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으면 물이 된다. 그렇게 시작 되는 날을 우수라 불렀다. 그리고 보름이 지나면 동면에 들었던 개구리가 땅 위로 나온다는 경칩이다. 그리고 다시 5일 상간으로 수달이 물고기를 잡고 기러기는 더 북쪽지방으로 날아가고 다시 5일 후 숨 죽이고 겨울을 버티던 초목에서 새싹이 돋는다. 이 무렵 혹독한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끝내 봄기운을 감당하기에 버겁다. 영춘화가 핀 후 매화가 피고 이화가 핀 후 덩달아 개나리와 진달래도 피고 벌 나비도 날아 다닌다. 우수가 지나면 작은 카메라 하나를 어깨에 매고 산천을 찾는 오래된 버릇이 있다. 봄의 전령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어디로 갈까 망서리다. 남한산성을 챙겼다. 漢水 즉 한강 이남에 있는 산이라 하여 남한산, 그 안에 산성이 있어 남한산성이라 부른다.산 내부 지형은 한양 도성 안을 꼭 닮았다. 한양 도성처럼 남북은 짧고 동과 서는 아주 길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문을 열어 놓은것도 같고 중앙에 종루를 만들어 종을 매달은 것도 또한 같다. 그 지역을 종로(鍾路)라 부르는 것도 같은데~~
남한산성 깊은 골 안에 새들의 보금자리가 있고 남한산 넘어 동쪽 기슭으로 내려가면 봄 기운을 감지하기 좋은 천(川)이 있어 그렇게 정한 것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에 가장 긴 코스라 힘이 들지만 봄을 체험하는 호사(好事)를 누리는데 그것이 대수냐 하며 발빠르게 정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최소한의 행락짐을 준비한 후 마음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볕은 해바라기 볕 바람도 춘풍이었다. 그래서 길은 질퍽거렸다. 양지 대부분은 그랬지만 음지 가장자리는 푸석한 눈이 쌓여 보행에 지장은 없었지만 음지 맨 안쪽은 빙판이 숨어 있어 우회하며 길을 열어 나갔다. 산은 걷는 길에 따라 느낌이 다르게 다가 온다. 남한 산성 중심부를 남북으로 걸으면 분지에 갇혀 행궁과 종로 길,유적지, 상가, 식당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서쪽방향으로 오르다 점차 서북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붕수대 정점에서 서울 전경이 한 눈에 들어 온다. 멋진 서울의 경치와 더불어 주변의 풍경까지 덤으로 차경(借景) 할 수 있어 좋다. 이것은 붕수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불빛과 연기로 지금의 이곳 상태를 신속하게 알리는 붕수대 위치는 사방이 탁 트여 조망권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산성 축성(築城) 때 대부분 승병이 쌓은 서북에서 동으로 이어지는 성곽따라 걸으면 산세의 선에 맞춰 이어 나가는 성곽이 매력적으로 다가 온다. 그리고 성 안쪽으로 수백년된 소나무 군락이 있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역사의 현장을 주도적으로 만든 주인공들은 자연으로 흩어졌지만 소나무는 아직도 청청(靑淸)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솔바람이 부는 날 이곳을 찾아 명상에 들면 호란의 전 부분을 역사 이야기로 들려 주는 것 같이 배운 역사를 반추하곤 한다. 성곽곁을 걸으며 줄곧 선조와 인조의 무능을 탓해야 하였다. 긴 걸음을 선택하였음에도 벌써 산성의 외성인 봉암산성 문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높은 성벽 영향으로 빛이 들지 않는 곳이라 미끄러웠다. 조심조심하여 성문에 접근하였으나 마지막 구간 1m 정도는 발을 딛을 수 없을 정도로 얼음에 광이 비쳤다. 방법은 하나, 쌓아 올린 성곽 석축마다 작고 큰 틈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Rock Climbing 동작을 응용한 것이다.손가락, 손 등, 바닥, 발 앞부분이 들어 갈 수 있는 틈을 이용하여 오르고 내리는 방법과 옆으로 이동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왼손을 살며시 crack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손 등과 바닥을 서로 반대방향으로 힘을 주어 확보를 시도하였다. 장갑을 끼고 있어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발을 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딛은 후 섰다. 그리고 옆으로 이동하며 온른 손이 들어갈 수 있는 크랙을 찾아 밀어 넣은 후 다시 옆으로 이동하여 빙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산성의 외성인 봉암성은 남한산성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새로 만들어진 외성이다. 본성에서 봉암성으로 가려면은 홍예문같이 만들어 놓은 암문으로 나가야 한다. 암문으로 나간 후 우측으로 돌아 나가면 언덕위에 봉암성 문이 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 빼앗겨 곤란을 겪었는데,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숙종 12년(1686) 부윤 윤지선으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고, 숙종 31년(1705) 수어사 민진후가 포루를 증축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봉암성은 새로 쌓은 성이므로 ‘신성’이라고도 하며, 동쪽의 성이므로 ‘동성’이라고도 불렸다.
