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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本文)은 논술(論述)입니다.
이번에는 가야(伽倻)에 관하여 검토(檢討)하고자 한다.
가야(伽倻)의 원래(元來) 발음(發音)은 ‘가라’(伽羅; 加羅; 駕洛)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일본(日本)에서는 ‘韓’, ‘唐’, ‘駕洛’, ‘加羅’라는 낱말을 모두 ‘카라’(から)라고 하는데, 본래(本來)의 소리에 가깝다고 보이며 후대(後代)에 편의상(便宜上) ‘가야’라고 발음(發音)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가야(伽倻)는 백제(百濟)-고구려(高句麗) 및 신라(新羅)의 영향(影響)을 받았고,
최종적(最終的)으로 가야(伽倻)의 일부(一部)는 백제(百濟)에게, 나머지는 신라(新羅)에게 흡수(吸收)-병합(倂合)되었으나, 삼국시대(三國時代)가 아니라 ‘사국시대’(四國時代)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연맹(聯盟) 국가(國家)이었다.
고대(古代) 가야(伽倻)는 다른 국가(國家)에 비하여 일찍이 왜국(倭國)과 깊은 관계를 가졌는데,
그와 관련하여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족보(族譜)를 언급(言及)할 수 있다.
그 족보(族譜)의 기원(起源)과 정확성(正確性)에도 의문(疑問)이 남지만, 분석(分析)을 위한 ‘기초자료’(基礎資料)로서 인용(引用)하고자 한다.
먼저, 아래에 인용된 <자료 1>을 살펴보면,
i) 1915년 6월 29일 ‘조선총독부 경무령’(朝鮮總督府 警務令)을 포고(布告)하여 “치안상(治安上)의 이유(理由)로 김해(金海)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김씨(金氏)의 족보발행(族譜發行)을 금지(禁止)시켰다”는 사실과, ii)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시조(始祖) 수로왕(首露王; 42년?~199년)에게 10명의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一般的)으로, 10명의 아들 가운데 2명은 김해(金海) 허씨(許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위키백과(한국어)>에 따르면,
김해(金海) 허씨(許氏)는 가락국(駕洛國)의 김수로왕(金首露王)의 35세손(35世孫)이며, 고려(高麗)때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허염(許琰)을 시조(始祖)로 한 성씨(姓氏)이다.
양천 허씨, 태인 허씨, 하양 허씨, 인천 이씨 등의 분가(分家)가 있다.
따라서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비(妃) 허황옥(許黃玉, 33년?~189년)의 자손(子孫) 또는 친족(親族)을 김해(金海) 허씨(許氏)로 부른다는 것은 잘못된 정보(情報)라고 한다.
수로왕(首露王)에게 2명의 딸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모두 12명의 자녀(子女)를 가진 것이다.
첫째 아들은 왕위(王位)를 이어받아 제2대 ‘거등왕’(居登王)이 되었고, 또 1명의 아들은 지방관(地方官)인 ‘거칠군’(巨漆君)이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8명의 아들 중에서 7명은 허황옥(許黃玉)의 오라버니를 따라 신앙생활(信仰生活)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하동(河東) 땅에 ‘칠불암’(七佛庵)이라는 이름을 남겼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7명의 아들은 성불(成佛)한 후에 ‘승운이거’(乘雲離去)하였다고 한다.
그럼, 나머지 또 1명의 아들은 어디로 갔을까?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족보(族譜)에 따르면,
7명의 아들은 세상(世上)이 되어가는 꼴을 비관(悲觀)하여 ‘구름을 타고’ 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여기서 ‘구름을 타고’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나중의 ‘천손강림’(天孫降臨)을 암시(暗示)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기록(記錄)을 근거(根據)로 하여, 그들은 왜국(倭國)에 진출(進出)한 것이라고 연구자(硏究者)들이 해석(解釋)하는 것이다.
물론, 수로왕(首露王)의 일곱 아들이 ‘왜국’(倭國)에 들어갔다는 것은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족보(族譜)에 명문(明文)으로 기록(記錄)되어 있지 않다.
다만, i) “김수로왕(金首露王)의 7명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금관가야(金官伽倻)를 떠났다”는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족보(族譜) 내용과, ii) “일본(日本) 황실(皇室)의 시조(始祖)가 하늘 나라로부터 구름을 타고 ‘큐-슈-’(九州)에 있는 ‘타카치호노미네’(高千穗嶺; たかちほのみね)의 ‘쿠시후루’(久旨布流; くしふる; 龜旨峯?)에 내려왔다”는 일본(日本)의 역사기록(歷史記錄) “고사기”(古事記; こじき; 코지키)와 “일본서기”(日本書紀; にほんしょき; 니혼쇼키)의 내용은, iii) ‘카라쿠니다케’(韓国岳; からくにだけ)와 ‘나나쿠마노사토’(七隈の里; 七熊の里; ななくまのさと; 일곱 곰의 마을, 7명의 김씨가 사는 마을)라는 일본(日本)의 지명(地名)과 함께 서로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問題)가 있는데, 지금까지 여러 연구자(硏究者)들이 주장한 내용들은 기본적으로 <반도사관(半島史觀)>에 따른 것이므로, 지리적(地理的) 사항(事項)은 지금부터 다시 검토하여야 한다고 필자(筆者)는 생각한다.
일제(日帝)가 1915년 6월 29일 ‘조선총독부 경무령’(朝鮮總督府 警務令)을 포고(布告)한 것은, 그들이 역사(歷史)를 왜곡/날조(歪曲/捏造)하기 위하여 의도적(意圖的)으로 강행(强行)한 조치(措置)일 수 있다.
조선(朝鮮) 시대에도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족보(族譜)는 발행(發行)되었고, 그것을 일제(日帝)시대에 추가(追加)로 발행(發行)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 사안(事案)이었다. 오히려, 그 족보(族譜)의 발행(發行)을 금지(禁止)한다면 세간(世間)의 주목(注目)을 받을 수 있다.
김해(金海) 김씨(金氏) 족보(族譜)의 내용(內容)이 100% 거짓은 아니지만, 한반도(韓半島)에 새로운 역사(歷史)를 심어놓기 위한 조치(措置)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웠던 일제(日帝) 시대에, 식민지(植民地) 통치(統治)의 논리(論理)로 주창(主唱)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한일동조론’(韓日同祖論)[‘일본인과 조선인(한국인)은 그 조상이 같다’는 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한 사전(事前) 행위(行爲)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론(理論)을 바탕으로 동조정신(同祖精神)을 한국인(韓國人)에게 주입(注入)-확산(擴散)시키기 위하여 1940년 1월 1일에 친일(親日) 일문잡지(日文雜誌)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창간(創刊)되었다고 한다.
한편, <반도사관(半島史觀)>을 견지(堅持)하는 일부(一部) 연구자(硏究者)들은 이른바 ‘한일동조론’(韓日同祖論)에 근거(根據)는 있지만, 식민통치(植民統治)의 정당화(正當化) 때문에 일제(日帝)에 의하여 철저(徹底)히 악용(惡用)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론적(結論的)으로 일제(日帝)가 한반도(韓半島)와 일본열도(日本列島)에 기존(旣存)의 설화(說話)나 역사(歷史)를 심어놓은 것인지의 여부(與否)를 세밀(細密)하게 검토(檢討)할 필요(必要)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에 인용된 <자료 4>와 <자료 6>에 나오는,
기원전(紀元前) 6세기 인도(印度)에서 바다를 건너온 ‘스리랑카’(Sri Lanka; Ceylon) ‘비자야’(Vijaya) 왕(王)의 설화(說話)에 관심(關心)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가야(伽倻) 김수로(金首露) 일족(一族)의 설화(說話)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역사학자(歷史學者) 최두환 선생님의 “조선통사”(朝鮮通史)라는 책[p.539, 도서출판 경남, 2007년, 대한민국 마산]에는 “삼국(三國)의 강역도(疆域圖)”가 나오는데, 가야(伽倻)는 지금의 인도(印度)와 스리랑카(Sri Lanka) 인근(隣近)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史實)이라면, 왜국(倭國)의 위치(位置)도 대략적(大略的)으로 추정(推定)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只今)의 인도(印度)를 가야(伽倻)로 본다면,
허황옥(許黃玉)의 고향(故鄕) 즉 김수로(金首露) 설화(說話) 속의 인도(印度)는 어디에 있었을까?
