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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는 것은(2)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요 17:11-16 / 이필재 목사
오늘이 주일로써는 사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로서 성찬 예식이 준비되어 있고 그 다음 주일이 부활주일이 됩니다. 오늘 말씀의 선언은 본문에 아주 확실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도다.” 11절에 이렇게 말씀하셨고, 13절에는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라고 하심으로 지상의 삶을 마감하시는 사순절의 계기가 됩니다. 주님의 33년 동안 지상에서의 생애를 한번 결산해 보면, 영원의 세계에 계시다가 지상의 시간 속에 오셨습니다. 시간 속에 제한된 삶을 사시다가 영원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초월적 세계입니다. 이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의 초월입니다. 영원의 세계에서 인간의 시간 속으로 오셔서 33년이라고 하는 제한된 시간을 사시다가 시간이 필요 없는 영원의 세계로 다시 가신 것이라고 결론할 수가 있고, 또 하나는 영의 세계에서 사시다가 물질세계로 오셨습니다. 물질세계에서 다시 영의 세계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을 그렇게 말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그 보는 것을 영인가 하더라.” 이렇게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 우리 육신은 물질입니다. 예수님의 몸도 육신은 물질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이 물질입니다. 예수님은 영의 세계에 영적 존재로만 계시다가 물질세계에 물질로 입으시고 오셨다가 다시 영의 세계로 가신 결과입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본래의 자리로 다시 되돌아가심을 선언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큰 희망을 선언하시는 것으로서 영적 의미가 나타나는 말씀이 됩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주는 신선한 영적 충격을 사순절 마지막 주일 말씀으로 기억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는 이제 이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고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그 첫번째 의미가 하나님과의 동질성 회복을 뜻합니다. 우리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절대적 교리가 삼위일체라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의 삼위는 본래부터가 일체라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떤 의미인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본래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본래 모습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동질성 문제를 논할 때, 회복을 논할 때 가장 확실한 근거는 창조론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2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최대의 중요한 조건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동질성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형상을 만들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축복을 받고 세상에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본질이 이 죄라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동질성이 파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질된 모습으로 되어버렸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이 권세를 예수가 대신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부여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물질적 존재 속에 살고 있는 이 때는 완전 회복이 안 됩니다. 아버지께로 갈 때에 완전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증거를 몇 군데 우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하나님나라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 말은 하나님 백성의 완전한 동질성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의 완전한 회복이 그때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동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뜨린 것입니다. 이 죄인 된 인간이 완전한 회복이 되어서 하나님 형상의 동질성이 도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1절에 보면 거기도 똑같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함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홀연히 변화할 것이다.” 변화된 인간,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완전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인간적 존재! 데살로니가 4장 16절에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과 항상 함께 있을 수 있는 완전히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인간의 모습이 약속되어지고 있습니다. 그 자체를 종말적 권위라고 그럽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에 “이제 내가 먼저 그렇게 되기 위해 아버지 곁으로 가오니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할 것이다.” “33년 동안 인간의 시간 속에 육신이라는 물질을 입으시고 나타나셨던 성자 하나님이 이제 시간과 물질을 벗어나서 변화되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나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끔 교인들께서 상식적 생각의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천국 가서 우리가 다 만나죠?” “만나죠.” “그럼, 나도 목사님을 알아보고 목사님도 나를 알아볼 수 있겠네요?” “그렇겠죠. 왜 알아보는 게 싫은가?” “그러면 몇 살 때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그거 궁금하잖아요? 예를 들면 말이에요, 이런 궁금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남편이 20대에 죽었단 말이에요. 나는 80이 넘도록 살았단 말이에요. 그럼, 천국간 남편은 20세로 있고 나는 80세에 만나니 이거 말아볼 수가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는 거예요. 상식적이에요. 상식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또, “우리 아버지는 20대 후반에 죽었는데 나는 90까지 살았으니 아니, 천국가면 아들이 90이요 아버지는 28살이니 이것 어떻게 됩니까?” 이게 상식으로는 맞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런 모순이 생길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성경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홀연히 변화하리니” 나도 몇 살 때 만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권능 속에서 모두가 다 홀연히 변화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아마도 가장 좋은 모습으로 볼 수가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실제로 요즘에는 하나님이 혼란하시답니다. 왜냐하면 성형수술을 하도 많이 해서 이 사람이 그 사람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어서…….
두번째 오늘 말씀의 의미는 세계관이 새로워집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걱정이 나타나고 있죠? “나는 아버지께로 가는데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두 가지의 세계관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이 세상 가운데 있지만 세상 가운데 있지 아니한 다른 세계관! 우리를 가리켜서 한국 시민 아닙니까? 바울 선생이 말한 또 하나의 시민권이 어디 있다고요? 하늘나라에! 두 시민권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 같이 저희도 나와 하나가 되게 하사 내가 가진 하나님 나라의 권리를 똑같이 갖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다인종 문화권으로 변해갑니다. 다른 나라들은 이런 사회적 환경이 오래 전에 이루어 졌습니다. 가장 이것이 잘 이루어진 나라가 미국이라서 나라 이름이 “United States of American” 즉, 다 합쳐졌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자 하는 다른 인종이 첫번째 가져야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법적 지위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여기서 살 수가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강제 추방의 문제는 사회 문제로 나옵니다. 어느 나라나 똑같습니다. 법적 지위를 얻어야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 세계관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은 확실한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라는 절대의 고난마저도 초월할 수 있는 역사관을 밝혀주는 계시의 세계관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
‘토인비 박사의 역사관’의 골자 “Adversity Theory” 라고 하는 역사관의 골자는 “문명과 문화는 역경의 소산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Universal Church의 개념이 필요하다.” 이런 말을 했는데 그가 말한 “Universal Church”의 개념이란? 이 세상은 위대한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종교가 있을 때 그 위대한 종교가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이것이 토인비 박사의 역사관입니다. 그러면 위대한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 있는 종교가 위대한 종교이다. 이 세상을 넘어서 다가오는 초월적인 세계관에 대한 역사성을 믿으며 그 방향을 희망적으로 인류에게 제시하는 종교! 이것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맞습니다. 히브리서를 보세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장래 기업을 바라보며 나갔으며”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잖아요? 어디로 가라는 것인지, 뭐가 준비되어 있는지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약속의 장래 기업을 바라보며 갔으며 “노아는 인류 구원을 위해 누구도 믿지 않는 방주를 믿음을 가지고 예비하였으며”, 이사야 11장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주 험악한 세상에서 장래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희망의 도전을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이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세계의 평화에 대해서 이런 말로 예언을 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 마침내는 인간이 소유하게 될 새 땅에 대한 열정의 집념,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그 세계로 지금 가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에 대해서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첫번째 성경 창세기를 알파로 보시고, 마지막 성경 요한계시록을 오메가로 비교해 보면, 창세기에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나타나죠? 거기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오메가는 그것이 다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오게 됩니다.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3장에 보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고 지켰어요. 요한계시록 22장에는 열어줘요. “먹으라!”