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필자 Daniel Courant(필명)은 3년 전부터 한국에 거주해온 프랑스 68세대로, 그는 최근 민주노동당 '사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레디앙>에 보내왔다. 그는 이 글에서 현재 민주노동당의 위기는 좌파 정당에게는 일종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는 '붉은 파시스트'와의 결별을 뜻하난 탈당 행렬은 좌파정당을 위해 매우 다행스런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절망과 분노로 탈당하거나,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진보정당'이라는 미래까지 버리지 말라고 호소한다.
유럽 좌파의 눈에 비친 민주노동당 또는 한국 진보정당의 현재의 모습은 당연한 분화이며 희망을 주는 좋은 기회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한 유럽인의 시선을 볼 수 있다. 특히 북한에 대한 유럽 좌파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동의되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이고, 격한 반발도 예상된다. 결국 독자가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반응은 큰 편차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긴 시간은 아니지만 한국의 진보정당 운동을 관심과 호의를 가지고 지켜 보아온, 그리고 자신의 애정을 '기고'를 통해서 실천한 그의 말은 충분히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는 받아만 준다면 기꺼이 새롭게 건설될 진보정당의 당원이 되고 싶다는 유쾌하고 급진적인 '생활 좌파'이기도 하다. <편집자 주> |
우리는 민주노동당을 숙주삼아 기생해온 무리들이 급기야 당을 삼켜버린 재난 때문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 가운데 일부는 완전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게시판은 그들의 탈당을 전하는 당원들의 글로 가득 차 있다. '주사파'들의 완벽한 아성이 되어버린 당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매우 걱정스러운 점은 많은 동지들이 한국과 전 세계를 둘러싼 암울한 정치적 미래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진보정당의 건설이라는 미래마저 져버리고자 한다는 점이다.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이 상황은 매우 긍정적이다. 정말이다. 의아해 할 것 없다, 동지여. 화내지 말고 끝까지 읽으시길. 잘 알다시피, 놀라운 역사의 배반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러나 이번엔 역사가 또 한 번의 가혹한 시련을 예비해 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선물을 준비해준 듯하다.
I
물론 우리가 느끼는 절망은 자연스럽고 충분히 이해되는 현상이다. 수 년, 수십 년 간의 헌신과 열정, 인내를 쏟아 부은 진보정당의 건설이 몇 달 만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를 이러한 절망감에 침몰되도록 놔두고, 이 절망이 우리로 하여금 이 사회의 변혁을 위한 노력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게 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좌파의 강력한 두 적대 세력이 완전하고 결정적으로 승리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 된다.
그 두 가지 세력은 역사적으로 여기저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국사회에서도 사실상 결합되어 있다. 하나는 전형적이고 ‘적나라한’ 우파 반동세력이고, 또 하나는 혁명주의자들로 위장한 ‘붉은’ 파시스트들이다.
세계 곳곳에서 좌파운동을 좀 먹어왔던 각양각색의 교조적 스탈린주의자들이 그들이며, 한국엔 주사파가 그 역할을 해왔다.
우파 반동과 붉은 파시스트
역사적 정황은 분명하다. 10월 러시아 혁명 이전에, 모든 해방을 향한 운동을 억압해온 주체가 전자인 우파 반동세력이었다면, 러시아혁명 이후로는 정치적, 사회적 반역의 상당 부분을 후자가 나누어 담당해 왔다.
그러므로, 방금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이 같은 반역이 얼마나 자주 실현되어 왔는지 자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또한 절망으로 두 팔을 다 내려놓음으로써, 이 뻐꾸기(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놓고, 다른 새들이 자신의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 다른 새의 새끼들을 둥지 바깥으로 내모는)들의 승리를 완성해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물론 당에 뻐꾸기들이 침투하게 한 그 과오를 반성해야 한다(1~2분 정도만. 그리곤 전진!). 그리고 이 파괴자들의 끊임없는 침투를 어떻게 차단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
|
|
▲ “민주노동당 후보로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서울 지역 위원장들과 예비후보들. 전국 곳곳에서 탈당의 봇물이 이어지고 있다. |
|
|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점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앞서 말했던 그 ‘선물’이다. 우리에게 다가온 이 재앙을 완벽한 긍정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역설이 존재한다. 한국사회는 절망적인 다른 사회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아! 감히 말하건대, 한국 좌파의 현 상황은 비할 수 없이 선명하고, 환하게 열려 있다.
