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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이들과 모처럼 가벼운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자유로를 타고 문산 방면으로 가다보면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지나 얼마 안가 황희 선생 유적지가 나옵니다.
여기에는 반구정이란 유명한 정자가 있습니다..반구정에 대한 이야기는 신영복 선생님의 “ 나무야 나무야” 저서에서 압구정과 비교하여 쓰신 내용이 워낙 인상이 깊어서 꼭 한번 가보리라 마음을 먹었던 마음속에 숙제 같았던 곳입니다..
자유로를 시원하게 달리다 보면 파주 출판 단지를 지나 조금은 쌩뚱맞은 광경을 목격 합니다..야산사이에 배 한척이 서있는 모습입니다..이곳은 ‘아쿠아 랜드’라는 사우나 및 놀이시설을 갖춘 관광업소라 알고 있습니다.. 영업을 위한 곳이다보니 눈에 띄게 업소를 갖추어 놓고 싶은 관계자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니지만 앞으로 시원한 들판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멋진 숲이 펴져진 그곳에 굳이 어울리지도 않는 범선모양의 건축물을 세워놓은 것을 보면서 옛 우리 어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국적 미학들의 위대함에 다시 한번 감탄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정자를 하나 지어도 자연과 어울려 지었고 높이도 마루에 서면 처마 끝에서 일출이나 낙조가 잘 어울리는 최적의 높이로 지었던 소박하면서도 멋들어진 미학적 관점은 전 세계 어느 민족도 따라올 수 없었던 최고의 수준이였습니다. .
반구정은 생각보다 가까웠습니다. 황의 선생 유적지의 이정표를 보고 자유로에서 나오면 조그마한 사거리가 나오고 그곳에서 좌회전하여 왕복 2차선으로 3분만 가다보면 황희정승 유적지 주차장이 나옵니다. 주차장은 잘 정비 되어 있었고 입장료도 받지 않습니다..
관리사무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나오는데 오른쪽이 방촌기념관인데 문이 잠겨 있었고 왼쪽이 유적지로 들어가는 문이 있어 그 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황희 정승의 고손인 월헌 황맹헌 선조의 신주를 모신 월헌사가 있고 그 옆으로 황희 선생의 동상이 서있고 그 옆으로 영정을 모신 방촌영당이 있습니다. 오른쪽을 보면 두개의 정자가 나란히 서있는데 앞쪽 정자를 보니 반구정이라 써있고 뒤쪽 정자에는 앙지대라고 써 있습니다.
반구정이란 뜻은 잘 알다시피 ‘갈매기와 벗하는 정자’란 뜻으로 황희 선생이 말년에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지낸곳입니다. 앞으로는 임진강이 시원하게 흘러 가고 임진강 건너편으로 들판이 펼쳐저 있어 절로 감탄이 나오는 곳입니다. 반구정 왼쪽에 반구정 보다 조금 높이 있는 정자는 ‘앙지대’ 라는 정자입니다. 이 앙지대는 반구정이 원래 있던 자리입니다. 1915년 반구정을 지금 현 위치에 지으면서 방촌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 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앙지대 상량문에는 ‘오직 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딴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란 이름은 詩經의 好仁이라는 뜻을 취했다’ 라고 적여 있습니다.
청백리의 상징인 황희 정승을 우러르는 마음을 느낄수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신영복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언언시시(言言是是) 정승이라 불릴 정도로 시(是)를 말하되 비(非)를 말하기를 삼갔고 소절(작은 예절이란 뜻 같습니다)에 구애되기 보다는 대절을 지키는 재상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우리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면 약간은 옳고 그름이 분명치 않고 유유부단하게 느껴지는 그런 성격이 아니였나 생각됩니다.
일화에서도 그런 점을 느낄수 있습니다. 황희정승 집안 노비 두 사람이 서로 다투다 그를 찾아와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 바치자 두사람 모두에게 ‘네말이 옳다’ 라고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이 무정견을 나무라자 ‘부인의 말도 옳다’고 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황희 정승의 관직생활이 세종대왕의 문화통치기란 점을 감안 하면 원만하고 작은 일에 구애 받지 않는 곧은 선비정신을 지킨 훌륭한 정승이였슴은 분명합니다. 임진강 강가에서 갈매기와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 동네사람들도 그가 정승 대감이였다는걸 알지 못했을 정도로 청렴하고 소탈한 모습은 이 시대에서도 공무원의 자세와 모습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 합니다.
