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적봉에서 남덕유산까지
중봉 아래로 흐르는 덕유평전의 모습은 언제나 부드럽고 풍요로운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언제 보아도 산 위에서 시원하게 트인 평전의 능선은 가슴 속에 담긴 답답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갖게 한다.
소백산 정상의 평원이나 이곳 덕유평전을 내가 좋아하는 이유는 빼곡히 둘러싸인 나무나 암벽으로 정상을 지키는 산보다 넓고 크기도 하거니와 산위에 거칠 것이 없는 그런 호탕함이 이 산들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주리조트 설천하우스에 도착(09:32)하여 리프트를 타기위해 줄을 섰다. 평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 않다. 한강 이남에 유일하게 형성된 스키장으로 겨울방학이면 수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던 곳인데 역시 금년 겨울에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아 시끌벅적한 스키장 기분이 나지 않는다.
무주군 설천면의 덕유산은 남부지방에서는 적설량이 많아 유일하게 스키장을 건설할 수 있는 장소였다고 한다. 아마도 지명이 설천(雪川)과 관계있는 듯 보인다.
리프트는 설천봉 휴게소(09:52)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수없이 다닌 사람들 때문에 반질반질해진 길을 따라 향적봉을 향해 걷는다. 향적봉에 도착(10:05)하니 정상비(頂上碑)가 나를 반가이 맞는다. 언제 보아도 반갑고 기분 좋은 정상비다. <덕유산 향적봉 1614m> 이번 산행은 올라가는 산행이 아니라 내려가는 산행인지라 나 같은 초자 산행꾼도 선뜻 따라나섰다. 향적봉에서 남덕유산 정상까지 15km이고 하산 길 등을 합치면 대략 19km 잡는 산행길이다. 그래도 남덕유산 쪽에서 오는 산행보다는 덜 고될 것 같다는 생각에 위안이 된다.
향적봉에서 남으로 5분 정도 내려가니 언제보아도 의젓한 주목 한 그루가 변함없이 서있다. 산악회 일행들의 빠른 발걸음을 따라잡는데 바쁜 마음인지라 서둘러 주목의 모습을 한 커트 찍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늘 갈 길이 머니 조금 늦어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중봉을 거쳐(10:23) 동업령(11:18)에 도착하였다. <남덕유 10.5km 향적봉대피소 4.3km 안성 매표소 4.5km>
2년 전 겨울 안성에서 동업령으로 북덕유산을 오르던 일이 생각난다. 그 당시 불던 세찬 칼바람에 산행이 너무 고생스러웠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 기억에 쓴 웃음이 난다.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니겠지.. 겨울 산행 중 가장 힘들었던 때는 작년 지리산 만복대 고리산 산행 때였는데 그 정도는 아니겠지.. 하며 지금까지는 내려오는 길이라 그다지 어려움 없이 잘 왔다. 이제부터 무룡산과 삿갓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잘 가야겠지. 그런데 올라가는 길이 오늘은 좀 힘들다. 어제 계룡산을 다녀와서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큰 산이나 긴 산행을 할 때는 나 같은 비실이는 미리 쉬어야 하는데 연거푸 산을 타니 근육이 피로하여 풀리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선수들이야 다르겠지만.
어째든 같이 가던 동무를 쫓아가기가 힘들어진다. 이제는 눈도 내리기 시작한다. 어제 일기예보에 오늘 중부지방과 충청서해안으로 대설예비특보가 내려진 상태고 오후부터는 기온이 내려간다는 엄포(?)가 방송과 휴대폰 등으로도 전해져 갈 길은 먼데 걱정이 앞선다.
앞에 가는 아줌마는 눈이 온다고 좋아한다. ‘눈이 내리네------’ 흥얼흥얼 몇 가지 눈 노래를 부르며 가볍게 산을 탄다. 남은 끙끙대며 언제 갈지 모르는데 남자로서 체면이 안 선다. 그래도 어느덧 무룡산(12:35)정상이다. <1492m 남덕유산6.4km 삿갓골재대피소 2.1km, 향적봉8.4km>
무룡산 올라오느라 힘이 들었는지 나도 물 한 모금마시고 가야겠다. 이런! 나보다 한참 늦게 올 줄 알았던 할메들이 벌서 온다. 같이 왔던 아지메 동무는 어느새 발 빠른 사람과 사라지고 없다. 혼자라도 가야지. 남 눈치 안보고 내 페이스대로 가니 오히려 혼자 가는 길이 좋다.
