 감격스러웠고, 고국산천이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들의 가슴은 두근 반 세근 반 희망으로 설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고국 땅에 도착해보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고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영원할 것처럼 견고했던 도성들은 자취도 없이 허물어져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심장이요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하게도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고 있던 삶의 자리는 이민족들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아있던 동족들은 이교 문화와 우상숭배에 푹 빠져 영혼없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청춘과 목숨까지 바쳐가며 독립 운동에 매진하다가, 해방의 기쁜 소식을 듣고,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귀환하던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받은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에 참 슬퍼졌습니다.
친일파들은 어우선하고 혼란스런 정국을 틈타, 어느새 자신들의 신분을 세탁하고 또 세탁해서, 새로 수립된 정부의 주류이자 기득권 세력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고 그 명맥을 오늘날까지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국가와 민족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독립 유공자들에게 다가온 것은 또 다른 박해요 철저한 냉대였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이찌 그리 무심하신지...
하느님께서는 암울했던 시절, 길잃고 방황하던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일으키기 위해 보낸 사자(使者)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구약시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에서 소개된 말라키 예언자 역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배에서의 귀환 이후, 이스라엘에는 사실 더 이상 왕이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백성들의 시선은 성전 재건 작업의 주인공들이었던 성전 책임자들, 곧 사제들에게로 향했습니다.
뜻밖에도 그들은 신앙적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재정 전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큰 파워를 지니게 되었고, 그에 따른 극단적 세속화와 부정부패가 뒤따랐습니다.
이런 위기 시대에 등장한 말라키 예언자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횡행하고 있던 온갖 악습과 그릇된 예배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특히 말라키 예언자는 사제들의 직무에 대한 게으름과 나태함을 강하게 꾸짖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대한 불충실, 이방인들과의 혼인에 대해 질책합니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예물 봉헌에 대해서도 강하게 경고합니다.
말라키 예언자가 신랄하게 경고하고 직책하는 내용 하나하나가 어찌 그리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흡사한지, 섬뜩할 정도로 유사합니다.
특히 총 6개의 신탁 가운데 두번째 신탁은 사제들의 타락을 강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말라키 예언자의 눈에 들어온 당시 사제들의 문제점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예물은 가장 값지고 흠없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더러운 빵과 훔친 가축, 병들거나 절뚝거리는 가축을 무성의하게 예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말라키 예언자가 활동하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주도권은 레위 가문이 아니라 사독 가문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즈루빠벨의 호위 아래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될 당시 모든 권한과 임무를 장악하게 되었고,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힘과 돈, 정치력까지 한 손에 쥐고 있으니 자연스레 타락과 부정부패의 길은 불을 보듯 뻔했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가 막대한 경제력을 지닌다든지, 세속적 권력과 긴밀히 결탁하게 될때, 타락과 비리, 부정부패는 마치 공식처럼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 교회 역시 지나친 경제력을 쥐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높은 위치로 올라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세속의 권력과 지나치게 친밀한 상태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교회는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세상적인 마인드로 재물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재물보다 잿밥에 더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세상의 개발 논리에 깊이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한 말라키 예언자의 경고는 날카롭기만 합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만군의 주님이 말씀하신다.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키서 3장 19~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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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할 때 일어나는 일; 믿어진다.>
오늘 복음은 어제 ‘주님의 기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이 증명되고 자녀로서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을 받는 특권까지 누립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에서 청원하는 내용에 집중해야지 그것을 통해 얻으려는 것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녀도 원할 때 무언가 더 주고 싶어집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무언가 자신에게 꾸준히 청할 때 자녀가 자신을 신뢰한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든 들어주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언가를 꾸준히 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꾸준히 청하는 것은 약간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이기에 꾸준히 청할 수 있으려면 상대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굉장해야 합니다. 따라서 꾸준히 청한다는 것은 이미 그만큼 하느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하느님은 그런 자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실 수 없으십니다.
평생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조지 뮬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기도 노트에는 기도 제목들이 3천 페이지나 넘게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도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기도했지만,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우정을 나누었던 5명의 친구 구원 문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섯 명의 친구를 위해 계속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씩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 믿는 친구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이 두 친구를 위해서 무려 52년간 기도했지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지 뮬러는 노년이 되어서 자기 인생의 마지막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날 조지 뮬러의 안 믿던 한 친구가 그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머지 한 친구는 안 믿었습니다. 결국, 조지 뮬러는 마지막 기도 제목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에 그때까지 안 믿고 있었던 한 친구가 뮬러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지 뮬러가 자기를 위해서 52년간이나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지 뮬러가 죽은 바로 그해 그 소식을 들은 이 친구는 결국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믿고 나서 그 친구는 전 영국 땅을 순회하면서 “조지 뮬러 목사의 기도는 다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최후의 응답입니다. 당신의 모든 기도는 다 응답합니다.”라고 간증하였습니다.
