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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들 (외 1편)
김혜순
저 바다 멀리 배 한 척 아련히 떠가고
흰 눈은 오려는지 말려는지
구름은 낮은 하늘 아래 터질 듯 빵빵하다
내 몸의 풍선들이 저 먼 곳의 풍경으로 둥싯 부푼다
위장과 작은창자 콩팥과 큰창자 허파와 뇌
나는 나이를 먹지 않는 저 바다를 위한 서커스를 하겠다
저 해변에 내 뼈로 골조를 세우고 천막을 부풀리고
그네를 매고 하늘 가득 내 몸속의 풍선들을 올리겠다
해골의 안쪽 고이 모셔진 풍선도 부풀리겠다
그렇지 않으면 전속력으로 오그라들 것 같은 예감!
저 먼 곳이 내 몸을 불어주고 있다고 말하겠다
단상의 저분은 한 시간째 민족과 예술 어쩌고저쩌고 떠들면서
목울대에서 쉴 새 없이 풍선을 꺼내 터트리고 있는데
연수받으러 이곳까지 내려온 동료들은 엎드려 낙서 중인데
이 순간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바다는 팽팽히 부풀어 오르고 터지며 배를 부풀리는데
언뜻 보니 이 회의실은 하늘을 떠가는 비행선의 내부를 닮았다
죽은 자들의 마지막 날숨으로 불어져서
내 머리 위를 떠도는 희디흰 구름들은 안녕하신가?
단상의 저 분은 우리 뇌의 은신처에 무언가 넣으려 안달이지만
재채기가 터지는 풍선 미소가 새는 풍선 꿈이 새는 풍선
자동차에 부딪치면 퍽 하고 터지는 풍선
8백 4십만 번째 환생이 사람이라는데
이 푸른 별 속에서 숨 쉬는 것들은 모두 꿈을 꾼다는데
저 바다 밑 고래님은 몸을 부풀려 무슨 꿈 꾸시는지
물속에서 부풀어 오른 것들! 고래님 고등어님 복어님들의 꿈 색깔!
일평생 물속에서 힘껏 자맥질하면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검은 파도로 살갗을 저미는 그 느낌은?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공중으로 떠올라봅시다!
나는 단상에 서신 분의 말을 자꾸 바꿔본다
본드 부는 거리의 아이들처럼
후! 하고 분 다음 낯선 곳에 내려 봅시다!
자, 우리의 날숨이 창문 틈으로 새나가는 걸 다 함께 내다봅시다
우리 몸에서 우리 얼굴이 둥싯
인도 사람들의 검은 0처럼 떠오르는 걸 관찰합시다!
바닷가 연수원을 빠져나가 인공위성을 타고 가다 문득 돌아보면
내 입김 서린 저 푸른색 동그라미!
저 먼 곳은 노오란 달이 달디단 곳!
—《포지션》2013년 여름호
맨홀 인류
○
세상에, 이렇게 징그러운 구멍이 있다니!
나의 털 난 구멍들!
위장엔 주름
콧구멍엔 섬모
작은창자엔 융모
사랑엔 음모
구멍 안으로 솟은 털들이 수초처럼 물결친다.
김이 피어오르는 배 속에 차곡차곡 겹쳐진 구멍들.
세상에서 제일 치명적인 축축한 독사들이 헐떡거린다.
채워다오! 우리에게 밖을 채워다오!
그 맛있는 밖을!
난민 구호 빵 트럭을 향해 뻗은 손가락들처럼 털들이 징징거릴 때
누군가 하늘을 향해 금관악기를 들어 푸르름을 찬양하여 울부짖는다.
세상의 구멍들이여, 뚜껑을 열고 짖어라!
○
담즙이 식도를 통과해 입안에 고인다. 식도가 타는 듯하다. 하수구가 역류한다. 독하다. 방바닥과 천장이 붙는 것 같다. 나는 지금 수평선으로 만든 회초리를 맞고 있다. 내 방으로 서핑하러 오는 사람 꿈을 꾼다.
고체 연료처럼 내가 목구멍에 심지를 꽂은 채 타오르는 꿈을 꾼다. 연이어 꿈나라에서 기체가 되는 꿈을 꾼다. 귀에서 바람 소리가 난다.
시멘트 바닥에 내 구멍들이 다 쏟아진 꿈을 꾼다.
