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는 것은(3)
세상으로 보냅니다
요 17:15-19 / 홍인식 목사
세상과 믿음
세속적인 삶과 우리 신앙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것입니까? 어떤 분들은 믿는 이들은 세상의 일과는 상관하지 말고 그리고 그것에 연연하지 말고 고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고 이 땅위에서는 저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일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발언하거나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정치목사라고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가 믿음과 세상의 일을 분리하는 태도를 갖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무시한 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신앙생활도 우리의 삶의 터전인 ‘이 세상’을 떠나서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잘못되어가고 있는데 믿는 사람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말씀은 바로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 얼마든지 자신이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말씀은 특히 영지주의적인 생각, 세상과 분리되고 또 물질과 영혼이 분리되어 진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펼쳐졌던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영지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고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하찮은 일들을 외면하고 오직 내세, 영적인 세계만을 위하여 살아가는데 인간의 생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하루속히 영혼의 감옥인 육체와 물질적인 세상을 벗어나는 것이 이들이 갖고 있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각이 당시 믿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오늘의 가르침은 충격적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자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하게 드린 아름다운 기도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를 읽다보면 주님의 당시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고 떠나가야 하는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과 제자들을 향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아름다운 본문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세상에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하여 기도드리지 않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내용은 영지주의자들과는 정반대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이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데려가 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1979년에 있었던 인민사원의 980여명 집단자살사건을 비롯해서 수 십 년 동안 심심치 않게 들려왔던 여러 이단 종파들의 집단 자살사건들을 보면 바로 이러한 ‘빨리 이 세상으로부터 나를 데려가 주십시오’ 라는 생각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더러우니 세상과 어울릴 수 없고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예수님과 또 초대교회에서만 있었던 문제는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경우에 믿는 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백로야 까마귀 우는 곳에 가지 말라.’라는 생각으로 이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상관하지 말 것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느 누구도 특별히 믿는 이들이 ‘까마귀 우는 곳에 가지 않으면’ 그 까마귀들한테 누가 하얀 백로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단 말입니까? 까만색 말고도 하얀색이 있음을 누가 알려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세상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에 따르면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데려 가지고 또 분리되어져서는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의하면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분명히 이 세상과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더 나아가고 계십니다. 믿는 이들을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속해있다’는 표현은 소유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 믿는 이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딘가에 속해 있으면 우리는 그 속한 곳의 가치관을 존중해야 하고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속해있다’는 의미는 바로 속한 단체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이 사회에 있지만 이 사회의 가치관에 의해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 사회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지배를 받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두 가지 모습을 경계해야 합니다. 첫 번째 모습은 세상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모습의 교회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 안에만 있다고 생각하여 교회일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며 사회나 그 밖의 장소에서의 일은 세상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모습은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교회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그대로 교회에 밀려들어와서 그대로 재현되는 교회입니다. 교회 직원 선거 때도 금품이 오가고 비방과 소문이 난무하고 부정이 있고 서로 권력투쟁을 하고. 만일 우리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는 교회가 되고 예수님의 기도를 정면으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모습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거룩함을 입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기 위해서는 진리로 거룩히 됨을 입어야 합니다. 주님은 기도하고 계십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주님은 교회에서 자신의 가르침이 왜곡되지 않는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거짓예언자를 조심하라고 말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자신을 성찰하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를 해나가면서도 과연 우리가 진리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있는 가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나고 있는 교회를 하고 있는가를 부지런히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는 거룩해 질 수 없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 움직이지 않는 교회는 단순한 인간들의 단체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실천되지 않는 교회는 형식적인 건물뿐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신학은 교회를 두 가지로 구분하여 왔습니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그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예수님의 정신을 깨닫고 삶의 도처에서 그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영적인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교회가 보이지 않는 교회를 실현해 나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보이는 교회로서 보이지 않는 교회를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으나 속해 있지 않은 거룩한 모임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 우리 안에 예수님의 진리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진리를 갖고 있지 못하면 곧바로 세상과 휩쓸리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혼탁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래 전에 런던에서 공기오염으로 수천 명의 시민들이 병에 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매연으로 오염된 시내공기가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그대로 머물면서 발생한 치명적인 공기오염 사건입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병에 걸렸는데 대부분이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쇠약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육체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살면서 처음으로 황사 현상이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황사가 몰려오게 되면 이런 멘트가 나오곤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1. 창문을 꼭 닫으십시오. 2. 되도록 외출이나 야외 활동을 삼가십시오. 3. 노약자나 환자는 집 안에 머무십시오.” 황사가 심할 때는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몸이 약한 사람들은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로 옷을 입고 있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곧 바로 오염된 세상에 의해 오염되고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그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지 못한 교회는 평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오염된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 안으로 밀려오게 되면 속수무책이 되어 무너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있는 건강한 교회는 어떠한 오염된 정신도 분별해 낼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면역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세상을 향하여 나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진리로 거룩함을 입은 공동체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전에 ‘이정현’이라는 여가수가 부른 노래 중에 ‘바꿔’ 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 ‘바꿔’라는 노래가 어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는데 그것은 그 노래의 가수가 파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바꾸라는 이야기였거든요.
