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가을 주왕산ㅡ
K형. 여기는 주왕산입니다. 당나라 주왕이 난을 피해 숨어 살았다 해 주왕산, 조선시대 세상을 등진 선비들이 숨어 지냈다는 전설의 산에 왔습니다. 산 오르내리기가 평탄하고 단풍 빛갈이 유난히 고와 가을산행 1번지로 꼽히는 산입니다. 보통 방문객들은 대전사를 출발해 펼쳐진 계곡과 기암절벽, 쏟아지는 폭포수와 바위들과 단풍을 둘러보는 일정을 잡지만, 저는 주왕산의 비경을 속속들이 감상하려고 절골코스를 택했습니다. 그리하면 대전사 너머의 깃대봉, 떡시루를 닮은 시루봉, 청학과 백학이 노닌다는 학소대 등 절경 어느 하나 놓침없이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발이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절골계곡에는 물안개가 자욱해 그 사이로 비쳐지는 색색의 단풍들의 향연이 아침부터 전개되어 어디가 산이고 하늘이고 무엇이 단풍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절골에 발을 내딛자 눈 앞에 열린 이 가을 단풍의 화려함, 계곡물 타고 내려오는 단풍잎 조각배들, 오묘하면서 화려한 배열의 기암괴석, 헤아리기 어려운 수 많은 전설들이 내게 다가와 몸을 휘감습니다. 2시간 남짖 계곡을 걸어 가니 가을 잔치와 향연에 몸과 영혼이 흠뻑 빠져 내가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지금 나는 가을의 자연에 일부가 되었습니다. 저 단풍잎들이 다 지면 눈꽃이 피겠지요. 절골을 한참 가다 가메봉으로 가는 길을 찾아 올라 하산 길목인 큰 골에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보이는 풍광들은 절골계곡과는 또 다른 세계입니다. 아래로 펼쳐 진 계곡 양면에 배열되어 있는 바위 병풍들을 올려다 보니 그 아찔한 절경이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골짜기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돌맹이들은 신선들이 공깃돌 놀이하다가 던진 돌과 같으며, 크고 둥근 바윗돌은 서로 엉키거나 흩어져 놓여 있어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맑게 흐르는 물 속에 작게 흩어져 있는 자갈돌 하나하나는 생선 알집처럼 오돌오돌 살아있어 시선을 매료시킵니다. 이 산에 오면 눈과 마음에 담아가고 싶은 것이 너무 많지만 오늘은 특별히 바위들의 모습에 주목하렵니다. 바위들마다 전설이 주절주절 열려있는 데다 그 형상이 평범하지 않아 발길을 멈추고 전설만 음미해 봐도 하루가 모자랄 것 같습니다. 또 계곡을 둘러 싸고있는 바위병풍들이 마침 등반길에서 멀지 않아 천천히 시선을 주어 쳐다보기만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눈 앞에 펼쳐진 바위 모습을 자세히 보니 천 가지 모습과 만 가지 모양입니다. 네모진 것 ,둥근 것, 쭈거려들거나 삐쭉 튀어 나온 것, 누구 키가 큰지 다투고 있는 것, 사이 좋은 부부처럼 배합한 것, 원수처럼 서로 등진 모습의 것, 형제와 친구처럼 나란히 서 있는 것 등 그 형상을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자연은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긴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니 이 풍경 전부는 어떤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만 인간이 그 퍼절을 읽지 못할 뿐이겠지요. K형. 세월이 가면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지만 저 바위들은 풍상에 모습의 변화는 좀 있겠지만 본연의 자태를 지켜왔고 또 지켜 나갈 것임을 생각하니 인생유한(人生有限) 자연무한(自然無限)이란 글귀가 생각납니다. 그러면서 내 삶이 어떠한지도 성찰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