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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제 3세계편입
포르투갈의 진출 -> 네덜란드 -> 영국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진출할 때까지도 인도의 왕국들은 강력하여 병합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굴황제나 술탄이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를 무찌르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인도양의 나라들의 분열(이슬람교와 힌두교간의 적대감정도,,), 약한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관계, 하급지도자가 모병하여 상급수장 휘하에 들어가는 군대시스템 때문이었다.
이당시엔 인도보다 동인도가 훨씬 이윤을 창출해서 네덜란드가 동인도를 지배하자 쫓겨난 영국은 인도에서 강력한 무굴제국의 허가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동인도회사 조시어 차일경은 인도에서 침략정책을 추구하여 심지어 무굴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는데 그 결과는 참담하여 벵골지방 동인도회사는 잠깐 동안에 유린되었으며 조시어경은 화평을 간청하여 영국이 배상금을 지불하고 '앞으로는 그러한 수치스러운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 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간신히 아우랑제브황제의 승락을 얻었으며, 영국은 이 조건을 지킬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포트 윌리엄 총독으로서 크롬웰의 손자인 존 러셀은 1712년 무굴 황제에게 보낸 청원서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굴욕적인 인사를 적고 있다. "영국동인도회사 사장인 모래알만도 못한 존 러셀은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노예로부터의 존경심을 가지고 삼가 청원하옵나니..."( R.pearson, Eastern Interlude : A Social History of the European Community in Calcutta P64)
영국은 18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무굴제국의 분열을 틈타 인도영토의 정복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아시아 무역은 '신세계'무역보다는 그 규모가 훨씬 작았는데 원인은
1. 아시아가 '대량무역'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시아 상품은 수요가 비탄력적이고 제한적이었으며 (예를 들어 후추) 도자기,비단,보석,벽지 등도 수요가 비탄력적이기에는 마찬가지였다.
예외라면 직물,커피 및 차 정도인데 17세기 초에는 아시아산 직물이 너무나 많이 수입되어서 유럽의 유력한 직물업자들은 네덜란드를 제외하고 전 유럽국가에서 직물수입을 금지하도록 만들었다.
- 깅엄(gingham,줄무늬 무명)은 줄무늬라는 뜻의 말레이어에서 나왔으며, 캘리코(옥양목)은 캘리컷에서 친츠(사라사 무명)은 점무늬라는 뜻의 흰두어에서 모슬린은 모술이라는 지명에서 나왔다.
커피는 주산지가 자바였고, 차는 중국이 주산지였으나 이에 대해선 큰 반대가 없었다. 차는 19세기부터는 인도산 홍차와 경쟁을 벌이게 된다.
2. 아시아에 유럽상품 수요가 없었다. 아프리카 노예,아메리카의 상품들, 유럽공산품등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아시아인들은 유럽의 금만 받으려 해서 무역이 지장을 받은 것이다.
1700년대 영국 동인도회사의 아시아 수출의 3/4은 금등 귀금속이었고 네덜란드는 그 비중이 더 컸다.
1600년 아시아와 유럽간 연간 무역총량은 수출입 각각 1만톤, 금액으로 100만 파운드 정도였고, 1751년 영국이 아시아 전체에서 수입한 총액은 가은 해 자메이카섬에서 수입한 금액의 3/4 이었다.
1793년 영국조지 3세에 대한 중국 건륭제의 회답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나의 단 한가지 목적은 여러나라의 완전한 통치를 유지하여 그들의 임무를 다하도록 하는 것뿐입니다. 신기하고 값진 물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 귀 대사도 직접 보았겠지만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기묘한 물건을 중시하지 않으며 귀국의 제품도 달리 쓸데가 없습니다."
(F.Whyte,China and Foreign Powers p38 . London : Oxford University Press 1927)
아메리카, 동유럽,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과 비교했을 때 너무 나도 다른 결과다..
"인도의 커다란 이익은 공업국이 되기보다는 농업국이 되는 것이다. - 토마스 바즐리 (맨체스터 상업회의소 회장 , 1862년)"
19세기 이전의 아시아 무역은 아메리카의 경우와 같은 대량 무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인도는 군사적 정복에 의해 무굴제국이 영국의 속령이 되었으며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처럼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또한 이른바 산업혁명은 값싼 공산품을 인도에 범람시켜 인도 전통적인 수공업을 파멸시켰으며 유럽소비자들도 차를 소비하게 되었으며 유럽의 공업역시 인도의 물적- 인적 착취를 필요로 하였다.