내가 그것을 플라스틱 솔로 씻어댄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샌다. 지하실부터 물이 고인다.
내 베개가 지하수 위에 뜬다.
이쪽을 보세요! 눈을 치켜뜨자 의사가 눈물샘을 긴 바늘로 쿡 찌른다. 눈물이 입안에 고인다. 짜다. 나는 내 안의 바다를 향해 눈을 부라린다.
목의 신경 구멍이 점점 좁아져서 신경 나무 전체를 압박한다. 구멍에 직접 진통제를 주입한다. 하루에 여섯 통씩 넣는다. 피가 뿜어져 나오려는 잇몸을 꽉 물고 있는 피아노.
오른쪽 어깨가 아픈데 의사가 왼쪽 발가락에 힘을 놓는다. 의사는 지휘봉을 들고 내 구멍들의 소용돌이와 나선의 구조를 설명한다. 누가 나의 맨홀 밖으로 머리를 내놓고 내다본다. 누가 내 목구멍으로 비명을 지른다.
구멍을 감싼 내 몸이 구멍을 두고 탈출하려 한다.
구역질이 구멍을 타고 오른다. 살갗을 벗자 몸에 뚫린 파이프들이 밖으로 샌다.
파이프 안으로 불 켠 청진기가 지나간다. 격자무늬 허파 길을 밤버스가 달려간다. 밤버스가 통증처럼 점멸한다.
○
구멍, 만물의 심장.
구멍, 나의 조국, 나의 질료. 나의 따끈한 하나님. 구멍이여, 영원하라! 만물은 큰 자궁의 영생을 위해 작은 자궁들로 한생 지분거리다 가는것. 저 높은 산 빼곡이 들어찬 여왕개미의 자궁들이여. 내가 숨을 쉬고, 음식을 먹는 것은 구멍에 대한 경배입니다. 구멍에 올리는 내 필생의 제사입니다. 일어나세요 마마, 아침이 왔습니다. 신선한 커피 한 잔 올립니다. 진정하세요 마마, 밤이 왔습니다. 펄떡거리는 뇌를 위해 포도주 한 잔 올립니다. 고통에 구멍을 뚫는 것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이 구멍에 입김 불어 나를 만드실 때, 내 구멍을 진동하던 당신 날숨의 악취, 오늘 나는 그분을 굶기고 싶습니다.
바람아, 병든 아이를 쓰다듬듯 내 허파꽈리들을 쓰다듬어다오. 시간의 기둥서방이 아직도 죽지 않고 여기 살고 있다고 말 좀 전해다오. 생전의 구멍이 생후의 구멍으로 유전하며 영생하고 있다고 말 좀 전해다오. 구멍이 구멍을 낳아 구멍을 기르고 있다고 말 좀 전해다오. (그런데 이 말을 내 구멍 말고 누가 듣고 있나요?)
○
다 함께 : 구멍께서는 죽으셨습니다
구멍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구멍께서는 다시 사셨습니다
(구멍들은 먹고 마신다)
○
자정의 지하철역에서 구멍의 입구를 맞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비명을 지르는지 삼키는지 달달 떠는지 짖어대는지
분수처럼 솟구치는지 지하도 전체가 비릿해지고 있다.
지하철 역사 안에서 손이 시커먼 아이가 손을 내밀고 있다.
잘하겠다고 하고 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고 있다.
아이를 이 역에서 몇 주째 마주치고 있다.
길 건너 산부인과에서 한 구멍이 한 구멍을 낳고 있다.
제발 무사히 구멍을 낳게 해주소서!
엄마 구멍의 엄마 구멍이 두 손바닥을 맞비비며 빌고 있을 때
분만실에서 병원의 배수관들로 만들어진 파이프오르간에 올라타려 소프라노가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하늘을 향해 비명을 내지른다. 큰 구멍이여 뱉으소서! 이 구멍이 이 어린 핏덩이를 감당할 수 없겠나이다. 뱉으소서, 큰 구멍이여! (아기의 탄생 시간은 누가
정하는 걸까? 아기일까? 엄마일까? 별들일까?)
병원 복도를 휘몰아치는 둔주곡 속에서 한 생명이 돋아 나오고 있다. 자정 근처 시각이다.