만약 두 아이가 무언가 청하는데 한 아이는 그저 ‘찔러보는 식으로’ 이것 청했다가 저것 청했다고 하고, 또 한 아이는 하나가 이루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청한다고 할 때 누구의 청을 먼저 들어주시겠습니까? 자신께 신뢰심을 보이는 아이일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청하면 그분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신뢰심은 기도의 ‘꾸준함’으로 증명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친구들이 한 명, 한 명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한 번만 청해도 다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 수천 번 넘어지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꾸준히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를 느끼며 믿음이 함께 성장합니다. 아기들도 걸음마를 할 때 매번 똑같이 넘어지지 않습니다. 조금씩 발전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더해져 포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험악한 얼굴에 인간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격까지 괴팍하였습니다. 얼굴과 성격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활도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방탕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항상 문제만 일으켰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가 왜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에 받은 부모의 학대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학창 시절에 당한 왕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원래가 이렇게 못돼먹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엉터리 같은 남자의 마음에 사랑의 온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게 된 아름답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할 수 있는 온갖 사랑의 말로 고백했고 청혼도 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온갖 진심을 보여주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거절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신같이 험악하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참 매몰찬 거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무도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가면을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비싼 값을 치른 후 인자하게 생긴 얼굴의 가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가면을 쓰고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고, 청혼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인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달콤한 사랑의 말과 가면의 인자한 모습에 감동한 것입니다. 남자는 결국 결혼을 허락받을 수 있었습니다.
원래 선량함이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던 여인을 신부로 얻게 되자 그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사랑스러운 신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손님은 이 남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남자가 잠든 사이 그는 여자에게 진실을 말하였습니다. 가면 속에 감춰진 남편의 험악한 얼굴과 방탕한 과거의 추한 모습들을 낱낱이 폭로했습니다. 그것은 아내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잠든 남편의 가면을 슬그머니 벗겨보았습니다. 순간 남편의 과거를 폭로했던 손님이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습니다. 가면 속의 얼굴은 과거 그가 보았던 험악하고 비열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살며시 미소 머금은 얼굴로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그 표정은, 오히려 그가 쓴 가면의 얼굴보다 더 인자하고 푸근하게 변해있었습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면 좋은 점이 무엇이냐면 그러면서 “믿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좋으신 분임이 믿어지고 그래서 내가 청하는 것을 꼭 들어주실 것이 믿어집니다. 그렇게 나 자신도 더욱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자신도 모르게 변합니다.
저는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1997년 신학교 입학하는 해 1월 1일부터 계속 바쳐오고 있습니다. 연옥에 가지 않고 순교자의 지위에 올려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처음에 이 기도를 바칠 때 마음 한구석에서는 ‘설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가고 10년이 지나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는데?’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이 기도를 바치며 자신이 조금씩 변화됨을 스스로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완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랬다면 지금 물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자꾸 바치다 보면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조금씩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어지게 되고 믿어지면 못 할 게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실 것을 확고하게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 내용을 깊이 묵상하며 꾸준하게 바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젖을 줄 때까지 계속 ‘엄마!’를 외치지 않는 아기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칠 때마다 젖을 주는 엄마를 보면 아이는 엄마임을 더욱 확실히 믿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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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얼마 전 가끔 만나 식사하는 젊은 부부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집 축성도 하고, 차 축성도 했던 부부입니다. 그들은 이제 아이를 키울 집을 찾고 있었습니다. 수영장이 딸린 이층집과 마당이 넓은 단층집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층집은 멋있고 구조가 좋아 보이지만, 단층집은 생활이 편리하고 어르신들에게 적합합니다. 매사에 신중한 부부이니 결국 좋은 선택을 하리라 믿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우리는 B와 D 사이에서 살아가는데,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늘 C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B는 Birth(탄생), D는 Death(죽음), C는 Choice(선택)입니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며, 그 선택이 우리 존재를 규정합니다. 성경도 선택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의 선택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낙원의 모든 것을 맡겨 주시면서 단 한 가지, “선악과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창세 2,17)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었고, 그 결과 낙원에서 쫓겨나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리라”라는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판도라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판도라는 열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자를 열었고, 그 속에서 슬픔과 질병, 전쟁과 질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희망’이었습니다. 인간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고통을 맞이하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남겨주신 희망 안에서 다시 살아갈 길을 찾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번영,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어서 “너와 네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하라”라고 권고했습니다. 신앙의 길은 결국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세상의 영광을 따를 것인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우리 삶의 방향과 영원을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실패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죽음을 부활의 영광으로 바꾸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절망에서 희망으로, 두려움에서 용기로, 원망에서 감사로 변하였습니다. 