1. 인도 정복
원인중 하나
국가문제보다는 지방문제를 중요시하는 '카스트 제도'
-> 부락 위에 있는 정부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외부인이 만들어 놓은 약탈이나 일삼는 불필요한 존재뿐으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중국의 경우와는 반대에 가깝다. 중국은 나쁜 정부를 좋은 정부로 갈아치우기 위해 주기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인도는 오직 정부의 지배를 벗어나기를 원하였다.)
(중국은 영토를 빼았기지 않았지만 인도는 영국에 의해 영토까지 지배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악바르대제가 1605년 사망한 후 1658년 즉위한 아우랑제브 황제는 이슬람교 광신자로서 힌두교도들을 박해하여 계속 전쟁에 휘말렸고, 세금을 올려 주민의 원성을 가져왔다.
1707년 아우랑제브 황제의 사망과 동시에 제국은 와해되기 시작했으며, 왕위 계승원칙조차 확립되지 않았기에 왕자들이 2년동안 왕위를 놓고 싸웠으며, 1712 - 1719 년 사이 델리에는 5명의 허수아비 황제가 있었다.
지방태수들은 서로 독립을 주장하게 되었고 마이소르의 '이데르알리'와 하이데라바드의 '니잠'과 같은 세습왕조를 세웠으며 초기적 힌두민족주의를 대표하는 마라타족이 인도의 권력을 장악했다.
마라타족은 서해해안에서 동부해안의 캘커타에 이르는 인도중부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했는데 이것은 18세기 중엽 인도토착민들의 유일한 활동적 정치세력이었지만 무굴제국을 승계하는데 정신이 팔려 봄베이,마드라스,캘커타 등지의 영국상인들의 위험성을 간과하였다.
영국은 이 같은 제국의 붕괴를 '분할통치'의 호기로 삼았으며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각지방 태수들, 그리고 이들과 무굴제국간을 이간시켰으며 이것엔 유럽상인들과 밀착해 돈을 번 인도의 새로운 자본가 계급의 협조가 있었다.(대표적인 것이 18세기들어와 소규모 사치품무역이 대량무역으로 전환되면서 거부가 된 마르와리 상인들 - 외세와 밀착하여 무굴제국에 대항했다..)
허약한 사회구조, 제국의 붕괴, 토착상인들의 협력으로 영국은 인도를 지배할수 있게 되었으며 요새화된 재외상사와 인도인용병- 세포이부대- 를 기반으로 점차 주변을 장악하게 되어 이윽고 인도전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벵골 지역인데 이 지방 태수가 직면한 세가지 위협- 서쪽에서 공격해 오는 마라타동맹, 부유한 마르와리 상인세트(Jagat Seth) 가 중심이 된 내부 적대세력, 캘커타 상사 요새를 강화하고 있는 동인도회사가 그것이었다.
태수는 동인도회사에 건축공사 중단을 명령했고 그것을 거부하자 캘커타 요새를 점령해 버렸다. 결국 영국인 클라이브가 마드라스에서 원군을 이끌고 와 인도사학자들이 "전투아닌 거래"라고 부르는 플라시 전투가 벌어지는데, 거부 세트가 태수의 장군을 돈으로 매수해서 영국에게 대응하도록 했고, 그는 벵골의 태수가 되었다. 이에 무굴제국이 개입을 시도했지만 제국군대가 패배하여 동인도회사는 징세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1769년 5월 24일 동인도회사 직원 비처가 런던본사에 보고한 내용 "동인도회사의 징세권 취득 이후 이 나라 백성들의 생활상태가 전보다 못해졌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영국인으로서는 가슴아픈 일이다.. 가장 독재적인 정부 아래서도 번영했던 이 훌륭한 나라는 지금 멸망해 가고 있다. " (K.M.Panikkar. Asia and Western Dominance. p101 New York : John Day)
피트의 1784년 인도법은 동인도회사의 정치활동은 영국통제위원회에 감독을 받아야 하며, "인도자치령의 정복과 영토확장 계획은... 국가의 희망,명예 및 정책에 반하는 것" 이라고 규정했지만 선편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데 1년이상 걸리는 불편때문에 런던의 본국정부는 제대로 움직일수 없었다. 그동안 동인도회사는 인도내 경쟁세력을 하나씩 제거했으며, 클라이브는 7년전쟁중 1761년 프랑스를 퐁디세리에서 항복시키고 프랑스는 1763년 파리조약에서 요새건설이나 정치활동은 못하게 되었다.