조선시대(朝鮮時代) 김정희(金正喜, 1786년~1856년)의 “완당집”(阮堂集) 제8권 “잡지”(雜識)에서는 ‘오인도’(五印度)의 강역(疆域)을 언급(言及)하고 있다.
“오인도(五印度)의 강역(疆域)은, 남인도(南印度)는 큰 바다로써 한계(限界)하고, 서인도(西印度)는 홍해(紅海)-지중해(地中海)가 있어 한계(限界)하여 예나 이제나 절연(截然)하여 어긋나지 않으며,오직 동(東)-북(北)의 두 인도(印度)는 육지(陸地)의 경계(境界)가 각국(各國)과 들쑥날쑥하다. 그러나 동인도(東印度)는 항해(航海)가 서로 통하여 상이(商夷)가 모두 익히 내왕(來往)하며 북인도(北印度)는 총령(蔥嶺)의 서(西)쪽이 간격(間隔)이 되어 내왕(來往)하지를 못한다. 대설산(大雪山)이 있어 그 북(北)을 경계(境界)했는데 그를 근거(根據)로 하여 북인도(北印度)의 계빈(罽賓)이 되었다.”
[출처=완당집(阮堂集)]
김수로(金首露) 설화(說話) 속의 인도(印度)는 ‘오인도’(五印度) 중 어느 곳이었을까?
“조선통사”(朝鮮通史)라는 책[p.541, 최두환, 도서출판 경남, 2007년, 대한민국 마산]에는 “삼한(三韓)의 강역도(疆域圖)”가 나오는데, 왜국(倭國)은 지금의 인도차이나(印度支那) 반도(半島) 및 중국대륙(中國大陸) 동/남부(東/南部)에 위치(位置)하고 있다.
여기서 가야(伽倻) 김수로(金首露)의 설화(說話)를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스리랑카’(Sri Lanka)에 불교(佛敎)가 도입(導入)된 이후에는 ‘타밀어’(Tamil Language)보다 ‘싱할리어’(싱할라어; Sinhala Language)가 우세(優勢)하면서 지명(地名)도 모두 ‘싱할리어’로 바뀌었다고 한다.
종교적(宗敎的) 변화(變化)가 통치적(統治的) 구조(構造)에도 매우 큰 영향(影響)을 준 것으로 보인다.
가야(伽倻) 김수로(金首露) 일족(一族)의 설화(說話)에도 그와 비슷한 상황(狀況)이 엿보인다.
역사적(歷史的) 배경(背景)으로 볼 때, 김수로(金首露) 일족(一族)이 가야(伽倻) 지역에 정착(定着)한 이래(以來) 정치적(政治的), 사회적(社會的), 종교적(宗敎的)으로 중대(重大)한 변화(變化)가 있었던 것은 틀림 없다고 본다.
그것 때문에 지배층(支配層)의 이동(移動)은 불가피(不可避)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편년가락국기”(編年駕洛國記)에 따르면, 수로왕(首露王)의 두 딸 중에서 1명인 ‘지진내례’(只珍內禮) 공주(公主)는 신라(新羅) 석탈해(昔脫解)의 며느리(息婦; 子婦)가 되었다고 하는데,
‘신녀’(神女)라고 하는 또 1명의 딸은 어디로 갔을까?
“김해김씨왕세계”(金海金氏王世系)에 따르면, 10명의 아들 중에서 1명은 ‘신녀’(神女)라는 공주(公主)와 함께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그들의 행선지(行先地)를 밝히기 위해서 아래에 인용된 <자료 3>을 살펴보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 “왜인조”(倭人條)에는 왜국(倭國)의 전란(戰亂) 후에 왜국(倭國) 왕(王)으로 추대(推戴)되었던 ‘야마토’(邪馬壹; 邪馬臺)국(國)의 ‘여왕’(女王) 1명과 그녀의‘남자 동생’(男弟) 1명이 나온다.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의 ‘히미코’(卑彌呼; 비미호, 175년?~248년?) 여왕(女王)은 ‘신녀’(神女)=‘무녀’(巫女)로서 종교의식(宗敎儀式)을 맡았고, 남동생(男弟)은 정치실무(政治實務)를 맡은 것이다.
일본역사서(日本歷史書) “고사기”(古事記; こじき; 코지키)에도 여신(女神)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 あまてらすおおみかみ)와 그녀의 남동생(男弟)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 すさのおのみこと)가 등장(登場)한다.
그 시조(始祖) 신화(神話)는, 역사상(歷史上) 실존(實存)하였던 ‘야마토’(邪馬壹; 邪馬臺)국(國)의‘여왕’(女王)과 그녀의 ‘남자 동생’(男弟)을 기초(基礎)로 하여 허구(虛構)로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 있다.
고대(古代) 왜국(倭國)에는 ‘히메-히코’(姬-彦) 제도(制度)가 있었는데,
‘히메’(姬; ‘ひ+め’)는 ‘태양(太陽)의 딸’이고 ‘히코’(彦; ‘ひ+こ’)는 ‘태양(太陽)의 아들’을 뜻하며, 둘은 ‘남매지간’(男妹之間)이다.
가야(伽倻)는 본래(本來) 태양신앙(太陽信仰)을 가진 나라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낱말이 생겨났다고 보인다.
가야(伽倻)의 전신(前身)인 ‘변진’(弁辰)은 ‘진국’(辰國)을 종주국(宗主國)으로 받드는 나라이었고,진국(辰國)은 ‘태양(太陽)의 나라’ 즉 태양신앙(太陽信仰)을 가진 나라이었다.
발해(渤海)의 옛 이름인 ‘진국’(震國) 또는 ‘진단’(震檀)도 마찬가지이다.
이두식(吏讀式) 표현(表現)인 ‘발해’(渤海; 뜻=‘밝은 해’?)라는 이름이 태양신앙(太陽信仰)을 표현(表現)하기에 더욱 적절(適切)하였다고 보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의 ‘왜’(倭)에 관한 기록(記錄)으로 다시 돌아가면,
‘야마토’(邪馬壹; 邪馬臺)국(國)의 ‘여왕’(女王) 1명과 ‘남자 동생’(男弟) 1명은 김수로(金首露)의 딸 묘견(妙見) 공주(公主)와 남동생 선견(仙見) 왕자(王子)라고 보인다.
그 이유(理由)를 구체적(具體的)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선견(仙見) 왕자(王子)는 ‘거등왕’(居登王)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硏究者)도 있으나, 거등왕(居登王, ?~259년)의 아들은 1명이고 왕위(王位)를 이어받아 금관가야(金官伽倻) 제3대 마품왕(麻品王, ?~291년)이 되었기 때문에 납득(納得)할 수 없다.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그 여왕(女王)이 위(魏)나라에 사신(使臣)을 처음 보낸 것은 경초2년(景初二年)=238년[“양서”(梁書) 경초3년(景初三年)=239년]이며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봉호(封號)를 얻었다.
