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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잃으면 달이라도 품으려 안달이 난 하늘.
그런 하늘을 아무런 생각없이 오랫동안
올려다보신 적이 계십니까.
올려다 보신적이 계시다면.
무엇이 가장 눈에 들어오더이까?
해입니까? 달입니까? 별입니까?
제가 보고 있는 건 어이하여 보지
않으시는지요.
어이하여.
선도 악도 눈감고 덮는 죄악의 하늘의
실체는 보지 않으시는지요.
환 향 녀 (還 鄕 女)
<025>
"…내부인의
소행이다."
청자 찻잔이 뿜는 청정함에 그의 수심에 잠긴 표정조차 팔면영롱했다.
하지만 그를 맴도는 기운은 필시 누군가를 발기발기 난도질할 살기였다.
내관은 사시나무의 톱니에 걸린 매미처럼 땅에 박혀버렸지만,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체모를 지켰다. 예리하게 사리에 밝은 월운의 냉안시라면 자신의 잘못을 파악하고도
남았다.
틈을 보여선 안 된다. 월운이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괴괴한 처소 안을
메웠다.
"……제길."
친가를 방문하는데 한나절이 걸릴 리가 없다.
신변에 곤고가 생겼거나 다른 일에
휘말려있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내관."
"예, 마마."
"저번에 입었던 조선 평민 복을 가져와라."
"마, 마마."
"내가 나가봐야겠다."
"하오나…."
의자가 뒤로 끌리자 두려움에 내관의 이빨들이 따각따각 마찰했다.
내관의 간곡한 음성을 무시한 그는, 귀준전 안에 장식용으로 배치 되어있던
다양한 검들 중에 가장 날카로운 장검을 집었다. 누룩빌레에서 캐온
검푸른 돌이 손잡이에 박혀 있어 어느 정도 중압감을 주면서 손에 안기는
감촉이 맘에 든 월운은 검을 옆에 놓여져
있던 검집에 밀어 넣었다.
거추장스러운 장신(長紳)을 토막으로 갈갠 그는 짧아진 허리띠에 검을 엮으며
본부한대로 옷을 가져오지 않는 내관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그가 입술을
떼었다.
"내 명령에 늑장을
부리는 건가, 내관."
거액에 홍 넘어가 답응을 위험에 빠뜨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음을 후회하며
내관은 무릎을 꿇었다. 자신은 그것이 함정인 줄 상상도 못했다. 이리 멍청한 놈이 있나.
자신과 밀거래 한 자가 자신을 한참을
비웃었을 생각을 하니 내관은 피가 꺼꾸로 솟아 끓었다.
이건 시간이 지나면 가치도 없어질 장신구나 사자고 금전 몇 냥으로 답응과
지 목숨을 판 꼴이었다. 인제 자신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월운은 스스로를 소리없이
힐책하는 내관을 모호하게 내려다보며 절로
내관의 머리를 숙이게 하는 위엄을 발산하고 있었다.
복종만이 허가되는 황제의 계승자, 황태자.
만백성을 선택의 여지 없이 첩복하도록 만드는 황제가 될 직책을 태어났을 때부터
단 만큼 그는 여지없이 위엄의 싸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가 눈빛만큼 싸늘하게 씹어
뱉었다.
"다시 말하겠다. 조선 평민 복을 가져와라."
"마마."
"베기 전에.
가져와라."
검을 뽑아 들진 않았지만 월운이라면 분명 그를 베고도 남을 것이다.
답응과 사적인 연관이 없는 내관도 미칠 것
같은데 그녀를 거둔 그는 오죽할까.
평소 성미가 울뚝밸한 월운이었으니 그의 심리가 이토록 혼란스러울 때 자극하는 건
좋을 게 없었지만 내관은 이것만큼은 말려야
했다.