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창세기에는 죄와 슬픔 고통이 시작되는데 요한계시록에 와서는 그런 것이 다시는 없습니다.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창세기에 인간의 첫번째 사망이 찾아왔어요. 요한계시록 21장에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창세기에는 첫 사람 아담의 통치가 나타나고 “네가 이것을 다 다스리라!” 요한계시록은 둘째 아담 예수그리스도의 통치! 창세기 11장에 가면 반역의 상징 바벨탑 사건이 나타나는데, 요한계시록 18장에는 바벨의 역사, 마지막 멸망이 나타납니다. 창세기에 사탄이 등장하여 하나님 역사를 반역하는데, 요한계시록에는 사탄 활동의 종결로 영원한 무저갱에 들어갑니다. 창세기에는 만물의 시작인데 요한계시록에는 만물의 종말!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의 시작과 끝이라.” 예수 그리스도! 인간 세상 삶에 가장 고난스러운 일이 눈물이요, 애통이요, 곡하는 것이요, 아픈 것, 사망에의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세계의 모습에 대한 계시록의 증언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새로운 세계관! 그래야 예수를 믿는 것이지 그래야 하나님이지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지……. 현실 세계와 정반대의 세계관의 역사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지금 그 세계를 가오니 아버지와 함께 있을 곳이라. 너희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모두가 그렇게 될 것을 기억시키고 있습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서구 사회가 20세기 후반에 와서 교회가 텅텅 비우는 불행한 일이 생겼죠? GNP 만 불이 되면서부터 교인이 늘지 않았어요. GNP 2만 불이 되니까 문 닫는 교회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교회가 관광지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국도 똑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이냐? 역사의 순환(cycle)이 있어요. 저는 기도의 제목이 “21세기에 세계 교회가 다시 부흥되게 하시고 그 역할의 중간 매개체 역할을 우리 한국 교회가 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기도의 제목입니다. 되리라고 보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해 내려가잖아요? 바닥을 쳤어요. 그때는 다시 돌아와요.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끝없이 끝없이 추락해서 더 내려갈 곳이 없을 때까지 20세기에 내려갔어요. 보다 나은 인간 삶이 무엇인가? 이제 더 내려갈 데가 없지 않느냐? 그때는 영적 회복이 이루어져 다시 올라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21세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마 미국에서 농구선수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던 매직 존슨(Magic Johnson)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에이즈에 걸렸다는 뉴스가 나가니까 미국의 고등학생, 대학생이 저희 아버지가 죽은 것보다 더 슬퍼했어요. 그 일을 놓고 얼마나 관심이 집중되었는지 ‘아! 이것은 미국 젊은이들의 영적 각성이 눈을 뜨는 분위기가 조성된 사건이다!’ 교회는 그렇게 바라보게 되었죠? LA 레이커스 농구팀을 미국 최고의 팀으로 발전시킨 코치 pat rally씨가 미국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친애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선물해 준 매직 존슨을 위해서 우리가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가 있습니다. 매직을 기억하시는 모든 분들은 제 의견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뭐, 돈을 걷나? 어쩔 건가?’ 모두 추리를 했어요. 마지막 결론은 “하나님께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미국 젊은이들은 그 소리를 안들은 젊은이들이 없었고, 그 농구팀 선수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소문이 난 A.C. Green이 다른 팀과 농구경기 직전에 혼자 일어나서 농구장 중앙에 나갔어요. 마이크를 잡고 5만 명의 관중을 향해 말했습니다. “스포츠를 사랑하시고 매직을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항상 이 자리에서 매직 존슨의 경기를 행복감 넘치게 관전하셨습니다. 이 시간 그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제가 기도할 테니 동참하실 분은 다같이 기도해 주십시오.” 5만 명의 통성 기도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가 부흥회가 되었습니다. 기도 안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토크쇼의 사회자가 되어 미국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앤소니오 홀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존슨을 TV 초대석으로 불러내어서 전 미국에 방영했습니다. “나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나도 소원이 있다면 내가 목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나는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매직 존슨을 위해서 이 방송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기도의 열풍이 일어났어요. 존슨을 위해서! 그는 아직 건강하게 살아있어요. “농구를 하도 마술스럽게 잘해서 매직이라는 본명이 아닌 아명이 그의 이름이 되었는데, 이 사람은 미국 사회에 또 하나의 매직, 즉 영적 각성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게 논평을 했어요. 로버트 쉴러가 뇌수술을 받는 날은 부시 대통령도 국민들에게 “나도 그를 위해서 특별기도 시간을 갖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러한 영적 지도자가 미국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미국의 손실입니다.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로버트 쉴러 목사는 지금 건강하게 목회 잘하고 계세요.
인간은 어느 지점에 가면 반드시 그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귀소 본능화됩니다. 왜 그러냐? 본래 그렇게 지음을 받았으니까…….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이 흑인영가는 왜 그렇게 유명한 노래가 되었는가?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는 감정에 대한 호소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곳에 가보고 싶으니까……. North Carolina 키넌 연구소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미국의 흑인들이 돌아갈 고향을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 땅에 와서 첫번째 정착해서 살았던 남부지방으로 대거 이동하고 있다. 75년에서 79년까지 41만6천명, 84년에서 85년까지 92만 2천명, 85년에서 89년까지 35만 5천명! 왜 남부지방으로 흑인들이 대거 이동하는가? 귀소본능이다.” 물고기들도 마지막에 부화된 곳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잖아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도무지 해결이 되지 아니할 때 공원에 가서 하루 종일 고심을 하고 있을 때 그 공원을 지키는 문지기가 이제 공원 문을 닫고 자기도 퇴근해야 되는데 저 사람이 안 나가고 있거든요? 한 사람이 안 나가서 퇴근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게 참을 수 없어서 가서 말했어요. “여보시오. 당신 어디로 갈 것인지 빨리 가시오. 나 퇴근 시간이란 말이오.” “네, 내가 갈 곳이 어느 곳인지 몰라서 이러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될까요?”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갈 곳이 분명하죠?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세상에서도 우리가 행복한 감정을 가질 때는 언제입니까? 오라는 데가 있을 때입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갈 곳이 준비된 사람!
마지막 예화 하나 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모리슨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가서 20년 동안 선교활동을 했어요. 희생적인 미국이 알아주는 아프리카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가정생활은 매우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이 그만 아프리카 풍토병에 견디지 못하고 죽었어요. 그 충격을 견딜 수 없어 엄마도 죽었어요. 혼자 남게 됩니다. 그러나 약속한 20년의 선교 사역은 훌륭하게 잘 끝내고 고향인 뉴욕으로 돌아가는 날, 그 돌아가는 배는 미국 선교사이기 때문에 혜택이 하나 주어졌어요.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루즈벨트가 2주간의 휴가를 가지고 아프리카에 가서 사냥을 즐기고 돌아가는 배였기 때문에 그 배를 태워준 것입니다. “아, 선교 활동하느라 수고했소.” 그래서 태워준 거예요. 대통령과 함께 뉴욕에 도착했는데, 대통령이 돌아오니까 뉴욕에서 군악대가 연주를 하지요, 예포가 울리지요, 뉴욕 시민들이 손에 손에 성조기를 들고 환영을 하지요, 고층 빌딩에서 막 색종이가 날리고 건강하게 돌아오는 대통령을 환영하고 뉴욕 시장이 와서 환영사를 하고, 내리는 길에 융단을 깔고 그 야단을 치잖아요? 모리슨 선교사는 상대적 슬픔이 생겼어요. 2주일 사냥을 즐기고 돌아오는 사람은 저렇게 큰 환영을 받고, 세 가족마저 잃어가면서 20년 그 땅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고 돌아온 나를 맞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대해서 너무 상대적 슬픔이 와서 참을 수가 없어 배에서 내려 모텔을 하나 얻어 들어가서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막 울었어요. 가족들을 다 잃은 그 선교사를 누가 맞이해 줄 것입니까? 한참 울고 있는 모리슨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 아들 모리슨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네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 내 나라의 천군 천사들의 음악으로 너를 환영할 것이다. 네 두 아들과 아내가 마중을 나갈 것이다. 너에 대한 환영 연설은 내가 할 것이다. 네가 걸어 들어올 길은 융단이 아니라 황금길이 될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모리슨은 아프리카로 다시 떠났어요.
주님과 같이 우리 모두 맡은 사역을 끝내고 주님과 같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를 생각하며 신앙생활 즉, 사순절을 지내시고 본향의 땅에서 주님이 내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때 내 귀에 들려주실 말씀 “내가 이제 생명수 샘물을 네게 주리니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이 땅에서 영원히 내 아들이 되리라.” 이 믿음의 승리가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 일치의 근거와 목적
오정호 목사
최근 야당을 향한 국무총리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인해 여야(與野)가 대치정국에 빠져 있습니다. 부부끼리라도 옛일을 자꾸 들추어내면 부부관계가 깨어집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게 하려면 적어도 여야가 적대적인 관계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청와대와 여당에서 앞장서서 화합의 지도력(leadership)을 펼쳐 서로를 하나 되게 만들어야 됩니다.
정치권의 분열이 가슴 아픈 것처럼 교회의 분열은 사회악(社會惡)입니다. 한국교회는 처음에 출발을 하나님의 은혜중에 너무 잘했다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갈등과 분열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교리적 논쟁 때문에 분열되는 것은 진리에 관한 문제이기에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정치 사회적인 대처 방법, 지역주의, 문화 언어적 요인 때문에 분열되는 경우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가리워 진다면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를 향해서 일치와 연합을 요구할수도 부르짖을 수도 없습니다.
Ⅰ. 교회일치를 위한 우리의 사명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먼저 사회의 빛이 되어서 연합과 일치(unity)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교회일치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일은 무엇입니까?
