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홍구 선생의 ‘역사와 책임’ 을 읽고...
MB 정부의 4대강 사업부터 민간인 사찰, 경제적 무능과 부정부패 그리고 현 정부에 이르러서는 국정원 선거개입, 1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사건, 청와대 문고리 권력 비리, 고 성완종씨 친박계 정치인 뇌물 수뢰 폭로 등 일련의 굵직한 사건의 발생과 그것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와 자세, 그리고 악화되는 언론환경과 선거 결과 등 일련의 혼란스럽고 암담한 현실에 접하면서 도대체 ‘우리나라에 민주주의는 존재하는가?, 우리나라가 이제까지 노력한 결과가 겨우 이것 밖에 안되는 나라인가?, 과연 앞으로 우리 학생들과 자녀 세대들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어떤 자부심과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 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들었다. 그 때 답답한 마음에 우연히 읽게 된 책이 한홍구 선생의 『역사와 책임』이란 책이다. 처음부터 3장까지 주요 내용을 요약해 본다.
머리말을 읽어 보니,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큰 사건들과 역사학자의 눈에 비친 커다란 사건들에는 차이가 있었다. 저자는 중요한 사건으로 세월호 사건 외에 통합진보당 해산, 전시작전권 회수, 조작간첩 사건을 들었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과 해방 이후부터 5.16 군사반란과 유신시대를 비교하여 되돌아보며 우리나라에 끈질기게 살아남아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는 공안세력에 대하여 자료와 사실에 입각하여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책의 내용은 크게 아래와 같이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 세월호, 역사 그리고 책임
2. 조작을 일삼은 간첩의 역사
3. 내란 공화국, 대한민국
4. 김기춘뎐-한국사법 엘리트가 사는 법
5. 역사로 본 전시작전권
6. 어제의 야당
1장은 6.25때 북한의 공격에 서울 시민의 피난 계획은 세우지 않고 6.27 새벽 3시 제일 먼저 달아났던 이승만과 세월호 선장 이준석을 비교하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세월호에서 구조를 하고 있다고 엉터리로 떠들어 대던 언론들처럼 당시 언론들 역시 시민들에게 근거도 없는 잘못된 정보를 마구 내보내고 있었으며 이 와중에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당시 피난민이 가득하던 한강다리를 현장 책임자인 최창식 대령에게 폭파 명령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가장 먼저 국민을 버리고 강을 건너 도망쳤다 돌아온 이승만이 서울 잔류파 국민들에게 한 일은 사과도 위로도 아닌 서슬이 퍼런 부역자 처벌이었다. 살인과 고문, 재산 약탈과 부녀자 겁탈 등이 경찰과 군에 의해서조차 자행되었다고 외신은 전했다고 한다. 이 부역자 처벌은 일부 극우 세력에게는 엄청난 재산 축적의 기회를 주었다. 심지어 임시정부의 어머니라 불리던 정정화조차도 부역죄로 징역을 살았다는데, 부역자 처벌에 앞장섰던 자들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에서 살아남기 위해 냉전과 분단의 틈바구니에서 애국적 반공투사로 변신한 김창룡, 원용덕, 노덕술 같은 자들이었다. 김창룡의 손을 거친 수많은 공안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백범 선생의 암살 사건'이다. 안두희는 사건 발생 43년 만인 1992년 자신이 김창룡의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승만은 진보당의 조봉암에게 간첩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사법 살인을 하였다. 일제의 악질 헌병 보조원으로 활동했던 박종표는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마산 시위에서 김주열 군을 정조준하여 발사하도록 지시하고 김군의 시신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유기하였다.
분단과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몰아닥친 엄청난 비극이었는데, 친일파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일제의 악질 고등경찰과 헌병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그것은 바로 분단과 전쟁 때문이다. 그들은 가만히 있으라 거짓 방송해 놓고 다리 끊고 도망갔다가 돌아와서는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을 빨갱이로 부역자로 잡아 죽이며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그것이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해 온 공안 권력의 출생의 비밀이다. 그 후예들이 지금껏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공안권력은 대한민국 수구세력의 중추이다.
