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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접공출신 변호사, 법원과 법관의 민낯을 말하다
올 초 ‘찢어진 예금통장’ 출간해 사법비판 이어가
“알고도 말하지 않는 변호사들에게도 책임 있다”
[법률저널=김주미 기자] ‘송사 3년이면 기둥뿌리 빠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소송이란 물적·심적으로 지난한 소모전이다.
안천식 변호사(사법연수원 34기. 법무법인 씨에스)는 그런 송사를 10년 했다. 한 사건으로 20여차례의 판결을 받았지만 모두 패소했다. 그는 여기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그런 판결을 내린 사법부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말보다 기록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그는 직접 출판사를 차렸다. 그러고서 지난 2015년, 자신의 10년 송사를 담아 ‘고백 그리고 고발’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올 초에는 그 책을 보다 쉽게 재구성해 ‘찢어진 예금통장’을 출간했다.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뼈아팠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사법부의 구조적인 문제점에 주목할 수 있게 된 그는 최근에 보다 활발해지고 있는 ‘사법개혁’의 바람이 반갑다고 전했다.
지난 8일 서초동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그의 10년 소송 이야기와 그가 생각하는 사법부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그 밖의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안천식 변호사와의 일문일답.
- 판결에 승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0년 동안 20번의 재판을 받고도 승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관계가 명확하면서 쟁점은 너무 간단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H건설은 법원에 가짜 매매계약서를 증거서류로 제출해 나의 의뢰인인 기을호(가명)의 부동산을 헐값으로 빼앗아 갔다. H건설이 제출한 부동산 매매계약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것이 쟁점이다.
이에 대해 법원은 “문제의 부동산매매계약서가 존재하고 있고, 증인 A가 계약체결과정에 입회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니 문제의 부동산매매계약서는 진짜이며 기을호는 H건설에게 문제의 부동산 소유권이전등기를 넘겨주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법원은 그 판결을 내리기 위해 한 쪽 눈은 감았다. 다른 사람의 글씨로 작성되고 막도장이 찍힌 매매계약서, H건설과 증인 A가 내 의뢰인을 무고죄로 고소했다가 오히려 그들이 무고죄로 처벌된 사실, 계약당사자(대리인)가 아닌 다른 직원의 필체로 판명된 부동산매매계약서의 글씨체, H건설의 직원이 다른 증인 C를 매수해 진술을 번복하도록 했던 정황,
H건설은 유사한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과 맺은 매매계약에서도 이 사건과 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의 해지된 계좌번호나 막도장을 찍어 계약서를 위조했던 사실 등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거나 소극적으로 언급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13년째 수행하면서 대부분의 증거자료들은 내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조사하고 찾아냈다. 그런 열정과 집념은 진실이 아닌 것을 향해 발휘될 수가 없다.
국민들이 느끼는 사법불신의 법 감정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분명하게 보게 됐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관예우, 연고주의 판결 등 각종 불명예스런 사법불신의 말들은 구조적으로 법원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있었다.
- ‘구조적’이라고 표현했다. 변호사님의 주장대로라면, 20번의 판결문에 이름을 올린 60명의 재판관이 다 똑같이 소위 ‘잘못된’ 판결을 내린 것이 법원의 어떤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사건 관련 판결서에 이름을 올린 60여명의 법관들은 대부분 그 판결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만큼 이 사건 관련 판결들은 법 전문가라면 누가 보아도 쟁점이 간단하고 증거가 명백하다. 더구나 우리 법관들은 그 정도 변별력조차 없는 집단이 아니다.
‘구조적’ 문제라고 이야기한 이유는 주지하다시피 우리 사법부는 태생부터 하나의 거대한 관료조직으로서, 관계가 상당히 수직적이며 경직돼 있다.
