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김복철, 박석진, 박승호 님들과 함께 단식 7일 째를 맞은 양윤모 선생님을 제주 교도소로 면회했어요. (제주 교도소 301 번 )
양교수님, 생각보다 많이 평안해보이셨어요.
면회 시 양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영화) 평론가다.아름다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쳐 지키는게 평론가의 역활이다. 훌륭한 영화를 보면 자진해서 앞장서서 선전해줬다. 그러한 나를 전혀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내가 영웅주의가 있는 것이 아니냐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하는 나의 신념이었다."
그러고 보면 구럼비는 양교수님께서 목숨바쳐 지키고자하는 숭엄한 아름다움이겠지요.
(사진: 작자 미상) 구럼비 해안에서 '중덕사' 천막을 짓고 생활 하실 때 양윤모 선생님 모습
2011년 1월 9일 10여일만에교도소에서 석방되신 양선생님 모습. 2010년 12월 27일, 해군 기지 사업단에 숙소 건설을 위한 자재들이 들어가는 것 ( 첫 해군 기지 공사 시작이라 말할 수 있었죠)에 항의한 기자 회견 참가자 전원이 연행되었을 때 유독 양윤모 선생님 만 이전의 업무 방해 혐의와 벌금 문제로 석방되지 못하셨어요. 주민분들과 인사들께서 십시 일반 돈을 모아 양교수님을 석방하게 한 바 있죠. 그 날 저녁 조촐한 환영 만찬 자리예요. 누구보다 기뻐하셨을 종환 삼촌 뒤통수 보이시나요? (사진: 최**)
양교수님은 4.3과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으세요. 1947년 3월 1일 3.1 기념 시위때 당시 중학생이던 외할머니 남동생 분이 경찰 총탄에 사망하셨데요. 또한 외할아버님도 4.3 때 학살되셨다는 말씀를 들으셨데요.
2011년 4월 3일, 조성봉 감독님의 4. 3 관련 '레드 헌트' 다큐멘터리 를 본후 소감 시간에 자신의 개인사를 말씀하셨던 양윤모 선생님 (사진: 최**)
2011년 4월 2일, 구럼비 해안에서 오키나와 분들을 맞으시며 기뻐하시는 양교수님 모습. 아, 저 아름다운 구럼비 해안을 다시 보고 싶어요. (사진: 최**)
4월 3일 다음 날인 4월 4일, 구럼비 해안 길목에 시멘트 거푸집 트럭이 오는 것을 보고 거푸집들 앞에 누워 항의하시는 양교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사진: 최**)
'4월 6일, 또 다시 트럭 이 오자 다시 막으셨어요. (사진: 최**)
2011년 4월 6일 체포되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사진: 작자 미상)
김복철님께서 단식 중단을 강력히 요구하셨어요.
양교수님은 노동자분들이 대선 이후 많이 자살할 때 많이 괴로우셨데요. 그리고 첫번째, 두번째의 단식은 명확하게 결정이 되셔 지금처럼 단식 여부에 대해 갈등하시지 않았데요. 최근 박상희 목사님도 많이 단식 중단을 만류하신 바 있고 이제는 단식 여부를 떠나 삶과 죽음에 초연해지고 당당해졌음을 느낀다 하시네요.
양선생님만이 알고 계실 내면의 변화와 여유가 생기셨음을 인정하시는 걸까요?
분명한 것은 1차, 2차 단식 이후 선생님의 건강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단식을 풀고 좀 더 여유롭고 평화롭게 지내실 수 있도록, 우리가 지속적으로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하며 비무장 평화의 섬을 향해 똘똘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요
2011년 4월 6일 체포되신 이후, 4월 10일 단식 5일 째를 교도소로 이감되기 전 유치장에서 맞으셨던 양교수님 모습이예요. 그 당시 아무도 양교수님께서 이후 74일 이상의 살인적인 단식을 하시리라곤 생각도 못했지요.
당시 양운모 선생님의 요구 사항이었습니다. 폭력을 휘두른 이들은 그 거짓과 폭력성이 밝혀져도 뻔뻔하게 승진하고 불의는 계속되나 그 불의에 맞서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에 빛이 있는 것이겠지요.
출처 클릭: 양윤모 선생님, 단식 15일 째 되는 이 날, 우리 모두 모이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