세상을 바꾸는 일을 가수한테 맡겨 놓으시렵니까? 우리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믿는 이들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각자의 맡은 일들을 통하여 이 세상을 바꿔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죽어서 천당만 가면 된다는 생각만 갖고 있어야 되겠습니까? 오늘 주님의 기도내용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세상을 향하여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모른 채 하고 나도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를 희생해 가면서 세상을 바꿔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올바른 삶을 살고 예수님의 정신으로 가득한 거룩한 삶을 삶으로서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21세기 인류의 최대의 화두는 환경오염방지와 창조세계의 보존입니다. 지구환경이 나빠지면 인류의 장래가 불투명해 지는 것 같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로 거룩하게 변화되지 못하고 계속 썩어져 가고 있다면 교회도 그리고 믿는 이들의 장래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성령강림의 사건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정신으로 가득 찬 채 우리의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결단하게끔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생각해 봅니다. 제자들이 세상에서 깨끗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들렸던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이 세상을 향하여 보내면서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왜곡시키지 말고 올바르게 행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믿는 이들은 세상을 등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진리로 거룩함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여 거룩하고 순결하라
요 17:16-22 / 이정익 목사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주일입니다. 우리교회는 1955년 1월 마지막 주일날 창립되었습니다. 그래서 금년으로 59주년을 맞이하게 되고 이제 내년이면 6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함께 하시고 부흥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우리나라에 교회가 약 7만개 정도 있다고 합니다. 해외에는 약 2천 5백개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참 대단합니다. 오늘 한국인은 이 세계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습니다. 또 한국인은 세계 어디를 가든지 가기만 하면 먼저 교회부터 세웁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운 다음에는 꼭 싸웁니다. 틀림없는 현상입니다. 이같은 모습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싸우는 것도 좋은 현상입니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열심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사람이 열심이나 열정이 없으면 싸우지도 않습니다. 잘 싸우는 사람은 대부분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는데 맥아리가 없고 매사에 소극적인 사람들은 싸우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흔히 건물을 교회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예배당입니다. 교회는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을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부름받아 예배드리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름받은 교회들에게는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인 성도들은 거룩을 지향해야 합니다. 거룩해 지려고 노력해야 하고 힘써야 하고 거룩을 흉내라도 내려고 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은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 즉 교회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시면서 교회는 몇가지 조건이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즉 교회에게는 몇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말 씀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여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여기서 진리는 말씀과 복음을 말합니다. 교회에는 반드시 진리, 말씀, 복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성도는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성도가 세상에서 반듯하게 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 이 시대는 교회와 성도에게서 말씀이 사라졌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오늘 설교에 철학과 이론과 내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말씀대로 중심있게 살려는 의지가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힘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제도도 건물도 숫자도 모양도 역사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먼저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1511년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교황청이 있는 이태리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30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는 공무를 마치고 빌라도 계단을 찾아갔습니다. 그 계단은 무릎으로 기어오르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는다는 전설이 있는 계단이었습니다. 루터는 계단을 밑에서부터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옷이 찢기고 살이 터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그래도 특별한 은혜를 입기 위해서 참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다 순간 루터가 깨달았습니다. “이게 아닌데, 고행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데…”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때 루터의 머리속에 로마서의 성구들이 불현 듯 생각났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그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다!” 루터는 그 즉시 일어나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6년간 깊은 묵상을 하고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1517년 9월 31일 95개의 조항을 내 걸은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중세 시대 기독교를 냉철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중세기독교는 형식, 제도, 법, 모양은 아주 세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있었지만 사제들만 읽었고 일반인들에게 보여주지를 않았습니다. 못 읽게 하였습니다. 자국어로 번역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번역하여 일반인에게 읽게 하려고 했다가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화형을 시키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그러니까 중세시대는 외형은 그럴 듯하게 있었지만 말씀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외형은 그럴 듯한데 내면이 텅 빈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쇠락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웅장하고 크고 사람은 많은데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중보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했으면 합니다. 교회는 말씀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거 룩
두 번째 요소는 거룩입니다. 17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은 순결입니다. 거룩과 순결은 교회의 생명의 요소입니다. 요한복음 1:14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의 성육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교회에 말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넘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한해에 50독, 60독 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서 책으로 만들어 아들에게 딸들에게 나눠 주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은 넘치는데 그 말씀이 성육신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씀은 있는데 말씀이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되는 일이 앖다는 말입니다. 즉 말씀화가 안되어 신앙과 불신앙이, 성과 속이 구분이 안되는 것입니다.
