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도스토예프스키 [ Dostoevskii, Fyodor Mikhailovich ] 0. 모스크바 출생. 0. 빈민구제병원 의사의 둘째아들로 태어남. 0.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 0. 넋의 리얼리즘 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 0.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20세기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침. 0. 특히 W.스콧의 환상적이며 낭만적인 전기와 역사소설에 흥미를 느낌. 0.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사관학교에 입학 및 졸업. 0. 그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은 도시의 뒷골목에 사는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 적 비극과, 그들의 심리적 갈등을 그려낸 중편. 0. 1849년 봄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좌 다른 서클 회원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음.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로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서 지낸 4년간의 생활은, 그가 인도주의자 ·공상적 혁명 가에서 변모하여 슬라브적인 신비주의자 ·인종사상(忍從思想)의 제창자로 사상적 전 신(轉身)을 하게 되었음. 0. 1859년 말 10년 만에 수도 페테르부르크로의 귀환이 허락. 0.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를 창간. 0. 시베리아 옥중생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독특하고 참신한 장편 《죽음의 집의 기 록》 (1861∼1862)과, 그의 전기(前期) 창작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학대받은 사람들》 (1861)을 발표. 문단으로의 복귀를 확고하게 함. 0. 궁핍한 생활 속에서 그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남기게 되는 《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惡靈)》(1871∼1872) 그리고 중편 《영원한 남편》(1870) 등을 발표. 0. 외유에서 돌아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그의 만년의 10년간은 장편 《미성 년》 (1875)과 그의 생애를 통한 사색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카라마조프의 형제 들》(1879 ∼1880) 이외에도, 1873년 이후 시사적 수상(隨想)과 문예평론 ·단편 등을 포함한 자유 형식의 문집 《작가의 일기》를 썼음. 0. 《죄와 벌》로 시작되는 그의 후기의 대작은 시대의 첨단적인 사회적 ·사상적 ·정치 적 문제를 예민하게 반영시킴과 동시에, 인간존재의 근본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점 에 그의 특색을 찾을 수 있음. 0. 1866년 잡지 《러시아 통보(通報)》에 발표된 세계 문학 걸작의 하나. 한국에서도 애독되는 작품. 등장인물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 - 해박한 법의 이론 무장. 살인. 뉘우침. 자수. 엄마 폴라헤리야 - 주인공의 엄마, 전형적 어머니상. 여동생 라쟈 - 정신적 순수 사랑의 소유자. 라드미힌과 나중에 결혼하게 됨 친구 라드미힌 - 라쟈와 결혼하게 되는 현실적 삶의 소유자 주인공의 남자 친구. 식모 나스타샤 - 측은지심으로 콜리니를 바라보는 순수자. 전당포 알랴이노브바 - 구두쇠로 오직 돈 밖에 모르는 악의 화신으로 콜리니의 죽여 없애야 할 대상. 살해당함. 그동생 베탸베타 전당포 주인인 언니와 함께 이유없이 살해당함. 창녀 쏘냐. (아버지 마르멜라도프) - 맑은 영혼의 소유자. 그 맑음에 콜리니가 살인을 자수할 상대로 지목. 영혼을 구제받음. 정욕의 절대자 스비드리가일노프- 라쟈의 미모에 반한 정욕의 절대자. 이루지 못하는 사랑으로 끝내 권총 자살함. 예심판사 포르필리 - 냉철한 법리 이론으로 콜리니가 살인자라는 예견을 함. 줄거리
읽으면서 내내 저자가 법대 출신의 법리 이론에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런지 쥐꼬리만큼이나 알고 있었던 법에 대한 이론이 이 책을 읽으며 얼굴 붉히게 했고,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자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때 웃음 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공병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해박한 법에 대한 지식을 갖고 소설을 완성해 나갔을까. 아마도 그것은 페트라세프스키 사건에 연루되면서 사형선고 까지 받았던 죽음에 대한 압박과 긴장을 법 이론과 결부시켜 꽤나 공부를 했다는 생각으로 결론을 지을 수 있었다. 근대 도시의 양상을 배경으로, 작중의 하급 관리 창녀 쏘냥의 아버지인 마르멜라도프의 말대로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뒷거리가 무대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라스 콜리니. 그는 자신이 가난한 것이 자신같이 없고 가난한 자들의 피를 빨아 먹는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들 때문이라는 이론에 도달하고, 그녀를 살해하기로 마음먹는데, 그 정당성은 영웅들이 영역을 넓혀가면서 주변의 사회와 문화, 인명까지도 파괴하거나 살상을 했지만, 승리한 그들은 그런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자신만의 법리 이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살인을 한 후에 자신의 마음이 떳떳하다고 느낄 것이라 생각했는데 후의 행동은 달랐던 것이다. 