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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人说人生如梦 快乐欢喜 有人说人生如云 欢聚悲离 哈, 虽然是各有各的人生观 我浪视悲欢的人生 欢聚的时候手牵着手 悲离的时候分开了手 孤独一个忧伤的喝着苦酒 孤独一个把烟卷拼命的抽 哈, 虽然是各有各的人生观 总归是悲欢的人生 有人是得意洋洋过了一生 有人是迷迷糊糊混了一世 哈, 虽然是各有各的人生观 我浪视悲欢的人生 我不怕贫穷我挣劳力 我不怕困难鼓足勇气 当这个世界使我转运 荣誉的宫殿我怎不去 哈, 虽然是各有各的人生观 我找寻快乐的人生 当这个世界使我转运 荣誉的宫殿我怎不去 [내사랑등려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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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산 그 옆에 있어요 ( 덩리쥔 제10년의 진상)-----有田芳生 저술
우리집은 산 그 옆에 있어요 테레사 텐 10년째의 진실 문예춘추 2005년 3월
第1章 想い出の余白
第2章 ふたたび
第3章 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
第4章 悲しい自由
第5章 冬のひまわり
第6章 春を待つ花
제1장 추억의 여백
제2장 다시
제3장 세월이 흐르는대로 나를 맡긴채
제4장 서글픈 자유
제5장 겨울의 해바라기
제6장 봄을 기다리는 꽃
[要旨]
요지
「つぐない」「愛人」「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などのヒット曲で愛された歌手テレサ・テンが旅行先のタイで急死してから十余年。スパイ説、中国政府の罠、天安門事件との繋がり…残された謎の数々。本当の死因は何だったのか?中国と台湾の現代史の狭間で翻弄されながら歌に生きた「アジアの歌姫」の真実。
10 여년. 간첩설, 중국정부의 음모 , 천안문사건과의 연관...남겨진 수수께끼의 여러가지. 진실된 사인은 무엇이었던가?
중국과 대만의 현대사의 틈새에서 우뚝 서서 존재감을 유감없이 들어내면서( 원문: 翻弄되면서 )노래로 살았던 아시아의 여가수 의 진실.
역주:翻弄.......객관적이지 않은 단어로 생각됨
제1장 추억의 여백
프랑스의 가을날이 빨리 왔다.
공기가 건조한 여름철이 끝나고 9월이 오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맑고 상쾌한 가을철이 되었다. 세계 여러나라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원인은 당연히 프랑스가 매우 많은 역사 유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자연경관이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阿尔查尔·蓝波는 일찌기 어찌하여 이 아름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아름다운에 놀라게 할 수 있나? 하며 이 곳의 자연을 그려냈었다.
布达拉斯와 罗马尼惠를 둘러싸고 있는 상젤리제 거리와 여유롭게 흐르는 세느강가에서 대체로 1989년 부터 93년 동안 4년간 일찌기 등려군 소저가 이 근처를 산책하는 것을 보고 하였다. 등려군 소저는 분홍빛깔의 외투를 입고 천천히 이 거리를 걸어 다녔으나 그녀가 아시아에서 널리 알려진 대 스타라는 것을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했다.
개선문에서 출발한 뒤 상젤리제 거리를 향하여 凯格尔광장을 바라보며 가면은 福兰克林· 路易士贝尔 거리가 교차하는 길 끄트머리에 닿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세느 강에 놓여있는 阿尔玛다리를 지나는 이 蒙特罗거리도 파리의 20개 구 가운데 8째 구이다.
이 거리에는 상젤리제 극장과 붉게 타오른 꽃들이 피어있는 처마가 있는 고급호텔들이 있다; 거리 양옆에는 샤넬,루이뷔통,크리스챤디올...등 고급 명품점이 있어서 파리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가라고 할 만 하다.
罗马尼惠를 따라서 옅은 녹색의 가로수 길을 천천히 걸으면 나는 이 곳을 확실히 알고 있어요. 몇채의 건물을 지나치면 바로 내가 찾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아파트-------蒙特罗거리의 8호 이다. 관리인과 몇 번 이야기를 한 뒤에 직접 넓다고는 할 수 없는 홀로 들어가 길 끄트머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바깥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뒤 6층을 누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 천천히 올라가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출때 거의 어떤 진동도 없으며 엘리베이터 문이 저절로 열린 뒤에 곧바로 외짝문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등려군 소저가 일찌기 살았던 2개 방과 2개의 홀이 있는 아파트이다.
등려군 소저는 1987년 홍콩의 赤柱에 집을 산 뒤에 이집을 작업하는 주요한 곳으로 생각하였으며 여자 제작자인 麦소저와 81년에 개설한 TNT 制作公司를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이 제작 회사는 오리지날 녹음 테이프 관리, 영상의 권리, 그리고 회계처리를 하였다.
등려군 소저는 일찌기 늘 이처럼 이야기를 하였는데 홍콩에서는 언어의 벽이 없고 매우 맛있는 중국요리가 있으며 자유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일찌기 영화 《慕情》으로 인하여 유명해진 천수만에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에 녹음실을 만들 생각을 계획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등려군 소저는 갑자기 홍콩을 떠났는데 가장 믿던 어머니와도 의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파리에서 머무를 곳을 찾았는데 사실
이것은 등려군 소저가 넉달을 쓰면서 여러 면으로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一九八九年十一月离开香港的她,在从凯旋门走路约十分钟路程的 佛布尔·桑·多诺雷大道二三0 番地,租了附家具的一房一厅公寓,之后在一九九0 年六月买下蒙特罗大道的公寓。到底是什么样的原因让喜爱香港的邓小姐,决意搬到语言不通的巴黎生活呢?
1987년 11월 홍콩을 떠났던 그녀는 개선문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佛布尔·桑·多诺雷거리 230번지에서 가구가 딸린 방 하나 거실 하나의 아파트를 빌렸다. 이뒤로 1990년 6월에 蒙特罗 거리의 아파트를 사게 된다. 도대체 무슨 까닭에 홍콩을 좋아하는 등려군을 말도 통하지 않는 파리 생활로 이사할 결심을 하게 하였나?
문을 들어서면 입구의 중간에는 원형의 대리석 탁자가 있는데 그위에 중국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景德镇에서 만든 清白壶 자기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는 바로 응접실인데 약 6평 정도이고 한 가운데에 표범 무늬의 소파가 놓여져 있으며 곁에는 전자 오르간과 하얀 빛깔의 음향기기가 있고 또한 수많은 CD가 놓여있다. 두개의 아마 빛깔의 소파가 있고 한 켠에는 작은 흰빛의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전화와 青瓷壶가 놓여 있으며 게다가 탁자 위에는 많은 등 소저의 편지들이 가득 쌓여 있다. 응접실에 이어서 안으로 들어 가면 바로 침실이다, 鲜紫色의 침대보가 덮혀져 있는 이인용 침대에는 분홍빛깔의 베개가 놓여 있다. 침대 곁에는 작은 탁자가 있는데 골동품 등불이 놓여 있고 등불 아래에는 《证严法师静思语》가 놓여 있다,바닥에는 흰색 레이스 오색끈의 분홍빛깔의 밀짚 모자 전용 함이 있다.
邓小姐最喜欢的颜色是粉红色,因为她深信粉红色是会招来幸福的颜色。寝室的窗帘是粉红色的蕾丝布做的,每个房门也都是粉红色的,墙上的横木也漆成了粉红色,浴室的瓷砖也贴粉红色,连浴巾都是粉红色的……所有的东西都是粉红色的;除了白色的墙面之外, 房子里到处都有她坚持的喜好,连停在地下室的速可达机车也漆成粉红色。
등려군 소저가 가장 좋아하는 빛깔은 분홍빛인데 왜냐하면 그녀는 분홍빛은 행복을 불러올 수 있는 빛이라고 깊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침실의 창문 커튼은 분홍빛의 레이스 천으로 만든 것이고 모든 방문도 모두 다 분홍빛이다. 벽에 가로로 걸려있는 나무도 분홍빛으로 칠하여져 있다. 욕실의 타일도 분홍빛으로 붙여져 있으며 욕실 수건 조차도 모두 분홍빛이다.......가지고 있는 물건은 모두 다 분홍빛이다. 흰빛의 벽이외에는 방안의 모든 곳이 그녀가 고집하는 좋아하는 것들이다. 지하실에 멈추어 있는 速可达 자동차도 분홍빛으로 칠해져 있다.
进入她约三坪大的工作间,往窗外可见到青翠的白杨树林,及文静的马路,连房内的椅子和单人床被单也都是粉红色。靠窗边的桌上,右手边放着白色的电话,中间则是放着一台限定版的powerbook 170 多彩苹果电脑,左边则放了本中国语辞典和《曹雪芹别传》,以及一本查理布朗的漫画,还摆放着计算机、订书机、墨水、印章、修正液,透明笔架里放有原子笔、糨糊、紫色的梳子等……
그녀의 약 3평 크기의 작업실에 들어가 창가로 가니 바깥에 새파란 백양 수풀과 그리고 차분한 대로를 볼 수 있다. 방안의 의자와 일인용 침대보 조차도 모두 분홍빛이다. 창가의 탁자에 기대면 바른 손 켠에 흰색의 전화기가 놓여져 있고 가운데는 한정판의 powerbook 170 多彩苹果电脑(apple computer)가, 왼쪽에는 중국어 사전과 《曹雪芹别传》이 놓여 있고,그리고 查理布朗(찰리 브라운) 만화책 한권, 또 계산기,스테플러, 잉크, 도장, 수정액, 투명한 필통에는 볼펜, 풀, 보라빛 빗등이 있다............
望向白色的书柜用蓝色及紫色的书架作区隔,当中夹着带着帽子的兔子摆饰,然后有津本阳写的《夏天梦》、大友克洋的漫画《AKIRA》、逃亡到法国的学者所写的《政治多么简单》、法语字典、高阳的历史小说《延陵剑》、《五陵游》、《茂陵秋》等书,最显眼的是一整套十册精美的古典诗集──
흰빛의 책장과 파란빛그리고 보랏빛으로 칠한 책곶이로 나뉘어진 것을 바라보면 그 가운데에 모자에 달려 있는 토끼 장식이 있고 이어서
津本阳이 쓴 《夏天梦》、大友克洋의 만화《AKIRA》、프랑스로 도망친 학자가 쓴 《政治多么简单; 정치는 너무나 간단하다》,프랑스 사전, 高阳이 쓴 역사 소설《延陵剑》、《五陵游》、《茂陵秋》등이 책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세트 10권의 아름다운 고전 시집
이다.
《宋诗选》、《唐诗选》、《清诗选》,歌手邓小姐极力追求独特世界的秘诀就在这些诗集里。大概在她三十岁左右,产生了希望将来能唱自己作词的歌的想法,而并排在此的古典诗集对邓小姐而言,就是通往梦想实现的道路。
《宋诗选》、《唐诗选》、《清诗选》,가수 등려군 소저는 힘을 다하여 이런 시집안에 있는 독특한 세계의 비결을 추구하였다.
대체로 그녀는 30 전후에 장차 자기가 작사한 노래를 부를 생각이 이루어지를 바랬었다.뿐만아니라 이곳에 진열된 고전 시집을 등려군 입장에서 보면은 바로 꿈을 실현하는 길로 이어지는 길이다.
让她对中国古典诗词产生极大兴趣的契机是在制作《淡淡幽情》专辑开始的,这张专辑的制作企划就是将南唐、宋朝的古诗词,请作曲家编曲而成。想出这个主题企划的是一家广告公司的社长谢宏中先生。在一九七九年秋天的某夜,谢先生正在书房了抄写李后主的诗词时,有位女士跑进来,拿起词就朗朗的读起来。谢先生被这抑扬顿挫的优美声音所吸引,心里突然有了一种想法,就是将古诗词谱上现代的音乐来唱。谢先生先将李后主的《乌夜啼》谱上曲子后试唱,录过音之后再听,感觉很不错,之后谢先生重编了十首诗词录制成《淡淡幽情》专辑。
중국 고전 시와 노래에 대하여 등려군이 가장 커다란 흥미를 가지게 되어서 《淡淡幽情》 앨범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 앨범의 제작과 기획은 바로 남당, 송나라의 옛 시와 노래를 가지고 작곡자에게 부탁하여서 편곡을 하여서 만든 것이다.
이 주제를 생각해 내어서 기획한 것은 한 광고 회사의 사장 谢宏中 이다. 1979년 가을철 어느 날밤 谢宏中 는 마침 서실에서 李后主의 시와 노래를 베껴 쓰고 있던 중 한 여자분이 들어 오더니 그 노래를 들고서는 명랑하게 읽기 시작하였다. 谢宏中 은 이 소리나 말이 높낮이와 곡절이 조화롭고 음률미가 있고 다채로운 아름다운 목소리에 빠지게 되었는데, 마음속에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옛 시와 노래를 현대식의 음악으로 노래할 수 있게 가사를 붙이게 할 생각이었다. 谢宏中 은 李后主의《乌夜啼》를 곡조에 가사를 붙여서 노래를 불러 보았다 .그리고 다시 녹음을 한후 들어 보았는데 느낌이 아주 좋았다. 이 뒤로 谢宏中 은 다시 10여 수의 시와 노래를 편곡하여서 《淡淡幽情》앨범을 녹음하여서 만들었다.
原本诗是由 四言、五言、七言的韵文而成,但词则不受此限,可以有很多的俗语的表现,算是中国文学的一大特色。谢先生立刻向音乐界的许多人提案此构想,而且试唱《乌夜啼》,但反应却非常的冷淡,但谢先生并没有放弃。
본래 시는 四言、五言、七言의 韵文으로 되어있는데 词 라는 노래는 이런 제한이 없어서 아주 많은 속된 표현이 될 수 있어서 중국문학의 커다란 특색이라 할만하다. 谢선생은 곧바로 음악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을 제안하고 《乌夜啼》을 시험삼아 불러 보았지만,반응은 도리어 매우 차가왔다. 그러나 谢선생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经过一年之后,一九八0 年秋天,谢先生在某个聚会上遇到邓小姐,就在当时向邓小姐提出《淡淡幽情》的构想,当时邓小姐显得很感兴趣,因此立刻跟香港宝丽金唱片公司老板郑东汉提案,企划成立,大概就在入秋之后吧,邓小姐、谢宏中、郑东汉及制作人邓锡泉四个人就在香港的雷格尔斯贝依饭店的咖啡厅,进行具体的讨论。讨论的内容大都集中在如何用现代音乐去表现宋代古诗词,以及如何去延续被遗忘了的中国文化等话题。之后请香港和台湾的作曲家们来作曲,就在一九八三年二月二日发行了《淡淡幽情》专辑。
1년이 지난 뒤 1980년 가을 谢선생은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등소저를 만나자 그때 등소저에게 《淡淡幽情》의 구상을 이야기 하였다. 그때 등소저는 매우 흥미를 보여 주었는데, 이리하여 곧바로 홍콩의 宝丽金음반회사의 사장인 郑东汉에게 제안을 하였으며 기획이 시작되었다. 대략 가을로 들어 서면서 등소저, 谢宏中、郑东汉그리고 제작자 邓锡泉 모두 4인이 홍콩의 雷格尔斯贝依 호텔의 커피점에서 구체적인 토론을 진행하였다. 토론한 내용은 대부분 어떻게 현대 음악을 사용하여서 송나라의 옛 시와 词 라는 노래를 표현할 수 있는 가와 그리고 어떻게 중국문화등등의 고사를 잊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가에 집중되었다.이런 뒤 홍콩과 대만의 작곡가들에게 작곡을 부탁하였고 마침내1983년 2월 2월 《淡淡幽情》전집이 발행되었다.
歌曲里飘着淡淡的哀愁,有时像在呢喃的唱法,但是有时又清扬动人的声音,像当在吟唱亡国的李后主所吟的《独上西楼》,就充满了无奈的情怀。专辑里一共收编了宋朝的苏轼、柳永、欧阳修等十二首歌曲,其中有三首是李后主的作品,之后又加上中国画家单祐钦描绘代表十二首歌的精神画作,以及邓小姐古装照作成的小册子,也引起很大的回响。
노래속에는 담담한 애처움과 슬픔이 떠돌고 떄로는 마치 속삭이는 것같은 창법도 있지만 떄로는 아름답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목소리도 있다. 마치 망국을 넋두리하는 듯 李后主가 부르는《独上西楼》는 , 어찌할 수 없는 심정으로 가득히 채워져 있다.
전집속에는 송나라의 苏轼、柳永、欧阳修등 모두12 수의 노래가 편집되어 들어 있다.이 가운데 3수는 李后主의 작품이고 이뒤에는 중국 화가 单祐钦가 그린 12 수의 노래를 대표하는 그림 그리고 등소저의 옛 복장을 찍은 작은 책자 있는데 또한 아주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专辑发行后,台湾的电视台“台视”还制作了《淡淡幽情》特别节目。当时企划内容是邓小姐身着古装唱歌,所以邓小姐本人也参与挑选服装,光是录影就花了三天的时间。后来邓小姐因为年轻人听过专辑过后自然会背唐诗、宋词而感到兴奋不已,让她觉得很有意义的就是将教科书上难懂的唐诗宋词借由歌曲就能简单记住。这让邓小姐在三十岁过后还能得到香港的唱片大奖“年度大碟”,甚至一九九0 年在日本发行,被誉为“最梦幻的大碟”,名音乐评论家中村东洋先生还称此专辑为“邓丽君在音乐领域上最杰出的作品”!
전집이 발행 된 뒤 대만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대만 텔레비전은 또한 《淡淡幽情》이라는 특집방송을 하였다. 당시 기획 내용은 등소저가 옛 옷을 입고 노래하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등소저는 스스로도 옷을 고르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촬영하는데 겨우 3일의 시간만 썼었다.
뒤에 등소저는 젊은이들이 이 전집을 듣고는 저절로 당시와 송사를 외우게 되자 감격하여서 흥분을 가라않지지 못하였다.
그녀에게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여서 교과서에 알기 어려운 당시와 송사를 노래에 붙이면 쉽게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다.이것이 30살이 지나가는 등소저에게 또한 홍콩의 음반 대상 年度大碟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더 나아가 1990년에 일본에서 발매가 되었는데 , 가장 몽환적인 CD라고 불리웠으며 유명한 음악평론가 가운데 村东洋선생은 또한 이 전집을 “邓丽君在音乐领域上最杰出的作品”(음악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등려군의 작품)이라고 칭송하였다.
所以邓小姐一直很希望能出续集,在一九九0 年亲自替专辑命名为《春梦秋云》,是将李白夸赞盛唐时代的《清平词》里选出三首来作曲,加上金末及北宋诗人的作品一共预定收录十五首歌,而且已经收歌完毕,音乐的录音制作也完成了,但邓小姐录唱完成第一首歌《问世间情是何物》之后就暂停制作。
그래서 등소저는 쭉 속집을 내기를 매우 바래서 1990년 스스로 앨범이름을 《春梦秋云》이라고 정하였는데,이것은 李白이 성당 시절을
크게 찬양한《清平词》속에서 3수의 노래를 골라서 작곡을 하였다. 게다가 금나라 말기 그리고 북송시절의 시인의 작품 모두 15수를 수록할 예정이었고 게다가 이미 노래도 완전히 준비가 되었고 음악의 녹음 제작도 다 끝났으나 등소저가《问世间情是何物》라는 첫번째 노래를 다 녹음한 뒤에 제작이 잠시 멈추어 졌다.
没有完成此专辑的理由是邓小姐喜欢挑选出来的词,但对作曲的部分却不满意,据当时的工作人员表示,邓小姐说《淡淡幽情》是表现中国味,第二张她想加入现代感,而且邓小姐还预定到牙买加录音,制作这张专辑。
이 앨범이 완성이 되지 못한 까닭은 등소저가 노래를 고를 시간을 바랬기 때문이지만 작곡가에 대한 부분도 오히려 만족스럽지 않았다. 당시의 작업한 사람들의 의견에 의하면, 등소저는 《淡淡幽情》는 중국의 맛을 표현한 것이라, 두번째 앨범은 그녀가 현대적 느낌을 더할 생각이었뿐만 아니라 등소저는 또한 자메이카에 가서 녹음을 하여서 이 앨범을 제작할 예정이었다고 말하였다.