1. 우리는 교회분열의 역사와 상처를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가 언제나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물과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그러한 잘못과 허물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할 때 치유가 가능합니다. 교회의 분열도 그것을 인정할 때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병자가 자기를 인정치 않고서는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교회분열이 정치 사회적 문제, 교리적 차이, 지역적 갈등 때문에 한국교회가 과거에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태도가 반듯할 때 비로소 주님의 치료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 마음속에 교회분열의 역사와 상처에 대한 편견과 아집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2. 우리는 교회일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11절b).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절b). 예수님께서는 교회일치를 소망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물론 교회가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순복음교회 등 여러 교단으로 나누어졌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간 우월의식이나 열등의식 같은 갈등은 없어야 됩니다. 교단은 다를 수 있으나 민족을 하나님 품으로 이끄는 복음화 운동에 있어서 조화롭게 일치와 연합을 이룬다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Ⅱ. 교회일치의 근거와 목적
권력집단은 권력의 속성에 의해서 서로 연합합니다. 경제집단은 돈을 벌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경제적인 이익에 의해서 하나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교회일치를 이루어야 합니까?
1. 주님께서 교회일치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21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
주님께서는 교회의 대표로서 이 땅에 남겨 두신 주의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일치와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적이고 핵심적인 교리적인 일치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교파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 교회일치를 통해 주님의 복음을 세상에 담대하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1절b).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b). 교회가 연합되고 일치 되어야 이 세상가운데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복음사역이 효과적으로 열매 맺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자체의 유익보다는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의 영광을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22).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것은 복음의 영광입니다. 복음의 영광의 결과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만 하나님의 자녀로 만족하지 맙시다. 교회밖에 있는 분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복음을 듣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도웁시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도전과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를 가리켜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희망’(the only hope of the world)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희망의 불꽃을 꺼뜨린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달려나올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진리를 가진 교회가 세상의 사이비 집단이나 이단들과 또 다른 면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교회의 일치와 탁월한 윤리성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런 일에서 좋은 열매를 맺으면서 이단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고, 우리보다 더 연약한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가진 것을 공유해야 합니다.
Ⅲ. 교회일치를 위한 구현방법
우리가 분열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일치를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교회일치를 어떻게 구현해 나가야 합니까?
1. 먼저 가정에서 일치를 구현해야 합니다.
부부(夫婦)간, 부자(父子)간 갈등을 가지고 교회일치를 부르짖을 수 없습니다. 일치는 먼저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참된 효도는 부모님 살아생전에 형제와 연합하고 화합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녀들끼리 서로 화합하고 비록 많은 물질이 없다할지라도 서로 격려하고 도와줄 때 부모는 기뻐하십니다.
2. 교회 안에서 일치를 구현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파(敎派)간 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장로교회의 위대한 신앙유산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장로교회의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말씀을 받을 때 양자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영적인 일치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 축복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 모두 교파주의를 뛰어넘어서 하나로 뭉치고 연합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3. 우리의 생각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많은 동료들이 다른 교회를 다니거나 생각이 다르다고 그들을 폄하(貶下)해서는 안됩니다. 직장 복음화를 위해서 우리가 함께 주의 귀한 일을 이룬다면 하나님께서 직장에서 우리를 한 알의 밀알로 삼아 하나님의 귀하신 뜻을 온전히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교회분열은 교회의 힘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을 맞아 우리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새로운 자각해야 합니다.
과거 우리 한국교회가 경험했던 갈등과 분열의 역사와 상처들을 주님 앞에 인정하고, 한국교회의 일치를 소망하면서 이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시다. 교회일치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세상의 유일한 희망인 교회가 서로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 효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복음의 영광을 회복합시다.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가정과 교회 안에서부터 일치를 이루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으로 다듬어지고 세워져서 대전광역시의 연합과 나아가서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기여하는 교회로 쓰임 받읍시다.
대전광역시에 소재한 모든 교회와 복음의 열정을 모읍시다.
주님의 관심과 우리의 관심이 일치되어 형제우애의 영광을 누리며 삽시다.
세상이 감동 받는 교회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세워갑시다.
세상에 파송된 우리
요 17:13-19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전파사역을 다 마치시고 이제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마지막 기도의 일부분입니다. 이 본문 속에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그의 제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과 그가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간구한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마지막 절 바로 뒤에 오는 20절을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내용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과 그가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를 위하여 해주시기를 간구한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누구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 먼저 14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16절에서도 반복됩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 다음 18절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에 파송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해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까?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을 충만히 가지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또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곧, 우리를 사탄의 유혹과 죄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이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에 파송된 사람들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을 충만히 가지게 해주시고 우리를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주시며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셨다는 사실의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사고와 행동과 삶의 기준이 다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파송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며 이 세상에 파송된 사람들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는 어떤 사명이 주어져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로 되돌아오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을 충만히 가지게 해주시기를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이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누릴 기쁨도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의 미움과 적대감에 맞서면 맞설수록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기쁨 속으로 더 확실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신 기쁨이고, 그 뜻을 다 이루신 기쁨이었으며, 이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시고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을 얻으신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시고 그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주시기를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 그의 제자들을 같이 데리고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떠나실 때 제자들에 대한 염려를 하셨지만 그렇다고 그들도 다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따라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나라 일을 위해 그들을 이 세상에 남겨두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워낙 악하기에 그 악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15절에서 보듯이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승리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에게서 떨어져버리도록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하나님에게로 얻는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수도원이나 기도원에 은거하여 하나님에 대한 순전히 개인적인 지적 탐구나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로 만족하는 것은 제자들이 나아갈 길이 아님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를 잊어버리려 하거나 도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려는 것이 교회의 도리임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이 세상 안에서 사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의 임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탄과 이 세상 악에게 넘어가지 않는 것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주시기를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하셨다. "거룩하다"는 말은 본래 "다르다", "분리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외의 모든 존재와 전적으로 다르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다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우리들도 이 세상과 다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등돌린 죄된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다시 등을 돌려 하나님 편으로 전적으로 속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아들께, 그리고 아버지께 속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보다 조금 앞서는 6절에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라고 하신 것이나, 9절에서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하신 것이나, 본문 16절에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은 모두 그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이 세상과 다르고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이들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함을 이루고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과 진리 그 자체이셨던 주님 자신이 이제 그의 제자들을 남기고 떠나야 하셨고 또 우리를 떠나 아버지 우편에 계시므로 그 대신 말씀으로 그들을 계속 거룩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신 것입니다. 본문 17절에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또 앞서 14절에서도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또한 15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 세상과 다르게 만드는 최선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으며, 그 말씀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이 세상과 달라야 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받는 미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래 "다르다", "분리되다"라는 뜻으로 "거룩하다"는 말은 그 안에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품고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특별한 임무를 위해서 따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실 때에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도 말씀하시며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 한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지라"(출28:41)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과 다르게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임무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르다", "분리되다"라는 뜻으로 "거룩하다"는 말이 품고있는 두 번째 의미는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 필요한 성품이나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거룩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했거니와 그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하나님의 백성됨과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가장 큰 표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행함이 없이는 거룩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께 속한 백성들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처럼 세상적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에 파송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파송된 사람은 파송된 사람답게, 그리고 파송되며 받은 사명에 일치한 삶의 모습을 지켜야 합니다. 이 세상에 파송된 사람이 이 세상과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파송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로서 이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거나 이 세상의 즐거움에 취해있으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탄에게 wu서 이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되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진리로 거룩하여지기를 간절히 구하고 계십니다. 아버지의 우편에서 끊임없이 간구하시는 아들의 소원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천국복음전파사역을 다 마치신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시작하시기 직전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16:33의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다 이기신 세상, 다시 말하면 주님에 의해 이미 완패한 이 세상을 겁낼 것도 탐낼 것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새문안의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에 파송된 우리답게 말씀으로 거룩하여지고, 주님의 기쁨을 누리며, 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이 되라
요 17:13-22 / 김태환 목사
인터넷 사이트 중에 「어머님 전상서」라는 사이트(www.episode9.com)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병든 어머니를 위하여 그의 아들이 만든 사이트입니다. 아들이 고통스럽게 암과 투쟁하는 자기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기 위해 만든 사이트라고 합니다. 이런 아들의 효성(孝誠)과 가족들의 지성(至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쟁한지 205일만에, 2003년 5월5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고 합니다. 아들 역시 어머니의 권유와 병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려고 교회를 열심히 나가기 시작한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이 사이트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이 사이트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자식들의 글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글은 이 아들이 어머니 돌아가신 지 약 보름이 지난 후에「어머니께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입니다. “10시 30분 늦게 퇴근을 하고 집으로 향하던 중 소주 한 병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보고 싶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터벅터벅 걸어 왔습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이 한적한지라 "엄마…… 엄마……"를 목놓아 부르며 걸어왔답니다. 저녁 늦게 혼자 퇴근하는 길…… 한적한 골목길을 홀로 걸어 올 때가 엄마가 제일 보고 싶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은 일도 열심히 하면서 엄마를 그리워하니까요……
오늘은 왠지 엄마에게 존대 말을 하고 싶네요…… 어리광만 부리던 이 아들……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네요…… 하루에 수 십 번씩 이 사이트에 접속을 한답니다. 이곳에 오면 엄마하고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좋아요. 엄마 사진 보고 있으면 엄마가 꼭 살아있는 것 같아……엄마 기억나죠? 엄마 돌아가시기 전 내가 엄마한테 마지막으로 했던 말……엄마 사랑한다고……왜 예전엔 자주하지 못했을까…… 뭐가 부끄러워서 그러지 못했을까…… 마지막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 엄마도 기억하고 있죠? 엄마는 비록 말할 힘도 없어 대답하지 않았지만…… 엄마 또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엄마 너무 보고 싶습니다.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면…… 단 한번만이라도......(2002년 5월 21일)
그리고 그 사이트에 둘째 딸 미선씨가 어머니께 올린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오늘 친정에 왔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빈집에 열쇠를 열고 처음으로 들어 왔습니다. 저희 집에서 나설 때부터 두려웠습니다. 그것은 항상 나를……아니 우리 예현이를 반겨 준 엄마가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예현이는 들어서면서 이모를 부릅니다. 예전에는 할머니를 부르면서 들어오더니... 나는 그 말에 서러워 울었습니다. 우는 나를 보고 예현이도 따라 웁니다. 할머니 보고 싶어서 운다는 나의 말에, 예현이도 보고 싶다고 합니다. 예현이가 하는 말이 이제 할머니를 볼 수 없다고,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언젠가 내가 한 말을 기억했나 봅니다. 생전에 그렇게 예뻐하던 손녀가 어린 나이인데도 모든 상황을 잘 이해합니다.
