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 최동호(65)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제자들이 〈치인(痴人)의 숲과 바람의 씨눈〉이라는 제목의 기념문집을 발간했다. 오는 8월 정년퇴임을 앞둔 스승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서다.
경남대 국어국문학과,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최동호 교수가 걸어온 길목에 세워져 있는 이정표들이다. 그 이정표에는 연구자로서, 시인으로서, 비평가로서의 이름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시력(詩歷) 40년을 앞둔 최동호 시인은 시인과 평론가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오면서 세 학교에서 수많은 시인, 평론가, 연구자를 길러냈다. 정일근(경남대 교수) 시인, 문태준(춘천 불교방송 PD) 시인, 성선경 시인, 장만호(경상대 교수) 시인, 박덕규(단국대 교수) 시인, 맹문재(안양대 교수) 시인, 오형엽(수원대 교수) 문학평론가 등.
그동안 최 교수의 가르침을 받고 문단에 발을 내디딘 문인만 70여 명에 이르며, 학부와 대학원에서 그에게 현대시를 배우고 국문학자의 길로 들어선 제자만 포함하면 120명을 넘는다. 이 가운데 60여 명의 시인, 20여 명의 평론가, 40여 명의 문학연구자가 기념문집에 참여해 자신들의 대표시와 최 교수의 시에 대한 감상과 인연을 담은 에세이집 〈치인의 숲과 바람의 씨눈〉을 봉정했다.
이처럼 한국 현대시문학이라는 숲에 수많은 씨앗을 심은 최동호 교수는 사실 불교와 인연이 깊다. 그는 고도의 정신주의 시세계를 열었던 시인이자 승려였던 김달진(1907~1989) 시인의 사위로, 박덕규 시인과 함께 김달진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으며 1997년에는 김달진 전집(문학동네)을 냈다. 제1회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자 선정을 10회까지 도맡아 했으며, 만해대상 수상자 선정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최 교수는 최근 만해 스님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11회 유심작품상 시 부문에 선정돼 오는 8월 인제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열리는 만해축전에서 상을 받게 된다. (본지 943호 4면 보도)
6월 18일, 서울 성북구청 근방 최동호 교수가 회장으로 있는 시사랑문화인협의회 사무실에서 최 교수를 만났다. 그의 자리에는 연구와 교육, 그리고 시 창작과 평론에 35년을 바친 노학자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만해 스님 ‘님의 침묵’ … 가을의 전율 1948년 수원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부산, 목포 등 지방도시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다시 수원으로 돌아와 남창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며 도서부장과 문예 반원으로 활동했다’고 기록돼 있다. 최 교수는 당시를 떠올리며 “멀리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외갓집에서 홀로 공부하는 소년의 외로움이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중학생이 된 1960년, 팔달산 언덕과 수원 천변서 놀던 기억은 최 교수의 문학적 상상력의 출발점이 됐다. “초여름 어느 날 화령전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보았던 붉은 작약꽃밭은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놀람과 경이의 기쁨을 느끼게 했습니다. 화령전 한편에서 들리던 국악 소리도 영혼 깊숙한 곳에 맴도는 음악적 체험이었으며 화령전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는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의 표상이 됐죠.”
일학년을 마친 그는 아버지가 근무하고 있던 목포로 전학했고, 얼마 후 아버지는 5ㆍ16 군사정변으로 인해 강제 퇴직을 당했다. 중3 시절은 최 교수에게 우울하고 어려운 시기였다. 이후 시골서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옮긴 최 교수는 역사나 철학서를 탐독하며 전공으로 공부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최 교수는 사실 이때만 하더라도 산문(山門)에 들어가 스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용기가 없어 결단하지 못했지만,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 많아 책을 많이 읽던 시기였다.
그러다 고2 가을 국어시간, 동급생이 만해 한용운의 시를 암송하는 것을 듣고 크게 마음이 흔들렸다. “동급생이 ‘님의 침묵’을 낭송했습니다. 약간 더듬거렸지만 그가 낭송을 끝내고 나자 침묵하던 교실 안은 이상한 전율에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이 알 수 없는 가을의 전율을 계기로 문학을 지망하게 됐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시에서 느꼈기 때문입니다.”
