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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조명
고래, 겹의 사생활
자신이 베어낸 파도를 등에 지고 내륙 깊숙이 들어온 고래가 비취색 살냄새를 그리워하오 피가 도는 비린내를 찾아 떠난 극지의 바다 떠돌던 유빙의 행적은 이미 사라지고 없소 바다 위에 종족의 문양을 그리는 고래의 꼬리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나를 끌고 가오
여덟 살 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간 해안가 검은 바위 위 고래가 한 마리 누워 있었소 처음 본 고래였소 실눈 사이의 비취색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커다란 바위로 믿을 뻔했소 아이는 고래의 눈 속에 다른 세상이 있고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눈을 감고 있다고 믿었소 그리고 고래는 와글거리며 다가오는 발자국들의 영혼을 건너다닌다고 믿었소 그때 아버지는 말해 주었소 고래의 관은 파도였다고 바닷속에 뼈를 묻는 종족들은 거친 파도 앞에서 순해지는 법이라고 그래서 고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북해를 닮은 비취색 바다를 갈망한다고 그 후 우리 집 앞 바다는 비취색으로 빛났소
고래의 고향 바다의 숲은 형언하기가 어렵소 가끔씩 바닷속에 잠겨 숲의 관람자가 되어 고래의 노래를 들어보고 싶었소 심해까지 보내는 고래의 노래는 오묘하오 고래는 긴 음절의 노래를 즐겨 부르오 고래의 노래에 주석을 달고 싶어진 나는 목관악기가 내는 소리를 배웠소 몸 안에서 제일 큰 통을 울리며 서툴지만 음절을 길게 끌었소 고래는 극지 가까이 도착하면 유빙 사이에서 깨어진 햇발을 은밀하게 즐기기도 하오 완강하게 버티는 빙벽쯤은 넘어갈 수 있다고 믿는 순간이 있었소 그러나 50분 또는 한 시간이라는 제약이 목줄을 누르오 가속들을 어깨 위에 얹고 바다 위에 유빙처럼 뜬다는 것이 힘든 일이란 걸 알았소 그게 바다에서 생을 마감하는 종족들의 숙명이란 걸 알았소 그림자 대신 물살을 낳는 고래의 몸에서 느리게 긴 음악이 흘러나오면 일가를 이루었다는 신호로 들었소 이제 더 이상 목관악기의 소리는 자라지 않았소
항해할 때마다 희망을 끌고 다니는 고래처럼 내륙에서 죽음을 찾아다닌 사내의 무덤을 찾아 나설 것이요 사내가 남긴 유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섬이 되었다고 들었소 섬 깊숙이 감춰두었던 문장들을 꺼낼 계절이 오면 가마우지 자세로 뱉어내야만 하오 제일 먼저 뱉어낸 건 갈색 눈동자였소 삼킨 순서에 따라 나온다는 걸 깜박했소 몇 번째 삼켰는지 헷갈리기 시작했소 비취색 눈동자라고 생각하고 뱉었는데 사라졌던 고래잡이의 시간이었소 고래잡이 시간이 되면 사내의 심장 안쪽에는 늘 뜨거운 바람이 분다고 했소 형이상학에서 형이하학으로 내려가는 경계에서 가끔씩 허리통증을 느꼈다고 했소 그게 살냄새를 그리워하는 증세란 걸 몰랐다고 했소 그때마다 환부를 도려내던 사내의 모험담을 들으며 자란 파도가 있었소 바다에는 늘 파도가 무성하오 바닷속의 숲 또한 무성해질 거요
웃자란 파도가 고향 집 마당에 착시현상으로 다가오면 또 다른 사내는 바다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 나가고 다 자란 아이는 뒷산에서 할미꽃을 꺾어 사내가 가는 길에 뿌릴 거요 그림자보다 물살에 현혹될 때가 많은 사내의 모험담은 도시에서 계속 자랄 거요 고래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경건해야 하오 이제 숲을 떠나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 변주되는 고래의 모험담을 관람해야 할 차례인 거요
데칼코마니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생전 할머니 손에 돈 한 푼 쥐여 드리지 못한 아버진 한지를 접어 저승 가는 노잣돈을 만드셨다 가위질을 따라 걷는다 꽃 위를 걸을 땐 발을 빼려고 휘청거리셨다 할머니의 눈물이 모여 만들어진 댐에 다다르면 아버지의 눈보다 가위가 먼저 젖었다 잠시 쉬었다 가는 동네 해안 길 제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내어 누군가를 지키는 파도를 보았다 굽이굽이 산길을 넘을 땐 할머니가 웅얼거리던 회심곡에 발자국을 실어 가쁜 숨 몰아쉬셨다