미국 독립전쟁 중 . 3명의 토착군주들이 인도에서 영국을 몰아내려고 했는데 영국인 총독 헤스팅스가 처음에는 방어를 하다가 나중에 공세로 나와 인도에는 결국 영국과 마라타만 남게 되었으나 마라타는 내부분열을 하여 마침내 1818년 마라타의 수도가 함락되어 동인도회사가 인도의 최고 주권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도 중심부에 세력을 구축한 영국은 네팔의 구르카족도 정복하고 서북지방에서의 전투 끝에 펀잡의 시크교도들을 평정. 19세기 중반에는 인도전역에 가까운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물런, 카시미르,하이데라바드, 베로다, 트라방코르 등 몇몇 왕국이 남았지만 이들은 서로 고립되어 영국에 대항하지는 못하였다.
2. 영국의 통치방법
세포이반란을 기점으로 몇가지 변하는 것이 있다.
동인도회사의 통치-> 영국정부가 직접통치
-> 이원구조. 전공무원제도- 영국/인도인
1900년 영국인 행정관은 4000명, 인도인 공무원 50만명
-> 인도군창설. 1910년 영국인 6만9000명, 인도인 13만명
인도인은 시크교도나 파탄독, 네팔의 구르카족중에서 주로 모집
-> 토착제후의 이용
소멸주의 -> 빅토리아의 여왕이 소멸주의에 노여움 표시. 토후국 합병 하지 않음- 고의적
이외 다수
이슬람교군주중 하나의 말 1938년 "우리가 하나의 계급으로서 존속하려면 정부의 지배가 강화되도록 해야 하며, 이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인도총독 캐닝경 1860년 "만일 여러토후국들을 정치권력을 갖지 못한 충실한 도구로서 유지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 해군의 패권이 존속하는 한 인도를 지배할수 있을 것이다."(K.Goshal, The people of India p129 )
농업에 미친 영향
-> '영구청산제'의 도입 1793년 갠지스지방에 도입으로 시작
종전에는 국가공무원인 세금징수원이 그들 관할 구역에서 소작료를 징수해갔으나 이제는 세금징수원들이 '자민다르'라는 일종의 영국식 지주로 변했으며 종전에 세습경작권을 가졌던 농민들은 단순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연간 300만 파운드의 소작료를 징수하기로 정해져 있었으며 10/11 은 영국당국에 바쳤고 1/11은 자기가 차지했다. 이것의 '영구'적 특성은 '자민다르'들이 정부에 납부하는 세액을 영구히 고정시켜 놓았지만 이들은 언제나 세금을 올릴수 있었기 때문에 2차대전 무렵에는 정부에 300만 파운드만 납부하면서도 연간 1200-2000만 파운드의 소작료를 징수하였다.
총독 윌리엄경의 1829년 제도도입의 동기설명 "이 영구청산제는 ... 영국자치령의 존속을 바라는... 막대한 규모의 부유한 지주층을 만들어.. 대중의 반란이나 혁명을 막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A.B. Keith speeches & Documents on Indian Policy 1750- 1921 London:Oxford University Press 1922 p209)
빚에 쫓긴 수많은 농민들은 수출상품 생산에 매달리게 되었고 철도는 늘어났지만 이것은 인도가 원료수출국으로 등장하게 되고 공산품들이 들어오면서 수공업은 타격을 받고 인구는 늘어났지만 취업할 공장도 이민갈 땅도 없었고 농업혁명도 이룩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구증가율이 작물증산율의 3배에 달하게 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
토너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회고컨데 영국의 통치는 인도 농업의 사회적 구조를 철저하게 변혁시켰지만 기본적 생산과정과 기술수준에는 사실상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새 농업사회의 상층부는 큰 혜택을 입었으나 농민들의 처지는 악화됐다. 농업발전에 필요한 자본은 빠져나가고 총생산수준은 침체경향을 보이고 있다."
3. 인도의 전통경제와 수공업
카스트만이 중요시. 부락끼리 경제-사회적 자급자족. 부락은 세금납부와 가끔씩의 강제부역외에는 외부세계와 별로 접촉하지 않았으며 농업과 수공업을 가지고 있어 쇠나 소금을 제외하면 대체로 자급자족하였다. 따라서 전통 인도의 도시들은 본질적으로 공업도시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주요도시들은 베나레스,푸리,알라하바드 등의 종교도시이던가, 푸나,탄조르,델리등 정치도시, 그리고 미르자푸르등의 상업도시 뿐이었다.
하지만 인도는 18세기말 영국에서 방적기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세계최대의 면직물 생산국이었다.
인도의 수출용 면직물 4대 생산지역은 중앙아시아와 중동을 시장으로 하는 펀잡지방, 중동을 상대로 하는 구자라트지방, 동남아에 수출하는 코로만델 해안지방, 그리고 북부인도와 유럽을 상대로 하는 벵골지방등이었다. 값싼 노동력과 국산원료를 가지고 생산하는 이 인도직물은 경쟁력이 매우 높아, 동인도 회사는 영국에 가져다가 100%의 이윤을 남기고 팔수 있었고 이에 자극받은 영국제조업자들이 기계를 만들어 산업혁명이 일어나게된 원인이 되었다.