두 번째의 희생양을 만들 순 없는 법. 적절한 방책을 고려하여 화영의 호위무사로
둔갑한 자의 꼬리를 잡아야 했다. 그것이 우선이었다. 대책없이 나섰다간 월운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것이었다. 이리 답응을 납치한 꼴을 보아선 상대방은 아주
대담한 것을 넘어 간댕이가 부운 것을 넘어
간이 아예 없는 놈이었다.
내관은 제발 자신의 뜻을 헤아려달란 절박한
얼굴로 머리를 조아렸다.
"마마. 이 흉사의 주도자가 내부인이라면, 마마가 적들의 표적일 것이옵니다.
답응 마마도 순전히 마마를 능멸하기 위해 해한 가능성이 높사옵니다.
연회로 인해 뒤에서 어떤 흉악한 짓을 꾸밀지 모르는 조선인들도 마마의 얼굴을 아는
시점에서,
출궁하시는 건 위험하옵니다. 연회에서 마마는 한양의 대상들에게도 노출
돼셨사옵니다."
"네 말대로 날 능멸하려 드는 놈 돌을 처단하러 가는 것뿐이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조선옷을 가져와라."
마지막.
내관의 눈이 동요했다. …마지막이라.
퍼런 핏줄이 소솝은 손으로 뽑은 검을 그는 내관의 오사모(烏紗帽)에 겨누었다.
내관이 그의 영을 어긴다면 결단코 그의 모자기를 잘라버릴 것이다.
침착을 잃은 월운의 힘 들어간 두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시퍼런 칼의 날이 더욱더
공기를 얼렸다.
"가져와라."
"마마."
"가져와라."
"마마, 아니 되옵니다."
"…네 입몰(入沒)을
자초한 건 너다."
하찮은 내관 따위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순 없다. 그녀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녀가 날 애타게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의 분노한 검이 일사천리로 내관의 목을 내리치려던 참이었다.
장지문이 벌꺽 열리며 안상궁이 부리나케 들어왔다. 비녀가 빠진 산발은 아주 알량꼴량했다.
날아오는 검이 일순간 멈추자 십년감수한 내관은 간신히 숨을 토해내었다.
검을 내관의 머리에게서 떼지 않으며 월운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야의 구석에서
불투명하게 간신히 숨을 몰아 쉬는 안상궁이
보였다. 그의 입술이 비틀어진 호를
그렸다.
"…무슨
일이냐."
농묵을 풀어놓은듯한 그의 눈은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자신의 경거망동을 따질 새도 없이 안상궁은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다, 답응
마마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기대대신 갈망이 그의 수확들을 차지했다. 늘씬해진 호를 입에 담으며
그는 검을 검집에 껴 넣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환한 희열이 그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그는 몸에서 힘이 완전히 빠져나간 내관에게 시선을 다시 고정시켰다.
‘………돌아…왔구나.’
***
"마마,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시옵니까?"
"없다. 헌데 그건 왜 묻느냐? 누가 자객이라도 사주했다더냐?"
“그, 그 천벌 받을 놈은 어디에 있답니까? 그 천벌 받을 놈은요!”
“천벌 받을 놈이라니?”
“마마를 친가까지 호위한 놈 말입니다!”
“자신은 귀준전으로 돌아 가겠다 하여 궁 앞에서 헤어졌다.
헌데 천벌 받을 놈이라니? 그 자가 어이하여 천벌 받을 놈이란
말이냐?”
맨 처음 머리카락 한 올도 뽑히지 않은 채 무사히 돌아온 화영을 귀신인줄
착각하고 까무러쳤던 정상궁은 그렁그렁한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의 신변사를 물었다.
피곤한 눈치로 없다고 대답한 화영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는 정상궁에 경황망조했다.
웬 서러운 울음이란 말인가. 자신이 궁에 없던 사이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호위무사가 천벌 받을
놈이라니. 대체…?