반복해서 되살아나는 살인에 대한 후회스러움은 점점 자신을 스스로 죽음에 몰아넣었다. 영혼이 황폐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가정의 중심인물이다. 아버지 없는 가난한 집에서 어머니 폴라헤리야와 여동생 라쟈의 헌신적인 기대적 인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대에 다니는 법학도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콜리니는 친구 라드미힌과 더불어 번역을 하는 알바의 일을 간간이 하지만, 자신을 위하여 고생하시는 엄마와 여동생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힘겹게 공부를 하면서도 가난으로 인한 병적인 사색에 깊어간다. 콜리니코프는 병적인 사색 속에서, 나폴레옹적인 선택된 강자는 인류를 위하여 사회의 도덕률을 딛고 넘어설 권리가 있다는 법적 결론에 도달하여 이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는 독충과 같은 고리대금업자 알라이노브바와 그녀의 여동생인 베냐베타를 죽여 버림으로서 이 사상을 실천에 옮긴다. 원래는 고리대금업자만 죽이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언니네 집을 방문한 베냐베타를 보고 완전범죄를 추구했던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베냐베타까지 살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행위는 뜻밖에도 그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하고, ‘인류와의 단절감’에 괴로워하는 비참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법리이론으로 완전무장을 하며 사회의 악인 고리대금업자는 죽어도 괜찮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인을 했지만 자신이 단절감에 빠지는 결과를 보고 즉 영혼이 황폐해지는 것을 보고 끊임없는 후회를 하게 되는 것이다. 민감한 예심판사 포르필리. 그는 콜리니의 논문을 보면서 직감적으로 콜리니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감지했다. 하지만, 법의 이론에 투철한 콜리니를 보며 쉽게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자신만의 냉철한 또 다른 법리 이론으로 하나하나 콜리니를 살인자의 영역으로 몰고 간다. 포르필리의 혐의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맞서나가면서도 죄의식의 중압에 견딜 수 없게 된 그의 심정은 가족의 호구지책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팔아야 하는 자기희생과 고뇌를 견디며 살아가는 ‘거룩한 창부’ 소냐를 찾아 살인을 고백한다. 비록 창녀지만 맑은 영혼의 소유자란 사실을 콜리니는 알았던 것이다. 사랑이다. 사랑 앞에서는 그 어떤 고난과 시련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에서 주는 또 하나의 교훈적 요소가 아닐는지. 또한 정욕을 절대화하는 배덕자 스비드리가이로프가 권총 자살을 했다는 수수께끼 같은 삶과 죽음에 자기 이론의 추악한 투영을 보고 마침내 자수하여 시베리아로 유형 된다. [ 다음(daum)과 네이버(naver) 신지식에서 발췌한 저자의 문학세계 ]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보는 심리적 통찰력으로, 특히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문학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죄와 벌 Prestupleniye i nakazaniye〉·〈백치 Idiot〉·〈악령 Besy〉·〈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 Bratya Karamazovy〉 등 그의 장편소설들은 삶의 지혜와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데 예술이 매체로 이용된 뛰어난 본보기이며, 그에게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의 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이론적 살인자 라스콜리니코프에 있어서의 인간을 추구한 《죄와 벌》, 조화와 화해를 초래할 아름다운 인간 미슈킨 공작(公爵)의 패배를 묘사한 《백치》, 네차예프 사건에서 소재를 얻어 혁명의 조직과 사상의 병리를 묘사한 《악령》, 청년의 야심적 생태를 다룬 《미성년》, 존속살해범을 주제로 신과 인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결시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 각 작품에서 다룬 소재가 다르면서도 총체적으로는 내면적인 통일성으로 굳게 연결되어 있는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세계’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죄와 벌》의 양극적(兩極的)인 인물상(人物像)인 소냐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각기 《백치》의 미슈킨 공작, 《악령》의 스타브로긴으로 계승되며, 나아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조시마 장로와 이반의 대결로 발전하는 것 등이 한 예로서, 그의 작품세계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긍정과 부정’의 상극을 작가 자신과 더불어 체현시킨 것이라 하겠다. 이 상극의 생생함을 ‘폴리포닉한 로망’ 형식 속에 그대로 재현시킬 수 있었던 점에서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천재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문학과 사상에 끼친 영향은 매우 광범위한 것이지만, 특히 현저한 것으로는 F.W.