저자는 2013년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송우석 변호사를 보고 뿌듯해 했다. 그러나 극장을 나와보면 세상은 변한 것이 없다고.... 노무현은 부엉이 바위 위에서 떨어져 죽었건만 그를 죽음으로 내몬 수사검사 우병우는 새로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에 임명되었다. 차동영의 배후에 있던 강검사 같은 자들의 맏형이 바로 김기춘이다. 부림 사건의 주임검사 최병국은 얼마 전까지 울산에서 3선 의원을 지냈고, 전 새누리당 대표이자 교육부총리 황우여는 부림사건 보다 더 큰 공안 조작사건인 '학림사건'의 판사였다. 국무총리였던 김황식은 재일동포 김정사에 대한 고문조작 간첩 사건의 판사였다. 사법연수원장 시절 법조인 교육시스템에 법조 윤리를 도입한 것으로 알려진 가재환은 전두환 시절 5년간 대법원장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안기부의 압력을 사법부에 전달하는 창구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세월호 이준석 선장이 도망갈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그가 돌아와 선장 윤리를 강의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우리에게 필요한 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 앞에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그리울 뿐이다. 중국 공산혁명을 이끈 마오쩌뚱의 아들 마오안잉의 무덤은 평양 외곽에 있다. 한국전쟁에 백만 대군을 파병할 때 남의 집 자식들만 국경을 넘어 전쟁터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26세 새신랑 아들은 북한 지역으로 출격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미군 장성 아들 중에서 아버지와 함께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람이 무려 145명이고 이중 35명이나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장관이나 고위 장성의 아들 중에서 한국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희생된 경우가 있는가? 들어 본 적이 없다. 현재 한국의 지배층은 가끔 사랑의 열매를 사 주는 식의 자선을 베푸는 것 이외에 공동체를 위해 단 한 번도 자신의 무엇을 희생해 본 적이 없는 집단이다.
친일파들은 일본과 친했고 일본을 위해 일했을지는 몰라도 일본의 보수 세력 본류가 가진 살벌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도덕성과 희생정신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과 부역자 처벌로 망가진 것은 좌익만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 진짜 사라진 것은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우익'이었다. 우익이라면 당연히 민족을 세워야 하는데 이 땅의 자칭 우익들은 삼일절에도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 부류들이다. 한국의 진보는 원래 진짜 보수였다. 극우파 김구의 수행비서였던 장준하는 김구가 남북협상에 나서자 공산주의자와 무슨 협상이냐며 이범석과 함께 떨어져 나왔고, 이승만 정권의 국무총리가 된 이범석이 직책상 좌익 전향자들을 포용하는 태도를 보이자, 이범석과도 갈라선 강골 극우파였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의 사상적 배후 함석헌,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시절 미군 장교였던 문익환과 박형규, 극우파 학생 조직의 행동대장 계훈제, 7년간 국군장교로 복무한 리영희, 반공포로 김수영, 유학생 열에 아홉은 미국에 잔류하던 시절 아버지와 큰 아버지가 납북당한 것을 잊지 않고 군에 복무하기 위해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백낙청 등등은 어느 모로 보나 보수의 가치를 충실히 지킨 양심적인 인물이었다.
