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훈 3
밤늦게 시를 쓰다가 북어와 함께 소주를 마시는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은 이 시를 쓴 시인 자신일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말라 비틀어져 입을 벌리고 있는 북어를 다시 한번 보게 되었고, 명태의 운명을 생각했을 것이다.
“명태, 너는 전생에 무엇이었느냐"고. 명태가 물었다.
”시인, 너의 전생은 무엇이었기에 나와 이렇게 인연이 되어, 내가 너의 한 잔 술 안주거리가 되어 너를 즐겁게 해주고 있느냐“고 물었다. 명태의 말 속에는 다음 생에서는 너와 나의 신세가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은연 중에 내뱉고 있었다.
찢겨져가는 명태를 보면서 시인은 어쩌면 마치 자신의 몸이 찢겨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시인은 명태를 위해 시를 쓰기로 했다. 그러면 명태의 불운은 충분히 보상을 받을 것이니까.
◀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창작혼을 불태우던 1985 년 1 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아내 석은애씨의 피아노 반주로 자작 가곡을 불러보는 변훈씨
시인은 독백한다. ‘너의 육신은 내 입으로 들어가 없어질지라도 너 영혼은 환한 저승길로 가라’ 고. ‘그리하여 너의 이름이 길이 길이 남아 있으리라’ 고.
명태는 월남 문인 양명문의 시에 6.25사변중 국군장교로 있던 변훈님이 곡을 붙인 가곡으로서 발표 당시에는 가히 혁신적인 곡이었다.
1952년 초연 당시엔 기존의 한국가곡의 틀을 깨는 돌연변이 같은 음악으로 치부되어 지독한 혹평을 받았다고 한다.
시인은 명태의 신세와 자신의 신세를 비유하면서 이 시를 썼지만 작곡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갇혀 젊지만 자유로울 수 없는 영혼들의 자조 섞인 신세를 명태에 비유해 풍류를 즐기는 사람으로나마 남고자 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으며, 세월이 흐른 지금엔 자연을 벗하고저 바다 앞에 선 호쾌한 장부들의 권주가로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노랫말 때문인지 몰라도, 명태는 왠지 서민의 고달픈 삶을 많이 닮았다. 어부들에 의해 잡혀 올라와 북어나 동태, 생태, 황태 등 영문도 모른 채 팔자가 나눠지는 그 신세가 왠지 처량하기만 하다.
한국적인 익살, 그리고 한숨이 섞여있는 자조적이면서도 재치가 있는 노래 명태....
명태와 바리톤 오현명씨의 인연을 오현명씨의 회고에서 찾아보았다.
일제시대 만주땅에서 출생한 그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자라다 6세 때 현제명 성악곡집을 듣고 음악적 감화를 받았다. 형의 친구인 작곡가 임원식씨로부터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듣고 中 1때 교회 무대에 처음 섰고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가 만든 조선 합창단 단원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징병을 당해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거기서 조국해방을 맞이하였고, 만주로 되돌아가던 중 38선이 막혀 서울을 떠돌게 되었다. 그러다 극적으로 현제명씨를 만났고 그 밑에서 일하다가 경성음악학교 장학생으로 입학, 평생의 스승 김형로씨를 만났다. 6·25 때는 좌익 학생들에 의해 납북되던 중 탈출하여 국군 정훈음악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일생의 레퍼토리가 된 가곡 「명태」를 만났다.