어느 처녀가 “이런 배우자를 주세요”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 조건 가운데 하나가 권사 시어머니 말고 집사 시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권사가 얼마나 좋은 직분입니까? 그럼에도 집사 시어머니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처녀는 권사에게서 말씀이 성육신 되지 않은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괜한 일로 권위만 내세우고 고집이나 부리고 주장만 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이중적인 모습에서 그만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무늬만 목사요 장로요 권사이기에 쓸데없이 고집이나 부리니까 교회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말씀은 있는데 그 말씀이 성육신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삶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교회들이 너무 혼탁하고 오염되고 갈등이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성도와 비성도 간의 구분이 없어졌고 성과 속의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가 거룩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꾸만 갈등이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더 가관인 것은 그렇게 싸움을 하면 경찰이 와서 말립니다. 어떤 교회는 두 패로 나뉘어서 한쪽은 1층에서 한쪽은 2층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서로 정의를 말하고 진리를 말합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거룩과 순결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거룩과 순결은 교회 공동체를 떠받치는 힘이고 기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들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외형도 중요하고 역사도 중요하고 숫자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이 거룩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말씀에 충실할 뿐 아니라 이 거룩을 유지하였으면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실력입니다.
하나됨
또 하나는 하나됨 입니다. 교회는 거룩과 순결과 말씀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1절 말씀에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또 에베소서 4장을 보면 “하나님 안에서 부름받은 너희는 십자가를 지시고 화목제물로 죽으신 예수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알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따라 너희도 하나 되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주도 한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분이시니 너희도 하나 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너무 열심을 내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더 많이 일 하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가 되기 위해서 더 애써야 합니다. 오늘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갈등하고 갈라지고 찢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약화되고 거룩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남은 것은 인간주의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무엇보다도 교회공동체가 하나되기 위해서 은사를 발휘해야 합니다. 먼저 온 사람은 나중에 온 사람에게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성격이 독특한 분은 스스로 자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 공동체가 원만히 유지될 수 있습니다. 언어가 거친 분은 절제해야 합니다. 마음대로 내뱉으면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가까운 곳에 사는 분은 멀리서 오는 분을 위해서 차를 두고 걸어오던지 택시를 타고 오던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차를 타고 왔으면 정확히 주차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에 오는 분들에게 지장이 없습니다. 중간선에 애매하게 주차하면 다음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것들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모두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입니다.
한때는 IQ를 중시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능지수가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에는 EQ를 중시했습니다. 감성지수, 인간됨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NQ를 중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NQ는 Network Quotion, 즉 공존지수를 말합니다. 즉 사람들과 얼마나 관계를 잘 운영하고 소통을 이루는가 하는 능력을 재는 지수를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이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공존지수가 탁월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운영해 나가는데 이 공존 지수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공존 지수가 약한 분들은 자꾸만 내 관점 내 생각을 내세우게 됩니다. 그러면 갈등하게 됩니다. 먼저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는 능력부터 길러야 합니다.