또 하나의 맨홀 인류가 탄생하고 있다. 시간이 아기의 몸에 구멍을 뚫고 있다. 머리에 맨홀 뚜껑을 얹고 있다.
그 아래 식당에서 식물, 동물 구별할 것도 없이
질투와 고독과 영혼을 구별할 것도 없이
도마 가득 몸들 올려놓고
두 손으로 난도질하고 있는 요리사의 손동작!
내가 내일 아침 저것을 먹는 것은 구멍의 껍질을 먹는 것인가? 구멍의 밖을 먹는 것인가? 구멍의 사슬을 먹는 것인가? 내 구멍의 보존 욕구여, 쉼표로 연주되는 쉼 없는 음악이여, 만만세여!
○
구멍의 본질은 불꽃 내부의 텅 빈 공간처럼 속이 비었다는 것.
혓바닥은 그곳, 아무것도 없는 구멍 끝에 속옷도 입지 않고 매달려 핥고, 오 오 오 소리를 낸다는 것.
그러므로 욕망을 잘 다스리라는 말은 순대의 속, 그 텅 빈 곳을 잘 다스리라는 말!
세상에, 보이지도 않는 곳을 어떻게 다스리라는 말씀들인지!
배고픈 순대들 속에 좌정하고 계시다는 공장장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
산부인과 한 층 아래 중환자실에선
구멍에 전기를 꽂고, 그래프는 왕왕 돌아가고, 심장은 팡팡 울리고,
그러다 운명하셨습니다. 시각은 자정 지나 12분. 바늘도 없는 시계가 하나 멈추네.
죽은 자의 구멍들이 일평생 처음 맞이하는 기쁨으로 축 늘어지면 시계는 태워지고
껍질은 남아 냉동 서랍에 모셔지고 기쁨에 찬 구멍 하나 저 공중에 떠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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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 검은 터널
죽은 후 흰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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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헛소리를 하느냐고? 사랑은 어디에서 나오냐고?
사랑이 어떻게 이 구멍에서 나와 저 구멍으로 가느냐고?
그 냄새나는 구멍 좀 치우라고?
○
겨울 연통을 두드리듯 엄마맨홀이 아기맨홀을 두드리고 있네.
무슨 이런 신기한 맨홀이 다 있어?
배고플 때마다 앙 앙 앙 눈물이 솟구치는 구멍이 있다니.
두 콧구멍 굴뚝이 칙칙폭폭 울부짖네.
아기맨홀이 울 때마다 엄마맨홀은 반도네온 폈다 오므리기 탱고 악사 손동작!
아기맨홀과 연결된 파이프를 자른 후 닥쳐온 피돌기 장애 때문에 온몸에 푸른 꽃을 피운 엄마맨홀이 구멍 수선하러 아래층 내과로 내려간다.
아기는 이 구멍
엄마는 저 구멍
각기 다른 레인을 헤엄치는 수영 선수들처럼
마주 보는 건너편 구멍은 다 다른 곳.
○
병실 침대에 누운 세면기와 변기들은 저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매트리스 속에서 붉은색 복수(腹水)가 차오르고 있다.
텅 빈 낭하를 푸르게 표백하는
형광등 속에는 날파리들이 가득 죽어 있고
간호사들은 하수도에 망가진 구멍들이 토한 것들을 버린다.
흰 구름 모양의 모자를 얹은 저 맨홀들!
저 구멍들이 내성이 강한 패혈증 바이러스를 나른다는 소문이 있다.
○
사지에 힘을 빼고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자세를 취해보세요.
몸의 구멍들이 다 열린다고 상상해보세요.
고체몸을 액체몸, 기체몸으로 바꾼다고 생각해보세요.
구멍의 덧셈, 곱셈을 풀어버리세요.
몸이 소용돌이치면서 배수구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그려보세요.
그다음 푸른 하늘이 구멍들 위에 걸터앉아 용변 보는 상상을 하세요!
큰 하수관 사방에 팔다리가 달려 있고
무거운 맨홀 뚜껑을 모가지 위에 올린 나의 자태!
꿈길에 발을 헛디뎌 구멍에 빠진 소녀가 운다.
그 소녀가 동굴 가장 깊은 곳으로 기어들어간다.
전조등 불빛이 두더지가 어둔 땅을 파듯
내 육체와 영혼 사이의 틈새 계곡을 비춘다.
