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낙무아이"(무에타이 선수)가 세계의 강자들과 맞서 링에 오를 때는 반드시 "싸움의 신, 나이 카넘뚱 에게 기원을 바칩니다!"라고 해설되고 있는데, 이 "싸움의 신"이라고 표현되는 "신"이 역사속에 실존했던 인물이다.
1767년, "아유타야"(태국의 옛 왕조중 한개)가 "버마"(현 "미얀마")군의 공격에 의해 함락 당했을 때였다.
(*아유타야 : 태국의 근대 왕조중 문화적으로 가장 왕성한 발전한 왕조였다. 그러나 왕조의 왕위 찬탈싸움으로 인해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을때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키웠던 버마군에게 한달만에 몰락 당하고 만다. 갑옷과 대포로 중무장한 버마군에 대항해 당시 시민들은 농기구와 맨손으로 버마군에 대항했었다.이러한 역사가 잘 표현된 영화로 "방라잔"이라는 영화가 있다.가까운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할수 있을것이다.)
미쳐 피난 가지 못해서 인질로 잡힌 시민중에, 무에타이 선수였던 "나이 카넘뚱"이 있었다.
1774년, 침략자인 버마왕 망라는, 불탑의 완성을 기념해 축제를 열었다. 그리고 이 축제에서 버마인들의 우월함을 선보이기 위해 타이 복서와 버마의 복서를 싸우게 하게 되었다.
(전쟁에 승리한 국가의 프로 격투기 선수와 인질로 잡힌 포로들간의 말도 않되는 이 경기는 축구에서 월드컵의 국가대항전 보다 진정한 의미의 국가 대항전이었을것이다.)
이때 태국측 대표로 링에 오른 사람이 바로 "나이 카넘뚱"이다.
링위에 오른 "나이 카넘뚱"은 자신의 대전 상대인 버마 복서의 주위를 몇차례나 돌면서 갑자기 뛰어 오르고는 해서, 버마인들을 떠들썩하게 했다.
나이 카넘뚱이 행한 이것이 "와이크루"이다.
(무에타이 경기전에는, 반드시 "와이크루"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룰에 정해져 있다.)
싸움이 시작되자, "나이 카넘뚱"은 팔꿈치 공격으로 눈 깜짝할 순간에 버마 복서를 KO 해 버렸다.
그러나, "나이 카넘뚱"이 와이크루를 해서, 버마인은 싸움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하여, "나이 카넘뚱"의 승리는 인정되지 않았다.
인질이었기에 거부권이나 어떠한 이의 제기도 하지 못했던 "나이 카넘뚱"은 결국, 전부 9명의 버마 복서와 싸움을 하게 된다.
그리고, 무에타이의 역사중 첫번째 공식적인 외국인과의 경기에서 명성을 드높히게된 "나이 카넘뚱"은 보기좋게 9명의 버마 복서를 KO시켜 버린다.
"나이 카넘뚱"의 막강함에 감탄한 버마왕은, 포상으로서 돈이나 미녀를 주기로 하고, 카놈틈은 "미녀"를 선택하여, 2명의 미녀를 상품으로서 획득하여 아내로 맞이하며 귀향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태국인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유명한 이야기다.
태국인의 애국심과 자존심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며 사랑받는 이유를 이해할수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막강한 절대권력을 가지던 그들에게 버마가 안겨준 상처는 엄청난것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국호를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꾼것에도 게의치 않고 여전히 공개석상에서도 버마라고 불러버리는 등 "나이 카넘뚱"의 실화가 태국인들에게 전해주는 감동과 에너지는 실로 위대한듯 하다.
물론 우리나라 같았으면 이야기의 결말부위가 좀더 교훈적인 내용으로 수정되었겠지만.(미녀 두명을 받고 행복하게 살았다..무언가 부족해보이는)
이 이야기외에도 역사속에 존재했던 위대한 전설의 낙무아이(무에타이 선수)들은 태국인들에게 "무에타이가 지상 최강의 무술"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