거북이 한 마리가 부산에서 서울로 출발을 했습니다. 한참 가는데 지렁이가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디 가냐고 물으니까 서울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렁이에게 내 등에 타라고 했습니다. 한참 가는데 굼벵이가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디 가냐고 물으니 또 서울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서울 가니까 내 등에 타라고 했습니다. 거북이 등에 지렁이와 굼벵이가 함께 타고 서울을 가게 되었습니다. 가다가 굼벵이가 지렁이한테 주의를 주었습니다. “야, 거북이는 되게 빠르다. 번개 같아. 잘못하면 떨어져 죽으니까 꽉 잡아.” 굼벵이 눈에는 거북이가 참 빨랐습니다. 그런데 옆에 토끼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세 존재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굼벵이한테 아무리 거북이가 빨라 보여도 토끼가 보면 거북이는 느림보입니다. 그때 토기가 거북이 보고 느림보라고 놀리면 안됩니다. 거북이는 거북이대로의 장점이 있습니다. 굼벵이도 그렇고 지렁이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관점을 이해하는 것을 소통이라고 합니다. 그 이해 속에서 조화하고 존중하는 것이 하나됨의 요소입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고 존중하는 태도와 능력이 거룩이고 순결입니다. 교회에는 이 거룩과 순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 순결은 말씀이 내안에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 내가 죽고 내가 성육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내가 주님의 성숙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역 할
교회의 요소가 있다면 말씀, 거룩, 순결, 하나됨 그리고 역할일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과 순결이 있어야 기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야 힘과 파괴력이 생기고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거룩은 교회 공동체를 스스로 지키는 울타리이기도 합니다. 오늘 교회가 거룩을 상실해 보십시오. 존재나 가치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것이 버려진 소금입니다. 오늘 교회가 거룩성을 상실하면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고 비난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이런 모습, 이런 역할을 감당했으면 합니다. 그런 모습을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자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께 갑니다. 사람이 많아서 돌아가려다가 지붕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붕을 뜯어냅니다. 여러분은 이 지붕 뚫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지붕이라는 말을 원문으로 보면 헬라어 도마(doma)라는 말로 써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지붕인가 하면 카라몬입니다. 카라몬은 타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예수님이 계시던 집의 지붕이 도마 카라몬 즉 타일로 된 지붕입니다. 오늘말로 말하면 콘크리트로 된 지붕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원문에는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내고(doma dia ton keramon)”라고 써 있습니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내렸습니다. 그 말은 뜯는데 수고와 힘이 들었다는 이야기이고 그 사람이 고침 받은 후에는 그 지붕을 원상복구 해주는데 돈이 많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지붕을 뚫는 것은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혹 지붕을 생각했어도 타일이 깔린 지붕을 보고 뜯을 생각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중풍병자가 고침 받은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마가복음 2:5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이 중풍병자가 그 동료들 때문에 고침 받았다는 말입니다. 여기 이 들것을 들고 지붕을 뚫은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오늘 교회공동체 일원입니다. 오늘 교회에 먼저 온 사람들입니다.
옛날 시골에서 저녁이면 일제히 굴뚝에서 연기가 올랐습니다. 그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은 분명 먹을 것이 없거나 땔감이 없는 집입니다. 그러면 동네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나무 한 짐을 가져다가 헛간을 채워주거나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것이 마을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옛날 순종은 저녁때가 되면 대궐문을 나서서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지를 조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이 있으면 그날 저녁상을 물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세상이 얼마나 건강하였겠습니까? 그것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일이고 정신입니다. 그 힘이 거룩이고 순결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여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십니다. 왜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는가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이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는 제일 큰 교회도 아니고 제일 많이 모이는 교회도 아니지만 말씀과 거룩과 순결과 하나됨이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하여 은사를 발휘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은혜가 넘치고 힘이 생깁니다. 그 힘으로 주어진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요 17:16-17 / 이수영 목사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첫 주일 설교는 그 해의 교회표어를 제목으로 삼아 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습니다. 지난 해에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자"는 표어를 걸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표어대로 우리가 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년의 교회표어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로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 중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잡히시기 전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기도 속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하신 간구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이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루려고 힘써야 하겠고,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그것을 이루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성별한다", "따로 세운다"는 뜻을 갖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바쳐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진리로 거룩하여진다"는 말은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에 일치시키고 그를 섬기는 데에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한 것은 그들 곧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적인 사람들이어서는 안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사람이어야 하고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신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거룩하여질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별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하고 행해야 합니다. 성화는 그러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했는데 진리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진리를 언제나 하나님과 연관시켜 말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진리란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특성이며 본성 그 자체입니다. 구약성경은 종종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시31:5에서는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했고, 사65:16에서는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알 때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진리는 하나님과의,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언급됩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진리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엡4:21-24에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는 진리는 요한복음에서 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입니다. 1:14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했고, 1:17에서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스스로를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우리는 진리라는 것이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살아 움직이는 현실 그 자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그리고 영생과 함께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구원과 새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과 새 창조의 역사를 떠난 추상적 진리를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생명과 삶의 언어입니다. 요17:3에 뭐라고 했습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참 진리는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요8:31-32을 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참 진리는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하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요4:23).
