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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강기맥 보래봉 부근은 서리꽃이 만발한 설국이다
芝蓋披雲下玉京 지개가 구름 헤치고 옥경에서 내려오더니
偶從金母問長生 우연히 금모에게 장생불로를 물어보네
瑤池一夜霜華重 요지에 밤새도록 서리꽃이 짙게 내리니
臥地靑牛凍不行 누워있던 청우가 얼어서 걷지 못하는구나
―― 지봉 이수광(芝峰 李睟光, 1563~1628), 「유선사(遊仙詞)」 10수 중 제4수
주) ‘지개(芝蓋)’는 신선이 탄 수레를, ‘옥경(玉京)’은 천제(天帝)가 사는 곳을, ‘금모(金母)’는 곤륜산에 산다는
전설상의 여신(女神) 서왕모(西王母)를, ‘요지(瑤池)’는 서왕모가 사는 곤륜산에 있다는 전설상의 못을,
‘청우(靑牛)’는 신선이나 도사들이 타고 다닌다는 소를 가리킨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최병준 (역) | 2015
▶ 산행일시 : 2022년 1월 9일(일), 맑음, 미세먼지 매우 나쁨
▶ 산행인원 : 4명(자연, 하운, 메아리, 악수)
▶ 산행시간 : 8시간 34분
▶ 산행거리 : 도상 13.9km
▶ 갈 때 : 청량리역에서 KTX 열차 타고 평창으로 가서, 택시 타고 덕거리 인흥동으로 감
▶ 올 때 : 덕거리 인흥동 버스종점에서 평창시내버스 타고 장평에 와서, 저녁 먹고 시외버스 타고
동서울로 옴
▶ 구간별 시간
06 : 22 - 청량리역, 평창 가는 KTX 열차 출발
07 : 37 ~ 07 : 58 - 평창역, 아침요기
08 : 16 - 덕거리 인흥동, 산행시작
09 : 20 - 930m봉, 첫 휴식
09 : 35 - △959.3m봉, 임도
10 : 28 - 1,230.6m봉
11 : 25 - 한강기맥 1,381.2m봉
11 : 37 ~ 12 : 30 - 1,337m봉, 점심
12 : 45 - △1,341.9m봉
13 : 20 - △1,274.6m봉, Y자 능선 분기, 왼쪽은 운두령, 계방산으로 감
14 : 20 - 1.051.1m봉, 도투고탱이
14 : 43 - 995.9m봉
15 : 37 - 947.2m봉
16 : 02 - 883.2m봉, 하산
16 : 30 - 매지교 아래 도로
16 : 50 - 덕거리 인흥동 버스종점, 산행종료(17 : 00 장평 가는 시내버스 탐)
17 : 36 ~ 20 : 13 - 장평, 저녁
21 : 49 - 동서울터미널, 해산
2. 구글어스로 내려다본 산행로
집을 나서자마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약간 찜찜한 느낌이 든다. 첫 전철에 타자 불현듯 생각이
난다. 양재기를 배낭에 넣는 걸 그만 잊고 왔다. 아마 나뿐만이 아닐 거다. 산꾼들은 양재기가 얼마나 소중한 물
건인 줄을 안다. 주로 탁주잔으로 쓰는 양재기가 물 잔으로, 밥그릇으로, 국그릇으로, 커피 잔으로 등등 다양하
게 쓰인다. 앞으로는 산행준비물품의 체크리스트를 꼭꼭 살펴봐야겠다. 어쩌면 체크리스트를 살펴야한다는 사
실 자체도 잊을지 모르지만.
왕십리역에서 지평 가는 전철로 환승하여 청량리역에 내렸는데, 자연 님이 바로 앞의 열차승강장에서 부른다.
이렇게 열차승강장을 쉽게 갈 수 있는데 전에는 역사 위층으로 올라가서 탑승구를 확인하고 다시 내려오곤 했
다. 평창 가는 06시 22분발 열차는 한산하다. 차창 밖은 아직 캄캄한 밤이다. 잔다. 야장몽다(夜長夢多). 밤이 길
면 꿈이 많다고 했다. 산을 가는 중이니 꿈이랬자 산을 가는 꿈이다. 미지의 산이다. 이 또한 즐거운 일이다.