연회에서 인조가 얼마나 월운을 미워하는지 톡톡히 보았기 때문에 그녀는 월운이
걱정이 되었다. 혹시 인조가 월운에게 해코지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면 호위무사랑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우는 정상궁의 팔을 끌어 정상궁이 자신을 마주보게 한 화영이 급히 하문했다.
정상궁은 딸꾹질을 하며 그녀를 이슬 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러느냐. 내가 출궁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더냐?"
"말도 마십시오. 저는 마마가 그만…. 흑……."
"울지 말고
말해보거라. 내가 출궁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느냐?"
숫기가 없어서 그런지 들은 백만언(百萬言) 수가 오십을 넘지 않은 대하기 어려운 분이지만,
민족이 등두해서 그런지 정상궁은 불민한 화영이 가긍했다.
자신도 청나라나 타국으로 끌려가 강제로
순결을 잃게 된다면 화영처럼 말을 대부분 잊어버렸을 태니까.
혹 화영의 친가나 성을 아는지 물어보기 위해 귀하전(貴下殿)을 들린 내관에서 전후수말을
전해들은 정상궁은 언제나 같은 조선인으로써 친근감을 가지고 대하던 화영이 어느 가혹한
모면을 겪고 있을지, 시간이 갈수록 걱정이 거익태산이었었다.
다른 상궁들에 비해 어려 장년도 접어들지 않은 정상궁을 달래며 화영이 부드러워진 어조로
다시 묻자,
정상궁은 당의고름으로 민망하다는 듯이 눈물을 재빨리 훔쳤다.
제철을 맞아 만개한 철쭉과 철 늦은 개나리나모들로 궁궐은 온통 여미한 화사함이 가득했다.
필요치도 않았던 소란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그것이. 딸꾹."
"말해보거라."
정상궁은 띄엄띄엄 말을 잇기
시작했다.
"…원래 마마를 궁 밖에서 모실 무사는 따로…딸꾹. 있었사온데….
마마가 출궁하시고 나서……귀준전 근처를 지나고 있던 나인이 마마를 모시도록
되어있던… 딸꾹. 무사의 송장을 발견하였다 하여…."
화영의 양미간이 뻣뻣하게 굳자 정상궁은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눈살을 찌푸린 화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실을. 누구누구가 알고 있더냐?”
“딸꾹. 왕실 어른 분들껜 불문에 부치었습니다.”
“내가 묻는 건 왕실
어른 분들이 아니다.”
분명 폭주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그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을 가뜩이나
과잉보호하려 드는 그는 궁을 쑥대밭으로
망쳐놓고도 남았을 것인데.
이상하게도 이 상황에서 걱정되는 것도 오로지 한 분.
떠오르는 것도 오로지 한 분이었다.
화영은 울먹이는 장상궁의 눈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그녀의 손이
후들거렸다.
“태자…. 태자
마마께선 이 일을 아시더냐?”
새삼스럽게 왜 그런걸 묻는 수고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자아내며
정상궁이 말했다.
“태자 마마가
모르시면, 누가 알겠사옵니까?”
다리 힘이 풀려 휘청일 뻔 했다. 가까스로 자신의 갈피를 다잡은 그녀가
물었다.
“어찌…. 반응하시더냐?”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사옵니까? 당연히 노발대발-”
“………했지만
돌아왔으니 됐군.”
등 뒤에서 화원을 울리는 나지막한 음성이 울려 퍼지자 화영은 기합 들어간
듯마냥 즉시 허리를 틀었다. 안심에 벅찬 내관을 비롯한 기다마한 행렬을 이끌고
걸어오는 월운은 읽을 수 없이 오묘하게
그녀를 주목하고 있었다.
대화 내내 잡고 있던 정상궁의 팔에서 손을 푼 화영은 송구함에 몸들 바를 모르겠단
자태로 예를 갖추었다. 그녀의 숙목한 앉은 절을 지켜보던 그는 의미심장하게 여러 발자국
그녀에게 어슷어슷 다가갔다. 구무럭구무럭하게 가까워져 오는 그를 그녀 역시 깊은
눈동자로 흡떠보았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그녀와의 간격을 좁힌 월운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올라오는 그의 손을 본 화영은 자신을 때릴 거라 넘겨 짚고
지르감았다.