반구정을 나오면서 문화재 관리소에서 안내책자라도 얻어 가려 들렸더니 유리창으로 보니 조그만 석유 난로는 켜져있는데 관리인은 보이지 않고 문은 잠겨 있어 의아해 하면서 저 멀리서 낙엽을 치우는 일꾼으로 보이는 분에게 관리소 직원은 어디 갔냐고 물으니 잠시 저의 아래 위를 쳐다보다가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어디서 오셨냐는 질문을 던져 저를 당황케 하더니 안내책자를 얻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표정이 밝아지면서 주머니의 열쇠를 꺼내 관리사무실로 안내를 하면서 몇가지 자료를 보여주었습니다. 자료를 보는척하며 관리사무소를 들러보니 책상은 여러게 있으나 직원의 흔적은 하나뿐이여서 한명만이 근무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추운 토요일에 낡고 지저분한 작업복을 입고 청소를 열심히 하던 바로 그분이 관리사무소의 유일한 직원이였던 것입니다. 누가 보지 않아도 자신의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계셨던 그분을 보면서 역시 황희선생님 유적지 관리인 답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유적지를 나와 황희 선생님의 묘소까지 들러 보려다가 다음 코스인 화석정과 자운서원 일정이 빠듯할 것 같아서 갈매기가 노니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9월에 다시 오리라 마을 먹으면서 화석정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파주의 정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구정을 떠올릴것입니다.
저도 화석정이란 정자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누가 지었으며 누가 즐겨 찾고 마음 수양을 했던 곳인지 잘 몰랐습니다. 화석정을 반구정에서 적성 방면으로 차로 약 15분 정도 가면 문산읍 파평면에 위치에 있습니다. 차길에서 꺽어 들어가면 약간 가판른 언덕길이 나오는데 조금더 들어가면 주차할 곳이 있고 조그만한 언덕을 하나 넘으면 화석정이 나옵니다.
화석정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매점입니다. 어느 관광지 가보면 바로 입구에 매점이 있고 여러 가지 음식물들을 펼쳐 놓은걸 보고 들어갈 때부터 기분이 언짠은 경험을 다른분들도 있을것입니다. .반구정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맡는 냄새가 유적지 옆에 있는 장어집에서 흘러나오는 고기굽는 냄새로 기분을 조금 상하게 하듯이 그 매점의 첫인상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매점 앞으로 약 10m 정도의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올라가면 맨 먼저 560년이 기록된 느티나무가 반갑게 맞아줍니다. 아마 정자가 세워지면서 기념수로 심은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옆으로 화석정이 다소곧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치로 따지면 반구정에 못지 않을 정도로 시원한 전망과 굽이치는 임진강이 양쪽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입니다. 화석정은 1443년(세종 25) 율곡 이이(李珥)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란분이 세운 것을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보수하고 몽암(夢庵)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이이(李珥)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는 정자입니다.
하지만 이 정자는 사실 이 동네에서 태어난 이율곡 선생님이 어릴적부터 학문을 닦으며 수양하였던 아주 귀중한 곳입니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는 아까 말씀드린 매점 아저씨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입니다. 아이들이 음료수를 먹고 싶어서 매점에 들러 음료수를 사면서 화석정과 이율곡 선생님과의 관계를 물었더니 이 마을이 바로 이율곡 서생님이 태어난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동네 이름도 율곡리라 말씀하시면서 정자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신 율곡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가지 강릉 오죽헌이 율곡 선생님이 태어나신 곳으로 알고 있었기에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곳이 정말 율곡 선생님이 태어나신 동네이고 율곡선생님의 학문적 기초가 닦여진 곳이라면 반구정보다도 더 역사적 의의가 있는곳인데 유적지로서 아무런 정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 말씀드렸더니 후손들이 변변치 못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황희정승의 후손들은 다 잘되서 현재에 유적지로서 대우를 받을수 있을 만큼 힘을 가졌지만 이율곡 선생님은 정실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해 대가 실질적으로 끊겼고 그 후로도 덕수 이씨氏에게서 그 흔한 국회의원 한명도 없어서 문화재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옆에 여러 율곡선생의 저작을 만화나 한글로 풀어놓은 책들을 가리키면서 이책들도 전부 외가쪽인 신氏 문중에서 만든것이라며 가문의 몰락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또 자신의 가슴에 붙어있는 문화재 명예관리자 란 명찰을 가르키면서 자신도 신씨라면서 그래서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15년동안 이곳에서 매점을 관리하면서 문화재 관련 공무원들이 단 한번도 관심을 갖어 주지 않았다면서 문화재 사업을 비판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비록 이씨 후손도 아니지만 조그마한 매점을 운영하면서도 율곡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문화재에 대한 애정을 지니신분을 보니 화석정을 지키는 또 하나의 느티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석정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율곡서냉님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임진강 나루의 화석정을 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마루를 닦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으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하며 봉투를 하나 남겼다고 합니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피신을 가다가 임진나루에 도착하였을때 비바람이 치고 어두워 앞을 분간 할 수 없을때 대신중 한명이 율곡이 남긴 봉투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석정에 불이 붙자 나루근처가 대낮같이 밝아서 선조임금이 무사히 강을 건널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율곳 선생님이 십만양병설을 주장 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정자의 이름이 화석정이라서 매우 그럴듯하게 들리는 설화입니다..