그 소녀를 찾고 있다. 소녀가 거대한 바위 밑을 달팽이처럼 기어들어간다.
링거액이 똑똑 떨어져 내 동굴에 구멍을 뚫으려 한다.
불 켠 거울이 내 몸의 단층을 훑고 지나간다.
이곳에서 신경이 퇴화된 곤충류 파충류 설치류 안개류 은하수류
통칭하여 괴물들이 솟아오를 때가 있지만 웬일인지 오늘은 소녀의 신음 소리뿐.
여기 보십시오 의사는 말한다
이 구멍의 이음새 부분이 비석회화 결절들로 협착해 있습니다
심전도 측정기는 구멍의 어떤 멜로디와 연결되어 있을까?
거짓말 탐지기는 구멍의 어떤 멜로디와 연결되어 있을까?
○
구멍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온다. 내가 나를 태운 연기다.
나는 발바닥에서 시작해서 멈추지 않는 나선을, 위로! 위로! 검은 미로를 쏘아 올리고 있다.
미로 안에 숨어 있는 방들을 통과한 검은 연기가 막힌 하늘 아래서 천둥 치며 울부짖는다.
내 얼굴 내 머리카락이 소용돌이치며 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비오는 날의 수챗구멍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간다.
그때, 추락하는 더러운 방마다 좌정한 이 누구던가! 이 방에서 저 방을 부르며 부르르 떠는 소리 들리던가! 내가 내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들리던가.
끝없는 심연 위 가느다란 로프에 매달린 채 검은 비 맞는 이 누구신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잠은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오는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사랑은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오는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고통은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오는가.
아픔아 너는 어디서 왔니?
무엇 무엇을 태워버리고 이렇게 뛰어서 왔니?
네가 나니? 이게 누구니?
왜 구멍 속에 기차가 살고 있니?
이 기차가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러면서 리듬 맞춰 나를 탈선하고 있니?
그렇게 많은 승객들을 다 죽음으로 실어 나른 기차!
검은 산속을 터널이 휘돌고 폭풍처럼 기차가 나를 지나쳐 간다.
이 기차를 굶겨 죽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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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을 위한 구멍에 의한 구멍에 대한 사랑. 나는 사랑을 말하는 척하면서 구멍을 쓴다. 나는 슬픔을 말하는 척하면서 구멍을 쓴다. 나는 당신을 말하는 척하면서 구멍을 쓴다. 나는 나를 말하는 척하면서 구멍을 쓴다. 나는 구멍에 의한 구멍을 위한 구멍의 글을 쓴다. 쓰다 말고 나는 내 몸을 들여다본다. 이것은 구멍을 둘러싸고 있는 가면이다. 이 가면에 무늬를 새기다 사라져가는 문명의 성쇠여. 이것을 찢으면 구멍은 없다. 나는 걸어본다. 구멍의 건축을 둘러싼 이 괴상망측한 구조물이 덜그럭덜그럭 걸어간다. 나는 암소나 암캐처럼 두 손으로 땅을 짚지도 않고 이렇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걸어간다. 나는 '없음'이라는 주형에 들이부어진 반죽이다, 직립한 사운드다. 불안이 침범하기 쉬운 취약한 구조다. 마침내 승리할 '없음'을 위해 나날이 경배하는 나여! 나의 살이여! 인도 사람들은 '그대 안의 신에게' 나마스테라고 인사한다. 누가 이 주형에서 지금 막 떠진 내 몸에 고리를 걸어 슬픔의 방아쇠를 당기는가.
이 구멍의 구조는 구멍의 출구가 구멍의 입구를 빨아 당기게 되어 있다. 죽음이 탄생을 빨아들이게 되어 있다. 조선의 왕자 중 하나는 출구가 막힌 채 태어났다는 설이 유포된 적이 있다. 왕자의 몸에 구멍을 뚫는 것은 범죄였으므로 그는 죽었다. 나의 시간은 이 구멍 구조 속에서 쉼 없이 배설된다. 나는 구멍에 삼켜져 구멍으로 배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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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과의 옆구리가 퍽 터지면서 벌거벗은 '첫' 여자의 입술로 빨려 들어간다. 원시 여자의 누런 치아들과 냄새나는 혀가 사과를 잘게 빻기 시작한다. 태양들이, 찬바람들이, 사과꽃들이, 뺨을 부비는 빗줄기 살랑거림들이 웜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사과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일반상대성원리를 좇아 깔때기 아래로 밀려 내려간다. 이곳을 통과하면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을 나가서 먼 과거에 도착해 치명적인 뱀을 죽이면 나는 태어나지 않는 시간, 그 광활 속에 있게 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구멍을 소화하려면 반드시 '음(陰)'의 질량 적당량이 필요하다. 구멍 내부에서 얼른 소화액이 분출된다.