邓小姐也尝试着自己写词,在法国的公寓里找到几篇邓小姐留下的词,譬如用铅笔写在B4 稿纸上的《冬夜里吹来一阵春》,是属于抒情的词。但若以写词呈现比较成熟的作品, 则是留在香港住所里的文章。邓小姐在橘色横条的笔记本上誊写了十六行的词,在她过世之地──泰国清迈的饭店里找到的咖啡色卡地亚的皮革笔记本里也记载着:
등소저는 또한 시험삼아 자기가 가사를 써봤는데 프랑스의 아파트에서 여러 편의 등소저가 남긴 词가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연필로 B4용지에다 쓴《冬夜里吹来一阵春》것은,서정적인 词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쓴 词중에 비교적 성숙한 작품을 든다면 홍콩의 집에 남겨진 글이다. 등소저는 귤색의 가로쓰기의 필기책에 16행의 词를 옮겨적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곳---태국의 치앙마이의 호텔에서 찾은 커피 빛깔의 卡地亚(Cartier) 가죽 필기책에서도 쓰여져 있었다.
往事不堪思,
지난 일은 차마 그리워할 수 없고
世事難預料,
세상 일은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워라
莫將煩惱著詩篇,
마음의 근심을 시로 쓰지는 마라
夢短夢長同是夢
꿈이 짧든 꿈이 길든 모두 다 꿈이라..
一切都是爲了年少的野心,
이 모두 다 젊은 야심을 위한 것이니
身世浮沈溟雨打萍,
정처 없는 이 신세, 부평초가 비를 맞고 있네
天涯何處有知己,
하늘 저 멀리 어딘가에 참 벗이 있을 진데
只愁歌舞散化作彩雲飛.
그저 노래와 춤이 흩날리어 오색구름이 되어 떠도는 걸 걱정만 하네..
一切都是爲了如水的柔情,
이 모두 다 물처럼 따스한 마음씨를 위한 것이니
不妨常任月朦朧,
아무리 달이 뿌옇다 하더라도 언제나 거리낄 것이 없네
爲何看花花不語
어찌 꽃들을 보더라도 말이 없나
是否多情換無情,
다정함이 무정함으로 변했단 말인가..
燭火無語照獨眠,
외로운 불빛이 말 없이 홀로 자는데 비추니
愛情苦海任浮沈,
사랑은 아무리 부침이 있다 하더라도 고해일 뿐이네
無可奈何花落去,
어찌 할 수 없이 꽃들이 떨어져 지니
唯有長江水默默向東流.
그저 기나긴 강물은 말없이 동녘으로 흐르기만 하네..
往事不堪思,
世事难预料,
莫将烦恼着诗篇。
梦短梦长同是梦。
一切都是为了年少的野心,
身世浮沉雨打萍,
天涯何处有知己,
只想歌舞散化作彩云飞。
一切都是为了如水的柔情,
不妨常任月朦胧。
为何看花花不语,
是否多情换无情。
烟火无语照独眠,
爱情苦海任浮沉。
无可奈何花落去,
唯有长江水默默向东流。
这首带着哀伤的词,后来由三位作曲家谱成《星愿》。如果这首词是邓小姐描述自己内心情境的话,为何邓小姐会感到如此的孤独落寞呢?
이노래는 애절하고 서글픔을 지닌 詞로 나중에 3부느이 작곡가가 곡을 붙여서 《星愿》으로 만들었다。만일 이 노래가 등소저가 스스로의 속마음의 심정을 그린 이야기라면 어쨰서 등소저는 이처럼 외롭고 쓸쓸함을 느꼈는지요?
在日本一提到邓丽君,就是家喻户晓、卡拉OK 演歌一定名列前十名的人气歌手,即使她过世之后的一年里,光是《偿还》这首歌,就被点唱了约三百万次,换算之后等于一天几乎有八千个人唱过这首歌。不只如此,邓小姐还唱红了比《偿还》更红的《任时光流逝》、《爱人》、《离别的预感》……等无数名曲。邓小姐虽狭隘地被定义为一名演歌歌手,但是邓小姐的成就是遍及全中华圈,甚至遍及全世界的。若单看她在日本的表现的话,就会扭曲她整体的成就。
일본에서 등려군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가라오케 엥카는 언제나 top 10 안에 드는 인기가수 이다. 설령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일년 뒤에도 단지 《偿还》이노래가 약 300만 차례나 불리워지었는데 환산하여 보면은 하루에 거의 8000 명 정도가 이노래를 불렀다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것이외에도 등 소저는 아직도 《偿还》보다 더 인기가 많은《任时光流逝》、《爱人》、《离别的预感》……의 수많은 명곡이 있다. 등소저는 비록 좁게는 엥카 가수라고 말하여지지만은 등소저의 업적은 보편적으로 전 중화권에 두루 퍼져 있고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만일 그녀가 일본에서만 한 것을 보게 되면은 그녀의 온전한 성취를 왜곡할 수 도 있다.
而且在现实生活里,她不只是在音乐上有所展现,对政治也抱以强烈的关心,她香港的友人提到邓小姐常论及政治的话题,如“美国总统的演讲,有许多错误”,也常针对中国和台湾的国际关系作论述。也会跟工作人员谈到日本自民党萧条不振时,“细川首相很不错, 但自民党却不好”之类的评语。
게다가 현실 생활에서도 그녀 음악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정치에 대해서도 강렬한 관심을 들어 내었다. 그녀의 홍콩 친구들은 등려군이 언제나 정치적 화제를 토론하였다고 이야기 하였는데 예를들면 미국 대통령의 연설에 많은 오류가 있다는 등 , 언제나 중국과 대만의 국제 관계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다. 또한 작업하는 동료들과 일본의 자민당의 부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는 ,“细川(호소카와)首相은 매우 좋은데 자민당은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하는 등의 평을 하였다.
她对政治的热中,可说是因为她生长的台湾处于特殊的国际关系,以及特别的年代背景下自然孕育出来的。邓小姐身为亚洲巨星,令人感到华丽活跃,但她的精神如果我们只看表面,说不定会有相当多的差异!
그녀는 정치에 대한 정열은 그녀가 자란 대만이 처한 특수한 국제 관계와 특별한 시대적 배경 아래에 자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등소저는 아시아의 대 스타로서 사람들을 화려한 활동에 감동하게 하였으나 그녀의 정신에, 만일 우리들이 단지 겉 모습만 본다면 아마도 단언 하기 어렵지만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二
一九九二年七月二十二日,邓小姐为了宣传新歌《爱的阳光》(愛の陽差し~アモーレ. ミオ),以及二十四日要参加在广岛举行的音乐祭演出而赴日,满脸笑容,亲切地和我握手, 穿着粉红色的裤装,长发及肩,满脸春风,给我的印象是非常的开朗。
1992년 7월 22일 등소저는 신곡《爱的阳光》(愛の陽差し~アモーレ. ミオ)을 홍보하기 위하여,그리고 24일 히로시마에서 개회되는 음악제 공연에 참가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지으며 친절하게 내게 악수를 하였는데,분홍빛 바지를 입고 긴머리는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으며 얼굴에 밝은 표정이 나에게 준 인상은 매우 명랑한 것이었다.
“因为变胖了,所以正在努力减肥中呢!”邓小姐一开口就这样说。虽然不是很道地的日语,但说话的声音令人感到清澈温柔的舒服。
这年在广岛举办的第十九届和平音乐祭,标榜透过音乐来宣导和平的重要性,参加演出的歌手除了邓小姐之外,还有日本的和田秋子、IRUKA、伍代夏子、海蒂·柯斯·媛坦(印尼)、玛莉婉·吉梅娜(泰国)等只限女性的音乐人的演唱会。访问当天伍代夏子和IRUKA 拜访了原爆医院并赠与捐款。邓小姐还告诉我和平音乐祭感人的故事:
살이 쪘기에 마침 체중을 줄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에요! 등소저는 입을 열자 이렇게 말을 하였다.
비록 제대로 된 일본어는 아니었지만 말하는 목소리는 맑고 투명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편안함을 느끼게 하였다.
이 한해에 히로시마에서 열린 제19회 평화음악제가 음악을 통한 평화의 중요성을 선전하고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을 표방하였는데, 등소저 이외에도 공연에 참가하는 가수로는 또한 일본의 和田秋子、IRUKA、伍代夏子、海蒂·柯斯·媛坦(인도네시아)、玛莉婉·吉梅娜(태국)
등 몇몇 여자 음악인의 공연이 되었다.당일 방문한 伍代夏子와 IRUKA 는 원폭 의원을 예방하고는 아울러 성금을 기탁하였다.
등소저는 또한 내게 평화 음악제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벤트라고 이야기 하였다.
“今年夏天最值得回忆的事,就是参加广岛的和平音乐祭。选择演唱《爱的阳光》,就是想献给‘因战争而受害’的所有人,为和平祈福。内心充满感情演唱,是以往从没有过像这次这样热血沸腾的舞台经验。”
금년 여름 가장 가치 있는 기억나는 일은 바로 히로시마 평화음악제에 참가한 것이에요. 《爱的阳光》을 부르려고 골랐는데 바로
전쟁으로 인하여 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명복을 위하여 받치고자 생각하였다.
속마음으로 감정이 충만하여 노래를 하였는데 이전에는 이번 처럼 이렇게 뜨거운 피가 끓듯이 하였던 무대 경험은 없었던 것이다.
邓小姐除了新歌之外,还演唱了《何日君再来》、《任时光流逝》、《偿还》。邓小姐知道日本被投下原子弹的事是读小学的时候,但拜访广岛这次则是第二次。当她到原爆慰灵碑献花时,遇见经历原子弹爆炸的妇人带着孙子前来参拜,妇人告诉邓小姐,因为被原子弹炸伤, 伤疤很严重,所以从少女时期就不曾穿过短袖的衣服。邓小姐听到这件事之后,一边摸着妇人的伤疤,不禁声泪俱下。
등소저는 신곡이외에 또 《何日君再来》、《任时光流逝》、《偿还》을 불렀다。등소저는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사건을
국민학교때 읽었서 알고 있었다.그러나 히로시마의 방문은 바로 2번째이었다. 그녀가 원폭 위령비()에 꽃을 헌화할때 우연히 원자폭탄에 다쳤던 부인이 손자를 데리고 참배하러 온 것을 보았는데 부인이 등소저에게 이야기하였다. 원자폭탄 때문에 다쳤기에 상처가 매우 심하여
소녀시절 부터 일찌기 짧은 소매를 입지 않았다고 하였다. 등소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부인의 상처()를 만져 주면서 또한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 하는 것을 멈출 줄 몰랐다.
“当站在慰灵碑前献花,瞭望原爆巨蛋时就不禁流下泪来,广岛、长崎的原子弹爆炸, 牺牲了三十万人的生命,而且目前仍然身心痛苦的人还非常多,令人感到悲伤不已……每次看到原爆的资料馆就深深感受到生命的可贵。”
邓小姐说她在来日本之前就曾看过有关广岛、长崎被原子弹轰炸的电影及电视,实在令人感到非常的悲伤及恐怖。在叙述有关原爆之事,邓小姐的眼神非常真诚,脸上洋溢着认真的表情。
위령비 앞에 서서 헌화를 할 때 원폭dome을 바라보니 눈물이 끊임없이 흘려내렸다.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자 폭탄의 폭발이 30만명의 목숨을 빼았었다. 게다가 현재에도 여전히 몸과 마음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매우 많다는 것이 서러움과 아픔을 느끼게 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언제나 원폭의 자료관을 볼때 마다 목숨()의 귀중함을 깊히 깊히 느끼게 하였다.
등소저는 그녀가 일본에 오기전에도 히로시마,나가사키가 원자폭탄의 투하와 관련된 영화와 텔레비전을 보았고 ,
실제로 매우 아픈 슬픔과 무서움을 느끼게 하였다고 말 하였다, 등소저의 눈빛은 매우 진지해 보였으며 얼굴에는 진지한 넘쳐 흘렀다.
话题转到最近的生活上。“为什么离开香港居所选择住在巴黎呢?”邓小姐带着微笑回
答说。
“身为艺人当然就是要住在巴黎啰!”“选择巴黎的理由是……应该说巴黎是经过琢磨洗礼的,有一种不太温柔的感觉,不像意大利人或西班牙人那样开朗,法国人比较沉默。但是若是以艺人身份的立场来看,巴黎是值得学习的地方,还有语言也很好听,而且令人最喜欢的是坎城所在的法国南部,很喜欢它的天气。”
화제를 최근의 생활이야기로 돌리었다: 어째서 홍콩의 집을 떠나 파리로 살려고 골랐는지요? 등소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예술인으로서 당연히 파리에 살고 싶어요! 파리를 고른 까닭은 ......파리는 절차탁마의 시련을 겪은, 일종의 그다지 다스하지 않은
느낌이고, 이탈리아사람 혹은 스페인 사람 처럼 그같이 명랑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사람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만일 예술인의 처지로 보면은 파리는 공부할 가치가 있는 곳이에요 또한 말도 매우 듣기가 좋지요 게다가 가장 즐거운 것은
칸느가 있는 프랑스 남부는 매우 그곳의 날씨를 좋아하였다.
问到她平时是如何在法国生活时,邓小姐的表情更显得开朗:“在巴黎……也没有什么大事啦(笑),每天学法语,偶尔进录音室录音,比如说忙的话大概在早上六点起床,然后去游泳,一星期游个四、五天,大约游一个小时后回家,九点半到下午三、四点就去上法语课,然后会在家附近找CD,偶尔会去看电影,但是次数很少。”在采访过程中谈及有关的生活话题时,她看起来不像是为了歌手生涯去充电的感觉,反倒是比较像随意地过活,只是悠哉悠哉地生活着的感觉。
그녀에게 평소에는 프랑스에서 생활할 때 어떻게 보내는 지를 물었다. 등소저의 표정은 명랑하게 보이면서; 파리에서....역시 어떠한 큰일은 없어요(웃음), 날마다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때로는 녹음실로 가서 녹음을 하는데 이를 테면 바쁘면 대체로 아침 6시에 일어난 뒤 수영하려 가고 일주일에 4.5일은 수영을 하고 대체로 한시간 뒤에 집으로 돌아가고, 9시반 부터 오후 3,4시에 프랑스어를 배우러 가고 이뒤에
집 부근에서 CD를 찾기도 하고 때때로 영화로 보기도 하고 그러나 횟수는 매우 적었어요. 인터뷰하는 동안에 연관된 생활이야기를 나눌때 그녀는 가수 인생을 위하여 충전을 하려는 느낌이 아닌 것 같아 보였으며 오히려 비교적 마음대로 생활하는 것처럼 보였고 단지 자유롭게 생활을 하는 느낌이었다.
“还有在家的时候比较多,会上钢琴课、看书,我不会天天练歌,但会每天练钢琴。最近在读一些宋词和汉诗,因为希望将来自己能作词,也常看中国小说。星期六、日则是很轻松的度过,因为喜欢早起,可能的话四点半起床最好,那段时间空气很新鲜又安静,可以随心所欲地作自己想做的的事。”
또한 집에 있을 때는 비교적 많이 파아노 연습, 책읽기를 하기도 하고 나는 날마다 노래 연습을 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날마다 피아노를 공부합니다. 최근에 이런 송사와 당시를 읽고 있는데 장래에 스스로 词를 쓰고 싶기에도 늘 중국 소설을 읽고 있어요.
토요일 일요일에는 매우 홀가분하게 지내는데 일찍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기에 가능하다면 4시에 기상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그때는 공기도 매우 신선하고 고요하여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생각한 것을 할 수 있어요.
邓小姐从香港迁移到巴黎定居,想问她有关这两个城市的事,因为借由这个话题,可能有机会切入我想问的主题上。用左手托住下颚的邓小姐,好像陷入思索的森林般……
“香港是个很容易生活的地方,嗯……因为语言也通,尤其是那里的海鲜料理最好吃, 在那里非常悠闲,生活也很奢侈。相对的在巴黎语言不通,觉得很寂寞。虽说住在香港很好, 但很怕因为只待在香港,很可能就平淡地过完一生,所以不想浪费生命,想给自己一点挑战。而且又发生×××事件,令我有一种好像从梦中惊醒的感觉。”
등려군 소저가 홍콩에서 파리의 집으로 이사를 하여서 그녀에게 이 두개의 도시와 관련된 일을 물어 보려고 하였다.그래서
이런 화제를 빌려서 내가 물어 보려고 하는 주제에 대해 파고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왼손으로 아랫턱을 괴고 있는 등소저는 마치 사색의 숲속으로 들어 가는 것 같았다.............
홍콩은 매우 쉽게 생활하는 곳인데 응... 말이 통하고 더욱이 그곳의 바다 생선 요리는 가장 좋은 먹을 거리이에요 그곳은 매우 한가롭고 생활도 매우 화려하지요 . 상대적으로 파리에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고 매우 쓸쓸하다고 느껴져요.비록 홍콩에서 사는 것이 매우 좋더라도,그러나 홍콩에서만 있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고 아마도 매우 순탄하게 생을 마치리라고 생각되어 그리하여 생명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내게 하나의 도전을 주려고 생각하였어요.
게다가 ×××(역자 주: 천안문 사건)사건이 발생하여서 나에게 마치 꿈속에서 깨어나는 듯한 어떤 느낌을 주었던 것 같아요
一听到“×××事件”的字眼,我立刻就接着问下个问题,因为我听说邓小姐想在巴黎开演唱会用以抗议×××事件的暴行。问及有关此事的进展状况,不料原本高兴地谈论着在巴黎生活的邓小姐,脸上突然扫过一阵阴霾。
“往后会以录音为主,并没有计划开演唱会,自从×××事件过后,就不想开演唱会, 心情一直很低落。因为在事件之前我们很积极的支持活动,如果当时我们不那样努力支持的话,说不定student 就不会被杀。只要一唱歌,就会想哭,内心的感觉也一直无法安定,我算是爱哭鬼吧!眼泪很容易夺眶而出,就因为如此,让我感到演唱是不好的。”
×××(역자 주: 천안문 사건)사건 이라는 단어를 듣자 나는 곧바로 이어서 어떤 문제를 물어 보았는데 내가 등소저가 이 ×××(역자 주: 천안문 사건)을 항의하기 위하여 파리에서 공연을 시작하려고 한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연관된 사건의 진행 정도를 알아내려는데 의외로 본래 기쁘게 파리에서의 생활을 이야기 하던 등소저는 돌연 얼굴에 어두운 빛이 잠시 스쳐갔었다. 앞으로 녹음 위주로 하려고 하고 결코 공연회를 열 생각이 없었어요.×××(역자 주: 천안문 사건)사건이 일어난 뒤 부터
공연회를 열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마음은 내내 매우 움츠러지었어요. 왜냐하면 이 사건 전에는 우리는 매우 적극적인 지지 활동을 하지 않았고,만일에 당시에 우리가 그처럼 지지에 노력하지 않았다면 , 말하기 어렵지만 학생들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노래만을 부르기만 하면 울기만 할 수 있을 거에요.속 마음의 느낌도 내내 마음이 편해질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울보가 될뿐이라고 간주되었지요. 눈물은 매우 흘리기가 쉬워요. 그래서 이때문에 나에게 노래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느끼게 하였지요.
邓小姐就如此在我这个初次见面的人面前掉眼泪。经过很长一段时间没有说话,我也不再问些什么问题。过了许久之后,邓小姐终于慢慢地像是一边选择词句,一边缓缓地说。
“CPC 政权执政已经四十年,这四十年来,中国people 过着什么样的生活呢?大家应该都知道吧,他们过着非常艰苦的生活。但反过来说,往后的中国也令人充满希望。我们所有海外的中国人之所以支持‘×××student 运’,就是为了这个。如果我们不支持那个有希望的中国,那谁来支持呢?到时如果变成好的government,大家就有好日子过,中国就可以变成一个democratic 国家,但是我们的心愿和希望,只限于中国government 用tank 去杀人之前为止。”
등소저는 이처럼 처음 만난 사람의 내 면전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었다. 매우 긴 시간이 흐르도록 말이 없었다. 나도 다시는 어떤 문제도 물어 보지 못했다. 오랜시간이 흐른 뒤에 등소저는 마침내 천천히 마치 词의 구절을 고르듯이 또 한편으로는 천천히 말을 하였다.
CPC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CPC) 정권이 정권을 잡은 지 이미 40년이 되었는데 이 40년 동안 중국 인민은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모든 사람은 모두 다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매우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반대로 말을 하자면 앞으로의 중국은 희망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해외의 모든 중화인이 ‘×××student 운동’을 지지해야 할 이유는 바로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희망이 있는 중국을 지지 하지 않는 다면 그 누가 지지하겠습니까?
