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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대목이 매우 궁금합니다
[그리운소리]
질문1- “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 여기서 예수님께서 받으라고 하신 성령은 행2:1이하의 성령강림과 차이가 있습니다. 요20:22에서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임시적인 것으로 ‘ 예수님을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의심없이 믿고 따르게 하는 [기본적인 성령]을 말하는 것이며- 행2:1의 성령강림은 이적과 기적과 여러 가지 은사들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존’을 보여 줌으로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는 성령충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요20:22의 성령은 선교를 위해 보냄을 받은 제자들에게 사명감을 일깨워주는데 목적이 있다면- 행2:1이하의 성령충만은 복음전파를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질문2- “ 너희가 뉘 죄든지 사(용서)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말씀을 고해성사의 근거로 삼고 교황이나 신부들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어떤 죄든지- 누구에게 지었든지- 은밀하게 신부에게 나아와 죄를 고하기만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카톨릭의 고해성사를 보면- 신자가 사제 앞에 나아와 낱낱이 죄를 고하면- 사제는 “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는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사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의 직무 수행으로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 하고 또 말하기를 “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평안히 가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죄용서 받기는 정말 쉬우나 이러한 행위는 비성경적입니다.
요20:23의 “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
타인의 죄에 대한 용서 유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교인들 중 하나(형제)가 나에게 성처를 입혔거나- 어떤 피해를 주었을 경우- 그 사람이 내게 와서 “ 정말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 고 진심으로 빈다면 당연히 용서를 해 줘야할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 하루에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 주라 ”고 명하셨기 때문이며.
둘째는- 내 죄도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할 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6:12-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상대방이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18:21-35까지 내용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옥에 갇히게 된 것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채권자에게 엎드려 비는 행위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나 –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일만 딸란트 빚진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 그 많은 빚을 탕감받아 놓고서도 –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적은 빚하나 탕감해 주지 않고 옥에 가두어 버렸다가- 그것이 죄가 되어 자신도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 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타인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자신의 죄도 용서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쌓여 있을 것이요- 타인의 죄를 용서해 주면- 자신의 죄도 하나님께로부터 용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카톨릭의 고해성사가 비성경적인 이유은-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피해를 입힌 사실이 있으면- 그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자기 죄와 상관없는 신부를 찾아 가서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그 사람을 찾아 가서 용서를 빌어야 성경적인데- 아무 상관도 없는 신부에게 가서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다는 그 자체가 도리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자신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교회도 포기해 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삶의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서- 그 사람이 용서해 줄 마음이 생길 때까지-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 때까지- 서로가 화목이 이뤄질 때까지- 일만 딸란트 빚을 진 사람이 엎드려 빈 것처럼- 백데나리온 빚진 자가 빈 것처럼- 빌고 또 빌어- 그 아픈 상처를 치료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치료. 마음의 치료. 이것이 바로 회개의 목적이요- 이유인 것입니다.
“ 하나님 아버지 ! 내게 상처를 입혔던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었으니- 하나님께서도 나의 죄도 용서해 주옵소서 ” 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런 죄를 지었다면- 나 역시 그 사람을 찾아가서 그렇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의 원리요- 사랑의 원리요- 그리스도 지체로서의 당연한 원리인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무자비하게 정죄했고- 아무 죄도 없는 욥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친구로 하여금 번제용 수송아지 7마리와 수양 7마리를 가지고 욥을 찾아가 용서를 빌라하셨고- 3친구는 욥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욥은 진심으로 잘못을 빈 그들을 용서했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욥42:7-9).