대가 끊인 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가문의 힘있는 후손이 없어서 그런 것 인지는 몰라도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화석정은 꼭 한번 방문을 권해드리고 싶은 곳입니다. 물론 재미있는 설화도 있고 경관과 풍경도 멋지지만 방문을 권해드리는 이유는 정자 옆으로 당시 8세때 이율곡 선생님이 지으신 ‘화석정’ 이란 시가 비문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대에 한글로 새겨놓은 것이지만 8세살 때 이처럼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 있었다니 21세때 장원급제 하고 당대 최고의 학자로 성장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8살인 저의 개구쟁이 큰 아들과 비교해보면 당시 이율곡 선생님의 부모님은 얼마나 뿌듯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걸 보니 저도 이제 학부모가 된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화 석 정>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숲속 정자에는 이미 가을이 깊었는데, 나그네 회포는 끝 간데 없네
멀리 강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내린 단풍이 해를 향해 더욱 붉다.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었어라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날아 가는고? 울음소리조차 저녁 구름속에 그쳐라
화석정을 나와 법원리 쪽으로 8km 정도 들어가면 자운서원이 나옵니다.
자운서원은 1615년(광해군 7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어 1650년(효종 원년) 자운(紫雲)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건축된 곳입니다.
1713년(숙종 39)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지방 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여 1975년과 1976년에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곳입니다.
자운서원에 들어서면 잘 정비된 주차장에 먼저 도착하게 됩니다. 그 앞으로는 국가 연수원인지 사설연수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5층 높이의 벽돌로 잘 지어진 율곡교육연수원이 있습니다. 자운서원 정문을 들어서면 먼저 왼쪽에 관리사무실이 있습니다. 입장료 안내문을 보니 어른 1,000원 청소년 500원이란 안내문이 있으나 징수하지는 않았습니다.
맨 먼저 가본곳은 왼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화장실입니다. 아이들이 가고 싶다고 해서 서둘러 들어갔습니다. 화장실은 참 깨끗이 관리되고 있었고 휴지도 안에 잘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관광지를 가더라도 화장실 관리가 엉망이면 외국사람이 와서 뭐라 생각할까 하며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데 깨끗한 화장실을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화장실을 나와 관리실 방향으로 다시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조금 높은 곳에 율곡 이이선생 신도비에 먼저 가보았습니다. 이 신도비는 대학자요 문신인 율곡 이이의 일대기를 담은 귀중한 금석입니다.
이이선생이 죽은 지 47년이 지난 1631년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이항복이 짓고 신익성이 쓴 멋진 금석입니다. 이항복은 제가 어릴 적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했던 인물 이였습니다. 이 덕형과의 우정은 오성과 한음이란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정여립의 옥사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면 정치적 입장으로 보면 그다지 훌륭하지는 않았으나 어릴 적 좋아했던 사람이고 오랜만에 만난 이름인지라 반가웠습니다.
신도비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전후면 모두에 글이 새겨졌 있는데 정말 안타까운 점은 앞면에 한국전쟁 때로 추정되는 탄흔이 한두 개도 아니고 여러 개가 있어 멋진 신도비가 훼손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이 선생님의 높은 학문적 업적도 전쟁을 피해가지는 못했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깨어진 대리점의 아픔이 우리 민족의 아픈 근현대사를 대변해주는 것 같습니다.
신도비를 내려와 중앙으로 올라가면 율곡선생과 신사임당의 유품이 전시되었다는 율곡 기년관이 있으나 반구정처럼 역시 이곳도 내부수리란 이유로 개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림의 뛰어난 실력을 가진 신사임당의 작품들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사라져 매우 아쉬웠습니다. 기념관에서 위로 올라가면 조그마한 연못이 나오고 그 옆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이이선생님을 비롯한 가족 묘지로 향하는 길입니다.
