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탁구를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중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탁구를 좋아하고, 만나면 탁구에 대한 얘기만 나누며, 탁구공 하나에 일희일비한다. 탁구인의 DNA에는 탁구 유전자가 태생적으로 존재할 거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렇듯 탁구 얘기만 나오면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에 넘치는 이들은 분명 탁구마니아이다. 생활의 중심이 탁구일 것 같은 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마니아이다. 탁구를 업으로 하는 경우라면 마니아인 게 당연하다. 하지만 취미 정도로 즐기는데 주변에서 마니아 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진짜배기이다.
주말마다 전국적으로 펼쳐지는 탁구 시합장에는 수많은 마니아들이 참가를 한다. 탁구가 생활체육으로서 자리매김한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에 참가 동호인의 숫자도 꾸준하게 늘어왔다. 각종 대회 입상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일정 부분은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어느 대회건 상위 8강 정도에 이르면 늘 같은 얼굴이 남는다는 얘기이다. 그만큼 새로운 강자로 발돋움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 호에 소개할 주인공은 바로 그렇게 탁구 시합장에서 입상자로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았던 동호인이다. 탁구가 생활체육에 명함을 내밀고 존재감을 가지기 이전부터 시작해 아직까지도 탁구를 즐기고 있는 진짜배기 탁구마니아. 바로 문옥정 동호인이다. 전국탁구연합회 주관대회 복식, 단식 등 17번 우승, 지자체 주관대회 20여회 우승, 한국여성스포츠회장배 SBS탁구대회 복식우승 5회 등 수많은 대회를 통해 생활탁구 고수로서 이름을 굳힌 그는 탁구인들 사이에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기에 또 다른 모습으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듯하다. 몇 해 전 ‘이젠 말할 수 있다’라는 자서전을 통해 커밍아웃을 선언한 문옥정 동호인. 하리수, 홍석천 이후 동성애나 트랜스젠더 등 성의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경직에서 어느 정도 완화된 모습 속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마음고생을 과연 누가 알까? 그런 속에서 그에게 탁구는 어떤 의미였을까?
문승일, 문명희, 문숙희, 에레나, 스잔나……
그가 지금껏 살아온 과거 속 이름들. 문승일은 제주도 태생인 그에게 제일 먼저 붙여진 이름이다. 성(性)에 있어 우리 모두는 남자 혹은 여자라는 각각의 모습으로 태어나지만, 그는 남녀의 성을 모두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우선 눈에 띄는 건 남성이기 때문에 남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출생의 비밀을 알았지만 부모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성(性) 정체성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온다. 평소 그를 귀엽다며 살갑게 대해주던 어떤 아저씨에 의해 일본으로 납치돼 그곳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성 제거 수술을 받게 된 것.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가 중학교 1학년.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 남자를 피해 다시 제주도로 돌아온 그는 학교생활로 돌아갔지만 예전 같을 수는 없었다. 체육시간이면 가슴을 숨기기 위해 붕대로 칭칭 동여매야만 했다. 그런 가운데 늘 자신을 위해 변호를 해주던 친구가 그와의 동성애 소문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해 버리는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린다. 주변의 지탄 대상이 된 그는 모두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결국 가출을 감행한다. 그때 부산을 거쳐 도착한 논산에서 생전 처음 본 여성국극은 그가 나중에 무용과 국악공부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어 서울로 올라오면서 국립국악원 산하 국악고등학교에서 전문교육을 받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춤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제주도로 돌아온 뒤 무용학원을 운영했는데 그 때의 제자가 제주 출신의 ‘국민배우’ 고두심과 ‘오수미’라는 예명의 영화배우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신검통지서와 자살기도 그리고 화류계 진출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군대 신체검사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고민하던 그는 신검 전날, 군의관들이 머무는 여관으로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제주도 전체에 그가 여자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는 군의관 앞에서 옷을 벗어 보인 수치심에 자살을 시도하지만 영험한 기운을 느껴 중단하고 만다. 