그러나 만일 죄지은 사람이-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그 죄는 반드시 그대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지 아니하면 결코 하늘에서도 풀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화목이 이뤄지지 않는 회개는 심판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서 잘못했다하고 화해해 버린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놓고- 피해를 입혀놓고-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화목은 깨지고 서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둘 다 큰 죄를 짓게 됩니다. 한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아 그 죄가 쌓이게 되여 구원의 길이 막히게 되고- 한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받아 미워하며 증오를 하게 되니- 이 또한 하나님께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원한과 증오가 가득하게 되면- 불을 품에 품은 것처럼 자기부터 타 죽게 되고- 숯불을 밟고 서 있으면 자기 발부터 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하여- 타인의 영혼구원을 위하여- 서로 용서의 무대로- 회개의 무대로- 화목의 무대로-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잠6:27-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28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므로 피차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 너희가 뉘 죄든지 사(용서)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는 말씀으로 전 기독교인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카톨릭 사제들처럼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 네 죄를 내가 사해 줬다 "가 아닙니다. 회개란 자기의 자존심을 다 버리지 않고서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용서해 줄 마음을 얻어낼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카톨릭의 고해성사는 자존심 다 세워가면서- 상대방이야 마음이 아프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죄 사함만 받아- 찜찜했던 양심의 지유함만 누려 보겠다는 것은 비양심적이고 비성경적인 처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회개를 원하셨을까요?
둘째- 교회 차원에서
정죄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목회자를 중심으로 교회의 위계질서가 반듯해야 하고- 성도들끼리의 사랑과 화목이 이뤄져야 하는 곳입니다. 이것을 위해 교회는 치리권(징계권)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 근거로 마18:15-20입니다. 교만된 행위로 교회의 화목을 깨고- 영혼을 실족시켜 신앙을 떠나게 하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교인이 회개치 아니하고 문제를 일으킬 때- 그 죄인을 정죄하여 징계처분 할 수 있는 최종 결정권은 목회자에게 주어졌습니다.
“ 마18:15-20 =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사실을 확증)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레19:17참조) ” 이 말씀은 교인 중 하나가 죄를 짓고 회개치 아니할 경우- 법적으로 정죄라는 최종 결정이 내려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성도가 어떤 교인의 교만된 언행으로 상처를 입었거나 – 금전적인 피해(사기행각 같은)를 보았거나- 아내나 남편을 유혹한 일 등으로 상처를 받았을 경우(15절)- 그 사람을 속으로 미워하거나 원망하면서 죄를 짓지 말고- 상처준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화목을 목적으로) 회개를 권면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함으로서 화해가 이뤄지면- 그 사람도 상처가 치료가 되고- 그 상대방 영혼도 회개할 기회를 얻어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런데 찾아가 회개를 촉구한 그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치도 아니하고- 뉘우치지 아니할 경우에는(16절) -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 회개하라 ”고 권면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때 들으면 다행이지만 - 그래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아니할 경우- 그 두 세 사람은 그 사건의 증인이 돼야 합니다.
셋째- 그 증인인 3사람이 교회 목회자를 찾아가- 그 사람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면 – 마지막으로 그 목회자와 3사람의 증인이 함께 찾아가서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들으면 다행이지만 듣지 아니하고- 자기 죄를 인정치 아니하고- [화목-화해]을 거절하거든- 목회자는 교회로 돌아와서- 대중 앞에서 그 사람을 정죄하는 최종판결을 내려 징계처분 한 후 그 사람을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격을 박탈해 버리라는 것입니다(17절).