비워라! 내 구멍. 아밀라아제. 베스티아제. 소화제를 분비해 무엇이든 섞어서 내려 보낸다. 사과를 다 섭취하고 나면 다시 공허를 향해 껄떡거리는 애달픈 구멍. 바다에 추락한 뱀처럼 허우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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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은 하늘나라의 창녀
구멍은 공허의 둘째 부인
구멍은 시간의 매춘굴
구멍은 잠의 정찰병
구멍은 이별의 전사
이 구멍의 건축엔 바닥이 없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깊다.
이 구멍의 건축을 매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린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서 음악의 우주를 홀연히 들여다보고, 은하수 머플러를 순간적으로 둘러본 그 어느 때처럼. 해안도시에 내린 빗물이 이 지상에 몇 분 살아보지도 못하고 소용돌이치며 배수구로 빠져들어 순식간에 다시 바다에 닿은 그 어느 때처럼 망각의 깊은 구멍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간다.
멀어지고 또 멀어져간다. "깊은 곳에서 내가 주께 부르짖나이다!" (두 번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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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속에 사는 쥐 떼를 전부 소화할 수 있다면, 해탈한 사람이 되어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설이 유포된 적이 있다. 이미 저세상을 임신한 여자가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는 오후, 쥐 떼들이 내 구멍 속에서 나를 물물교환하고 있다. 밭은 숨소리들의 합창이 들려온다.
당신은 아는가, 역광 속으로 걸어가는 당신이 허공에 뜬 하나의 구멍이란 걸.
당신을 걷는 내가 또 하나의 구멍이란 걸, 당신 구멍 속이 구만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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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구멍 속에 사는 여자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빛을 본 적이 없는 심해의 여자다. 살갗 없는 붉은 괴물이다.
시간의 소용돌이에 시달려 얼굴이 둥근 여자다.
심장이 몸 밖 가로등에 걸려 골목 전체가 쿵쿵 울릴 때가 있다.
몸 안의 피가 차가워지고 그림자와 내가 몸을 바꿀 때가 있다.
그림자엔 구멍이 없다. 저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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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의 버튼을 누른다. 내가 병원을 나서자 내 구멍이 쓴다. 검은 헤나가 흘러나오는 뾰족한 펜으로 글씨를 쓴다. 구멍의 심연이 퍼 올린 꿈 하나가 쓴다. 구멍 속의 여자가 구멍 밖으로 사지를 뻗치며 쓴다. 구멍을 울리며 외마디 말이 쏟아진다. 혀가 그것을 뒤섞는다. 그러나 나의 말은 내 밖으로 나가서 다시 내 구멍 속으로 돌아온다. 내가 꽃이 핀다 꽃이 핀다 외치자 내 구멍 내부에서 꽃이 진다.
○
내 구멍 속을 조리할 때 쓰는 동사는 '끓이다, 굽다, 찌다, 졸이다, 달이다, 태우다'이다. 이 동사들 앞에 쓰이는 목적어는 배춧속, 순대 속, 마음속 같은 '속'이다. 당신이 내 속을 조리한다. 양파 속 같은 내 텅 빈 곳을 잘도 조리한다. 나는 내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멈출 줄 몰라 늘 보이지도 않는 심지를 태우고 야 만다. 내 속을 끓이는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 탈이 난다. 당신은 '+열'과 '+물'한 동사로 조리하는데, 그 동사에 '+열', '+시간' 할수록 내 구멍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끓다, 굽다, 찌다, 졸이다, 달이다, 타다' 순으로 내 마음이 조리된다. 최후엔 항상 몸 전체가 탄다. 당신이 내 마음을 태우면 내 몸도 탄다. 마음과 몸의 가림판이 녹아내린다. 녹아내린 것이 다시 피어오른다. 고체가 기체가 된다. 참고로 말하자면, 꽃은 기체다. 붉은 수증기 한 송이다. 마음은 조리법인 동시에 조리된 것의 상태다. 내 마음을 태운 연기가 당신의 구멍 속을 밀고 들어가면 당신은 저리 가, 고약한 냄새! 젓가락을 던져버린다. 그렇다고 조리되지 않은 생선회처럼 저며진 마음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오늘의 요리 — 증오 몇 뿌리를 넣고 거기에 내 구멍을 빻아 넣고 그림자 가루를 섞는다. 그다음 불 위에 올리고 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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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를 가득 실은 트럭 뒤를 따라가고 있노라면 내 온몸의 구멍들이 부르르 떤다.