최 교수는 법이나 경영을 지원하길 희망했던 부모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조지훈 시인이 있는 고려대로 진학했다. 시의 매력을 느끼기도 잠시, 대학 3학년 시절인 1968년 5월 조지훈 시인이 타계하면서 최 교수는 한동안 문학적 방황을 했다. 무너진 꿈을 찾기 위해 그는 혼자서 몇 백 권의 시집을 독파하는가 하면, 동시 교내 독서 서클 호박회 회장이 돼 매주 학생들과 함께 한 권의 고전을 읽었다. 졸업을 앞두고 도서관에 진을 치고 있던 학구파들이 회계사가 되거나 고시를 하고, 일류회사에 입사하면서 하나둘 씩 제 길을 찾아갔다. 반면 최 교수는 습작시를 쓰고 있었으나 뚜렷한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막막한 날들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최 교수에게 위로가 된 글이 있었다. 바로 김달진 시인이 역술한 〈법구경〉의 구절이다.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지친 나그네에게 길이 멀 듯이/ 불법(佛法)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생사(生死)의 밤길은 길고 멀어라’
최 교수는 군복무를 하면서도 습작시를 써내려갔다. 제대 후 20대 중반 무렵, 고등학교 교사가 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일생을 걸고 문학을 계속 할 것인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월정사 마당에 가슴 속에 새겼던 〈법구경〉의 그 구절이 돌에 새겨져 비를 맞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숫타니파타〉 〈아함경〉 〈유마경〉을 탐독하는 계기가 됐다. 스님 김달진 시인과의 만남 1976년 시간강사를 할 무렵, 최 교수는 대학시절부터 갖고 있던 시작노트를 정리해 〈황사바람〉(열화당)을 발간했다. 이때 지인의 소개로 한 여인을 만났다. 김달진 시인의 딸 김구슬 교수(협성대) 였다. “아내(김구슬 교수)를 몇 차례 만나면서 부친이 김달진 선생님인 것을 알게 됐고, 그 분이 생존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인연이라 생각했죠. 책에서 본 인연이 10년이 지나면서 현실로 이어지게 된거죠.”
시인이자 한학자이며 승려였던 월하 김달진 시인은 1960년대 이후 은둔하면서 동국대학교 역경(譯經)위원으로 불경 국역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83년에는 불교정신문화원에 의해 한국고승석덕(碩德)으로 추대됐다. 김달진 시인은 은둔생활을 하면서 지속적이고 일관된 시세계를 견지했으며, 시집〈청시(靑詩)〉(1940)를 비롯해 시전집 〈올빼미의 노래〉(1983), 선시집(禪詩集) 〈한 벌 옷에 바리때 하나〉(1990) 등을 통해 세속적 영욕이나 번뇌를 초탈한 절대세계의 지향을 표현하고자 했다.
“김달진 선생님은 수도자적인 분이셨고 자신의 공적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시인이라는 세속적인 이름을 버리고 불교 경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이 저로서는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하면 이름을 내볼까 하는 생각으로 고민하던 최 교수에게 노령에도 불구하고 매일 서너 시간씩 경전번역에 몰두하던 김달진 시인은 외경스런 존재였다.
“선생님은 세속범사는 잘 모르는 분이셨지만 유명한 스님이나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보다도 제게 가르침을 많이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하고 인연이 돼 불교에 관계된 일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그분이 평생 해 오신 일이 역경(譯經) 사업이었기 때문에 그분 밑에서 심부름을 했고, 지금도 김달진 선생에 관한 불교 책은 제가 다 심부름을 하고 있습니다.”