평창역. 어둑하다. 역사 고객휴게실에 들러 꼭두새벽부터 서두르느라 식사를 거르고 왔기에 싸온 군고구마로
아침요기 한다. 얼추 날이 밝았지만 미세먼지가 잔뜩 끼어 건너편 괴밭산은 물론 천지가 흐릿하다. 평창역에서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인흥동 가는 평창시내버스는 9시가 넘어서 있다고 하니 택시를 탄다. 택시는 장평, 봉평
시내를 지나고 보래동 가기 전 삼거리에서 덕거천을 거슬러 들어간다.
인흥동. 평창시내버스 종점이다. 마을 어귀에 ‘仁興洞’이라는 표지석에 인흥동의 유래가 이전에는 ‘고음동’이었
다고 한다. 국토정보플랫폼의 지명유래에 따르면 구 지명대장에 “이 부락은 절골의 어귀에 있는 부락인데 절이
있음으로서 인인(仁人)이 많이 있다 하여 인흥동으로 부름”이라 한다. Y자 갈림길 왼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몇
가구가 되지 않는 절골 마을이 있다. 절골교 건너 절골 마을로 간다. 동네 개들이 궐기하듯 짖어댄다.
한 마리가 짖어대면 담장 너머로 보이지 않는 개까지 그 소리를 듣고 합세하여 짖어댄다. 온 동네가 이리 시끄
러운데 주민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멀찍이 741.2m봉을 내린 안부께를 겨냥하고 농로를 오르다가 골짜기
의 울창한 덩굴 잡목에 막히고 왼쪽의 낙엽송 숲 사면을 박차 오른다. 길 없는 우리의 길이다. 되게 가파르다.
메아리 님이 앞서 만든 발자국계단을 오른다. 바람이 없고 날씨가 푹하여 한 피치 오름에 금세 땀난다. 껴입었
던 웃옷 벗고 덤빈다.
831.5m봉을 내린 안부까지 임도가 올라왔다. 오래된 임도다. 임도 따라 돌면 한 피치 오름은 절약할 수 있겠으
나 당연히 사양하고 직등한다. 가시덤불숲을 뚫는다. 무덤 4개가 자리한 너른 개활지가 나오고 임도와 만난다.
성묫길로 임도를 내지 않았을까 한다. 이제 한강기맥 주릉까지 줄곧 오르막이다. 주변 산릉은 수렴에 가리기도
했지만 미세먼지가 심하여 가도 가도 조망은 무망이다. 가파름이 잠시 수그러든 틈을 타서 휴식한다. 메아리 님
이 가져온 과메기 안주하여 입산주 탁주 마신다.
△959.3m봉. 삼각점은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어렵사리 맞추어보니 ‘봉평 488, 2005 복구’이다. ‘봉평’은 지형도
의 도엽명이기도 하니 231개나 되는 지형도 묶음에서 이곳의 지형도를 찾기가 쉽다. 산허리를 도는 임도와 만
난다. 곧장 능선 마루금과 이웃하여 묵은 임도가 간다. 임도 따른다. 묵은 임도에는 산딸기 가시덤불이 무성하
다. 그 따가움을 못 견디고 능선에 올라붙는데 베어낸 잡목가지를 아무렇게나 버려두어 일일이 추려 걷느라 아
주 고역이다. 땀난다.
3. 산행 초반은 낙엽송 숲속 가파른 사면을 오른다
4. 멀리 상고대 서리꽃이 보이자 발걸음이 급해진다
5. 더덕은 씨방도 우아하다
6. 상고대 서리꽃이 움트기 시작한다
7. 골짜기에 핀 서리꽃이 더 화려하기에 등로 벗어나 다가가기도 한다
8. 상고대 서리꽃
9. 상고대 서리꽃
10. 휴식, ‘바람 안 불어 좋은 날’이다.
11. 고도를 높일수록 등로 주변은 화려하다
12. 두고 가는 경치가 아쉽다
13. 철쭉나무에 핀 서리꽃
이래서일까? 한강기맥 주릉에 다다를 때까지 산행표지기 한 장 보지 못했다. 자칫 엎어지기라도 하면 베어낸
잡목의 그루터기가 날카로운 창끝이라 크게 다칠 염려가 있어 걸음걸음이 무척 조심스럽다. 멀리 공제선은 상
고대 서리꽃이 만발하여 자연 발걸음이 급해진다. 고도 1,000m를 넘자 서리꽃은 움트기 시작한다. 오른쪽 골짜
기에는 서리꽃이 무더기로 핀 것으로 보이기에 가파른 생사면 지쳐 애써 다가가면 다시 저 멀리가 그곳이다.
신기루다.
