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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에뜨랑제의 태평양 전쟁사 원문보기 글쓴이: jinsoo kim
태평양 전쟁사를 이야기함에 있어 일본군을 얘기할 때 항상 나오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대본영"의 명에 따라 어쩌구 저쩌구,이리저리 해서 "대본영"에 보고,"대본영"회의 결과, 머시기 저시기...
그렇담 도대체가 대본영은 무엇일까요?
항상 대본영이 명령을 내리고 거기다가 보고 하는 걸 보니 최고 꼭대기 겸 대가리 집단인 것은 같은데...
그래서 오늘은 이 대본영이 먼 짓거리 하는 조직이고 먼 짓거리를 했는지 함 디벼 보시죠..
대본영(大本營)
1. 사전적 의미와 조직
1)사전적 의미
- 대본영(大本營,だいほんえい다이혼에이Imperial General Headquarters of japan)은 전시(戰時) 중 또는 사변(事變) 중에 설치된 일본 제국 육군 및 해군의 최고 통수 기관으로 일왕의 명령(봉칙 명령, 奉勅命令)을 대본영 명령(대본영 육군부 명령(大陸命), 대본영 해군부 명령(大海令))으로 발하는 최고 사령부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기관.
1945년 1월 내려진 대본영 해군부 명령(大海令) 명령서
- 전시 일본의 최고 통수기관으로 1893년에 제정된 전시 다이혼에이 조령을 기초로 하여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 설치되었고, 1937년 11월에 제정된 다이혼에이령(令)에 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존속.
- 천황(天皇)의 직속기구로서, 육군의 최고 지휘관인 참모총장과 해군의 최고 지휘관인 군령부총장(軍令部總長)이 각각 육·해군의 막료의 장으로서 일왕을 보좌.
2) 기 원
- 청일 전쟁을 지휘하기 위한 대본영은 1894년 6월 5일에 설치, 당시는 전시 대본영 조례에 의해 해군의 군령도 통괄하고 있던 육군의 참모총장만이 막료장으로 여겨졌으며 9월 15일, 전시의 지휘를 위해 일왕이 히로시마에 옮겨 갔기 때문에 대본영도 히로시마로 옮겼다가(히로시마 대본영)1894년 4월 1일, 청일전쟁이 끝나자 해산.
아직 남아있는 히로시마 대본영 건물
- 러일 전쟁을 지휘하기 위한 대본영은 1904년 2월 11일에 설치,이 때는 1903년의 대본영 조례 개정에 의해 전시에 있어서도 육해군 모두 군령 기관이 대등하게 되었기 때문에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군령부장 모두 동등한 막료장의 지휘를 가졌으며 1905년 12월 20일에 해산.
- 1937년 11월 18일에 대본영 설치를 전시로 한정하고 있던 대본영 조례를 폐지, 새롭게 전시 이외의 사변에도 설치 가능하게 한 '대본영령'(쇼와 12년 군령 제1호)이 제정되고 1937년 11월 20일, 대본영이 설치되어 그대로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존속.
3) 조 직
- 대본영은 대부분의 기관이 참모본부(육군) 및 군령부(해군)에 속해있는 조직이었고 일종의 전시 어전회의인 대본영 회의는 일왕과 참모총장, 군령부 총장, 참모 차장, 군령부 차장, 참모본부 제1부장(작전 부장), 군령부 제1부장, 육군 대신, 해군 대신에 의해서 구성되고 추밀원(일왕의 내시(?) 조직) 담당관과 군사 관련 황족이 참석(걍 군부만 참석하고 민간정부는 배제...)
일본군 대본영 조직도
- 이 조직에는 내각총리대신과 외무 대신등 일본 정부측의 문관(文官)들은 참석하지 않았고 대본영과 일본 정부와의 의사 통일을 꾀하기 위해 대본영 정부연락회의가 설치되었지만 유명무실.
2. 군부의 국가 장악
1)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 메이지 유신에 참가, 근대 일본육군의 장교가 되고 이후 승승장구 일본 의회제도 체제 아래 최초의 총리이자 3대 총리를 역임하고 육군 원수의 자리에 오르며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 근대화의 주축(이라고들 알고 개중엔 존경을 표하는 한국 사람들도 있더라마는..-_-;;)
- 일본 군부와 정계 양측에 걸쳐 자신의 파벌(소위 초슈벌)을 거대하게 구축하여 메이지와 다이쇼 연간의 일본 정치판을 막후에서 장악하고 뒤흔들어 이후 일본군의 최대 평폐중 하나인 파벌구축의 할배가 됨은 물론 군부의 정치개입을 당연시화 시켰으며 끝내는 일본 근대를 지배하다 못해 나중엔 똥통으로 끌고가는 진정한 원조 흑막.
