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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2 아라한 공덕 (2) (법문: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아비담맛타상가하> 9장 깜맛타나(kammaṭṭhāna. 수행 주제) : 아라한 공덕 (2)
문단번호 8번 아눗사띠 10가지 하고 있습니다.
아눗사띠 10가지 8. ①Buddhānussati ②dhammānussati ③saṃghānussati ④sīlānussati ⑤cāgānussati ⑥devatānussati ⑦upasamānussati ⑧maraṇānussati ⑨kāyagatāsati ⑩ānāpānassati ceti imā dasa anussatiyo nāma. |
아눗사띠(anussati)의 ‘아누(anu)’는 거듭거듭, 사띠(sati)는 ‘기억하다, 상기하다’입니다. 거듭해서 상기해서 좋은 것이 10가지가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상기하면, 도움이 되는 것을 상기하면, 들끓는 번뇌(탐진치)가 식는다는 거죠. 그 아눗사띠가 10가지입니다.
그중에서 첫 번째 붓다눗사띠(buddhānussati), 붓다의 공덕에 대해서 상기하는 겁니다. 붓다의 공덕에 대해서 상기하는데, “이띠삐 소 바가와, 아라한, 삼마삼붓도, 윗자짜라나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아눗따로 뿌리사담마사라티, 삿타데와마눗사낭, 붓도, 바가와(Iti’pi so Bhagavā, Arahaṁ,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 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ṁ, Buddho, Bhagavā’ti.)” 중에 첫 번째가 아라한입니다. 아라한(Arahaṁ)이 우리가 보통 아는 것은 ‘번뇌로부터 떠나서 사람과 천신 범천들의 특별한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라고 돼 있는데, 어제 이것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삼장 사전>에 의하면 아라한(arahaṁ)의 어근(語根)중 하나가 na+raha입니다.
arahaṁ에는 ‘윤회를 더 이어서 가지 않는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라한의 ‘raha’에 ‘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앞에 ‘na’ 부정어가 붙으니까 가지 않는다는 뜻인 거죠. 가지 않는데 어딜 가지 않는가 하면 ‘윤회를 더 이상 가지 않는 붓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arahaṁ의 뜻이.
아라한따(arahanta)라고 하면 우리가 아는 아라한입니다. 번뇌를 소멸한 존재, 일반적인 아라한입니다. 이 아라한이라는 단어가 붓다의 공덕에서 ‘이띠삐 소 바가와 아라한’ 할 때, 이 아라한(arahaṁ)은 우리가 아는 그 ‘아라한따(arahanta)’ 그것보다 좀 더 의미심장합니다. 아꾸살라 찟따(akusala citta. 불선한 마음) 12개를 소멸한 존재가 아라한이죠? 총 12개의 번뇌에서 수다원에서 5개의 번뇌를 소멸하고 사다함이 되면 남은 7개의 번뇌가 확연하게 옅어지고 개수가 줄지는 않고 연해집니다. 아나함이 되면 남은 7개 중에서 감각의 행복을 원하는 탐욕, 성냄 두 개가 사라집니다. 아라한이 되면 완전히 사라집니다.
불선심 12개를 소멸한 존재가 '아라한'이죠.
불선심(아꾸살라 찟따) - 12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로바물라 찟따 lobha-mūla-citta) - 8 (1) 기쁘고, 사견과 결합된, 적극적인 탐욕 마음 (2) 기쁘고, 사견과 결합된, 억지로 일으킨 탐욕 마음 (3) 기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적극적인 탐욕 마음 (때때로 교만과 함께하는) (4) 기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억지로 일으킨 탐욕 마음 (때때로 교만과 함께하는) (5) 덤덤하고, 사견과 결합된, 적극적인 탐욕 마음 (6) 덤덤하고, 사견과 결합된, 억지로 일으킨 탐욕 마음 (7) 덤덤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적극적인 탐욕 마음 (때때로 교만과 함께하는) (8) 덤덤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억지로 일으킨 탐욕 마음 (때때로 교만과 함께하는)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도사물라 찟따 dosa-mūla-citta) - 2 (9) 불만족(도마낫사 domanassa)이 함께하고, 적의(빠띠가 paṭigha)와 결합되고, 적극적인 화냄 마음 (10) 불만족이 함께하고, 적의와 결합되고, 억지로 일으킨 화냄 마음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모하물라 찟따 moha-mūla-citta) - 2 (11) 덤덤하고, 의심과 결합된 마음 (12) 덤덤하고, 들뜸과 결합된 마음 |