이제 바람도 세차게 분다. 휘몰아치는 눈에 앞이 분간이 안 될 정도다. 삿갓재 내려가는 길은 거칠기는 해도 풍광은 좋은 것 같다. 그러나 앞을 볼 수가 있어야지. 눈물 콧물 바람이 모두 앞을 가리니. 그나마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위험한 구간은 계단을 만들어 놓아 내려가기는 수월 하였다. 길은 앞 사람의 발자국이 눈보라에 지워져 안 보이는 부분이 많아진다.
삿갓재대피소(13:25)에 도착하니 먼저 온 일행들이 식사를 끝내고 출발하려한다. 먼저 출발하라 하고 난 가져온 떡과 뜨거운 물로 점심식사를 하며 적당히 쉬었다. 이미 피로가 가중된 상태였기 때문에 앞으로의 행군은 속도를 조절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또 이 곳 대피소에서 남덕유산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실지는 오늘 하루 중 가장 어려운 코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 몰랐다.
내가 아는 일행들이 일찌감치 떠난 후 나는 배낭을 정리하고 세찬 눈보라와 다시 맞서 홀로 길을 나섰다. 산행길에 세찬 눈보라가 부지런히 인간의 때를 지워나가는 것인지 앞사람의 발자국이 완전히 지워져있다. 그래도 지난겨울보다 적설량이 적어 눈의 높이가 길임을 어렴풋이 가리켜준다. 걱정이 앞선다. 또 하나 어려운 점은 따뜻했던 겨울에 눈 녹은 청빙(淸氷:물이 맑게 얼은 얼음)이 눈 밑 바위 틈새를 메워 잘못 디딘 발이 순식간에 미끄러져버린다. 아이젠도 별 소용이 없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통과하는 수밖에 없다. 온 몸에 땀도 나고 겁이 난다.
가끔 역으로 오는 사람을 만날 뿐 홀로 가는 심설산행이 슬며시 겁이 난다. 오늘 중에는 내려가겠지 하면서도 떨어진 체력이 나를 무척 고되게 한다. 삿갓봉 가는 길이 왜 이렇게 먼지! 언제나 남덕유 정상에나 가려나. 앞에 간 일행들은 어디쯤 통과했을까. 산속에서 실종하는 사람들은 이러다 실종하는 것일까. 나보다 뒤에 오는 사람들은 있을까. 황점으로 탈출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까는 무룡산만 넘으면 점심 먹고 금방이라도 남덕유산까지 갈 것 같았는데. 왜 앞사람들 발자국은 없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조금도 쉴 여유 없는 그리고 무사하게 목적지까지 가야겠다는 생각만이 내 몸을 이끄는 것 같다.
드디어 삿갓봉(14:19, 1418m)에 도착하였다. 휴! 이제 월성재를 지나면 남덕유산이겠구먼. 가 보자. 지친 다리 스틱 의지 삼아 계속 걸어본다. 이곳 무룡산부터 남덕유산 줄기는 북덕유산 능선과 달리 산이 거칠다. 암능과 꼬불꼬불한 좁은 길로 피곤한 사람을 잡는다. 그래서 사고도 많이 난다고 한다. 삿갓재대피소가 그래서 세워졌다고 한다.
혼자 가는 길이 고행 길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사람이 그리워진다. 산길 위에서 ‘어이!!’하고 소리를 질러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일까? 그래도 남덕유산에는 최근에 3번 왔으니 대략 그림이 그려져 다행이다. 월성재는 얼마나 가야 나오는 거야?
가다보면 눈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바람불어 한쪽으로 켜켜이 쌓인 모습, 바람이 빚은 각진 눈의 모습 등이 나를 홀린다. 마치 사막에서 신기루의 모습에 홀리듯 누구도 디디지 않은 눈 위에 누워버리고 쉽다. 사진이라도 찍어볼까? 그래도 갈 길이 멀고 기력이 떨어져 지체하면 안 되겠다는 조급증에 떨쳐버리고 쉴 새 없이 힘든 발걸음을 옮겨본다.
고대하던 월성재로 내려오니 마음이 놓인다. <해발 1240m 남덕유산 1.4km>라는 이정표를 보고 오르막길을 오른다. 이제 마지막 오르막길이라 힘을 내보지만 오르기가 쉽지 않다. 40분 정도 가야 할까. 시간보다는 체력싸움이다. 삿갓재대피소에서부터 한번도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왔는데 쉴 장소도 없고 같이 쉴 동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다시 쉬기도 그렇고 해서 계속 행군만 할 뿐이다. 숨이 턱턱 막힌다. 다리의 근육은 그동안 섭생을 잘 못해 그런지 비실되는 꼴이 내려가면 돼지고기, 삼계탕 등 영양식으로 많이 섭취해야겠지. 간간히 보이는 선행자의 발자취가 눈 위에 찍혀있어 그 자리를 다시 찍으며 따라간다. 밑에서 ‘야호’소리를 질러보니 위에서 응답이 온다. 위에 누가 있기는 한 모양이다.
