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답하기 위해 국어사전을 펼쳐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공부 -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학문’은 뭐고 또 ‘기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초중고생들이 하는 학교공부를 ‘학문’이나 ‘기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위 사전적 정의가 얼마나 제한적인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단어에 대한 정의는 시대에 따라 변해왔기에 항상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학문’이란 쉽게 말해 ‘밥벌이로서의 공부’ 정도의 의미입니다. 즉 그것은 대학교육 중에서도 대학원 이상의 교육체계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기술’은 어떨까요? 이는 ‘밥벌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식’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학문’은 비실용적 지식을, ‘기술’은 실용적 지식을 뜻한다고 생각하지만, 양쪽 모두 생계유지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실용적으로’ 운용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문제는 사전처럼 공부를 ‘학문’이나 ‘기술’이라는 실용적 영역에 묶어놓고 보면, 그 단어가 가지고 의미가 매우 협소하게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사전적 정의는 우리의 일상적 언어사용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하겠습니다. 일단 교육제도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공부코스를 거치게 됩니다. 놀이방,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대학졸업과 더불어 공식적인 공부를 마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인생공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첫째) 공식적인 제도교육 밖인 일상생활(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부를 의미하지만, (둘째) 인간이란 ‘공식적 교육’과는 무관하게 평생 무언가를 배우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공부’를 다음과 같이 재정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부 - 배우고 익히는 것
이런 식의 정의는 그 자체로 수긍할 만한 것이지만, 너무 막연하고 일반적인 정의이기 때문에 해당개념이 가진 문제성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분류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1) 학교공부 (초등, 중등, 고등, 그리고 대학까지의 일반과정)
2) 학문 (대학원 이상)
3) 기술공부 (특수고등학교, 전문대학, 대학의 일부 실용학과)
4) 인생공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조금 다루었으니 ‘학교공부’에 대해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국가적으로(그리고 가정적으로) 가장 막대한 비용이 사용되는 ‘학교공부’(특히 고등학교까지)를 보면,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공부하는 주체의 자발성이 매우 낮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학생들은 하고 싶어서 공부를 하는 게 아니지요. 그런데 이는 역으로 말하면 학부모의 영향력(강제력)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은 반강제적으로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것은 대학진학을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학교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험공부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대학개혁 없이는 중등교육제도를 아무리 손질해(인성교육을 강화해) 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교육이 대학입학으로 수렴되는 것일까요? 바꿔 말해,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부’하면 ‘학교공부’를 떠올릴 정도로 우리 모두가 ‘학교공부’를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어느 대학에 진학하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인생이 사실상 결정되는 현실적 사회구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면 ‘학교공부’ 역시 실용적인 공부(학문/기술)와 완전히 구별되는 공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결국은 공부하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엇’이 목적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생공부는 어떠할까요? 적어도 이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공부가 아닐까요? 하지만 사실 이것도 실용적인 공부에 속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과 잘 어울리면서 무리 없이 잘 살아가는 기술(삶의 기술, 또는 처세술)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다른 공부들과 달리 공부의 도구를 ‘책’이 아닌 ‘삶’에서 발견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저는 공부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직업’이라고 말하기가 껄끄러울 정도로 소득은 낮지만요). 이런 사람에게 공부가 즐거운 일일 수는 없습니다. 이는 축구선수들에게 축구시합이 ‘놀이’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간간히 공부의 즐거움에 빠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나도 모르게 공부하는 데에 몰두하여,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노동’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입니다.
미국의 철학자 중에 에릭 호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않지 않은 사람으로서 오로지 독학으로 지식을 습득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예전의 숙련된 노동자들은 일을 놀이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는 근대화(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과 놀이의 엄밀한 구분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지적인 동물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깨닫거나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흥분하게 되지요. 그런데 문명이 발전할수록 지식의 ‘축척’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희열’이 구분되어 전자만이 교육제도의 형태로 체계화된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당연 이 과정에서 지식은 인간 사이의 서열을 만드는 핵심기준이 되고, 이에 발맞추어 내 자녀만큼은 좀 더 높은 서열에 들어가게 만들기 위해 과도한 교육열(공부열)이 생겨나는 거구요.
최근 인기가 있는 교양공부론은 이런 학교공부(또는 실용공부)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거기서 가장 강조되는 것 중 하나가 '놀이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교양공부론의 핵심은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노동과 놀이이라는 구분 위에 성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용성'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바꿔 말해, 교양교육이란 노동과 놀이의 일치를 통해서라기보다는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경제적 여유)를 상징하기에, 자신을 타인과 차이화하는 데에 있어 매우 유용한 존재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공부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노동에서 찾고 싶습니다. 즉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주어질 때만 가능한 교양과는 무관한 어떤 목적을 수행하는 것인데, 쉽게 말해 그것은 여유를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가 아니라 여유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바뀌어야 하는 것은 '노동 이후'가 아니라 '노동 자체'라 하겠습니다.
첫댓글 마지막에 진정한 공부에 대한 (개인의) 정리 혹은 정의를 내리셨는데, 참 어렵군요^-^ 전 항상 노동 이후의..여유만을 찾으려 한 거 같은데, 약간의 생각의 전환을 가질 계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여유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이것 또한 참 머리아픈 일이지요/ 저는 공과대학을 나와 기술직종에서 몸 담고 있어서 그런지, 문학-철학-교양 등은 저에게 약간의 동경이자, 나의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는 그 무엇, 혹은 일상생활에서의 탈출구(?)의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것들이 여유를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에 촛점이 맞춰져있다는 거...^^;
마지막부분이 제일 눈에 띄네요.