접혀진 한지를 펴자 꽃길은 사라지고
아버지와 나는 닮은꼴의 다른 유전자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시간대를 등에 업고
오를수록 높아지는 빌딩 숲을 헤맨다
아버지를 닮은 내가 빌딩의 거울 속으로 첨벙 걸어 들어가자 거울은 끄떡없고 와장창 깨진 내가 바짝 마른 아버지를 읽는다
호객 행위
- 장미
늑대들의 척추에서 원죄가 익어가는 시간
역전 뒷골목으로 숨어들어 스스로 몸에 불을 밝히는 꽃이 있다
몇 번의 건기를 관통하고서야 몸에 핀 꽃이 가시가 된다는 것을 안 사내
가시에 찔린 사내의 행성은 전신주에 매달려 밤새 별빛을 토해냈다
꽃송이 대신 마른 눈물이 배달되는 시간
몸에 두른 가시를 열면 쏟아지는 새끼손가락들
‘머리 올려 줄게 오빠랑 살자’
‘오빠랑 도망가자’
설탕과 분자구조가 같은 말이
켜지 못한 촛불이 되어 유리 창살 안에 갇혀있는 저녁
짐승의 피를 깨우는 여자의 웃음이 담장 아래로 쌓였다
물컹거리며 제일 먼저 썩어가는 심장은
사내의 식민지와 여자의 식민지가 만나는 지점
여자가 더듬이를 갖다 대고
사내의 속을 읽어 내는 방식을 고집했다
꽃잎은 서서히 낡아가며
열여덟 살의 이력을 한 움큼의 비린내로 뿌렸다
눈물로 정조준된 사내는 다시 벼랑에서 추락하였다
누군가를 보내고 돌아선 새벽
수명이 다한 피의 비늘들이 떨어져 역전 뒷골목을 구르고
상처에 비린내가 차오르면 장미의 시간에 옹이가 박혔다
헐거워진 창살 사이로 고개를 내민 여자
깨어진 골목 안을 기웃거리는 늑대의 담벼락에
다시 뜨거워진 촉수를 올렸다
스스로의 죄를 창살 밖으로 꺼내 놓고 수선 중인 장미
아직도 사내의 식민지일까
종이 사막
지금은 시차差時여행 중
애초 사고지점은 내 안에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시점은
순간이 순간에 닿는 불모지의 허구
사랑해서 배고프지 않았던 혁명의 시절 있었다
나를 지탱해주던 척추가 주저앉을 때 알았다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를
사랑이란 단어를 쪼개면 쏟아지는 슬픔의 뼈
몇 겹의 추위가 뼈에 파고들수록 아득해지는 종이 위
이력에 들어가지 못하는 영혼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남기고 간 모든 것들이 슬픔이었다면
그 씨앗들을 종이 위에 심고 마른 눈물로 키워야 했다
서로의 얼굴에 서로의 얼굴을 새기던 계절은 지나고
겨울 저녁 일기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남아있는 내가 낯설어져
종이에 쌓여있는 당신의 마음을 장작 삼아 불을 지핀다
조금씩 젖어오는 일기장
페이지 없는 안개를 끌어다 종이 사막에 묻었다
낯익은 안부를 피해 전화기 속으로 숨어들어 파미르고원의 별빛을 그리워하거나 파타고니아의 우수아이아 등대를 그리워했다 파미르고원의 별빛은 누구의 상처로 키워진 빛인가 우수아이아 등대에 가면 절망을 감싸는 불빛이 보일까
그곳에서 만져지는 바람은 고향 집 해변에서 만지던 바람과 무엇이 다를까
자웅동체로 자라는 슬픔의 반지름을 가늠해 본다
물을 줘도 자라지 않는 반환점은
종이 사막을 수식하는 문장이 되고
힌트가 가득한 방에서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꼭 한번은 열어보고 싶었던 당신의 흉곽
지상에서 내일을 열어볼 수 없는 시간을 정의해 보면
마지막 영지靈地는 허공으로 뻗는 가지 세 개가 전부였다고
당신이 남긴 슬픔으로 종이 사막을 건너고 있다고
발아래 허공보다 더 아찔한 절벽이 당신과 내가 세운 처음이자 마지막 성이었나를 묻는다 또는 하늘에 끈 없이 매달린 몸뚱이로 바람을 막아 생이 건조해지듯 몰락한 종갓집 제단 위에 놓인 족보 대신 저수지에서 훌쩍이는 울음소리의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며 의도치 않게 어둠에 관여해야 했다
흉곽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었고
어둠을 파먹으며 자란 눈먼 뼈를 천천히 더듬어 내렸다
마른 눈물을 밀면서 오래달리기를 하다 보면
종이 사막을 건널 것도 같아
비를 기다리며 바람 속에서 며칠 더 살기로 했다
종이 사막에서 찾아낸 것은 의식의 띠를 물고 발화를 기다리는 한 송이 꽃이었다
왜 아픈 동백이야?