할머니는 하늘나라 천국에 갔다고 ......
엄마…… 엄마가 계속 누워서 자질 못하고 앉아서 밤을 세워서, 저는 이렇게 기도했어요. 누워서 편히 잘 수 있게 해달라고... 앉아서 엎드려 자지 말고 몇 시간이라도 누워서 잘 수 있게 해달라고……그 기도를 하고 하루가 되지 못해 엄마는 편히 쉴 곳을 찾아 영원히 가셨지요. 편히 쉴 곳이 하늘나라 밖에 없었나 봅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제가 집으로 가면서 내일 오겠다고 하니까 알겠다고, 어서 가라고 하시고 선, 전 당신의 임종도 못 봤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가시다니…… 한마디 말씀도……없었지요.
엄마…… 왜 생전엔 몰랐을까요. 엄마의 빈자리가 이렇게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다는 것을…… 예현이 아빠와 예현이가 있어 엄마가 조금이나마 안심을 하고 가셨다는 거 잘 알아요. 엄마 행복하게 잘 살께요. 엄마 나중에 천국에서 우리 꼭 만나요.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날을 소망하며 살래요. 엄마……다음에 또 소식 전할께요. 엄마……사랑해요. (2003년 5월 8일 어머니 날에)
참 이상하지요? 사람은 이렇게 어머니를 그리워하는가 봅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그리워한다는 말은 별로 많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몇 년 전에 김정현이 쓴 「아버지」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누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급할 때 얼떨결에 나오는 말이 “엄마”라는 말이라고요. “어머나(어머니)!” “에구머니(아이고, 어머니)” “어머머(엄마, 엄마)?” 이런 말들이 모두 “엄마”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우리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인가 봅니다. 여러분, 최효섭 목사님이 쓴「어머니는 누구인가?」라는 글 보신 적 있습니까? “어머니는 백과사전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질문에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해가 지면 밤새 어디에 가 있는지, 제트기가 어떻게 날아가는지 등을 척척 대답한다. / 어머니는 간호사이다. 흔들리는 이를 아프지 않게 빼 낼 줄 알며, 한 밤중에도 아픈 귀를 고칠 수 있다. / 어머니는 위대한 탐정이다. 행방불명된 양말 짝을 용케 찾아낸다. / 어머니는 애인이다. 모든 인간의 첫사랑은 엄마이다. 아이의 처음 주택은 엄마의 가슴이다. 아이의 처음 침대는 엄마의 팔이다. 아이는 엄마의 무릎에서 처음 기도를 배워 그것이 인간의 처음 예배당이 된다. / 어머니는 아이의 하나님이다. 아이가 이 우주 속에서 어머니만큼 믿는 대상은 없다. 어머니만큼 의지하는 대상도 없다. 어머니만 곁에 있으면 다른 모든 것은(아빠까지 포함해서)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눈에 안 보여도 어디 있는지 알고, 말을 안 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 어머니는 눈치 면에서 천재이다. 어머니가 칭찬하는 남자 아이라면, 딸의 boy friend 이고, 전화 벨 소리만으로, 그것이 아들의 girl friend 에게서 온 것인 줄 안다. / 모든 어머니는 십자가에 달린 순교자이다. 어머니의 인내는 치약 튜브 같다. 왜냐하면 다 쓴 것 같아도 짜면 아직 남아 있다. 어머니는 희생이란 것을 생각조차 안하고 희생한다. / 그런데 대부분의 어머니는 그의 딸이 자기 남편보다 더 나은 남편을 만나기를 바라고, 그의 아들은 안 되긴 하였지만, 아빠가 만난 여자(즉 나) 만큼 좋은 아내를 만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만한 자부심은 충분히 인정해 줄 수 있다.”
어버이 날이 되면 늘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양주동 박사가 쓴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라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 3절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엔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에 오직 한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요.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여러분, 어머니 마음 속에 있는 오직 한가지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어버이 마음 속에 있는 오직 한가지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식들이 잘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자식들 잘 되라고 살과 뼈를 깎아 바칩니다. 세상에 어머니의 사랑보다 거룩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늘 어버이 주일에 졸업예배를 같이 드려왔습니다. 그 이유는 졸업하는 사람들이 부모님 은혜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에 우리교회에서 졸업하는 사람들이 무려 38명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가고,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엘 가고, 또 박사 학위를 받고, 이 사람들이 여기까지 온 것이 따지고 보면 자기가 똑똑하고 잘나서가 아닙니다. 모두가 부모님 덕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덕분입니다.
부모님께 효도(孝道)하고,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길은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잘 되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한가지 소원이 여러분이 잘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잘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잘 되는 성공(成功)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졸업하는 여러분들에게 성경 말씀을 빌어서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은 흔히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합니다. 본래 제사장이라는 말은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직분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주시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또 한가지, 본문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이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 속에 사랑하는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 놓고 가는 절박(切迫)한 예수님의 심정이 잘 나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그가 가지고 있는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13절).
예수님의 기쁨은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졸업하고 학위를 받는 여러분들에게도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어렵게 하는 졸업일수록 기쁨이 더할 것입니다. 수백만 불짜리 복권(福券)에 당첨된 사람에게도 기쁨이 있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로포즈를 받는 사람에게도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쁨은 이런 기쁨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根源的)인 기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요한복음 4장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유명한 사마리아 여자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의 우물가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 때였습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습니다. 제자들은 마을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은 물을 길으러 온 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났습니다. 한 시간쯤이나 지났을까요? 먹을 것을 내 놓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을 구원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예수님은 양식에 비유(比喩)하셨습니다. 그 기쁨이 너무 커서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이지요. 좋은 집 사고, 좋은 차 타고, 좋은 옷 입고, 돈 쓰고 하는 데서 얻는 기쁨이 아니라 한 사람을 구원하는 데서 얻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마땅히 그런 차원(次元)의 기쁨에 눈을 떠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이런 주님의 기쁨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빌립보서 4:4).”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그의 삶의 조건이 어떻게 변하든지 상관 없이 그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기쁨을 알고 있었기에 환난 중에서도 그는 기쁨의 메시지를 쓸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주님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감각적이고, 쾌락적이고, 순간적인,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생의 기쁨을 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영원한 기쁨을 안고 사는 삶! 여러분은 세상적인 가치관에 지지 말고 도전(挑戰)해야 합니다. 여기에 참 인생의 기쁨과 행복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세상에 내 보여야 합니다.