아무튼 ‘히미코’(卑彌呼; 비미호) 여왕(女王)은 실존(實存)하였던 인물(人物)인데,
173년에 신라(新羅)로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한 것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三國史記”=阿達羅尼師今 二十年夏五月 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
“후한서”(後漢書)에도 왜국(倭國)의 전란(戰亂)이 기록(記錄)되었는데,
그 시기(時期)는 후한(後漢)의 환제(桓帝)-영제(靈帝) 치세(治世)의 때로서 146년~189년이다.
이는 “수서”(隋書)의 기록(記錄)과 일치(一致)한다.
[“後漢書”=桓靈閒 倭國大亂 更相攻伐 歴年無主 有一女子名曰卑彌呼 年長不嫁 事鬼神道能以妖惑衆 於是共立爲王]
[“隋書”=桓靈之間 其國大亂 遞相攻伐歴年無主 有女子名卑彌呼 能以鬼道惑衆 於是國人共立爲王]
다만, “양서”(梁書)와 “북사”(北史)에서는 후한(後漢)의 영제(靈帝) 광화(光和) 년간(年間) 즉 178년~184년이라고 한다.
[“梁書”=漢靈帝光和中 倭國亂 相攻伐歴年 乃共立一女子卑彌呼爲王 彌呼無夫壻 挾鬼道 能惑衆]
[“北史”=靈帝光和中 其國亂 遞相攻伐 歴年無主 有女子名卑彌呼 能以鬼道惑衆 國人共立為王 無夫]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첫째 아들 즉 금관가야(金官伽倻) 제2대 거등왕(居登王)의 재위(在位) 기간(期間)이 199년~259년이므로,
시기적(時期的)으로 거등왕(居登王)이 금관가야(金官伽倻)를 통치(統治)한 것보다 먼저, 그의 형제자매(兄弟姉妹)인 묘견(妙見) 공주(公主)와 선견(仙見) 왕자(王子)가 왜국(倭國)을 통치(統治)한 때와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거등왕(居登王)의 재위(在位) 기간(期間)이 정확(正確)하지 않을 수 있으나,
그들 모두가 수로왕(首露王)의 자손(子孫)이라는 것을 감안(勘案)하면 같은 세대(世代)이므로 가능성(可能性)은 충분(充分)하다고 보인다.
<위키백과(한국어, 일본어)>에 따르면, ‘히미코’(卑彌呼; 비미호)의 출생년대(出生年代)가 175년이지만 분명(分明)하지 않고, 사망년대(死亡年代)는 248년이라고 한다.
‘히미코’(卑彌呼; 비미호)가 173년에 신라(新羅)로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記錄)을 신뢰(信賴)한다면, 그녀의 출생년대(出生年代)를 175년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無理)가 있다.
그녀의 사망년대(死亡年代)는 중국(中國)의 역사기록(歷史記錄)에 나오므로 일단(一旦) 인정(認定)할 수 밖에 없다.
“양서”(梁書)에 따르면, 240년~249년 즉 정시(正始) 년간(年間)에 ‘히미코’(卑彌呼; 비미호)가 사망(死亡)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記錄)에 따르면, 히미코(卑彌呼; 비미호)는 148년에 태어나 179년에 ‘야마토’(邪馬台)국(國)의 여왕(女王)이 되어 69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99살이던 247년에 사망(死亡)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실적(現實的)으로 그 나이를 그대로 믿을 수 없지만, 신화적(神話的)인 요소(要素) 때문에 과장(誇張)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實際) 나이는 어느 정도(程度)이었을까?
고대(古代)의 역사기록(歷史記錄)을 완전(完全)히 무시(無視)하기도 어렵다.
지금까지 각종(各種) 역사기록(歷史記錄)을 살펴본 결과(結果), 시기(時期)에 오차(誤差)가 발생(發生)하므로 논란(論難)의 여지(餘地)가 남아있고,
일본역사학계(日本歷史學界)에서도 ‘히미코’(卑彌呼; 비미호)를 여러 인물(人物)로 비정(比定)하는 학설(學說)들이 제기(提起)되었지만,
야마토(邪馬壹; 邪馬臺)국(國)의 여왕(女王) 1명만을 살펴보는 것보다는 ‘그녀의 남자 동생(男弟) 1명’을 함께 감안(勘案)하여야 한다.
왜국(倭國)의 ‘히메-히코’(姬-彦) 제도(制度)와 통치(統治) 시기(時期)를 고려(考慮)한다면, 그들을 김수로(金首露)의 딸 묘견(妙見) 공주(公主)와 그녀의 남동생 선견(仙見) 왕자(王子)라고 보는 것은 타당(妥當)하다고 생각된다.
‘묘견’(妙見)과 ‘선견’(仙見)이라는 이름이 암시(暗示)하는 바가 많다.
따라서 필자(筆者)는 아래의 <자료 2>에 나오는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 (故) 이종기 선생님의 견해(見解)에 동의(同意)하는 것이다.
다만, ‘야마토’(邪馬壹; 邪馬臺)국(國)의 위치(位置) 비정(比定)은 제외(除外)한다.
문제(問題)는 신어문(神魚文) 또는 쌍어문양(雙魚紋樣)인데, 가야(伽倻) 시대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고려(高麗) 시대 이후 또는 조선(朝鮮) 시대에 허황옥(許黃玉)의 후손(後孫)이 만들었다는 견해(見解)도 있다.
일본(日本)의 정사(正史) ‘일본서기’(日本書紀; にほんしょき; 니혼쇼키)에 ‘히미코’(卑彌呼; 비미호) 여왕(女王)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데, 그 이유(理由)는 ‘신공황후’(神功皇后; じんぐうこうごう; 진구-코-고-, 170년~269년)와 동일시(同一視)하였고, 그 공백(空白)을 채우기 위하여 기년(紀年)에 120년을 추가(追加)하였다고 연구자(硏究者)들은 주장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편집자(編輯者)들이 ‘히미코’(卑彌呼; 비미호) 및 그 후손(後孫)들의 역사(歷史)를 지우기 위하여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치세(治世) 기간(期間)을 ‘이주갑’(二周甲; 120년) 인상(引上)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금부터는, 일본(日本)에서도 여러 학설(學說)이 제기(提起)되었던, ‘邪馬臺’(일본식 표기=‘邪馬台’)를 발음(發音)하는 방법(方法)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 발음(發音)은 여러 가지인데, 한국식(韓國式)으로는 ‘야마대’ 또는 ‘사마대’라고 하며, 일본식(日本式)으로는 ‘야마타이’ 또는 ‘야마토’라고 읽는다.
때로는 ‘邪馬臺’(邪馬台)를 ‘耶馬臺’(耶馬台)라고도 표기(表記)하지만, 그 발음(發音)은 마찬가지이다.
<한자사전(漢字辭典)>에 따르면,
‘邪’는 그 뜻에 따라 발음이 2가지로 구분되는데, i) ‘사’는 간사하다(不正姦思), 사기(不祥)라는 뜻으로, ii) ‘야’는 축축한 땅(下地), 그런가(語助疑辭), 땅 이름(地名), 물 이름(水名)으로 새긴다.
‘耶’는 i) 어조사(語助辭), 그런가(疑問辭), 아버지(爺)로 새길 때에는 ‘야’로 발음하고, ii) 간사(奸邪)하다는 뜻으로는 ‘사’로 발음한다.
‘臺’의 한국식(韓國式) 발음은 ‘대’이지만 ‘台’의 발음은 ‘태’, ‘이’, ‘대’ 3가지이다.