이것은 또한 진리가 신자의 삶과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말해지고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5:8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 말했습니다. 신자들이 거룩해지는 것은 진리로 말미암는 것입니다(17:17). 신자들이란 곧 진리에 속한 사람들입니다(18:37).
따라서 참 진리는 성령과도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14:17)이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분(15:26)이시며,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분(16:13)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서 믿음을 일으키시며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로 그들을 변화시키시며 진리로 새 사람을 창조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일5:6에서는 아예 성령이 곧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이나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성령과 함께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받고자 더욱 힘쓰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속적인 사고나 판단을 좇지 말고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새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어떤 사람의 추종자가 되려 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을 위하여 성별되는 이 2003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만 진리는 발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진리이고 영생입니다. 이 진리 안에서만 우리는 거룩하여질 수 있습니다. 진리로 우리 안의 모든 거짓을 내쫓고 거룩하여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할 수 있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며, 참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 해의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며 실천의 목표입니다.
다 하나가 되라
요 17:17-24 / 김광일 목사
어떤 거지가 길을 가다가 몸이 가려운 나머지, 부자이며 정신적 지도자인 랍비의 집 앞에 서서 대문 기둥에 등을 대고 긁고 있었습니다. 정원을 거닐다 이상한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 본 랍비는 거지를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다음에 먹을 것을 주어 내보냈습니다. 다음날,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거지 부부가 랍비의 집에 찾아와 그 거지처럼 대문 기둥에 등을 비비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 광경을 본 랍비는 그들에게 호통을 치며 쫓아내었다고 합니다. 쫓겨난 거지 부부는 왜 그 거지처럼 대우해 주지 않느냐고 불평을 하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그 거지는 혼자였기에 기둥에다 등을 비벼 긁을 수밖에 없었지만, 너희는 둘이니 서로 등을 긁어줄 수 있지 않느냐? 서로 사랑하여 하나 되지 못하고 얕은 꾀로 살아가려는 너희는 이런 대접을 받음이 마땅하니라.”
날갯짓을 아십니까? 새는 두 날개가 같은 방향으로 서로 균형을 이루며 날갯짓을 하기에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한쪽 날개가 다른 한쪽 날개를 이해하며 보조를 맞추어 날갯짓하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하나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더 높이 날아오르도록 하나 되어야 합니다.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혼자 마음대로 날갯짓을 하다가 결국 추락하고 마는 어리석은 모습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본문 17장은 다락방 강화를 완결짓는 부분으로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고별기도입니다.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구속의 희생제물로 자신을 드리고자 하는 헌신의 기도와 남겨질 제자들과 미래의 모든 세대의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예수의 기도는 장차 영광에 대한 기대감과 성부와 성자 간의 연합을 본받는 거룩한 공동체를 향한 비전으로 충만합니다. 본 장의 1-4절은 성자 자신과 성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어 6-19절은 제자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20-26절은 미래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뚜렷한 주제는 ‘하나됨’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시기를 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승리의 영광 앞에 있는 십자가가 부담스러워서 지지 못하고 있습니까? 아버지와 함께 누릴 영원한 영광을 볼 수 없기에 이 땅의 거짓된 영광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까? 구속받은 교회의 거룩한 일치됨의 비전을 갖지 못하기에 작은 일에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 모습이라면 진실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여기의 ‘다 하나가 되어’는 원어로 ‘히나 판테스 헨 오신’인데 ‘계속해서 하나가 되어’라는 뜻입니다. 이는 존재의 일치가 아니라 뜻과 목적과 감정에 있어서의 일치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공유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다 하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진리로 이루어야