누구의 몸이 되시려는가, 구멍들이여!
그 속의 둥근 어둠이여!
구멍이 되고파 헐떡이는 투명한 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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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이 약을 쓰고 있다. 전화기에 대고 소리치고 있다. 콧구멍을 후비고 있다.
구멍이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비웃고 있다. 들이받고 있다. 자동차 뒤에 자동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밀려가지 않고 있다. 토하지도 못하고, 울음을 참고 있다. 토사물이 위액과 함께 목까지 올라와 있다. 가죽 장갑을 낀 경찰이 달려오고 있다.
○
'나', 내가 내 몸속에 유폐되어 있는 곳을 부르는 이름!
'나', 몸속의 구멍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이름!
'나', 혹은 몸속에 사시는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분을 모셔 부르는 이름!
그런데 나는 지금 구멍이 아픈 걸까? 구멍의 가면이 아픈 걸까?
구멍이 죽으면 '나'는 죽는다. 그러므로 '나'는 호수에 그려진 파문 한 자락을 부르는 이름. 구멍의 건축에 감금된 한 여자를 부르는 이름.
그리하여 다시 나는 구멍이다. 나는 구멍한다. 나는 스스로 구멍하는 자. 만물은 구멍이다. 만물은 구멍한다. 만물은 마침내 죽었지만, 구멍은 살아 있다. 구멍은 과거에도 있을 것이고, 미래에도 있었다. 나는 구멍의 놀이터, 나는 구멍의 아픔. 나는 구멍의 짐꾼.
○
꽃으로 올라가는 구멍의 내벽에 더덕더덕 붙은 진액들, 피고름들, 진드기들. 신생아의 피부에 붙은 싯누런 피지들, 피고름들. 작은 구멍 하나가 썩기 시작한다. 구멍이 점점 커진다. 이윽고 꽃이 고개를 떨군다. 허공에 파문을 그리다 그만 사라져간 꽃 한 송이.
잠깐 떠 있다가 어디로 갔는지, 한 떨기 보이지도 않는 수증기의 파문.
○
별이 하나도 뜨지 않는 칠흑 같은 골목을, 거기 굴뚝을,
그 어둔 구멍을 오르내릴 물이여! 불이여! 바람이여!
구멍의 어둠을 데우려면 몸 밖으로 나가야 해!
사람들은 왜 늘 같은 말만 할까?
'여기 사람들이 가득 차 징그러워요. 사람 없는 곳으로 가요.'
내 구멍 아래엔 웃는 입처럼 벌어진 무덤들.
유해가스와 오수가 가득 흐르는 곳.
내가 내 몸속으로 들어가 질식한다.
이 구멍을 다 통과하면 저 묘혈로 떨어져간다
구멍은 우주라는 광활로 만들어진 연통이다.
연통의 맨 앞쪽에 내 심장이라는 연탄난로가 있다.
○
구멍을 청소하라! 한 마리의 쥐도 남기지 마라!
내 구멍으로 쥐를 가득 실은 열차가 도착한다. 쥐떼가 창궐한다.
구멍을 얼른 관 속에 넣고 못을 친다면?
○
지금 그립다고 편지를 쓰는
당신의 이름은 쓸개인가? 아니면 작은창자?
그것도 아니면 식도?
당신의 이름은 구멍에 붙인 명패.
나는 당신의 구멍까지 사랑해야만 해.
당신은 허방의 극장.
구멍의 예배당.
구멍 생산 공장.
내가 당신의 얼굴을 보면, 당신 구멍의 건축을 점칠 수 있네.