사그락사그락 눈 소리 너머에서 보내온
선흘*지경에서 찍었다는 동백꽃 사진
동생은 나무에 핀 꽃이 예뻐서 피사체로 찍었고
받아본 나는 떨어진 꽃잎에 포커스를 맞췄다
“아 아픈 동백이구나”라고 문자를 보냈고
“언니 왜 아픈 동백이야”라는 동생의 질문에
선뜻 대답해 주지 못했다
누이에게 가갸거겨를 남겨주고 돌담을 넘었던
외삼촌의 영혼이 꽃이 된 얘기는 더욱 하지 못했다
포승줄에 묶여 돌아온 외삼촌의 생애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세워 놓았다는
따따따따따 따발총 소리에
혈흔은 나무 위에 흩뿌려지고
혈흔을 맞은 나무는 모두 동백이 되었다는
달마저 눈감은 밤 거적때기로 끌어안아
날마다 드나들던 선흘밭 귀퉁이에
봉분 없는 묘를 만들었다는 할아버지의 얘기를
동생에게 들려주어야 하나
나무 아래 떨어져 눈 빤히 뜨고 기다렸을 동백의 시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어머니는 오라비가 남겨준 가갸거겨로 천수경을 새겨 제단을 만들고
우리는 제단에 둘러앉아 외삼촌의 목숨을 나누어 먹으며
동백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 선흘: 제주시 조천에 있는 지명
그 골목의 책장 풍경
- 이태원
책상에 꽂혀 있는 책들을 숨 막히게 바라본다
풍경이란 말은 어디에서나 아름다울 수 있는 말일까
‘누나 팔 뻗어봐 앉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이 시간 간절한 건 누나를 눕게 하는 일이다 책속을 헤매던 지난 시간들이 이 가을을 향해 달려왔었나를 묻는다 질문이 지나치는 빌딩 루프톱에는 떨어지지 않는 별들만 쌓이고 대로변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드론적 시각을 가졌다
떨어져 포개지는 은행잎을 보자 대지를 덮는 욕이 하고 싶어졌다
발설하지 못하는 통증을 가슴으로 밀어내다 지워버린 이름들
나무 아래 누워 바라보면 나뭇가지는 구름을 잘라내어 백기를 흔들고
도시에서 흔드는 백기는 불빛에 치이고 비명은 비명에 묻혔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고요하다고 믿는 착각을 했다
드론적 시각이 주는 오류니까
누나의 입속에 물고기가 살고 있다는 얘기는 가을 바다를 보고 싶다는 얘기
‘누나 눈 감지 마 바다 보러 가자 바닷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미래가 있을지 몰라 파도를 타고 미래까지 가보자 난 아직 한 번도 파도를 타본 적이 없어 누나 눈 감지 마 눈 감으면 우리는 벌써 미래에 와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눈감지 마 물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떠서 잠을 잔대 영원히 바다를 볼 수 없을까 봐 누나 눈 떠’
한동안 책장에 꽂혀 있는 책처럼 서 있었다 촘촘히 꽂혀 있는 책을 몇 권 빼서 숨통을 열어주자 책 한 권이 스르르 눕는다 따라서 두 권 세 권……
이름을 지우고
얼굴을 지우고
미래의 시간을 지우고
누군가 보내오는 전화벨 소리를 듣기에는 목숨은 너무 멀리에 있었다
오름과 섬이라는 시적 행간
시는 소외와 실패, 상실의 체험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의 시는 사는 동안 실패한 경험이거나 상실의 체험이 몸 안 가장 깊은 곳 즉 내면 깊숙이 가라앉은 앙금 같은 어둠에서 건져 올리는 빗살무늬 흉터 같은 것이다. 삶은 상황에 따라 슬픔·고통·절망과 같은 비극적 감정을 체득하며 몸에 새겨지기도 하고, 타협하지 못한 분노 등 많은 경험들이 의식과 부대끼며 때에 따라선 또 다른 ‘나’가 되어 의식을 지배하거나 몸에 새긴 고뇌의 감정들이 어둠의 무늬가 되어 무의식에 재편되기도 한다. 