성령의 힘을 받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파견 사명을 담대히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삶에서 매일 작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 선택이 하느님을 향한다면, 비록 지금은 좁은 길처럼 보여도 결국은 생명과 평화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신앙은 선택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이끌려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희망을 주시며 다시 선택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선택을 한다면, 우리 삶은 “시냇가에 심겨 제때 열매를 맺고, 그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처럼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하느님 안에서 복된 선택을 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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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계속 청하면, 잠을 못 잘 정도로 계속 청하면 아마도 잠을 자기 위해서, 귀찮아서라도 그의 청을 들어줄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 기도드릴 때는 오래, 쉬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주실지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창세기에서 이사악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 레베카를 위해서 기도합니다(25,21 참조). 이사악은 아마도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주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제발 저의 아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기도가 이루어져 에사우와 야곱이 태어납니다. 이사악이 과연 몇 년 동안 그 기도를 하였을까요? 성경에서는 이삭이 레베카를 아내로 맞이하였을 때 그의 나이가 마흔이었고, 에사우와 야곱이 태어났을 때는 예순 살이었다고 하니 거의 이십 년 동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이틀도 아니고, 두 달도 아니고, 이 년도 아닙니다. 무려 이십 년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기도합니까? 혹시 지금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고 주님께 열심히 기도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지쳤다며 포기하지는 않습니까? 또는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화를 내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면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를 위하여 늘 함께해 주시는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맡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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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5-13: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기도의 끈질김과 그 열매를 가르치신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나라는 아무렇게나 열리는 문이 아니다. 그것은 게으른 이가 아니라, 끊임없이 청하고 찾으며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리는 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주시기 위해 기도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를 통해 그것을 받아들일 그릇을 넓히도록 하시기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Sermo 102) 즉, 기도는 하느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분의 은총을 담을 준비를 하는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사물로써 진리를 드러내신다. 생선은 세례와 믿음을 상징한다. 물속에서도 살아남는 생선처럼, 믿음은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생명을 지켜 준다. 반대로 뱀은 속임수와 죄의 상징이다. 달걀은 희망을 나타낸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생명이 숨어 있듯, 믿는 이의 희망은 언젠가 드러날 미래의 영광을 지향한다. 그러나 전갈은 절망과 파괴를 뜻한다. 꼬리에 독을 품고 있듯, 희망을 잃은 삶은 자신을 해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에서 추가되는 빵은 사랑을 뜻한다. 빵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음식처럼 사랑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양식이다. 반대로 돌은 굳은 마음, 사랑을 거부하는 완고함을 상징한다. 믿음·희망·사랑이라는 삼덕은 이렇게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며, 우리의 기도 안에서 더욱 성장한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여기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최고의 선물은 성령이다.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능하게 하고, 우리를 진리와 사랑 안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교리서도 이렇게 말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은혜와 성령을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특권적 순간이다.”(2652항)
우리는 자주 기도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정말 들어주실까?” 하는 의심을 품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주님은 우리가 청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 우리가 간구해야 할 가장 큰 은사는 바로 성령, 즉 하느님 자신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에, 또 일상의 순간마다 하느님께 마음을 열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임무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믿음의 흔들림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기도 안에서 믿음 희망·사랑을 청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아 살아가라는 초대이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그 문을 활짝 열어 주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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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께 청합니다>
루카 11,5-13 (끊임없이 간청하여라.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하느님께 청합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하느님께 있는
믿음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불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희망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절망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사랑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미움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온유를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난폭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용서를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복수가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베풂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탐욕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포용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배척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일치를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분열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평등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차별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축복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저주가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해방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억압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살림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없는
죽임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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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일은 ‘지금’ 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3)