당신의 혀가 채송화 꽃잎처럼 섬세하게 떨리더니
구멍 끝에 매달린 꽃잎이 떨어지며 내 이름을 부른다.
그러니 오늘 우리 하수구는 잊어버리자.
당신의 구멍과 나의 구멍이 고상하게 징징거린다.
구멍을 오가는 교신, 징징거리기.
○
발자국마다 구멍이니 꽃 떨어진 자리마다 구멍이니 쓰다듬고 떠난 자리마다 구멍이니 입 벌리고 닫은 자리마다 구멍이니 고약한 구멍이니 해 뜨고 진 자리마다 구멍이니 도처 구멍이니 흡사 구멍이니 구멍이 구멍을 입으니 구멍이 구멍을 낳으니 허파 구멍이니
허파 구멍으로 들어갔다 나와도 구멍이니 화급한 구멍이니 화창한 구멍이니 화통한 구멍이니 구멍 깊으니 구멍 높으니 구멍 까마득하니 구멍 덜컥 빠지니 구멍 기어오르니 구멍 털어내니 구멍 후비니 구멍 박으니 구멍 쌓이니 일진광풍 만화방창 구멍 불어오니
천지사방 사방팔방 구멍이니 구멍이 구멍을 벗으니 내가 구멍을 쫓는 것인지 구멍이 나를 쫓는 것인지
구멍 하나 구멍 둘이라고, 이 커다란 새벽 구멍이 호명하니
○
구멍, 나의 거지.
구멍, 나의 왕자.
구멍, 내 몸의 움직임을 위한 철근 콘크리트.
구멍, 나의 아득한 만다라.
구멍의 원활한 교통, 그것이 삶이다.
구멍이 나의 길이요 진리니, 나의 시작이요 마지막이니, 당신은 당신의 구멍을 다해 구멍하라.
내 구멍의 정체, 내 구멍의 고독. 내 구멍의 중독.
내 구멍의 관제탑에 앉아 계시는 이 누구신가?
내가 내 구멍의 미로 속을 실을 풀며 간다. 구곡양장의 머나먼 길.
그럼에도 오늘 나는 내 길에 당신을 내려보내 착상하고 싶다.
내 하수구에서 당신과 살림 차리고 싶다.
범고래가 지구 구멍을 한 바퀴 돌아왔다. 새끼를 데리고 다시 나간다.
나는 구멍 깊은 곳에서 미지근한 물이 샘솟는 우물처럼 출렁거린다. 두근거린다.
구멍 노동 이것이 생이다.
구멍은 당신이 투척한 시한폭탄이다.
당신이 내 구멍 속에 손을 넣어 휘젓고 있다.
구멍의 끝에 혀처럼 돌돌 말린 채송화가 핀다.
꽃잎이 침을 흘리며 나의 안팎을 향해 혀를 날름거린다.
꽃이 말을 버무려 향기를 휘젓고, 씨앗을 먹여 살린다.
다시, 참고로 말하자면 꽃은 문이다. 문은 기체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그런데 왜 씨앗을 구멍 밖으로 뱉어서 문을 키워야만 하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그러나 밑 빠진 독에서만 피는 꽃.
○
구멍을 멀리하라.
구멍을 금욕하라.
구멍은 다 늑대다.
구멍 랍비들의 교훈.
내 구멍이 달보고 짖는 밤, 나는 구멍을 붙안고 잠들어 구멍의 노래를 듣는다.
내 무릎 속에, 내 임파구 속에, 내 골반 속에, 내 사타구니 속에, 내 식도 속에, 내 콧구멍 속에, 내 귓구멍 속에 든 노래. 내 구멍이 노래하면 저 건너 대륙의 구멍이 응답한다.
티베트 사람 하나가 내 허벅지에서 뼈를 꺼내 피리를 다듬는다.
내 노래가 당신 구멍 속을 비행기 타고 나는 꿈, 착륙하는 꿈.
낑낑거리며 무거운 외투를 벗어버리듯 내가 내 구멍을 벗어버린다.
구멍을 벗을 때 음악이 열린다. 감금된 음악이 고치를 푼다. 핏줄을 타고 흐르던 노래가 펜 끝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대 구멍이여, 문을 열어라. 내 구멍은 내 몸의 이행 없이는 열리지 않는 것. 그대 구멍이여 구멍하라. 내 구멍이 열리면서 당신의 구멍을 연다.