즉 시인의 일상적인 체험이나 직접경험 또는 간접경험이 결국 시인의 시 속에 알게 모르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때의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은 시 속에서 같은 범주를 지니게 된다. 그때의 시는 시인의 여러 ‘나’ 중에 상실과 비극으로부터 자신을 회복한 ‘일상 속의 나와 경험 속의 시적 화자인 나’ 등으로 분열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즉 시는 경험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 속에서 경험의 주체인 ‘나’는 일상 속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 진실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빗살무늬 흉터 속에는 여러 ‘나’들이 있으며 여러 ‘나’ 중 하나의 나를 결별시키고 시적 상관물을 빌어서 슬픔의 본질을 얘기하거나 스스로 시적 상관물 속으로 들어가 상처를 치유 받기도 한다. 즉 경험치가 시적 상관물에 이입되어 얘기를 풀어놓는 것이 나의 시인 것이다. 군더더기들을 뜯어내며 사물 속에 감춰져 있는 본질만을 드러내는 조각가처럼 시의 맨바닥에 나를 엎질러 놓고 나의 어둠을 조금씩 뜯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는 동안 겪었던 상실의 체험 또는 실패의 어둠을 치유하고자 하는 일이 내가 시를 대하는 시적 태도이며 시적 대응인 셈이다. 이때 일상적인 언어의 글쓰기 형식과 다른 대척점이 바로 시적 인식의 자리이며 시적 창조를 일으키는 시점이 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소비하여 몸으로 체험한 여정을 시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코옐로의 말처럼 절대적 공간에서 관념이 지배하는 몸으로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했던 한 여자의 여정은 나의 시적 은유가 되었다. 4.3사건으로 오빠를 잃고 뼈대라는 화두에 매달려 평생을 살아야 했던 한 여자의 슬픔을 나는 안다. 그 여자 뼈대 있는 집안에 태어나지 못한 원죄로 남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중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 남자를 향해 원삼 족두리 대신 소복을 입고 꽃길 대신 비석거리*를 터벅터벅 걸어서 훈장 집이라는 택호를 찾아 시집온 암창계*라는 슬픔을 끌어안고 평생을 살았던 여자. 뼈대라는 굴레에서 탈출하려 자신을 수없이 절벽 앞에 세웠고 수많은 날들을 바닷속에 갇혀 숨비소리로 울며 살았다. 그러나 뼈대라는 굴레는 한 번도 그 여자를 풀어주지 않았다. 사방으로 가로막혀있는 바다는 여자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여자 뼈대를 세우려 오르다 오르다 멈춰 서서 오름이 되었다. 사방으로 가로막힌 바다를 벗어나려 한없이 걸어가다 서서 섬이 되었다. 즉 그녀가 뼈대를 향해 오르다 오름이 된 행간과 그녀가 뼈대를 벗어나려 한없이 걸어가다 서서 섬이 된 행간은 영원성을 내포하고 있는 나의 시적 상징이 되었다.
하얀 소복을 입고 문을 나서는 딸을 향해 이제 훈장 집으로 가면 죽기 전에는 절대 그 집 문턱을 넘어선 안 되며 죽어서야 그 집 문턱을 넘을 수 있다며 훈장 집을 강조 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은 비수가 되었고 4.3사건이 터지자 울담을 넘기 전 댓돌 위에 벗어놓았던 오빠의 흰 고무신이 가슴에서 자랐다는 얘기를 고해성사하듯 딸에게 들려주던 그 여자.