중세교회가 부패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때 진리를 지키려고 일어선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왈덴스 (Waldenses)인들입니다. 당시 천주교 교황 무오설, 마리아 숭배설, 고해성사, 연옥설 그리고 면죄부 등 성경에 없는 교리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왈덴스인들은 진리로 하나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순교의 길을 각오하고 진리 수호의 길을 택했습니다. 진리로 하나를 이루며 끝까지 교황청과 싸웠습니다. 그들은 항복하지 않고 산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왈덴스인의 지도자는 피터 왈도(Peter Waldo)였습니다. 그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전도하였습니다. 가장 성서적이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맞는 진리를 설교하였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설교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왈도는 “나는 사람보다 오히려 하나님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핍박이 더 심해졌습니다. 하지만 왈덴스인들은 흔들리지 않고 스위스의 산속에서 진리로 하나가 되어 살았습니다. 성경을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교황청은 십자군을 만들어 이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왈덴스인들은 진리로 더욱 하나가 되어 순교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산의 동굴 안에서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영향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영국의 위클리프 (John Wycliffe), 프랑스의 장 칼뱅 (Jean Calvin), 독일의 루터 (M.Luther)에게 개혁의 불이 붙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왈덴스인을 찾고 계십니다. 진리로 하나된 왈덴스인의 모습을 말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여기의 ‘진리로’는 원어로 ‘엔 테 알레데이아’인데 삶에 임하는 제자들의 태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악한 자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깨끗해진 자라고 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을 통해 계속 자신을 성별하고 악에 물들지 않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안다고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생활의 근거로 삼아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로 하나가 되는 일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까? 목적지가 분명해도 길을 잘못 들면 결코 이르지 못합니다. 오직 진리라는 도로 위로 달려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과 생각으로 하나가 될 것이 아니라 진리로 하나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둘째로 사랑을 행하여야
미국의 작가 아서 골든 (Arthur Golden)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웃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서로 오고 가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부부가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구를 부수는 요란한 소리도 들립니다. 젊은 부부는 아서를 찾아와 남편은 아내를 흉보고 아내는 남편 흉을 봅니다. 그는 불화한 가정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젊은 부부의 가정이 달라졌습니다.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신기하게 여긴 아서는 가정이 변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냐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젊은 부부가 대답합니다.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서 존경하는 의사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 물었더니 처방을 해주더랍니다. “행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고, 행하기만 하면 도움이 될 텐데” 하면서 가르쳐 준 것이 여덟 단어의 말이었습니다. “So I love him, though I love him-그래서 사랑하고 그래도 사랑하고' 그 뒤로 젊은 부부는 이 말을 입으로 외우면서 '그래서 사랑하고, 그래도 사랑하고'의 태도로 서로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지내는 가운데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여기의 ‘사랑하신 것’은 원어로 ‘에가페사스’ 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합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됨에 어떤 틈이나 불화나 사소한 다툼도 허용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의 어떠한 조직과도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하나됨에 이른 성도가 교회 안에서 분쟁이나 파당을 만드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한 행위입니다. 사랑으로 언제든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시기와 분쟁은 하나됨을 훼방하며 성숙하지 못한 신앙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교회의 일치는 예수 안에서의 사랑과 섬김에 근거합니다. 부디 예수를 본받아 사랑으로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영광을 보이어야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활동했던 제임스 게일 (James S. Gale) 선교사의 ‘한국의 풍물(Korean Sketch)’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게일 선교사는 농부들이 땅을 팔 때 가래질하는 모습에서 감명을 받고 헤버 존스(George Heber Jones)의 글에서 이렇게 인용하였습니다. “재미있는 발명품인 가래는 조선에서 사용하는 농기구로서 노동력을 덜어주는 최고의 기구이다. 그것은 적어도 세 사람이나 다섯 사람이 많은 일을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가래는 긴 나무에 부삽이 달린 것인데 양쪽에 선 사람들이 잡은 끈은 부삽의 가장자리에 매어 있다. 농부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많은 일을 해낸다.” 가래질할 때의 민첩함과 활력에 찬 노래 운율이며 휴식시간의 즐거움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서양 사람의 눈에도 경이롭게 보여질 만큼 우리 조상들은 서민 생활 속에서 아름다운 풍속을 이어왔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가래 자루를 잡은 우두머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은 좌우에서 끝을 잡고 리듬에 맞추어 하나가 되어 삽질을 도와야 일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행위를 자제해야 합니다. 믿는다는 이름으로 이웃을 위한 양보나 덕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영광을 가로막는 행위가 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야 합니다.