1,230.6m봉. 잡목 벌목지대도 지났고 부드러운 산길이다. 더러 깊은 눈은 바람이 쓸어 한데 모아놓기도 했지만
설원이 이어진다. 눈길을 간다. 눈 온 뒤로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이다. 메아리 님 한 사람의 발자국으로 간다.
서산대사 경구를 상기한다. 눈 덮인 들판 길을 갈 때/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말라(踏雪野中去/不須胡亂行). 고개
들면 서리꽃은 더욱 장관이고 고도를 높일수록 점입가경이다. 본의 아니게 나뭇가지 건드려 목덜미가 서늘하게
우수수 꽃비를 맞기도 한다.
1,381.2m봉. 한강기맥의 주릉이다. 한강기맥은 오대산 두로봉에서 시작하여 양평군 양수리 한강 합류점에서 맥
(脈)을 놓는 166.9km에 달하는 산줄기다. (박성태의 신산경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남한의 6개 기맥 중 가장 길
다. 계방산을 넘고 여기 1,381.2m봉을 지나 보래봉, 회령봉, 흥정산 구간이 한강기맥의 중추가 아닐까 한다. 눈
이 깊다. 발목을 덮는다. 여기서부터 한강기맥을 벗어나는 △1,274.6m봉까지 1.8km가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다.
설국, 그 원로(園路)를 간다. 미세먼지가 차츰 걷히기 시작하여 파란 하늘을 우러르면 온몸으로 핀 서리꽃은 비
할 데 없는 산상가화다. 등로 주변의 일목일초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일제히 소담스런 서리꽃을 피웠다. 능선은
부드러워 눈길 스르르 지치며 내렸다가 그 반동으로 오르곤 한다. 진퇴양난이다. 두고 가는 경치가 차마 아깝고
저 앞의 경치는 또 어떠할지 조급히 궁금하다.
홀로 산꾼을 만난다. 건장한 청년이다. 모닥불을 쬐며 휴식하고 있다. 우리를 보더니 흠칫 놀란다. 한겨울 이 깊
은 산중에 등산객이 자기 말고 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 또한 그와 똑같은 이유로
놀랬다. 그는 비박으로 한강기맥 종주 중이라고 하며 이틀은 더 산중에서 지내야 할 것이라고 한다. 대단한 산
꾼이다. 한편 그가 부럽다. 그는 김삿갓이 금강산에서 공허 스님과 주고받았다는 시구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月白雪白天地白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천지가 온통 흰데
山深夜深客愁深 산은 깊고 밤도 깊고 나그네 시름도 깊다
다음 봉우리에서 양광 가득한 설원에서 점심자리 편다. 비닐쉘터를 친다. 겨울 산행은 이 맛이다. 눈보라니 칼
바람이 몰아치면 더욱 좋겠다. 둥그렇게 한껏 부푼 비닐쉘터 안은 훈훈한 봄날이다. 버너 불 피우고 김이 금방
꽉 찬다. 자주 쉘터를 걷어 올려 김을 빼낸다. 버너는 모닥불 다름이 아니다. 일찍이 오오시마 료오끼치(大島亮
吉, 1899~1927)는 이런 즐거움을 알았다. 그의 『山, 硏究와 隨想』의 몇 줄만 읽어 보아도 알 수 있다.
“모닥불의 즐거움, 그것은 도시에서 찾아온 사람 아니고서는 느끼지 못한다.
혼자 산을 가는 자에게 모닥불은 말 없어도 명랑한 친구다. 마음이 쓸쓸할 때 불을 지피고 그 밝고 즐거운 얼굴
을 바라보라.”
14. 나뭇가지를 건들기라도 하면 서리꽃이 우수수 떨어진다
15. 잠시 서성이고
16. 점입가경이다
17. 한강기맥 주릉이 가깝다
18. 한강기맥 주릉은 설국이다
19. 한강기맥 주릉 북사면
20. 건너편 산릉은 서리꽃이 흐드러졌다
21.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22. 설국의 원로
23. 비닐 쉘터, 칼바람이 분다 해도 좋았다
24. 설국의 화원
홀로 산꾼의 족적을 역으로 밟고 간다. 그도 특히 설경이 멋진 곳은 등로를 벗어나 꼬박 들르곤 했다.
△1,341.9m봉의 삼각점은 깊은 눈 속에 묻혔을 것이라 그냥 간다. 햇볕이 들자 서리꽃은 가뭇없이 지고 만다.
