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여름에 무늬를 더하다
후투티
후투티 머리 깃털은
인디언 추장의 모자를 연상시키지만
그 위엄의 값어치는
영화 기생충 이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 같다
보호구역에 격리되었던
아메리카 어느 원주민 부족의 몰락은
오래전 일이었는데
후투티에게도 그만큼의 어제와 역사가 있었으니
나름의 배경과 후광은 든든한 셈
그들은 그러나 변함없이,
쉬지 않고 마른 잔디밭 사이 뭔가를 콕콕 쪼고 있다
땅 위의 뭔가를 부리로 쪼아댈 때마다
먹이를 잡는 일에 성공하진 못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헛된 수고를 기꺼이
마다하지 않는 것
다만 그게 삶의 위엄이란 것을
후투티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는 듯
후투티는 말이 없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는 화두
지중해 해안 절벽 위에 살아가는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흰꼬리수리 한 쌍의 삶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보았다. 흰꼬리수리는 지중해 연안을 다해도 기껏 60여 개체만 살아남았다. 그 한 쌍은 20년을 한결같이 함께 살아왔는데, 어느 날 암컷이 해변 고압선에 걸려 죽는다. 수컷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횡사한 암컷의 주검 곁을 꼬박 며칠을 지키다가, 이윽고 훌쩍 날아오르는 것으로 이별을 고했다. 그들은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릇 언어란 대개 뭔가를 말하기 위해 발설된다. 미처 말이 되지 못한 비언어적 누설도 있다. 발설이든 누설이든 간에, 이제 언어는 실재계와 상징계를 동시에 반영하고 내포한다. 세상은 우리가 알다시피 ‘현실 세계(유니버스)’와 ‘가상 세계(메타버스)’ 간의 경계마저 허물어지고 있다. 이미 만들어진 가상/환상의 ‘이미지’가 실제나 실체보다 더 막강한 권능을 발휘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소쉬르가 언어를 ‘랑그’와 ‘파롤’로 구분한 이후, 라캉의 ‘시니피앙’을 거쳐 들뢰즈의 ‘노마드’, ‘정동’, ‘리좀’ 등의 전복/해체/확산적 개념을 지나 보드리야르의 ‘시물라크르’를 통과하면서, 가상/환상의 이미지는 실재라는 우리의 삶/존재와 종이 한 장의 앞뒷면처럼 얇고 투명해져서 거의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근대 이후의 인간 소외의 기형적 결과물인 타자성/익명성/다성의 목소리들을 품어 안음으로써, ‘상징/환상’과 ‘실체/실재’는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이다.
세기의 전환과 ‘미래파’의 등장 이후, 우리의 시단은 아마도 세계 으뜸의 수준으로 시적 발화 양상이 분기되며 활발하게 전개되어 오고 있다. 새로운 일군의 시인들은 시를 통한 ‘말하기’를 일찌감치 포기하는 대신 이른바 ‘에둘러 말하기’와 ‘말 안 하기’라는 발화 방식과 양상을 선택함으로써 실재/실제의 이면과 심층을 환상/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시의 언어는 더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성/모호성을 껴안는 것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로써 ‘실체/실재’와 ‘상징/환상’의 경계는 지워지고 허물어지게 되었다.
세상은 경이로운 혁신의 가속도를 붙이며 소위 ‘초연결사회’ 혹은 ‘열린사회’를 향해 치달아가고 있다. 아직 정치 분야만 이 전환/혁신적 융합의 대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채, 기득권이라는 보루에 갇혀 편 가르기에 마지막 몸부림처럼 몰두하여 버티고 있다.
요즘의 내 시 작업은 시적 발화 양식으로서의 ‘말 안 하기’라는 화두에 골몰하고 있다. ‘유구무언’의 시학이라고 일단 이름을 붙여 본다. 입이 있어 발설은 되지만 굳이 말하려 하지는 않는 태도. 말을 하되 에둘러 말하거나, 정작 하고 싶은 말을 안으로 삼켜버리고 흔적이나 얼룩 같은 자국을 어루만지려는 발화 방식. 말들이 넘쳐나는 이즈음의 세태에 질려서라고, 굳이 어설픈 이유를 사족처럼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