II
다른 사회는 더 심각한가? 대체로. 한국사회에서 절망할 필요는 없는가, 완전히 다시 시작할 조건들이 갖춰졌단 말인가? 물론! 농담인가? 전혀….
대부분의 다른 사회에서 진정한 좌파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의 세력을 강건하게 구축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 미국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똑 같은 두 개의 정당이 독점하고 있는 이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며, 단 한 번도 민주주의가 아니었고, 결코 민주주의가 되고자 한 적도 없다. 잔인한 과두정치 체제일 뿐이다.
그토록 강성했던 좌파를 가졌던 유럽,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야만적 자본주의가 승리의 찬가를 외치게 된 이후의 유럽은 또 어떤가? 전통 좌파는 이제 그 허울만 남아 있을 뿐이고, 활동가들과 시민들의 열망에 호출된 새로운 좌파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 전통 좌파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유럽의 세 가지 전통 좌파
첫 번째는 노골적으로 정체성을 배반하고 우경화한 집단이다. 이들은 사회연대의 파괴와 자본가들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능동적으로 기여하며 자족하는 집단이다. 프랑스와 유럽 전체의 사회당들, 영국의 노동당, 프랑스와 독일의 녹색당 등이 그것이다. ‘사회주의자’는 이제 그 이름 뿐이고, ‘좌파’는 하나의 단어일 뿐이다.
|
|
|
▲ 한때 유럽 최대 정당이었던 이태리 공산당. 그러나 지금은 그 이름마저 사라져버렸다. |
|
|
두 번째 그룹은 여전히 약간은 좌파의 냄새를 풍기나, 종종 우파와 연합하고 타협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로 아직도 스탈린주의의 정신과 습성을 버리지 못한 공산당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완전히 정치적 신망을 잃었고, 당원들은 거의 떠났으며, 그들에게는 가상의 존재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2차대전 직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제1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에는 완전히 그 이름을 바꿔 버리고, 자본주의를 위해 역동적으로 활약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유럽은 미친 걸까? 아니, 미친 것은 유럽이 아니라 세계 전체다.
한국에는 이처럼 거추장스러운 좌파의 유산이 없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잠깐만, 동지. 이제 곧 이야기할 테니.
유럽의 전통좌파에서 세 번째 그룹이 남아 있다. 공산당 밖의 전통적인 극좌그룹이 있다. 68이 잠시 그들에게 젊음을 불어 넣기도 했으나, 이들은 두 세계대전 사이의 상황의 계승자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과 트로츠키 등으로 분화된 노선 투쟁)로 여전히 머물러 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무관한 이론투쟁에 파묻혀 있고, 대중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하물며 지금의 새로운 세대와 현상에 걸맞는 정치 프로그램을 제시하기에는 더욱 역부족인 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사용자의 파트너로 전락한 노조들
노조들도 배반과 타협의 길로 나섰다. 가장 놀라운 사례는 눈부시게 급진적이며 공산당의 교조주의에 치를 떨던 활동가들로 조직되었으나, 지금은 사용자들의 가장 든든한 파트너로, 완벽한 어용으로 전락한 프랑스 최대노조 CFDT를 들 수 있다.
나머지 노조들은 대체로 말랑말랑하고, 은밀한 타협에 현혹되어 있으며, 아래로부터의 건강한 운동의 흐름을 차단하는 역할을 주로 맡고 있다. 전체적으로 운동을 마비시키는 이 시스템을 피하기 위해, 새로 조직되는 노조들이 새로운 연대조직(예를 들면 노조연대체인 SUD)을 꾸리게 할 만큼 상황은 숨막힌다.
많은 활동가들, 좌파적 성향의 시민들, 유권자들은 이 모든 조직들을 피하고, 이들을 우울한 가면극처럼 바라보며, 좌파의 모든 역량을 모아 새로운 정치적 형태를 구축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행해진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세력의 구축은 여전히 가시권에 들어와 있지 못하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전통 좌파들이 남겨놓은 삼중의 유산인 배반, 동맥경화, 분열은 현재로선 너무 큰 걸림돌이다.
