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디자인을 어떻게 할까(3)…설교의 분명한 목적을 설정하라
설교를 디자인한다는 것은 사고(思考)나 아이디어를 구성(조립)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디자인은 설교가 보이게 되고 형체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에 비한다면 콘크리트로 뼈대를 세우는 것과 같다. 설교의 윤곽(outline)보다 더 구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화가의 스케치와 같고, 건축설계사의 설계도(청사진)와 같은 것이다.
지난 번에 말한 아이디어는 적어도 한 사고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완전한 사고는 아니다. 완전한 아이디어는 주부와 술부로 된 완전한 문장 안에 표현된 완전한 사고라고 하겠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설교의 제목·서론·본론·결론이 조립되었을 때를 완전한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강좌 NO.2에서 사도행전 1장 8절을 인용한 바가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성서 구절이 설교자에게 유독 관심이 있어 몇 번 읽고, 주해서를 찾아보고, 머리에 '복음의 파장' 또는 '사랑의 파장'같은 생각이 떠올랐다고 할 때 이것을 아이디어라고 한다.
호숫가에서 호수를 향하여 돌을 던졌을 때, 돌이 떨어진 중심에서 파장이 일어나 더 넓게 멀리 퍼져나가는(파문) 것을 보게 된다. 이처럼 복음이 갈릴리 나사렛 예수님으로 시작하여(십자가의 수난과 3일 만에 부활), 승천 직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여(행 1:4),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120문도가 열심이 기도한 결과 성령이 강림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하루 3000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고, 비로소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했다. 이 사실을 목도하고 경험한 제자들이 유다, 사마리아(이방 땅)에서 땅 끝까지, 즉 오늘날 우리 한국까지 복음의 파장이 120년 전에 밀려와 이젠 1200만 명의 신자가 되었다. 이를 믿은 성도들이 세계의 오지까지 복음의 사신이 됐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자들은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이것을 사도행전 1장 8절의 중심사상이라 할 수 있다. 아이디어를 좀 다르게 생각해서 '사랑의 파장'이라고 한다면 중심사상은 "사랑의 실천자가 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복음의 핵이 되는 사랑의 실천은 가장 가까운 예루살렘과 같은 가정(家庭)이라 하겠다.
부모가 가정에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하는 것은 부부끼리 서로 사랑하는 본을 보여 주어야 한다. 부부간 사랑의 감정, 사랑의 정서 여하가 그 가정의 스위트 홈을 이루느냐 못하느냐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의 사랑의 밀도 여하에 따라 그 자녀의 정서가 형성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아는 기본적 교육심리다. 즉 자녀는 부모의 사랑의 모습을 본 대로, 듣는 대로, 느끼는 대로 그대로 자녀들에게 이루어지게 된다.
자, 그렇다면 사도행전 1장 8절을 가지고 설교 디자인을 하려고 한다면, 중심사상이 '복음의 증인'이나 '사랑의 실천자'라면 제목 설교나 본문 설교나 일단 제목을 '가정의 복음화' 또는 '부부의 사랑'이라 한다면, 이것을 가지고 서론·본론·결론을 어떻게 디자인 할 것인가? 서론·본론·결론을 조립하기 전에 디자인의 여섯 가지 기본 원칙을 생각해 보자.
본문만 읽지 말고,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2장 47절까지 전후 문맥과 성서교훈의 말씀, 그 말씀과 주해서가 말하는 중요한 교훈을 메모해 놓고, 이 본문인 1장 8절과 상관관계 등을 심사숙고하면서 명상해 봄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음의 여섯 가지 원칙의 질문 앞에 답을 써야 할 것이다. 이 원칙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아이디어가 '복음의 파장'이라고 한다면 이 아이디어를 해부(解剖)해 보는 것이다.
제1원칙 "내가(설교 디자인자) 말하는 것은 무엇에 대한 말인가?" 설교 디자인자가 본문과 문맥 전후를 깊이 묵상해 본 결과,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행 1:6)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했다. 이 제자들의 질문이 다윗의 빛나는 왕국의 재현에 대한 질문이라고 한다면 정말 다윗의 왕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상적인 왕국이라고 하겠다. 제자들은 그 실현의 때를 물은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 안에 있으니,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오직 너희 권한 안에 있는 것을 하라는 말씀으로 1장 8절 말씀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확실한 신자가 되라(신실한 신자가 되는 것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되거든 네가 믿고 체험한 복음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고(확신적인 믿음), 이 사실을 증거하는 일이 이 아이디어의 해석이다. 아이디어의 해부는 복음의 파문이 확대되어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1장 8절 '복음의 파장'에 대한 해부는 첫째 이 본문을 갖고 설교 디자인하려는 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What is the man talking about?) 환언하면 내가(설교자 디자인자) 설교하려고 하는 분명한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설교 디자인자가 "실제적으로 무엇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가?"(What is actually taltked about?) 더 구체적으로 복음 증거 대상의 확대를 말한다. "자기 가정부터(예루살렘) 복음화하자는 생각이다"고 할 때, 그러면 이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 믿음이 통일 되지 못한 신도들이 많은데 자기 가정부터 복음화를 강조한다면 "교인들(회중)이 내게(설교자) 요구(need)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는 단계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자가 일방적으로 "짝 믿음의 가정은 믿음을 통일시키도록 해야 합니다"며 윽박지르는 명령조의 설교가 아니라 듣는 짝 믿음의 성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정을 신앙으로 통일 시켜야 하나요"의 질문을 이끌어야 한다. 설교자는 그 방법까지 짝 믿음의 성도들에게 설득하는 설교가 있어야 한다.