1)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청하면 주실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청해서 받아라.”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ㄴ)라는 산상설교의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분이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 자동적으로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청해서’ 받아야만 ‘나에게’ 옵니다. 만일에 청하지 않는다면, 또는 안 받으려고 하면, 아버지께서 아무리 많은 것을(좋은 것을) 주셔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도당해서 초주검이 된 그 사람은,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이고, 또 누구든지 아무나 지나가다가 도와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 지나가는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에게 제발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도와준 것은, 그의 요청에 응답한 일이기도 하고, 또 그의 간절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살기를 포기하고, 그래서 기도하지도 않고, 사마리아인의 도움도 거절한다면?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또 만일에, 자기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동족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나는 사마리아인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 라고 도움을 거절하거나,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니 사람이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면서 도움을 거절했다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께서 ‘직접’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가 아닙니다. 물론 도움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통해서 받든지 간에 내가 받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기도했던 그것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시기와 방법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3)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말씀도 ‘같은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이미 문을 열어 놓으셨으니, 그 문을 찾아서 들어가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스스로, 능동적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면, 문이 이미 열려 있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문은 닫혀 있는 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서, 그리고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시고, ‘내가’ 그 문을 열어 드려야 하는 상황은 복음 말씀과는 반대의 상황인데, 그래도 어떻든 ‘능동적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무시한다면, 그래서 문을 열어 드리지 않는다면,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4) 문을 두드린다는 상황에서 다음 말씀도 연상됩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이 상황은 ‘최후의 심판’이 끝난 뒤의 상황입니다.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이미 들어갔고, 그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사실상 쫓겨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달라고 애원해도, 닫힌 문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이 끝나면 모든 상황이 끝나고, 주님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을 두드리는 일은, 또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문을 열어 놓고서 기다리시는 때이고, 문이 닫히는 ‘그날’은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때입니다.
사실 ‘청하고 찾는’ 일도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은’ 특별히 청할 일이 없다.”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오만함과 자만심을 버리지 않으면, 정말로 간절하게 청해야 할 일이 갑자기 닥쳤을 때, 청하지도 못하고 허둥대기만 할 것입니다.
기도는 평소에 꾸준히 하는 사람이 잘하게 되는 법입니다. 어떤 아쉬운 상황이 되어야만 기도를 하려고 하고 평소에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의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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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믿고, 하느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 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 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 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 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 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좋은 것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말고 그분의 때와 방법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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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기도’라는 주제로 어제 복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시며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셨다면,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한 가지 비유로 시작합니다. 만일 누군가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면, 그 친구는 간절한 도움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여기에는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비유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설명하십니다.(11,9-13 참조) 되풀이되는 세 쌍의 단어들(‘청하다’와 ‘주어지다’/‘받다’, ‘찾다’와 ‘얻다’, ‘문을 두드리다’와 ‘열리다’)은 비유에서 강조한 요점, 곧 ‘지치지 말고 끈기를 가지고 기도하라.’는 메시지를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논증 방식은 비합리적인 듯이 보이지만 매우 합리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본성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청하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 기도하면서도 의심하고 있는 우리를 일깨웁니다. 기도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을 향한 견고한 믿음은 우리가 의심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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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간청하면 그분께서는 이에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분의 응답은 우리가 기대하는 때와 방식이 아니라,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가령 꼬마 아이가 자기 아빠에게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면 아빠는 그 간청을 곧바로 들어주겠습니까?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컸을 때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하고, 그 뒤 자동차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에야 운전할 수 있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하여 적절한 때를 살펴보고 계시며, 심지어 그때까지 우리가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주십니다.
또 아이가 동네에서 친구들과 싸웠는데, 분을 이기지 못하여 엄마에게 달려가 그 친구를 혼내 달라고 청하면 엄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며 우선 화를 달래고, 무엇이 올바른지 차근차근 설명해 준 뒤에야 그 친구에게 가서 진정한 화해를 이끌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뱀을 달라는 기도라면, 그분께서는 생선으로 응답하시기 위해서 적절한 형태를 찾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의 침묵을 두고, 그분을 무능하게 보거나 선하지 못한 폭군으로 내몬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께서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점을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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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강화에 살 때, 철새의 이동 시기인 11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에 조류인플루엔자가 위험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강화도에 들어가는 다리에서부터 차량 방역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방역을 철저하게 하는 것은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닭, 오리 같은 가금류에서 고병원성 AI가 발생하면 치사율이 매우 높아 대량 폐사가 일어납니다. 때로는 드물지만, 사람에게도 전염될 수 있기에 강화도 입구에서부터 철저하게 방역하는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하느님 나라에 곧바로 가지 못하고 연옥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혼이 깨끗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한다면서도 왜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부르지 않는 이유입니다. 깨끗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기 영혼의 정화는 필수지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자기 영혼의 정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미리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계속 정화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집중하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우리의 영혼은 더욱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하지요. 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당연히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특별히 기도의 자세와 하느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요. 비유와 가르침을 통해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며,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십니다.