- 또한 우리 민족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짓으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기반으로 근대 일본의 근대화 계획을 수립하며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창안
- 주권선은 일본의 주권이 행사되는 선으로 일본 본토와 오가사와라 제도, 오키나와 까지, 이익선은 주권선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선으로 조선 반도와 대만, 사할린 등 이었는데 이후 조선과 대만을 병합한 이후, 조선과 대만은 주권선으로 편입, 이익선은 만주와 필리핀으로 확장, 이것을 미화하고 정당화 시킨 꿀 발린 소리가 소위 "대동아 공영권"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부터 시작된 군국주의 일본의 팽창
- 또한 치안유지법이란 걸 만들어 당장 일본내 좌익세력을 작살내는 데 사용했지만 이는 꾸분히 이어져 군부로 세습, 전시 일본내 치안유지를 헌병대가 장악하는 기초가 되고 이는 우리에게 까지 이어져 국가보위법의 원조가 됨(알고 존경 합시다...)
2) 군부의 야심
- 이러한 야마가타의 이론과 보호 아래 청일전쟁,러일전쟁을 거치며 비대해진 일본군부는 드디어 군이 정부를 위협할 수준에 올랐는데, 이것이 추후 감당하지도 못할 대 막장 뻘짓극을 벌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효시가 됨.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공황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일본은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며 그 여파로 정계가 민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하자 군부는 수 없이 정치공작과 테러를 벌였고 이것도 모자라 드디어 쿠데타를 기도, 5.15 사건과 2.26 사건이 벌어짐
2.26 사건 당시의 쿠데타 군 병력들(골때리는 건 주모자가 중위, 대위..모냐?)
- 수상 따위의 민간정치권에 맡기지 말고 일왕이 직접 통치하라고 주장(일왕파)하는 극단주의 위관급 장교들이 벌인 2.26 사건(수상과 장관, 장군들을 살해)은 이후 진압 되었지만 겁을 잔뜩 집어먹은 정치권을 군이 협박, 이를 빌미로 일본이라는 국가는 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이를 성공시킨 집단(군이 국가를 통제한다는 통제파)을 주축으로 새로운 군벌인 "쇼와 군벌"이 나타나며 그 대표적 인물이 도조 히데키.
3) 군의 국가 장악과 팽창
- 야마가타가 만들어 놓은 전시에는 현역군인도 수상을 겸직할 수 있다는 전례를 이용, 도죠 히데키가 현역 육군 장성의 몸으로 총리대신에 올랐고 그 라인을 탄 수많은 같은 파벌 출신들이 그 능력과 상관없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며 승승장구 출세길에 오름.
- 도조 히데키가 수상일 때 쯤에는 일본은 완벽한 군국주의 국가였으며 이후 완전히 팽창주의 군국주의 국가의 길을 간 원인은 주권선과 이익선을 유지하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군사력을 증대하였기 때문으로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느니 주변에 약해 보이는 놈 좀 패서 식민지로 삼으면 된다는 생각, 즉 오로지 이익선의 확장 만이 그들의 목적이었기 때문.
군부의 국가장악과 국민의 동조..일본의 군국주의
- 따라서 주변국을 뜯어 먹으려면 경제 규모 따윈 신경쓰지 말고 오로지 군대 키우기만이 국가의 목표가 되었고(이는 군부가 젤로 원하는 일...)국민들도 식민지를 만들면 당장 눈앞에 이익이 떨어지니(식민지에 가서 수탈하면 뭐든 간단하게 해결되니 일본군 만세를 처 부른다는..) 이에 적극 동조하게 되었고 이제는 군대와 국민이 똘똘 뭉처 떼강도로 돌변함.
3. 태평양 전쟁의 대본영
1) 파벌의 전쟁
- 이윽고 진주만 공격을 감행한 결과 본격적으로 일본은 현대전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데 미국을 위시로 한 연합국과의 전쟁은 그들이 이전에 수행했고 어느 정도 먹혔던 중국군(청나라, 만주 군벌 포함)이나 제정 러시아 군과의 전쟁과는 차원이 달랐지만 이들의 전술은 거의 그대로 였음.