'노동자체'에 대한 이해와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선 제 개인적으론 경제학이 좀더 보편화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아직도 주식,펀드,채권에 대한 상식이 없이 함부로 투자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더라고요. 개인적으로 한국경제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는데 자본주의가 가진 소유구조로 인해 앞으로 장차 우리사회의 갈등이 불거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실용학문을 하는데에 대해서는 저는 50%만 동의합니다. 대학에서 휴대폰만드는 일 따위에 지적역량을 올인한다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이 가지는 참된 의미와 그 사회에서의 가치(구체적
으로 임금수준까지 고려하여) 를 배우는 데 시간을 투자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공부라는 보편적인 대상을 놓고보자면 지금 30대에서 50대 즉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공부를 많이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전을 뛰어본 사람만큼 삶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기 좋은 사람은 없을 뿐더러 가장 적극적으로 정치(사회변화)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아쉽게도 대부분 삼십대중반이 되면 책에서 손을 놓고 "인생 다 그런거 아니냐"란 말을 늘어놓습니다. 제가 제일 듣기 싫은 말중 하나이기도 하죠. 공부란 의미를 제쳐놓고 현재 자신이 왜 그곳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히 고민해야 할
사람들이요.
헤겔이 말한 것처럼 세계사에서 아무런 사건도 없는 시기가 가장 평온한 시기인 것은 분명하고 또 아직까지는 그런 시기에 속한다고 저도 생각합니다만 앞으로 훨씬 더 힘든 시기가 올 것이라는데에 개인적으로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정말 눈 크게 뜨고 세상 살아야 할 날들이요.
혹 강퇴당하지 않을까싶어오랫만에 인사차 들렀습니다. 세상에 사람없이 책하고만 살아도 살것같은 나날입니다. 건강하시길.
강퇴를 보류하겠습니다. ^^ 한데 사람없이 책하고만 사는 세상이란 아마 끔찍한 세상일 것입니다.
공자는 "吾嘗終日不食 終夜不侵 以思無益不如學也"라고 말했고, 콩트는 사유하기 위해 자신의 책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하지요. 저는 조금 더 근본적인 물음에서, 사유의 위치를 고민해보아야만 비로소 "공부란 무엇인가"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양공부론 따위가 인기를 끄는 것은, 사유를 배제한 '공부'만을 떠올리는 탓이 아닐까요?
저의 기본적인 주장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공자와 꽁트의 주장은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유하는 대신에" 책을 읽자! 콩트가 50이후에 대뇌건강의 이유로 책을 읽지 않았다는 일화는 들었지만, 그가 책을 모두 태웠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가 말년에 나르시시즘에서 헤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는 아닐는지...
노동 자체를 바꿉시다!!
그렇지 않으면 교양중독과 일중독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요.
공부란 도 닦는 것이고 그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단순 기술이든 심오한 철학 도덕이던 간에 말이죠...사람이 살아 가는 동안의 제반 깨달음의 과정 습득 일체를 말해야 되지 않을까요...너무 좁게 해석하신 것 같애요...소조님답지 않게 말이죠...ㅋㅋㅋ 무엇보다도 잘 아는 내용이라도 글 쓰는 동안에 자꾸 주변 현실를 감안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학문 특히 인문학 계통이 유럽처럼 발전 못하는 이유가 다 있지요...
공부=도닦기(지나치게 넓은 의미)와 유럽보다 뒤쳐진 한국인문학의 현실은 모순 아닌가요
한국의 인문학에 독창적인 게 부재하다 이 말이지요...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소조님이 언급하신 공부란 개념인데...잘은 모르지만 한국에서 공부 좀 한다하면 거의 다 현실 문제에 매달리거나 실질적 학문에 들어서서도 뭔가 개성적이고 독자적인 사고는 못하고 거의다 외국(미국 유럽)에서 개발된 개념들을 너도나도 써먹으려다 보니 그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말하자면 소조님처럼 푸로의식을 갖고 공부하시는 분들도..거의 마찬가지라고 본다면 화가 나시겠지오만...
비평고원정기모임을 다녀온 다음날 '비평고원100주년을 위한 10년대계'란 제목으로 초안을 작성했는데 아직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도 많을 내용이고요. 하지만 제 생각에 지금과 같은 방식이라면 비평고원100주년은 그 이름에 비해 성과는 미미할 것이라는 게 제 솔직한 생각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비평고원다움'으로 기존의 틀을 깨부술것인가라는데에 있습니다. 물론 부순다는 의미에는 새로운 방법의 모색도 포함되겠지요. 한가지 지적하자면 비평고원회원중 번역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꽤 있으신 것 같은데 더러 자신이 번역한 책의 원저자에 대해서 관대하다 못해 방어적인 태도가 눈에 띈 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가까이 호흡했던 사람이어서 평가에 있어 날카롭고 세밀할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한점이 조금 아쉽더군요. 요즘엔 책을 읽으면서 번역자후기를 꼼꼼히 보는 편인데(아마도 비평고원의 영향인 듯) 초반에는 작품안에서 작자를 들여다보는 것과 함께 작품밖에서 넓게 바라보고 평가를 내리는 번역자들도 있더라고요. 후반부에서는 번역자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어 독서의 새로운 맛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윗글은 좀더 숙고한 뒤에 기회가 닿으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문득, 그 중에서도 인문학은 '삶'이라는 위험을 감수(risk)하는 공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부란 숙제해결이라 생각합니다. 어떤질문.. 물론 스스로의..질문또는숙제를 풀어가는과정과 그것에서 얻는나름의결론 저는 그런거라 생각했습니다.
어이쿠, 공부란 무엇인가란 글의 말미 노동이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 움직였습니다^^
글의 말미에 공부의 의미를 '노동'에서 찾는다는 부분에서 놀랐습니다. 생각해보니 공부의 사전적 정의처럼 노동에 대한 개념도 제한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