니체에서 현대의 실존주의자에 이르는 사상의 계보를 들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온갖 적극성을 부정하는 수난의 철학을 신봉하는 자로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반동작가로 규정하여 왔으나, 근자에 이런 견해는 다소 약화되어 그의 저작집 등도 새로 출판이 허용되게 되었다. 공병학교를 졸업한 얼마 뒤 오로지 글 쓰는 일에 몰두하기 위해 과감히 전역했으나 생계를 꾸려나갈 수단이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농노들에게 살해당한 아버지는 유산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 Bednyye lyudi〉(1846)의 원고를 완성해놓았던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친구를 통해 유명한 문학평론가인 비사리온 벨린스키에게 이 원고를 보냈다. 벨린스키는 이 무명의 청년 작가를 불러 주인공의 숨겨진 본성을 밝히는 예술적 재능을 칭찬해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기쁨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이렇게 회상했다. "진실은 예술가인 당신한테 고지되고 선언되었소. 그것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주어진 것이라오. 그 재능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충실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위대한 작가가 될 것이오!" 〈가난한 사람들〉은 별로 노력을 기울인 작품도 아니고 초심자의 기술적 결함으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었지만, 벨린스키의 칭찬은 예언적인 통찰이었다. 벨린스키는 이 작품에서 러시아 최초의 사회 소설을 읽어낸 것이었다. 이 작품은 고아 소녀에 대한 사랑을 아버지다운 애정으로 감추고, 그 애정을 감상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면서 존경을 얻으려고 애쓰는 가난하고 늙은 관리의 절망적인 노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가난한 사람들, 당시의 처참한 사회 상황에 희생된 사람들의 희망과 노력이 아무 결실도 맺지 못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준다. 주제를 다루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솜씨는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그는 종래의 방식에 새로운 차원(주인공의 갈등을 내면에서 관찰하는 심리분석적 관심)을 더했기 때문이다. 그는 형 미하일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접근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종합이 아니라 분석으로 글을 써나갑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깊숙한 곳으로 뚫고 들어가며, 모든 원자를 분석하면서 전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그는 러시아 사실주의 소설의 독자적인 전통을 수립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니콜라이 1세 황제의 억압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정치적·사회적 개혁운동에 가담하여, 이상주의자인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의 집에서 금요일마다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다. 이 모임에서는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이 토론되었다. 그는 이 토론회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소책자를 불법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소규모 비밀결사에도 참석했다. 서유럽을 휩쓴 혁명운동이 러시아에 미칠 영향을 염려한 정부는 1849년 4월에 페트라셰프스키 서클 회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같은 해 9월, 오랜 수사가 끝난 뒤 체포당한 218명의 정치범들 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를 포함한 21명이 총살형을 선고받았는데 그해 말 극적인 해결이 이루어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때의 상황을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 12월 22일, 우리는 모두 세묘노프 광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사형수의로 갈아 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일행 중 3명이 처형장으로 끌려가 기둥에 묶였습니다. 저는 앞에서 6번째였고, 우리는 3명씩 끌려갔으므로, 저는 2번째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제는 정말이지 1분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옆에서 나팔소리가 울려퍼지더니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기둥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풀리고, 황제 폐하의 사면을 알리는 칙령이 낭독된 것입니다." 