신입법관은 선배 법관으로부터 도제식 교육을 받아 성장하며, 상급자인 법원장과 재판장의 근무평정에 따라 판사들이 좌지우지 되는 시스템은 이러한 경직적 구조를 더 견고히 한다. 사법부의 꼭지점에 있는 대법원장을 향해서는 최근 그 권력이 ‘제왕적’이라고들 문제제기 하지 않나. 사법부란 제왕이 나올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법원 국제인권법학회가 법관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가 지난 3월에 발표됐다. 발표가 있던 학술연구회에 직접 갔는데, 설문조사 결과 90%도 넘는 법관이 ‘법원행정처의 인사권 남용 등 관료화된 사법시스템이 법관의 재판독립을 침해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더라. 내가 비판했던 ‘법원의 관료적 조직구조’의 폐단은 이미 법원 내부에서도 상당히 공감대가 형성된 부분이다.
- 이렇게 구조적으로 ‘불공정한 재판’이 나올 수 있는 법원이라면, 그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이 한두명은 아닐 것 같다. 직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피해사례의 규모는 어느 정도 되는가.
어떤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내게 “전체 사건의 약 40% 정도는 실체진실을 왜곡하는 불공정한 판결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떤 사법피해 관련 시민단체 회원은 “현재 전국의 사법피해자 사례는 최소 100만건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들의 추측성 발언이지만, 그 수치가 전혀 근거 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2015년 OECD 조사보고서는 우리나라 법원의 신뢰도가 27%로서 조사대상국 41개국 중 39위라고 발표했다. 이 충격적인 결과가 어떻게 나왔겠는가. 국민들이 보고 겪은 바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사법피해 사례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 생각보다 규모가 큰데, 그에 비하면 충분히 공론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 이에 대하여 변호사의 역할을 중요하게 제시하면서 “불공정한 재판의 실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개개 변호사들이 침묵을 깨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심하게 말하면 변호사들 역시 지금의 사법불신 사태의 한 축이다. 대부분의 변호사가 ‘알고도’ 법원과 법관을 비판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들의 안위가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2009년부터 2014년까지 6년 동안 대한변호사협회 사법인권소위원회 위원을 자청했다. 목표는 하나였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불편한 사법현실에 대한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백서로 남기고 싶었다.
변호사 사회가 법원을 견제해 주면 전체적으로 신뢰받는 법조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다른 위원들의 태도에 크게 실망하고 충격을 받았다. “변호사가 어떻게 법원과 법관을 비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법권력의 핵은 법관에게 있고 변호사는 이들로부터 재판을 받는 입장이라 사법권력의 공포를 가장 크게 느끼는 집단이 바로 변호사다. 변호사에게 판사는 ‘갑 중에 갑’이다. 법조인들은 권력의 속성과 그 작용방향을 잘 알고 있다. 권력이란 진실을 밝히기보다 진실을 영원히 침묵하게 하는 쪽으로 발휘된다.
최순실 국정농단사태의 국가적인 불행 역시 불편한 권력 오남용에 대한 침묵, 묵인에서 비롯됐다. 같은 불행이 더 이상 우리 사회에 반복되지 않으려면 권력 앞에 침묵하기보다 당당하게 법원의 잘못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변호사들이 책임 있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생업을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사법피해를 호소하는 국민들이 상당히 많다. 변호사들이 나서야 할 이유로 충분할 것이다.
나는 2015년과 2017년, 이러한 사법현실을 고발하는 두 권의 책을 냈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책을 발간해 줄 출판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출판사를 차렸고 처음에는 법원의 판사들이나 고위법관들, 변호사들에게 나눠줄 생각으로 책을 출간했다.
받아본 변호사들의 반응은 거의 같았다. “나도 겪었다, 나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말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어’라는 무력감 때문일 것이다.
책 출간은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 다 없던 일이 된다. 당장 가시적인 변화를 볼 수 없다 해도, 훗날 누군가 나처럼 다시 나서줄 때를 위하여 그 디딤돌이 될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
- 사법부가 신뢰를 받으려면 어떤 제도적 개선이 있어야 할까.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방안들이 있다면.
현재 재판에 관한 모든 권한을 법관에게 집중시키면서 마땅한 견제장치를 두고 있지 않은 것이 법원의 가장 큰 문제다. 재판에 있어 사실확정과 법리적용에 대한 모든 권한을 법관이 혼자 행사한다는 것은 법관이 마음만 먹으면 재판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쉽게 말해 돌멩이를 뱀이라고 사실확정 한 후 뱀에 맞는 법리적용을 하는게 가능한 시스템이다.