그만큼 심려를 끼쳐드렸으니 맞아 마땅했다.
청나라인들의 심기를 그리 어지럽혔으니
속죄를 받는 것이 이치였다.
하지만 자신의 뺨을 그랬듯 아주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에 그녀는 눈을 바짝 떴다.
그는 억눌린 손길로 그새 훼척해진 그녀의 창안을 애만지고 있었다. 그는 울음을
삼키려는 듯 붉어진 눈시울을 감출 수
없었다.
정상궁도. 그가 이끌고 온 행렬의 무리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어느 때보다 애잔하게
주시하는 그의 시선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의 굼뜬 손놀림이 서서히 둔해져 갔다. 그의 손을 마주잡아주려는 지 화영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우쪽 손으로 허공을 머줍게
갈랐다. 그리고 그의 손등에 손을 포개려던
찰나.
“………피곤할 탠데
이만 쉬지.”
손을 빠르게 거두고 매몰차게 뒷모습 없이 자신을 지나치는 월운에 허망함이
들었다면 자신의 감정이 망가진 걸까. 힘없이 서있는 화영의 온기가 남아있는
자신의 손을 반대 손으로 거머쥔 그의
눈에서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홀연히 흘러내렸다.
그녀의 뺨을 만지자마자. 지금이 꿈이 아니라는 걸 실현시키는 연함이…. 여전히
한참을 맴도는 온기가 그를 점령했다. 아찔할 만큼 고혹적인 그녀의 슬픈 얼굴에서
눈물의 향이 마디마디에서 배어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밀려온 눈물이
차올랐다.
어째서 항상…. 그녀는 지독한 슬픔으로써만 자신을 상대하는 것일까.
그녀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미칠 듯이 울고 싶건만.
자신을 평생 등질 그녀의 마음 하나만으로도
대성통곡하고도 모자라건만.
바랄 것이 없다.
귀신이 아닌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와준
것만으로도.
“………마마………….”
황궁의 식구들은 외롭다.
숨겨워도.
비절해도 꿋꿋한 뒷모습 밖에 보일 게 없음으로.
행렬이 말없이 묵묵히 월운을 따라 행차한 뒤 화원에 달랑 화영과 정상궁만이
남았다.
멀거니 서있는 화영을 안타깝게 응시하며 정상궁이 보다못해 말했다.
“마마. 그냥…. 우세요.”
“……………….”
“마마 표정이 마치 울지 않으시면 죽기라도 하실 표정입니다.
그냥 이번만큼은 우세요.”
왜 이리 슬픕니까, 마마. 가르쳐 주십시오.
고이고이 마음에 간직해왔던 님을 잃은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왜 소녀의 마음을 충돌하는 지요. 왜…. 왜 마마의 매몰참에 가슴이
이토록 아린지 누구든 괜찮으니…. 제발 알려 주십시오……….
“……쓸데없는 데에
마음 쓰지 말거라.”
자신을 추스르며 강고하게 걸음을 옮기는 화영에 도리어 울음을 터뜨린 건
그녀를 이해하는 정상궁이었다.
첫댓글 믿을게요. 성실연재! 쿡. 건필하세요~
항상 꼬릿말을 달아주시는 이쁜이님, 너무 감사드립니다ㅠ 성실연재! (숨 들이키고) 몇달이라도 꼭 해보겠습니다!
재밌어요~~~ 월운이랑 화영이 좀더 진도 나갔으면~~~
재밌다니ㅠ 칭찬 감사합니다. 월운과 화영의 진도라..흐음... 글쎄요오 (<-소설 인물들 괴롭히는데 도가 튼) 아무튼 꼬릿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