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iling_of_the_Sistine_Chapel_detail
Ceiling_of_the_Sistine_Chapel_detail
Ceiling_of_the_Sistine_Chapel_detail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1508-1512)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 부오노로티는 1475년
아버지 로도비코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0세때 피렌체 시내 프란체스코 울비노 학교에 들어가나
학교 공부보다 지옷토나 마사치오 그림을 모방해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부친은 그들 가문에서 예술가가 나온다는 것을
가문의 수치라 여겼기 때문에 못마땅히 여겼지만
13살때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 문하에서 3년간 도제 수업을 받았다.
기를란디오는 그 당시의 부유한 피렌체 시민 계급의 생활을
명쾌하고도 매력적으로 표현해준 화가이다.
그의 화실에서 미켈란젤로는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일반적인 교양과 기법을
특히 프레스코벽화의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이때부터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 피렌체풍의 세련된 미술을 거부하고 기념비적이고
강한 표현을 즐겨하게된다.
미켈란젤로는 1496년 로마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상'을 제작하고
피렌체에서는'다비드'상을 1504년에 완성하여, 많은 사람들로 부터 찬사 를 받는다.
1512년에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에 '천지창조'를 4년여만에 완성했으며
그 후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는 1508년 5월 10일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4년 동안 천장벽화의 프로그램을 짜고 설계하여
그 계획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갔다.
일반인은 물론 교황까지 출입을 통제시키고
천장 밑에 받침대를 세워 직접 그렸다.
얼굴에는 온갖 물감이 흘러내려 피부병이 생기고
몸은 하프악기처럼 휘어지고
항상 고개를 뒤로 제치고 그렸기 때문에
고개가 굳어 목이 잘 굽혀지지 않는 고통스럽고도 고된 작업이었다.
1512년 10월 31일 시스티나 성당이 교황의 미사 후에
마침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바사리의 기록에 의하면
작업이 공개되었을 때 온 세상 사람들이 미켈란젤로가
무슨 그림을 그렸는가를 보려고 달려왔고
그것을 보고는 너무도 경탄하여 할말을 잊은 채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한다.
관람객의 머리 위로 수천 피트 넓이의 천장에는 300명이 넘는 인물들이
어떤사람은 실물보다 3.4배나 더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창세기의 여러 장면들을 연출해 다양한 위치에서 본 것 같이 그려냈다.
찬란한 색채로 그려진 천장은 이제까지 본일이 없는
압도적인 거대한 스케일로 제시된 가장 거창하고 야심찬 화려한 장식이었다.
Michelangelo 자화상 (1475-1564)
생존 마지막 기간 중에는 론다니니 피에타 등을 조각했는데
거의 죽어가는 순간까지 이 작품들을 조각하였다.
1564년 2월18일 미켈란젤로는 뇌일혈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이틀 전 플로렌스에 묻히기를 원하였기에
로마의 성 아포스톨리 교회에서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플로렌스로 가서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되었다
Sistine 성당
최후의 심판
피에타(산 피에트로 성당)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미켈란젤로의
걸작 피에타 상이 놓여 있다
이 조각상은 성당 입구에 세워진 것으로 성모 마리아가
임종한 아들 예수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 혹은"비탄"이란 뜻.
Ann roozha / Farid Farj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