때가 이르러 만일 좋은 government로 바뀌어 진다면 모두가 좋은 날을 보낼 것입니다. 중국은 democratic국가로 바뀔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소원과 희망은 단지 중국 governmen가 탱크로 사람을 죽이기 전에 멈추게 하는 것 뿐입니다.
邓小姐是在一九八九年五月二十七在香港参加支援×××students 活动的集会。在tank 杀死人之前,在香港的跑马场举行支援北京student 运动的慈善演唱会,邓小姐有受到邀请, 但不想让人认为是借此宣传,所以决定不去。但在家看着实况转播,越看越坐不住,所以还是出门赶到现场去。
“我想说的话,就在这首歌里面,请您听看看,我不后悔去演唱会,现在仍然从不后悔过。”
但是原本预定要在巴黎举办的×××事件追悼会,并没有如期地在事件发生三周年的×月×日举行。问及此事,邓小姐作了以下的说明:
“身为歌手的我,很想以演唱会的方式,尽可能地带给中国people 什么帮助,但是总觉得不安,因为那次事件死了很多students,总觉得开演唱会唱歌是不好的,其实我也感到很困惑……”
등소저는 1989년 5월 27일에 홍콩에서 ×××students 활동 지지를 하는 집회에 참가하였다. 탱크가 사람을 죽이기 전에 홍콩의 跑马场에서 개최된 북경 student 운동을 지지하는 자선 공연회에 등소저는 초청을 받아 들였는데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빌어서 홍보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가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집에서 실황 중계를 보고 있으니 보면 볼수록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래도 문밖으로 나가 현장으로 나갔다.
내가 말하고 한 것은 모두 이 노래에 있으니 , 여러분이 한번 들어 보기르 바래요. 나는 조금도 공연장에 간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지금도 여전히 후회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본래 파리에서 개최하기로 예정된 ××× 사건 추도회는, 결코 예정대로 사건 발생 3주년의 모년 모일에 거행하지는 않아요.
이 사건을 알아보는데 등소저가 아래의 설명을 하였다.
가수인 나로서는 공연회 방식이 될수 있는 한 중국 인민에게 무슨 도움을 가져다 주는 가를 고심하였는데 그러나 늘 불안함이 느껴지었고 왜냐하면 이 사건으로 많은 students이 죽었기에 늘 공연회에서 노래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느꼈으며 사실 나도 매우 곤혹스러웠다....
其实,抗议×××事件的演唱会已经筹备得很具体了,新闻也曾报导过,也引起国际间的注意。为什么会停办这个活动呢?
邓小姐并不想说明停办这个活动的真正理由,当然或许是她内心的伤痛,使得她远离歌唱也是一个事实。依我的判断,困惑着她的原因,不单只是她个人的感情层面,在说出“困惑……”之后,邓小姐到底是想要接什么词句呢?在当时我并不清楚她想说什么。
交谈许久后,问邓小姐为什么要离开香港,她这样子告诉我:
“完全无法相信那个government 了,如果我只顾着自己享乐的生活,而无视问题的存在,那势必之后就会有大灾难来临。”
对邓小姐而言,她所指的“大灾难的预感”是什么呢?她并没有说明。但从她谈话的过程里,清楚发现×××事件的伤痛深深的烙印在她心里。
사실 ×××사건을 항의하기 위한 공연회는 이미 매우 구체적으로 준비가 되었으며 신문도 일찍이 보도가 다 되었고, 또한 국제적인 관심도 끌고 있어요. 어째서 이 활동을 도중에 멈출 수 있나요?
등소저는 결코 이 활동의 진정한 이유를 중간에 설명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당연히 아마도 그녀 내심의 아픔이 그녀를 노래에서 멀리 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나의 판단에 의하면 그녀를 곤혹스럽게 한 원인은, 단지 그녀 개인의 감정 문제 만이 아니라, 곤혹...이라는 말을 한 뒤에 등려군은 도대체 어떤 词의 구절을 만나려 하는 것인가? 당시에 나는 결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오랜동안 이야기를 나눈뒤에 등려군소저에게 어째서 홍콩을 떠났는 지를 물었는데 그녀는 이처럼 내게 말을 하였다.
저 정부를 완전히 믿을 방법이 없었어요! 만일 내가 그저 내자신의 향락적 생활만을 보내며 문제의 존재를 무시한다면, 필시 이 뒤에는 커다란 재난이 올거예요.
등소저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가리키는 커다란 재난의 예감은 어떤 것일까? 그녀는 결코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말한 과정에서 분명히 ×××의 사건의 아픔이 깊숙히 그녀의 마음 속에 낙인 찍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香港要归还中国是在一九八四年十二月十九日的中英共同声明里决定的。因为同意归还后,以一国两制统治,所以从八七年开始就有很多香港人移民到美国、加拿大、澳洲,大家对CPC one party 执政的中国都抱着不安的想法,尤其在×××事件时,让大家看清了许多现实状况,所以对中国产生不信任,进而产生移民潮。对邓小姐而言,内心充满着中国统治下香港到底会发生什么事的不安全感,所以才认真地去思索在中国体制下是否会直接受到影响,也公开表明自己的意思和批判许多事情。由此可看见邓小姐的心情因中国这个国家而起了大波澜……
홍콩은 중국에 돌려 주게 된 것은 1984년 12월 19일에 중영 공동성명에 결정된 것이다. 반환 뒤에 일국 양체제 통치로 동의되었기에 그래서 87년 부터는 수많은 홍콩 사람들이 미국,카나다, 호주, 등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CPC one party 집정의 중국에 대하여 불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사건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현실 상황을 분명히 보게 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대하여 불신감이 생겼고 더 나아가 이민 사태를 만들어 내었으며 등소저의 말에 의하여 내심으로는 중국 통치하의 홍콩은 도저히 어떠한 일이 생긴다는 불안감으로 가득채워졌다.
그래서 비로소 진지하게 중국체제하에서 직접 영향을 받아드릴 수있는지를 숙고하게 되었다.또한 자기의 의사와 많은 사건의 비판을 공개하였다.이로서 중국 이라는 이 나라가 커다란 파란을 일으키기에 등소저의 마음을 볼수 있을 것이다.
“最近在香港录国语歌,甚至需要花三天练习才终于可以录成,因为很容易就哭,所以花了很多时间。希望中国可以很快地democratization,到时候就可以唱很多庆祝的歌曲,我现在还无法控制自己的情绪,很容易就想哭。”
邓小姐的采访对我而言,谈的比想象中的多,尤其是有关×××事件的political 话题,不忌讳地侃侃而谈,针对问题也完全没有避重就轻带过了事,给我一种非常自然的应对感觉。
邓小姐提到新歌专辑《难忘的》还于当年十月二十八日以中文版精选集《莫忘今宵》之名在日本发行,当时即使是香港、台湾的电视节目,邓小姐也是一年上个几次而已。我想我采访邓小姐的时候,邓小姐因为×××事件内心受到很大的冲击,所以这个时期应该是刻意限制工作量。
최근 홍콩에서 중국어 노래를 녹음하는데는 심지어 3일간의 연습을 해야만 비로소 마침내 녹음을 할 수 있어요.왜냐하면 매우 쉽게 울기 때문이기에 매우 긴시간을 써요. 중국이 매우 빠르게 democratization를 희망하는 데, 그때가 이르면 많은 경축할 노래를 부를 수 있지요.
나는 지금 여전히 내 감정을 억제할 방법이 없어요 매우 쉽게 울기 때문이지요.
등소저는 인터뷰에서 내게 말을 한것에 의하며 생각보다는 말한 것이 많았고 특히 ×××사건에 관한 정치적 화제입니다.
담담하게 피하려 하지 않으며 말을 하였고 문제에 대하여서도 어려운 것을 피하고 쉬운 것만 이야기하지 않고 일을 다 마무리하였다.
내게 매우 자연스럽게 응답하는 어떤 느낌을 주었다.
등소저는 신곡 앨범《难忘的》즉, 또 그해 10월 28일에 중국어 판 최고급 《莫忘今宵》의 이름으로 일본에서 발행된 것을 내놓았다.
당시에 홍콩 대만의 텔레비전프로그램 일지라도 등소저는 일년에 서너 차례 일뿐이다. 나는 내가 등소저를 인터뷰 하였을 때를 생각하면 ,
등소저는 ×××사건은 내심 매우 커다란 충격을 받았기에 이 때에는 고심하여서 작업량을 제한하고 있다.
三
约经过两年后的一九九四年十月二十四日,在日本仙台市的宫城县民会馆地下楼的后台休息室前,和邓小姐又再次见面,而且此次的日本行竟然成为邓小姐最后一次赴日之行。
“很光荣……”邓小姐望着我用极小的声音说话,我告知她想将她的一生和中国及台湾的关联背景写成书时,她这样的回答我,而且她还说出令我更意外的话。
약 2년이 지난 뒤 1994년 10월 24일에 일본 센다이시의 宫城县民会馆 지하층의 무대 뒤 휴계실 앞에서 등소저를 다시 만났다. 게다가 이번 일본 여행은 뜻밖에 등소저의 마지막 일본 나들이가 되었다.
매우 영광입니다.....등소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하였다. 나는 그녀의 삶과 중국 그리고 대만의 관련된 배경을 책으로
쓰려 한다고 그녀에게 말을 하였을때 그녀는 이처럼 대답을 하였다. 게다가 그녀는 또한 나에게는 더욱 뜻밖인 말을 하였다.
“我往后人生的重点就是为了中国的和平自由而努力。”
一听到她开口说这话时令我很惊讶,但同时也令我感到“果然如此”。上次的采访当中邓小姐曾说过:
“极小的暴力会演变成巨大的战争,我最讨厌战争,所以为了和平,我愿意尽一己之力。”
나는 앞으로 삶의 중점은 중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서 노력하는 것이에요.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 나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였는데 그러나 동시에 나를 과연 이렇구나 하고 놀라게 하였다.
저번의 인터뷰하는 중에 등소저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주 작은 폭력도 거대한 전쟁으로 바뀔 수 있어요 나는 가장 전생을 싫어해요, 그래서 평화를 위하여 나는 나 하나의 힘을
끝까지 다 하길 바래요.
邓小姐如此强烈的表达出“为了中国的和平自由而努力”的心意,我想这是第一次也是最后一次了,能如此自然地表达出肺腑之言,应该是内心经过许久的纠葛后,坚决地流露出真情,这跟只想把信念传达给他人,有着很大的差别。邓小姐口中的“为了中国的和平自由而努力”的含意,是因处在中国和台湾的特殊关系背景下,时逢现代史上的关卡时,明显反映出一位女性精神的形成。
등소저는 이처럼 강렬한 주장은 중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한 노력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나는 이것 이 처음이자 또 마지막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저절로 마음속의 참된 말을 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마땅히 속마음이 오랫동안의 갈등을 겪어서 굳건하게 진심을 토로하는 것으로,
이것은 단지 신념을 남에게 전달하고자만 하는 것과는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다.
등소저의 말 가운데의 중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한 노력이라는 말의 뜻은 중국과 대만의 특수한 관계 배경하에서 일어난 것이다.
현대사에서 때때로 만나는 난관에 처할 때 뚜렀하게 한 여성의 정신이 이룬 것이 반영되었다.
邓小姐甚至和笔者约定,过完年后要在香港再找时间慢慢聊,但最终这个约定并无法实现。因为邓小姐在半年后的一九九五年五月八日,逝世于泰国清迈。邓小姐健在的时候,也有过几次“死亡说”的传闻。第一次是在一九九0 年邓爸爸过世,而邓小姐并未出席丧礼,所以谣传邓小姐“因受打击而引发肾脏病恶化在巴黎的医院逝世了”。第二次是在一九九一年的时候,邓小姐久未在媒体曝光,因为邓小姐曾表明支持×××事件的student 运动立场,又实际参加声援演唱会,所以谣传已被暗杀,日本的女性周刊杂志还专题报导过这些在香港谣传邓小姐奇怪的“病死说”及“暗杀说”。
등소저는 더 나아가 필자와 약속을 하였는데 ,정월을 보내고 홍콩에서 다시 천천히 잠시 시간을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 약속은 결코 실현 될 방법이 없게 되었다. 등소저가 하반기인 1995년 5월 8일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서세하였기 때문이다.
등소저는 건강할 때도 여러 차례 사망설 소문이 있었다.
제1차는 1990년 등려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등소저가 끝내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그래서 등소저가 충격을 받아서 신장병이 악화 되어서 파리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풍문이었다. 제2차는 1991년 때로 등소저가 미디어에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고
등소저가 일찍이 ×××사건을 지지하는 학생운동 입장을 표명하였고 또 실제로 성원하는 공연장에도 참가 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이미 암살되었다는 풍문이어서 일본의 여성주간잡지는 또한 이것을 홍콩에서 등소저의 괴이한 병사설 그리고 암살설 풍문을 특정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隔了一年九个月后,邓小姐在一九九一年为新歌《与悲伤共舞》(悲しみと踊らせて)赴日上节目宣传时,以很不屑的口吻说了以下的话:
“香港的杂志写出这样的谣言实在太肮脏了,原本只有两千本发行量的杂志,想利用诽谤来卖杂志,因而捏造谣言。”
1년 9 개월이 지난 뒤 등소저는 1991년 신곡《与悲伤共舞》(悲しみと踊らせて)때문에 일본에 가서 프로그램 선전을 할때 매우
경시하는 말투로 아래의 말을 하였다:
홍콩의 잡지는 이런 뜬소문을 실제로 너무나 추악하게 썼는데 본래 단지 2000 권이 팔리던 잡지로 헐뜯어서, 잡지를 팔려고 생각하여서 뜨소문을 날조하였다.
四年后,邓小姐客死泰国清迈,以往传说的“谋杀论”更让人深信不疑,尤其当和清迈这个地方联想在一起时,更传出“因毒品死亡”、“因爱滋病死亡”等等许多说法。之后又因贵为以国葬处理,导致产生“是军方特务”的说法,这个特务的话题被大规模的报导,尤其足以令人采信的根据,是邓小姐过世前五年间,好几年都拒绝了所有电视的演出,只热衷参加劳军活动而且不收酬劳。
4년뒤 등소저가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객사를 하자, 이전의 떠돌던 모살설이 더욱 철석같이 믿어 지게 되었다.더욱이 치앙마이 이곳과 함께 연상될 때, 더욱 약품으로 인한 사망, 에이즈로 인한 병사등등의 수많은 설들이 퍼졌다. 뒤에 또 높이 기려서 국장으로 장례를 하게 되어서 이 군부 간첩(军方特务) 라는 설을 야기시켰는데,이 특무의 화제는 대규모로 보도되었고,더욱이 믿을 만한 근거가 되었다.
이것은 등소저가 서세 5년 동안,몇년 간 모두 다 모든 텔레비전의 출연을 다 거절하였지만 단지 군 위문활동에 참가 뿐만 아니라 보수도 받지도 않고서 간절히 바랬다,
邓小姐比较大规模的劳军活动有:在美国待了一年七个月后,在一九八一年刻意返台至金门古宁头做劳军活动的“君在前哨”,之后在一九九二年参加台中清泉岗的劳军“永远的情人”,以及最后的一九九四年,高雄凤山劳军的“黄埔建军七十年”。
最初报导邓小姐曾是军方特务的是《独家报导》这本台湾杂志,而且出面证实“邓小姐是特务”的人,就是曾担任台湾情报局的高官谷正文先生。他回答记者的问题如下:
등소저는 비교적 대규모의 군 위문 활동으로는 이런것이 있다: 미국에서 1년 7개월를 기다리고서는 1981년 고심하여서 대만으로 돌아와서 金门(진먼도)의 古宁头로 가서 군위문 활동을 한 君在前哨,이 뒤로 1992년 台中(타이쫑)의 清泉岗의 군위문의 永远的情人,
그리고 마지막으로 1994년 高雄(까오슝)의 凤山의 군위문의 黄埔建军七十年.이다
최초로 등소저가 일찍이 군부의 특무라는 것을 보도한 것은 《独家报导》라는 대만 잡지이다. 뿐만 아니라 등소저는 특무라는 것을 실지로 증언하는 사람이 얼굴을 보였는데 바로 일찍이 대만 정보국를 담당한 고관 谷正文 이었다.그는 기자의 질문에 아래처럼 대답하였다.
记者:日本媒体大胆地推测邓丽君曾是中华民国军方的特务。
谷:根据我的了解,邓小姐是军方的人员应该不会错,如果我没有记错,应该归国家安全局第三处管理才对。
기자: 일본 매체는 대담하게 등려군이 일찍이 중화민국 군부의 특무라고 추측을 하였습니다.
谷正文; 나의 판단에 의하면 ,등소저는 군부의 직원이라는 것이 틀릴 수 가 없는데, 만일 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다면 마땅히 국가 안전국 제3처 관리에 속해야 맞는 것이다.
六月二十三日,香港《信报》将这篇《独家报导》的内容刊出,引起共同通信社的香港支局将《信报》刊出的文章发布,日本的《每日新闻》也刊登《邓丽君曾是谍报员?》“由台湾国家安全局退休的中将(其实是情报局退役的少将)爆料证实”的消息(六月二十四日的报纸)。这篇《独家报导》的文章在日本引起很大的回响,日本杂志《周刊现代》七月八日号,更是在未采访到谷正文之情况下,就刊登《邓丽君是台湾版的金贤姬》的大标题(金贤姬是北韩派到日本的特务,是日本家喻户晓的人物),而且又在文中置入住在台湾的评论家福雷特·吉野说的:
6월 23일 홍콩《信报》는 이 《独家报导》의 내용을 출간하였는데, 共同통신사의 홍콩 지국은 《信报》가 출간한 기사를 펴내게 하였고 일본의《每日新闻》도 대만 국가 안전국을 퇴직한 中将(사실은 정보국 퇴역한 少将)이 증언하는 특종의 기사인《邓丽君曾是谍报员?:등려군은 일찍이 첩보원이다?》을 게재(6월 20일에 보도 되었다)하였다.이 《独家报导》의 기사는 일본에서 매우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일본잡지《周刊现代》7월8일자 호는 더욱 谷正文과 인터뷰도 아직 하지 않은 상황에서 《邓丽君是台湾版的金贤姬:등려군은 대만판 김현희이다》이라는 대 표제의 기사를 실었다(김현희는 북한이 일본에 파견한 특무인데 일본의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또 글속에서 대만에 주재하는 평론가 福雷特(Foret) 吉野가 말한 것을 인용하였다:
“邓丽君的工作应该是在东亚,尤其是日本的可能性最大。”之类的言论佐证。更被扩大报导的是一九九五年七月二十号的《周刊宝石》,以《邓丽君二十年来本来就是秘密情报员!!》为大标题,作出专题报导,而且出面证实的人就是谷正文先生,文章的一开头就用《惊人的真相》——谷先生的发言为引言。
등려군의 공작활동은 마땅히 동아시아,특히 일본에서 가능성이 가장 컸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언론 증거는 더욱 널리 보도된 것은 1995년 7월 20일자의《周刊宝石》에,《邓丽君二十年来本来就是秘密情报员!!:등려군은 20년 동안 본래는 바로 비밀정보원!!》이라는
큰 제목으로 특집으로 보도가 되었다.뿐만 아니라 실제로 증언하는 사람 즉 谷正文이 얼굴을 드러내었다. 기사 첫머리에 바로 《惊人的真相:사람을 놀라게 하는 진상》——谷正文의 말를 인용하였다.
“在我离开情治局之前,邓小姐就被吸收为谍报员,我和她第一次见面的时候是在她十三岁的时候。”
谷正文又说明:“她的父亲邓枢原本是国民党军的陆军中尉,和我本来就认识,后来经介绍也知道邓丽君,在审查吸收的人员资料时,一看就知道是她了。我退役以后,她仍然还是安全局的成员。当然一九八九年×××事件的时候仍然还是,一直到她过世于泰国为止, 她都是台湾的谍报员,资历超过二十年以上。”
내가 情治局을 떠나기 전에 등소저는 받아들여져서 첩보원이 되었고, 나와 그녀는 처음으로 만났을 때는 그녀가 23살 때이었다.