- 이유야 간단한데 이전의 원시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진급해 파벌을 형성한 장군들과 중견 장교들이 주축이 된 대본영 내에서 정신승리를 바탕으로 하는 총검돌격(걍 반자이 어택)이 가장 중요한 전술이라 믿었던 육군과 함대결전만이 사무라이로써 수행 해야할 당연한 전술이라 주창한 해군의 똥별 지휘관들이 만들어 낸 전술이었으니 더 바뀔 게 없었음.
작전은 닥돌 뿐이닷!!
- 게다가 대본영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앉은 별들의 면면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파벌에 충성하는 것이 군인으로써 가장 큰 사명이라 믿었던 보신주의자들로써 이들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이란게 국가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개념보다 자신이 속한 파벌의 안녕과 이익을 목적으로 한 작전들이 대부분.
- 즉, 전투는 적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 파벌을 이기기 위해서 였으므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전략보다 '우리 파벌이 주역을 맡고 적대 파벌은 그저 거드는' 전쟁 상황을 연출하려는 노력이 우선이다 보니 실효성 보다는 보기 좋고 겉멋 자르르 한 예술적인(?) 작전계획으로 난리를 쳐대는데 이러한 군 상층부의 작전에 의문을 표하는 것은 곧, 축출의 좋은 건수였음.
2) 똥별들의 향연
- 이러한 막장 파벌주의와 보신주의는 그 사람의 능력과 실적과는 아무 상관없는 진급행태로 나타났으며 이를 통해 일본군은 수없이 많은 소위 똥별들을 양산하는 데 일일히 열거하기도 귀찮을 만큼 많았고 이들이 본토 대본영의 중추를 이루기도 했고 일부는 최고위 지휘관으로 전선에 배치되었음
-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는 기상천외한 인류학설을 주창한 무다구치 렌야(계급이 무려 육군 중장...)만 보더라도 버마 임팔전선에서 그렇게 개뻘짓을 벌이고도 이후 본국의 육군예과 사관학교장으로 승진되지를 않나 베트남 전선에서 일개 사단 18,000명을 400명만 남기고 말아먹은 도미나가 교지(이 인간도 육군 중장..)도 경질은 커녕 승승장구 육군성 차관에다 항공군 사령관까지 해 처먹음(거기다 이 둘을 데리고 쓴 책임자 스기야마는 육군 원수!!!)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주창한 무다구치 렌야
- 따라서 그나마 유능한 인물들은(또 이런 애들은 왜그런지 줄타기를 잘 못하는...)대부분 한직이나 최일선, 혹은 예비역으로 밀려났으며 돌대가리에 할줄 아는 건 비비기요 성질만 드러운 똥별들이 최상층부에 앉아 작전을 지휘하고 부하들에겐 개뻘짓거리 작전을 강요 했으며 작전 실패의 책임은 모조리 부하들에게 온갖 구실로 뒤집어 씌웠음.
3) 보고 체계의 막장
- 일본군은 전쟁 말기까지 보고체계가 개판이었고 이는 곧 패전의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가 됐는데 우선 대본영까지 보고되는 정보들 자체가 전혀 신빙성이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극심한 파벌주의와 육해군 대립의 결과로 자기들이 유리한 전황만 보고하고 불리한 패전같은 내용은 급격히 축소시키거나 아예 보고조차 하지 않음.
- 따라서 유리한 전과만을 일선 지휘관이 보고함에 따라(지 안죽을려고...) 대본영에서도 이를 그대로 믿고 작전을 수립하거나 상급단위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려버려 전역 전체를 들어먹은 일이 비일비재했고 필요하면 상관의 이름을 빌려 명령서를 위조하는 것은 예사에다 일선의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걍 자기가 중간에서 없애버리기도 했음.
