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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방송통신고등학교’
이권섭(마산방송고 27회, 2004년 졸업)
인생을 배우기 위해 마산방송고송고등학교 문을 두드린 후 새로운 세상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50이 넘어서다. 1995년 창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에서 5년째 한문학과를 다니던 10월 어느 날인가 보다. 주임교수님께서 자기 방에서 차나 한잔하자고 제의했다. 흔쾌히 교수님 방을 노크했다. 당시 교수님은 나만 보면 ‘이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불렀다. 그 이유는 한문 실력이 동료 수강생들보다 우월했다고나할까. 교수님은 자리를 권하면서 차를 내오셨다. “이 선생님 지금 연세가 몇이요?” “네 50입니다.” “좋은 나이다. 우리 창원대 국문학과에 입학해서 정상적으로 공부해 볼 생각 없는가?” 라고 물었다. 나는 적이 당황했다. 사실 5년 전 입학원서를 작성할 때 거짓말을 했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내가, 졸업한 학교를 사실대로 확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학력 란에 ‘고졸’이라고 썼기 때문에 교수님은 고등학교 나온 놈이 한문 실력이 탁월하다고 여기신 것 같았다. “나이가 많아서요.” “이제 50이면 지난 50년은 접어버리고 지금부터 후반 50년을 더 산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늦은 시기도 아니다.”라고 했다. 우물쭈물 화제를 돌려서 이야기 나누다가 교수님 방을 나왔다. 이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37년 동안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 다니고 싶었던 학교가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여건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일주일 동안 고심하다가 다시 교수님 방을 노크했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초등학교밖에 졸업 못해서 망설일 수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을 속 시원히 털어놓고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교수님은 웃으면서 “이 선생님의 학문은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지금부터 공부하세요. 검정고시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이때부터 아이들이 쌓아놓은 헌 책의 먼지를 털고 방으로 가지고 와서 머리를 싸맸다. 이때가 1999년 11월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생업에 매달리랴, 틈틈이 공부하랴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다음해 1월 디스크로 수술을 받아 거동이 불편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2000년 4월 5일 중졸 및 고입검정고시에 도전했는데 8과목 중 수학, 영어 두 과목에서 기본 점수 미달로 떨어졌다. 다시 머리를 싸맸다. 8월 영어, 수학 2과목에서 당당히 합격했다. 고졸 및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하려 하니 매일 12시간 매달려 있는 자영업 때문에 너무나 힘들 것 같아 2001년 마산고등학교 부설 방송고등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3월 입학식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고자 하는 향학의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20대에서 60대까지 아무런 사심 없이 오직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인 학우들, 그들 사이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항상 나에게 따라다니는 호칭은 큰오빠, 큰형님이다. 생업을 이어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힘들었다. 1학년 2학기 어느 날 반장이 오빠 인생의 경험담을 학예경연대회에서 사례 발표로 한번 해 보라고 권유를 했다. ‘나의 인생 나의 삶’이란 주제로 사례 발표를 했는데, 그날 경북 구미방송고등학교 ‘서명환’ 선배가 내려와서 듣고 다음 해 5월 방송고등학교 영남연합회 대의원대회에 연사로 초청해 주었다. 오히려 마산에서 처음 사례 발표할 때보다, 더 많은 학우들이 공감하고 호응해 줬다. 장내가 눈물바다가 됐다. 그 일로 인해 영남지역에서 일약 스타로 변신하는 계기가 됐다. 다음에는 ‘윤순병’ 전국 방송고등학교 총학생연합회장 초청으로 전국 방송고등학교 대의원대회에서 사례 발표를 했다. 마산방송고등학교에서는 이권섭(이슬이)을 잘 몰랐지만, 전국 방송고등학교에 다니는 선배, 동료, 후배들은 마산방송고등학교 이권섭(이슬이)하면 알아주는 만학도로 크게 성장한 것이다. 이후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산방송고의 위상을 높였다. ‘어울마당’ 카페가 개설되어 네티즌 활동도 열심히 했고 방송고등학교 동료, 선후배들과 인연을 만들어갔다. 전국 방송고등학교 출신 수많은 동료, 선배들과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음이 자랑스럽다. 3년의 마지막 코스 대학 진학을 눈앞에 두고 마산대학 한약재개발과에 수시모집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2004년 2월 마산방송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주간 대학을 다니면서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어갔다. 경제사정이 어려울 때 선배, 동료, 동문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특별히 거명한다면 한 해 선배인 구미고 서명환 선배, 구미고 박영희 선배, 경남여고 문정숙 선배, 경복고 이태훈 선배 등 다수가 있다. 이렇게 하여 졸업을 앞두고 문단에 등단도 했다. 새로운 사회생활에서 나의 인생과 삶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생활환경도 좋아졌다. 3자매 모두 시집을 보냈고, 우리 부부는 둘 다 문인(文人)이다. 시와 수필을 쓰면서 농장일 돌보고 한가한 여가를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신문사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이유는 某신문사에 기고한 글을 보고 이런 분이라면 자기가 운영하는 신문사 기자로 충분하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설명이었다. “하는 일도 있고 남들은 퇴직하는 나이에 얼마나 일할 수 있겠나.”면서 거절했다. 특히 거절의 이유는 ‘신문사 기자’하면 인식 자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 세 번 방문하여 요청하는데 거절하다 마지못해서 1년만 도와주고 그만 둔다는 조건으로 신문사 기자로 나섰다.
벌써 내 나이 환갑이 되었고 신문사 기자로 일한 지 32개월째다. 평온한 가운데 새로운 인생을 산다는 것은 행복이다. 다소의 걱정거리가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방송통신고등학교’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혹자들은 방송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부끄럽다고 자기 인생에 등불이 되어 준 ‘방송고등학교’ 출신임을 외면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그들이 불쌍하며 가여운 마음이다. “우리가 최고의 학부를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준 모태인데, 왜 무슨 이유로 이렇게 ‘방송고등학교’를 홀대하고 업신여기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방송통신고등학교는 나의 인생을 새롭게 안내해 준 등불이었기에 이순(耳順)의 나이임에도 젊은이들 못지않은 왕성한 열정으로 오늘도 자신 있게 사회에 적응하고 신문기자로서 존경받으면서 아름다운 노후를 맞을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 지난 삶의 모습이 전국의 방송고에 다니는 재학생이나 졸업생들에게 조금이나마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남은 인생을 노인들의 고귀한 경험과 경륜이 후손에게 이어져서 사회에 환원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편, 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인의 권익 신장을 위해 일하고 싶은 새로운 희망의 꿈을 꾸고 있다.
주. 한국교육개발원 ‘U반딧불’에 실린 기사.
첫댓글 성진 선생님 존경합니다 지난날 여러차레 선생님의 글을 읽고 근황을 알게되고 살아오신 고난의 길도 굳은 신념으로 극복하시고 오늘의 이자리에 서게된 피땀흘린 결실의 영광입니다 저로써는 부끄럽게 살아온 인생 할말이 없습니다만 선생님의 굳은 의지는 이땅의 젊은 이들에게 등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훌륭하십니다 그 실천력에 놀라고 용기에 감동했습니다 행복한 노후가 되시길 빕니다
성진 선생님의 고운 글에 마음까지 따스해지는 느낌입니다^^
정말 값지게 인생을 사시는 분 같습니다.선생님 화이팅!!^^*
참으로 큰 마음으로 행하는 노력 너무 훌륭합니다.멋진 인생길이 될 것입니다.기쁨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