谷正文은 또 말을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 邓枢는 본래 국민당 군대의 육군 중위로 나하고는 본래 알고 있었고 이후에
소개를 통하여서 등려군도 알게 되었다. 받아들일 사람의 자료를 심사할 때 한번 보니 바로 그녀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퇴직한 뒤에
그녀는 여전히 또한 안전국의 직원이었다. 당연히 1989년 ×××사건 발생했을 때에도 여전히 또한 내내 그녀가 태국에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그녀는 완전히 대만의 첩보원이었고 경력도 20년 이상을 넘었다.
《周刊宝石》的文章里还特别提出因无法确信《独家报导》所写的内容是否真伪,所以标榜“亲自采访谷氏”。
“在谷氏台湾的家中”、“访问详细的内容”等等词句,到底什么才是真的?邓小姐曾亲口说过:
“我是国际难民”,她的人生中留下了太多无解的谜题。
특별히 인용된《周刊宝石》의 기사속에도 특히 《独家报导》가 보도한 내용이 정말인지 가짜인지를 확신할 방법이 없었기에 , 그래서 "스스로 인터뷰한 谷氏" 라는 제목을 표방하였다.
"谷氏 의ㅣ 대만 집에서" " 상세한 내용을 취재"등등 의 기사, 도대체 무엇이야 말로 정말인가? 등소저는 일찍이 직접 말을 하였다:
"나는 국제 난민 이에요", 그녀의 삶 가운데에 너무나 많은 풀수 없는 수수께끼를 남겼다.
因接获邓家家属说巴黎的公寓即将处理掉的联络,我特意在一九九八年五月十九日, 去法国采访。房间里单人床上铺着粉红色条纹的床单,沿着枕头往墙上看去,墙壁上挂着法国地图,还有九一年发行的新歌《与悲伤共舞》宣传海报,另外还贴了一些有关如何减肥的剪报。不知道为什么,其中一张照片特别令我在意,是一张边角微卷的彩色照片,邓小姐带着一顶镶着黑边草帽的全身照片,身穿一件全黑的洋装,外面罩着有花纹的白色外套,颈上带着珍珠项链,手上拿着一条蕾丝质的披肩,嘴边泛着微笑,眼神看起来很安详。
등려군 가족들이 파리의 아파트를 곧 팔아버린다는 연락을 접하였기에 나는 특별히 1998년 5월 19일에 프랑스로 가서 인터뷰를 하였다.
방에는 일인용 침대위에 분홍빛 줄무늬의 침대보가 덮혀져 있는데, 베개를 따라 있는 벽을 쳐다보니, 벽에는 프랑스 지도가 걸려 있는데,
또한 91년 발표된 신곡《与悲伤共舞:悲しみと踊らせて》의 홍보 포스터가 있다. 이외에 또한
어떻게 하면 살을 뺼 수 있는 가와 연관된 신문 스크랩 몇장이 붙어 있다.
어째서인지는 알지 못하나, 이중에 한장의 사진이 특별히 마음이 머물게 하는데, 이것은 사진 가장자리가 약간 말린 칼라사진으로 등소저는 검은 테두리의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전신 사진인데, 온통 검은 빛의 양장을 전신에 입었고, 겉에는 꽃무늬의 흰빛 외투를 입었고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걸고 손에는 레이스로 된 망토를 들고 있으며,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눈빛은 보기에 편안하였다.
衬托着她黑色身影的背景,是受到法国建筑影响的折户式窗户,和充满创意的条状遮阳板的建筑物,也像是在东南亚的殖民都市常可看到的哥洛尼亚文艺后复兴时期的白色建筑物,庭院前有一大撮深绿色凤尾兰挺直着腰身,盛开着一串串的小白花,再过去一点的地方则有绽放许多嫣红的波罗尼花栽。
그녀의 검은 빛의 몸그림자의 배경에 두드러지는 것은 프랑스 건축의 영향을 받아드린 折户식의 창문에, 아이디어가 넘치는 나무막대기 모양의 차양판이 있는 건축물인데 또한 마치 동남아의 식민 도시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哥洛尼亚 문예 이후 부흥기의 흰색 건축물의 정원 앞에 하나의 커다란 진녹색의 凤尾兰을 한손에 쥐고 허리를 곧추 펴고 있는 데 작은 흰꽃이 여기저기 활짝피어 있고 다시 다른 곳으로 가도 또 수많은 붉은 波罗尼花가 심어져 피어나 있다.
看起来不像在整理相簿的样子,而是在日常生活中每天都会看到的地方不经意地贴上的一张照片,没有特别标出摄影的日期和地点,是否只是因为她想随时可以看到她喜欢的风景而已,还是有着什么特殊的意义呢?我真的想知道这张照片里隐藏着写什么意义,到底是在何时?何地拍的?而那个时候,邓小姐的内心反映着何种风采……?循着邓小姐的足迹, 终于追到那个“现场”之后,看见眼前展现出宛如就是她逃离亚洲后波折不断的历史片段一样。(笔者所述照片见尾页)
마치 사진을 정리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날마다 볼수 있는 곳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서 붙여 둔 한장의 사진에는 촬영한 날짜와 장소를 특별하게 표시는 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때때로 그녀가 좋아하는 경치를 보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뜻이 있었는지?
나는 정말로 이 한장의 사진에 어떤 뜻이 숨겨져 있는지,도대체 언제인지 , 어디서 찍은 것인지, 그리고 언제인지 ,등소저의 속마음이 어떤 모습이 반영되고 있었는지,를 알고 있어요.
등소저의 발자취를 따라서 마침내 그 현장에 다다른 뒤에, 바로 그녀가 아시아를 벗어난 뒤의 끊임없는 파란의 역사같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필자가 묘사한 사진은 말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赵素桂는 언제나 꿈을 꾸었는데 딸이, 가끔씩 그녀가 홍콩의 음식점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모습의 꿈을 꾸었다.
종종 등소저가 아마도 30살 즈음에, 중화옷을 입고서 공연장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는 것의 꿈을 꿈꾸었다.
항상 꿈에서 깨어난 뒤에 깊은 쓸쓸함을 느꼈으며 또한 언제나 감격하였는데, 미국을 가든 아니면 일본을 가든지 모두 다 "아! 우리는 함께 그곳을 갔었구나"하며 깊은 시름에 빠졌다.
설령 지금껏도 언제나 이런 추억이 젖어 있더라도, 이로 인하여서 곳곳에 다 수많은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 남아 있어요.
딸의 CD를 듣는 것은 이미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으며, 더욱이 열너댓살 스무살때 불렀던 노래는 그리워하는 것을 멈추게 하게 못해요.
먼저 대만에서 데뷰를 하고 나중에 홍콩으로 , 일본으로 진출하였을 때의 추억은 특히 생생해요, 가끔은 토요일에 한꺼번에 8개의 앨범을 다 듣고 있는데. 노래를 들으면서 가구 위에 놓여진 액자사진을 바라보니 젊었을 때의 딸이 마침 미소 짓고 있어요!
달마다 늘 金宝山(진바오샨)의 묘원에 가는데 그러나 만일 꿈속에서 딸을 보면 하루 걸러서 반드시 묘원으로 가요. 金宝山의 묘원은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대만 지역인데 基隆부근으로 내 삶에서 가장 깊은 그리움이 있는 거리이에요.........
赵素桂의 본적은 중국 대륙의 山东省东平县(산동성 동평현)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흑룡강의 하얼빈의 출생이다.중화민국 15년 즉 서기로는 바로 1926년 6월 20일에 태어 났는데,내내 5살이 되도록 그곳에서 지냈다. 아버지 赵守业은 그때에 하얼빈 우정국의 국장을 담당하고 있었고, 어머니 赵张은 가정주부이었다. 중일전쟁 때문에 온 식구가 어쩔 수 없이 河南省으로 달아나 피난을 갔었다. 남편 邓枢와는
河南省의 洛阳에서 알게 되었다.
邓枢是在民国四年也就是一九一五年一月十日在河北省大名县出生,出生后母亲就过世了,当军人的父亲也在他四岁的时候就过世,当时国民党的军队到处迁移,所以村里的男人都去从军,无依无靠的邓枢也在十四岁的时候加入了军队,因为只要从军就可以不用担心无法过活。然后就在二十六岁的时候认识赵素桂,因为素桂祖母的友人就住在附近,所以热心地介绍。当时素桂只有十五岁,害羞的躲在祖母后面。在十六岁订婚,回想当初母亲跟自己说:“这个人要成为你的丈夫。”但不懂是什么意思。原因好像是父亲希望女儿嫁给军人, 因为素桂想就读蒋夫人宋美龄所创的育英学校,所以从洛阳搬到陕西的西安。而后结婚是在一九四三年十七岁的时候,婚礼是在洛阳举行,但居住在西安,丈夫也因为结婚而离开军职, 到洛阳附近的宣阳县税务局工作。
邓枢는 민국 4년 즉 1915년 1월 10일 河北省大名县(하북성 대명현)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난 뒤 어머니가 바로 세상을 떠났다.
군인이던 아버지도 그가 4살 때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때 국민당의 군대는 이리 저리로 이동하였기에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갔었다. 아무런 의지 할 곳이 없는 邓枢도 14살때 군대에 들어가게 되는데, 오로지 군대에 들어가게 되면 살아가는데
방법이 없는 것에 대한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뒤로 26 살 때 赵素桂를 알게 되는 데, 왜냐하면 赵素桂의 할머니 친구가
부근에 살고 있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심히 소개를 하였다. 그때 赵素桂는 겨우 15살 이어서, 부끄러워서 할머니 뒤에 숨었었다.
16살에 약혼을 하였는데, 맨 처음에 어머니가 자기에게 말 한것을 회상하며:
이 사람은 너의 남편이 될 것이야. 그러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까닭은 마치 아버지가 군인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赵素桂는 장개석 부인 宋美龄이 창립한 育英学校에서 공부를 하려고 생각하였기 때문으로 그래서 洛阳에서
陕西의西安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후에 결혼은 1943년 17살때 하였는데 혼례는 洛阳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집이 西安이어서 남편도 결혼으로 인하여 군대를 그만두었으며 洛阳부근의 宣阳县의 세무국에서 일을 하였다.
18살에 장남을 낳자 小狗(강아지)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정식 이름은 짓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때의 양식이 부족하여서 영양 실조에 걸려서, 10개월이 되면은 대체로 요절하였기 때문이다. 이뒤로 1945년에 西安에서 차남을 얻게 되는데 그래서 또한 나중에 장남을 长安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왜냐하면 이전에 西安의 이름이 长安이었기 때문으로 이 지명에서 이름을 얻은 까닭이다.
이뒤로 남편은 또한 河南省郑州(허난성 짱저우)에 군대가 돌아 오자 군에 입대를 하였으며 1948년에 차남 长顺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쟁시기에 앞으로가 순탄한 생활을 하기를 바랬기에 그 이름의 뜻을 长顺이라고 하였다.1949년 9월에 온가족이 공산군에게 쫓기는 蒋介石 군대를 따라서 广东省汕头에서 수백명의 사병과 함께 철수하는 배를 타고서 대만으로 가게 되었다.
부부 두 사람과 4살과 1살의 아이는 두 사람의 군인 친구와 같이 피난선의 갑판위에 앉아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다 선창으로 내려 갔었고, 갑판위에는 아주 적은 사람들 만이 있었다. 그때 赵素桂는 매우 심하게 배멀미를 하여서 물 조차 마셔도 모두 다 곧 토해버렸기에, 이로 인하여 3일 뒤 基隆항에 도착한 뒤에는 버틸 수 없어서 땅에 넘어져 버렸다. 좀 시간이 지나고는 의식이 돌아온 그녀는 비로소 대북의 北投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현재의 北投 이 곳은 대만에서 이름난 온천 지역이다.이곳에서 약 2 주간을 기다렸다.
1949년 12월 蒋介石이 重庆에서 대만으로 철수하자 邓枢의 군대는 한번 해산을 하였으며 이 뒤로 다시 새로이 개편을 하였고 邓枢는
개편하고는 후비군으로 宜兰县으로 이동을 하였다. 또한 그때 赵素桂는 여동생의 소식을 찾으려 온갓 곳을 뛰어 다녔는데, 듣기에 공군의 비행사 인 妹夫가 1947년에 高雄으로 이동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곳에는 공군 기지가 있었다. 이 뒤에 여동생을 찾았고 赵素桂는
아들과 같이 잠시 高雄冈山에 다녀 왔었다.
赵素桂는 1951년에 宜兰에서 세째 아들을 낳는데, 그 때의 생활이 실제로 너무나 가난하여서 재물을 가져오기를 바래서 삼남은 그 뜻을 살려서长富라고 이름을 지었다. 대체로 宜兰에서 1년을 살고는 林县褒忠乡龙岩村으로 이동을 하였다. 방은 붉은 벽돌과 기와로 얹어서 만든 방이었다.나무 문을 댕겨서 열면 아주 작은 한칸 짜리의 평상이 있는 방이 있었다.대체로 이곳에서 4년 정도 살았고 온 가족은 대륙에서 도망 온 외성인이어서, 몇해 동안은 마을 사람들과 말이 전혀 통할 방법이 없었다.
1953년 1월 29일 네째 아이가 태어 나는데 이 때는 딸이었다. 아이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던 이는 바로 그때 집주인 인 张素霞 아주머니가 산파를 담당하였다.부부 두 사람은 딸의 이름을 丽筠”이라고 지었다. 筠”의 뜻은 갈라 진 대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속에는 피리에 쓰이는 한장의 얇은 막이 있을 수 있다. 또한 투명하고 맑고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북경의清华大学을 졸업한 친구가 제안한
이름이었다.왜냐하면 첫째 딸이기에 특별히 아름다운 이름을 생각하였다. 이 뒤로 교회에서 “TERESA”라는 영어식 이름이 있어지만,
집안에서는 모두 다 그녀를 작은丫头혹은 丫头(계집애)라고 불렀다.이 때 남편도 정식으로 전역을 하고는, 군대와 관련된 부문으로 전직하여서 을 도와 주는 일로 전환하여서 임무를 담당하였고 한해를 걸러서 네째 아들_---长禧를 낳았다.
딸은 평범한 어린아이로, 입을 열어서 노래를 할 수 있던 것은 두세살 적에야 비로소 할 수 있었고 그 아이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함께 따라 불렀는데 특히 인상이 깊은 것은 그아이가 세살 때인데, 그때 그아이는 혼자서 집 근처의 사진관으로 달려가서 주인에게 말을 하였다.: 우리 엄마가 나더러 사진을 찍고 오래요.그래서 사진관 주인은 그 연유를 알고서는 재미있게 그녀를 찍어 주었으나,나는 이제껏 그런 말을 한 것이 기억에 업사. 지금도 여전히 그때 찍었던 사진이 남아 있는데, 어깨에 비스듬하게 작은 보따리를 매고 몸에는 아주 작은 양장을 입고 오른 손은 촬영대의 장식대 위에 올려 놓고 왼손은 마치 어떤 물건을 쥐고 있는 것 같으며 ,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렌즈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결코 딸아이가 유명한 가수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나. 외동딸이어서 그아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다 그아이에게 해 주려고 하였다. 그래서 네 살때 그아이에게 발레를 배우게 하였다. 어머니는 아직도 그때의 선생님이 또한 칭찬하면서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 이 아이는 매우 잘 춤을 추어요, 다리의 곡선도 매우 아름다워요.
등려군이 다섯살이 될때 집이 여러차례 이사를 하였는데,台东、屏东에서 살기도 하였고 이 뒤로도 대북의 松山通化街에서도 살았고 또한
이곳은 지금도 유명한 야간시장이다. 두 부부는 台东으로 이사를 한 뒤로 邓枢는 군대에서 제대를 하였고 생계를 위하여 작은 음식 노점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막 시작한 주된 것은 국수 음식 파는 것으로 대북으로 이사한 뒤로도 운이 나쁜 것인지 아니면 전반적인 경기가 나빠서인지 날마다 번 돈이 겨우 석탄을 살 수도 없을 정도이었다. 화가 나 등려군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였는데, 한평생 다시는 국수를 팔지 않겠다고 하고는 이때 비로소 만두를 팔기 시작하였다. 잘 만드는 만두를 학교나 가게에 도매로 공급을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유치원에 다니던 등려군이 졸업식장에서의 연설을 하려고 글짜를 모르기에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연설할 때 키가 여전히 마이크에 미치지 못하여서 작은 나무 상자를 딛고 하여야 하였다.유치원 규정에 의하여 반드시 하얀 스카프와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매달아야 하였는데 다섯째 长禧는 희미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등려군은 언제나 학교 문앞에서 동생이 손수건을 매다는 것을 도와 주고는 함께 문을 나섰다.그때의 집은 곳곳이 모두 다 논이던 전통적 농촌 지대에서 살았다.
등려군이 여섯살 일때, 온 가족이 대북현의 芦洲로 이사를 하였는데 바로 그녀가 芦洲국립소학교에서 공부하던 때로 중대한 전기가 있게 된다. 아버지의 같은 고향사람인 친한 친구 李成清이 집 근처에 살았는데, 그는 군대의 九三康 밴드에서 胡琴을 연주하였다.
이李成清은 독신이어서 늘 등려군 집으로 놀러 왔는데 그래서 등려군에게 노래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李成清이 말을 하였다:
이 아이는 매우 천부적이다. 그래서 노래하는 이 길을 갈 수 있다. 이 뒤로 언제나 그녀를 데리고 군위문 야간 공연을 다녔다.
맨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소학교 3학년 때이었다. 늘 라디오가 방송하는 美空云雀(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불렀다.그때의 노래책에는 가사가 있으나 악보는 없었다. 그래서 단지 라디오를 따라서 노래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밤에 가장 즐거운 일은 바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在女儿十岁的很流行《梁山伯与祝英台》的电影,我还带她去看电影,她竟然可以记住十多首的插曲,是大陆安徽省的‘黄梅调’。因为觉得女儿有天分,所以帮她报名参加华视的歌唱比赛,在不分年龄的比赛中,她唱电影主题曲《访祝英台》,打败了五十多位参赛者获得优胜,拿到‘优胜奖状’时非常高兴。记得当时女儿还跟我说:‘只要有比赛都想参加。’,所以之后常常都是说着:‘我会把奖状拿回来,你在家里等我喔’,然后就出门去比赛,也常拿大奖回家。
딸아이가 열살 때 매우 유행하던 《梁山伯与祝英台》의 영화를 나도 아이를 데리고 보러 갔었는데, 그 아이는 뜻밖에 열댓편의 삽입곡을
기억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대륙의安徽省의‘黄梅调’이었다. 딸아이가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기에,그래서 그아이가 중화텔레비전의 노래자랑 콘테스트에 참가 신청을 도와 주었다. 나이를 나누지 않는 콘테스트에서 딸아이는 영화 《访祝英台》을 불러서, 50여명의 참가자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 하여서,우승 상장을 받을 때 매우 기뻤다.그때 딸아이가 내게 말을 하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단지 콘테스트가 있기만 하면은 모두 다 참가하려고 해요. 그래서 이 뒤로 언제나 모두 이렇게 말을 하였다.:
나는 상장을 가지고 돌아 갈 수 있을 거예요, 엄마는 집에서 저를 기다리세요 네. 이러고는 집을 떠나서 콘테스트에 참가하였고 또한 늘 대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 왔다.
학교의 국어 시간에 읽기를 할때 언제나 발음이 맑고 깨끗하고 또 정확하다고 칭찬을 받았으며,11살때 전교 웅변대회에서 일등을 차지 하였다.
노래 자랑 콘테스트에 참가한 일을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대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노래하는 것이 또한 얌전히 공부를
하는 것보다 낫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며, 사회의 인식도 어떤 명문학교에 합격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것이 주된 것이었다. 부근의 아이가 어떤
학교에 입학한 것이 모두 다 뜨거운 화제 꺼리 이었다. 그래서 등려군은 초등중학교를 천주교회의 金陵女中에 합격하여서 공부를 하게 된다.
1966년 13살때 그녀는 대만 텔레비전과 계약을 한 가수가 되었으며, 이따금 매주 한번 방송되는 음악프로그램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다.
그때 대만에는 오직 방송국이 하나만 있었는데 바로 대만 텔레비젼 이었으며, 30분간의 프로그램인群星会에서, 그때의 상해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대표적인 인기가수 周璇의 영향을 깊게 받았는데,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추억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어머니와 딸아이는 모두 다 한 달안에 프로그램에서 한번 노래를 하였는데 매우 잘한다고 인정 받게 되었다.