이승만 같은 자들이 선장을 하고 김창룡, 원용덕, 노덕술, 박종표, 이근안 같은 자들이 선원질을 한 대한민국호가 그래도 침몰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2척이 남아 있다고 한 이순신 장군도 있었지만, 나라의 녹을 먹은 적이 없으면서도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장들이 있었다. 장수만 있어서 어찌 전쟁이 되겠는가. 역사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수많은 의병들이 이 나라를 지켰고 다시 세웠다. 전두환의 계엄군이 다시 광주로 쳐들어온 5월 27일 새벽 도청에는 시민군이 300명이나 남아 죽음을 기다렸다. 지는 싸움이지만 피할 수 없었기에 집에 가버리면 텅 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내주는 것이었기에 그냥 남았다. 평범한 이들이었지만 위대한 광주 시민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며 부인의 전화를 끊은 양대홍 사무장, 구명 조끼가 모자라자 “내 거 입어.” 하고 선뜻 벗어준 학생, 아기부터 탈출시킨 학생,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인하여 자살한 교감 선생님, 아이들과 함께 가라앉은 선생님들, 겨우 매점에서 물건 파는 어린 알바생이면서도 “선원은 맨 마지막에 나가는 거야. 너희들 다 구하고 나갈거야.”라며 세월호의 악마들, 대한민국호의 악마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어마어마한 책임감을 보인 박지영…….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호가 여태껏 가라앉지 않고 항해할 수 있는 숨은 복원력이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이 복원력 밖에는 없다. 더 이상 대한민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2장에서는 우리나라의 간첩사건을 다룬다. 간첩사건은 시기별로 역사적 특징을 갖는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간첩 대다수는 북에서 직접 내려 보낸 직파 간첩이 많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간첩의 절대 다수는 재일동포, 납북어부, 월북자 가족 등 사회적 약자였다. 1990년대에는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던 운동권 출신들이 간첩의 주된 공급원이 되었다. 1970년대 이후 간첩 조작 사건이 빈발한 이유는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 보안사, 대공경찰 등에서 방첩 업무에 종사하는 수만 명의 대공수사 요원들로서는 간첩을 찾아내지 못하면 자신들의 존립 근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양한 실제 간첩 사건들도 있었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무리하게 조작한 다양한 조작된 사건들 (1974년대 울릉도 간첩단 사건, 1980년 홍종수 사건, 1987년 윤태식 사건, 김진모 사건, 최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원정화 사건 등)을 생생하게 전해 준다.
아직도 대한민국에 3~5만 명의 고정 간첩이 있다고 믿는 국정원 대공수사 파트를 갖고서 21세기 정보화에 걸맞는 선진국의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될 수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의 형법상의 간첩죄는 적국이 보내는 간첩만 처벌할 수 있다. 지금 한국이 진실로 경계해야 할 것은 미국 간첩, 일본 간첩, 중국 간첩이다. 북한 간첩과 적국 간첩에만 매달려온 대한민국의 법체계로는 이들을 막아낼 수 없다. 이들은 외국인일 수도 내국인일 수도 있다.
3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다양한 내란 사건들을 다룬다.
저자에게 내란 사건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이석기와 통진당 사건'이다. 2013년 8월 28일 국정원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자택과 사무실 등 10여 곳을 압수수색을 시작했고, 그 후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으로 발전했다. 1980년 전두환 일당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한 이후 33년 만에 공식적으로 내란음모 시간이 터졌다. 이렇게 엄청난 사건으로 발전하리라고는 저자도 미처 예상하지 못할만큼 현 정부는 역사적 전례없이 여기에 올인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여러 가지 조작된 내란 사례들과 진짜 내란 사건을 구별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을 지낸 자연인은 모두 11명인데, 다들 내란과 관련한 추억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내란’은 부도덕한 인간들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없는 부도덕한 세력이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었다.
조작된 내란 사건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람은 '최능진'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악질 경찰들이 해방 후 일본 상관들이 떠난 자리를 메우며 미군정 경찰이 고위직을 차지하게 된 것이 당시 민중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는데, 대구 경북을 중심으로 1946년 가을에 폭발한 것이 '10월 인민항쟁'이었다. 당시 미군정 수사국장이었던 최능진이 대구 경북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와, 민중들이 경찰을 공격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해방이 되었는데도 친일경찰이 오히려 출세한 것은 더 큰 문제라며 미군정 내의 친일 경찰 숙청을 주장하다가 파면되었다. 친일파의 배후가 이승만임을 간파한 최능진은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구에 출마했다.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으로 추대되기를 원했다가 격노했는데, 이승만 부하들에 의하여 후보 등록 서류를 탈취 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등록했으나, 친일 관료들의 공작에 의하여 등록을 취소당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말 내란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9.28 수복 후 정전과 평화를 위해 노력한 것을 ‘이적 행위’로 몰아 내란죄로 결국 군사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내리고 1951년 2월 11일 그를 총살했다.