수다원이 되면 다음과 같이 사견이 결합한 4개의 '탐욕 마음'과 의심이 결합한 1개의 '어리석음 마음'이 없어져서 7개만 남습니다.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로바물라 찟따) (1) 기쁘고, 사견과 결합된, 적극적인 탐욕 마음 (2) 기쁘고, 사견과 결합된, 억지로 일으킨 탐욕 마음 (5) 덤덤하고, 사견과 결합된, 적극적인 탐욕 마음 (6) 덤덤하고, 사견과 결합된, 억지로 일으킨 탐욕 마음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모하물라 찟따) (11) 덤덤하고, 의심과 결합된 마음 |
수다원이 되면 사견이 사라지고, 의심(위찌낏차 vicikicchā)도 사라집니다. 위찌낏차의 뜻이 마음이 두 갈래라는 겁니다. 여인이 임신해서 입덧을 하면 평소에 먹고 싶지 않던 것들을 먹고 싶어 하듯이, 마음이 두 갈래로 갈렸다 해서 이 단어를 씁니다. 근데 여기서 위찌낏차는 의심인데 팔정도에 대한 의심입니다. 다른 것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위빳사나 수행방법(8정도)에 대한 의심, 4성제에 대한 의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근데 우리가 헤매는 것이,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지 않습니까? 아니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 고성제를 수카(sukha. 즐거움)로 본다거나 어리석음 때문에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죠. 어쨌든 8정도에 대한 의심입니다. 위빳사나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다섯 개가 없어지죠. 수다원이 되면 다섯 개가 없어지고 7개 남습니다.
7개가 남아 있는데 사다함이 되면 남은 7개의 번뇌 밀도가 한 10분의 9가 준다고 합니다. 번뇌의 밀도가 확연히 줄어서 10분의 1만 남는 거죠. 10분의 1만 남고 아나함이 되면, 이 옅어진 7개 상태에서 도사(성냄)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도사 2개가 사라지죠.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도사물라 찟따) - 2 (9) 불만족이 함께 하고, 적의와 결합되고, 적극적인 화냄 마음 (10) 불만족이 함께 하고, 적의와 결합되고, 억지로 일으킨 화냄 마음 |
4개의 사견과 결합하지 않은 갈애가 남아 있었는데, 아나함이 되면 이것들이 사라집니다. 사견과 결합하지 않는 5욕락에 대한 갈애, 감각적인 행복, 물질적인 행복을 원하는 갈애가 사라집니다.
아나함에 남아있는 불선 마음 5가지
탐욕 뿌리 마음(물질적 행복에 대한 갈애는 없지만 존재 갈애는 남아 있음) (3) 기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적극적인 탐욕 마음 (때때로 교만과 함께하는) (4) 기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억지로 일으킨 탐욕 마음 (때때로 교만과 함께하는) (7) 덤덤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적극적인 탐욕 마음 (때때로 교만과 함께하는) (8) 덤덤하고, 사견과 결합되지 않은, 억지로 일으킨 탐욕 마음(때때로 교만과 함께하는)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모하물라 찟따) (12) 덤덤하고, 들뜸과 결합된 마음 |
아나함이 돼도 선정의 행복, 바와 라가(bhava-rāga), 색계와 무색계의 생을 원하는 마음이 남아 있고, 들뜸도 있습니다. 5개가 남아 있는 거죠. 5개가 남아 있는데 연하게 남아 있는 거죠. 매우 연하게 희미하게. 욕계에 살지만 욕계 중생 같지 않고 범천 같겠죠. 욕계 중생들이 갈구하는 그런 탐욕이 없어진 거죠. 아나함은 욕계 중생들과 같진 않지만 들뜸이 남아 있어서 수다를 떤다고 합니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내가 돼봐야 알죠?
그러나 아라한이 되면 그것마저 사라지는 거죠. 아라한이 되면 남아 있던 범천의 삶을 원하는 갈애와 들뜸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래서 어리석음도 다 사라집니다.
붓다의 공덕에서 말하는 '아라한'은 번뇌가 다 사라진 '아라한따'가 아니고 붓다의 특별한 공덕인 거죠. 번뇌가 소멸했다는 것은 둘 다 같은데 일반 아라한따와 붓다의 공덕으로서의 아라한은 일반 아라한따들이 가지는 공덕 이상의 공덕이 있는 거죠. 물론 겹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번뇌가 없어서 가지는 공덕들이 있고 또 붓다만의 공덕이 또 있는 거죠.