둘째로, 여러분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銘心)하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분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으로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14절).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떠난 다음에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적당히 타협(妥協, compromise)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내 보내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태복음 10:16).”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삶 속에 늘 따라 다니는 것이 “타협”이라는 문제 아닙니까? 때때로 타협이라는 말은 융통성(融通性, flexibility)이라는 말과 혼동됩니다. 그리고 두 말이 분명한 경계선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때는 타협이라는 말 대신 융통성이라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 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양은 아무리 이리 속에 들어간다고 해도 양입니다. 양이 이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양은 어디까지나 순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여러분은 쉽게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They are not of the world, even as I am not of it. 16절).”
셋째로, 여러분은 진리(眞理)를 위해서 몸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7절).
NIV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nctify them by the truth.”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성결(聖潔)하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제자들을 볼 때, “아, 이 사람들은 진리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구나!” 이렇게 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 진리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이 떠난 다음에도 그의 제자들이 여전히 진리를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時代)는 진리가 무엇인지 혼동스러운 시대입니다. 바울은 일찍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로마서 12:2).”고 했습니다만, 너도 나도 이 세상의 패턴(pattern)을 따라갑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이 세상 패턴을 따라가면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이 세상의 패턴의 핵심은 이기주의(利己主義)입니다. 자기 만족, 자기 행복, 자기 기쁨입니다. 절대로 이 세상의 패턴은 기독교의 가치관과 양립(兩立)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몸바쳐 살아야 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Your word is truth).” 더 이상 진리가 무엇인지 토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도 잘 모르는 이상한 얘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서 몸 바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진리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가치와 판단의 기준(基準, standard)이 됩니다. 디모데후서 3:16-17에 있는 말씀 기억하시지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습니다(As you sent me into the world, I have sent them into the world. 18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졸업하는 여러분들은, 물론 상급학교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공부를 마치고 사회로 나가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싫든 좋든 이제 여러분의 무대(舞臺)는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이제 여러분이 나가서 살아야 할 영역(領域)입니다. 여기에 파송(派送, sending)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내 보내는 것입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 가라. 세상은 돈벌이의 무대가 아니다. 세상은 너의 즐거움을 위해서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네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곳이다. 세상은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그물을 던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야 할 곳이다. 세상은 네가 진리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할 곳이다. 그리고 세상은 내가 너를 파송한 곳임으로,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 있는 곳이다.”
오늘 졸업하는 여러분, 온 교우들과 함께 축하합니다. 여러분들의 장래(將來)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를 잊지 마십시오. 세상의 패턴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공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래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거룩이 사명이다
요 17:14-19 / 임덕순 목사
신자에게 세상은 어떤 곳일까요?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빌3:20에서 바울 사도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하였는데, 천국이 우리의 본국이라면 이 땅은 우리에게 어떤 곳일까요?
세상을 대하는 신자의 태도는 대략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세상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지식이나 돈이나 직장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는 다 이 세상에 있습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면 세상과 담을 쌓고도 살아갈 수가 있겠지만, 날마다 필요한 것들을 세상으로부터 얻기 때문에 세상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 의존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왠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이 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외면하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세상은 죄로 완전히 오염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얻거나 본받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속이고 빼앗고 음란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숨을 쉬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로도 죄짓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만 싶고 주님이 왜 빨리 오시지 않는지 답답합니다. 이렇게 세상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왜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본문은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이 기도에서 믿는 사람은 세상과 갈등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바로 이해하면 이 세상에 살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갈등을 겪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14절이 그 해답을 줍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를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학교나 직장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성격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야, 예수를 믿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너무나 성격이 변해서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어떤 깨달음을 주었고, 그 깨달음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못하게 된데서 세상 사람들과의 갈등과 긴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갈등이 있을 리가 없었고, 잘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 때문에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후에 우리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고 새로운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렵게 되었고, 그들이 우리를 부담스러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동안은 하나님이 계신 것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세상을 창조하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법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 전체가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 안에 큰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이 세상은 임자가 없고 누구든지 열심히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을 해치지 않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에 주인이 계시다는 알았습니다. 그분이 주신 생명을 갖고 사는 내가, 그분이 주인인 세상에서 살면서, 주인의 생각은 물어보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산 것이 죄라는 것을 말씀이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나?”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이제부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가 지금까지 먹던 음식에 독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그 음식을 다시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처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나면 삶의 방식을 고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깨달은 성도는 세상 사람처럼 살 수 없기 때문에 마음속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감독자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그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해온 것 중에서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워지고 삶이 조심스러워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도 아니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사람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갈등은 내 마음 안에서만 생긴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도 밀려옵니다.
14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 때문에 내 안에서만 갈등과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라, 세상도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토요일 새벽에 영국에서 올림픽 동메달을 놓고 일본과 맞붙었습니다. 모두가 가슴조이고 있는데 박주영 선수가 수비수 네명을 따돌리고 신기한 골을 넣어서 온 나라가 들썩였습니다. 결국 2:0으로 우리가 이겨서 동메달을 땄고 선수들은 군대 면제라는 특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축구영웅 박주영을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그들은 박주영이가 군 면제를 받았지만 그래도 군대에 가야만 한다고 난리랍니다. 왜 박주영을 미워하는지 아십니까? 그가 골을 넣으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믿는 나를 왜 미워할까요? 세상은 우리가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멸하고 거부합니다. 그들은 왜 우리의 변화를 싫어하고 미워할까요? 지금까지 그들은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왔는데 하나님을 인정하면 자기들 삶에 충격적인 변화가 올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때문에 자기들에게까지 어떤 변화가 올까봐서 믿는 사람을 일부러 무시하고 주저앉히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난 우리는 세상에서 미움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 살 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기는 해야 하는데 관계가 어색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오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의 우리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4절과 16절에서 두 번씩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공산군에게 점령당해 패망하던 날, 미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배와 비행기를 보내서 자기 나라 사람들을 다 데려갔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 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월남 사람들은 거기서 함께 망하고 수백만이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나요? 자기의 욕구충족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누리고 싶은 것은 다 누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만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준과 소유와 축복도 하늘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몫이 없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보화와 상급이 천국에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천국의 시민이라면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떠나버리면 더 이상 갈등할 필요가 없고, 더 이상 죄에 오염될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서 나는 것을 먹고 세상의 의복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날 즉시로 천국으로 불러올리시지 않고 왜 우리를 여기서 살게 하실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 여기에 남겨두신 이유, 우리의 삶의 목적 역시 주님의 기도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당장 하늘로 불러올려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세상에 남겨두겠으니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이 세상에 남겨 두어야할 필요가 있어서 여기 남겨두겠으니 이들이 악에 빠지지 않고 거룩하게 보전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거룩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은 온통 죄로 먹칠되어버렸습니다.
그 죄의 힘이 얼마나 센지 국회의원이고 장관이고 부자고 가난한 사람이고 청소년이고 노인이고 간에 구분 없이 죄에 빠져있습니다. 죄짓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죄악 세상에 남겨두시면서, 죄에 빠지지 않고 거룩하게 보전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죄가 가득한 세상이고 너무나 어두워서 사람들이 바르게 사는 길도 모르고 구원의 길도 모르므로 성도가 세상에 남아서 그들에게 바른 삶, 바른 길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 남겨둔다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삶을 거룩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목적은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빨리 떠나는 것도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거룩한 삶이요 그렇게 살아감으로 사람들에게 바른 삶, 바른 길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내용이 그런 기도입니다.