박정희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내란 전과 3범. 자신이 가장 많은 별을 달기도 했지만 가장 많은 별을 달아준 인물이기도 하다. 박정희 제거를 위해 병력 동원 계획을 세운 것은 원충연 대령이 1965년 5월에 모의하다가 적발된 사건 딱 하나뿐이다. 박정희 정권은 정상적인 대화와 토론과 설득으로 정치를 이끌어갈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위기가 닥치면 늘 내란이 만들어졌다. 대형 내란 사건이나 공안 사건이 발생할 때의 상황을 보면 늘 ‘절묘한 타이밍’을 발견한다. 1967년 6월 8일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동백림 사건'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간첩 사건이 발생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등 정치 개입에 대한 반발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거세어지자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이 때맞춰 터져준 것처럼 내란의 유령이 잠에서 깨어날 때에는 스멀스멀 나쁜 기운이 한국사회를 감싸기 마련이었다고....
1964년 8월 중앙정보부는 초대형 공안 사건을 터뜨려 각종 학생 시위의 배후에 불순 세력이 있었음을 과시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1차 인민혁명단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극우 보수세력 중에서도 가장 극우라고 할 수 있는 공안검사들의 양심이 살아 있어서 중앙정보부의 시나리오에 따라 관련자들을 기소하는 대신에 차라리 사표를 던졌다. 그 외에도 1971년 11월 13일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이 있다. 박정권이 10월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각 대학에 군대를 투입하여 74개의 불온 서클을 폐쇄하고 문제 학생 177명을 제적하여 강제 입영시켜 버렸는데,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은 이런 분위기에서 터진 것이다. 연행된 학생들은 혹심한 고문 끝에 4.27 대선에서 박정희가 재선되자, 폭력으로 정부를 타도 전복하기 위하여 내란을 음모했다고 자백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내란죄로 걸려든 것은 학생뿐이 아니었다.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형법학자 유기천 교수는 자료 조사차 자유중국(대만)에 갔다가 대만의 고위층으로부터 한국 정부의 요직에 있는 인물들이 대만 총통제를 연구하기 위해 와서 자료를 모아갔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귀국 후 수업시간에 이야기를 했다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내란선동 협의로 입건되어 자의반 타의반 망명길에 올랐다.
유신 시대 최대의 내란 사건은 '민청학련 사건'이다.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폭력혁명으로 노농 정권을 수입하여 했다는 사건으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었다.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영장없이 체포해 군법회의에서 최고 사형까지 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법이었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조사를 받았고, 230명이 구속되었다.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21명이 구속되었고, 결국 이중 8명이 1975년 4월 9일 사형을 당했다.
내란죄의 구성 요건에서 가장 중요한 '국헌 문란'에 대해 형법 91조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1.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2.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
12.12와 5.17이라는 쿠데타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한 행위를 자연인 박정희에 다한 단순 살인이 아닌 정권 찬탈을 위한 내란 목적 살인으로 규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강압적으로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대법원장 이영석은 입이 돌아가는 마음 고생을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진짜 내란은 5.16 군사반란과 유신 친위쿠데타와 5.17 군사반란 뿐이다. 5.17 군사 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일당은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내란 목적의 살인이었다. 내란범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하여 내란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바로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다. 김대중은 이 사건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란음모죄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 전 단계인 모의를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벌 규정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되어 있다. 즉 내란 음모죄로는 사형이 불가능하다. 사형 판결은 반국가단체의 수괴였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유신 직후 일본에 망명하여 일본과 미국의 민주인사들을 모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1977년 법원은 재일동포 '김정사의 간첩 조작 사건'에서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판시했고, 이 판례를 인용하여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반국가단체의 수괴로서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 때 재판부의 한 사람이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이다.