1989년 김달진 시인이 작고하면서 최 교수는 그의 삶을 묻어두어선 안 되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이듬해 김달진문학상 제정위원회를 조직해 매년 ‘김달진문학상’을 시상하고 있다. 인간이 구현해야 할 정신주의 영역을 일관되게 추구했던 월하 김달진 선생의 시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다. 또 최 교수는 1996년부터 매년 가을 창원시 진해구 소사동 김달진 문학관에서 김달진 문학제도 개최해오고 있다. 바보[痴人]가 설악산 숲길을 헤매다 2000년 가을, 수년간 오현 스님과 교유해오던 최동호 교수는 설악산 백담사에서 스님을 만났다. 오래전 말씀드린 당호를 받기 위해서다. 오현 스님이 내려준 당호는 ‘치인(痴人)’. 어리석을 ‘치(痴)’에 사람 ‘인(人)’이다. ‘바보’가 되다니, 마음속으로 부러워하던 전설적인 명호 들이 최 교수의 머리를 스쳐갔다. “큰 기대를 가지고 설악산에 들어갔는데 죽비 한 방을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오현 스님은 당황한 최 교수의 마음을 간파하고 말했다. “〈벽암록〉에 나오는 족보 있는 당호요. 앞으로 열심히 시를 쓰라는 뜻이지.” 방문을 열고 나와 소변을 보고 나니 설악산 계곡에 쏟아지던 달빛과 물소리가 최 교수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만해 한용운이 ‘님의 침묵’에서 말한 바로 그 숲길을 어둠 속에서 걸었다. 그리고선 벽암록 제7칙의 본문을 음미했다.
혜초가 법안 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법안이 답했다. “네가 혜초냐.” 혜초는 이 말 한마디에 바보가 됐다. 그리고는 크게 깨달았다. 되다 만 바보는 바보가 아니다. “시의 길을 가는 하나의 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때로 흔들림이 있었지만 서로 창작이 바로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비분리의 길을 찾아서 지금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최동호 교수는 10년 전 불교신문에 〈선문염송〉을 1년간 연재 하면서 처음 〈선문염송〉을 읽었을 때 옛날에 꼭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선문염송〉은 굉장히 어렵거든요. 그래도 제 나름대로 읽고 종합하면서 평설을 덧붙여 연재를 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불교경전을 알음알이로 아는 것이 아니고 거의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아요. 저는 불자라고 내세우며 다니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도, 또 제가 해온 일도 그렇고 마음속에는 늘 부처님의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최동호 교수의 시 철학은 그가 만든 ‘극(極) 서정시’라는 용어에 잘 녹아 있다. 극서정시란 인간의 희로애락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서정시 중에서도 짧고 간결한 시를 뜻한다. 장황하게 나열하지 않고 단 몇 줄만으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게 목표다. 모든 형식이나 격식을 벗어나 궁극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시(禪詩)와 비슷하다.
‘거품 향기, 찬 면도날/ 출근길 얼굴/ 저미고 가는 바람/ 실핏줄 얼어, 푸른 턱/ 이파리 다 떨군/ 나뭇가지/낙하지점, 찾지 못해/ 투명한/ 허공깊이 박혀/ 눈 거품 얇게/ 쓴/ 홍시 얼굴 하나’ (최동호 ‘얼음 얼굴’)
최동호 교수의 시와 비평은 불교적 직관과 통찰을 바탕으로 유가적 동양시학의 전통을 정립하는데 바쳐졌다. 그의 비평은 20세기 후반 서구의 시학을 넘어서서 한국의 주체적 시학을 확립하는 토대를 만들었으며 그의 시는 물신주의를 넘어서는 선적 직관과 통찰로 순수 서정시 지평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런 최 교수는 서정시 본연의 미학과 이론을 창출하기 위해 시 전문지 〈서정시학〉을 1990년 창간했고, 선시문학과 서정시의 영역을 확대ㆍ심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정년을 앞둔 최 교수의 마음은 수원 남문에 가 있다. 요즘 그는 고향인 경기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시 창작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12주 과정으로 진행되는 강의는 3회 이상 결석하면 수료증을 안 주고 탈락시킬 정도로 학사관리가 엄격하다.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수강생들이 최동호 교수의 지도를 받고 있다. “고향에 가면 다시 초등학생이 되는 기분입니다. 분주함도 번다함도 없어요. 시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시의 기초를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 현재 제 소망입니다.” |  | | ▲ 최동호 교수는 최정례, 정일근, 문태준 시인 등 70여 문인을 발굴했다. 사진은 2005년 고려대 교정에서 제자들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