우리는 거룩 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과거 하나님을 모를 때 지은 죄를 씻음 받아서 깨끗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19절에서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게 무슨 말일까요? 주님이 죄를 지어서 죄를 씻으셔야 한다는 말일까요? 주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죄를 씻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말은, 자신을 구별된 일에 자신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거룩 이라는 말은 단순히 죄로부터 분리된다는 소극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구별하여 드린다는 적극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보셨을 때, 이 세상에는 당신이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으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 만물이 모두 망가져 있습니다. 자연이 파괴되어 이미 멸종된 동식물도 많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가진 지식과 삶의 체계도 망가져있어서 그것도 바로잡을 필요를 느끼셨을 것이고, 병든 사람들도 너무 많아서 하실 일이 산더미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일 저런 일을 다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일만을 목표로 하여 스스로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이었고, 그 사실을 세상에 전달할 몇몇의 사람들, 즉 교회를 양육하는 일에만 전념하셨습니다. 그 일에 자신을 바치는 것을 당신을 거룩하게 한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거룩이란 우선, 하나님을 깨닫고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죄를 모르면 거룩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자기가 죄인인 것을 어떻게 알지요? 오직 말씀으로 깨닫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알게 해주고 죄를 깨닫게 해줍니다. 죄가 무엇인지 지적해 보여주시고, 그동안 죄를 지으며 살아왔다는 것에 대하여 수치심과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죄를 버리게 하고 하나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거룩하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명하신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은 일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이루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이 없어서 그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능하셔서 무엇이든지 원하시면 다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하여 제한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이 당신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고전 10:23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만 하려고 자신을 제한하고 집중하여 거기에 바치는 것을 거룩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이 왜 거룩입니까? 그것이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은 복잡한 삶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것이 많고 추구하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남보다 성공하고 남보다 유명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죄를 떠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거룩입니다.
18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구원받고서도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는, 천국에 가지 못해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똑같이 주님은 성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남아 있으라고 하신 목적은 공연히 고생을 좀 하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아서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식하고 촌스러운 열두명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신 이유는 그들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맡은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산불이 나서 온 산에 나무들이 다 타버리면 잿빛 민둥산이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밑둥까지 타지 않고 남은 그루터기가 있고 흙속에 남아있던 씨앗이 있습니다. 그루터기와 씨앗이 남아있기 때문에 몇 년 후에는 다시 산에 나무가 자라기 시작해서 온 산을 푸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리의 그루터기로 삼으셨고, 오늘 우리를 복음의 그루터기와 씨앗으로 삼으셨습니다.
씨앗이 곯아버리고 그루터기가 썩어버리면 희망도 없지만 그것만 살아만 있다면 산은 다시 푸르러질 수 있는 것처럼, 성도가 거룩함을 잃으면 세상에 희망이 없지만, 성도가 자기를 거룩하게 지켜내기만 한다면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새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바탕은 깨끗한 사람, 거룩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씻은 사람,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구별한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딤후 2:에 보면, 큰 집에는 큰 그릇도 있고 작은 그릇도 있으며, 질그릇도 있고 금 은그릇도 있지만 그중에 주인이 쓰는 그릇은 금 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질이 우수한 것보다 삶이 깨끗한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생활이 깨끗할 뿐 아니라 마음이 나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위해서만 삶을 집중시키는 삶이 거룩함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그렇게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라고 보냄을 받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거룩이며, 거룩하게 사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는 천국 갈 시간이 덜 되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한 그루터기와 씨앗으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세상과 섞이지 않게 하고 부패하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정결케 하고 거룩하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때에 당신의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공연히 미워하고 핍박할 때 우리도 그들이 밉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모독할 때는 하늘에서 불이라도 내려와서 그들을 심판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닮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저주하고 십자가에 죽였지만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거룩함이며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달리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모든 전권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셨고, 그 권능으로 박해 속에서도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면서 아버지가 당신을 보내신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셨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10:1에 보면,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되어있고, 그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눅10:17에는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보고하였고, 그러자 주님은 다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은 당신이 가지신 그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핍박을 이기는 데와 사람들을 살리는데 쓰라고 주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세상을 구원하는 일과 그것을 감당할 능력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한 그릇으로 쓰시려고 세상에 남겨두셨습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고 주님 닮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거룩함이란 세상 사람과 다른 생각, 다른 행동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과 경쟁하지 말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주님이 명하신 일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사랑하라
요 17:14-19 / 김상복 목사
어떤 사람이 소설책 한 권을 갖고 기차 여행을 떠났습니다. 기차 안에서 한참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옆에 앉은 사람이 "그게 무슨 책입니까?" 합니다. "이런저런 책입니다." "재미있습니까?" "참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누구인지 꼭 한 번 만나 봤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전데요." 그래서 그는 그 작가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아주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 다시 그 책을 읽는데, 그 책이 그 작가를 만나기 전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작가를 만났고, 그를 이해하였고, 그의 배경과 음성과 모습과 표정을 알고 난 후에 읽으니 한 줄 한 줄이 실감나서, 이제는 그 책 뿐 아니라, 그가 쓴 책을 모두 사서 재미있게 읽었다고 합니다. 작가를 알기 전에 읽은 소설과 저자를 친히 만나 알게 된 후에 읽는 책은 다른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만나 알게 된 후에 읽는 성경은 전과는 전혀 다른 책이 됩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알기 전에도 매일 성경을 3장씩 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알고 나서 성경을 폈을 때는 전혀 다른 책이었습니다. 더 이상 전과 똑같은 책이 아니었습니다. 저자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아야만 자유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아야만, 우리가 죄로부터, 불의로부터, 지옥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마귀로부터, 연약함과 무지함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점점 더 넓은 영적 자유의 세계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알다" 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단순히 지식적 정보를 수집해서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헬라어로는 '기노스코,' 히브리어로는 '야다' 라고 하는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 체험하여 알다' 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았다"(창4:1) 라는 말씀에서 '동침하매'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부부가 친숙하게 깊은 사랑의 관계를 갖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요10:14)고 말씀하셨을 때도 이 단어를 쓰셨습니다. 이것은 그저 양이 몇 마리나 있는지를 아는 정도가 아닙니다. 모든 양을 한 마리씩 그 특징과 음성과 습관을 정확히 파악해서 사랑으로 돌봐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를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체험적 신앙입니다. 그저 정보를 머리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성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는 생활 속에서 진리를 체험함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되기 원합니다.
그러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네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이 진리입니다(갈2:5,14).
우리는 복음의 내용을 여러 번 들었는데, 들어서 아는 것과 개인적으로 체험하여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소식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만세 전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나를 먼저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 복음으로 나를 부르셔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메시지가 그저 세상을 향하여 선포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나를 향한 복음임을 절실히 깨닫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제가 자랄 때는 복음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개인적으로 주님을 알기 전에도 성경을 매일 읽고 들어서 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말씀이라는 사실은 깨닫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써있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신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뭐 이런 정도였지, 복음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만세 전부터 택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셔서 영원히 나를 돌보아주신다는 사실이 나와 직접 관계되는 것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서 다니던 신학교에 연세가 70정도 되신 매클리 박사님이 총장님으로 계셨는데, 한 번은 채플 시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27살에 처음으로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모태신앙으로 늘 성경을 읽고 교회를 다녔지만 잘 알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이렇게 도전하셨답니다. "이 메시지가 당신을 위한 것임을 아는가?, 예수님이 당신의 구주라는 사실을 아느냐? 예수님을 당신의 마음속에 모셔들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가? 만약에 자신이 없다면 오늘 새롭게 주님을 영접하라. 그래서 오늘이 바로 당신 자신의 구원의 날인 것을 알라."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다가, 자기가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그 복음이 바로 자기를 위한 것인데도 자기가 그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 날 예수를 영접했답니다. 그 이후로는 비슷한 질문이 오면, "아, 나는 27살 어느 극장에서 어떤 목사님이 설교할 때 그 복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지" 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나를 영원히 사랑하신다" 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개인적 고백의 체험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복음의 진리를 각자 자신의 것으로 확인하는 체험이 꼭 있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체험적으로, 개인적으로 알지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오늘, 진리인 복음을 분명히 알고 참 자유를 누리는 출발이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책을 읽다가 그 저자를 만나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도 책을 여러 권 출판했기 때문에, 먼 시골에 가도 "목사님의 책을 읽고 꼭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하며 저를 반기는 목사님들과 성도님들을 만나곤 합니다. 