- 가뜩이나 개판인 보고체계에 대본영내의 육군과 해군사이의 알력 싸움도 더해져서 서로 간의 질투가 허위 전과보고로 이어졌으며, 예를 들면, 레이테 만 해전 직전에 해군은 대만 근해에서 미국의 기동함대를 격멸하고 항공모함 수 척을 격침했다고 뻥튀기 발표를 했고 문제는 후에 정찰로 이것이 과장된 전과임을 알고도 육군측에 단지 창피해서 알리지 않았으며 육군은 적의 기동함대가 격멸되었다는 허위보고를 믿고 필리핀 방어계획을 세움으로써 이는 훗날 미군이 필리핀에서 사실상의 무혈입성을 달성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
레이테만 해전에서 미 기동함대를 격멸하는 일본 해군 카미카제...-_-;;
4) 껍데기 작전회의
- 일단 일왕의 전시 전략 어전 회의인 '대본영'에서 육해군의 작전을 총괄한다는 원칙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군부가 독자적으로 만든 작전을 실행하고 이를 단지 일왕에게 보고하는(이렇게 할 거다..알았지? 뭐 그런..) 개념이 대본영의 실질적인 존재 이유였고 이런 상황에서 수상이 현역 군인인 대본영 회의는 껍데기 히로히토를 앉혀놓고 육군과 해군,기타 각종 파벌들이 각축을 벌이는 장소로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
대국민 사기 발표..대본영 해군부 발표(1941년 12월 8일)
- 따라서 이들을 대본영에서 통합 지휘, 조율하려니 육군과 해군끼리 싸우고, 각각 군 안에서도 자기들끼리 싸우고, 심지어 같은 부서 안에서도 싸우고 해서 말을 안 듣는 게 문제였고 타국을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합의를 볼 수 있었던 이유가 결국 확고한 지휘체계(미국의 펜타곤,독일의 늑대굴,소련의 크레믈린...)가 있었기 때문인데 일본은 지네끼리 처 싸우느라고 그게 불가능했음.
- 게다가 대본영 하위조직으로 되어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따로 노는 희안한 조직이 있었는데 바로 일본 육군의 "관동군"과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였고 이들 모두 형식상으로는 대본영의 하위조직인데, 일왕 직속이라는 점을 내세워 상부의 말을 안듣는 것은 기본인데다가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어서 통제가 불가능했음.
우린 일왕직속이야..그래서 우리 맘대로 해..일본해군 연합함대
- 당장 관동군은 만주사변과 할힌골 전투를 제멋대로 일으킨 전력이 있으며, 연합함대는 거의 모든 해군의 함선을 통제하기 때문에 사실상 해군체계의 수장이 해군대신, 군령부총장, 연합함대사령장관이라는 삼각구도가 되어 배가 산으로 가는 체제가 완성되었고 이는 연합함대 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해군 군령부총장(참모총장) 등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독자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계기가 됨(왜? 우리는 덴노 직속이니까!!... 미친 놈들...)
4. 결 론
- 일본은 애초 근대화 시작 시기부터 프로이센을 카피해서 "일왕 절대국가"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군대를 조직할 때 일왕에게 독자적인 통수권을 부여하여 군을 일왕에게 직결시켜놓고,처음부터 내각과 정부와는 독립된 활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음.
- 하지만 초기에는 내각과 정부에서 군을 어느 정도 통제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는 초창기 일본의 정치가들이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강력한 권력을 손에 넣었고, 군의 고위 간부들도 이러한 정치가들과 파벌 관계로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치가 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런 구조 덕에 비공식적인 절차로나마 '조율'이 가능했음.
- 이러한 비공식적인 라인은 이후 군에서 이전의 정계 파벌의 일원이었던 이들이 은퇴하고, 사관학교를 통해 독점적으로 육성되는 인력으로 이루어진 독립성 강한 조직으로 변하면서 소멸되어 버렸고
- 내각과 정부에서 예산 권한 등을 이용하여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시도하면 군에서는 짜증나게 구는 수상을 암살(2.26사건 등등)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여기에 육군대신, 해군대신을 오로지 현역 중장, 대장만이 할 수 있다는 조항을 이용해서, 민간인 출신 총리를 가지고 놀다 그것도 맘에 안들었는지 나중엔 아예 육군과 해군의 현역 대장이 수상에 취임.
- 따라서 국가를 장악한 군이 전시상황하에 대본영이라는 무소불위의 조직을 만들고 거기다가 소위 살아있는 신이라는 일왕까지 바지사장으로 앉혀놓고 단지 권력을 휘두르기 위하여 존재했던 조직이 바로 대본영이었음.
- 이후 대본영은 군이 정부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군이 정부 아니,국민과 국가전체를 협박하고 강압하는 수단의 하나로만 기능했고 그 내부에서는 또 다시 여러개의 독자적인 권한과 독단적인 성향을 가진 조직이 판을 치는, 군벌 연합체와 별 다를 것이 없는 조직이 되버림.
결론은...여기랑은 완전 다르다는 거...걍 시궁창 조직 대본영..
전쟁 지휘부를 통채로 지하로 옮기려 했던 마츠시로 대본영..우리 강제 징용자들의 원혼이 서린 곳..
첫댓글 자세한 설명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