본문 24절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여기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은 원어로 ‘데오로신 텐 독산’인데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을 경험하고 참여하고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영광 속에 계시다가 짧은 생을 마치시며 영광을 버리셨으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다시 영광으로 들어가십니다. 그 영광을 혼자만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하나가 되기에 힘쓰는 성도들과 더불어 영광을 보도록 기도하십니다. 이것은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고백한다고 이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며 성경은 그것을 예수를 위한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영광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어느 집사가 암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목사가 찾아갔을 때 휴유증으로 말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글씨를 써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집사가 삐뚤거리는 글자를 써서 내민 쪽지에 이러한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깨달았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목사님, 그동안 집사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나되는 일에 게을리 했습니다. 교회와 하나되지 못하였습니다. 가족과 하나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가 되는 일에 힘써 오셨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가 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말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지체는 많으나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성도의 연합은 몸의 머리 되신 주 안에서의 일치요 하나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먼저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하여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되고 성도 개개인이 건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부디 예수께서 허락하신 진리를 통해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보이신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섬김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된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며 그 영광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의 영광
요 17:17-21 / 오정호 목사1
질병 가운데 '마라스 머스'라는 병명이 있습니다. 못먹어서 생기는 병이 아니라 사랑을 받지 못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전쟁시에나, 시설아동들 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질병입니다. 이 병은 지독해서 정신을 파괴시키고 몸도 파괴시켜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병입니다. 약을 먹어서 나을수 있는게 아닙니다. 사랑을 공급 받을 때 비로소 치유될수 있습니다. 이 지구촌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이 '사랑 결핍증'에 걸린 자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수많은 자들이 아직도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나를 용납해주고,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결핍이 깊어지면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로 느껴지고 결국에는 삶의 회의에 빠져 생명까지도 끊게 됩니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언어를 사용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때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못을 박는 언어를 사용할때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범주에는 네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입술의 언어로 입에서 나오는대로 내뱉는 언어입니다. 일종의 잔소리입니다. 둘째로는 머리(두뇌)의 언어입니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합니다. 셋째로는 가슴의 언어입니다. 남이 기쁠 때 같이 기뻐해주고, 슬플 때 같이 슬퍼해주며 공감하는 것이며, 내 마음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입니다. 이 가슴의 언어가 활발한 가정은 행복한 가정으로 서로를 향한 격려가 있는 가정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언어는 입술의 언어도, 가슴의 언어도, 머리의 언어도 아닌 영혼의 언어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새롭게 변화된 마음에서 나오는 언어입니다.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나서 주님앞에 사랑을 고백하고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가득 부어질 때 다른 사람의 영혼을 둘러 보면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하는 주님의 사랑의 전달자로 쓰임받는 언어입니다. 20절에서 '저희 말'은 '전도의 말', 곧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언어입니다. 불신풍조가 가득찬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믿을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전달되어 온 생명의 복음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전도'를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으로 연상하지만, 위의 관점에서 보면 '영광'입니다. 우리는 전도의 영광을 체험할 때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22절에서 '내게 주신 영광...'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에게 주신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14에서 "... 우리가 그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이 주의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사도들에게 주셨고 흘러 흘러서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에게까지 전달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의 섬김과 전도를 통해 이 영광이 나의 것이 된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도를 정의할 때, '예수믿는 자들이 교회밖에 나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교회의 한 사람이 되게하는 가능한 모든 방법의 총칭'이라 합니다. 이것을 압축하면 '예수믿게 하는 것'이고, 더 압축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길과 진리와 생명과 소망이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전도가 영광인 원리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1.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 관심사를 이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성도가 요즘 마음이 어디로 쏠려 있는지를 알수 있는 방법은 그의 기도내용을 들어보면 알수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가 대부분이면 그 성도의 우선순위는 자녀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17장은 예수님의 최후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잘 관찰해보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청사진이 무엇인지를 알수 있습니다. 20절에서 주님은 대제사장적 중보기도를 하시며 동시에 마지막 유언적 기도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2천년전에 사셨지만 오고오는 세대에 사도들의 복음을 전수받고 이 복음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생명을 얻는 영혼들을 영의 눈을 들어 보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를 향한 구원의 청사진을 이루어 드리는 구체적인 일이 됩니다. 