다시 사전으로 돌아와서 붓다의 아라한은, ‘12개의 불선심이 사라진 아라한보다 더 많은 뜻을 가진다.’ 이 붓다의 공덕에서 아라한이라는 존재는 ‘붓다의 공덕뿐만 아니라 모든 아라한이 가지는 뜻도 있고 붓다만이 가지는 뜻도 있다.’ <삼장 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아라한처럼 번뇌로부터 멀어서 붓다이다.’ 번뇌로부터 멀다는 것을 범부들은 모르지 않습니까? 항상 번뇌와 같이 사니까, 번뇌가 사라져 본 적이 없으니, 번뇌로부터 멀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 잘 모르죠. 가벼워집니다. 지금 가벼워진다는 게 어떤 것인가 잘 알기 어려울 것 같은데 하여튼 가벼워집니다. 예를 들어 모래주머니를 매고 모래사장을 달리다가 모래주머니를 떼고 맨땅을 뛰는 것 같은 느낌, 물에 잦은 솜옷을 입고 있다가 다 마른 느낌입니다. 무거운 칼을 들고 있다가 가벼운 칼로 바꾼 느낌입니다. 그 무게감이 줍니다.
‘번뇌로부터 멀어져서 붓다이다.’ 여기서 아라한이 아니라 붓다를 말합니다. 붓다의 공덕이니까. 그리고 지혜가 없는 악한 이들로부터 멀리 있는, 지혜가 없으면 악합니까? 이 책에 이렇게 나와 있는데. 지혜가 있으면 나쁘진 않겠죠. 지혜가 있으면 악한 일을 하지 않겠죠. 지혜가 없으면 악한 일도 하고 좋은 일도 하겠죠. 지혜가 있으면 악한 일을 안 하겠죠. 나쁜 일을 하지 않겠죠.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아니까요.
그다음에 또 어떤 뜻이 있냐면 ‘지혜 있는 일, 지혜 있는 사람, 선한 이들과 함께 하는, 선한 이들과 가까이 있는 붓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이들과 가까이 있는 붓다, 지혜가 있으면 붓다와 가까이 있겠죠. 그리고 당연히 '번뇌라는 원수들을 죽인 붓다.' 번뇌라는 원수, 사람의 원수가 아니라 번뇌라는 원수들을 죽인 붓다.
지혜가 없어서 악한 거니까 지혜가 없어서 나쁜 짓을 하는 거니까. 어리석음을 제거하면 착한 사람이 되는 거죠. 착한 사람이 되면 내 안에 있는 원수를 제거한 거니까. 번뇌는 원수를 죽인 붓다. ‘윤회 바퀴를 부숴버린 붓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특별한 네 가지 보시물로 특별한 예경을 받기에 합당한 붓다.’ 아라한의 뜻입니다. 합당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땅하다, 합당하다’는 뜻이 raha가 그런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예경을 받기에 마땅하신, 칭찬받기에 칭송받기에 합당하다”라는 뜻으로 라하를 ‘합당하다’는 뜻으로 보면, 예경 받기에 네 가지 보시물을, 특별한 물질 예경을 받기에 합당한 붓다.
특별한 물질 네 가지를 말합니다. 물질이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술이나 그밖의 계율에 어긋나는 것들로 예경 받지 않습니다. 특별한 네 가지 보시의 예경을 받기에 마땅하신 붓다, 그리고 칭송받기에 마땅하신 붓다. 칭송 받아서 마땅하지 않은 존재, 그러니까 마땅하지 않은 이들을 칭찬하기도 하죠. 비난받아 마땅한 이들을 칭송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를 칭찬하기도 하고, 칭송 받아 마땅한 존재를 비난하기도 하고, 외도들이 붓다를 비난하고 모함하듯이 그렇지 않고 칭찬받기에 마땅하신 존재,
그리고 불선업을 지을 만한 감추어진 자리가 없는 붓다. 불선업을 지으려는 감추어진 자리가 없는 붓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불선업을 짓고자 하는 마음이 아예 없으니까 숨겨진 자리가 없는 거죠.