학교는 대체로 오후 4시경에 끝나는데 이후는 쭉 6시 까지 복습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 온 뒤에는 대부분은 군대의 康乐队 공연에 갔었다.
그래서 그녀도 康乐队에 소속되었기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대체로 거의 다 밤 11시 가 되었다. 하루 걸러서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숙제를 하고는 7시에 학교에 등교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학교에 알려진 뒤에는 등려군은 학교의 생활지도 교사에게 불리워 갔는데, 말하기를:
너의 행동을 받아 드릴 수 없다, 조심을 많이 해야 하므로 끝까지 노래를 부르려면 그러면 학교를 쉬는 것이 좋겠다.
등려군은 쫓겨나게 되자 아버지와 어떻게 선택할 지를 의논하였는데 등려군이 초급중학교 2학년 때이었다. 개성이 올곧은 아버지는 하루가 지난뒤 학교로 달려갔다. 화가 나서 선생님에게 따졌다: 어재서 이렇게 말을 하나요!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휴학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히려 휴학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다. 딸아이가 노래 자랑에서 우승을 차지 할때 마다, 딸이 노래하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일찍이 이 길로 가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 딸이 노래홀에서 노래하는 것을 바라는 모양으로 보여서,
사람들에게 딸에게 한번 마땅히 해보라고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친구도 찬성을 표시하였다:
그녀를 이길로 가게 하면 비교적 잘 발전할거야.
등려군의 생각은 만일 가능하다면, 그녀도 공부하면서 노래 하기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학교의 태도는 오히려 강경하였다.
그녀가 휴학 때문에 괴로와 하는 것을 그치지 못해 보이자 어머니는 딸을 美尔顿 영어학원에 보내었다.
딸은 중화텔레비전의 전속 가수가 되어서 정식으로 노래하는 길에 발을 내딛게 되었는데 이것이每日一星( 날마다 별 하나) 라는 프로그
램이다. 즉 날마다 한 초대가수가 10분 동안 노래하는 프로그램이다. 한주일 프로그램 공연 한차례의 고정 출연이 바로 첫번째 출연프로그램이었다. 또 이때 본명 丽筠을 예명丽君으로 개명하였는데, 왜냐하면 본명이 언제나 잘 못 읽히기 때문으로 그래서 필획과 자형이 비교적 아름다운 君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것은 어머니가 그때 생각난 이름이었다.
이후로 한 집의 생계가 딸아이의 수입에 의존되게 되었는데 당시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였는데 이러고 날마다 노점의 수입은 대체로 2천元이었다. 비록 프로그램에서의 수입이 적었지만 그러나 음악홀에서 공연한 수입은 오히려 많았다.
비록 딸의 명성이 점점 더 커갔지만 나는 이런 뒤에 날마다 노점에서의 수입은 한달에 대체로 2천元이었다. 속으로 딸아이의 태도를 보아하니 전혀 바뀐 것이 없어요 만일 좀 엄밀하게 어디가 바뀌었나 말을 하자면 그것은 예쁘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때 집안의 뜰에서 한마리의 암닭을 키웠는데 날마다 달걀 하나씩을 낳았다. 그래서 딸아이의 고생을 달래려고 갔다 주었는데
누나가 달걀을 가지는 것을 볼때마다 동생인 长禧는 매우 부러워 하였다. 아마도 长禧가 고급 중학교에 다닐 때로 음악홀에서 노래를 다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등려군은 , 동생의 고급중학교 진학을 축하하려고 시계를 사러 가겠다고 말을 하고는 자동식의 고급시계를 선물로 사주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첫번째 시계이었다. 그시절 장남은 인쇄 공장에서 일을 하였고 이 뒤로 스스로도 인쇄 공장 회사를 차리게 되었다.
둘째오빠는 배를 타러 갔고 셋째 오빠는 사관학교에 갔고 그녀의 수입이 늘어나기 때문에 비교적 큰 집으로 이사하여서 살 수 있었다.
1967년 9월 우주 음반회사는 등소저 생애의 첫 앨범 음반을 출시하였는데 《凤阳花鼓》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앨범으로 그속에는
《桃花江》、민요《凤阳花鼓》,《何日君再来》이 개명된《几时你回来》등이 들어 있다. 이 앨범 음반의 제목으로《邓丽君之歌第一集》쓰여졌으며 일련번호는 결과적으로 이 시리즈에서 모두 다 19장의 음반이 나왔다.대북에는 夜巴黎(밤의 파리)라는 음악홀이 있는데
한번 공연은 90분으로 대체로 15명의 가수가 출연을 하는데 등소저는 이 음악홀에서 연속으로 70일간 노래를 하는 놀랄 만한 기록을 만들었다.그녀가 노래를 다 부를 때마다 청중들은 내내 앙콜을 외쳤다. 결과적으로 모두 두곡 세곡 네곡 노래를 더 하게 되어서 다른 가수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으며 이 뒤에 마지막 순서(영광스런 순서)에 노래하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등려군 어머니는 딸이 아직은 어리기에 더 나이가 많은 선배들이 마지막 순서에 노래하는 것이 훨씬 좋다며 핑계를 대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음반이 출시된 등려군은 자기의 노래를 부를 뿐만 아니라 또한 일본 노래인《手提箱女郎》、비틀스 노래, 민요등을 불렀다.
그리고 이전에 같은 무대에 서는 여자 가수가 매니저에게 등려군을 빼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등려군 어머니는 딸을 달래며 말을 하였다:
이렇게 마음 아파 하지 말아라 재주가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모두 다 살수 있다
第四张唱片终于有自己的新歌——《晶晶》,之前的唱片一直唱别人的歌。就在台湾第一部连续剧《晶晶》一九六八年播出时,她唱的主题曲,是由古月作曲,唱片风行到必须排队才买得到,引起非常大的轰动,但是邓丽君却比较喜欢上电视节目表演。
在一九六九年十六岁的时候,就参加电影《谢谢总经理》的演出。电影里面饰演在一位年轻有为的总经理所开的公司上班,因一些困难的解决而和老板谱出恋曲的故事,在当时的台湾电影院开演前会有二十分钟的歌唱歌唱表演,前十天每日限定两场的舞台现场来了非常多的观众,有人甚至听完邓丽君唱歌就回家。
제4의 앨범 음반은 마침내 자기의 신곡인——《晶晶》이 실렸으며 ,이전의 음반은 모두 다 다른 사람의 노래를 불렀다.
대만에서 첫번째의 연속극인《晶晶》이 1968년에 방송이 될때,그녀가 부른 주제곡이 바로 古月 작곡으로 음반이 인기가 있어서 반드시
줄을 서야 살 수 있었다. 매우 커다란 인기를 모았으나 등려군은 오히려 비교적 텔레비전 프로그램 출연을 기뻐하지 않았다.
1969년 16살때 영화 《谢谢总经理》에 출연하였는데 영화에서 한 젊고 유능한 사장이 경영하는 회사에 출근하는 역할을 연기하였으며 어떤 빈곤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장과 사랑의 노래를 작곡한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대만의 영화관에서는 상영전에 20분간 노래를 부르고 상영을 하였다. 이후10일 간 날마다 2회 한정인 무대 현장에 많은 관객이 왔었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등려군의 노래를 다 듣고서야
집으로 돌아 갔다.
이해에 등려군도 싱가포르 총리 부인이 주최한 자선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등려군으로서는 이번 여행이 첫 출국이었다.
그녀는 어째서 먹는 음식이 평상이 먹던 맛과 거의 같은 지가 의아하였는데 나중에 듣자하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다 福建省에서 왔다는 것을 듣고서는 까닭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1980년 홍콩 무대에 올라 발전을 하였다. 香港丽歌厅”(홍콩 음악홀)과 공연 계약을 하여서, 홍콩에서 공연을 하기로 결정하였을 때,자기를 영어 이름으로 TERESA·TENG을 골랐으며 홍콩에서 출시되는 음반에도 모두 다 등려군과 TERESA·TENG”이라고 표시하였다.
등려군은 홍콩의 九龙에 东方”이라는 음악홀에서 노래를 부를 때 홍콩 섬의 喜来登酒店(쉐라톤 호텔)에서 머물렀으며 그때는 아직도 지하철이 없어서 반드시 배를 타고서 강을 건넜다.평일을 말하자면 오후 2시부터 4시반 까지 밤에는 7시반부터 9시반 까지, 10시부터 12시 까지, 하루에 3차례 공연을 하고 만일 토,일요일에는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3시부터 5시까지 이런 뒤에 밤에는 2차례 하루에 4차례의 공연을 하였다. 한차례 공연은 대체로 10명 정도의 가수가 노래를 불렀는데 한사람이 2곡을 불렀고 처음에는 등소저가 노래 순위가 중간 쯤
이었으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서 노래 순서도 점차로 뒤로 가게 되었다.
엄마! 오늘 아주 많은 관객들이 와서 매우 기뻐요! 등소저는 늘 이런 말을 하였다.
이때 《晶晶》앨범을 출시한 宇宙公司는 경영이 좋지 않아서 문을 닫게 되었다.그리하여 홍콩의 乐风唱片公司와 1971년 12월 12일 계약을 맺었다. 이 회사는 원래 말레이지아를 근거로한 회사이었고 이후에 싱가포르 홍콩 대만에 모두 지사가 있었다.
이때 古月을 필명으로 하는 左宏元이 등소저의 음반 제작자로 파견되었다.
古月은 欧阳菲菲의 첫앨범 담당 제작자이었는데 또한 翁倩玉을 위하여 작곡도 하였다. 등려군을 담당하는 제작자인 古月은
등려군을 위하여 악보를 썼을 뿐만 아니라 홍보용 글조차도 모두 다 손수 썼었기에 등려군 어머니 素桂는 언제나 만두를 만들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古月에게 야식으로 등소저를 통해서 보내주었다.
경쾌한 노래는 발음이 비교적 짧아서 쉽사리 어려 보인다고 느낄 수 있는데, 너는 이미 18살이 되었으니 따라서 마땅히 조금은 비교적 성인의 느낌이 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
등소저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였다.
《谢谢总经理》이 영화도 이 한해동안 홍콩에서 상영이 되었다. 등소저는 사상 최연소로 白花油慈善公主로 뽑혔는데, 그때 18살이었다.
또한 텔레비전 드라마《天涯共此时》에도 출연하고 있었다.등소저는 유명해진 에 대하여 단지 어머니에게만 이야기하였다."영화스러워요"
1972년 19살의 등소저는 홍콩의 10대 가수로 선정이 되었고 1973년에는 주연한 영화《歌迷小姐》로 인하여 《千言万语》노래가
많이 팔리게 되었다.《彩云飞》이라는 비극 애정소설을 영화로 만들려고 할때 《千言万语》를 삽입곡으로 쓰게 되었다.
古月이 작곡을 한뒤에 감독이 古月에게 물었다: 작은 아이가 어떻게 어른의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古月이 몇사람을 찾아서 이 노래를 녹음하여서 감독에게 들려 주었는데 마지막으로 여전히 등소저가 선택되었다.
또한 이해에 그녀는 北投에 별장을 한채 구입하였고 다시 아버지를 위하여 아름답게 만든 스포츠카를 선물로 사드렸다.
아버지는 날마다 늘 엔진을 켜서 차를 따뜻하게 하였으나 부주의하게 차를 몰아서 벽에 부딛쳤었다.
중화인의 세계에서 이름이 난 뒤로 여러 곳에서 초청이 있어 등소저는 어머니와 같이 홍콩 월남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를 순회공연하였다. 공연한 곳은 중국 음식점, 식당, 나이트 클럽등등 이었다. 그중에서
등소저에게 인상이 깊었던 것은 월남에 가서 공연한 그 때일 것이다.식당에서 삼륜차를 타고 공연장으로 갔는데 수상 부인이 미국군인과 월남여인이 낳은 아이 900여명을 초대하여서 사이공의 극장에서 등소저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등소저는 출국할때 마다 선물을 사는 것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출국전에 동생 등장희를 위하여 발크기를 짐작하고 스케이트를 그를
위하여 샀었고 또한 아버지를 위하여 로렉스 시계나 양복감을 샀었다.
일단 대만으로 돌아 오면 언제나 현지의 토산품과 특색에 대하여 이야기를 가졌다. 싱가포르의 거리는 매우 깨끗해요, 대만의 오토바이와 택시는 너무나 혼란스러워요. 왜 고칠 방법이 없나요? 동생 등장희도 언제나 이것때문에 누나와 같이 한동안 논쟁을 하였다.
1973년 3월 일본의 宝丽多 唱片公司는 佐佐木幸男와 中村準良 두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홍콩 여행 3박 4일을 하게 하였다.
佐佐木는 泽田研二을 담당하였고 中村는 野口五郎를 담당한 제작자 이었다. 여행의 목적은 홍콩의宝丽多 에 가서 친선방문을 하기를 바랐으나 사실상 그들의 평시의 업무의 고생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佐佐木 와 中村는 홍콩에 도착하자 바로 홍콩의 宝丽多唱片公司로 달려가서 그때 홍콩의 제작부서의 부장인 郑东汉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어디를 갈 지를 물었다. 그들은 바로 노래를 들어러 가자고 대답하였고 郑东汉도 바로 음악홀을 예약하였다.
다음날 그들은 郑东汉에게 자신들을 위하여 등려군의 음반을 수집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음반을 듣고서는 그들은 목소리의 수준이 따스한 분위기가 있게 느껴진다고 인식하였으며 설사 일본에서도 상당하게 인정받는 인물로 인정되리라고 하여서 佐佐木와 中村는 이런 판단을 내렸다. 일본 가요계에는 이미 홍콩의 陈美龄과 대만 출신의 欧阳菲菲가 이미 데뷔를 하였으나 그들은 등소저가 이 두사람 같은 가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날 밤 그들은 음악홀의 앞쪽 4번째 줄에 앉아서 콜라를 마시며 공연을 보았다. 대단한 등소저의 공연을 다 보고는 매우 좋았다는 것을
좀더 알게 되었다. 단지 노래하는 것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종의 총명한 느낌도 있었다. 佐佐木에 의하면 가수로 성공하렴면 지성을
갖추었는 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고 하였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佐佐木는 말을 하였다:
나는 손수 이 가수를 위하여 제작을 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郑东汉에 부탁하여 계약과 관련된 일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回到东京的翌日,位于世田谷区池尻大桥的宝丽多唱片公司了,五十岚泰宏制作本部长正在主持制作人会议。佐佐木在会议中报告出差状况,然后拿出唱片指着封面,极力主张务必签下邓丽君。其实佐佐木从香港回东京的夜晚,因为兴奋无法入睡。他心想不早一天将她签下来,就可能被别家公司签走。佐佐木很坚决的说着,被这股魄力所震慑的制作本部长就说:
“知道了,舟木,你明天立刻去香港签约。”
当时担任制作签约部部长的舟木先生就被命令去和邓小姐签约。
동경으로 돌아간 다음날 世田谷区 池尻大桥에 있는 宝丽多唱片公司에서 五十岚泰宏제작 본부장이 마침 제작자 회의를 하고 있었다.
佐佐木는 회의 중에 출장상황을 보고 하였는데 이런 뒤에 봉투에서 음반을꺼내며 반드시 등려군과 계약을 하여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사실 佐佐木는 홍콩에서 동경으로 돌아 온 밤에 흥분하여서 잠들 수 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그녀와 계약을 체결하는 데
하루도 빠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다른 회사와 계약을 할 수 도있었기때문이다. 佐佐木는 매우 강하게 정곡을 찔렀는데
이런 박력에 의하여 겁먹은 제작본부장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 알았다 舟木씨 당신이 내일 당장 홍콩으로 가서 계약을 하시오.
그때 제작을 담당한 계약부 부장인 舟木는 임명되어서 등소저와 계약을 하러 갔었다.
계약 교섭을 위하여 그들은 구룡의 尖沙嘴에 있는 美丽华호텔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등소저는 계약 대행회사가 없었기에 그래서 모든
작업의 세부사항은 모두 다 어머니 素桂가 돌보아 주었다. 그래서 舟木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였다:
이본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음악 시장입니다. 어머니와 같이 일본으로 가서 공부하는 것이 응당 좋을 것같습니다.
마침 계약 조건을 설명하는 때에 등소저는 갑자기 말을 하였다: 일본을 한 번 가볼까 생각합니다.
舟木가 희망이 있다고 판단을 하었다.그러나 등소저는 "나는 가기를 바란다"고는 꾸물 거리며 말을 하지 않았서 그를 매우
신경쓰이게 하였다. 몸매도 아름답고 날씬하고 감각도 매우 맑고 신선하여서 바로 스타 가수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舟木의 등소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나요? 舟木는 초대하고는 이 첫 만남을 끝냈다.
舟木과 헤어진 뒤에 등소저는 어머니에게 말을 하였다: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어머니 素桂는 대만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얻은 대답은 반대이었다. 딸아이가 대답하였다:
그럼 가지 않겠어요. 어머니도 대답하였다: 좋아. 그러나 이때 등소저의 속마음은, 동남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이미 이름이 나서 일류가수가 되었는데 외국에 가 도전을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절로 일어났었다.
설령 함께 尖沙嘴의 커다란 上海饭店에서 식사를 하였지만 그녀의 응대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알수는 없었다. 그녀는 관심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일을 하고 싶어요.舟木는 홍콩의 宝丽多公司로 부터 받은 정보는,이미 홍콩에서의 수입도 좋기 때문에 부모가 반대하고 있어서 고심하여서 일본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홍콩의 宝丽多公司의 직원들은 등소저와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다른 여자 가수를 추천하려고,
다른 여자 가수를 찾아보는 것이 어떠십니까 ? 하였다. 郑东汉조차도 말을 하였다:
설령 그렇다 해도, 됐어요! 舟木는 여전히 매우 집착을 하였다. 특히 한 일본통이 그에게 말을 하였다:
"등려군은 대만의 미소라 히바리(美空云雀) 입니다 " ,더욱더 그더러 전력을 다 기울이게 하였다.
舟木은 먼저 동경으로 돌아간 뒤에 다시 대만을 날아 갔다.아버지 邓枢를 설득하기 위하여서였다. 대북시德惠街에 있는 統一饭店
에서 邓枢의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한뒤에 宝丽多의 정보가 정확하였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아버지는 현재의 수입도 매우 많아서 일본에 반드시 가야 할 필요가 없고 게다가 딸이 사람도 땅도 낯설은 곳으로 또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다.그러나 舟木 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 등소저 본인은 일본 진출에 흥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舟木는 더욱 더 직접 北投의 등려군 본가로 가서 일본 진출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할 생각을 하였다.
이때 舟木는 반대하는 정도가 이전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긴 설득을 하고는 마침내 등려군 아버지의" 그럼 당신에게
허락하겠소,舟木先生"이런 대답을 얻었다.
어머니는 이상의 말을 듣고는 또한 딸아이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결정하였다. 舟木는 그들의 내놓는 모든 요구를 받았드렸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의 거주 문제,계약금, 희망의 조건 등이었다.
舟木는 모든 문제마다 등소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물어 보았는데 그녀는 언제나 대답하였다:
"어머니에게 여쭈어 주세요." 느낌으로 그녀는 결코 불안감이나 걱정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머니 素桂는 딸이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일본어로 인사등을 할 수 있도록 공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설령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동안이라도 중국인 가정교사에게 딸아이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등소저는 곧바로 졸리워하였는데 또한 이렇게 말을
하였다: 지금은 공부할 마음이 없어요. 일본에서 일할 동안에 쓸 이름을 생각하여야 해요, 어머니 素桂는 중국어 이름을 쓰는 것을 좀더 좋아 하였으나 그러나 등려군은 邓、丽、君이라는 발음이 듣기에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여서 이 이름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홍콩에서 쓰는 TERESA·TENG라는 예명이 있기에,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께 말을 하였다:
어머니, 이것을 쓰면 좋을 것 같아요! 일본에 가게 되면 TERESA·TENG라는 예명으로 음반을 낼래요. 일본 회사에도 이 이름에 동의하였어요.
일본에 진출하고서의 업무 경영은 와타나베(渡边)制作公司가 관리를 하고 음반의 제작은 일본 宝丽多가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일단 2년의 계약을 하였고 첫 계약의 일시는 1973년 4월 12일이었고 등려군 어머니와 등소저의 동의에 의하여 체결된 첫번 계약서에
첫해의 보수는 매월 일본돈으로 25만 元이었다. 그 때 일본 대학 졸업의 공무원의 최고직의 월급이 일본돈 55,600 元이었다.