장기적으로는, 법관에게 집중되어 있는 재판에 관한 권한을 국민들에게 이양하고 국민이 함께 재판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된다. 미국 배심제와 선거제, 독일 참심제, 일본의 재판원제가 그 예가 될 것이다. 또 법원 내부의 지나친 폐쇄성을 완화하기 위해 법원행정의 권한 중 일부를 판사회의 등 다른 기관에 이양하자는 주장에도 동의하고 있다.
법규상으로는 합의의 비공개를 규정한 법원조직법 제65조와 법관의 ‘다른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공개적인 논평이나 의견을 금지’한 법관윤리강령 제4조 제5항을 보다 탄력적으로 운용하거나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규정들은 법관에게 재판 권한이 집중된 현재의 시스템을 억지로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판결에 대해 제한적으로라도 법원 내부에서 자유롭게 소통하며 의견을 공유하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상식에 어긋나는 판결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법관을 폐쇄된 틀 속에 가두기보다 열린 광장에서 마음껏 토론하고 춤출 수 있게 하는 것이 법관의 사기진작과 법원의 신뢰를 쌓는데 더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 스스로를 ‘힘 없는 변호사’라고 하지만 지금 하는 활동들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보이는데. 애초부터 이 쪽에 뜻을 두고 변호사가 되었나.
어떤 신념을 가지고 변호사가 되진 않았다. 나는 공고 출신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가정형편이 상당히 어려워 중학교 때 고교 진학을 포기했다. 직업훈련소에 가려고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선생님께서 보내지 않으셨다. 이후 포항제철 공고에서 학생을 모집했고 그 때 전액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5년 의무복무와 대학진학 포기를 서약하고서 진학했다.
스무살 때부터 5년 6개월 정도 용접공으로 일했다. 정확한 명칭은 제관공이다. 그 때가 80년대 중반이었는데 한참 데모를 많이하던 때다. 월급 받고 일하는 우리 시각에서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학생들은 뭔가 다른 것 같았다. 의무복무 기간도 마친 즈음이라 대학을 가서 다른 세계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상대(지금의 경영대)를 가려 했다. 대학 진학이 전기·후기로 나뉘어 있던 땐데 전기에서 떨어지고 나니 ‘아닌가보다’ 싶어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다고 무슨 뚜렷한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법대를 지원하게 됐다. 졸업할 때가 되니 32살이었다. 함께 포항제철에 들어갔던 친구들은 일한 지 십몇년이 되어 지위도 생기고 월급도 상당히 받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나가서 신입사원 하려니 뭔가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그런 현실적인 이유로 사법시험을 본 것이다.
변호사가 되고서도 종종 법원 앞에서 법원을 비난하며 사법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당시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경멸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판사들이 고심 끝에 내린 판결에 불만을 갖는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었고, 정상적인 법절차를 따르지 않고 거리에 나와 있는 것도 좋게 보이지 않았다.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판결을 내가 직접 받아보던 초반에도 마찬가지였다. 불복할 생각 없이 깨끗이 승복했고 그게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물론 개인적으로 포기하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다. 그만큼 지나온 과정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한 사건에 매달림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잃은 것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멈추면 나의 변호사로서의 생명은 끝날 것 같은 위기의식이 생겨났다. 내 스스로 사망선고가 내려질 것 같았다. 다른 어떤 사건도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의욕을 잃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내 아이들에게 ‘돈 잘 버는 아버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끄러운 아버지’는 아니고 싶었다.
인터뷰 김주미 기자, 사진 강미정 기자
안천식 변호사(51세, 사법시험 44회)는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졸업, 포항제철 근무, 경희대학교 법학과 졸업, 서울시립대학교 세무전문대학원에서 조세법을 전공했다. 「고백 그리고 고발」 「찢어진 예금통장」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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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패한 조직 법원을 파괴하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