시간과 공간을 함께 소비했던 비석거리를 지나 올레로 들어서면 마당 가득 출렁이는 숨비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마당 가운데 솟아 있는 오름과 마당 가운데 떠 있는 섬을 만날 수 있는 고향 집 어머니의 몸에 새긴 뼈대 이야기와 댓돌 위에 놓여있던 흰 고무신이 전설처럼 선명해지는 시적 인식의 자리이며 시적 창조를 일으키는 시점이 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소비하며 몸으로 체험한 어머니의 여정에서 슬픔으로 낳은 오름과 고통으로 낳은 섬을 파먹으며 나는 오늘도 시 앞에 앉아 있다.
*암창계: 제주에서 신랑의 부모가 돌아가시면 혼인식을 올리듯 신부 혼자서 소복을 입고 신랑집으로 오는 것을 말함
* 비석거리: 제주시 조천에 있는 지명
슬픔의 기억과 기억의 슬픔
- 김양숙의 시 세계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인간은 기억의 동물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가 기억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내가 과거에 한 일들을 기억하는 지금 나의 인식에 의해서 답해질 수 있다. 글쓰기란 바로 이 기억의 확대이고 심화이다. 특히 일인칭의 장르인 서정시는 시인의 기억 속에 숨겨진 자신의 삶과 꿈을 재현하는 작업이다.
김양숙의 시들은 대체로 시인 자신의 기억들과 관련되어 있다.
자신이 베어낸 파도를 등에 지고 내륙 깊숙이 들어온 고래가 비취색 살냄새를 그리워하오 피가 도는 비린내를 찾아 떠난 극지의 바다 떠돌던 유빙의 행적은 이미 사라지고 없소 바다 위에 종족의 문양을 그리는 고래의 꼬리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나를 끌고 가오
- 「고래, 겹의 사생활」 부분
시인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과자의 향기처럼 고래의 기억이 과거 속으로 시인 자신을 이끈다고 말한다. 그 기억 속에서 고향집 해변, 바다와 함께했던 아버지, 어머니의 삶, 그리고 4·3 때 죽은 외삼촌 등을 다시 만난다. 하지만 그 기억 속에서 본 과거는 안온하거나 행복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기억 속에는 고통과 슬픔이 스며있다. 그 기억 속의 슬픔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사랑이란 단어를 쪼개면 쏟아지는 슬픔의 뼈
몇 겹의 추위가 뼈에 파고들수록 아득해지는 종이 위
이력에 들어가지 못하는 영혼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남기고 간 모든 것들이 슬픔이었다면
그 씨앗들을 종이 위에 심고 마른 눈물로 키워야 했다
서로의 얼굴에 서로의 얼굴을 새기던 계절은 지나고
겨울 저녁 일기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남아있는 내가 낯설어져
종이에 쌓여있는 당신의 마음을 장작 삼아 불을 지핀다
조금씩 젖어오는 일기장
페이지 없는 안개를 끌어다 종이 사막에 묻었다
- 「종이 사막」 부분
왜 사랑이란 단어는 “슬픔의 뼈”가 되고 사랑했던 사람은 슬픔을 남기고 갈까? 그것은 완전히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 가진 한계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으로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빈자리, 즉 결핍이 있어 사랑은 완전하게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파국을 맞거나 이별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사랑했던 “당신의 마음”은 항상 슬픔으로 기억되어 그 기억을 적은 종이는 “사막”처럼 황량하고 쓸쓸하다. 결국 종이 사막은 시인이 기록한 자신의 기억이며 바로 자신이 쓴 시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슬픔의 기억이다. 시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종이 사막에서 찾아낸 것은 의식의 띠를 물고 발화를 기다리는 한 송이 꽃이었다
- 「종이 사막」 부분
다음 시에서는 과거의 기억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슬픔과 연결된다.
나무 아래 떨어져 눈 빤히 뜨고 기다렸을 동백의 시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어머니는 오라비가 남겨준 가갸거겨로 천수경을 새겨 제단을 만들고
우리는 제단에 둘러앉아 외삼촌의 목숨을 나누어 먹으며
동백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 「왜 아픈 동백이야?」 부분
시인은 떨어진 동백 꽃잎 사진을 보고 4·3 때 죽었다는 외삼촌을 떠올리고 동생을 잃고 슬픔과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을 어머니를 생각한다. 또한 시인은 “외삼촌의 목숨을 나누어 먹으며”라는 구절에서처럼 그 참혹한 시간의 아픔을 지우지 않고 언제까지나 기억하고자 한다. 슬픔과 고통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그 슬픔을 견디고 넘어설 수 있다고 시인은 믿기 때문이다.