계약 회사는 渡边制作公司에 속한 자회사인 桑梓와 직접 등소저와 경영을 계약하였다. 다시 桑梓公司가 宝丽多와 계약을 맺는 형식이었다.
잠시 신쥬쿠(宿在)의 아카사카(赤坂)의 新日本饭店에 머물렀으며 경비는 渡边制作公司가 부담을 하였다.
음악은 宝丽多와 渡边音乐出版公司가 같이 공동으로 제작하기로 하였다. 등소저는 2 %의 인세를 받게 되었다.
이어서 일본에 진출하는 것에 대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1973년 11월에 등려군 어머니와 등소저는 첫으로 일본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등소저는 겨우 20살이었다.
하네다(羽田) 공항에 직접 온 사람들 속에는 樱井五郎(사쿠라이 고로)도 그안에 있었다. 樱井五郎는 그때 渡边制作公司의 유명가수인 石田步、大信田礼子、安·露易丝(안 루이스)등 유명한 가수등을 총괄담당 하는 매니저 이었다.어느날 상사인 井泽健에게 불리워 갔는데 일본에 진출한 등려군의 매니저 담당이 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래서 樱井는 등려군의 모든 음반을 다 듣고는 무슨 노래를 골라서 데뷰하는
등려군이 부르게 할 지를 기획하기 시작하였다.
하네다(羽田) 공항에서 등소저를 본 첫 인상은 마치 福婆婆 같은 모습이지만 밉지는 않았다. 아름답지 않은 “福婆婆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로 오히려 인정이되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소녀가 인기를 만히 끌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邓小姐是个态度柔和,外表给人清纯的感觉。看过无数歌星的樱井,发觉到她和一般女孩不同的优点,好比虽然不是艺人,但是走在街头会引人多看一眼的人大有人在,但邓丽君是属于经过琢磨后自然散发出一种光芒的人物。应该用什么方式在日本呈现,到底能被接受到什么程度?其实在樱井的心中有许多的不安。
등소저는 태도가 온화하고 겉모습이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었다.수 많은 가수를 보았던 樱井는 그녀에게서 일반적인 소녀와는 다른 장점을 발견하였는데 예를 들면 비록 예술인은 아니지만 그러나 길거리를 가다가 한번 보면 사람을 이끄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러나
등려군은 훈련을 거친 뒤에 자연히 일종의 광채를 발산하는 인물에 속하였다. 어떤 방식으로 일본에 데뷰하여야 하는 지 도대체 어느 정도
받아드려야 하는 지? 사실 樱井의 마음속에는 많은 불안감이 있었다.
데뷰한 노래는 渡边制作公司가 주도하였는데 우상 트렌드를 시도하였다. 70년대의 일본 가요계 초기는 小柳琉美子의 《我的城下町》(わたしの城下町)、天地真理(아마치 마리)의《水色之恋》(水色の恋)、欧阳菲菲의《下雨的御堂筋》(雨の御堂筋)등의 유행가가
인기가 있었는데 그래서 신곡은 天地真理에게 부탁하여서,陈美龄이 작사하고 山上路夫(야마가미 미치오)가 곡을 쓰게 하였고 다시
南沙織(미나미 사오리)에게 부탁하여서 欧阳菲菲가 썼고 인기가 있던 筒美京平에게 작곡을 하게 하였다.
佐佐木와 樱井는 함께 등려군을 데리고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가서 견학을 하였다. 월요일 일본NTV방송국의《红白前十名》과 후지 텔레비전의《夜晚的热歌舞台:한밤의 뜨거운 노래 무대》를 보러 갔었고, 화요일에는 TBS의 《唱吧!演奏曲:부르자 연주곡》,하여간 날마다 여러 방송국의 음악 프로그램을 가서 견학하였다.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모든 TV방송국의 음악프로그램을 참관하였다.
"왜냐하면 장래에 우리는 반드시 이런 일본의 일류 유명가수만이 오를 수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야 합니다.'佐佐木의 이런 격려의 말을 듣자, 등소저의 눈동자는 곧바로 반짝이였고, 게다가 등소저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이었다.어떤 음악 프로그램이건 간에 모두 다 큰 악단이 반주를 하였다."동경은 실제로 너무 좋았어요. 왜냐하면 시장이 매우 컸어요"
등소저는 잘 못하는 일본말로 그녀가 받았던 인상을 이야기 하였다.일본활동이 결정된 뒤부터 등소저는 곧바로 노트에 일본어를 쓰면서
연습을 하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만일 질문을 받게 되면::“H~ai”(好吗?:안녕하세요?)어머니는 즉시 대답을 하였다:“H~AI”,
전에 일본어를 말해 본적도 없었고 일과 연관된 것도 일찍이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아무도 모르게 그저 딸만 돌보았는데,
일반적인 일본의 스타 어머니와는 같지 않았다.
佐佐木등은 식사하기에 적합한 음식점을 찾는데 진력을 하였다. 어느날 有乐町의 전철 아래에 있는 烧肉店에서 돼지다리를 먹고 있었는데,
등소저는 여러차례 맛이 있다고 말을 하였는데 표정은 보기에 매우 기뻐보였다. 처음으로 일본음식을 먹은 것은 涉谷东急广场의 9층에
있는 味田之屋라는 일본요리점으로 鲑鱼茶泡饭(연어お茶漬け)를 먹은 것이다. 그녀도 일본의 涮涮锅和茶碗蒸(샤브샤브 냄비와 ちゃわんむし)를 매우 좋아하였다.
1974년 2월 7일 등려군은 감기 몸살로 집에서 하루 종일 잠을 잤었다. 밤에 일어난 뒤 창가로 가서 밖을 보았는데
그녀는 하얀빛깔의 물건이 바람이 휘날리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태어나 처음으로 눈 내리는 것을 본것이었다.
등소저는 감동에 겨워서 환호를 하였다 일본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신선한 자극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던 중 등소저는 한차례 대만으로 돌아 갔었고 일본에서 정식으로 1974년 2월15일에 출시를 위하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 갔다.
羽田공항에 도작하자 마자 곧바로 赤坂王子饭店 구관의 기자 회견장으로 달려갔는데, 회견장에는 이미 백명이 넘는 인터뷰 매체가 모여 있었다. 등려군이 회견장으로 들어 서자 간간히 사진 플래쉬가 끊임없이 터졌다.
이런 뜨거운 반응을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매우 놀랐다. 등려군의 양켠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일본의 宝丽多회사의 五十岚제작본부장
과 渡边制作公司의 井泽이었다.
등려군은 음반 출시전에, 회사는 “香港的红玫瑰”(홍콩의 붉은 장미)라는 것으로 작사한 것을 홍보하였는데 “香港最红的歌星”(홍콩의 가장 인기있는 유명가수)를 의미하였다.그때 등소저는 이미 21살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오히려 19살로 회견장에서 발표하였고 작년 11월에 등소저
가 처음으로 일본에 와서 녹음한 《是今夜还是明天》(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를 내 놓았고,미니스커트를 입은 등소저는 마치 정말로
같이 노래하는 것 같았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회견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사람씩 장미꽃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佐佐木正가 막 떠나려 할때 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TBS 방송국 기자인 铃木明가 그에게 말을 하였다:
이러면 너무나 지나친 것입니다. 일본과 대만의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을 까요? 등려군은 대만 출신이니 당연히 그녀를 대만의 장미라고
고쳐 불러야 하지 않나요?
사실 铃木는 일찍이 등려군이 16,7살때 대만의 음악홀 무대에 올라 공연할 때,그녀의 공연을 보러 가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었다.
그때 그녀가 만일 일본 가요계에 있다면 반드시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등려군은 정말로 일본에 진출하게 되자 그를 매우 기쁘게 하였고 아울러"최고의 대만 인기가수"를 오히려 "홍콩의 인기가수"로
불리우게 되는 것이 그로서는 참을 수 없게 하였다.
佐佐木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는 홍콩에서 우연히 등소저와 만나서 계약을 하였기에 등소저는 “香港的玫瑰”의 가수라고 생각하였으나
사실은 정말로 지적된 것과 같았다.
邓丽君以流行曲调的《是今晚还是明天》一曲出道,光是三月份就上了四十五个电视节目,因同属与渡边公司,所以能在大牌歌星森进一四月二十六日至五月三日在日剧的演唱秀上唱歌。但印制的三万张唱片没卖出,在日本当时的歌曲销售排行榜只进到第七十五名而已。
邓小姐对这个结果感到自责。“卖不出去是因为我不好,我必须更加努力才行。”
舟木先生好几次安慰了自责的邓小姐说:“刚开始都是这样的啦。”其实因为在香港挖掘邓小姐,当谈不成邓小姐时,有被问及“改签能演能唱的优雅怎么样?”的那位优雅也已经在日本出道,而且相对于邓小姐的《是今夜还是明天》排行榜第七十五名的成绩,优雅的《处女航》却拿到排行榜第二十四名。在香港自己的地位远超过优雅,但在日本的成绩却输她,这点让邓小姐感到非常郁闷。
등려군은 유행곡《是今晚还是明天: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로 데뷰를 하였는데 겨우 석달만에 45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였다.
渡边公司와 같은 소속이었기에 최고인기가수인 森进一가 하는 4월 26일 부터 5월 3일까지의 日剧의 공연show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그러나 발행된 3만장의 음반은 팔리지 않았는데 일본에서 당시의 노래 판매순위표에는 겨우 75위에 진입하였을 뿐이었다.
등소저는 이결과에 대하여 자책감을 느꼈다.
팔리지 않는 것은 내가 잘하지 못해서 입니다 나는 반드시 좀더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舟木는 여러차례 자책하는 등소저를 위로하는 말을 하였다: 막 시작한것은 모두 다 이렇습니다. 사실 홍콩에서 등소저를 발굴하였기에,
등소저와 의논하지 않았을때,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는 우아한 사람이라고 고쳐서 홍보하면 어떨까? 하는 그 사람이 우아하게 일본에 이미 진출하였고 게다가 등소저의《是今晚还是明天: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가 순위표 제75위 올라가있으며, 우아한 《处女航》가 오히려 순위표 제24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물어 보게 되었던 적이 있다.
홍콩에서 자기의 지위는 우아한 수준을 훨씬 넘었으나 일본의 성적은 그녀를 오히려 지치게 하였고 이점이 등소저를 매우 우울하게 하였다.
《是今夜还是明天》这首曲子,樱井认为是别的歌星唱不来的曲子,而且对电视节目的伴奏乐团而言太难了,无法达到唱片水准的演奏,所以通常只能交代他们伴奏最简单的版本。
为什么不卖?樱井以观众的立场去思考问题的原因:这首曲子给人一种上流社会格调太高的印象,而且以邓丽君的容貌和音质去判断,基本上而言,不应该把她做成流行曲风的歌星。
“这个女孩绝对只能作唱演歌。”
樱井下了这样的结论。
《是今晚还是明天: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이노래에 대하여 樱井는 다른 가수는 부를 수 없는 노래이고 게다가 텔레비젼 프로그램의 반주악단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매우 어렵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음반 수준의 반주를 할 도리가 없었기에 보통 그들에게 가장 간단한
버젼으로 하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왜 팔지 않나요? 樱井는 청중의 입장에서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였다: 이노래는 일종의 상류사회의 격조가 너무나 높은 인상을 주고 있고
게다가 등려군의 용모와 음질로 판단하여서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를 유행가 스타일의 가수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이 여자는 절대적으로 엔카를 할 수 밖에 없어요.樱井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등려군이 데뷰한 노래가 아직 인기를 얻기 못하였기에 그래서 등려군을 발굴한 佐佐木로서도 하나의 부담이라고 할 수있다.
비록 음질과 감정상의 표현이 모두 충분히 뛰어나더라도 그러나 인기를 얻지 못하는 까닭은 , 이것은 일본어를 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원래는 21살의 나이를 19살로 낮추고 10대의 어린 연령층의 팬들을 주로 대상으로 한 설정이 잘못인가? ...
이런 고민이 한달이상 지속되어서 거의 날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작곡가 筒美京平는 엔카의 길을 견지하도록 이미 4곡의 유행가 스타일의 노래를 좋게 만들어 놓았으며 佐佐木와 의논하여서
회사에는 보고를 하지 않고서 猪俣公章에게 남몰래 작곡을 의뢰하였다.猪俣公章는 그때 오로지 森进一을 위하여 작곡하던 작곡가로,
佐佐木가 엔카를 쓰는 것이 특기인 猪俣에게 유행가 스타일의 노래를 써달라고 부탁을 하였다.그러나 猪俣는 이미 DEMO 테이프 조차도 다 만들었는데 왜냐하면 樱井가 森进一를 위하여 유행가 스타일의 《我的朋友再见》(さらば友よ)를 이미 써놓았기 때문이었다.
山下路夫는 《雨的空港》이라는 가사를 노래 한곡을 써놓았는데,仿柯尼 Francis의 정서, 배경은 유럽으로 설정하였다. 仿柯尼 Francis는 1960년에 인기리에 불렀던 《可爱宝贝》와 《VACATION》의 미국 유명 가수이다.
被委托写歌的猪俣说:“你们也真是的,怎么要求这么稀奇的事呢?”但在一周内却写了三种曲风给他们。佐佐木是喜欢优美旋律的人,但樱井想做的是比较通俗的歌,樱井甚至主张将佐佐木用小提琴伴奏完成的序曲版重新制作改为小喇叭演奏。樱井的意见是曲子像“西田佐知子唱的歌较好”,佐佐木让步了。所以编曲选择采用活跃在流行风派的森冈贤一郎,理由是不想让曲风呈现太道地的演歌所下的工夫。
舟木一听佐佐木说第二张单曲改走演歌路线时,“到底会红吗?”的疑问让他很不安。听到完成后的曲子,认为很适合森进一唱,但判断应该不是邓丽君唱的歌曲。
“再做一首试试看吧。”
노래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猪俣가 말을 하였다: 당신들도 참 나, 어떻게 이런 흔치 않은 일을 요구하십니까? 그러나 일주일안에 3가지 스타일의 우아한 선률을 가진 곡을 그들에게 써주었다. 佐佐木는 우아한 선률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樱井는 만들고 싶었던 것은 비교적 통속적인 노래이었다. 樱井는 심지어 佐佐木에게 바이올린으로 반주하여 완성한 서곡을 새로이 작은 나팔 연주로 고쳐서 만들기를 주장하였다.樱井의 의견은 곡이 西田佐知子가 부른 노래가 비교적 좋아 보인 것 같다는 것이다. 佐佐木는 양보를 하였다.
그래서 편곡은 유행가 스타일로 활약하는 森冈贤一郎이 선택되었는데 까닭은 뜻밖에 노래 스타일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만든 너무나 감정적인 엔카로 보인다는 것이다.舟木이 듣고는 佐佐木에게 두번째 앨범을 엔카 스타일로 가라고 말을 하였고, 아무튼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까? 하는 의문이 그를 매우 불안하게 하였다. 다 된 뒤의 노래를 듣고는 森进一가 부르면 매우 적합하다고 여겼고, 등려군이 부를 노래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다시 한번 노래 한곡을 써 주세요!
舟木는 이렇게 말을 하자,佐佐木는 오히려 강경하게 대답하였다:이 노래를 바로 씁시다. 만일 하지 않으면 나를 교체해 주시길 바랍니다.
올해의 일본 음반 대상으로 뽑힌 노래는 森进一가 부른 《襟裳岬》인데,이런 유행스타일과 엔카의 융합 노래는 깊숙하게 청중의 속 마음을 움켜쥐는 시대이었다.舟木는 할 수 없이 양보를 하였고 다음날 녹음을 하였다. 최초의 노래 이름은 《雨的空港》이었으나,
欧阳菲菲가 불렀던 《雨的机场》(空港就是机场)때문에,그래서 雨的”이라는 단어를 빼버리고 《空港》으로 하였다。
7월 1일 출시된 제2 싱글《空港》은,주 대상을 20살 부터 25살까지의 여자 오피스걸들로 설정하였고 그리하여서 정말로 성공을 바랬다.
게다가 조사 결과에 의하여 40 살 전후의 남성 팬들도 다수 차지 한다고 나타났다.
그리고 매우 빠르게 유선방송에서 노래 신청하는 반응이 나타났다.실제로 17만장의 음반이 판매되었다. 등려군은 이 노래로 인하여 1974년 일본음반 대상의 신인상 (최우수 신인상을 차지한 사람은 《逃避行》를 부른 麻生洋子이다)을 차지 하였고,이리하여서 향후 20년간의 일본 음악계에서의 성공한 명실상부한 슈퍼스타의 주춧돌을 다지게 되었다.
그러나 등려군 속마음에 갈등도 이때 시작되었다.홍콩,대만에서는 美空云雀와 마찬가지의 초특급 슈퍼스타로 여겨지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일반적인 신인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었고 게다가 신인을 대하는 일본의 일반적 대우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고
프로그램에서의 인터뷰와 대화도 신인으로서 대우할 뿐이었다. 설령 공연에 참가하더라고 단지 신인처럼 작은 시간만 노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이 어느때인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공연을 할 때 일어났는데 홍콩에서 온 玲玲,兰兰이 뜻밖에도 등려군이 한칸의 대기실을 공용으로
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였기에 이때 화를 내면서 소속회사 太阳音乐의 福田时雄에게 말을 하였다:
어째서 陈美龄은 개인 대기실을 사용하는데 등려군은 오히려 우리들과 공용으로 써야 합니까?
그녀들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등려군과 같은 이런 등급의 슈퍼스타와 공용으로 대기실을 쓰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등소저가 나타난 것을 보고난 뒤 玲玲,兰兰은 뜻밖에 흥분하여서 말을 하였다: 등소저, 우리에게 싸인 좀 해 주세요.
그리고 언젠가 일본의 남성 주간 잡지의 사진을 찍으러 오키나와로 촬영을 갔는데 사전에 수용복 사진을 찍는다는 것을 들었으나,
등소저는 촬영팀원이 비키니 수용복을 가지고 오자 등소저는 오히려 놀라며 대답하였다: 중국인은 정말로 이런 수영복은 입지 못해요,
싫어요.
여러번 일본의 신인이 데뷰를 할때는 언제나 이런 수영복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등소저는 여전히 완고하게 촬영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결과적으로 촬영팀원은 하는 수 없이 소박한 올인원 수영복 을 그녀에게 주어서 입고 난 뒤에야 비로소
사진을 찍었다.
일본에서 데뷰하고서 내내 궤도에 오를 때 까지 등려군의 속마음은 결코 순풍에 돛을 단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등소저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일본에서는 음식이나 신일본호텔에서 거주하는 것을 막론하고 생활에서의 문제가 대체로 적합하였으나
유독 가장 커다란 난제를 만났는데 바로 언어이다. 예컨데 “watashi(我)”를 말하자면,언제나 발음이 “wadashi”로 되었는데, 예컨데
품사의 발음 문제같은 것을 내내 연습할 도리가 없었다.
또한 언어상의 장애에서 이를 극복할 방법이 없었기에 등소저는 일찍이 어머니에게 대만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을 여러 차례 나타냈다.
그러나 일본에서 가수가 되려고 생각하려면 반드시 언어에서의 이런 난관을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머니 素桂를 담당한 통역자는 대만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귀화하여서 일본 국적이 된 바이올린 연주자인 佐井芳男이었다.
어머니는 佐井芳男에게 딸아이의 일본어 지도를 부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딸에게 중화인 이웃의 아파트로 이주 시킬 작정이었다.
등소저가 어머니에게 말을 하기를 호텔에서 지내는 것은 충분한 휴식을 가질 방법이 없었기에 대체로 한달 여 찾았으나 내내 알맞은 살집을
찾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비로소 原宿에서 중화인이 주인인 올림피아 빌딩를 발견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등소저가 반년 여의 호텔 생활을 끝내고 안정되게 쉴수 있게 되었다.7층 높이의 건물에 등소저의 새로운 방은 4층이었고 두개의 방과 두개의 홀이 있으며 등소저는 침실에 흰색 가구와 침대와 깔개를 선택하였다. 침대 곁의 탁자위에는 많은 화장품을 놓아 두었고 탁자 곁에는 언제나 전신을 비춰 볼 수 있는 커다란 거울을
놓아 두었다.등소저는 늘 침대위에 누워서 일본어 교과서를 보았으며 아니면 침대에서 포커 점을 치곤 하였다. 언제나 그녀는 깊은 밤 2시에 잠에 들수 있었으며 아침에는 7시에 일어 났었다.