‘台’는 ‘臺’(대)의 속자(俗字)이며, 그 뜻이 ‘돈대’(墩臺) 즉 ‘축토고이관사방자’(築土高而觀四方者;흙을 높이 쌓아 사방을 볼 수 있는 곳)인 경우에는 ‘대’라고 발음한다.
[출처=존 한자사전, http://www.zonmal.com/]
일본식(日本式)으로 ‘邪馬台’를 ‘야마타이’(やまたい)라고 발음하는데, ‘야마’(やま)는 타당(妥當)하며 ‘타이’(たい)가 문제이다.
일본(日本)에서 ‘邪馬臺’의 ‘臺’는 ‘台’로 대체(代替)되었고, 일반적(一般的)으로 ‘台’를 ‘타이’(たい)라고 읽는 데서 유래(由來)한다. 물론 ‘다이’(だい)라는 발음도 있다.
즉 ‘태’를 ‘타이’(たい)로, ‘대’를 ‘다이’(だい)로 발음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래에 인용된 <자료 6>에 따르면,
‘야마토’(邪馬台; やまと)를 ‘타밀어’(Tamil Language)로는 ‘사마테’, ‘사마타이’ 또는 ‘사마토’로 발음하였고, ‘싱할리어’(싱할라어; Sinhala Language)로는 ‘야마타이’ 또는 ‘야마토’라고 발음하였다고 한다.
놀랍게도, ‘싱할리어’의 발음이 지금의 일본식(日本式) 발음과 똑같다.
‘邪’를 ‘사’로 읽으면 ‘타밀어’(Tamil Language)이고, ‘邪’를 ‘야’로 읽으면 ‘싱할리어’(싱할라어; Sinhala Language)가 되는 것이다.
공교(工巧)롭지만, ‘타밀어’(Tamil Language)와 ‘싱할리어’(싱할라어; Sinhala Language)는 한자(漢字)의 발음(發音)과 어떻게 서로 연결(連結)되는 것일까?
한편, ‘邪馬臺’(邪馬台)를 ‘야마토’(やまと)라고 발음(發音)하는 것은 이두식(吏讀式) 표현(表現)이라고 보는 경우이다.
그 근거(根據)를 제시(提示)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日本)의 고대(古代) 가집(歌集)으로 알려진 “만엽집”(萬葉集; まんようしゅう; 만요-슈-)에서 사용된, 향찰(鄕札)이나 이두(吏讀)와 비슷한, ‘만요-가나’(万葉仮名; まんようがな)라고 불리는 독특(獨特)한 표기법(表記法)을 사례(事例)로 들 수 있다.
“만엽집”(萬葉集)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백제계(百濟系) 가인(歌人)들은 ‘倭’(왜)라는 한자(漢字)를 쓰면서 ‘야마토’(やまと)라고 훈독(訓讀)하였다.
반면, 대다수의 신라계(新羅系)-가야계(伽倻系) 가인(歌人)들은 한자(漢字)의 발음(發音)만을 차용(借用)하여 ‘夜末等’ 등으로 표기(表記)하면서 ‘야마토’(やまと)라고 읽었다.
그러나 후대(後代)에는 백제계(百濟系)-고구려계(高句麗系), 신라계(新羅系)-가야계(伽倻系) 가인(歌人)들이 두 가지 방식(方式)을 점차(漸次) 섞어서 사용하게 되었다.
“만엽집”(萬葉集)에 수록(收錄)된 노래 중에서도 그 창작(創作) 시기(時期)가 늦은 것일수록 지금의 일본어(日本語)에 가깝게 되었다.
[출처=“日本語の発見”, 박병식(朴炳植), 學習硏究社, 1987년, 日本 東京]
또한 “만엽집”(萬葉集)에는 ‘야마토’(やまと)라는 낱말이 ‘총61회’ 사용되었다.
그 중에서 ‘也麻等’, ‘夜麻登’, ‘夜麻等’, ‘夜末等’, ‘夜萬登’, ‘八間跡’, ‘山常’ 등이 1회부터 4회까지 표기(表記)되었는데 총10회이고, ‘山跡’ 총17회, ‘日本’ 총15회, ‘倭’ 총19회 사용되었다.
이들은 모두 ‘야마토’(やまと)라고 음독(音讀) 또는 훈독(訓讀)되었다.
중요한 점은, ‘日本’과 ‘倭’를 음독(音讀)하지 않고 ‘야마토’(やまと)라고 훈독(訓讀)하였다는 것이다.
‘야마토’(邪馬台; やまと)라는 낱말은, 가야(伽倻)의 전신(前身)인 ‘변진’(弁辰) 12개 나라 중 ‘미오야마’(彌烏邪馬)국(國)의 명칭(名稱)에서 유래(由來)하였다.
그리고 ‘토’(と)의 원래(元來) 발음은 ‘터’이다.
‘터’는 일부(一部) 명사(名詞) 뒤에 붙어 ‘자리’나 ‘장소’(場所)를 나타낸다.
[출처=“萬葉集 枕詞辭典”, 박병식(朴炳植), 小學館, 1990년, 日本 東京]
참고로, ‘미오야마’(彌烏邪馬)국(國)은 나중에 육가야(六伽倻) 중 ‘대가야’(大伽倻)로 발전(發展)한다.
후기(後期) 가야(伽倻)의 역사(歷史)를 알 수 있는 “우륵(于勒)의 12곡(十二曲)”에 따르면,
고령(高靈)의 대가야(大伽倻)를 ‘상가야’(上伽倻)라고도 부르며 일본(日本)에서는 ‘우가야’(うかや;うがや; 위?가야)라고 한다.
그리고 ‘변진’(弁辰) 12개 나라 중 ‘안야국’(安邪國; 安羅國?)에서 유래(由來)한 함안(咸安)의 아라가야(阿羅伽倻; 安羅伽倻)를 ‘하가야’(下伽倻)라고도 하며 일본(日本)에서는 ‘아라가야’(あらかや;あらがや; 아래?가야)라고 한다.
결국, 일본식(日本式) 발음인 ‘우가야’(上伽倻)와 ‘아라가야’(下伽倻)는 ‘上’과 ‘下’를 각각(各各) ‘우’와 ‘아라’로 훈독(訓讀)하는 이두식(吏讀式)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변진’(弁辰) 12개 나라 중 ‘구야국’(狗邪國)에서 유래(由來)한 금관가야(金官伽倻)를 ‘하가야’(下伽倻)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하가야’(下伽倻) 즉 아라가야(阿羅伽倻; 安羅伽倻)는 금관가야(金官伽倻), 대가야(大伽倻)와 함께 육가야(六伽倻) 연맹(聯盟) 중에서 상대적(相對的)으로 강한 세 나라에 포함(包含)되었기 때문이다.
후기(後期) 가야(伽倻)의 맹주(盟主)는 ‘대가야’(大伽倻; 上伽倻)와 ‘아라가야’(阿羅伽倻; 安羅伽倻;下伽倻)이었다.
전기(前期) 가야(伽倻)의 맹주(盟主)이었던 금관가야(金官伽倻)를 ‘본가야’(本伽倻)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에는 ‘변진’(弁辰) 12개 나라를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접도국(接塗國),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순시국(古淳是國), 반로국(半路國 혹은 半跛國), 악노국(樂奴國),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감로국(甘路國), 구야국(狗邪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안야국(安邪國), 독로국(瀆盧國)으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한편, 일본(日本)의 역사기록(歷史記錄)인 “고사기”(古事記; こじき; 코지키)에는 ‘夜麻登’, “일본서기”(日本書紀; にほんしょき; 니혼쇼키)에는 ‘夜摩苔’, ‘夜莽苔’, ‘揶莽等’, ‘野麼等’, ‘野麻登’ 등으로 표기(表記)되었다.