2014년 6월 30일 저자는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사건 항소심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갔다고 한다. 변호인은 우리나라에서 내란 조작의 역사, 비합법적 지하조직의 성격, 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적인 전개과정 등에 대하여 질문했다. 아래는 그와 관련한 저자의 생각이다.
먼저 RO의 실체와 관련한 비합법적 지하조직의 행태 문제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100명이 넘게 모여 얼굴 보며 수련회 갖는 그런 비합법적 지하조직은 역사상 있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고...
단, '진보적 민주주의' 문제는 비단 내란음모사건 뿐 아니라 원내 제3당인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결정한 헌법 재판소의 정당 해산 심판과도 깊이 관련된 문제이기에 6월 30일의 증언 내용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진보적 민주주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1948년의 제헌헌법을 자세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독립을 재건하면서 그 주역들이 이런 나라를 만들겠다고 국민들과 맺은 숭고한 협약이다. 그런데 한국의 시민들은 제헌헌법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로 아는 게 없다.
제헌헌법의 전문을 보면 뉴라이트들의 건국절 논란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금방 알 수 있다. 헌법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으며 1948년의 정부 수립은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 것이라고 밝힌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이고 1948년의 정부 수립은 대한민국의 ‘재건’이라고 명쾌하게 규정하고 있다.
제헌헌법 18조는 노동 3권이 아니라 노동 4권을 보장했다. 노동 3권에 더하여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 근로자는 법률에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를 보장했던 것이다.
제헌헌법의 농지개혁 조항은 지주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민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김성수는 첫손에 꼽히는 땅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늘날 자칭 애국보수와는 격이 다른 큰 인물이었다. 한국 보수의 원류는 김창룡이나 노덕술같은 인간 백정에 일제 앞잡이들이 아니다. 정말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던질 줄 알았던 이회영 등 6형제, 김성수, 방응모 같은 분들이 보여준 모범을 재해석하는 작업은 보수의 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말하면 종북인가?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이나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에서 큰 쟁점이 된 것은 진보적 민주주의 문제였다. 정부측 견해 따르면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에 평양노동정치학교 연설에서 처음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썼고, 통합진보당은 이를 추종하여 진보적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첫 번째는 진보적 민주주의란 말은 김일성만 독점적으로 독창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
두 번째 문제점은 김일성이 1945년 10월 3일에 평양노동정치학교에서 했다는 연설의 텍스트를 역사 연구를 넘어 사법적 판단의 증거로 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김일성이 해방 후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리가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장군 평양시 민중대회였다. 수만 명이 들은 연설조차 1949년판 <조선중앙연감>에 200자 원고지 두 쪽 분량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보다 앞서 평양노동정치학교에서 했다는 연설이 제대로 기록되었을 리가 만무하다. 1980년에 나온 백과사전에 갑자기 등장한 뒤 1990년대에 간행된 <김일성 전집>등에 ‘전문’이 실렸다. 이북 정권에는 남아있지도 않는 연설문을 수십 년 후에 ‘원문 그대로’ 복원하는 특별한 재주(?)를 보였는데,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정부가 그대로 믿고 통합진보당 강령이 이 연설을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더 중요한 문제는 검찰이 진보적 민주주의를 김일성만이 쓴 것처럼 규정하면서 종북으로 몰았다는 점이다. 그런 행위야말로 우리 헌법의 역사성을 짓밟는 반헌법적 행위이다.