《空港》의 열렬한 판매가 등려군을 날로 바쁘게 하였기에 그때 한달에 4,5개의 호텔이나 음악홀을 뛰어 다녀야 했다. 신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나쁘지 않은 수입이었지만 등소저는 오히려 울면서 언제나 어머니에게 호소하였다:
술에 취한 손님 앞에서 노래를 부를 생각이 없어요. 어째서 일본에 와서 이런 곳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안되나요............사실 등소저는
대만에서도 일찍이 음악홀에서 노래를 불렀었다. 원래 음악홀의 환경과 분위기는 결코 낯설지는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손님과의 응대 방식이
대만과 같지 않았기에 혐호감이 생기는 것을 금치 못했다. 그중에서 가장 그녀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함께 춤을 추거나 함께 번갈아 노래 하는
것을 요구받는 것이었다. 심지어 공연할 때 취객들 중에서 큰 소리로 옷을 벗은 사람들이 저속하고 비열한 말을 하였다.
등소저는 회사에게 "일본남자의 지나친 횡포와, 차라리 보수를 받지 않을 지언정 이런 부류의 공연을 멈추어 주길 바란다"는 등의
성명을 제출하였고 이뒤로 그녀는 다시는 호텔이나 음악홀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邓小姐很喜欢去上“8 时!全员集合”的电视录影,她觉得在节目中表演翻筋斗很好玩,有时候也会表演特殊才艺,也常随志村健的团体下乡公演唱开场打头阵,成员当中的加藤茶和高木会特别照顾她。
很快地,邓小姐两年的合约,酬劳在第二年就从原本的二十五万日币调高为五十万日币,甚至第三年就调升为一百二十万日币。一九七六年七月十日在新宿路易道举行第一次演唱会,身穿黑旗袍的邓小姐面对稀疏的观众唱了十五首歌,还因为太紧张,在唱《再见!我的爱人》时没有跟上音乐的节拍,当时会场的角落坐了一位贵宾,日本演员川谷拓三先生,很认真地倾听邓小姐歌唱。这个时期的邓小姐要上很多电视及电台节目又常下乡公演,忙到一个月只能休假一天。
등소저는 매우 기쁘게 "8시! 전원 집합'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녹화하러 갔었는데, 그녀는 프로그램에서 공중제비 공연이 매우 재밌다고 느겼으며 때로는 또한 특수한 기예를 공연할 수 있었다.또한 때때로 志村健의 팀을 따라서 지방으로 내려가 첫 순서로 무대를 여는 공연도 하였다. 그 단체 사람중에 加藤茶와 高木가 특별히 그녀를 돌보아 주었다.
매우 빠르게 지나서, 등소저의 2년간의 계약은 둘째 해의 보수는 원래 25만 엔에서 50만 엔으로 증액되었고 심지어 셋째 해는 120만 엔으로 증액되었다.1976년 7월 10일 新宿路易道에서 제1차 콘서트가 열렸는데 검은 색 치파오를 입은 등소저는 너무나 적은 청중을 놓고서 15곡을 부르게 되었는데 또한 너무나 긴장이 되어서 《再见!我的爱人》을 노래 할 때 음악의 박자를 따라하지 못하였는데 그때 공연장 구석에 한 귀빈이
앉아 있었는데 일본의 배우 川谷拓三로 매우 진지하게 등소저의 노래를 경청하였다. 이때의 등소저는 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라디오 프로그램 또한 언제나 지방으로 가서 하는 공연을 하여야 하였기에 매우 바빠서 한달에 겨우 1일을 쉴 수 있었다.
1975년 등소저는 홍콩의 宝丽多唱片公司와 계약을 맺는데 인기리에 불리워 지는 주제곡《小城故事》、《甜蜜蜜》등의 명곡 그리고 아울러
1976년에 홍콩에서 열린 제1차 개인 콘서트, 그 때의 콘서트는 보수가 없었고, 단지 교통비와 숙식비 뿐이 있었다.일본에서도 잇달아
출시된 《アカシアの夢(针槐之梦)》、《夜のフェリーボート(夜之渡船)》、《ふるさとはどこですか(故乡在何方)》등의 명곡. 월급이 또 250만 엔으로 증액 되었다. 그래서 음악 사업이 순풍에 돛단 듯 잘 된다고 할 만 하였다!
널리 좋은 평판이 받아들여지던 때에 사건이 오히려 일어 났다.
1979년 2월 17일에 등소저에게 영향을 끼친 여권사건이 발생하였다. 대체로 밤 8시경 그때 일본宝丽多唱片公司 편성부 부장을 담당한 舟木稔
은 또한 등소저에게 일본 진출과 등소저를 담당하는 일본의 후견인으로 계약하기를 재촉하였던 사람인데,자기 집에서 전화로 알려 주었다.
“舟木씨, 등소저가 붙잡혀 갔어요 어서 호텔로 가보세요"
등려군 어머니의 통역 佐井芳男이 전화를 걸어와서는 허둥대며 말을 하였다.
"일본 출입관리국의 직원과 인도네시아 대사관의 직원이 모두 왔는데, 여권이 문제를 일으킨것 같아요...."
그때佐井는 또한 등소저에게 물었다; " 당신은 농담하고 있나요?"
그러나 전화에서 들려오는 것은 등소저의 초조하게 하는 대답이었다: 정말이에요!
舟木는 연락을 받자 급하게 赤坂의 동경힐튼(希尔顿)호텔(지금은 CAPITOL 东急饭店로 이미 개명하였다)서둘러 뛰어 갔다.
큰홀에서 기다리던 佐井와 만나서 곧 바로 736호실로 뛰어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방안에는 단지 등려군의 어머니가 풀이 죽은 채 소파에앉아 있었다. 등소저는 이미 체포가 되어서 港区港南에 있는 동경 출입국 관리 사무소로 가 있었다.
본래 1978년 동경의 주소에서 퇴거한 뒤에 등소저는 홍콩을 계속 연예활동을 하는 거점으로 생각하였다. 원래는 1979년 연초에 싱가포르와 홍콩 공연을 하여야 하였고 그뒤에는 일본으로 돌아와서 신곡을 녹음하려고 하였다. 마지막에 다시 미국에 갈 여정이었다.
舟木는 한때 무슨일이 생겼는 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1월10일 등소저는 대만 여권을 가지고 대만에서 홍콩으로 날아갔으며, 2월 14일 등소저는 홍콩의 활동을 끝냈을 때 일본에서 작업를 벗어나서 여가를 가질려고, 일본으로 갈때 대만을 경유하여서 2,3일 머무르며 아버지를 찾아 보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일 중화민국 여권을 가지고 입국하면 반드시 다시 출국 수속이 필요하였고 가장 빨리 하더라도 처리하는데 적어도 20 일이 걸리었다.
그리고 심사직원은 등소저에게 비자가 없으면 입국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 남자가 입국심사 창구 가까이에 있었는데 이 모든 과정을 다 보았다. 그리고 이 남자는 등소저를 이 다음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지게 하였는데, 당연히 등소저는 그때 전혀 이 남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입국이 거절된 등소저는 부득이 일본으로 날아 가야만 하여서,일본으로 가는 중화항공 016 편기를 탑승하려고 기다리던 등소저는 홍콩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말을 하였다:
저는 먼저 일본으로 가니,엄마는 이틀 뒤에 돌아 오세요.
그녀가 이를 알려주고 난 뒤에 또 대만 입국할 때의 여권 문제를 이야기 하였다.
등려군 어머니는 엄중하게 등소저에게 일깨워 주었다:
나는 너에게 인도네시아 여권을 어디서나 전혀 쓰지 말라고 하였잖니, 그러니 대만에서도 쓰면은 안된다!
등소저는 반드시 주의를 하여야 하였다.
그 다음날의 제3일에 일이 일어난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등소저가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날 등려군 어머니도 이어서 서둘러 돌아 왔다.
2월 17일 저녁때 등소저는 어머니와 함께 두명의 친구를 데리고 赤坂의 “楼外楼饭店”에서 식사를 하였는데 , 상해요리 虾腰汤面,炒青菜등을 다
먹고 난 뒤, 곧바로 숙소로 돌아 왔었다. 호텔에 다달았을 때 등려군 어머니는 홀에 있는 선글래스를 낀 남자를 쳐다 보자, 등려군 어머니는
갑자기 까닭도 무른채 가슴이 뛰고 간이 서늘해지기 시작하였다.
등소저는 어머니와 함께 방으로 돌아 와서 쉬고 있는데 곧이어 전화가 울렸다.자칭 인되네시아 대사관 직원이라는 사람이 말을 하기를,
지금 호텔 로비에 있는데, 일이 있으니 등소저를 바꿔 달라고 하였다. 대사관 직원 이외에 또 일본 출입국관리국직원이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등소저의 여권을 압수하였다. 또 몇장의 사진을 촬영하고는 등소저를 데리고 갔었다.
다음날 舟木과 등소저의 어머니는 출입국 관리국에 의하여 이끌려 갔으며 그들에게 사실에 근거하여 대답하도록 하였다.
舟木는 등려군 어머니로 부터 등소저가 홍콩 노래팬들로 부터 여권을 받은 일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이외에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날 수감된 등소저와 면회를 하지 못하였고 그 다음날 舟木는 등소저와 면회 허가를 받았다. 면회때 등소저는 초췌하고, 마음이 편치
않은 듯 보였다.
제가 조심을 하지 못해서 커다란 난리를 일으켰기 때문에.........어머니는 여전히 좋나요?
등소저는 오로지 어머니만을 걱정하였고, 舟木에게" 빨리 저를 꺼내서 나가게 해 주세요"라고 부탁하였다.
등소저의 이같은 말을 듣고는 舟木는 그저 위로할 수 밖에 없어서 걱정마세요 곧 나올 수 있어요! ..........라고 말을 하였다.
舟木는 단지 얼굴만 보더라도 등소저를 비교적 안심시킬 수 있다고 여기어서 날마다 모두 등소저를 보러 갔었다. 등소저는 한마음 한뜻으로 어머니의 상태를 걱정하였고 언제나 풀려 나는 지를 물었다.
이때 대만과 국제관계는 마침 가장 어려운 곤경에 빠져 있었다. 1979년 1월 1일 미국은 중공과의 우호관계 회복을 위하여서 대만과
단교를 하였고 그때 대만과 우호관계를 가진 나라는 단지 南韩、沙乌地阿拉伯(사우디아리비아)、南非(남아프리카 공화국)등 21개 나라이었다.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정세도 일반 사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주었으며, 등려군은 대만이 일찍이 없었던 곤경에 빠지는 것에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또한 일찍이 국방기금에 돈을 기부하여 왔다. 공교롭게도 이것이 얼마되지 않았는데 여권 사건이 일어났다.
대만 매체는 제멋대로 보도하였는데 그중에서 ,《中国时报》는" 구입한 인도네시아 여권을 가지고 입국하다가 제지 되다....."
"홍콩으로 돌아가자 곧바로 비행기를 갈아타고 일본으로 갔는데 일본 경찰에 체포되다................" 등 의견으로 사건의 전 과정을 매우 자세하게 그리고 있는데 ,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관에서 등려군과 세관 심사직원과 대화하는 것을 보았던 남자는 바로 《中国时报》의 당시 공항 주재 기자이었다.
그는 입국 심사에서 거부된 등소저가 일본으로 곧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바로 심사 직원에게 자세한 내막을 물어 보았고, 기자은 곧이어서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의 대만 주재 연락창구인 인도네시아상회에 증거를 요청하여서, 등소저에게 여권을 발급한 일이 있는지 여부를
물어 보았다. 그러나 얻은 대답은 뜻밖에 NO! 이었다, 이때 등려군은 마침 일본으로 가는 도중이어서, 인도네시아상회의 직원은 곧바로
일본 입국 관리국에 연락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등소저는 일본에서 체포되게 되었다.
사건이 매체에 의하여 실리게 된 뒤에, 대만 정부는 관련 기관을 통하여 舟木에게 압력을 주어서,그에게 등소저를 풀어 주어서 곧바로 대만으로 돌아 오게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도 여러 차례 일본정부가 강제로 돌려보내게 요구하였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대만 정부는 때 마침 국가의식을 어쩔 수 없이 올리려고 애를 써야 하는 시기에 봉착하였는데, 오히려 대만을 대표하는 등려군이 여권 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등려군 송환을 매우 강하게 요구하였다.당시의 모든 정세를 종합하면 일반적으로 모두 다 등소저가 대만으로 돌아고기만 하면 공황에서 체포및 조사를 받으리라고 여겼다.
舟木은 여러번 여러 가능성을 따지었다: 당시 대만 정부는 때 마침 계엄령을 실시하고 있는 시절이었는데 만일 등소저가 대만으로
돌아 가면,1,2 년 동안 등소저는 연예활동에 종사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또한 아주 오랜동안 출국할 방법이 없을 것이고 심지어 삼엄한 분위기는 반드시 이때부터 가요계에서 퇴출되어서 노래를 부를 도리가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모든 宝丽多唱片公司의 직원들은 걱정해 마지 않았다.
그들은 일찌감치 최고법원에서 소송하는 변호사를 찾아서 상담을 하였고 그들에게 법무부를 분주하게 다녀주기를 부탁하였으며,
등려군도 눈물을 흘리면서 단호하게 "잠시 대만으로 돌아가지는 않을래요! 오로지 강제로 대만으로 추방되는 것만 피하려고 생각해요!"
여자 수용소에는 다다미 식의 방이었으며, 대체로 20여명의 여자를 수용하고 있었다.그 가운데 대부분은 대륙국적의 여자들이었기에,
이로 인하여 등소저는 말할 사람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말을 할 수 가 없었기에 풀이 죽어 보였다.
모든 조사는 입국경비과와 입국심사과가 집행을 하였다. 출입국관리과는 "내일은 풀려날거예요" 그러나 오히려 내내 등소저는 갇혀 있었다.
등소저가 소유한 인도네시아 여권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발행한 것으로 여권번호는 “D003124" 이었다. 이름칸에는 “ELLY·TENG”으로 등기가
되어 있었고 26살, 그리고 붙여진 것은 등소저 본인의 사진이었다. 경비처의 조사에 의하면,만일 중화민국 여권을 사용하여서 비 우방국을
입국하였다면 매우 오랫동안 수속을 하여야 하였기에,편리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등소저는 인도네시아 여권을 소지하였다.
当时被国际孤立的台湾,举凡政治家、财经界人士都拥有除了中华民国护照之外的第二本护照,会持有如美国、加拿大等的其他护照,这几乎是众人皆知之事。但像邓小姐这样身为艺人而拥有第二本护照是非常少见的,因为当时的台湾歌星几乎没人能在海外开演唱会。
而艺人想拿到出国许可证最少需要费时二个月,甚至需要花一年时间才拿得到的也有:首先必须向当时主管音乐、演艺活动的教育部申请,再由新闻局检视艺人的实力及视当时的状况,判断是否有必要出国;之后再由警察局作形式上的许可,最后再经外交部准许,在审查过程当中还可能被戒严总司令部传唤去作思想调查。因为当时必须要有护照及出国许可证才能出国,虽然如果有海外的应聘书就可以将两个月的申请期缩短为十天,但无论如何对当时的艺人而言,出国申请是一件非常麻烦的事,而且只要签证一到期就必须回台重新申请。为了让邓小姐证件申请顺利,舟木先生甚至还亲自拜会过新闻局及外交部,尤其在《空港》一曲畅销时,邓小姐的工作非常忙碌,但只要签证一到期就不得不回台湾。
一九七八年八月,邓小姐和友人们在聊天时,刚好提到出入境时的困扰。一名贵夫人歌迷的儿子刚好在印尼政府担任高官,贵夫人歌迷因同情邓小姐的处境,好意地对邓小姐说会帮忙她想办法。
就在约半年后,一九七八年十一月,邓小姐在新加坡拿到护照,为了酬谢给护照的人,还包了二万港币。这本护照就是邓小姐在入境台湾时所使用的那本护照。
그때 국제적으로 고립된 대만은 모든 정치가 재계인사들은 모두 중화민국여권이외에 별도의 여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를 들면 미국 카나다 같은 다른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등려군 같은 연예인으로서는 별도의 여권을 가지고 있던 것은 매우 볼 수 가 없었는데, 그때 대만의 가수는 거의 해외에서
공연을 하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예인은 출국 허가증을 받는데 최소한 2달이 걸렸다. 심지어 일년의 시간이 허비되고서야 비로소 얻을 때도 있었다. 우선 그때 음악, 연예활동을 주관하는 교육부에 신청을 하고는 다시 신문국이 연예인의 실력을 조사하였고
그때의 상황을 살피고는 출국할 필요가 있는 지 여부를 판단하였다: 이뒤에 다시 경찰국이 형식적인 허가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다시 외교부의 비준을 거쳤다. 심사 과정에서 계엄총사령부에 소환당하여 사상조사를 받으로 갈 수 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반드시 여권과 출국 허가증이 있어야만 출국이 가능하였다. 비록 만일 해외의 초청서가 있다면 2개월의 신청기간이 10일로 단축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연예인의 입장에서 말하면 어째튼 출국신청은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고, 게다가 비자가 일단 만료가 되면은 반드시 대만으로 돌아와서 다시 신청을 하여야 하였다. 등소저의 비자 신청을 순조롭게 하려고 舟木는 심지어 또한 스스로 신문국과 외교부를 방문하였고 특히 《空港》이 매우 잘 나가고 있을 때 등소저의 일이 매우 바뻤으나. 비자가 일단 만료가 되기만 하면은 어쩔 수 없이 대만으로
돌아 가야 하였다.
1978년 8월 등소저와 친구들이 한담을 하고 있을 때 마침 출입국의 번거로움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한 귀부인 팬의 아들이 마침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고관이어서 귀부인 팬이 등소저의 처지를 동정하여서 호의로 그녀를 도와줄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말을 하였다.약 반년뒤 1978년 11월 등소저는 싱가포르에서 여권을 받게 되었는데 여권을 준 사람에게 사례를 하기 위하여 2만 홍콩 달러를 준비하였다.이 여권이 바로 대만에 입국할 때 사용한 바로 그 여권이다.
불법으로 입국한 것은 법률상 3년이하의 징역이나 또는 10만 엔의 벌금에 처하는데(당시), 조사과정에서 명백하게 등소저는 악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대만의 특수한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출입국관리국은 끝내 불기소나 벌금을 부과 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여권상의 이름이 비록 같지 않았지만 여권은 결코 위조 된것이 아니고 진품이었다. 이 사건에 아마도 인도네시아 정부와 관련된 관리때문에,등소저의 구류의 시간이 연장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건을 진위가 불명하며, 촛점이 모호하여 중간에 흐지부지하게 결론을
내렸다. 일본 출입국관리국도 강제로 등소저를 국외로 내 보내며, 1년이내에는 일본의 국경을 들어 오지 못한다는 처분을
내렸다.
일주뒤 2월 24일 등소저는 마침내 자유의 몸으로 회복되었다. 경비과의 직원은 이구 동성으로 등소저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였다. 왜냐하면 수용소에서 주는 급식이 바깥에서 말하는 벤토(도시락)이었는데 보통 돈이 있는 죄수같으면 늘 일부러 입에 맞지 않는다고 하며 이런 음식은 먹을 수가 없어요 라는 불평을 하고는 특별허가를 얻어서 고급벤토를 구해다 먹었다.
그러나 등소저는 아무런 불평도 없었고 뿐만 아니라 벤토가 맛이 있다고 칭찬을 하였으며, 또 다 먹고는 언제나 다음처럼 말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잘 먹었어요 고마워요":“ご馳走さまでした(谢谢您的美食)”、“ぁりがとぅござぃます(谢谢!)”。
미국으로 추방된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 등소저는 너무나 흥분하여서 저녁식사로 주어진 생선프라이 일식정식 벤토를 먹을 수가 없었다. 또한 거의 잠을 자지도 못하였다. 석방될때 옅게 화장한 등소저는 같은 방의 죄수들에게 말을 하였다:
내가 여러분에게 친절하게 돌보아준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표하기 위하여 노래 한곡을 부르겠어요.
죄수들은 등소저가 중국어 노래를 다 부르고 난뒤에 커다란 박수로 환호를 하였으며 등소저는 수용소를 나올때 모든 경비직원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끄떡이며 감사의 말을 하였다:
너무나 신세를 졌습니다!:“大變お世話になりました!(谢谢你们的照顾!)” 舟木는 하루전에 등소저에게 스스로 글을 써서
매체에 대하여 일본식 사과를 하게 하였다.
