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어느 사이트에 올린 글 수정해서 올립니다. 평어체는 양해바라며...)
김태촌이 죽었단다. 호남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선배 주먹들 사시미로 난도질하며
서울 밤거리를 휘젓고 다녔던 김태촌이 죽었다.
이제 주먹계에서 소위 말하는 거물들은 다 죽거나 은퇴했다.
대부분 사업하거나 교회 목사로 산다. 진짜 반성하는 사람도 더러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런다고 대한민국에서 조폭이 사라진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폭들은 사회 전반에 침투해 있다.
다만 예전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한눈에 봐도 삥뜯게 생기고 얼굴 험상궂은 놈은
절대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진짜 거물들은 바로 여러분 주변에 숨어있다는 걸 명심하자.
필자가 이 글을 쓰는 것도 대한민국이 그만큼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사회였다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함이다.
그리고 이 글은 조폭 미화 글은 아니라는 걸 오해말기 바란다.
보통 한국 주먹 중에 떠오르는 사람 고르라면 당연히 김두한, 시라소니, 이정재, 이화룡, 홍영철 등이다.
(신마적, 구마적, 박두성, 김무옥 이런 애들은 행적도 찾기 힘들고 많이 부풀려져서 생략. 참고로 구마적은
종로 밤거리 휘어잡기 전에는 택시 조수였고 김무옥은 해방 이후 6.25까지 수도경찰청 유도사범을 지냈다)
김두한, 시라소니, 이정재는 하도 드라마, 영화에서 많이 다루니까 생략하겠다.
하지만 이화룡, 홍영철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있어서 간단히 말한다.
김두한이 서울과 그 이남의 지배자였다면 이화룡은 이북의 지배자였다. 하지만 당시 많은 이들이
조선 최고의 주먹은 김두한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틀린 말이다. 세력 규모만 따지면 이화룡은 김두한보다
영향력이 더 컸던 사람이다. 평양, 신의주뿐만 아니라 상해, 북경 일대의 밤거리까지 진출(?)했다. 간단히
말해 나와바리 규모나 끌어모은 돈에서는 이화룡이 김두한보다 한 수 위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그렇다고 이화룡이 싸움을 할 줄 모르는 놈이었냐면 그것도 아님.)
게다가 한글도 제대로 못 쓰고 머리가 나쁜 김두한에 비해 이화룡은 머리가 좋고 말빨, 글빨이 있어서
밤거리 사업을 금방금방 점령해 나갔다. 그 능력 덕에 해방 이후에 명동에 그렇게 쉽게 자리잡았던 거지.
물론 명동은 그 유명한 하야시의 사업 구역이었지만 하야시가 야쿠자 탈퇴하고 평양으로 가니까 무섭게
이화룡이 좌익을 피해 월남해서 명동을 금방 먹는다. 물론 여기서는 김두한이 양보한 측면도 있지만.
게다가 이화룡은 해방 직후 YMCA 서북 청년단에서 간부였으며 그 단체의 돈줄 역할까지 했다. 월남하자마자
YMCA의 경제적 기반 역할까지 할만큼 명동 거리를 휘어잡았던 거다. 이정재가 이기붕과 곽영주를 등에 업고도
이화룡을 건드리지 못했던 이유는 그의 경제력 때문이었다. 참고로 이화룡은 이정재처럼 정치에 직접적으로
깽판친 적은 없다. 돈냄새는 귀신같이 맡았지만 정치에는 무관심했으니까. 그러고도 그렇게 밤거리를 오랫동안
지배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서울 중심가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 홍영철은 더 생소할 텐데, 이정재가 건드리지 못한 거물 중 한 명이다. 홍영철은 소공동 일대를 휘어잡은
사람이다. 홍영철의 경우 연세대 출신에다가 영어까지 능통해서 미군과도 친하게 지냈고 정계 인맥도 꽤나
탄탄했다. 김두한이 국회로 가면서 종로 밤거리 일대는 주인없는 땅이 되었는데 이 주인없는 종로 밤거리를 차지한
인물 중 한 명이 홍영철이다. 홍영철의 경우에도 정치판에 직접 가담한 적은 없는데 그럼에도 그가 50년대에
동대문과 끝끝내 손을 잡지 않는 건 조금 미스테리하기도 하다. 왜냐면 동대문은 이승만의 3선 전후로 서울 밤거리
일대를 거의 다 장악하고 서울의 상인들을 죄다 자기 영향권으로 집어넣었으니까. 게다가 충정로 도끼사건을
직후로 명동까지 먹어버리면서 서울 밤거리의 돈은 모두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의 손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동대문도 끝내 홍영철은 굴복시키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이화룡, 홍영철이 소위 말하는 '경제형 조폭'의 선두였던 셈이다. 자기 돈줄이 확실하니까
아무리 꼬봉 숫자, 나와바리 건물 수가 적어도 자기 생명줄이 이어지고 외부 빽과의 연결선이 유지되는 거다.
