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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7장 7절 ~ 11절
주를 신뢰하고 그의 소망을 주께 두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7)
Blessed is the man that trusteth in the LORD, and whose hope the LORD is. 7)
주께 소망을 두는 것과 소망을 두지 않음에 중간은 없습니다. 주를 신뢰하고 주께 소망을 두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택은 하나를 취하고 나머지 하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위의 말씀을 쉬운 당연한 말씀으로 생각해선 안됩니다. 왜냐면 주를 신뢰하고 주께 소망을 두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일치할 때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 문제로 시험을 받았고, 어려움속에서도 이겨내어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산에 오르는 것이 바로 주를 신뢰하고 그의 소망을 주께 둔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생각과 주의 명령이 일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주를 신뢰하고 그에게 소망을 둔것입니다. 주께 소망을 두는 것은 그의 생각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주의 말씀의 뜻이 충돌합니다. 충돌하는 그때에 나를 내려놓고 주의 뜻대로 순종할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마치 시속 100km 자동차를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벽을 들이받는 것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브레이크를 밟아야만 살것같지만 밟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시는 것이고, 그 판단을 신뢰하는 것이 주를 신뢰하고 주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 말씀은 그냥 당연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최후의 통첩과도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극단적인 비유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는 아브라함에게도 있었던 일이나, 홍해앞에 섰던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고 가정해본다면 항상 주를 신뢰하고 주께 소망을 두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때 나의 생각과 나의 견해를 버리고 주의 뜻에 맡기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위의 말씀은 신앙의 본질이 농축되어 담긴 말씀입니다. 이것이 본질의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이러한 본질의 신앙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형식의 믿음에 갇혀서 지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서 어떤 때라도 주를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저도 매일 성경나눔이라는 형식이 있지만 이것을 믿음의 본질보다 우선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매일이지만 매일 올리지는 않습니다. 저에게 형식이 의무로 되어 저에게 짐이 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우리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의 달란트와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 한정된 달란트를 믿음의 본질을 지키는데 선택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의 형식을 선택하면 믿음의 본질은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사람의 지혜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킨다면 그 위대한 구원이 실행될 것입니다. 이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실행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며 수고하고 있으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하리라."고 하시리라.
누가복음 10장 41절 42절
위 말씀을 읽으면 누구나 마르다의 길보다는 마리아의 길을 선택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이 마르다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면 당장 마리아의 좋은 편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권유하시는 길입니다. 마르다의 길을 택하면 마리아의 길은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둘 중하나만 선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좋은 편이라고 말씀하신 마리아의 길은 형식의 교회를 다니면서도 선택할 수 있는 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과 그의 나라를 구하고, 그 다음에 교회생활을 하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에 있습니다. 절대로 주일 성수와 십일조라는 형식을 지키는 것과 지키는 않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 말씀에 나타난 마르다의 모습은 형식에 대한 염려로 본질을 훼손하는 모습이며 이런 모습이 당신에게 있다면 마르다와 마찬가지로 버려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본질을 넘어서는 형식에 매달림은 마르다가 되어 그 자신은 슬프게 좋은 편을 택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듣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의 길은 형식에 앞서 본질로 주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일대 일의 신앙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드러나지 않는 믿음의 본질의 모습입니다. 주를 신뢰함은 다른 사람이 개입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설득으로 주를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 힘을 가지려면 예수님앞의 마리아처럼 주앞에 나아갈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기독교인들과 성경이 불법이 됩니다. 세상에서 합법으로 있는 것과 말씀에 순종함이 일치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때 한시적인 세상의 법보다는 영원한 주의 뜻의 법을 따르는 것이 영원한 복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 변하는 세상은 우리를 욕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겠지만 그들은 또 변덕스럽게 변해버릴 것들입니다.
지금의 백신 사기극에서도 아무런 이유없이 태도를 바꾸는 정부와 언론을 보십시요. 마치 그들은 기억상실증이거나 정신분열증 환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미친자들을 두려워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하기를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네 생명을 그들 중의 하나의 생명같이 만들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리고 더 내리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엘리야가 그것을 보고 일어나 그의 생명을 위하여 가서,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종을 거기에 남겨두니라.
O 그러나 자신은 광야로 하룻길을 갔으니, 그가 향나무 아래로 가서 앉아, 죽기를 구하여 말하기를 "이것으로 족하오니, 오 주여,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내가 내 조상들 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더라.
열왕기상 19장 2절 3절 4절
차별금지법으로 협박을 받는 것은 위 말씀의 이세벨의 협박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상의 사제 800명을 죽인 엘리야도 권력자의 죽이겠다는 협박에 지쳐서 괴로워합니다. 우리는 여기까지만 생각합니다만 주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음을 아는 것이 주를 신뢰함인 것입니다. 주께서 엘리야를 천사와 까마귀로 돌보시고 이세벨을 쳐서 개의 먹이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그렇게 때문에 그를 신뢰하는 자를 하나도 소홀하게 않으시고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를 신뢰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언약이라는 계약은 죽음을 초월합니다. 이 세상의 법들과 계약들은 당사자가 죽으면 소멸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구원의 계약은 죽음이후에도 유효하며, 죽음을 무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이 하신 명령 즉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자신의 독생자로 지키시고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그의 승리를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를 신뢰하고 주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 가진 복인 것입니다.
