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06 08:30 게스트하우스 출발부터...
피라미드란 그리스어의 Pyramis에서 유래했는데 고대 이집트왕의 무덤을 말한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수메리아,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고 여러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도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메르(Mer)라 하고 상형문자로 ▲로 표시했다.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지 않고는 이집트를 말하지 말라.' 라는 말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한 사람의 관광객으로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발길을 옮겼다. 게스트하우스 바로앞의 Sadat역에서 Giza역으로의 이동과 현지인들이 타는 마이크로버스(1인당 25피아스트로였었나?)를 통해서 기자지구에 도착했다.
2008.01.06 09:40 피라미드입구 도착
분위기 좋다. 어떤곳이든 입구에 도착했을때 받는 느낌이 있는데 아주 좋은 느낌이 들었기때문이다.
기자는 카이로 시내에서 서쪽으로 13km떨어져 변두리, 사막과의 경계에 홀연히 웅대한 피라미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파라미드들은 지금부터 약 4500년 전인 고왕국 제4왕조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제4왕조(BC 2613 - 2494)의 쿠푸왕, 카프라왕, 멘카우라왕의 무덤등이 있으며, 현존하는 70여개 피라미드중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피라미드의 가장 경이로운 점은 아마도 그 거대한 구조물의 방향일 것이다. 각 능선은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그 각도의 오차는 진북(眞北)에서 5분밖에 벗어나 있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어서, 우연의 배열의 결과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또한, 현대 20세기의 건춤룰로도 따라갈 수 없는 정확성은 도저히 인간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이다. 105m 높이의 '상승통로'는 완벽한 배열에서 1cm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 피라미드가 건조될 당시 당시 천구(天球)의 북극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용 자리의 알파 별을 지표로 삼아 이 통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여기는 연암 평원이다. 옛날에 나일강이 범람해도 홍수가 미치지 않는 바위 언덕이다. 제 4왕조의 왕들은 내세의 안식처로써 여기에 「죽은 자의 도시」를 건설했다. 저 아래 스핑크스 앞 피라미드 하곡 신전에 배가 닿을 수 있도록 운하와 접안시설을 두고 이집트 전 지역에서 돌을 채석하여 나일강을 통하여 운반했다. 대 피라미드는 4,500여 년 전 이집트 고 왕국의 쿠푸왕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이 피라미드는 건설과정, 규모, 정확도 그리고 역사상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현존하고 있는 것으로는 유일하다.
「이집트 피라미드기행」중에서
지금 우리가 들어가려고 선 입구는 도굴꾼이 만들어 놓은 곳이다. 옛 도굴꾼 덕분으로 피라미드를 관광하게 된 셈이다. 서기 818년 알 마문이라는 아랍의 이집트 통치자가 아주 노골적으로 대피라미드를 도굴하려고 이 입구를 뚫었다. 그는 궁핍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남의 민족 왕 무덤을 파헤친 도굴꾼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해서왕의 방, 여왕의 방, 지하의 방에 들어가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석관 하나가 있을 뿐 비문도, 보물도, 사체도 돈 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아마 천수백년 전에 도굴꾼이 먼저 다녀갔다는 것이다. 원래 입구는 지금 관광객이 드나드는 입구보다 7m정도 위에, 또 남북축에서 동쪽으로 7m정도 비켜나 있었다. 큰 돌 두 개가 겹 ∧자 모양으로 기대면서 밑에 1M 정도의 입구를 만들었는데 입구는 돌로 완전히 막혀져 있다. 알 마문 일행이 원 입구 위치를 알고도 너무 높아 지금의 입구를 일부러 뚤었을까? 외붕[서 올라가는 통로까지 최단거리로 아주 정확하게 입구를 찾아 한사람이 근근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굴을 뚤었다. 상하, 좌우 각도가 여간 정확치 않고서는 지금의 입구 위치를 계산해내기가 어려웠을 텐데말이다. 「이집트 피라미드기행」중에서
그래서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은 코렐리 형이 더욱 심한 스타일이다 '마문의 굴'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입장했다. 기자지구 피라미드의 입장료가 50파운드였는데 이 곳은 별도로 100파운드를 받는다. 완전 도둑맞는 기분은 들었지만 들어가서 보지않고가면 평생동안 어떤 모습이었을까란 생각으로 후회하는것보다는 좋을듯해서 깔끔하게 들어갔다.