중국(中國)의 “수서 왜국전”(隋書 倭國傳)에는 ‘邪摩堆’라고 하였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에는 ‘邪馬臺’(邪馬台)라고 나온다.
‘登’, ‘等’, ‘苔’, ‘堆’, ‘臺’(‘台’)라는 한자(漢字)의 고대음(古代音)에는 모두 ‘어’라는 모음(母音)이 들어간다.
그래서 일본(日本)의 학자(學者)들은 그것들을 모두 ‘을류’(乙類)로 구분하고 있다.
실제의 발음은 모두 ‘토’(と)라고 하며 ‘乙と’라고도 표기한다.
[출처=http://www.k3.dion.ne.jp/~kodaira/xyz1106a.htm]
불행(不幸)하게도, 지금의 ‘카나’(仮名; かな)로는 모음(母音) ‘어’를 그대로 표기(表記)하거나 발음(發音)할 수 없다.
‘카나’(仮名; かな)가 본격적(本格的)으로 도입(導入)된 이후에는, 표기(表記)하거나 발음(發音)할 수 있는 모음(母音)의 개수(個數)가 ‘만요-가나’(万葉仮名; まんようがな)의 경우보다 줄어들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에는 ‘邪馬臺’(야마대)가 ‘邪馬壹’(야마일)로 표기(表記)되었는데,
이것 때문에 ‘邪馬臺’(邪馬台)와 ‘邪馬壹’(邪馬壱)은 그 명칭(名稱)과 위치(位置)가 서로 다른 별개(別個)의 나라(國)이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硏究者)도 있다.
예(例)를 들어, ‘邪馬臺’(邪馬台; やまと; 야마토)는 일본열도(日本列島) ‘혼슈-’(本州; ほんしゅう)의 ‘키나이’(畿内; きない)에 있었고, ‘邪馬壹’(邪馬壱; やまい; 야마이)는 ‘큐-슈-’(九州; きゅうしゅう)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명칭(名稱)에 있어서, ‘壹’(뜻=‘하나’)이라는 한자(漢字)는 이두식(吏讀式) 표현이고, 훈독(訓讀)하여 ‘하토’(はと)라고 발음된다고 필자(筆者)는 생각한다.
지금의 일본어(日本語)로는 ‘하나’(壹)라는 뜻으로 ‘히토’(ひと)라고 발음하며, ‘처음’(初)이라는 뜻으로는 ‘하츠’(はつ)라고 발음한다.
따라서 ‘邪馬壹’는 ‘야마하토’(やまはと)이고 ‘하’ 발음은 소실(消失)되어 ‘야마토’(やまと)라고 발음되므로, ‘邪馬臺’(邪馬台)와 ‘邪馬壹’(邪馬壱)은 둘 다 ‘야마토’(やまと)라고 발음되어야 한다.
즉 ‘邪馬臺’의 ‘臺’(대) 및 ‘邪馬壹’의 ‘壹’(일)은 모두 ‘자리’나 ‘장소’(場所)를 나타내는 낱말 ‘터’의 이두식(吏讀式) 표현이고, 게다가 음독(音讀)이 아니라 훈독(訓讀)하여야 되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양서”(梁書), “북사”(北史), “수서”(隋書)에는 ‘邪馬壹’(야마일)이 아니라 ‘邪馬臺’(야마대)로 기록(記錄)되어 있으므로, 두 글자가 매우 비슷한 탓에 ‘臺’가 ‘壹’로 잘못 기록(記錄)되었다고 보아도 무방(無妨)할 것이다.
‘야마토’(やまと)는 원래(元來) 한 곳에 있었는데 후대(後代)에 점차(漸次) 영토(領土)를 확장(擴張)하였고, 그 위치(位置)를 불문(不問)하고, 그 나라의 이름은 ‘야마토’(やまと)이었다고 필자(筆者)는 생각한다.
지금도 일본(日本)에서 ‘大和’(대화)를 ‘야마토’(やまと)라고 훈독(訓讀)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 작은 나라들로 구성된 왜국(倭國)의 맹주(盟主)는 ‘야마토’(やまと)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래의 <자료 6>에 따르면, ‘邪馬臺’(邪馬台; やまと; 야마토)를 ‘邪馬壹’(邪馬壱; やまい; 야마이)로 발음하는 ‘타밀어’(Tamil Language)나 ‘싱할리어’(싱할라어; Sinhala Language)는 없다.
결론적(決論的)으로 ‘邪馬臺’, ‘邪馬台’, ‘邪馬壹’, ‘邪馬壱’ 등으로 표기되지만, 그 발음은 모두 ‘야마토’(やまと)라는 것이다.
참고로, “계림유사”(鷄林類事)에 따르면, 고려(高麗) 시대에 숫자(數字) ‘1’(壹; 壱)은 이두식(吏讀式)으로 ‘河屯’(하둔)이라 표기(表記)되었고 ‘하두’ 또는 ‘하도’라고 발음(發音)되었다고 한다.
김수로(金首露)의 ‘首露’ 또한 ‘우두머리’라는 뜻의 이두식(吏讀式) 표현인데, 그 발음은 ‘마로’이다.
‘首露’(마로)는 ‘마립간’(麻立干)의 ‘麻立’(마립)과 비슷한 것인데, ‘麻立’은 ‘마리’(머리?)의 이두식(吏讀式) 표현이고 ‘干’은 ‘汗’(Khan; 칸)과 비슷한 것이다.
‘麻呂’(まろ; 마로)와 ‘麿’(まろ; 마로)는 고대(古代) 일본(日本)의 남자(男子) 귀족(貴族) 이름에 주로 사용(使用)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とよとみ ひでよし, 1536년~1598년)의 어릴 적 이름은 ‘히요시마루’(日吉丸; ひよしまる)인데, ‘丸’(まる; 마루)는 ‘麻呂’(まろ; 마로) 또는 ‘麿’(まろ; 마로)에서 유래(由來)한 것이다.
하여간(何如間), 훈독(訓讀)만 하거나 음독(音讀)과 훈독(訓讀)을 섞어서 사용하는 이두식(吏讀式)표기를 잘 모르면, 본래(本來)에 가까운 발음을 알 수 없다.
문제(問題)는, ‘훈독’(訓讀)의 방법(方法)이 아직까지 체계적(體系的)으로 통일(統一)되어 있지 않아서 견해(見解)의 차이(差異)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耳懸鈴 鼻懸鈴; 이현령 비현령)가 되기 쉽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일본(日本)의 역사학자(歷史學者)들도 그 유명(有名)한 ‘야마토’(邪馬台)국(國)의 정확한 위치(位置)를 아직까지 확정(確定)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매우 다양(多樣)한 학설(學說)들이 나왔는데, 대부분(大部分) 그 위치(位置)를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찾고 있다.
비교적(比較的) 최근(最近)에 일본(日本)의 언론(言論) 매체(媒體)에서 거론(擧論)된 것은, 일본열도(日本列島)의 ‘시코쿠’(四國; しこく)라는 섬에 비정(比定)한 학설(學說)이다.
[출처=“邪馬台国は間違いなく四国にあった”, 大杉 博(おおすぎ ひろし; 오-스기 히로시), たま(타마)出版, 1992년, 日本 東京]
예외적(例外的)으로, 고대(古代) ‘야마토’(邪馬臺; 邪馬台)국(國)은 지금의 ‘대만’(臺灣) 섬이었다고 주장한 일본(日本)의 연구자(硏究者)도 있다.
이 학설(學說)은 <대륙사관(大陸史觀)>에 가까운 것이라고 보인다.
