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무비스님이 가려 뽑은 불교 명구 365 ㉻ 10월13일

[자비심]

                                                    10월13일

                                      무단히 걸음 따라 시냇가에 이르니

                                   물소리 냉랭하게 저절로 선(禪)을 설하네.

                               만나는 사물이나 만나는 일들이 참모습 드러내니

                                            공겁(空劫) 이전 소식과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소식을 논할 것이 없어라.

                                        無端逐步到溪邊 流水冷冷自說禪

                                                      무 단 축 보 도 계 변   유 수 랭 랭 자 설 선

                                        遇物遇緣眞體現 何論空劫未生前

                                                      우 물 우 연 지 체 현   하 론 공 겁 미 생 전

                                                     - 나옹 혜근

                                                                     ...........

        근래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선(禪)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다. 그래서 너도나도 선을

   이야기한다. 큰 사찰에서는 선의 대가들을 모셔서 특별 선회(禪會)를 연다. 무차(無遮)선회니

   설선(說禪 ) 법회니 담선(談禪) 법회니 하는 이름들이다. 전국에서 1년 내내 이어진다.

   선원(禪院)도 출가인 전용 선원과 재가인(在家人)을 위한 시민선원들까지 수백 곳에 이르고,

   참선에 참여하는 인원수는 수만여 명이나 된다. 한국불교 역사상 오늘과 같은 선의 붐은

   처음일 것이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있던 신라 시대에도 없었고, 임제선(臨濟禪)이 도입되던

   고려에도 없던 일이다.

        그래서 선은 승속을 막론하고 일상사가 되었다. 불교인· 비불교인을 막론하고 상식이

   되어서, 천주교의 신부가 선에 관한 책을 저술하고 수도원에서 참선을 강의한다.

   서양에서도 식자(識者) 축에 들려면 선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며, 일본에서는 상담(商談)을

   하는 데도 선을 모르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사람들의 일상사에서도 선을 도입하여 글씨에는 선서(禪書)라 하고, 그림에는 선화

   (禪畵)라  하고, 무술에는 선무(禪武)라 하고, 차에는 선차(禪茶)라 하고, 음식에는 선식(禪食)

   이라 하고, 무용에는 선무용(禪舞踊)이라 하고, 음악에는 선악(禪樂)이라 하고, 화장품에는

   선화장품이라 하고, 건축에도 선 스타일이라 한다. 사람이 하는 일 모두 선(禪)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다. 실로 선천선지(禪天禪地)에 선산선수(禪山禪水)며, 대천선세(大千禪世)에

   일편선심(一片禪心) 그대로다.

        선! 이것은 무슨 물건인가? 무슨 물건이기에 이처럼 다양하게 그 쓰임새가 많은가?

   수천 년간 불교에서는 선의 진리를 참구하였고 세상 사람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선의 오묘한

   의미를 헤아리고 찾아다녔다. 고려 말의 나옹 스님은 어느 날 무단히 한 걸음, 두 걸음

   걸어서 시냇가에 이르렀다. 냉랭하게 흐르는 물을 보는 순간 흐르는 물이 저절로 선(禪)을

   설하고 있음을 알았다. 만나는 사물마다 만나는 인연마다 모두가 선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았다.

        선은 여기 이렇게 있었다. 그런데 모두 선을 찾느라고 우주가 생기기 이전의 자기가

   무엇인가를 궁구하고 있다. 또 부모가 나를 낳아주기 전의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마른 똥 막대기를 붙들고 어둠 속에서 헤맨다. 무(無)자 화두를 잡고

   집이 뒤흔들릴 정도로 소리 지르고 있다. 그래도 선이 보이지 않아서 법당 마룻바닥을

   머리로 짓찧어 피를 흘리고 있다.

   판치생모(板齒生毛),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시심마(是甚麽) 등 1천 7백 공안 모두가 선을

   찾아가는 지팡이다. 선은 여기 이렇게 언제나 변함없이 널브러져 있거늘, 마치 태양이

   눈부시게 밝은데도 시각장애인들은 어둡고 캄캄하다고 아우성치는 것과 같다.

        나옹 스님의 말씀대로 선은 바람 소리, 물소리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며, 귀에 들리는

   그대로다. 선은 이렇게 간단명료하고 소박하며 쉽다. 또한 저절로 그러한 것이 선이다.

   그러면서 한편 탈속하고 깊고, 유현(幽玄)하다. 고고하며 아주 조용하다. 선은 단지 그렇기만

   한 것이 아니고 변화가 많다. 고정되고 일정하여 어떤 틀에 박힌 것은 절대 금물이다.

   웅덩이를 만나면 고였다가 경사를 만나면 급하게 흐르고 장애를 만나면 돌아갈 줄도 아는

   것이 또한 선이다. 선방(禪房)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선의(禪意)가

   있으면 그대로 선 생활이 된다. 그와 같은 존재의 이치를 모르면 아무리 선의 깃발을

   펄럭이고 선이라는 글로 도배를 해도 그것은 선이 아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신문화가 선이며, 사람이 만들어낸 것 중에서 최고의

   걸작품이 또한 선이다. 그와 같은 칭송을 받는 선이 다름 아닌 '본래 있는 것'이며

   '저절로 그러함'이다. 물소리, 바람 소리며,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