승병들이 산성을 쌓고 지키며 거처한 장경사 절이 동장대 아래에 있고 동장대 넘어로 하남시에 있는 검단산과 이름이 같은 검단산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동장대다 청군들은 가파른 남문과 서문, 북문을 포기하고 지금 하남시 고골 계곡을 타고 모여 들었다. 포를 전부해체하여 포를 갖고 오르다 조립하여 벌봉을 향해 포격을 하여 두 조각으로 쪼개진 모습이 벌 날개처럼 생겼다하여 벌봉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곳에 오른 청군들이 남한산성 내부를 염탐하여 전술적으로 이용하여 인조는 곤란을 겪어야 했다. 전쟁 이 후 숙종 재임 시 벌봉을 중심으로 그 아래 동림사란 승병들의 거처를 만들고 축성한 성이 바로 봉암성이다. 또한 전쟁 중 청태조의 처남이 전사하게 된다.이에 분노한 청태조는 조선의 왕 인조에게 지시한다. 처남의 고향 이름을 딴 동림사 아래 서북사면에 절을 세워 혼령을 위로하라 한다. 지금 그 절은 폐허가 되어 사라지고 터와 샘물과 부도만 남아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남한산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그들이 올랐던 능선 길목에 있다.
봉암성에 들어서면 모든 가시거리는 짧아 진다. 사방이 산으로 막히기 때문이다. 벌봉 부근에서 잠시 망서렸다. 바람재를 건너 샘재방향으로 가는 북으로 갈까 아니면 용마산 검단으로 이어 갈 수 있는 은고개 방향 능선을 택할까 하다 엄미리 계곡방향 길을 선택하였다. 불현듯 디모테오 형제님의 부탁이 생각난 것이다. 형제님은 전주 이씨 왕손이다. 같은 형제회 형제로서 함께 도반이였고 참례와 걸음 여행도 함께 한 형제셨다. 어느날 부탁을 해 왔다. 의안대군 이방석의 후손이라 하시며 묘를 참례하고 싶으니 안내를 부탁해 온 것이다. 깊은 산중이라 특별한 계획이 필요한 관계로 미루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생각이 떠 오른 것이다. 그 생각이 나의 걸음을 엄미리로 옮기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의안대군 이방석, 조선 최초의 세자였다. 의안대군(宜安大君) 1382년~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은 조선 태조 이성계 의
8왕자이다. 그의 시호는 소도(昭悼)이며, 본명은 이방석(李芳碩)이다. 그는 태조의 왕비(제2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다. 조선 최초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하여 폐위되고 향년 17세로 암살되었다. 오랜만에 찾은 의안대군 묘, 이곳을 발견한 것은 아주 오랜 일이었다. 당시 무너진 봉분을 보고 참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지나다 찾으니 제대로 복원된 것 같아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어찌하든 조선역사의 주인공인데... 진입로도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도 잘 정비 되었다. 5월이 오면 형제님을 모시고 방문해야 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내려섰다.
태조 7년(1398) 10월 6일(음력 8월 26일), 정안군 이방원(靖安君 李芳遠)의 주도로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게 된다. 세자는 광화문 앞에 주둔하고 있던 정안군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었으나,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 기병이 꽉 찼다"는 봉원량(奉元良)의 보고에 군사 대응을 포기하고 만다.
정도전, 남은, 박위 등 정안군의 시점에서 부정적인 세력이 제거되고 난 뒤, 정안군 세력은 세자를 방석에서 영안군 이방과(永安君 李芳果·후일의 정종)로 교체했다. 유배되기로 한 폐세자 방석은 잠시 후 영추문을 통해 경복궁에서 나왔고, 이거이(李居易) 등 정안군 세력은 도평의사사와 합의하여 자객을 보내 방석을 죽였다. 앞 쪽에 있는 묘가 의안대군 방석의 두 번째 부인 沈씨의 무덤이다. 첫 부인 류씨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廢嬪이 되어 추방되었다.
1406년(태종 6) 8월소도(昭悼)의 시호를 받았다. 1437년(세종 19) 6월세종의 배려로 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를 후사로 정하면서 입묘봉사(立廟奉祀: 사묘를 세우고 제사를 받듬.)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오원(五原)을 증읍(贈邑)받고 사우(祠宇)가 건립되었다.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 의 묘소에 치제한 글
의안대군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 今距宜安
겨울과 여름이 몇백 차례 바뀌었지만 / 幾百冬夏
사람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기는 / 激感人心
노릉에 버금가도다 / 魯陵之亞
영령이 너울거리는 저곳에 / 翩繽處彼
추백이 열매를 맺지 않고 / 楸柏不實
동풍에 영우가 내리는 때에 / 東風靈雨
보리밥이 소슬하였네 / 麥飯蕭瑟
정릉을 회복했으나 / 貞寢之復
오원에는 겨를이 없었는데 / 未遑五原
관작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린 것은 / 贈以爵諡
숙종의 은혜로운 말씀이었네 / 肅祖恩言
한 나라는 신릉군(信陵君)을 제사 지내고 / 漢祠信陵
송 나라는 전씨(錢氏)의 분묘를 수리했는데 / 宋治錢墳
더구나 이 은황이 / 矧玆銀潢
낮추어져 대군이 되었음에랴 / 降而大君
이에 명하여 묘를 깨끗이 하고 / 乃命汛掃
수호할 집을 두어 묘를 지켜서 / 置戶守阡
초동목부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 無俾樵牧
변두(籩豆)의 제기를 드리게 하였네 / 有加豆籩
감히 성대한 예를 거행했다 하지는 못하고 / 非敢擧也
다만 정성만 표시했을 따름이니 / 聊以識耳
우리 종묘사직 돕기를 / 佑我宗祏
천년만년 무궁하게 하소서 / 萬歲千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