그 밖에도 지금의 ‘오키나와’(沖縄)나 ‘자바’(Java)=‘자와’(Jawa) 섬에 비정(比定)한 학설(學說)도 있다.
다시 본론(本論)으로 돌아가면,
김수로(金首露) 일족(一族)이 가야(伽倻)에 도래(渡來)하기 이전(以前)부터,
가야(伽倻)의 전신(前身)인 변진(弁辰) 또는 변한(弁韓) 세력(勢力) 등이 지리적(地理的)으로 가까운 왜국(倭國)에 먼저 진출(進出)하였을 것이고,
그들이 여러 곳에 정착(定着)한 후에는 각각(各各) ‘작은 나라’ 즉 분국(分國)을 이루었다고 보이므로,
나중에 합류(合流)한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세력(勢力) 즉 김수로왕(金首露王)의 “7명의 아들” 그리고 “1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은 각각(各各) 그들의 정착지(定着地)를 달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에서 김수로(金首露)의 딸 ‘묘견(妙見)=신녀(神女)’는 ‘야마토’(邪馬臺; 邪馬台)국(國)의 여왕(女王)으로 추대(推戴)되었다.
지금까지 인용(引用)된 여러 자료(資料)를 검토(檢討)한 결과(結果),
가야(伽倻)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자손(子孫) 대부분(大部分)이 왜국(倭國)에 진출(進出)한 것으로 정리(整理)할 수 있다.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일등(一等) 공신(功臣) 김유신(金庾信)은 금관가야(金官伽倻) 김수로(金首露)왕(王)의 12대손(12代孫)이었으므로,
김수로(金首露)의 후손(後孫)들이 왜국(倭國)과 삼국(三國)에 끼친 영향(影響)은 매우 큰 것이었다.
그 밖에도,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비(妃) 허황옥(許黃玉, 33년?~189년)은 본래(本來) 인도(印度)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公主)로서, 배를 타고 가야(伽倻)에 왔다고 알려져 있다.
‘인도’(印度)와 ‘배’(船舶)라는 낱말이 함께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해양세력(海洋勢力)의 일족(一族)이라고 생각된다.
그녀의 나이 156살은 수로왕(首露王)의 나이와 함께 논란(論難)이 되고 있으나, 이는 가야(伽倻) 사람들이 자신(自身)의 시조(始祖)에 신화적(神話的)인 요소(要素)를 포함(包含)하고자 과장(誇張)된 표현(表現)이 있던 것으로 사료(思料)되고 있다.
[출처=위키백과(한국어)]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은 태국(泰國)에도 식민지(植民地)를 구축(構築)하였다고 한다.
혹자(或者)는 허황옥(許黃玉)이 인도(印度)를 떠나 태국(泰國)을 거쳐 중국대륙(中國大陸) 사천성(四川省)의 보주(普州)로 이주(移住)한 후에 가야(伽倻)에 도래(渡來)한 것으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이것은 차(茶)의 전래(傳來)를 근거(根據)로 하는데,
인도(印度) 동북부(東北部)의 아삼(Assam)은 차(茶)의 생산지(生産地)이고, 중국대륙(中國大陸)의 사천성(四川省) 및 운남성(雲南省)은 차(茶)의 발상지(發祥地)라고 하며, 허황옥(許黃玉)이 가져온 차(茶)는 중국대륙(中國大陸)의 것이라고 한다.
차(茶)나무의 원산지(原産地)에 관하여는, “인도(印度)와 중국대륙(中國大陸) 남부(南部)의 것은 원종(原種)이 아니고 재배품종(栽培品種)이다”라는 견해(見解)도 있다. 차(茶) 문화(文化) 또한 중원(中原)을 둘러싼 ‘사이’(四夷)의 ‘몽골리안’(Mongolian)이 만들었다는 견해(見解)이다.
[참고=http://www.seoje.com/calture20.htm]
아래에 인용된 <자료 4>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스리랑카(Sri Lanka; Ceylon) 최초(最初) 왕(王) ‘비자야’(Vijaya, 재위 기원전 543년~504년) 설화(說話)와 금관가야(金官伽倻) 시조(始祖) ‘김수로’(金首露, 42년?~199년) 왕(王)설화(說話)는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체적(具體的)으로 어느 시기(時期)에 ‘비자야’(Vijaya) 설화(說話)를 기초(基礎)로 하여 ‘김수로’(金首露) 설화(說話)가 만들어졌을까?
‘비자야’(Vijaya) 설화(說話)는 사실(史實)이고, ‘김수로’(金首露) 설화(說話)는 가공(架空)의 허구(虛構)일까?
결론적(結論的)으로, 가야(伽倻)와 인도(印度)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關係)가 있었다고 정리(整理)할 수 있다.
그리고 아래에 인용된 <자료 5>에 따르면,
“성염색체(性染色體) 유전자(遺傳子)는 다음 세대(世代)가 되면 사라지지만 상염색체(常染色體) 유전자(遺傳子)는 수많은 세대(世代)를 거쳐도 그 흔적(痕跡)이 계속 남는다”고 하며,
22쌍의 상염색체(常染色體) 유전자(遺傳子)를 분석(分析)한 결과,
한국(韓國)을 비롯한 현재 아시아인(亞細亞人) 대부분의 조상(祖上)이 아시아(亞細亞) 남부(南部)를 통해 유입(流入)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단일이주설’(單一移住說)이다.
반면, 기존(旣存)의 ‘다중이주설’(多重移住說)은 1쌍의 성염색체(性染色體) 중 Y염색체(Y染色體)와 세포기관(細胞器管; Cell Organelles)인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 유전자(遺傳子)를 분석(分析)하여 나온 학설(學說)인데,
선사시대(先史時代)에 아시아(亞細亞)로 인구(人口)가 유입(流入)된 것은 아시아(亞細亞) 남부(南部)와 중앙아시아(中央亞細亞) 두 경로(經路)를 통해 이뤄졌다는 내용이다.
두 학설(學說)은 아시아(亞細亞) 남부(南部)에서 유입(流入)된 인구(人口)의 비중(比重)이 크고 작은 것에 차이(差異)가 나고,
그 연구(硏究) 결과(結果)의 신뢰성(信賴性)에도 의문(疑問)이 제기(提起)되지만,
먼 옛날 어느 시기(時期)에 ‘벼농사’(稻作) 문화(文化)를 가진 남방계(南方系) 사람들이 흑조(黑潮)등의 해류(海流)를 타고 대륙(大陸)을 경유(經由)하여 반도(半島)나 열도(列島)에 도래(渡來)하는 것 자체는 전혀 불가능(不可能)한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그 사람들의 이름이 허황옥(許黃玉)이든 무엇이든 상관(相關) 없는 일이다.
일반적(一般的)으로 ‘벼농사’(水田 稻作; 수전 도작)는 북방(北方)의 문화(文化)가 아니며, ‘고인돌’(支石墓; Dolmen; 돌멘) 분포(分布) 지역에 관련된다고 한다.
기존(旣存)의 상식(常識)과 달리, ‘벼농사’(稻作) 문화(文化)가 기존(旣存)의 학설(學說)들이 제시(提示)한 것과는 정반대(正反對)의 방향(方向)으로 전래(傳來)되었을 가능성(可能性)도 있다.
그 증거(證據)를 찾아보는 것도 향후(向後) 연구과제(硏究課題)이다.
지금까지는 여러 연구자(硏究者)들이 <반도사관(半島史觀)>에 기초(基礎)하여 자료(資料)를 분석(分析)하였으나,
이제부터는 <대륙사관(大陸史觀)>에 따라 지배층(支配層)이었던 김수로(金首露)와 허황옥(許黃玉)일족(一族)의 이주(移住) 시기(時期)와 장소(場所)를 구체적(具體的)으로 특정(特定) 또는 확정(確定)하여야 한다.