이 곳은 올라가는 통로 크기는 폭이 1.04M, 높인 1,19m이다. 덕분에 오리걸음하듯 올라간 길이는 39.3m 경사는 26도다. 그리고 대회랑에 이르게되면 고고학자들이 구조해석면에서 시공, 설계 면에서 걸작품이라고 찬탄을 하는곳으로 바닥경사는 26도지만 천장은 8.53m의 높이로 낑낑거리면서 올라갔고 사진을 남기고 싶었으나 입구부터 사진기를 맡겨두고 올수밖에 없기에 내부사진은 없다...
카프라왕의 피라미드
유일하게 마감돌이 남아 있는 카프라왕의 피라미드다. 카프라왕 피라미드 크기는 밑변의 길이 약216m이고, 높이는 143m이었으나 지금은 136.5m이다. 대피라미드보다는 작지만 지대가 높아 조금 높게 보인다고 하는데 이 피라미드도 정상부 6.5m가 달아났다고 하며, 그래도 상부에 석회암 마감돌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피라미드가 스핑크스 정면에 있어 세 피라미드와 구도를 맞추면 매우 아름다운 모습이란다. 어쨌든 그 시대 개념없는 사람들이 외장부분을 모두 뜯어갔다고 하니 어이하리오...
태양의 배 박물관인데 모두들 관심밖이어서 그냥 통과...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
맨카우라왕 피라미드는 밑변의 길이 103.4m, 높이는 65.5m이고 높이 각도는 예의 52도와 달리 51도20분이다. 하부에 당초의 마감돌로 보이는 화강석이 남아 있는데 원래 피라미드 높이의 1/3은 화강석으로 그 위 2/3는 라임석으로 마감됐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피라미드 관람 중 식당을 만날 수 없는 관계로 과일과 빵, 물을 준비해 가서 맨카우라 왕의 피라미드에서 먹었다. 소풍 온 기분이다. 점심을 해결하고 나서 우리는 기자의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작은 맨카우라왕의 피라미드를 보고 바로 뒤에 있는 여왕의 작은 피라미드로 올라갔다. 3개의 피라미드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위해 대부분 쿠푸왕의 피라미드 앞에서 자신들이 타고 온 관광버스나 택시 등을 이용해 한참을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뜀도령이 정보력을 동원해 찾아낸 곳이 있는데 바로 아래 사진의 피라미드에 올라가면 3개의 피라미드를 동시에 볼 수 있다. 두 명의 관광객과 한 이집션 가이드가 벌써 사진을 찍고 내려온다. 이 곳은 사람들이 몰라서 그런자 찾아 오는 사람이 없다.
점심에 관한 글은 코렐리 형의 블로그에서 퍼 온 그대로다...
맨카우라 피라미드 앞에서 찍은 카프라왕 피라미드
[동영상]
자,,,순서가 바른것도 같고 뒤바뀐 느낌도 있지만 스핑크스로 향하자구...