『1951년 해군 정훈음악대에 있을 때, 연락 장교로 있던 작곡가 변훈씨가 날 위해 만들었다며 던져주고 간 악보뭉치 속에 「명태」가 있었지요. 멜로디보다 가사 위주로 가는 생소한 방식, 해학적인 가사가 좋아 발표했다가 당시엔 지독한 혹평을 받았어요. 작곡가가 낙담해 진로를 바꾸기까지 했으니까요. 1970년에 다시 불렀다가 유명해져서 어딜 가나 오현명 -명태, 명태 -오현명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작곡가 변훈(1926∼2000)은 함경남도 함흥 태생이며, 주포르투갈 대사 등을 역임한 외교관 출신 작곡가로 함남중학교를 거쳐 연희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 53년 외교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외교관 초임시절 브라질 등지의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 주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부영사와 파키스탄 총영사 등을 역임했으며,81년 5월 주포르투갈 대리대사를 마지막으로 28년간의 외교관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1947년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금잔디」를 시작으로 윤동주 작시의 「무서운 시간」, 시인 김광섭의「차라리 손목잡고 죽으리」, 김광섭 작시의
「나는야 간다」, 김소월의 「초혼」「진달래꽃」, 정공채의 「갈매기 우는구나」, 조병화의 「낙엽끼리 산다」, 김영삼 시 「귀향의 날」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작품집으로 <갈매기> (세광출판사, 1981년)가 있다.
- 글 : 내마음의 노래(2006. 10. 1)
"변 훈(邊 焄)" 3
한국 가곡의 새 장르를 개척한 직업외교관 작곡가
2000 년 8 월 29 일 향년 74 세의 나이로 별세한 변 훈(邊 焄)은 작곡가로서 한국 가곡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변 훈(邊 焄)에게 '명태'는 한국 가곡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표작인 동시에 쓰라린 추억이 담긴 가곡이다. 또 그가 음악을 포기하고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이 '명태' 때문이기도 하다.
연희전문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휘자 정종길에게 작곡을, 바리톤 최봉진에게 성악을 배운 그는 외교관의 길로 접어 들기 전부터 작곡에 심취, 1947 년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금잔디'를 첫 작곡한 데 이어 윤동주 작시의 가곡 '무서운 시간'(48 년), 양명문의 '낙동강'(51 년), 시인 김광섭의 '차라리 손목 잡고 죽으리'(52 년) 등의 작품을 차례로 발표했다.
1952 년 변훈은 그의 인생을 뒤바꾸게 되는 <명태>를 바리톤 오현명을 통해 부산 극장에서 첫발표회를 가졌다. 고달픈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가난한 시인의 술 안주가 되어 버린 명태에 빗댄 풍자가이기도 한 '명태'는 탄생하자 마자 세인들의 숱한 빈정거림을 받았다.
베이스 오현명(吳鉉明)이 부른 이 곡을 듣고 음악 평론가 이성삼(李成三)씨가 연합신문에 '이것도 노래라고 발표하나'라는 평론을 써, 변훈씨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남성적이고 너무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적인 변훈의 '명태'였기에 홍난파류의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가곡에 익숙해 있던 그 당시 음악계의 몰이해와 냉대 때문이었지만 그것은 작곡자가 전문 음악 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편견도 작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어쨋든 그는 그 이후 음악을 접고 외무부에 특채 되어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바리톤 오현명은 '명태' 발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부산 해군 정악대에 복무 중이던 어느날, 나보다는 세 살 아래인 邊씨가 악보 뭉치를 들고 찾아 왔어요. <귀향의 날><낙동강'>등 여섯 곡의 가곡이 들어 있었죠. 노래를 부르던 친구가 작곡도 하나 싶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중 유난히 눈길이 간 노래가 <명태>였어요. 하지만 발표 때 객석 여기 저기서 터지는 웃음 소리를 듣고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죠."
또 오현명은 "고인(변훈)은 선이 굵은 성격의 소유자"라며 "음악계의 아웃사이더로 평생을 나그네처럼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고 회고 했다.
