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 스님의 주련] 37. 해남 대흥사 천불전
부처님 말씀은 중생에게 차별 없는 큰 빛
‘화엄경’ 대위광태자의 게송 인용
중생 깨달음으로 인도해줘 청정
부처님 가르침은 보리심 일게해
해남 대흥사 천불전 / 글씨 송곡 안규동(松谷 安圭東 1907~1987
世尊坐道場 淸淨大光明
세존좌도량 청정대광명
比如千日出 照耀大千界
비여천일출 조요대천계
(부처님께서 자리하신 도량은/ 청정한 큰 빛을 비추나니/ 비유하자면 천 개의 해가 뜬 것과 같아/ 대천세계를 밝게 비추네.)
위의 주련은 80권본 ‘화엄경’ 가운데 권제11 비로자나품 제6에 나오는 대위광태자(大威光太子)의 게송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올바르게 인용하지 못하고 우리나라 불교 재의례(齋儀禮)에 나오는 내용을 따라 인용했다.
‘화엄경’ 비로자나품은 법보리장회(法菩提場會)며 설주는 보현보살이고 주된 설법은 자내증(自內證)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고자 부처님은 치방광(齒放光)과 미간방광(眉間放光)을 놓으시고 비로장신삼매(毘盧藏身三昧)에 드셨다.
연화장세계해를 장엄하신 비로자나부처님께서 과거세에 이룬 수행 공덕의 인연으로 열 가지 법문을 증득하며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화엄설법이 시작된다. 대위광태자가 이같은 법의 광명을 얻고 나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대중들을 두루 살펴보고 열 가지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는데 그 첫 번째 게송을 주련으로 삼았다. 이를 온전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좌도량 청정대광명(世尊坐道場 淸淨大光明) 비여천일출 보조허공계(譬如千日出 普照虛空界), 세존께서 도량에 앉아 계시니/ 청정한 큰 광명이/ 마치 천 개의 해가 함께 떠서/ 온 허공계를 널리 비추는 듯하네.”
원문의 비여(譬如)를 주련에서는 비여(比如), 보조(普照)를 조요(照耀)로 고쳐 썼다. 이를 글쓴이의 잘못으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산보집’이나 ‘작법귀감’ 등에 좌불게(坐佛偈)로 실려있기 때문이다. 한 번의 악습은 고쳐지기가 어렵듯이 경전을 인용할 때는 원문을 충실하게 인용해야 한다.
세존(世尊)은 석가세존의 준말로 부처님을 나타내는 열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다. ‘세간에서 가장 뛰어나기에 존중받는다’라는 뜻이다. 좌(坐)는 앉는다는 표현이기에 의역하면 ‘계시는’, 이러한 표현이 된다. 도량(道場)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곳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면 인도 보드가야에 있는 보리수 아래 금강좌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원의 법당이나 그 밖의 장소에서 법회가 진행되는 곳을 말한다.
청정(淸淨)은 맑고 깨끗하다는 뜻도 있고 더럽거나 속되지 않는다는 뜻도 있다. 이는 순진(純眞)함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누구에게도 차별이 없기에 청정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번거로움이 전혀 없기에 청정하며, 모든 의문에 대해 막힘없이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기에 청정하며, 무명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기에 청정하다. 이를 빛으로 나타내면 광명(光明)이다. 대(大)는 부사로 쓰이면 정도가 높고 규모가 크거나 수량이 많은 것을 나타낸다.
중생은 부처님의 청정하고도 광명스러운 가르침으로 인해 계정혜(戒定慧)를 갖추고 보장(寶藏)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리심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으로 이를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표현한다.
한문에서 비(譬)는 사물을 끌어대어 비유한다는 뜻으로 쓰이기에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예컨대’ 란 뜻이다. 여기에 반해 비(比)는 주로 무엇과 견주어 보다는 뜻으로 쓰인다. 넓은 의미로 보면 모두 비교한다는 뜻이지만 문장의 흐름으로 보면 비(譬)가 타당한 뜻이 된다. 보조(普照)는 널리 두루 비추지 아니함이 없다는 뜻이고 조요(照耀)는 밝게 비추어 빛난다는 표현이므로 보조(普照)가 더 합당하다.
대광명(大光明)은 곧 부처님의 진리를 빛에 비유하여 나타낸 것이다. 불언(佛言)이 곧 빛이요 진리라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말씀은 모든 중생에게 차별이 없다. 다만 중생이 지은바 업(業)에 따라 근기가 달라서 이를 이해하는데 차등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