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선생은 제천 장담으로 이사했다. 양가의 재당숙인 유중교가 1888년 춘천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사와 제자를 양성하던 중 1893년 작고하자, 선생은 유중교가 닦아 놓은 기반을 흡수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얼마 뒤 선생은 바로 이곳 제천을 거점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이 무렵 일제는 청일전쟁을 개시하는 한편 김홍집을 총재로 하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한국의 내정개혁을 전격적으로 단행함으로써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켰다. 갑오개혁이라 불리는 이때의 개혁 중에서도 전통적인 의복제도를 서양식 복제로 개정한 의제개혁은 유생들을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했다. 또한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제는 그들이 한국 침략정책을 수행해 가는데 큰 걸림돌로 여겼던 명성왕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고는 1895년 11월 17일을 기해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을 바꿈과 동시에 성인남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렸다. 바로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의병항쟁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선생의 의병항쟁은, 제2차 의제개혁 직후 '변고'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895년 5월 2, 3일 양일간에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와 향음례를 거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이 행사는 이후 11월 거의 직전까지 대개 10일의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는 곧 의병항쟁의 준비단계였으며 후일의 거의에서도 여기에 참석한 인물들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문인들의 거의로 시작된 호좌 의병진
선생의 호좌 의병진은 먼저 문인들의 거의에서 유래한다. 즉 선생의 문인들인 이춘영과 안승우가 1896년 1월 12일 김백선의 포군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에서 거의한 뒤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을 축출하였다. 이것이 호좌 의병진의 발단인 것이다. 이들은 곧이어 제천에서 서상렬, 이필희, 신지수, 이범직 등의 호응을 얻어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이필희를 의병대장으로 삼고 서상렬을 군사로 임명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다음 1월 22일 단양에서 공주병참 소속의 관군과 일본군 혼성부대와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혼성부대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자 서상렬과 이춘영은 죽령을 넘어 풍기로 들어갔고, 안승우는 영동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전력의 분산을 막고자 전령을 보내 이들을 모두 영월로 모이게 했다.
영월에서 회합한 이필희 이하 이춘영, 서상렬, 안승우 등은 의병장이 되어 줄 것을 선생에게 간청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복수보형(復讐保形: 국모의 원수를 갚고 의리를 지킨다)'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되었다. 선생은 의병대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발표하여 사기를 고무하였다.
의병대장으로 취임, 충주성을 공격하다
호좌 의병진은 거의 초기에 안승우, 이필희, 이춘영 등이 모집한 지평 의병 400여명을 주축으로 하고 화서연원을 중심으로 한, 각 지역단위의 소규모 의병진들이 연결 되어 연합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의병대장에 취임한 선생은 제천으로 회군해 곧바로 충주성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선생은 당시 친일 개화파 관리로 알려진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 등 이른바 토왜(土倭)들을 참수, 친일개화정책을 펼치던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호서의 중앙에 위치한 충주는 관찰부가 있는 곳이고 더욱이 그곳에는 관군이 400명, 일본군이 수백 명, 지방군이 400명이나 집결해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게 된다면 호서를 장악함은 물론 뒤로 영남과 호남을 배경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틀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의병진은 1896년 2월 16일 의외로 쉽게 충주성을 장악하였다. 승지 우기정과 이호승이 각각 3천명, 5백명의 병력을 원조해 와 군사수는 일본군과 관군측에 비해 우세하였다. 하지만 실제 총을 가진 자는 4백여 명에 불과하여 신식 병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 비해 의병진이 전력면에서는 절대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각오한 의병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기습공격을 감행 하자, 그 기세에 눌린 관군과 일본군은 항전을 포기하고 탈주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충주성에 입성한 선생은 먼저 친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는 한편,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발표하여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또한 의병진의 세력을 확장 시키기 위해 서상렬, 원용정, 홍선표 등을 영남으로, 이범직을 호서로 파견하여 각지의 민병을 모으게 하였다. 그리하여 서상렬은 안동, 예천, 봉화, 순흥, 풍기, 영천 등지의 의병진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상주에 있는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 하였고, 이범직은 삭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백성의 원성을 크게 산 천안군수 김병숙을 처단하였다.
한편, 충주성을 빼앗긴 관군과 일본군은 성의 외곽을 포위, 의병진의 보급로를 차단시킨 채 공성작전을 펼쳤다. 그 뒤 의병진은 계속되는 접전으로 전력이 소모된 데다가 보급로를 차단당해 물자조달에 어려움이 커 더 이상 충주성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의 의병진은 3월 4일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환군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