△1,274.6m봉. Y자 능선이 분기한다. 한강기맥 주릉인 왼쪽은 운두령으로 가고 우리는 오른쪽 그 지능선을 간
다. 설국을 나와 쭉쭉 내린다. 키 작은 산죽지대에 들어선다. 좌우사면 아무리 살펴도 푸른 사막이다.
1,051.1m봉. 긴 내리막이 잠시 멈칫한다. 이제는 눈 대신 낙엽을 지쳐 내린다. 넙데데한 안부는 도투고탱이다.
도투고탱이가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도투는 돼지의 방언이라고도 하니 고탱이는 골짜기를 뜻할 것
같고, 혹시 멧돼지들이 넘다드는 골짜기라는 뜻이 아닐까 내 멋대로 추측한다. 지난 가을에 킬문 님이 이곳을
왔지만 덕순이를 도통 볼 수 없었다고 하여 과연 그러한지 좌우 사면에 들어 수소문했으나 우리 역시 찾을 수
가 없다.
오전에 한강기맥 1,381.2m봉의 남릉을 오를 때는 오르내리는 봉이 없이 그저 오르기만 했기로 한강기맥
△1,274.6m봉을 내리는 능선 또한 그와 같지 않을까 느긋했는데, 사정이 딴판으로 다르다. 굴곡이 심한 봉봉을
오르내리고 능선 마루금(봉평면과 용평면의 면계)을 꼭 붙들기도 쉽지 않다. 995.9m봉을 내리던 중 오른쪽 지
능선으로 뚝 떨어지다가(효자뻑이었다. 자연 님과 하운 님은 아예 그 길로 매지폭포 쪽으로 내려갔다) 방향착오
를 깨닫고 뒤돌아 오른다.
이다음 봉우리인 947.2m봉에서도 지도에 눈 떼면 가야 할 능선을 놓치기 쉽다. 잘난 왼쪽 능선의 유혹을 뿌리
치고 못난 오른쪽 사면을 치고 내려야 한다. 이 길이 초행이 아니지만 계절을 달리 하니 다른 산이다. 883.2m봉
에서 하산한다. 넘어야 준봉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지만 그만 끊는 것도 용기다. 서진한다. 가시덤불 섞인 잡
목 숲을 뚫는다. 주춤주춤 내리고 좌우사면 아래로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임도가 보인다.
얼마 안 가서 맞닥뜨리게 될 임도와 그 절개지를 생각한다. 절벽일지도 모를 일. 미리 야트막한 안부께에서 사
면을 치고 내리기로 한다. 오른쪽은 설사면이라 눈 녹은 왼쪽 사면을 더듬는다. 가팔라 잡목 붙들어 내린다. 임
도로 내리고 보니 우리의 판단이 현명했다. 가면 갈수록 절개지는 깊은 절벽이었다. 산모퉁이로 돌아와서 다시
능선 잡는다. 이제 그리 어려운 데는 없다. 덤불숲 헤쳐 도로에 내려선다.
인흥동 가는 길. 어느덧 해거름이다. 산골 드문드문한 민가에는 흰 연기가 따스하게 피어오른다. 오늘도 교통운
이 좋았다. 인흥동 버스종점에 도착하여 무사산행을 자축하는 하이파이브 나누고 배낭정리를 마치자 장평 가는
평창시내버스가 들어온다. 마치 우리를 태우러 오는 것처럼.
25. 한강기맥 주릉은 눈이 발목을 덮는다
26. 서리꽃이 마치 이팝나무 꽃 같기도 하다
27. 서리꽃이 마치 이팝나무 꽃 같기도 하다
28. 한강기맥 주릉 북사면은 눈이 깊다
29. 화창으로 보이는 능선은 운두령으로 간다
30. 햇볕이 들자 서리꽃은 꽃비로 떨어진다
31. 도투고탱이
32. 우리가 지나온 한강기맥 주릉
33. 멀리 산릉이 우리가 지나온 한강기맥 주릉
34. 인흥동 가는 길
35. 인흥동 주변의 산릉
첫댓글 메대장님 과메기가 그립군요. 아름다운 설경입니다. 산행기를 읽는 내내 서리꽃이 살에 스치는 듯 가벼운 몸서리가 쳐지고 눈 밟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리는 듯합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산은 아무래도 높아야 볼 거리가 있더군요.^^
금년 겨울 들어 처음으로 설산을 갔습니다.
설경이 근사합니다...
짧았지만 오랜만에 눈 맛 좀 보았습니다.^^
겨울 오지로 눈꽃비 맞는 산행이었네요. 눈을 밟고 싶어지는 산행기 입니다. 큰 눈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