그리고 백제(百濟)-고구려(高句麗), 가야(伽倻)-신라(新羅)의 세력(勢力)이 곳곳에 진출(進出)하여 그 흔적(痕跡)을 남긴 왜국(倭國)은 어디에 있었는지 ‘대략적(大略的)인 강역(疆域)이 아니라’ 주요(主要) 장소(場所)들을 구체적(具體的)으로 밝혀야 할 것이다.
숨겨진 ‘진실’(眞實)을 찾고자,
필자(筆者)는 다시 나침반(羅針盤)을 들고 또 다른 여행(旅行)을 하고자 한다.
(이하, 인용 자료)
<자료 1>
일본(日本)은, 무력(武力)으로 협박(脅迫)하여, 우리나라의 통치권(統治權)을 겁탈(劫奪)한지 5년도 채 못되는 1915년 6월 29일, 조선총독부 경무령(朝鮮總督府警務令)을 포고(布告)하여,「치안상(治安上)의 이유(理由)로, 김해(金海)를 본관(本貫)으로 하는 김씨(金氏)의 족보발행(族譜發行)을 금지(禁止)」시켰다.
경무령(警務令)이란 대체 어떤 명령(命令)이길래, 남의 족보(族譜)의 발행마저 규제할 수 있는 강제력(强制力)을 가졌는가부터 우선 살펴보자.
일본말 사전(辭典)에 따르면, 경무령(警務令)이라는 것은,「국가(國家)의 안전(安全)과 사회공공(社會公共)의 질서(秩序)를 지키기 위하여, 국민에게 명령하고, 강제(强制)하여, 그 본래의 자유를 제한(制限)하는 명령(命令)」이다.
서기(西紀) 1985년에 실시한 국세조사(國勢調査)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274종의 성씨(姓氏)가 있는데, 김씨는 그 가운데 하나다. 더구나, 그 김씨에게는 자그마치 285가지의 본관(本貫)이 있으며, 김해 김씨(金海 金氏)는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 김해 김씨의 족보가, 왜 「일본(日本)의 국가안전(國家安全)과 사회공공(社會公共)의 질서(秩序)를 해친다」고 일본정부(日本政府)는 생각했을까? 그 수수께끼를 풀자면,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김해 김씨의 족보(族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서기(西紀) 1864년(甲子年)에 발행되어 전래(傳來)되어 오는 김해 김씨의 족보(族譜)에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에 쌓인 구절이 보인다.
“김해 김씨의 시조(始祖)인 수로왕(首露王)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부터 열째까지의 일곱 아들은, 세상이 되어가는 꼴을 비관(悲觀)하여, 구름을 타고 나라를 떠났다.”
김해 김씨의 족보(族譜)에 있는 수수께끼 같은 이 구절이, 일본 정부로 하여금, 족보의 간행(刊行)을 금지시켜야 할 정도로 「일본(日本)의 국가안전(國家安全)과 사회공공(社會公共)의 질서(秩序)를 해친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출처=http://breaknews.com/new/sub_read.html?uid=75833§ion=section4]
<자료 2>
가야(伽倻)와 일본(日本)의 관계 연구에 평생을 전념한 재야사학자 이종기 선생(1929년~1995년)은 김수로(金首露) 왕(王)의 딸 묘견(妙見) 공주(公主)가 서기 103년 거북선을 타고 규슈(九州)로 건너가 남동생 선견(仙見) 왕자(王子)와 또 다른 가락국(駕洛國)을 세우니, 그것이 ‘야마타이’국(邪馬台國; ‘야마토’국)이며 ‘히미코’(卑彌呼) 여왕(女王)이라고 주장한다. 가야(伽倻)의 한반도 남부 지역과 규슈(九州) 지역에서 발견된 파형동기(巴形銅器)나 신어문(神魚文) 등이 거의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이도흠 교수(한양대 국문학과, 한국학연구소장)도 “고대 일본의 첫 여왕(女王)인 ‘히미코’(卑彌呼)가 가야국(伽倻國) 공주(公主)로, 가락국(駕洛國) 시조(始祖)인 수로왕(首露王)의 두 딸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출처=Weekly경향,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2792]
<자료 3>
其國本亦以男子爲王, 住七八十年, <倭國>亂, 相攻伐歷年, 乃共立一女子爲王, 名曰<卑彌呼>,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壻, 有男弟佐治國. 自爲王以來, 少有見者. 以婢千人自侍, 唯有男子一人給飮食, 傳辭出入. 居處宮室樓觀, 城柵嚴設, 常有人持兵守衛.
그 나라는 본래 역시 남자(男子)가 왕(王)이었다. 칠팔십년(七八十年)후에 ‘왜국’(倭國)에 전란(戰亂)이 있어 서로 공격하고 벌하며 지내다가, 함께 여자(女子)를 왕(王)으로 세웠다. 일명(一名) ‘비미호’(卑彌呼; 히미코)로 귀신을 부리고 능히 백성을 미혹게 하여 이미 성인(成人)인데도 남편이 없다. ‘남자 동생’이 있어 나라의 다스림을 도왔다. 왕(王)으로서 왔는데 보았다는 사람은 적다. 여자(女子) 종 수천이 시중드는데도 오직 ‘남자(男子) 한 명’이 음식을 대고, 나고 들면서 말을 전한다.거처하는 궁실(宮室)과 누각(樓閣)과 성책(城柵)은 엄하게 만들었고, 항상 병사(兵士)로써 지키고 있다.
[출처=“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三國志 魏書 東夷傳 倭)]
<자료 4>
한국(韓國)의 가야(伽倻)나 일본(日本)의 ‘사마태’국(邪馬台國; ‘야마토’국) 등의 한일(韓日) 고대사(古代史)에 등장하는 주요 인명(人名)과 지명(地名)이, 일본어 발음은 물론 우리말 발음과 똑같이 나타나는 나라가 있다. 바로 기원전 6세기 인도(印度)에서 바다를 건너온 ‘비자야’(Vijaya, 재임 기원전 543년~504년)에 의해 ‘싱할리’(Sinhali) 왕국(王國)을 수립한 ‘스리랑카’(Sri Lanka; Ceylon)이다.
‘비자야’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로 승리(victory) 또는 정복(conquest)의 뜻에서 정복자(Conquerer)로 발전한 ‘비자야’(Vijaya) 왕의 이야기는 아시아권 정복개국(征服開國) 설화(說話)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손꼽힌다. 한반도(韓半島)에서 수만리 멀리 떨어진 스리랑카(Sri Lanka)의 역사(歷史)와 지리(地理)에서도 거의 똑같은 내용이 있다. 기원전 6세기 스리랑카(Sri Lanka) 최초 왕‘비자야’ 설화와 수백년 뒤 금관가야(金官伽倻) 시조(始祖) ‘김수로’(金首露, 42년~199년) 왕 설화를 비교하면 그 수수께끼가 풀린다.
두 설화를 비교하면 비자야(Vijaya) 왕과 김수로(金首露) 왕 모두 거북과 관련이 있고 새 땅에 도래,첫 왕국을 열었으며 추종자 수백명의 추대에 의해 초대 왕위에 올랐고, 바다 건너 인도(印度) 땅에서 (타밀인) 왕비를 맞이한다는 점에 있어서 두 설화는 아주 비슷하다.
정복개국 설화의 원형인 비자야(Vijaya) 왕 이야기는 구전(口傳)으로 동남아시아에 널리 펴졌으며 종국에는 한반도까지 영향을 끼쳐 수로왕(首露王)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가야인(伽倻人)이 이를 모방해 ‘대위법’에 의해 수로왕(首露王) 설화 형성에 원용(援用)한 것으로 보인다.