예수님은 화목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서로 죄를 용서하므로 [화목]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화목을 도모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목회자들에게 [정죄]에 대한 최종결정권자로서의 주어진 치리권입니다. 이런 교회의 권위에 대해서 고전5:11-13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고전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교인 중 하나)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교인들)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13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
불신자들이 위와 같은 죄를 범하거든 복음을 전하여 – 회개하도록 가르쳐야겠지만- 이미 하나님을 믿는 교인들이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고전5:11과 같은 죄를 범하고도 회개치 아니하거든 이 악한 자는 그리스도 공동체 밖으로 내 쫓아 버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단 둘이서 해결해야 될 잘잘못을 둘이서 해결 못하고- 교회 지도자까지 나설 정도가 되었는데도 회개치 아니할 때에는 교회차원에서 단호하게 징계처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 는 말씀이요- 목회자에게 주어진 교회 치리권을 말하는데- 이러한 징계처분은 명분이 확실해야하고- 자타가 공인할 수 있는 죄로- 성경에 입각했을 때- 성경에서 어긋나지 말아야 하는- 인간의 기분이나 감정이나 혈기가 개입되지 아니하는 공명정대한 치리권으로 성경이 기준이 된 치리권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눅7: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유대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유다는 인간들에게 가서 죄를 빌었습니다. 카톨릭 고해성사처럼 말입니다. 마27:3-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 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
가룟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잘못을 회개를 했습니다. 이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 네가 저지른 그 죄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 유다를 책망했습니다. 오늘날 카톨릭의 고해성사를 배격하는 말입니다. 가룟유다가 용서를 빌어야 할 상대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 죄를 지었으니 예수님께 가서 통회자복해야 옳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룟유다의 신앙현주소였습니다. 가룟유다의 회개방법은 오늘날 카톨릭의 고해성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 마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레19:17참조)”와 직결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위계질서를 위해 – 그 죄인이 철저하게 회개하면- 교회에서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선포해야 하며- 회개치 아니하고 화목을 거절할 경우에는 교회 밖으로 쫓아버리는 정죄의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정정당당한 판결을 보시고- 하늘에도 풀어 주실 것이고- 회개치 아니하는 죄인에게는 죄를 사해 주지 않고 그대로 놔둘 것입니다. 잘못을 하고도 뉘우치거나-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교만하여자기 죄를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을 교회차원에서 정죄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끝으로 한 마디
문제는 오늘날 교회에서 그런 악인들에게 죄를 처벌할 힘이 없다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세워야할 목회자를- 교인들이 투표를 통해서- 교인들의 동의을 얻어서- 교인들의 마음에 든 사람으로 - 결혼할 때 선을 보듯이- 목사들의 선을 보아- 교인들의 선택에 의해서 노.총회에서 사람을 보내 세우게 되니- 목사가 교인들의 종이 되어- 교인들의 비위를 맞출 수 밖에 없고- 교인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직업목사들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좋은 직장하나 잃게 되는데- 어떻게 문제를 일으킨 교인들에게 단호한 징계조치를 취할 수 있겠는가. 한 교회를 맡을 주의 종은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세우도록- 모든 성도들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데- 오늘날 주의 종들은 직업목사들이 되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교인들의 종이 되어 있으니 -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치리권행사나- 천국대사로서의 행사해야될 주권에 힘이 없으니 그것이 큰 문제 중에 하나인 것이다.
학생은 많은데 제자가 없고- 선생은 많은데 스승이 없으며- 체포해야될 악인은 많은데 생명걸고 잡아들일 검.경찰이 없고- 문제를 일으킨 악인들은 많은데- 단호하게 징계처분할 수 있는- 청빈과 정직으로 무장한 목회자 찾아보기 힘드니 ... " 갈데까지 가 보자 "는 오늘날 한국교회. 과연 그 배는 어느 방향을 향해 달려 가고 있는가 !!! ....
첫댓글 전도사님 우리가 이웃이나 누구에게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것이 잘못된건가요? 또한 사과를 할때 내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할때 말에 잘못이 있는건가요? 사람의 죄를 사람이 용서하지 못한다고 하면 이렇게 말하는것이 잘못된것 같아요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어 괴롭게 하거나 원망과 미움이 생기거나 했을때 사과 하는것과 용서를 구한다는것 같은말인지요? 잘못을 빈다고 할때 죄를 용서해 준다고 말 하는것이 틀린것 같네요 화해를 한다고 해야 맞는것 같은데 정리좀해주세요