'장군의 아들'에서나 나오는 장면들은 일제 시대 이후로 없어졌다고 봐야지. 해방 이후로 조폭들은 서서히
사업가로 변신하며 정계, 재계와의 관계를 쌓고 있었다. 이화룡, 홍영철 둘 다 박정희 군사정부의 조폭 소탕에서도
유유히 살아남았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최인규 등에 비하면 죄가 가벼운 건 맞음.
(이들이 무죄라는 게 아니니 오해말기 바람)
사실 지금처럼 조폭이 직접 정계의 방패막이 역할을 한 건 누가 뭐래도 이정재가 처음이다. 정치깡패라는 용어가
처음 도입된 게 이때부터거든. 동대문이 직간접적으로 거느린 조직원 수가 1만여명이었다고 하니(드러난 것만)
이 정도면 전국의 밤거리가 동대문 휘하에 있었다는 얘기(물론 지방의 군소 조직들은 관리도 안했고 건드리지도 않음)
3선 개헌부터 시작해서 자유당이 행사한 무력은 죄다 이정재의 손에서 나왔다. 자유당의 용역업체였던 셈.
(이정재 휘하에는 차력사도 있었을만큼 이정재 휘하의 조폭들은 출신도 다양했다고 함)
이 동대문 조직에서 꼭 언급해야 할 두 사람이 있으니 바로 낙화유수. <야인시대>에서 낙화유수를 그냥 유지광 꼬봉 중
한 명으로 대충 묘사해놨는데 사실 낙화유수는 동대문 휘하 별동대인 화랑동지회의 2인자였다. 암흑가의 핵심이었지.
1인자는 당연히 유지광이고. 낙화유수는 밤거리에서 여자들에게 잘 먹히고, 낮에는 정계 인사들에게 잘 먹히는 그런
스펙의 소유자였다. 실제로 고딩 때 먼 발치에서 봤는데 내가 봐도 얼핏 보면 조폭인지 모를 그런 외모의 소유자임.
당시에 키 175cm였지, 얼굴 하얗지, 유도 잘하지... 무엇보다 서울대 상과대학 출신. 예나 지금이나 조폭들 대부분은
무식하기 때문에 조직의 운영은 낙화유수의 손을 거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랑동지회의 경우 화랑영화사라는
영화사의 수입을 통해 조직 자금을 충당했다.
낙화유수는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박정희 군사정부 때도 별 피해없이 살아남았고 그 후 정의사회실천모임의
고문을 지냈으며 경호회사의 사장이었다. 정계와도 여전히 긴밀한 관계였고, 주먹 원로들과도 친했으며, 양로원이나
보육원 후원도 죽기 직전까지 지속해왔다. 낙화유수 김태련의 이전 경력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저 '잘생긴
사업가'이다.
그리고 60년대 주먹 중에 무시못할 인물이 한 명 있는데, 바로 문무회라는 사람이다. 왜냐면 중앙정보부 수사관이었기
때문. 벌교 출신인 그는 호남 출신 주먹들이 서울로 올라올 때 상당한 도움을 준 걸로 유명하다. 이것만 봐도 중정이
제대로 돌아간 조직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박정희의 이른바 깡패 소탕 작전도 진정성이 의심된다. 지금 국정원에도
조폭이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글에서 계속.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요즘 승부조작, 주가조작, 성접대같은 조직적 범죄들이 늘어나다보니 이전 글을 다시 올려봅니다.
첫댓글 낙화유수를 고딩 때 직접 보셨다면 가넷피어스님은 대체 나이가 몇살이신 건가요?
적어도 60대 중반이상..
아니 제가 고딩 때 노인 낙화유수를 봤다고요..ㅋㅋㅋ
"낙화유수는 밤거리에서 여자들에게 잘 먹히고, 낮에는 정계 인사들에게 잘 먹히는 그런 스펙의 소유자였다. 실제로 고딩 때 먼 발치에서 봤는데 내가 봐도 얼핏 보면 조폭인지 모를 그런 외모의 소유자임. 당시에 키 175cm였지, 얼굴 하얗지, 유도 잘하지..."
위의 본문 내용은 낙화유수가 잘나갈 적 모습을 본 거라고 받아들여지기 쉽네요.
울산도 지금 남구청장인가 중구청장인가 그사람 깡패출신이죠...ㅡㅡ
이전글은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하군요.
학교 커뮤니티에 올렸는데 그 때 댓글에 머드 축제가 열려서 지워버렸네요.
재밌네요. 무협식 주먹싸움보다는 밤산업에 대한 영화도 보고 싶습니다.
좀 안맞는게 있는데.. 동대문이 홍영철을 굴복 못 시킨건 아니고.. 나중에 유지광과 동맹을 맺었다고 알고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