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제가 한 일곱여덟살 정도 됐을라나...
아버지께서 제 손을 잡고 어디론가 하염없이 데려가더군요.
그 때 무지하니 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지하니 멀리 가는 듯 했습니다.
꼬마인 제가 얼마나 그리 멀리 나가 보았겠습니까? 무서워서 놀아봐야 집 근처와 동네를 벗어나 보았던 적이 없었겠지요.
암튼 아버지 손을 잡고 그렇게 한없이 걸은 듯 했습니다.
속으로 '아버지는 대체 어디를 가시는 거지? 왜 이렇게 멀어...'하면서도,
시장을 지나면서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신천지를 보는 듯한 신기함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어느 극장옆의 커다란 공터같은 곳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어떤 아저씨, 아줌마의 쉼없이 조잘거리는 듯한 말을 박수를 치며 재밌게 듣더란 말입니다.
저는 별 재미도 모르겠는 것을 말입니다.
나이들어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 그 유명했던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 공연'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각종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엄청나게 확장된 시공간 속에서 살고 있지만,
돌이켜보건대 그 당시 어린 제게 있어서의 세상은
그저 제 집과 제가 걸어다닐 수 있었던 동네 언저리 정도가 세상의 전부였던 것이겠지요.
한자 공부를 하면서 1급도 엄청난 줄 알았지만, 특급은 더 대단해서 마치 태산인 줄 알았습니다.
어떤 분의 특급 합격후기엔가는 히말라야 등정에 비유하는 것을 보기도 했던 듯 합니다.
오르기 전에는 태산인 줄 알았는데, 태산인 줄 알고 올랐는데... 왜 이러죠? 자꾸만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태산은 커녕 고봉준령도 고사하고 잘해야 뒷동산의 언덕정도 밖에는 안 되어 보이니 말입니다.ㅋㅋㅋ...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 손 잡고 한없이 걸었다고 생각했던, 고춘자 장소팔 공연 구경갔던 어렸을 때의 그 길이 자꾸만 오버랩됩니다.
그 한없이 멀었다고 느꼈었던 그 길이 얼만큼 이었는지 아십니까?
중학생이 되어 제가 버스타고 학교가기위해 매일 걸어야 했던 그 버스정류장이 있는 바로 옆이었습니다.ㅋㅋ...
걸어서 십분, 십오분 걸리는 거리 말입니다.ㅋㅋㅋ...
물리적인 공간의 확장은 또한 사고의 확장도 불러 오지요. 그 반대도 또한 마찬가지구요.
정말로 우물 안 개구리요, 어려도 너무 어렸던 모양입니다.
(이 넓은 서울의 이끝과 저끝을 자가용타고 밥먹듯 왔다갔다하는 요즘 아이들이 이 말을 이해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달에나 왔다갔다해야 이해할까요?^^)
그래도 그 때 아버지 손잡고 걸으면서 보았던 신천지(?)같던 시장의 많은 사람들과 상점들의 풍경이라니...
참으로 신기하고 재밌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아버지 생각도 나면서요. 아버지와 나, 단 둘이 갔었으니... 아버지가 나를 많이 예뻐했었나 싶기도 하구요.^^)
더욱 우스운 건,
'이제 겨우 동네 뒷동산밖에 못 올랐나?... 허면 태산은 언제나?... 태산은 정녕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하는
절망이나 낙담은 전혀 들지 않고,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굳이 태산의 정상에 올라 깃발을 꽂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요새는 이 곳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고픈 생각도 없습니다.)
학여불급이라 했으니 그럴 수도 없으려니와, 어쩌면 배움에서의 '태산'이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밑에 있는 사람들, 또는 호사가들이 그가 있는 그 위치를 그냥 '태산'이라고 이름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태산북두라고 하는 '공맹'도 어찌 그들이라고 세상의 이치를 다 관통했을 것이겠으며, 모자람이 없었겠습니까?
'그래 올라가 보자...'하는 마음 뿐 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보다 올라가는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기쁩니다.
(가만히 있으면 편하지만 재미가 없고, 올라가자면 힘들지만 재미가 있지요. 세상은 이렇게 공평한가 봅니다.)
왜? 못 보던, 못 듣던, 알지 못했던 것들이 있기에 말입니다.
단지 그냥 올라가는 것이, 배우는 것이, 알게되는 것이,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내가 아직 많이, 그것도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우~~ 행복하기까지 합니다.
첫댓글 공감가는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오르기 전까지는 태산인줄 알았으나..오르고 나니 뒷동산이더라..이 말이 참 마음에 와 닿네요^^
안녕하세요. Q TV [엄마를바궈라] 작가입니다. 이 댓글 보시게 되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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