버려서 마땅하고 버려야 하는 번뇌가 없는, 아라한의 raha를 ‘버리다’는 뜻으로 보면 버리기에 마땅하고, 그리고 버려야만 하는 번뇌가 없기도 하고 또 다른 뜻으로 아라한과 유학자 그리고 범부이지만 착하고 지혜로운 범부라는 성품이 있는 이들로부터 버림받지 않고, 그리고 이들을 버리지 않는, 좋은 이들은 버리지 않고, 그리고 좋은 이들을 버리지 않고, 나쁜 이들은 버리고 나쁜 존재들은 버린다는 뜻도 있습니다. 왜? 사견을 가진 존재들은 붓다를 버리고 그리고 붓다도 사견을 가진 존재들, 악한 이들은 버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업과 업의 결과로 우리가 구원을 하는 것은 내가 나를 구원하죠. 바른 방법을 선택하고 그 길을 갈 때 내가 구원받는 거죠. 나에게 지혜가 없으면 무엇이 바른 길인지 모르고 그 길을 가지 않는 거죠. 일단 지혜가 있어야 되겠죠. 일단 지혜가 있고 그다음에 그 길을 갈 용기가 있는가? 없는가? 용기가 있으면 결심하겠죠. 그래서 이제 아라한, 유학자 그리고 지혜가 있는 범부들이 버리지 않고, 또 이런 존재들을 버리지 않는 붓다입니다. 그렇지 않은 존재들은 버릴 수도 있죠.
데와닷따가 마지막에 뉘우치고 “붓다를 보고 싶다”고 말하고 붓다에게로 오죠. 붓다를 여러 번 살해하려고 했죠. 붓다를 죽이기 위한 방법으로 다른 살수들도 많이 죽였습니다.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에 죽을 때가 다 돼서 붓다를 보고 싶다고 사원 정문으로 옵니다. 부처님이 “그는 나를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나를 볼 수 있는 업이 다 했다. 자기의 불선업으로 나를 볼 수가 없다.” 붓다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업과 업의 결과로 보든가 못 보는 것이지, 자기가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보여주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업은 냉정합니다.
또 ‘버리다’는 뜻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가 하면, “선한 이들이 버리지 않는, 선근(善根) 있는 이들이 버리지 않는, 그리고 선근 있는 이들로부터 버림받지 않는 붓다”라는 이런 뜻입니다.
앞에서는 좀 전에 한 말은 아라한, 유학, 범부 이렇게 묶어서 얘기했고, 지금은 그냥 “선한 이들, 지혜로운 이들이 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나와 있어요. 존재를 특정 짓지 않고 그냥 선근 있는 이들이 버리지 않는, 그리고 버림받지 않는 붓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윤회를 다시 가지 않는 붓다입니다.
미얀마에 떼인구 사야도가 있었습니다. 빠리닙바나에 드셨다고 하는데, 아라한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출가 전에 강도였습니다. 조직을 만들어서 강도짓을 하는 강도였습니다.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고 합니다. 잘 훔치고, 부인도 4명이 있었고, 초범일 때만 딱 한 번 잡히고 그 뒤로는 잡히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일로 먹고 살았는데, 그리고 일자무식이고 공부가 안 되었습니다. 집안도 가난하지 않은 한의사 집안이었는데 아들이 공부를 전혀 하지 못하는 거죠. 공부가 전혀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초등학교도 못 마쳤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 수 있는 일로 강도짓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더 이상 못하게 돼서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되셨다고 하는 분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분도 수행해서 됐습니다. 그분은 그게 마지막 생이었던 거죠. 그렇게 거칠게 살다가 수행을 시작하셨는데. 그 일대기에 보면 떼인구 사야도께서 아나함이 되고 난 뒤에 신통이 열렸답니다. 자기 전생을 볼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가 수명이 긴 깟사빠 붓다(Kassapa Buddha) 시대에 비구였는데, 1만 년 동안 아주 열심히 수행을 했지만, 보시 받은 물건을 잘 못 써서 지옥에도 태어나고, 소로도 태어났다가 이번 생에 온 거죠.
강도짓을 하면서 5계를 어기고 살았으면서도 수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과거생에서 아주 열심히 1만 년 동안 수행을 했었기 때문에, 이번 생에 그렇게 거칠게 살고도 아라한과를 얻으신 거죠. 업과 업의 결과로 그렇게 된 거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번 생밖에 못 보고 사는데, 보이지 그 사람의 전생에 뭐가 있을지 알 수가 없죠. 이번 생에 거칠게 살아도 수행을 하면 어느 날 갑자기 될 수도 있는 거죠.
그분이 수행하신 걸 보면 아주 지독하게 했습니다. 수행을 잘하는 사람들은 아주 지독하게 하는데 전생에 그렇게 했던 사람들이라서 그렇겠죠. 그때 그렇게 하셨던 게 있어서 시키지 않아도 이번 생에 과감한 용기가 나는 거죠. 하라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겠죠. 전에 했던 그대로 하는 거죠. 아주 오래전 생에 했던 과감한 노력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 담마삐야
* 2023-06-02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496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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