오늘 저희 교회에 오신 한 가족은 지방에 계신 동안 제 설교와 강의 테입을 많이 들으셨답니다. 어린 딸도 함께 아침 9시 예배를 드리면서, "어, 내가 듣던 목소리야" 하며 늘 듣던 테입의 주인공을 만난 기쁨을 표현하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체험해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저자인 예수님을 만날 때 그분이 진리이고 나를 자유롭게 해주신 분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그저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 정도가 아니라, 내 구주, 내 주인, 내 삶의 중심으로 모실 때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대일의 인격적 사귐에서 생겨난 산지식이 여러분에게 꼭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일 뿐 아니라 나의 주님이라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자는 영어로 "Savior," 즉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영어로 "The Lord," 즉 내 삶을 완전히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전적으로 그 분을 의지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을 따라 살면서, 내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분께 지배를 받고, 나 자신을 그분께 바쳐서 그분을 체험해야 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 하나님의 아들이 진리요, 진리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영원히 인도하시는 구주와 주님이신 것을 체험적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성령님이 진리입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너희는 저를 아나니"(요14:17)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님을 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아십니까? 성령님을 체험하셨습니까?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이는 "돕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님을 알게 됩니까?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 성령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와 함께 계시며 늘 동행하시며, 어떤 필요가 있든지 채워주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근심이나 고통이나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 분의 도움을 청해서 직접 받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3년 반 동안은 신학교 교수만 하고 목회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주말마다 집회를 요청하는 교회들이 전국에 있어서 주말이면 늘 나가서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이 쇠약해져서, 어떤 때는 도저히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는데, 약속은 이미 2년 전에 해 놓은 것이어서 취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너무 지쳐서 한 시간 수업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한 시간 누워 있다가 다시 수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주말에 비행기를 타고 집회장소로 가야 했는데, 도저히 3일간의 집회를 인도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말집회를 감당할 능력도, 기운도 없습니다. 저의 몸 속에 성령님의 새 에너지를 일으켜 주옵소서. 힘과 건강 주셔서 이 일을 잘 감당케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한참 졸다가 도착하면 그 시간부터 제 몸 속에 새로운 힘이 생겼습니다. 사흘동안 넉넉하게 집회를 끝내고 돌아와서 바로 월요일 아침부터 강의실에 또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 때마다 성령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절실하게 체험했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영원히 함께 계신 것을 믿으십시오. 성령님은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길 때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 보십시오. 지혜가 모자랄 때 지혜를 구하십시오. 믿음이 모자랄 때 믿음을 구하십시오. 인내가 모자랄 때 인내를 구하십시오. 능력이 모자랄 때 능력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성령님을 체험해야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체험적 신앙입니다. 그저 듣고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도우시고, 여러분을 위해 역사하시는 것을 직접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이신 성령을 체험적으로 알지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연약해도, 무지해도, 성령께서는 우리를 약함과 무지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온전치 못하고 능력이 없어도, 성령께서는 온전치 못함과 무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복음의 진리를 여러분의 것으로 알아 구원의 기쁨을 누리십시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구주와 주님으로 알아 그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게 하십시오. 진리이신 성령님이 여러분의 안에 계셔서 여러분의 모든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아, 기독교 신앙이 진리임을 생활 속에서 입증하십시오.
넷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저들을 당신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17:17). 여러분과 제가 거룩해지는 방법이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과 제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된 자유가 무엇입니까?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죄성으로부터, 죄악으로부터, 악한 생각과 모습과 태도와 행동으로부터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불경건하고 더러운 생활은 노예같은 속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읽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체험을 해보아야 합니다. 순종을 해보아야 압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말씀이 과연 진리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말씀을 철저히 읽고 작은 것 하나라도 묵상하고 암송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알아서 여러분이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 원합니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시내가 참 어지럽습니다. 낡은 집에서 흑인들이 주로 살며 많은 범죄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 한 분이 시내에 식료품 가게를 냈습니다. 시내의 작은 식료품 가게는 그 동네사람들의 공동 냉장고와 같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장을 봐서 집에 있는 냉장고에 넣어 놓고 먹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길을 가다가 들러서 피클도 하나 사먹고 우유도 한 병 사먹고 합니다. 그래서 그 동네사람들의 하루종일 들락날락합니다. 그래서 일년 365일 상점을 열어야 합니다. 그전에는 단 하루도 그 가게가 닫힌 적이 없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것을 인수해서 주일에 가게문에 "We go to the church" 라고 써 붙였더니, 월요일에 그 동네에 큰 소동이 났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몰려와서 항의를 하고 야단이 난 것입니다. 그 분이 "나는 기독교인이어서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 합니다" 했더니, 동네 사람들은 "우리도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인도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소동을 부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일에 또 닫았습니다. 역시 몰려와서 야단법석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 가게가 이제 망하게 되었다고, 손님들이 이제 이 가게로 안 올 것이고 매상이 떨어져서 곧 문닫게 될 것이라고 쑥덕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일에도 문을 닫고 "We go to the church" 를 붙였더니, 동네 사람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기독교인이 주인이 되어서 반갑다며, 자기들도 토요일에 물건을 미리 사놓고 주일에는 교회에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한 달쯤 지나니까 이전보다 매상이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전혀 손해보지 않고 1년에 52일을 놀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은 놀면서 먹고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못 놀며 먹고산다." 이 차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겁이 나서 주일에 영업을 하는 것을 제가 오랫동안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1년에 52일은 놀면서도 먹고삽니다. 지금 그 분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자녀가 셋인데, 모두 훌륭한 대학을 나와서 잘 되었습니다. 한끼도 굶은 적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에 다니게 되니, 그 분은 그 가게를 처분하고 소련에 선교사로 나가서 교회를 섬기며 대학을 세우고 있습니다. 구멍가게의 주인이 지금은 얼마나 멋있게 되었습니까? 놀면서 잘 먹고살았을 뿐 아니라, 자식들을 잘 키워서 사회로 내 보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두 부부가 러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1년 해 보시니까 어떻습니까?" 그 분이 대답하기를, 얼마나 자유로운지, 매일 가게에 안 나가서 좋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이제 나머지 생애를 자유롭게 선교하며 대학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순종을 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해 보면 그 진리의 말씀이 과연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의 복음을 단순히 지식적, 개념적으로 아는 수준에서 벗어나십시오. 그 복음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객관적으로 아는 수준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분이 바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바로 나를 위해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바로 나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심을, 그래서 그분이 나의 영원한 구주와 주님이신 것을 날마다 체험하며 일대 일로 그분을 아시기 바랍니다. 진리이신 성령께서 여러분을 돕기 위하여 여러분의 가슴속에 임재해 계십니다. 그 분은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어떤 도움이 필요합니까? 성령님께 도움을 구해 보십시오. 그분에게 기도로 도움을 구해 본 사람들은 그 분이 진리라는 것을 인생에서 체험합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성령님이 여러분의 가슴속에 영원히 여러분과 함께 살아계실 것입니다. 부지런히 진리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순종하십시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앎으로써, 여러분의 삶이 거룩하게 변화하며 참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
요 17:14-19 / 조상호 목사
‘요한 모리츠’라고 하는 젊은이가 세계 제2차 대전 때 징집을 당해서 독일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유대인이라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나치 독일로부터 유대인들은 엄청난 핍박과 학살을 당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 청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핍박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번은 우연하게 독일 군의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군의관이 요한 모리츠의 신체검사를 하더니 그는 독일 게르만족의 순종이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는 군의관의 이 판결 이후부터 갑자기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모진 수모와 고통을 받았던 그가 극진히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독일군이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그는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연합군의 심사관이 포로들을 하나하나 심사하다가 요한 모리츠의 파일을 보게 되었는데, 그의 파일은 두 가지로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서류에는 유대인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어떤 서류에는 독일사람, 즉 게르만족의 순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심사관은 그에게 “도대체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포로로 잡혀 온 이 청년이 그 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는데, 그의 파일까지도 전혀 다르게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심사관의 질문을 받은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도대체 나는 누구지?’라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핍박을 받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독일군 영웅으로 높임을 받으면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그가 재판을 받고 석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자, 부모와 처자식이 그렇게 반겨주는데도 그는 전혀 기뻐할 줄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자기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이 이야기는 ‘게오르규’라고 하는 사람이 쓴 <25시>라고 하는 작품의 줄거리입니다. 하루는 24시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24시간이 지나고 25시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계도 말세가 다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인간들이 전부 자기를 상실해 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문할까요? 여러분, 도대체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어떤 존재이십니까? 