황제의 사면령이 발표되기 직전에 죽음을 각오하고 처형에 대비했던 무시무시한 경험은 그의 기억에 깊이 새겨져, 후기소설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사형선고는 시베리아의 옴스크 유형지에서 4년 동안 중노동을 하고 다시 4년 동안 군대에서 병졸로 복무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중죄를 범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처벌을 당연한 죄 값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더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중노동을 하면서, 가벼운 죄를 지은 일반 죄수들을 '특별한 사람들'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따금 정신적 고통에 짓눌렸고, 이 무렵에 첫 번째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간질병은 그 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유형지에서 그에게 허용된 책은 〈신약성서〉뿐이었는데, 이 책은 1825년 12월의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이른바 데카브리스트의 부인 한 사람이 기증한 것이었다. 그는 이 책을 거듭 읽었다. 〈신약성서〉는 유형지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신앙을 배웠다. 죄인을 일으켜 주고,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었다. 감옥생활은 그가 장차 작가이자 사상가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젊은 시절의 급진주의 사상은 기존 질서에 대한 존중과 민중의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었다. 고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러시아 정교회의 영성주의가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감옥은 굴욕당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더 깊이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해 주었다. 쇠사슬에 묶여 유형을 떠난 지 만 10년 만에 자유의 몸으로 그가 사랑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그는 새로운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옹호하는 사회개혁에 공감했다. 이 잡지가 주창한 입장은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 양대 지식인 그룹의 이념적 화해였으며, 러시아를 구하기 위해서는 두 파벌이 대중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논설과 소설을 통하여 인텔리겐치아와 민중의 참된 접근방식을 모색했으며, 그 덕분에 잡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시인인 아폴론 마이코프와 비평가인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및 니콜라이 스트라호프 등 그의 견해에 동조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모여들었고, 그의 정치적·사회적·예술적 견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죽음의 집의 기록 Zapiski iz myortvogo doma〉(1861~62)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일찍이 누렸던 문학적 명성을 되살려 주었다. 투르게네프가 갈채를 보냈고,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최고 걸작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소설은 아내를 죽인 혐의로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은 한 남자의 회고록 형식으로 표현되었지만, 사실은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유형지에서 겪은 경험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면서, 유형생활을 묘사하고 특별한 죄수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통찰하는 한편, 감동적인 삽화를 통하여 이 버림받은 그가 〈죄와 벌〉(1866)을 처음 구상한 것은 아마 유형지에 갇혀 있을 때였을 것이다. 이 소설의 구상을 적어 놓은 수많은 작가 노트(그는 그후에도 소설을 쓸 때면 노트에 구상을 적어두곤 했는데, 이 작가 노트들은 그의 창작방법 및 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음)에는 그가 이 작품의 예술적 세부에 기울인 끝없는 관심이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는 돈을 기본 문제로 삼고 있는 사회소설이다. 이 작품의 가난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비롯한 급진적 젊은이들의 유물론 사상이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사회에 반항하는 지식인 허무주의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데, 그에게는 이성이 삶의 과정을 대신한다. 인도주의적 목적은 사악한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의 파괴주의적 이론은 결국 그를 살인으로 몰고간다. 