-> 그럼 이 모직물 산업이 왜 붕괴되었을까?
19세기중 영국의 공식입장은 자유무역주의이다. 영국 정책입안자들은 영국 상품의 수입을 규제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외국에 대해서는 즉각 무력을 행사했다. 예로 모하마드알리가 이집트의 국내공업 육성을 시도하자 즉각 제거했고, 독일 관세동맹이 독일의 유치산업보호를 추구하자 이역시 붕괴시키려 했다. 하지만 인도산 직물수입으로 영국의 모직공업이 타격을 받게 되자 영국은 편리하게도 자유무역이론을 버렸다. (영국의 주력산업이 모직공업이기도 하다.)
맨체스터 상업회의소 회장 바즐리는 1862년에 이렇게 선언했다. "인도의 큰 이익은 공업국이 아니라 농업국이 되는 데 있다."
1814년 인도에 수입된 영국제 모직물에는 불과 2% 면직물과 견직물에도 불과 3.5%의 수입관세가 부과도었고 영국의 인도산 원면 수입관세도 명목뿐이었다. 그러나 인도산 면직물의 수입관세는 무려 70- 80% 에 달했다. 이때문에 1814- 1844 년 30년 동안 영국의 인도산 면직물 수입은 125만필에서 6만 3000필로 격감한 반면에 인도의 영국산 면직물 수입은 같은 기간중 100만 야드 미만에서 5300만 야드 이상으로 급증하게 되었다.
1757년 클라이브는 데카를 "런던만큼 넓고 인구가 많고 부유한 도시"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1840년 트레벨리언경은 "인도의 맨체스터였던 데카는 이제 매우 가난한 소도시로 전락했다."라고 증언했다. (P.Harnetty , Imperialism and Free Trade : Lancashire and India in the Mid-Nineteenth Century p6 Vancouver :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Press 1972)
자 마틴도 1840년 상원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영국이 자기자신은 자유무역을 외치면서 인도에는 자유무역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의 직물공업이 파멸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흔히 인도의 토착공산품이 영국제품으로 대체된 것이 영국의 기술이 가져온 빛나는 승리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의 압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실례이며, 또한 인도가 모국의 이익을 위해 그 가장 분통터지는 관세제도 때문에 얼마나 피해를 받았는가를 보여주는 실례인 것이다."
물런 자유무역원칙을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도담당 국무상 우드경(1866년 사임)때는 정부개입이 봉쇄되었다.
철도의 경우는 서방국들에게는 자본재공업과 기술혁신을 촉진해 주었지만 인도의 철도는 군사용이거나 항만운송용이었므로 내륙지방을 연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철도부설과 기관차 공급을 영국기업이 독점하였기 때문에 일명 '기계공업의 대학'이라고 불리는 기관차 제조창이 육성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실은 독일과 미국기업들의 입찰가격이 더 낮았으며, 인도에서조차도 기관차 제조기술이 일찍부터 발전되어...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도의 수공업이 모두 망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쇠퇴하거나 전업했지만 새로운 기계를 설비한 새공장들도 들어섰다. 그럼에도 2차대전 이후 독립당시 인도는 여전히 저개발국이었고 지금도 비슷하다. 1914년 유일한 공업지대는 캘커타와 봄베이 정도였고 대부분이 영국기업이어서 국민경제 파급효과가 없었다. 국내에는 투자대상이 없고 단지 금을 수입할 뿐이니 공업 추진의 기회는 오기 힘들었던 것이다.
첫댓글 간디는 영국문화를 증오하는 바람에 현대식 영국의학을 하지않고 자기 부인을 죽게 만드는
인도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나라가 그렇게 압제를 받고 차별받았다면 영-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치가 떨렸을듯...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우리나라는 유교덕후와 보수주의덕후빠들이라서 그냥그대로 법을 방치한듯
성종 이럴땐 너무 빡센 유교국가라 왕도 스트레스 대빵으로 받았는 데..ㄷㄷ
우리 왕언니의 파워가 나오는 근원지라고 할수있는곳이죠..;;
왕언니는 독일어만 잘하고 영어는 못하는 바보죠(조상이 독일인이라서 조지1세가)
원래 중국이나 인도나 세계에서 5손가락 안에 드는 강대국이었죠... 그런데...너무 오랫동안 모든걸 방치해놓다 보니... 결국 잠시 군사적, 정치적으로 앞선 유럽에 뒤쳐졌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