보통 왕릉이나 커다란 묘는 큰 규모와 어울리는 경관과 자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파주 용미리에 있는 윤관장군 묘와 봉일천에서 하니랜드 방향에 있는 공, 순,영릉 서삼능등은 적어도 10번 이상씩은 가보았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그 특유의 고즈라한 정취에 흠뻑 젖어 조용히 감상하다 돌아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 크지 않은 봉분과 가족들이 같이 모여 있는 조그마한 가족묘에 이렇게 진한 감동을 받은 것은 처음입니다. 자운서원을 이곳에 세운 이유가 바로 이 묘지들 때문이란 걸 알게 해주는 아주 멋진 곳입니다. 춥다는 아이들을 먼저 차로 돌려보내고 묘지는 저 혼자 들어갔습니다. 묘지를 알려주는 문을 지나면 먼저 약 50개 정도의 돌계단이 나옵니다. 돌 상태를 보니 계단을 만든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계단을 다 오르면 묘지 전경이 훤히 보이는 데 얕은 야산의 계단식으로 위부터 아래로 가지런히 묘들이 이고 왼쪽으로는 위쪽 묘지로 올라가기 펴나도록 돌로 정비 되어 있습니다. 정말 멋진 모습은 묘지 양쪽으로 우거진 나무숲이 마치 묘지를 보호 하듯이 둘러 쌓여 있고 맨 위쪽 묘지 위로 파란 하늘과 낮달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왕릉처럼 화려 하지 않지만 단정하게 가족끼리 부모 형제 뿐 아니라 출가외인이 엄격했던 그 당시 환경을 생각해 볼 때 파격적인 것 같은 누이부부묘 합장묘까지 정말 사이좋게 나란히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도 그렇게 화목하고 정이 넘치는 집안 이였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율곡 선생 묘 앞에서는 문신을 나타내는 상이 양쪽으로 서 있고 오른쪽에 서있는 비문도 아주 멋들어지게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도 있었습니다.. 보통 가묘를 쓸 때는 제일 윗 어른 분 그러니까 이원수선생과 신사임당 부부의 합장묘가 제 위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맨 위에는 율곡선생님의 부인이신 노씨의 묘가 있고 부모님의 묘가 아래쪽에 있다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보통 부부들끼리는 같이 합장하거나 아니면 나란히 묻는 것이 관례로 알고 있는데 부모님의 묘나 율곡선생님의 형님 내외분들은 전부 합장을 했는데 이율곡 선생님의 묘와 부인 노씨의 묘만 별도 있었고 그것도 같이 나란히 있지 않고 아래위로, 그러니까 아내의 묘와 맞닿게 바로 율곡 선생님이 묘가 붙어 있다는 점입니다.
조선시대 가례와 제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궁금점을 남기고 왔으나 혹시 아시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서둘러 둘러보고 내려왔으나 다시 한번 꼭 가보고 싶을 만큼 남다른 정취가 있는 곳입니다. 특히 가운데 묘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사이에 도란도란 모여 있는 가족묘, 그 위로 파란 하늘과 낮달이 서로 어우러져 있는 모습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묘지에서 내려와 오른쪽으로 가면 지금의 자운서원을 있게 만든 자운 서원이 나옵니다. 서원 앞에는 서있는 솟을삼문 왼쪽에는 자운서원의 묘정비가 있는데 묘정비란 것은 일대기를 기록한 신도비와 달리 덕과 학문적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만든 비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숙종 때 세운 묘정비가 있고 그 옆에 현대에 재건하면서 쓴 대리석에 양각된 철판을 박아 세운 묘정비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다. 너무나 대비되는 두 묘정비에서 당대의 명필로 소문난 김수증 쓴 예서체의 글씨와 철 주물로 만든 현대의 묘정비의 글씨를 꼭 비교해 보길 바랍니다.
특히 김수증의 묘정비의 글씨는 어디 하나 나무랄 대 없이 첨보는 순간 탄성이 나올 정도로 예서체의 교본처럼 정말 잘 쓴 글씨이기에 묘정비를 본 것만으로도 자운서원의 매력을 접할 수 있습니다.
솟을삼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가운데 자운선원이란 사액이 걸린 중심건물 양 옆으로 화석정에서도 보았듯이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습니다. 아마 이 나무들은 율곡선생님의 후학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정진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와 왔을 것 입니다. 그리고 낭랑한 글 읽는 소리는 수백 년간 듣고 자란 나무 일 것 입니다. 아마 사람처럼 과거를 보았으면 급제는 쉽게 했을 것입니다.
자운서원을 끝으로 오늘의 외유를 마감 했습니다.
이율곡선생은 이기통국설을 주장한 학자이기 이전에 현실적인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실천적인 관료였습니다. 또한 어려운 백성에게 곡식을 꾸어주는 사창을 설치하고 형편에 따라 쌀, 무명, 생선 등으로 세금을 걷는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들의 어려운 살림을 개선코자 노력한 정치가이기도 합니다. 황희선생과 더불어 파주가 배출한 훌륭한 위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주위에 이러한 위인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들이 많습니다. 이런 곳이 어디 파주뿐이겠습니까. 전국 어디에 가도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업적과 숨결이 없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러한 위인들의 생각을 잘 다듬어 현실의 우리의 갈 길을 찾는 지혜는 이젠 순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미래로 가는 길을 오래된 과거에서 찾는 일은 역사가들만의 의무는 아닐 것입니다. 미래를 열어가야 할 모든 현대인들의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인 것 같습니다.
2004. 02. 20
첫댓글 눈앞에 있는듯... 자세한 답사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