끈질긴 벗의 비유를 통해 기도하는 이의 절대 물러서지 않는 자세를 이야기하십니다. 한밤중에 벗을 찾아가 빵을 구하지요. 당시는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지 못하는 것이 주인에게 큰 수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빵을 구하러 간 사람은 단순히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라, 공동체의 명예와 의무를 지키기 위해 ‘줄곧 졸라대고’ 있습니다. 단순히 끈기나 성가심을 넘어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담함이라는 강한 의미를 보입니다. 자기 체면이나 상대방의 불편함보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필요성에 집중하여 물러서지 않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물러나지 않는 기도를 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최고의 선물, 모든 선물의 근원인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뜻을 깨닫고,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으면서, 우리의 영혼이 진정으로 깨끗하게 정화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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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이어가시면서,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만큼 다 주시고”(루카 11,8 참조), “성령을 주시는 분”(루카 11,13 참조)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또한, ‘주님의 기도’의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청원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시면서, 동시에 ‘양식’을 주는 일과 그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벗을 위한 양식’을 구합니다. 자신이 양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는 자신의 결핍과 부족과 무능과 한계를, 자신의 가난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겸손과 사랑으로 끈질기게 청합니다. 그러면,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청하여라’는 것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이요, 희망을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께 두고 겸손하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시고 먼저 우리에게 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찾아라.’는 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고, 믿는 바를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너희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말할 것이다.”(이사 65,24;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18)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충실하시고 신실하시고 항구하게 우리를 찾으시니, 그분을 반겨 맞으며, 우리 또한 그렇게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두드려라”는 것은 사랑의 가슴으로 “두드려라”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라고 하시며,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결국,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청하고 계시고, 우리를 찾고 계시며,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바로 ‘가난한 벗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청하고 두드리고 계십니다.
<두 번째> 비유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양식’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 곧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 몸을 맡기는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이고, 뒷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이며,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마태 7,11), 곧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령한 양식’인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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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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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루카. 11,10)
힘겹게 매달리며 청하지만 받는 것은 없습니다. 청할수록 때로는 좌절만 더 느낍니다. 어려움 때문에 매달리지만 현실과 당신은 너무 멀리 계시는 듯이 느껴집니다. 때로 현실에서 당신은 전혀 쓸모없는 하느님처럼 계십니다.
얻으려고 찾지만 얻을 수 없습니다. 위로자나 동반자를 찾지만 발견하지 못합니다. 필요한 사람을 찾지만 그런 사람도 얻지 못합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두드려도 열리지 않아 때로 지칩니다.
두드릴 힘조차 없어 문에 기대어 섰지만 문은 잠겨 있습니다. 벽처럼 버티고 있는 꽉 닫힌 문 앞에서 통곡을 해도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절망으로 주저앉은 마음은 죄절감만 커갑니다.
청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때로 우리의 일마저 주님이 대신해 주시기를 청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를 대신 풀어주시기보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풀 수 있도록 도와주시려고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찾지만 얻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 숨겨진 보물을 찾기보다 엉뚱한 곳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잃어버린 우리 자신을 찾아 세상을 얻도록 도와주십니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은 우리 마음이 아직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 세상의 문이 열립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문을 직접 열어주시려고 하지만 우리가 그 문을 닫습니다. 성령께서는 어떠한 시련도 우리가 받아들이도록 열린 마음을 주십니다. 우니가 마음의 문을 열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어떤 문도 열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협조자이신 성령의 힘을 받을 때, 우리는 청하는 것을 받고, 찾는 것을 얻으며, 두드리는 어떠한 문도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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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간절하고 진실하고 항구한 기도>
“기도와 삶”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 40;5ㄱㄴ,시편1;2)
오늘은 5대 국경일중 하나인 한글날입니다. 1446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했으니 제579돌이 됩니다. 한글을 창제한 까닭을 밝힌 성군(聖君 ) 세종대왕의 말씀이 감동입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린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노라. 내가 이를 위해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것이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이요 세종대왕 역시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한글날 가사도 좋고 노래도 참 우렁차고 힘이 샘솟습니다. 한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국경일 노래중 정인보 선생이 아닌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최현배 선생이 작사한 노래 1절만 소개합니다.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시간되면 한글 사랑과 애국심이 철철 넘쳐흐르는 3절까지 꼭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가사 2.3절에 나오는 "한글은 우리 자랑 민주의 근본", "한글은 우리 자랑 생활의 무기"라는 말마디도 감동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길이 없습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저절로 하느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인간은 인간의 정의입니다. 기도하라 직립인간에 어디서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기도없이 사람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날아
흰구름되네”
기도할 때 푸른 하늘에 흰구름처럼 자유롭고 행복한 삶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기도가 삶의 꼴을 결정합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 기도입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이 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둘중 하나입니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제가 평생 기도하는 수도자로 살지만 늘 한없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사랑에서처럼 기도에서도 늘 초보자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은 나중에 천국입장시 당신을 닮았는지 닮지 않았는지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기도할 때 날로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얼굴이 됩니다. 기도와 삶처럼 기도와 말도 함께 갑니다. 기도에서 참말이 나옵니다.