[이집트 여행전에 읽은 피라미드에 관한 글들]
#피라미드 건축의 비밀은 내부경사로# 피라미드 건축의 비밀은 내부 경사로" 佛건축가 "4000명으로 건설 가능" 새 가설 제시 장 피에르 우댕이 주장한 쿠푸 왕의 피라미드 건설 방법. 기단부터 43m 지점까지는 외부 경사로를 이용한다. 이후부터 피라미드 내부의 나선형 경사로를 이용해 돌을 운반한다. 외부의 길은 작업 인력의 통행로다. 내부 경사로의 네 모서리는 운반된 돌의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외부에 노출되도록 했다 세계 최대의 피라미드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현존하는 유일한 건축물인 이집트 쿠푸 왕의 대 피라미드는 어떻게 지어졌을까. 평균 2.5톤 무게의 돌 300만개가 사용된 이 거대한 피라미드의 건설 방법과 관련, 프랑스 건축가 장 피에르 우댕이 ‘내부 나선형 경사로’를 지어 돌을 운반했을 것이라는 새로운 가설을 제시해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댕은 자동차와 항공기 설계용 3차원 모형 제작회사인 다쏘시스템사의 엔지니어 14명과 2년 동안 공동으로 작업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은 얻었다고 밝히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3차원 영상을 지난달 말 인터넷 사이트(www.3ds.com/khufu)에 공개했다.우댕은 우선 맨 아래부터 위로 43m 높이까지는 ‘외부 경사로’를 사용해 건설한 뒤, 이후부터는 피라미드의 표면에서 10~15m 가량 들어간 내부에 나선형 경사로를 세워 높이 136m의 구조물을 완성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내부에 경사로를 세우면 경사로를 만들기 위해 불필요하게 석재를 낭비할 필요가 없으며, 직사광선을 쏘이지 않아도 돼 작업자들의 노동 환경도 크게 개선된다. 그동안 피라미드 건설에는 10만명 가량의 인원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해 왔지만, 우댕은 자신의 가설대로 피라미드를 건설할 경우 4,000명 미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태까지 피라미드 건설방법과 관련해 널리 인정된 가설은 돌을 운반하기 위해 피라미드 한쪽 면 외부에 거대한 직선형 경사로를 지었다는 ‘외부 경사로’ 설과, 피라미드 바깥 표면에 나선형으로 경사로를 지었다는 ‘나선형 경사로’ 설이었다. 그러나 우댕은 꼭대기까지 직선 외부 경사로를 만들 경우 경사로에만 피라미드 전체에 쓰이는 돌만큼 들어가며, 외부에 나선형 경사로를 만들 경우 이를 표면에 고정시키기 어렵고 측량에 필요한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일보 최진주 기자
#이집트 피라미드, 누가 만들었나?
[대기원]이집트 기자 지역의 거대한 피라미드는 성지이자, 여행자와 영화감독들을 끌어들이는 훌륭한 촬영장이다. 많은 사람들은 피라미드가 고대 이집트인들의 지혜를 체현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피라미드는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다. ‘고대인들은 도대체 이렇게 많은 거석을 어떻게 이곳으로 운반하였을까? 어떻게 규칙적인 모양으로 가공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의 기계문명으로도 다루기 어려운 몇 십 톤의 돌들을 가지고 어떻게 이다지도 찬란한 건축물을 건설한 것인가?’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많은 이론을 제시했지만 현재까지 사람들을 완전히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더욱 도전적인 의견까지 내놓았다. '이 피라미드를 정말 이집트인들이 건설했을까'”
거석(巨石)인가 벽돌인가
미국 드렉셀대학 재료공학과 마이클 바소움 박사는 2006년 12월 9일자 인터넷 과학전문지 사이언스 데일리에서 이 피라미드는 주조한 벽돌을 사용함으로서 대량의 거석을 운반하는 작업을 줄였다고 발표했다. 이 이론이 발표되자 많은 과학자와 이집트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사실, 벽돌을 피라미드 건축에 사용하였다는 주장은 신선한 것이 아니다. 1970년대 말, 프랑스 화학자 조셉 다비도비치도 이와 같은 주장을 내세웠다.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최근에 이르러서야 지질학자들은 자연 석회석과 석회를 녹여서 주조한 벽돌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바소움 교수는 3년 동안 천여 개의 피라미드 돌 표본 사진을 연구한 결과 이집트 기자고원에 있는 피라미드는 두 종류의 돌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즉, 피라미드의 대부분이 자연석인 석회석으로 되어 있지만 내, 외 양측과 상부 주요부분은 인조 벽돌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과학자들은 벽돌을 만들려면 대량의 석회석 백토와 나무가 필요한데 당시에 그렇게 많은 나무를 가져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그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인력에만 의지해 자연석을 운반하고 끌어 올렸을 것으로 믿고 있다. 재료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또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집트인들이 이렇게 많은 거대한 암석을 어떻게 운반하고 올렸을까?’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또한 이집트인이 벽돌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왕의 묘실을 가로 지르는 70톤의 화강암 상판은 벽돌을 주조하듯이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은 무거운 상판을 어떻게 들어올렸는가와 함께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다.