대구에 가면 '녹향'이라는 음악 감상실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 우리 가곡 중 걸작으로 칭송 받는 변훈의 가곡 ‘명태’의 노랫말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김동리가 부산 ‘밀다원’에서 진을 치고 있던 6ㆍ25 피란시절(1951 년), 이중섭·최정희·양주동·박계조와 함께 대구 ‘녹향’에 파묻혀 지내던 당시 종군기자였던 시인 양명문이 ‘녹향’ 다탁(茶卓)에서 써내려간 ‘명태’ 시를 변훈이 건네 받아 곡조를 붙인게 바로 '명태'였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고전음악감상실 1 호를 서울의 옛 ‘르네상스’ 감상실 쯤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실지 모르나 그 보다 더 오랜 원조가 1946 년 대구 향촌동에서 문을 열었고, 지금도 대구 중앙로의 옛 대구 극장 맞은 편에서 영업 중인 ‘녹향’이라는 곳이라고 한다. (수 년전 신문에서 우연히 '녹향'에 관한 기사를 보고 대구에 내려갔을 때 찾아가 인사를 드린 이후 부터 대구에 내려갈 때면 시간 나는대로 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초연이 실패로 돌아 간 '명태'가 한국 가곡사의 획을 긋는 수작으로 재평가 받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말,
음악 평론가 서우석(徐友錫)은 <문예중앙> 80 년 겨울호에 쓴 '음악과 사실성'이라는 글에서 <명태>를 '언어의 억양과 사실성에 충실한 노래'라고 극찬했다. 이어 음악 평론가 박용구(朴容九)도 "홍난파, 현재명류의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가곡에서 탈피한 <명태><쥐> 등은 40 년대 이 땅에 리얼리즘 가곡의 씨앗을 뿌린 김순남, 이건우의 맥을 잇는 듬직한 산봉우리"라고 평가했다. 그가 외교관으로 해외 공관 이곳 저곳을 다니는 동안 천덕꾸러기였던 <명태>는 점차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귀한 몸'이 되었다.
오현명의 독창회에서 으레 앙코르곡으로 불려지며, 오현명이 무대에 설 때면 객석에서 '명태!'를 연호하는 청중이 늘 있게 마련이라고 한다. 어부에 잡힌 명태의 입장에서 쓴 해학적인 노래말은 이전에 없던 신선함과 함께 '한국적인 和聲(화성)'을 창출했다는 음악적 새로움도 간과할 수 없다. 작 곡가 李旭(이병욱)은 "명태에 이르러서 비로소 한국 가곡이라 내세울 수 있는 곡이 생겼다. 봉선화로부터 이어 온 이전의 가곡들은 사실 우리 색깔 이 없었다"고까지 말했다.
이에 고무 된 변훈은 81 년, 28 년 간의 직업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여의도에 '오페라 하우스'라는 레스토랑을 연 뒤 '시와 노래와 그림과'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 달 한 차례씩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주 포르투갈 대리대사를 마지막으로 28 년 간의 외교관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뒤 음악에만 전념 할 정도로 가곡에 대한 그의 애착은 대단했다.
양중해 작시의 '떠나가는 배'와 김영삼의 '귀향의 날'을 비롯한 전쟁 또는 실향의 아픔을 노래한 작품들과 '설악산' 같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노래들도 그의 음악 세계를 대변해 주고 있다. 시인 정공채(鄭孔采)와 콤비를 이뤄 전국을 누비면서 조국 산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임진강' '한강' '한려수도' '한라산' 등의 노래에 담아 내기도 하고, 김소월의 '초혼',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명시(名詩)의 가곡화 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외교관 시절에도 작품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고 김광섭 작시의 '나는야 간다'와 '바다의 소곡', 김소월의 '초혼'과 '진달래꽃」'등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은퇴 이후에도 '갈매기 우는구나'(정공채 시), '쥐'(김광림 시), '춤의 판타지아'(정한모 시), '낙엽끼리 산다'(조병화 시) 등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여 왔다.
지병을 앓기 시작한 10 여년 전부터 작고하기 전까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비롯한 성가를 위주로 작품 활동을 벌여 왔다. 그의 작품들은 "서양음악에 창과 아악, 시조, 민요같은 전통음악 기법을 도입, 동양적 색채를 풍기는 독특한 멜로디를 지니고 있으며, 노랫말 또한 중시함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노래"라는 게 음악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故 변훈은 우리 가락의 풍류와 해학, 애뜻한 사랑이 충만한 민족을 노래한 작품을 창작, 가곡계 발전에 공헌한 점이 공로로 인정 돼 화관문화훈장으로 추서 됐다.
글 : 음악 서적 / 웹사이트 참조 편집 / 네이버 블러그 <뮤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