그리고 이후 ‘문숙희’라는 이름으로 이태원으로 진출해 돈을 물 쓰듯 하는 생활에 빠지게 된다. 한때 그런 생활을 청산할 수 있는 계기도 있었다. 가정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한 중년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 것. 하지만 그런 행복도 잠시로 끝났다. 그 남자는 도박중독자였고, 도박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결국 결혼 생활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상심한 그는 당대 최고 요정인 국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만 찾는다는 그곳에서 우리 사회의 검은 그림자를 심심찮게 체험한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 기업을 한다는 단골손님의 며느리가 되기도 했지만 항상 결말은 안 좋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춤으로 유명한 쇼걸 ‘스잔나’가 되어 있었다. 그 즈음 전국의 출연제의로 곳곳을 다니며 공연을 하다 다시 제주도에 발을 붙였다. 그리고 역학공부를 시작해 철학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신통력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등 문전성시를 이루기도 했다고. 그러나 한 일본인 조직세력의 거물과의 관계가 정신적으로 그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거기서 헤어 나오기까지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탁구는 내 삶의 목표의식
부귀영화, 희로애락, 인생의 쓴맛, 단맛을 뼈저리게 경험했을 것 같은 그에게 고비 때 마다 가장 힘이 되어준 건 바로 ‘탁구’였다고 고백한다. 만약 탁구를 하지 않았다면 사는 자체가 힘들어 운명이 잘못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탁구에 대한 애정이 깊고도 다른 의미라는 것. 동생이 1968년 싱가포르 아시아대회 때 탁구국가대표로 출전하게 됐을 때 자신도 탁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고, 이후 70년대 초반부터 라켓을 잡고 본격적으로 레슨을 받아가며 운동을 했었다는 것. 그런 탓에 그는 일본에서도 사회체육 탁구선수로 등록이 되어있고, 입상경력도 꽤 된다고 한다. 지난해에도 일본 오사카 대회에 참가해 단체전 우승을 했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건 시선을 많이 받는 편이어서일까? 가끔은 그와 관계된 일이 가십거리가 될 경우도 종종 있다.
“젊을 땐 누구나 그런 기질 있잖아요? 나도 예전엔 자기주장이 많았던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한 해 두 해 시간이 자꾸 지나가면서 왜 그랬나 싶어요. 그저 탁구 공 하나로 모두 함께 할 수 있다면 족한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구설에 오르내림을 별로 개의치 않고 언제든 할 말은 하는 스타일로 잘 알려진 그의 이미지만 생각한다면 그의 컨셉은 ‘자유’일 것 같다. 무엇에도 속박 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것 같은 그가 얼마 전 탁구장을 오픈했다. 서울 중랑구 면목8동에 위치한 ‘해바라기탁구장’이다.
“내 원래 역마살이 껴서 왔다 갔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주변에서 그럽디다. 이제 좀 정착해서 차분하게 지내라고…… 그래, 주변 지인들 도움으로 함께 이 탁구장을 열게 됐어요. 앞으로 좋은 어머니 선수 배출할 수 있도록 좋은 훈련장으로서 역할을 해야지요. 또, 실력으로 1, 2위가 아니라 인격이나 인품을 나누는 도장 역할도 필요하고요, 탁구인이 아닌 사회인을 대상으로 새로운 탁구인 만들기에도 열심히 해야 하겠고요(웃음).”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명상을 통해 하루를 시작한다. 현재 89세 김교환 옹이 최고령 회원으로 열심히 운동중이라 그는 실버 탁구인들에게도 뭔가 특별한 혜택을 마련 중에 있다고 한다. 우선은 매달 마지막 화요일에 회원 전원이 참여하는 대회를 여는 게 가장 우선적으로 마련된 계획이라고 밝혔다
첫댓글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로군요.. 자서전을 써도 몇권을 쓰겠네요.. 이 분이 전에는 부천대회에도 자주 출전해서 뵜었는데 그때마다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문을 들었었는데.. 그것이 사실이었군요... 요즘은 안보인다했더니 탁구장을 내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