이집트인에게는 불가능한 공사
사실 이집트 피라미드의 대부분은 비교적 작아서 인력으로 건설이 가능하다. 그러나 쿠푸의 대 피라미드, 카푸라 왕의 피라미드 및 카라 왕의 피라미드 등의 건설 방법은 아직 고고학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불가사의로 남아있다. 쿠푸의 대 피라미드는 높이 146m, 밑변 230m, 면적 5만 2,900㎡이고 230만개의 석재가 사용되었다. 그 중 가장 작은 것이 1톤이고 가장 큰 것이 100톤이다. 고고학자들은 이집트인들이 청동기를 사용하여 부근의 채석장에서 거석을 떼어내 통나무를 이용하여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 운반한 후 그것을 경사에 놓고 쐐기와 지렛대를 이용하여 피라미드 위로 끌어 올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거석을 운반하기 위해 경사를 만드는 것 자체도 거대한 공사일 뿐만 아니라 바위를 운반하여 정확한 위치에 놓는 것도 불가사의하다. 이집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대 피라미드를 건설하는데 10만 명의 인원과 2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매년 1년 내내 피라미드 건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일강이 범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3개월 동안만 건설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매일 10시간 일한다고 계산할 경우 노동자들은 반드시 매 분마다 몇 톤이나 되는 암석을 운반하여 실수 없이 올려놓아야 하는데 고대 시대의 인력, 물력 및 사회 실정에 비추어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집트학자들은 30여종 이상의 건축방식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 이집트인의 기술과 능력으로는 이런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대기원]피라미드 건설 방법상의 논쟁이 고대 이집트인의 지혜를 재현하는 문제라면, 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에 대한 연대분석은 더욱 도전성을 가진 가설에 이른다. 대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더욱 오래되고 위대한 사전문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우선, 대 피라미드의 각 수치가 대단히 정확하다. 예를 들어 각 능선은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고 각 방위의 오차는 5분(1분은 1도의 60분의 1)이내이다. 이렇게 방대한 건축물이 엄청난 정밀도를 유지하고 있다. 대 피라미드를 이렇게 높은 기술 수준으로 건설하려면 적어도 수천 년의 진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집트 역사를 돌아보면 이런 기술 발전 과정과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현재 정통적인 견해는 대 피라미드는 기원전 2,500백 년 전 이집트 제4왕조에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집트에서 하룻밤 사이에 신과 같은 기술자와 거인과 같은 장인이 출현했단 말인가? 그 외, 이집트인은 파라오를 기념하고 칭송하기 위해, 왕묘 내부를 대단히 화려하게 장식했고 풍부한 부장품을 묻었다. 그러나 서기 820년, 대 피라미드를 최초로 발굴했을 때 내부는 아주 수수한 방이었고 부장품, 보물, 조각은 물론 파편 하나 없었으며 벽 역시 어떤 그림이나 문자 장식도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도굴묘’라고 추정했으나 실제 연구에 의하면 도굴범이 다른 통로로 피라미드에 들어올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도굴범이 파편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훔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벽에 그려진 파라오의 비문을 전부 지웠을 가능성은 더욱 없다. 그렇다면 대 피라미드의 건설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대 피라미드 근처의 스핑크스이다. 과학자들은 스핑크스에서 물로 침식된 듯한 흔적을 발견, 조사한 결과 스핑크스가 습한 기후에 노출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원전 3천년 이래로 기자의 고원은 줄곧 스핑크스상의 침식 흔적을 조성할 만한 비가 없었다. 기원전 만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이런 대규모의 침식을 일으킬 날씨가 있다. 따라서 스핑크스는 기원전 만년 이전 즉 사전문명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많은 역사학자들이 사전문명 학설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만약 스핑크스가 더욱 오래된 문명에서 온 것이라면 그 문명이 존재하였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전문명을 입증할 만한 다른 발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2년 미국과학발전협회에서 사전 문명 및 스핑크스 건설 시기에 관한 논쟁이 있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피라미드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일부 과학자들은 심지어 피라미드 건설 주인공에 대한 시선을 우주로 돌렸으나 이것은 사전문명을 증명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고대 이집트학의 아버지 쟝 프란시스 챔폴리온은 19세에 “이 피라미드 주인공들의 지혜는 100피트 장신의 거인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 남영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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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뜀도령의 그림별장 원문보기 글쓴이: 뜀도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