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야래향 여섯 번째 이야기
이런 야래향이 한국에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국에 야래향은 처음 어디서 들어왔을까?
이에 관한 어떤 문헌도 찾아볼 수 없지만 중국에서 먼저 들어왔다고 본다. 1930년대 후반
일제식민지 문화정치에 따라 중국 상해에서 유행하던 시대곡들이 조선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그당시 상해는 서구음악의 영향을 받은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중간단계의 창법을 구사했다.
그러나 야래향이 번안곡으로 정식 발표된 것은 1950년대다.
625전쟁 후에 전쟁의 상처를 위로하는 노래들이 유행을 했는데, 그때 야래향도 한국대중가요계
1세대인 심연옥님이 번안곡으로 불렀다. 님은 우리나라 美聲의 가수중에도 손꼽히는 가수로 6.25의
아픔을 담은 노래 "아내의 노래"를 전쟁 중에 불렀고, 불후의 명곡으로 일제치하의 암담한 현실을
노래한 "나그네 설움"을 부른 가수 백년설 선생의 부인이기도 하다. 1970년대 말 미국 로스
엔젤레스로 이주하여 백년설은 80년대에 돌아가시고 심연옥님은 지금도 생존해 계신다.
중국과 일본처럼 한국의 야래향도 이미 사라져버린 노래가 아니고 실존인물과 함께 여전히 역사의
향기를 꽃피우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노래다.
그러나 백년설은 일제때 강압에 못이긴 친일행적의 어둠이 있다. 몇년전 그의 고향인 경북
성주 초등학교에 세워진 백년설의 흉상이 이 문제로 훼손되었다고 한다. 자의적이진 않았겠지만
그 시대 일제의 직간접적인 협박에 못이겨 일본 찬양노래를 부른다거나 그런 행사에 불려다니는
것은 연예인으로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강압적인 과오 때문에 외국에 거주하며 가요계
원로로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말년을 보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튼 심연옥님은
백년설의 부인이므로 역사적 상처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작년에 발표된 친일인사 명부에 올라간 수많은 인사들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한다.
역사적 비극이 아닐 없다. 우리모두 과거를 청산한다는 것은 그들의 친일행적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것인데, 해방이후 과거 친일파들이 더 득세를 하고 일제치하에서 수많은
애국자들을 탄압했다면 한 인간으로서 아무리 넓은 가슴을 가졌다 하더라도 용서키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이 문제는 그시대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수많은 자손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갈등이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정부의 일관되고 진정성 있는 국민포용정책이
필요하겠다. 참고로 중국은 일제패망 직후 친일행적을 가진 중국국민을 전면색출하여 바로
단죄해버렸다. 이향란, 야마구치요시코는 그때 살아남은 것이다.
☆야래향/심연옥☆
지나간 그 옛날에 푸른밤 잔디 위에서
나란히 마주 앉아 속삭이던 그 때가
그리워져요 낯설은 달빛 아래서
그대와 부르던 노래 지금은 사라진 꿈
내 마음은 언제나 외로워져요
예라이샹 예라이샹 애달픈 호궁의 소리
언제나 돌아오려나 구름 같은 그 님아
오늘도 이슬 젖어 끝없이 헤매이며
사라진 옛 추억을 가슴 안고 언제나
울고 있어요
예라이샹 예라이샹 애달픈 호궁의 소리
언제나 돌아오려나 구름 같은 그 님아
오늘도 이슬 젖어 끝없이 헤매이며
사라진 옛 추억을 가슴 안고 언제나
울고 있어요
예라이샹 예라이샹 예라이샹
위 가사를 보면 중국과 일본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625전쟁에 전사한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남편을 애타게 그리며 그 옛날 푸른산 잔디위에서 그대와 잠시 속삭이던 추억을 노래하고
있다. 오늘도 이슬젖어 끝없이 헤매이며...사라진 옛추억을 가슴안고 언제나 울고 있어요.
예라이샹 예라이샹 예라이샹~~ 그냥 야래향이라고 하지 않고 원음을 이어받고 있다. 반면에
중국과 일본은 멀리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을 님이 아니라 언젠가 꼭 다시 돌아올 님을 애타게
그리며 인고의 기다림을 표현하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은 전쟁중에 불려진
노래였고, 한국은 625전쟁 후 아픔을 위로하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상황은 또다시 변하여 전쟁의 아픔이 차츰 잊혀지고, ‘잘살아 보자’는 경제구호에 열을
올릴 무렵 이 노래는 아주 저속한 딴따라 댄스곡으로 전락한다. 이 말은 가사의 내용이나 원래 가수의
아름다운 창법보다 경쾌한 리듬에 몸을 싣고 스텝을 밟는 카바레 도우미곡이 되버린 것이다. 한때
도시 농촌 가릴것 없이 ‘샤모님, 저랑 춤 한번 추실까요?’란 말이 유행한 적 있다. 사모님들이
시장간다고 장바구니들고 대낮에 카바레 출입했던 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태가 도덕적 비난을 받기보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원초적 본능이 태동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지금도 무슨 묻지마 관광이니, 성인 콜라텍이니 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가끔 어수룩한 무도학원 등을 통해 어엿한 대중문화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
<노래방 버전>
언제나 잊지못할 푸른밤 잔디위에서
가슴에 얼싸안고 맹세하던 그 때가 그리워져요
달빛에 젖은 그림자 둘이서 부르던 노래
지금은 흘러간 꿈 내 얼굴에 눈물만 얼룩젖어요
예라이샹 예라이샹 애타는 호궁의 소리
언제나 돌아오려나 구름같은 그님아
달빛에 젖은 그림자 둘이서 부르던 노래
지금은 흘러간 꿈 내 얼굴에 눈물만 얼룩젖어요
예라이샹 예라이샹 애타는 호궁의 소리
언제나 돌아오려나 구름같은 그님아
달빛에 젖은 그림자 둘이서 부르던 노래
지금은 흘러간 꿈 내 얼굴에 눈물만 얼룩젖어요
예라이샹 예라이샹 예라이샹
위 가사는 지금 노래방 곡으로 채택된 버전인데 심연옥님의 가버린 님에 대한 애타는 간절함과
순결함은 사라지고 빠른 리듬에 어둠에서 흐느적 거리는 퇴폐적인 분위기로 돌변하였다.
대표적인 부분이
<나란히 마주앉아 속삭이던 그 때가 그리워져요 낯설은 달빛 아래서 그대와 부르던 노래>가
<가슴에 얼싸안고 맹세하던 그 때가 그리워져요 달빛에 젖은 그림자 둘이서 부르던 노래>
로 좀더 육감적이고 상업적인 표현으로 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