구멍에서 음악이 솟구친다. 구멍이 그것을 듣는다. 음악이 내 구멍의 미로에 숨은 묘혈들을 다 발굴하고 있다. 음악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던 파이프라인이 진동한다. 이 음악을 들으려면 당신 살을 찢어야 해. 나는 희망도 없이, 위로도 없이, 의미도 없이 전율을 타고 높이 치솟다가 깊이 떨어져간다. 저 깊은 곳에서 껍질을 버린 거대한 구멍이 확장한다. 그때,
나는 갠지스 강변에서 버터를 마시고, 목구멍에 심지를 꽂은 시신처럼 타오른다. 내 일생이 지나간 어둡고 외로운 구멍들이 촛농을 내뿜기 시작한다. 내가 지금 이 순간이라고 부르는 구멍의 봉우리에서 불꽃이 핀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의 봉화대에 불이 지펴지고, 멈추지 않는 소멸의 급류를 타고 불꽃이 핀다. 시간의 한 점에 꽃이 핀다. 어둠의 광장에 불꽃의 만다라가 넘실댄다. 내가 그렇게 구멍의 절정을 넘어갈 때 저절로 밀려 나오는 노래의 노래, 외침의 외침. 온몸의 구멍들이여 울어라! 혈관이 하얗게 타고, 목구멍이 하얗게 탄다.
구멍 밖으로 노래가 날아오른다.
졸업식 모자들처럼 잠시 공중에 맨홀 뚜껑들이 뜬다.
○
춤은 내 구멍 속에 든 음악이 불러낸 나의 슬픔.
춤은 내 구멍을 타고 오르는 음악이 불러낸 흐느낌.
자정이 지난 시각, 거리에 나타난 굶주린 분홍신처럼 나는 춤춘다.
구멍에서 나왔으나 구멍을 입은 나의 몸이여, 한없이 증식하는 구멍이여!
나는 이 미로를 다 춤추어야 한다.
나는 이 구멍이 거룩해질 때까지 춤추어야 한다.
깃털을 단 뱀처럼 일어나 춤추는 구멍이여.
노래가 담긴 터널이여, 회오리여, 머나먼 길이여.
내 구멍이 춤춘다. 불꽃이 춤춘다. 나를 태운 재가 춤춘다.
구멍이여! 춤 속으로 사라져라!
손도 발도 머리도 없는 구멍이 춤춘다. 향로의 연기처럼 춤춘다. 발밑의 하수구가 탄성을 지르고, 바람이 탄원한다. 아이구 놀래라, 가로수 이파리들이 전부 당신의 귓바퀴다.
내 비루한 구멍을 들어 하늘을 향할 때, 그 속에서 금빛 우주선이 발진한다.
광장에서 내가 운다. 웃는다, 소리친다. 입술이 분수처럼 터진다. 슬픔이 터진다.
구멍이 밖으로 쉼 없이 배출된다. 잠시 리듬의 만다라가 뜬다.
하늘이 나의 맨홀 뚜껑을 열고, 형언할 수 없는 리듬으로 채워진 구멍에 불을 붙인다.
금색 파도 속을 내가 서퍼처럼 지나간다.
그러던 잠시 나는 화살을 맞은 매처럼, 깃털을 잃은 뱀처럼 추락한다.
음악으로 빚은 세상이 길바닥에 쏟은 물처럼 땅속으로 스민다.
구멍의 기슭을 오르내리던 음악의 발광점들이 유성처럼 죽는다.
소매 속의 새들이 죽는다. 모래 만다라가 빗자루 밑에서 스러진다.
차디찬 숯, 검은 방패의 밤이 닥친다.
○
하와이엔 파도가 만드는 터널이 있다.
순간적으로 솟아올랐다 둥글게 허물어지는
거대한 파도가 만드는 터널.
푸른 바다가 한숨을 내쉬면 바다의 안팎이 뒤집히고
그 한숨 속을 노란 보드에 올라선 서퍼가 지나간다.
열리면서 무너지는 푸른 터널!
깊은 파도 속을 떠도는 구멍 한 필.
—시집『슬픔치약 거울크림』(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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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어느 별의 지옥』『우리들의 陰畵』『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 기계』『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슬픔치약 거울크림』. 시론집『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나)』.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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