다음 시는 또 다른 사회적 고통의 기억에 대해 말하고 있다.
떨어져 포개지는 은행잎을 보자 대지를 덮는 욕이 하고 싶어졌다
발설하지 못하는 통증을 가슴으로 밀어내다 지워버린 이름들
나무 아래 누워 바라보면 나뭇가지는 구름을 잘라내어 백기를 흔들고
도시에서 흔드는 백기는 불빛에 치이고 비명은 비명에 묻혔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고요하다고 믿는 착각을 했다
드론적 시각이 주는 오류니까
…(중략)…
한동안 책장에 꽂혀 있는 책처럼 서 있었다 촘촘히 꽂혀 있는 책을 몇 권 빼서 숨통을 열어주자 책 한 권이 스르르 눕는다 따라서 두 권 세 권……
이름을 지우고
얼굴을 지우고
미래의 시간을 지우고
누군가 보내오는 전화벨 소리를 듣기에는 목숨은 너무 멀리에 있었다
- 「그 골목의 책장 풍경」 부분
작년에 있었던 이태원 사고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사회에서는 그 사고를 “드론적 시각” 즉 관찰자의 시각에서만 바라보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시선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그 현장에서 죽어가는 자의 모습을 다시 재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책장에서 쓰러지는 책들을 보며 다시 생각한다. 시인이 죽어간 이들을 책으로 비유한 것은 그날 죽은 각각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기억이 새겨진 존재들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통해 이름도 얼굴도 미래의 시간도 지워지고 없다. 기억한다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그들을 다시 되살리는 일이다. 그들의 이름과 얼굴과 사라진 시간을 영혼이 기억해주는 것만이 그들과 우리가 겪은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고 시인은 믿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를 기억하고 무엇인가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과거나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지금 여기 자신의 것으로 내재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접혀진 한지를 펴자 꽃길은 사라지고
아버지와 나는 닮은꼴의 다른 유전자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시간대를 등에 업고
오를수록 높아지는 빌딩 숲을 헤맨다
아버지를 닮은 내가 빌딩의 거울 속으로 첨벙 걸어 들어가자 거울은 끄떡없고 와장창 깨진 내가 바짝 마른 아버지를 읽는다
- 「데칼코마니」 부분
거울에 들어간다는 것은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기억 속의 나는 “와장창 깨진” 고통의 모습이고 그것은 “바짝 마른 아버지”의 슬픈 기억과도 닮아 있다. 이렇듯 어떤 기억을 가진다는 것은 그 기억의 주체가 가진 고통과 슬픔을 공유하는 일이다. 그것은 공감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다. 하지만 슬프고 아픈 사랑이다. 시인은 타자를 향한 사랑 때문에 이 고통을 포기하지 않는 자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보내고 돌아선 새벽
수명이 다한 피의 비늘들이 떨어져 역전 뒷골목을 구르고
상처에 비린내가 차오르면 장미의 시간에 옹이가 박혔다
헐거워진 창살 사이로 고개를 내민 여자
깨어진 골목 안을 기웃거리는 늑대의 담벼락에
다시 뜨거워진 촉수를 올렸다
스스로의 죄를 창살 밖으로 꺼내 놓고 수선 중인 장미
아직도 사내의 식민지일까
- 「호객 행위」 부분
뒷골목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의 모습을 “수선 중인 장미”로 그린 참신한 표현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장미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뭇 사내들을 짐승의 피를 깨워 유혹하지만, 그들은 상처 입은 존재들이다. 시인은 이들의 고통까지도 끌어안는다. 몸을 파는 여자들이 겪는 삶은 “사내의 식민지”로서 가장 극단의 한계지점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들의 삶은 아직도 남성의 식민지로서 삶을 강요당하는 많은 여성을 대신해서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들의 고통을 떠올리고 기억하는 것은 시인에게도 역시 슬픈 일이 된다.
이렇듯 다른 시간 다른 삶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삶에 배어 있는 고통과 슬픔을 잊지 않고 되살리는 일이다. 시인은 기꺼이 그 고통을 자신의 언어로 대신한다. 그것을 통해 타자와의 연대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을 기억하는 그 고통의 시간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시는 진정한 내면의 언어가 된다. 김양숙 시인의 시들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