우리가 만일 차선을 앞세우고 최선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열심히 해서 열매를 남겨도 칭찬을 받을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우선순위에 우리 삶의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려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뿐아니라 부활후 승천하시기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였습니다. 문화와 언어 그리고 혈통을 뛰어넘어 주님의 마음의 소원을 이뤄달라는 주님의 부탁이자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28:18,19에도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주께서 분부하신 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상 최대의 명령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탁인 복음을 붙들고 충성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은 20절의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체험하기를 원하면 복음전도의 열정을 가지실 바랍니다. 전도하는 자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인류구원작전을 계획하셨는데 '전도'라는 방법을 통해 인류를 하나님의 자녀 삼기로 하셨습니다. 전도는 주님을 만난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달되는 생명의 복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전도는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2.보냄받은 자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보내다'는 동사가 2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전도는 예수를 만나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자만 할수 있습니다. 전도는 '주께서 나를 이 가정에, 이 지역에, 이직장에 보내셨다'는 확신이 있는자만이 그 사명을 감당할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전도야말로 보냄을 받은자의 특권입니다. 의무이기전에 특권입니다. 의무를 생각하면 마음이 부담스러울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권을 생각하면 내가 전권대사로 보냄을 받았는데 침묵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복음을 들을수 없고, 저들의 영혼은 마라스머스 병에 걸려 '영혼의 사랑 결핍증'에 걸려 죽어갑니다. 그 영혼을 깨우기 위해서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는 말밖에 없습니다. 한 나라의 외교관을 대사로 파송할 때 아무나 모집해서 하지 않습니다. 외무고시를 치루고, 언어능력을 평가하고, 풍습을 가르쳐 주는등 외교관으로서의 법칙과 자질을 함양시켜 줍니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외교적인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지구촌에 영적인 대사로 보내신것처럼 나도 너희를 이땅에 나의 영적인 전권대사로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자질을 테스트 받은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뢰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가 잘못 전하면 복음이 와해되고 오해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연약한 우리에게 이 영광스러운 인류 구원계획의 전권을 위임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 입술을 열수밖에 없습니다.
3.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21절).
세상에는 많은 이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론이 지상에서 영원까지 옮겨주지 못합?求? 명절이 되면 우리 동족가운데 남북 이산가족들의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과 북의 이산가족은 백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천국에 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幣?이산가족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서 영원히 이산가족의 아픔과 눈물 이 없는 삶을 살게하는 능력과 축복이 복음을 통해 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전?舊?않는 것은 천국과 지옥에서 영원한 이산가족이 되자는 의미입니다. 정말로 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요, 자녀요, 친척이요 친구라면 저들을 나와함께 영원히 천국의 복락을 누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고 오직 복음을 통한 전도뿐입니다. 그러므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축복을 독점하겠다는 아주 악한 생각입니다. 인류가 사는 길을 정말 발견했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내 혼자 품에 품고만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 엄청난 구원의 진리지식을 깨닫게 될 때 흩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은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영원한 천국에서 같이 만나 살 수 있다는 영적인 축복의 청사진을 같이 나눠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가 된것처럼, 주의 제자들이 하나가 되고 이들의 복음전도를 통해 또 다른 하나님의 양우리밖에 ㄴ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엄청난 축복이 '전도'라는 과정을 통해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영광 그 자체입니다. 후랭크 류마라는 사람이 공산주의 사상을 연구했습니다. 1903년에 4명이 공산주의였는데,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때 공산주의 골수분자들이 4만명, 그후 70년이 지나면서 15억이 공산주의 이념을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는 복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을 황폐화시키는 악한 계략임에도 그들이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이념을 퍼뜨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주님의 복음은 2천년동안 뭘 합니까? 우리가 가진 복음이 공산주의 사상보다 약합니까? 맑스나 레닌보다 우리 주님의 권세나 사랑이 약해서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습니까? 그럴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열정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고 내가 이것을 믿는다면 어떻게 감추고 살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4:29절의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도는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세워진 기도입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의 열광의 도가니였고, 복음의 활화산이었습니다.
그 복음과 우리가 가진 복음은 동일합니다. 우리가 침묵하면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이 사회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가 이미 가진 복음을 뜨겁게 일으키셔서 입을 닫고있는 증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입을 활짝여는 증인으로 우리 모두를 사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