여러분은 어디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살면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어디에 속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의 정체성’을 바르게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14절에서 그 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4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또 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만약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모셔 들인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상을 떠나 살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분들 가운데 세상에 살고 있지 않는 분들은 한 분도 없습니다.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하고, 직장에 가서 일도 하고, 가정에서 자녀들을 돌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거나, 겨울에도 추위를 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기 전에 하루 세 끼 먹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하루에 세 끼를 먹어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친구들이 대학에 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대학 가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도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16절 하반절의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를 NIV 영어 성경을 보면, “They are not of the world"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는 ‘Of'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Of'라는 단어는 소유격으로 소속이나 신분을 나타냅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We are in the world, but we are not of the world"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순간,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 집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 집니다.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리는 뉴질랜드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분들을 법적으로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뉴질랜드 사람이냐, 아니면 뉴질랜드 사람이 아니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 등지에서 왔다 할지라도, 시민권을 신청하여 뉴질랜드 시민권을 받았으면 그 사람은 법적으로 뉴질랜드 사람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오랫동안 뉴질랜드에 살았다 할지라도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은 채 영주권만 가지고 살아간다든지, 유학생 비자나 관광 비자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아직은 뉴질랜드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똑같이 뉴질랜드에 살아가고 있지만, 시민권 소지 유무에 따라 그 사람의 소속이 달라집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되어 집니다. 아직까지 하늘나라 시민권을 따지 않은 채로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늘나라 시민권을 취득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비슷하지만, 소속이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까? 저는 이 자리에 있는 분들 가운데 한 사람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늘에 속하셨다면,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된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하늘로 당장 데리고 가시지 않을까요? 예수 믿은 후에도 왜 우리가 계속해서 이 세상에 살아야 할까요? 본문 15절을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주님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된 우리들을 하늘로 당장 데리고 가지 않고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8절에 그에 대한 답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주님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늘에 속한 우리들을 당장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자마자 하늘로 들림 받지 아니하고 이 세상에 남겨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명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래 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이야기 한편을 다시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하나님께서 닭과 개와 돼지를 불러서 “너희들은 이제부터 인간 세상에 내려가서 1년 동안 사람들을 위하여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고 봉사하다가 올라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년 후에 닭과 개와 돼지는 하나님께 돌아와서 보고를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닭이 입을 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세상에 가보니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기는 하는데 시간을 몰라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꼬끼오!‘하며 새벽을 알려 주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기쁘셔서 닭에게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 후부터 닭은 상으로 받게 된 벼슬을 항상 자랑하며 흔들고 다녔습니다. 두 번째 개가 와서 하나님께 보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세상에 가보니 도적이 많아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만 이상한 사람이 보여도 ‘멍멍!’하며 힘껏 짖음으로 집을 지켜 주었습니다.” 개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3개의 다리를 가진 개에게 다리 하나를 더 주었습니다. 다리 하나를 선물로 받은 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네 번째 다리가 너무나도 귀하기 때문에 용변을 볼 때, 하나님으로부터 하사받은 다리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도록 꼭 다리 하나를 들고 용변을 보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돼지가 와서 하나님께 보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세상에 가보니 세상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먹고 자고 놀다가 왔습니다.” 돼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저 돼지의 주둥이를 단칼에 치라” 그리하여 한 천사가 하나님의 명대로 돼지주둥이를 칼로 잘라버려 돼지의 주둥이가 없어지고, 코와 입이 붙어 있어, 먹을 때마다 숨이 막혀 곤란하게 되었답니다. 돼지는 자신의 코와 입이 붙어 있어 어려움을 겪다가 한 가지를 생각했는데, 돼지 머리를 놓으면 복 받는다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리석은 인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복을 받겠다고 돼지 목을 잘라놓고 그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누가 웃으라고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닭이나 개나 돼지에게 나름대로의 사명이 있는 것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늘 속한 사람들이 된 우리들 각자에게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명을 위해서 우리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자마자 하늘로 부르지 아니하고 우리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똑같은 의미와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구원받은 우리들을 당장 하늘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즐기고 싶은 것 마음대로 즐기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서 우리를 곧바로 하늘로 데리고 가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로 우리를 쓰시기 위해 우리를 곧바로 하늘로 데리고 가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살라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라고 말씀하며 하늘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길찌어다'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영어로 ‘Count’라는 현재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계속해서 세어보라' '계속해서 생각하라’ ‘계속해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처음부터 완전히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계속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우리의 결단과 결심이 약하여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행동한다할지라도,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2000년 12월에 해밀톤에서 있었던 뉴질랜드 PRE-KOSTA 때 모 강사님으로부터 들은 '라이언 킹'이라는 영화 줄거리에 많은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라이언 킹' 영화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Remember'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언급됩니다. 이 단어는 아빠 사자가 아들 사자에게 교육을 하면서 가르치는 말입니다. 아기 사자는 그가 정글의 왕이 될 후계자였지만, 아직은 어리고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철없는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아들 사자에게 '너는 기억하라. 너는 이 정글의 왕이다. 이 점을 기억하라. 너는 이 정글의 왕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후에 아기 사자는 'Remember'라는 이 단어를 기억합니다. 결국 'Remember'라는 이 단어가 그의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어, 아기 사자는 정글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항상 기억하고 행동하면서 왕답게 행동하는 것을 배워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이 왕인 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철없는 행동을 할 것입니다. 왕이면서도 왕답지 못하게 행동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아니면 하늘에 속한 사람인지를 날마다 매 순간마다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르지만, 생각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제 한 책을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가 자주 책 소개를 하기 때문에 꼭 책장사하는 것 같이 느껴질지 모르지만, 제가 읽은 책 중에 도전받은 책을 혼자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저는 작년 11월 말경 선교차 중국에 갔다가 이 책 제목을 들었습니다. 영어로 이라고 되어 있고, 한국말로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소제목으로 <현대판 사도행전의 기적, 윈 형제의 중국 전도행전>이라고 쓰여진 이 책을 아마 이미 읽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2003 영국 기독출판박람회에서 ‘올해의 책’이라는 상을 받고, 2004년도에는 영국 ‘기독교출판상’을 받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작년 7월30일에 초판 인쇄된 후에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저는 중국에서 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서점에 가서 이 책을 구해서 읽었습니다. 나중에 뉴질랜드에 도착 한 후에는 저 혼자 읽기가 너무 아까워서 별도로 한국에 20권을 주문한 후 실례를 무릅쓰고 이송남권사님이 뉴질랜드로 들어오는 편에 가져왔습니다. 각 샘별로 한권씩 나누어서 돌려 읽도록 하고, 샘에 편성되지 않은 분들이나 청년들과 학생들은 1주일 동안 빌려 가셔서 읽도록 할 예정입니다. 그 책을 빌려 읽고 싶은 분들은 예배 후, 테잎 복사실로 가셔서 김양배전도사님께 성함을 말씀하고 빌려 가시기 바랍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본명이 리우전잉(劉陣英)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윈(雲) 형제라고 부르고, 서방세계에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Heavenly Man’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름은 그가 중국 정부의 극심한 박해 속에, 30회 이상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얻은 이름입니다. 중국정부의 기독교 정책과 타협하지 않고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그는 1984년 처음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인한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도 감옥에서 무려 74일 동안 음식 뿐 아니라,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1991년 역시 같은 이유로 2차 투옥되었다가, 감옥에서 나온 뒤로도 중국 가정교회 연합 운동을 일으키다가, 1997년 3월에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사도행전 12장에서 베드로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하심으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 그도 감옥에 갇힌 지 두 달 후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하심으로 탈옥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계를 향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의지하여 그 해 9월 독일로 탈출한 후, 현재 독일에 근거를 두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중국교회의 선교 비전인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윈형제의 주님을 위한 고난의 여정과 더불어 중국 가정교회의 이해와 중국선교에 대한 방향들을 올바로 제시해 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윈형제는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고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74일간 식음을 전폐하다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체중이 30Kg밖에 되지 않는 상태로 그야말로 뼈에 가죽만 씌워진 것 같이 앙상한 몰골에, 머리까락은 쥐어 터지고 채인 까닭에 몽땅 빠져 없어지고, 두 귀는 잔뜩 쪼그라지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그의 모습이 변했는지 그의 아내조차 그의 모습을 몰라볼 정도가 되었지만, 그는 주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감옥 안에서 끊임없는 매질과 욕설, 전기고문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간수들에 의해 소변통 속에 얼굴이 빠지기도 하고, 다른 죄수들로부터 얼굴에 오줌 세례를 받으면서도 그는 견뎠습니다.
여러분, 윈형제가 그렇게 극심한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아십니까? 그렇게 고문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아십니까? 그 이유는 그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극심한 고문과 발길질과 구타와 욕설을 당하면서도 그가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믿음만 있다면 배가 고파도 인내할 수 있고,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참을 수 있고, 엄청난 환난 가운데에서도 견딜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