드디어 남덕유산 정상이 보인다. 한 커플이 막 도착했는지 사진을 찍으려한다. 어찌나 반가운지 내가 먼저 사진을 찍어준다고 하고 나도 한 장 부탁하여 기념으로 남기고 그들을 뒤로하고 먼저 하산을 시작하였다.(16:14) <남덕유산 해발 1507m, 영각사 3.4km>
남덕유산 정상에서 항상 북덕유산 정상을 바라보며 언젠가 저 길을 종주하는 날이 있으려나하는 기대가 오늘 이루어졌지만, 오늘은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날씨 때문에 또 지친 마음에 북쪽 하늘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남덕유산의 암능에 놓인 철계단은 보통 미끄러운 게 아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사고 나기 십상이다. 아래쪽에 부부가 조심스레 내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남덕유산부터는 하산길이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여 마음이 느긋하여진다. 비록 시간에 맞추어(하산예정시각 16:00) 가지는 못하였다하여도 사고 없이 목적지 까지 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가벼워진 마음이다. 얼마간 돌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디고 넘어진다. 왼쪽발의 아이젠이 풀려 없어진 것이다. 조심해 내려오는데 자꾸 넘어진다. 이번 겨울엔 아이젠을 몇 개나 버릴까? 지난번 백덕산에서도 하산 길에서 고생하고 오늘도 그렇고, 다음은 어딜까? 이제 내려가는 길이 더 고생길 같다. 스틱에 의존하니 스틱이 힘을 받아 길이가 짧아졌다. 그래도 몇 번 넘어지고 굴러보니 영각매표소다.(17:45)
이젠 오른발의 아이젠을 풀고 걸어가다 서너 번 넘어지며 한 오륙 분 가다보니 고향집 같은 버스가 기다린다. 버스에 오르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거의 꼴찌수준의 산행이다.
덕유산종주! 남들은 반쪽짜리 종주라지만(원래는 구천동 삼공매표소-향적봉-남덕유-육십령이 풀코스 종주란다.) 향적봉에서 남덕유를 삭풍 속에 눈썹에 상고대 펴가며 사고 없이 주파한 것이 어찌나 기분 좋은지 피로가 싹 가신다.
2007년 1월 26일 산행
첫댓글 아주 멋진 산행을하고 돌아오셨군요....산행기 잘보고 갑니다...
재미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솔산악회 덕에 소원풀었습니다. 새해에 더욱 건강하시고 좋은 산 많이 다니세요.
죄송함니다 같히 산행을 했였야하는데 같은자리에안고도 ,죄송,,,ㄲㄲ,
제가 워낙 기본기가 부족해서 그렇죠. 그래도 앞에 가신분들 보호하며 가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이번주에 간다고 신청은 했는데 다녀오신분들이 힘드셨다기에 걱정이 앞서네요. 한라산만큼이나 덕유산도 장관이네요.. 세심한 산행기 잘보고 갑니다요^^
살아 숨 쉬는 듯한 생생한 산행기, 마치 저의 느낌을 말해 주시는 듯 절절합니다. 산행후기로 또다른 감동을 주시네요. 소박하면서도 솔직한 산행기가 감동적입니다.
석정님 산행기 잘보고 갑니다~~앞으로도 변함없이 좋은 산행기 부탁 드립니다~~
아주 멋들어진 산행기에 제자신이 빨려들어가네요. 이번주에 신청했는데 안가도 될것같네요.ㅎㅎ 수고많으셨습니다.
무룡산 지나 삿갓봉을 돌아 남덕유산의 겨울풍광 못보시면 후회하실걸요. 잘 다녀 오세요.
칼바람,눈보라 속의 남덕유 종주 산행의 생생한 체험기 정말 감동적입니다. 눈 속을 혼자 걷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고생스러우면서도 펼쳐지는 겨울풍광에 매료되신 石井님,정말 멋지십니다.
감사합니다. 졸작 산행기 칭찬해주셔서.... 겨울산행으로 가볼만하네요. 준비는 잘하셔야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