이처럼 설교를 디자인하려는 자는 확실한 목적부터 설정해야 한다. 다시 설명하거니와 '사랑의 파장'이란 아이디어의 해부는 가정(출발지점은 예루살렘)이 사랑의 출발 지점이다. 가정의 사랑 중심지는 부부다. 부부의 사랑 여하에 따라 자녀에게 사랑의 마음을 심어줄 수 있다. 부부의 사랑 여하에 가정의 행복 여하가 결정된다. 그러면 "어떻게 부부 사랑의 본을 보여 줄까"라는 단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교 디자인의 제1원칙은 이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다. 교인들에게서 나오는 반응이 무엇이어야 한다는 설교자의 기대감이 바로 목적이다. 이 설교를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반응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설교를 쓰는 목적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 '설교마당'을 보면 이 제1원칙이 분명히 세워지지 않은 설교들이 대다수다. 좌로 갔다가 생각해 보고 돌아오고, 우로 갔다가 다시 본 궤도로 오는가 하면, 또 좌로 가곤 한다. 그러니 설교가 엉망진창이다. 무슨 목적으로 쓰는지를 모르겠다. 분명히 설교를 집필할 때, 무슨 목적으로 쓴다고 하면서도 가다가 길을 잃는 수가 많다.
그러니 은혜가 될 수 없고,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일으킬 수가 없다. 쉬운 일인데 실제로 쓰면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설교 목적에 관계없는 것에 손을 댄다. 금년 구정(舊正)에도 고속도로에 귀성객으로 교통이 혼잡해질 것이다. 그래서 국도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고, 고속도로를 강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서울서 부산을, 목포를, 간다는 분명한 목적지를 설정해야 한다.
그 목적지에 따라서 서해안 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아니면 중부고속도로 등 여러 여건을 선정해서 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가는 날짜에 따라서 번잡한 것과 질펀하게 잘 달릴 수 있는 여건도 결정되겠지만, 고속도로가 번잡하지 않더라도, 줄곧 달리기만 하면 운전자는 긴장이 지속되어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가 어렵다.
가다가 잠시 휴게소에서 쉬어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목적은 분명한데, 내리 달리기만 하는 설교를 듣는 교인은 피곤하다. 그래서 잠이 온다. 잠시 쉬어가면 푸른 하늘도 보고, 흰 눈이 쌓인 산도 보고, 푸른 싱싱한 소나무도 보면 눈의 피로가 가신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예화, 대화체, 적합한 시, 옛 위인의 명언, 유머 등 모두 회중이나 독자에게 긴장을 풀게 하고, 잠시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하고(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게 하고, 흥미를 지속시키게 한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고속도로 길 좋다고 마구 달리는 것처럼,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교리적이고, 본문 해석을 해석학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줄달음질한다.
이런 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아무리 좋은 내용의 설교라도 지루함을 느끼고, 피곤해서 밖을 보기 마련이다. 독자도 '적적'한 설교, 이론적인 설교를 읽다가 결론이 무엇인지 모른 채 대충 끝난다. 미국 버클리에 있는 버클리 제일장로교는 바깥을 훤히 볼 수 있는 투명유리로 되어 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가 교회 벽을 유리로 만든 이유가 교인들이 내 설교 듣다가 지루하면 바깥을 보라고 해서 유리로 만들었다고 유머를 했다. 전체 회중이 듣다가 한바탕 웃고, 다시 새로운 흥미로 목사의 설교를 듣는 모습을 보고 절실히 느낀 점이 많다.
요컨대 분명한 목적의식이 인생의 어느 면이든지 중요한 것처럼, 설교에서도 제1원칙이 이 설교를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다는 분명한 목적이 설교의 성패를 제일먼저 판가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목적이 분명하다고 내리 달리기만 하지 말고, 잠시 쉬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