III
그럼, 왜 한국의 상황은 덜 절망적인가?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역사적 유산은 매우 다르며, 따라서 전망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좌파는 한국사회에 가해져 왔던 네 가지의 주된 억압에 의해 ‘강력하게’ 성장할 수 없었다. 그럴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일본으로부터의 적대적인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식민지화, 곧 이은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종교적 경제적 문화적 식민지화, 남한 정부의 자본주의 독재, 해방 직후 북한에서 뿐 아니라, 남한사회에서도 좌파 활동가들과 지도자들을 말살시키는 데, 주된 역할을 맡았던 김일성의 붉은 파시즘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커다란 공백을 만들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어쩌면 이 거대한 공백의 덕에, 너무 많은 좌파의 흔적들을 가진 유럽의 경우와 정반대로 (PD와 NL이 한 지붕 아래 사는-편집자)민주노동당이라는 공개적인 좌파의 단일한 연합체는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연합적이며 동시에 개방적인 정신 덕에, 민주노동당은 대중들에게 그토록 큰 희망과 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한국에선는 이런 개방성이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었지만, 좌파의 흔적이 많은 유럽에서라면 전혀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기억하시는지, 2004년 원내진출 직후, 22%에 달하는 지지율을 기록했었음을. 좌파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가 이처럼 강하게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 이 같은 역사적 이변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정말로 놀랍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 좌파의 정치적 풍경이 지니는 선명함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아마도 당시 정파 연합 속에 담고 있는 위험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개방되어 있는 좌파연합이란, 유럽인의 눈에 너무도 분명한 것이다.
거기엔 좌파로 가장한 지독히 반동적인 세력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사실, 굳이 ‘가장’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들은 단지 명칭을 좌파로 차용할 뿐, 그들의 사상이나 반동적 사고는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상적 불량배들과의 동거가 끝났다
한국에는 붉은 주사 파시스트들이 있었고, 민주노동당은 어리석게도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 의해 침범당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가장 크게 위협한다고 여기는 것을 파괴하는 일에 특히 능한 자들이다. 이들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좌파이다.
왜 민주노동당을 침탈한 자들의 승리가 우리를 절망시키기보다는 고무시키는 사건이어야 하는가? 사상적 불량배들과 함께 했던 우리의 오염되고 위험한 동거의 모순이 이제는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주사파가 없는, 주사파에 적대적인, 모두의 눈에 투명하고 진정한 좌파가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주사파들은 자연스럽게 썩은 과일처럼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떨어져 버릴 것이다. 반면, 우리는 이제 모든 층이 창조적인 생각과 실천으로 가득한, 넓고 건강한 집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일찍이 구축할 수 없었던 이 새로운 상황의 선명함, 그것을 갖지 못했기에 22%에서 3%로까지 굴러 떨어졌고, 결국은 우리를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으나, 그것을 갖게 된 지금을 역사적인 기회로 간주할 수 있으며, 간주해야 한다.
오늘이 좀 더 일찍 다가왔더라면 더 행복했을 것이다. 우리는 치료 불가능한 악성 종기를 앓고 있었고, 가능한 한 빨리 그 종기가 곪아 터지는 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린 이 역사적 기회를 얻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주 비싼. 과거의 유령들과 족쇄들을 모두 벗어 던지고, 내부의 걸림돌들을 모두 제거한 현대적이고 급진적인 진정한 좌파정당을 만들기에 이토록 호의적이고 분명한 상황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린 드디어, 우리의 내부를 갉아먹던, 모두가 보았지만 금기로 존재하던 암 덩어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 재앙은 우리 앞에 탁 트인 새로운 풍경을 열어준다. 이는 우울한 이야기의 슬픈 마지막 에피소드가 아니며, 우리가 앞으로 써갈 매우 근사한 이야기의 활기에 넘치는 전주곡이다. 우리가 약간만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면, 우리에게 닥친 재앙이 엄청난 희망이라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지금 잘 보시다시피 주사파는 신도 없는 사이비 종교일 뿐. 몇 달 뒤 그들은 무(無)의 세계에 침몰할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