감옥에 갇히자 그는 도덕률을 위반하도록 자신을 충동질한 지적 오만을 버리고, 행복은 이성에 바탕을 둔 실존 계획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고통을 통해 얻어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마르멜라도프와 그의 아내, 창녀 소냐,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 같은 보조 등장인물들도 뛰어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은 살인을 다룬 흔해빠진 추리소설 속에 주목할 만한 철학적·종교적·사회적 요소들을 집어넣음으로써 평범한 추리소설적 긴장감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주었으며, 발표되자마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소설의 혁신적 기법과 강렬한 문체, 그리고 범죄자와 도덕적 불구자들의 가장 어두운 내면을 밝혀주는 영적 광휘가 독자와 비평가들을 매료시켰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완성하기 전에 악덕 출판업자와 이미 맺은 계약을 1개월 안으로 이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계약을 어겼을 경우에는 가혹한 벌금을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에 쫓긴 나머지 안나 스니트키나라는 젊은 여자 속기사를 고용하여 중편소설 1편을 기일 안에 끝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도박사 Igrok〉(1866)는 거의 힘들이지 않고 쓴 작품이지만, 도박에 대한 열정과 폴리나 수슬로바와의 애증관계에서 영감을 얻은 힘찬 장면들이 몇 군데 들어 있다. 이듬해 그는 이 속기사와 결혼했고, 빚쟁이와 돈을 요구하는 인척들을 피해 아내와 외국으로 가 4년 동안 머물렀다. 두 사람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살았고, 때로는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는 경우도 많았다. 젊은 아내는 이 모든 고난과 남편의 간질 발작, 끊임없는 노름, 그리고 첫 아이의 죽음을 꿋꿋이 견뎌냈으며 남편과 남편의 천재성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 2번째 결혼은 진정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건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2번째 걸작 〈백치〉(1868~69)는 이처럼 불우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이 소설의 출발점은 러시아 신문에 보도된 어떤 형사재판 사건 기사였다. 이런 사건들을 그는 '환상적인 사실주의'라고 불렀지만 이것을 소설에 이용할 때는 외부세계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정신세계를 강조했다. 그는 평범한 러시아인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지만 '인간 내부의 인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런 문제들을 한 차원 끌어올려 보편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나를 심리학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단지 더 높은 의미에서 사실주의자일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인간 영혼의 모든 심연을 묘사한다." 그는 조카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백치〉의 주요의도는 "절대로 아름다운 인간(즉 도덕적인 의미에서)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절대로 아름다운 인간은 오직 한사람뿐이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은 주인공 미슈킨의 순수한 도덕적 성정을 손상시키고, 예판친 집안과 이볼긴 집안, 로고진 그리고 미슈킨의 사랑을 얻기 위해 다투는 유별난 경쟁자 아글라야 및 나스타샤와 그의 관계를 좌우한다. 이 작품에서 이들을 비롯하여 관능·탐욕·범죄에 굴복하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미슈킨의 도덕적 신념을 시험하는 장면은 특히 뛰어나다. 이들은 그의 신념과 밝은 성격에 이끌리지만 봉사와 동정심 및 우애를 외치는 그의 계시는 그들을 끌어들이지 못한다. 그의 체험은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 틈에서 겪었던 체험을 상징한다. 결국 그가 자신의 선량함으로 감동시킨 죄인들은 불행해지고 그 자신은 백치가 된다. 오늘날 도스토예프스키는 가장 널리 읽히는 19세기 소설가로 손꼽히는데, 그 까닭은 아마 그가 소설 속에서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세대 및 전후세대를 괴롭힌 도덕적·종교적·정치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극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시인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고, 나치 지배 이전의 한 독일 비평가는 마르틴 루터 다음으로 독일에 가장 큰 정신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라고 말했다. 20세기 프랑스의 경우,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자기 세대의 지성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으며,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철학은 이성의 횡포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난에서 영감을 얻었노라고 말했다. 레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대해 "나는 그런 쓰레기를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소련에서도 널리 읽혔으며 유명한 소련 작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
출처: 앵초의 삶처럼 원문보기 글쓴이: 별꽃앵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