검찰은 또 한국의 진보 운동이 역사적으로 자주ㆍ민주ㆍ통일 노선을 정립해 온 것을 북한의 주장을 추종한 것으로 단정지으려 했다. 이것은 너무나 한심한 편견이라고..저자는 판단한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에서 자주는 당연한 것이요, 봉건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나라에서 민주는 당연한 것이요, 분단된 나라에서 통일을 추구하는 것 역시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검찰은 너무나 당연한 자주 민주 통일을 종북으로 모는 것일까? 저자는 것은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낙인찍기 위함이라고 본다. 김정일을 트위터 상에서 조롱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박정근 사건처럼 고문에 의한 조작 보다 편견에 의한 조작이 오늘날 훨씬 더 위험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독립운동사에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는 문건은 김규식, 여운형 등이 주도한 신한청년당이 1920년에 간행한 기관지 <신한청년>이다. 또한 1942년 12월 29일 태평양 전쟁 1주년을 맞이하여 임시정부 주석 김구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는 “3.1 운동이후 우리는 가장 진보적 민주주의 이상을 가지고 혁명적인 정치체계를 수립했다. 그것이 현재의 중경 임시정부이다. 우리는 국가적 독립을 회복할 수 있으며 현대의 요구에 적합한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 지배를 수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념인 동시에 한국건국의 중심 사상이자 최고 원칙이었다.
1944년 4월 22일 임시의정원이 헌법인 임시헌장을 개정하면서 채택한 선언은 “가장 진보된 민주주의 집권제 원칙의 채용을 주안으로 삼고...”라는 말이 나온다. 또한 당시 기사를 보면 조선일보도 동아일보도 김성수도 맥아더도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지하였다고 나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의정원과 정부, 그리고 헌법이 모두 진보적 민주주의 사상 위에 성립된 것이다.
이런 제헌헌법은 당시 좌파가 제정한 것일까? 아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재건될 때에 좌파는 전혀 참가하지 않았다. 중간파도 백범을 따라 납북협상에 참가했지 정부 구성이나 재헌의원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제헌헌법은 우파들만 모여서 만든 것이다. 특히 이승만이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재헌헌법에는 중요산업 국유화 같은 골수 운동권 종북세력이 모여서 만들었다는 통합진보당 강령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내용이 가득하다. 제헌헌법을 기초하고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법제처장을 지낸 유진오는 제헌헌법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해설서인<헌법해의>에서 제헌헌법의 경제 조항에 대해 “우리나라는 경제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폐기하고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했다”고 설명했다. 또 제헌헌법의 기본 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ㆍ사회적 민주주의를 조화하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ㆍ사회적 민주주의가 조화된 것이 바로 진보적 민주주의였다.
이런 역사가 있는데 진보적 민주주의를 계승한 것이 어떻게 내란이고 종북일 수 있을까? 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를 지우는 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사이의 역사적 계승성을 말살하는 자들이고, 이들이 대한민국의 헌정사적 정통성을 왜곡하는 자들이다.
.............................................
나머지 4장에서는 유신헌법에서부터 공안세력의 두목으로서 아직도 기춘 대원군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김기춘에 대하여 별도의 독립된 장으로 훑어보았다. 5장은 전시작전권을 중심으로
6장은 야당성을 중심으로 어제와 오늘의 야당에 대하여 분석하고 저자 자신의 역사적 관점과 견해를 피력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현대사는 기득권층에 대한 직접적인 불편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학자적인 입장이라고 할지라도 바르게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어떤 과정을 거쳐 고난을 당한 일제 침략기에도 굴하지 않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희생해 온 순국선열들의 뜻을 기린다면 결단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가로서 관점을 오늘날의 현실과 연계지어 쉽고 자세하게 그러면서 가슴 아프게 독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2015. 4.2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03074
* 투데이 신문(2015. 4.12) 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770
* YES24 미리보기 http://www.yes24.com/24/goods/17403505
* 알라딘 미리보기 http://www.aladin.co.kr/shop/book/wletslookViewer.aspx?ISBN=8984318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