서기 712년과 720년에 잇따라 편찬된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日本書紀) 등 일본인이 펴낸 고대 일본역사서에 두 여왕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들이 왜국 토착민을 무너뜨리고 왕국을 건설한 해외 도래인(渡來人)일 가능성이 커 아예 삭제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伽倻)의 여러 작은 나라를 지칭하는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다라국(多羅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졸마국(卒麻國), 걸찬국(乞飡國), 사이기국(斯二岐國), 염례국(稔禮國), 탁순(卓淳), 탁기탄(啄己呑) 등 12개 소국(小國) 이름이 비자야(Vijaya) 왕과 타밀 출신 둘째 부인 야쇼다라(Yashodhara) 왕비 사이에 낳은 12 자녀 이름과 일치한다.
영어로 표기하면 Kara, Anla, Tara, Kocha, Chata, Sanbanha, Cholma, Kolchan, Saigi, Yomrye, Taksun, Takkitan이 된다. 가야(伽倻) 지역 12개 소국(小國)의 이름이 비자야(Vijaya) 왕의 자녀 이름과 일치한 것은, 당시 가야인(伽倻人)이 비자야(Vijaya) 왕 이야기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출처=Weekly경향,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2792]
<자료 5>
“한국인 조상, 남아시아에서 왔다”
약 7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넘어온 인류는 5만년 전쯤 인도(印度) 남부(南部) 등 살기 좋은 해안가에 정착했다. 얼마 뒤 이들 가운데 일부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으로 이동했고, 또 다른 이들은 더 따뜻한 태평양 섬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북쪽으로 옮겨갔다.
이들 중 일부가 중국을 거쳐 다시 남하했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한반도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긴 여정을 거쳐 비로소 한반도에 터를 잡게 된 것이다.
연구팀은 한국을 비롯한 현재 아시아인 대부분의 조상이 아시아 남부를 통해 유입됐다고 설명한다.이른바 ‘단일이주설’(單一移住說)이다. 이는 선사시대 아시아로의 인구 유입이 아시아 남부와 중앙아시아 두 경로를 통해 이뤄졌다(‘다중이주설’)는 기존 학설과 달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 중앙아시아를 통해 들어온 인류가 아시아 대륙에 자손을 많이 퍼뜨리지 못해 유전적 영향이 미미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연구에 참여한 강호영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연구원은 “다중이주설(多重移住說)을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아시아 남부 해안을 통해 유입된 인류가 아시아인의 주류(主流)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고 말했다.
기존 학설과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은 분석 대상 유전자(遺傳子)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에 따르면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웃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국, 중국, 일본이 유전적으로 가깝다는 점이 입증된 셈이다.
[출처=한국일보,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912/h2009121102330821950.htm]
<자료 6>
‘일본’의 지명들은 ‘스리랑카’ 옛 지명들의 판박이다
약40년의 비자야(Vijaya) 왕 통치기 전후의 스리랑카(Sri Lanka) 역사 및 지리를 더 추적한 결과, 비자야 왕의 첫 국무총리(당시 명칭은 '비미호'였음) 이름이 '묘견(妙見)'이었고,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는 당시 왕궁의 이름임을 확인했다. 당시 스리랑카(Sri Lanka)의 인명, 지명, 관직명 등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및 중국의 삼국지(三國誌) 그리고 일본 책 등에 나오는 것들과 그대로 빼어 박았음을 다음의 이야기가 놀랄 정도로 전해준다. 비교 참고를 위해 한자를 병기했다.
"비자야 왕이 인도에서 거북 모양의 배, 즉 '가라파(Karapa, 河童)'를 타고 스리랑카 섬으로 향하던 중 제일 먼저 목격한 섬은 '츠시마'(對馬)섬이다. 곧 스리랑카 섬의 서부 해안에 도착, 그곳을 '하카다'만(博多灣, 일본 후쿠오카의 해안 지역)이라고 불렀다. 비자야 왕이 추종자들의 추대에 의해 스리랑카 왕국의 초대 왕이 된 뒤 자신의 추종자들 가운데 국무총리 격을 '비미호(卑彌呼)'라고 칭했다.
그 아래에 관리들의 주요 직책들을 '이지마(伊支馬)', '미마승(彌馬升)', '미마획지(彌馬獲支)', '노가제(奴佳鞜)'라고 차례로 정했다. 최초의 비미호(卑彌呼) 이름은 '묘견(妙見) 또는 마헤간'이고 그 동생의 이름은 '선견(仙見) 또는 신견'이었는데 '비미호 묘견'은 '선견'의 조언을 받아 국정을 운영했다.
'비미호 묘견'은 '하카다' 부근에다 비자야 왕의 궁전을 지어 타밀어로 '사마테' 또는 '사마타이'(邪馬台), 싱할리어로는 '야마타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평화(=peace)'를 뜻한다.
비자야 왕은 인도 남부에서 초빙한 타밀 공주 야소다라(Yasodhara)에게서 12명의 딸을 낳는다. 12명의 딸 이름을 영어로 표기하면 Kara(加羅), Anla(安羅), Tara(多羅), Kocha(古嵯), Chata(子他), Sanbanha(散半下), Cholma(卒麻), Kolchan(乞飡), Saigi(斯二岐), Yomrye(稔禮), Taksun(卓淳), Takkitan(啄己呑)이 된다.
비자야 왕과 타밀 출신의 야소다라 공주 사이에 낳은 12명 딸의 이름이 가야 지역에 있던 12개 소국의 이름으로 바뀌며, 최초의 국무총리 명칭 '비미호'(卑彌呼)가 왜국의 초대 여왕 이름으로, 궁전 이름 '사마테'와 '야마토'가 각각 일본 왕국의 이름들로 바뀌었을 뿐 전체적인 큰 틀은 거의 완벽히 일치한다.
일본 지명과 같은 스리랑카 지명들은 거의 전부가 당시 타밀어 발음이었다.
특히 '사마테'를 우리말 발음에 따라 음차(音借)하여 한자로 邪馬台로 표기했는 데 이는 비미호 여왕이 <가야계>였음을 반증한다. '사마테' 또는 '야마타이'는 '평화(Great)'를, '사마토' 또는 '야마토'는 '큰 평화(Great Peace)'를 뜻하는 데 이를 훈차(訓借)한 결과, 한자어로 '대화(大和)'라는 조어(造語)가 탄생한 것이다. 비미호 여왕의 사마태 왕국 시절엔 스리랑카의 명칭들을 우리말 발음대로 한자로 표기했으나 그 이후 야마토 정권부터는 고대 일본식 한자표기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스리랑카 명칭들을 일본식 발음으로 한자 표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에서 大가 '야마'로, 和가 '토'로 발음되는 경우가 야마토(大和) 단어가 유일한 데 이는 스리랑카의 외래어 단어를 훈차(訓借)하여 한자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야마'는 산(山)에서, '토'는 장소(所)에서 그 발음을 따와 만든 것이며 비미호 여왕의 '사마타이'와 관련이 있다고만 막연히 유추할 뿐 그 본질적 어원을 아직 정확히 캐지 못하고 있다.
아시아 전체에서 정복개국 설화로서 가장 오래된 원형 설화로 손꼽히는 스리랑카 초대 왕 비자야 왕 이야기에 나오는 명칭들을 그대로 모방하여 일본의 명칭에 갖다 붙인 것으로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출처=http://blog.naver.com/inkisong76?Redirect=Log&logNo=32778915]
http://cafe.daum.net/chosunsa/POVo/5170 김홍필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