옛 현자의 말씀도 기도의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한 번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 번 입에서 나온 말은 돌이킬 수 없다.”<다산>
“흰 옥구슬의 흠은 갈아 없앨수 있지만, 말의 흠은 없앨수 없다.”<시경>
침묵의 기도에서 참말이, 생명의 말이 나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 역시 훈련이요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기도의 복음이라 할 수 있는 루카복음은 어제 주님의 기도에 이어 오늘은 ‘기도의 자세’에 대해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바로 예수님은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기도는 간절하고 항구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참으로 겸손히 간절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청하라는 것이요 하느님은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 역시 올바른 기도와 믿음,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부단히 “청하고, 찾고, 두드리고...”, 그대로 좌절이나 포기가 없는, 끝없이 도전하는 지칠줄 모르는, 참으로 영적탄력이 좋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의 자세, 믿음의 자세, 삶의 자세를 말해줍니다. 참으로 좋으시고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기에 이런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성령이야 말로 만병통치약입니다. 성령은 ‘좋은 것’, ‘하느님의 은혜 그 자체’입니다. 정말 청해야 할 바 성령 하나뿐입니다. 성령안에 좋은 것 모두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마음에, 하느님 뜻에 일치하여 살게 하는 성령이요 성령에 따른, 성령충만한 삶이야말로 참으로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효소가 답이다” 하여 웃었는데 “성령의 효소가 답”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간절히, 항구히 청해야 할 바 성령의 선물입니다. 오늘 구약성경의 마지막 말라기서 다음 말씀은 더욱 기도에 힘쓸 것을 가르쳐줍니다.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이런 그날에 앞서 겸손히 회개하라 주어진 하루하루 선물의 날들임을 깨달아, 심기일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경외하며 의로움의 태양인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말라기 예언은 그대로 루카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높은 곳에서 새벽이 우리에게 밝아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리라.”(루카 1,78-79)
그렇습니다. 정의의 태양,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치유와 온전함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치유의 구원을 주시고, 간절하고 항구히 기도하게 하시며, 정의의 태양,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살게 하십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 되리라.”(시편 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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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11,9)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 11,5-13)은 '끊임없이 간청하여라.'는 말씀과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그리스도인들은 '청하는 사람, 찾는 사람, 문을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청하고, 성령을 찾고, 성령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께 나의 온 존재를 내어 맡기는 사람입니다.
이 성령께서 나를 움직이십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이끄십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유혹과 악에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큰 은총이며, 큰 행복'입니다.
'믿음이 충만한 가정'은 재물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니 큰 재산을 모으는 부자는 못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정은 행복합니다. 눈에 보이는 재산보다도 더 큰 재산인 성령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돈이 아니라 성령을 찾고, 성령을 구하고, 성령의 문을 두드리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화답송)
참으로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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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 9)
하느님 사랑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거짓의 나가
사라지면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의
나를 만납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으로
가득한 기쁨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기도입니다.
온전히 우리
생활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을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로 삶을
바라보는 마음이
바뀌게 됩니다.
올바른
마음의 행위가
참된 기도입니다.
조르고 청하는
기도에서
시작하지만
기도는 성장하며
받아들이고
베풀 줄 아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나갑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언제나 기도에
화답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하느님의 마음을
만나게 합니다.
가슴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임을
다시 배웁니다.
우리를 있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면
이미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고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는 나의 뜻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뜻을
받아들이는
평화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가장 좋은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는
가장 좋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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