그는 물가에 심겨진 나무가 강가에 그 뿌리를 뻗침과 같아서 더위가 와도 걱정하지 않고 그 잎이 푸르러 가뭄의 해에도 염려하지 않고 열매를 맺는 것도 그치지 아니할 것임이라. 8)
For he shall be as a tree planted by the waters, and that spreadeth out her roots by the river, and shall not see when heat cometh, but her leaf shall be green; and shall not be careful in the year of drought, neither shall cease from yielding fruit. 8)
yielding ① 양보를 잘 하는 ② 잘 구부러지는 ③ 수확이 많은
강가에 심겨진 나무는 그 뿌리가 강에 까지 퍼져 가뭄이 와도 메마르지 않습니다. 이는 말씀에 붙들려 있는 사람이 세상이 변화하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상황이 험악하게 변해도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풍요하고 자유로운 때의 믿음 생활이나 앞으로 기근과 폭력적인 압제의 시기에나 우리는 똑같은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믿음이 말씀에 붙들린 강가에 심겨져 있는 나무가 가뭄에도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가에 심겨진 나무라면 가뭄속에도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믿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이 강가에 심겨져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당신 성경말씀과 멀어진 메마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저도 제 자신이 때로 메마르기도 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의무감을 만들어 매일 성경나눔을 쓰려고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의무감은 마르다의 염려인 형식일 뿐입니다. 매일 성경나눔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저의 진도일 뿐인 것입니다. 본질에서 벗어나면 썩어버립니다. 의무감으로 작성한 글은 교만하게 되고, 제 자신의 쓰레기같은 자부심이 됩니다.
우리에게 가뭄과 같은 환경이 바뀌는 것은 개인적인 것도 있고 집단적인 것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집단적인 신앙생활의 환경의 변화가 오고 있으니 그것은 차별금지법입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으로 성경이 불법이 되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의 법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시적이고 변덕스러운 세상의 법으로 주는 불이익은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하는 법을 순응하여 따라가다보면 그들이 쳐놓은 죄의 덫에 걸려 하나님과 멀어지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O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9)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desperately wicked: who can know it? 9)
desperately ① 절실하게 ② 필사적으로 ③ …하고 싶은 ④ 절망적으로
마음이 모든 것보다 악하고 절망적으로 사악함이란 마음에는 상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마음속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음란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상상들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악함은 사탄이 공격하는 것도 있지만 제 스스로도 상상한 것도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의 악한 사람이라도 그의 마음의 상상보다는 덜 악할 것입니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마음은 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의 상상은 알지 못합니다.
나 주는 마음을 살피고 나는 속을 시험하며 그 사람의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각 사람에게 주노라. 10)
I the LORD search the heart, I try the reins, even to give man according to his ways, and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doings. 10)
reins 허리: 성서에서 감정[애정]이 깃드는 곳.
9절과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마음을 살피고 속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상상대로 결과를 주시지는 않습니다.
행위와 행실의 결과대로 각 사람에 주시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는 주께서 죄에 대한 심판의 기준이라고 보여집니다.
상상 만으로 징계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상이 행위와 행실로 드러난 것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와가 죄를 짓는 단계가 선악과를 탐낸 때가 아니라 선악과를 먹은 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징계와 심판의 기준되지만 죄의 기준은 이보다 높습니다. 죄의 기준은 마음의 상상에서 부터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가 그의 마음에 그녀와 더불어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 28절
이처럼 징계와 심판의 기준보다 죄의 기준이 더 높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자고새가 알들을 품어도 부화되지 않는 것처럼 바르게 재산을 모으지 아니한 자도 그의 생애 중간에 그것들을 떠나 보내리니 그의 종국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11)
As the partridge sitteth on eggs, and hatcheth them not; so he getteth riches, and not by right, shall leave them in the midst of his days, and at his end shall be a fool. 11)
partridge ① 자고새
hatch ① 부화하다 ② 해치 ③ 계획을 세우다
편법으로 모은 재물은 쉽게 사라지고 그 마지막은 어리석음이 될 것입니다. 재물에 매달리는 것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희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재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이것 또한 우리의 선택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은 재물은 재물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재물은 형식이고, 행복은 본질입니다. 형식인 재물에 집착하면 행복과 재물모두를 잃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같이 믿음의 형식과 믿음의 본질 둘중에 하나만 선택하십시요. 형식에 매달리면 모든 것을 잃고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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