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으로 오래 살았다는 생각부터 든다. 사실 '3김시대'는 우리 현대사에 있어 필요악이었다는 게 본 교사의 결론이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3김 시대라는 건 없었을 테니까. 가령, 우리는 누군가 친일(親日)을 했다고 비난하면, 특히 나이를 X로 쳐먹은 수많은 늙은 것들은 그 당시를 거론하면서 네가 뭘 알고 함부러 입을 놀리느냐고 한다. 그런 식이라면 세상에 욕을 먹을 자가 과연 누구이며, 역사가 존재할 이유는 없다.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대갈도 손주들에게는 자상한 할애비이니까 말이다.
항상 박정희를 말할 때 나오는 게 '근대화의 기수(?)'인데 그렇다면 과연 5.16 군사쿠데타가 잘한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30년 동안 정체 아니 후퇴해야 했고, 장준하 등 죄없는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다 죽은 건 대체 어디에서 보상을 받아야 할까? 박정희가 경제는 살리지 않았냐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넘들은 일제강점기에 대해 입을 다물어야 한다.
결론은 하나다. 부패의 원조이며 한일회담 중 독도를 폭파시키려 했던 늙은이야~ 잘 가라~ 그리고 국립묘지에 당신을 묻힐 자격이 없고, 죽기 전에 그걸 안 건지 스스로 거기에 안 묻히겠다고 한 건지... 그건 당신이 92년 동안 한 짓들 중 가장 잘한 거라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보듯 똑똑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똑똑한 짓을 얼마나 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라는 걸 당신의 인생을 통해 배웠다고~~~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 역사속으로
지난 4월 신당동 자택에서의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김범현 기자 =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92세.
김 전 총리 측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김 전 총리가 오늘 오전 8시 15분께 별세했다"고 밝혔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별세…향년 92세 (서울=연합뉴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 별세했다. 향년 92세. 김 전 총리 측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김 전 총리가 오늘 오전 순천향병원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은 1973년 박정희 대통령컵 아시아 축구대회 선수입장식에서 박수를 보내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2018.6.23 [연합뉴스 자료사진] uwg806@yna.co.kr
김 전 총리는 이날 오전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119 구급대에 의해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병원 측은 설명했다. 김 전 총리는 노환으로 별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로써 김대중·김영삼·김종필 트로이카가 이끌어왔던 '3김(金)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
지난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지난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고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3김 시대'의 한 축인 김 전 총리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으며, 같은 해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줄곧 영원한 '제2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증권파동을 비롯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63년 2월 '자의반 타의반' 첫 외유를 떠난 데 이어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주역으로서 핵심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또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나,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다.
김 전 총리는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다 1986년 귀국한 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해다가 낙선했다. 그러나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의 국회의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 오뚝이처럼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그는 이어 평생의 꿈인 내각제를 고리로 1992년 대선에서 3당 합당과 함께 김영삼(YS) 당시 대선 후보를 지원했으며, 1997년 대선에선 자신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다시 대권에 도전했으나 선거 막바지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키며 김대중(DJ) 당시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함으로써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함께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내각제 파동과 16대 총선 과정에서 쌓인 공동정권 수장 사이의 앙금은 결국 2001년 9월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 및 공조파기로 이어졌다. 김 전 총리는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재기를 시도했으나, 자신의 10선 도전 실패와 함께 고작 4명의 의원만 배출하는 참패를 당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김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쿠데타 원조에서부터 중앙정보부 창설자, 풍운의 정치인, 영원한 2인자, 경륜의 정치인, 처세의 달인, 로맨티스트 정치인 등 그에 따라붙는 여러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영욕과 부침을 거듭해왔다.
김 전 총리의 서거로 1960년대부터 우리 정치권을 풍미해 온 '3김 시대'는 실질적 종언을 고하게 됐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예리씨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