내가 표현력이 부족한가봅니다. 누가 나에게 죄를 짓고 내게 와서 잘못했다고 진심으로 빈다면 당연히 용서를 해 줘야합니다. 하루에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으니 말입니다. 위에서 내가 한 말은 사람과 사람끼리의 용서를 주고 받는 그 차원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잘못을 하고도 뉘우치거나-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교만하여- 자기 죄를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을 교회차원에서 정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서 잘못했다하고 화해해 버린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해놓고- 피해를 입혀놓고-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운소리 화목은 깨지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고해성사같은 것은 상처를 주거나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잘못을 빈 것이 아니라- 신부에게 가서 죄를 고하면서 용서를 받지 않습니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그 상대에게 가서 빌어야지- 아무 상관도 없는 신부에게 가서 빈다는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신부가 죄를 사해준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상처를 준 사람이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가서 진심으로 잘못을 빌었을때- 상처받은 마음이 치료가 되어 그 사람을 용서할때- 하나님께서도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운소리 이것이 바로 " 너희가 뉘 죄든지 사(용서)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사람의 죄나 무조건 자기가 하나님 위치에 서서 " 네 죄를 내가 용서해 줬다 "라가 아니라- 자기에게 죄를 범한 사람이 와서 용서를 빌때- 그 죄를 용서해 주면서 서로 화목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고- 만일 죄지은 사람이-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빌지 아니하면- 그 죄를 그대로 두겠다는 말씀입니다. 서로 단 둘이서 해결해야될 잘잘못을 둘이서 해결못하고- 교회 지도자까지 나설 정도가 되었는데도 회개치 아니할때에는 교회차원에서 단호하게 징계처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운소리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6:12-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 상대방의 죄를 내가 용서치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마18:21-35까지 내용은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용서해 달라고 엎드려 빌었지만- 용서해 주지 않고-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자신은 일만 딸란트나 탕감을 받아놓고서도 말입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합니다. 위 글이 이해가 안 간 모양입니다. 다시 보완을 해야겠습니다
@그리운소리 저는 또. 이 말씀이 있어서 혼선이 왔습니다. 죄를 사할 권세는 오직 하나님, 예수님뿐이 없다는 말씀에서 헷갈렸습니다. 모든 궁극적인 죄는 하나님께서만 용서가 된다는것으로. 알면 되는거지요, 자기와 상관없는 죄를 용서할 인간은 아무도 없다. 에고 제가 이해력이 부족해서인뎅 ㅠ 어쩌나요 눈도 불편하신데 아고 성경도 정말 겉핡기 식으로 읽는것과 깊이 생각하고 읽는것과 천지 차이인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래서 정신 집중하고 요것이 무슨뜻인가 머리를 싸매고 읽어야. 하는데 자꾸 엇나가는때가 많네요
행: 은 사도행전
요:는 요한복음이지요?
맞아요
예수님의 이 이 말씀이 개개인에게 한 말씀만이 아니군요 이제는 더 정확하게 죄사함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이러한 죄들을 다스리지 못하여 큰 늪에 빠져버린것 같습니다. 죄를 일깨워주지 않고 정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또한 어떤 사람에게 죄를 지고 괴롭혔는데 양심에 찔려서 주님이 아닌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그 사람에게 이러저러하게 잘못을 했네 미안해서 죽겠다" 이런식의 양심고백은 아무런 죄사함의 댓가를 받을수 없다는 말씀 깊이 깨닫습니다. 말씀을 보면 늘 개개인에게 주는 말씀과 또한 단체에게 주는 말씀으로 주시기도 하는데 많이 헷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너희들이,
라는 말을 쓸 때에 제자들이나 그 시대에 사람들의 한정된사람들에게 하는 소리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에수님이 제자들에게 죄 사함의 권세를 준것인가라고도 생각을 했었네요. 사람에게 지은 죄는 그 당사자외에는 아무상관이 없는것이고 단지 교회에서는 상관할 권리가 있는것이군요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것인가요?
@청포 그렇지요. 당사자들끼리 서로 풀어버리고 화목의 길로 나가기만 하면
교회에서 나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죄를 회개하라는
것은- 그 사람의 죄도 용서해 주려는 것이고 - 특히 상처를 입고 마음아파 하는 사람의
마음에 치료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미움과 증오와 원한이 사라져야 화목이 이뤄지니까요
광야의 소리 글은 너무나 귀한 글이라서 정말 아까운 글입니다.
세상 책에 비유하자면 베스트셀러가 될 것입니다. 읽고도 깨닫지 못하는 분들은 언젠가는 깨닫겠지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지금 이 순간도 함께 하여 주시는 주님!!!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도사님 저도 3월2일부터 30일작정기도 하기로 했어요
저희 큰오빠 작은오빠도 30일 하기로 했고 저희엄마는 100일작정기도 하신다고 합니다 끝까지 잘마칠수있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