여러분께 많은 괴로움을 끼치고 또한 모든 팬들에게 걱정을 하게 하여 매우 죄송합니다!
저는 미국에 가서 원래 예정한 콘서트등을 완성하고는 공연을 다 마치고는 다시 대만으로 돌아갈거예요.
서명할 곳에 등려군은 매우 정중하게 본명 邓丽筠(등려균)을 서명하고 아래에 다시 일본어와 영어로 “TERESA·TENG”를 서명하였으며,
날짜는 1979년 2월 23일이었다.
"나는 아주 많은 매체가 올거라고 생각했어요, 얼굴에 미소를 짓는 것을 기억해요 네."舟木의 건의에 대하여 등려군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래요 . 출입국관리 사무소의 수속을 다 처리하고 바깥으로 나가니,과연 예상처럼 많은 매체가 왔는데, 격자 무늬 블라우스 검은 바지를 입고난 뒤 모피 외투를 입은 등려군이 왼손엔 LV 가방을 들고 얼굴에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빠른 걸음으로 차안에 올라탔다.그러나 수많은
텔레비전의 기자는 여전히 큰소리로 질문을 하였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니,舟木는 어머니와 등려군을 특별 휴게실로 안내하고는 그녀가 panam항공의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 표를 준비하는 것을 도와 주었다(당시 약 30만 대만달러). 이 비행이 등려군 샤오졔의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샌프란시스코을 거쳐서 로스 앤젤레스에 도착한 뒤 등소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저는 이미 괜찮아졌어요. 지금은 미국에 도착했으니
어머니도 어서 오세요. 말할 것도 없이 어머니素桂는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 가서 등려군 샤오제를 만났다.
서로 만났을 때 등려군은 감격하여 말을 하였다: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대만의 매체가 완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 그저 내가 배신자라고
매도하는 것이어요.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이후의 1년 여의 자유로운 시간이 그녀로서는 의외로 가장 평온한 시기이었다.
제5장 겨울철의 해바라기
등려군은 1993년 12월24일에 프랑스를 떠나서 홍콩으로 돌아 온뒤 다시금 파리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언제나 돌아 가야 할 시기가 되면은 홍콩의 생활이 매우 바빴는데 바로 파리가 너무나 추운 계절이었기 때문이다.
등소저는 추운 것을 매우 싫어 하였다. 그래서 일단 겨울철이 되면은 태국의 普吉岛(푸켓)으로 휴양을 하러 갔다. 그러나 계절의 영향으로 언제나 비가 내렸는데 이것은 그녀가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부분이었다. 어느날 태국여행가이드 책을 보다가 태국의 치앙마이의 기후가 매우 좋다는
것을 읽었다 .그래서 한번 가 보려고 생각하였다.
1994년 8월 첫번째로 치앙마이에 도착하였는데 곧바로 그곳의 거리의 느낌,기후의 온화함,공기의 신선함. 푸른 산 녹지의 아름다운 경치에
빠지게 되어서 이것 때문에 그녀는 이곳을 휴양지로 결정하였다.
1994년 12월 18일 등소저는 홍콩에서 치앙마이로 날아 갔다. 치앙마이에서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을 보냈다. 1995년 1월 11일 홍콩으로 한번 돌아오고는 다시 2월 대만으로 돌아 가서 가족과 설날을 보냈다.약 한주간을 보낸뒤에 홍콩으로 돌아갔다. 3월14일 태국 영사관에 60일 체류
관광 비자를 신청하였다.4월 2일 태국항공 TG605항공기를 타고 치앙마이에 도착하였다.
대략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달간을 보냈다.
택시를 불러서 赤柱(스탠리)의 집으로 가서 그들을 만났으며 欧丽明에게 bye bye라고 인사를 한 뒤에 史帝芬(스티븐)과 같이 공항으로 갔다.
아름다운 치앙마이에서 휴양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 등려군은 원래 내내 5월 말 까지 있을 셈이었다.
치앙마이는 방콕에서 700 km떨어진 태국 북부의 주요한 도시중 하나이다. 만일 비행기를 타게되면 한시간 정도면 다다르고 그러나 차를 타게
되면 약 10여시간이 걸린다. 시내의 성벽에는 13세기의 兰娜, 태국 왕도의 시기의 화려한 유적이 있으며, 300여개의 절이 있다.
과거는 도자기,우산, 직물, 은그릇, 나무조각의 주산지 이었으나 현재는 관광산업이 주요한 수입원이다.
거리를 걸으면 민예품을 파는 가게가 많이 있다.또한 마치 택시같은 영업용 삼륜차가 눈에 많이 띄였다.
등소저가 머무는 곳은 치앙마이 시내 중심의 甘边汀옛길에 있는 帝国梅宾饭店 이었다. 그녀는 1994년부터 95년까지 모두 이곳에 3차례
머물렀다. 호텔의 근무자는 거의 70%가 태국사람이었고 그중에 유럽인과 일본인이 15% 정도 이었다.
14층과 15층은 정상급 귀빈층으로 일단 엘리베이터를 나서면 서비스 데스크가 있다. 전속 직원이 있어서 체크인 체크아웃 수속 이든
이곳에서 직접 처리를 할 수 이었다.
등려군이 태국에 왔을 때 언제나 프랑스 남자친구 史帝芬·保罗와 함께 왔다. 처음 왔을 때는 야시장이 정면으로 보이는 皇家王子饭店
에 머물렀다.그래서 어느날 여기저기 배회하다가 정원이 넓은 帝国梅宾饭店 을 보게 되었는데 등려군은 한번 보고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하루 뒤에 옮기었다. 홍콩의 집관리인欧丽明에게 호텔을 바꾸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梅宾饭店의 편지지를 사용하여서 글 써서 그녀에게
보냈다. 편지에는 잘지내니? 우리들은 태국의 일정을 연장하였으며,모든것이 순조로우니 걱정할 필요없어. 건강하길 바란다. 다음은
호텔의 전화번호이다. 일자는 1994년 8월 25일이라고 쓰여 있다.
평상시 등려군은 방안에서 비디오를 보면서 대부분을 보냈으며 만일 싫증이 나면 산책이나 달리기를 하였다. 혹은 밤늦도록 야시장을 거닐었다. 언제나 가는 비디오 점의 노부부 사장은 또한 등려군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곳에서 매우 가볍게 교제를 하였다.
일찌기 가게에 파는 《邓丽君金曲集》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내가 젊은 시절에 불렀던 것이예요"라고 말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인기를 얻었던 노래를 중국어로 번역하려고 했다"는 따위의 말을 하기도 하였다.
바깥으로 나갈때 분홍빛깔의 블라우스와 표범무늬의 긴바지를 입고 분홍색 운동화를 신었는데, 대부분 그녀가 좋아하는 빛깔과 무늬이다.
거리의 가게에 가서 柠檬汁(레몬쥬스)와 芒果糯米(망고찹쌀떡)으로 만든 과자를 주문하여 먹는 것을 좋아하였다.
체크아웃 할때 일본어를 하는 여자 직원이 총지배인普罗班에게 말을 하였다." 저분이 분명히 유명 가수 등려군이예요"
지금까지 이일을 발견하지 못했다.총지배인은 등려군에게 말을 하였다" 우리들은 최근에 스위트룸을 새롭게 수선을 하였으므로,오게 되면
부디 다시 왕림하여 주세요" 등려군은 말을 하였다"연말에 다시 만나요"
그녀도 정말로 12월 18일에 다시금 이 호텔에 들렸다.
등소저가 머물던 방은 15층의"皇家花园大套房”(로얄 가든 그랜드 스위트 룸)의 최고급의 방이었다.
1994년 8월에 올때 머물던 곳은 일반 스위트 룸 1515호실이었고, 이때는 공주 스위트룸(1501호실)과 왕자 스위트룸(1502호실)이 합쳐진 특별한
스위트룸으로 고친 것이었다. 하룻밤 비용이 15000 태국 바트로. 대체로 대만 돈으로 20000 위앤이었다.
그러나 등소저는 장기간 투숙을 하기에 호텔은 방값을 50% 할인하여서 등소저를 우대하였다.
데스크에서 수속을 다 마치고 난 뒤에 우측의 미백 색채의 양탄자를 지나쳐 가면은 왼편에는 1506호실이 오른편에는 1507호실,1505호실이
있었다. 끝에는 외쪽 목제 문이 있었는데 1502호실의 입구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서 통로를 지나면 왼편에는 또 한칸의 침실의 문이 있고,
홀에는 탁자가 하나 있고, 8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가장 안쪽에는 텔레비전과 소파가 있었다. 벽에는 직물로 된 장식품이 있었고 또한
촛불 모양 같은 전등이 장식되어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그려내고 있었다. 침실의 가장 안쪽에는 커다란 욕실이 있었다.
창문에서 바깥을 보면 1676m높이의 司退普山위의 절의 붉은 지붕과 야시장이 보였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가 되자 이날은 호텔 직원들이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로 분장을 하고서는 일일히 투숙하는 손님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인사하면서 작은 선물도 주었다.호텔이 매우 떠들석한 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방안에 있던 등소저는 총지배인의 만찬 초대를 받아드렸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총지배인부부은 15층에 올라가서 그들을 만나서 “明明”이라고 하는 중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활발한 이야기를 하던 중 美斯乐(華南에 있는華民國國軍의 最后의基地)그곳에 있는 국민당 마을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는데 , 등려군의 부모이 중국에서 대만으로 도망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은 중국에서 태국으로 도망쳤던 무리들이다. 모두 대략 60개의 마을이 있으며 인구는 약 70000 명이었다. 美斯乐는 바로 그중의 하나이었다. 치앙마이에서 차를 타고서 약 6시간을 가면은 비로소 도착할 수 있는데 8000 명이 살고 있었다.
1949년 혁명시기에 중국에서 미얀마로 도망쳤던 국민당 제93연대이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1961년 그들이 북부에서 사는 것을 금지하기 시작하였기에 그들은 산을 넘고 고래를 넘어서 태국 북부로 이동하였다. 태국 정부는 그들이 난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는 동화하기를 바랬다.
등려군은 국민당군이 떠돌며 산다는 것에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여, 총지배인에게 한번 가 보자고 부탁하였다. 며칠 뒤 그들은 등려군을 모시고
清莱(Chiang Rai)와 美斯乐로 갔다. 정말로 국민당의 장병과 그의 가족들이 사는 마을이었다.그들은 중국어로 이야기를 하였다.
여러곳을 다니던 중에 등려군은 작은 학교에 갔는데 매우 많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들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였지만 학교 건물의 낡을 것을
보고 그녀는 마음에 담아 두게 되었다. 이뒤로 등려군은 돈을 기부하여서 학교 지붕을 수리할 뿐만 아니라 또 고아원에게 돈을
주어서 급수탑을 만들었다.
走出梅宾饭店的前院道路,对面就有一家“拉塔那”面店。邓丽君几乎每天一到傍晚五点一定会到这里报到。通常若是没人就一定坐在靠左边最里面的桌子。点的是当地叫做“归地欧改”的鸡肉汤白面。一碗约三十元的面。因为很小碗,所以一次会吃二、三碗。后来变成熟客之后,店主任还请邓小姐签名。邓小姐爬上她常坐的位子的椅子上在天花板上写:
梅宾饭店호텔 앞에 도로에 나가면 맞은 편에 “拉塔那”라는 국수집이 있었다. 등려군은 거의 날마다 저녁 5시 경에 늘 이곳에 갔었다. 보통 만일
손님이 없으면 언제나 왼편 가장 안쪽의 탁자에 앉았다. 주문하던 것은 그 지역에서 归地欧改라고 부르는 닭고기탕 밀가루 면이었다.
한그릇에 약 30 위안의 국수이었다.너무나 작은 그릇이었기에 그래서 한번에 2,3그릇을 먹었다.
뒤에 단골 손님이 되고 난뒤에 가게 주인이 또 등소저에게 sign을 부탁하였다. 등소저는 그녀가 늘 앉던 곳의 의자 위로 올라 가서 천장에 썼다.
恭喜发财!
등려군(“邓丽君”)이라는 이름 옆에 “1·1·95”라고 쓴것은 1995년 1월 원단이라는 것이다.하루 전날은 1994년 12월 31일로, 등려군에게는
특별한 날이었고 그래서 식당 가운데에 3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 홀에 카운트 다운 시계를 설치하였다.
만찬 뒤에 한시간 정도 디스코 파티를 열었고 이후 또 불꽃 놀이를 가졌다. 스티븐은 캠코더를 가지고 등려군이 입으로" 아름다워라 , 아름다워라"하며 소리치는 장면을 찍었다.
이후에 때마침 커피점으로 이동할 때 이미 술에 취한 총지배인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가 말을 하였다:
"노래 부르실래요?"
아! 목소리가 나올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등소저는 따스한 꿀을 탄 레몬쥬스를 주문하였다. 곁에 있던 스티븐슨은 노래를 요청받는 모습을
달갑지 않게 보고 있었다. 무슨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그녀는 《任时光流逝》을 정하였다。
그러나 악단이 오히려 이노래를 몰랐기에 다시 할 수 없이 《梅花》로 고쳐 불렀는데,刘家昌이 작사 작곡한 이노래는 대만의 역사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1971년 7월 1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74년 5월에 중국을 방문한다고 발표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국가안전국의 키신저를 비밀리에
중국으로 가게 하였다.바로 이것이 일반적으로 닉슨 충격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월남전이 진행되는 국제 정세 가운데에서 가을에 열린 유엔(원문:연합국) 총회에서 결정할 때 중국이 유엔회원국(원문:연합국)에 가입하고 대만은 유엔회원국(원문:연합국)에서 퇴출한다고 선포하였다.
일년 뒤 1972년 2월 21일전, 닉슨은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과 회담을 하였으며 카터에 이르렀을 때 1979년 에 중국과 우방외교를 회복하였다.
또한 대만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국제 고아가 된 대만은 항간에서도 애수띤 분위기가 떠돌아 다녔다. 이로 인하여 민심과 시기를 돋우기 위하여,
많은 노래들이 창작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던 노래가 바로 《梅花》。현재에도 여전히 중국 정부에 의하여 이노래는 금지가 되었는데 등려군은 1980년 출시된 《原乡情浓》의 앨범 속에 포함 시켰다 ,이뒤로 언제나 이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푸른색 바탕에 꽃무늬가 있는 치파오를 입고 어깨에 커다란 망토를 걸치고 오른 손에는 팔찌를 하고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하였다.
어깨에 늘어진 긴머리를 빗으로 빗고는 분홍색 머리링을 이용하여서 동여매었다. 오른 쪽 귀에는 본래는 음료 컵에 장식하였던 커다란
붉은 꽃을 꽂았다.
여러분 새해를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시간입니다.우리 함께 노래하지요.
무대위에서 관중을 바라보며 말을 마친뒤에 가볍게 반주음악에 맞춰서 노래를 하였다.
梅花梅花满天下
越冷它越开花
梅花坚忍象征我们巍巍的大中华
看那,遍地开满了梅花
有土地就有它
冰雪风雨它都不怕
它是我的国花
매화 매화 온누리에 가득하네
추울 수록 그것은 꽃을 피우니
매화의 굳은 마음은 우리들
높고도 높은 커다란 중화를 상징하네요
여기저기 피어난 매화를 보세요, 아!
땅이 있으니 그것도 있네요
얼음 눈 바람 비 이 모든 것은 무섭지 않아요
이것은 우리의 국화이네요..
描写像梅花一样越冷越开花的精神的这首歌,长期以来鼓舞了许多的台湾人,但是等着倒数的客人们,哪里知道其中的涵义呢?这个优美的歌声引起在场的客人热烈鼓掌。唱完这首歌的邓小姐满脸通红。回到自己的座位,向四周的客人说:
“好久没有在别人面前唱歌了。”
추워질 수 록 피어나는 매화 같은 정신을 그려내는 이노래는 오랫동안 수많은 대만인을 격려하였으나. 서로 호응해주는 관객을 기다렸다,어떻게 그속의 깊은 뜻을 알았는지?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객석의 청중들에게서 뜨거운 박수를 이끌어 내게하였다.
이 노래를 다 마친 등려군은 얼굴이 붉게 되었다. 자기 자리로 돌아 가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래 하지 않은 지가 꽤 오래 되었네요!
서로 호응해주는 뜨거운 소란에 휩쓸려 관중 앞에서 노래를 하였던 등려군은 보기에도 매우 건강하였다. 잠시 등소저와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은 모두 다 그녀가 매우 건강하다고 여겼다. 호텔의 직원들이 이렇게 여겼던 것은 바로 등소저가 拉姆병원에 건강 검진을 하러 갔다고 이야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병원에 간 것은 건강 검진을 하러 간것이 아니었다.
塔那贴普병원의 奴阿铁普尼皮兹汉의사가 1994년 12월 30일 오전 9시 전후에 호텔에서 등소저의 몸이 불편하다고 하는 것을 듣고서는
그에게 한번 들어 오기를 바랬다.奴阿铁普는 15층의 방안에 곧 들렀다. 방안에 들어서자 방안은 매우 어두웠으며 찬기운이 강하게
느낄 정도였다. 게다가 방안은 담배연기가 자욱하였다. 의사는 준엄하게 방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스테판 퓨엘에게 부탁하였다:
"즉시 손에서 담배를 끄시오" 등려군은 방안의 침대에 누워있었다. 의사가 물었다:" 당신도 담배를 피우시나요? 가끔 피워요." 그러나
또 한마디를 덧 붙였다." 그러나 습관적인 흠연은 아니에요"
스테판에 따른 설명은 29일 한밤에 천식이 발작하였다는 것이다. 위급하여서 호흡할 도리가 없었다. 이후 등소저가 늘 복용하던
약을 흡입하고서는 답답함이 나아졌다. 지난 달 일본에 갔을 때 몸이 불편하기 시작하였기에 쓰는 약이 많이 바뀌었다.
"
등려군이 이렇게 말했다.그녀가 가리키는 것은 센다이에 처음 갔던 것이었다. 병의 상태도 오늘 밤과 마찬가지로 생겼다.
奴阿铁普의사는 청진기를 가슴에다 대었는데 쌕썍 거리는 고통스런 호흡음이 들렸다. 스테판은 천식 발작을 예방하는 주사제를 요구하였으나,의사는 기관기 확장제가 매우 강하다고 여겼기에 병원에 와서 산소를 공급하여서 비교적 좋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등소저는 호텔의 차에 올라 타서 시내에서 설비가 가장 좋은 拉姆병원에 갔다. 건강 검진을 끝냈 뒤에 산소 마스크를 쓰고는 산소를 보충받았고 이후로 항생제 점적 주사를 맞았다. 받은 약은 “贝罗德阿尔”이었다.
1102호 병실로 이동하여 입원을 하였는데 등려군은 전날 하루 종일 잠을 자지 못하였기에 가벼운 수면제를 복용하고서야 비로서 잠에 들었다. 반나절 뒤 등소저는 체력을 회복하고서 의사에게 말하였다:
마치 죽을 것 처럼 불편하였어요. 어째서 병원에 오지 않았지요? 그녀가 대답하였다: 올 생각이 없었어요.
31일이 되자 등려군은 제안하였다: "퇴원하고 싶어요" 의사는 그녀와 이야기를 하였는데 소변에 적혈구가 많아서 그녀에게 " 서두르지 말아요, 잠시 이곳에서 검사를 하면 좀 좋아 질거예요" 하고 하였다. "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강하게 말하였다"호텔로 돌아 가고 싶어요"
오후에 퇴원한 등려군은 梅宾호텔로 돌아 갔다. 몇 시간 뒤 호텔의 커피숖에 있던 200 명의 사람앞에서 《梅花》를 불렀다。
이것이 등려군의 일생중에서 최후의 무대가 되었다.
迎接新年之后,邓丽君待在房间里看电影或是听音乐,过着宁静的时间。连续一阵子每天都过着在房里超过十六小时的日子。门外通常都挂着“请勿打扰”的牌子。清洁人员大概三天才进房打扫一次。
一月五日邓丽君打电话给奴阿铁普医生说“好很多了。”医生说:“你常常会去香港吗?”
邓丽君就开玩笑跟医生说:“你还不知道我是谁喔?”医生回“不知道”时,邓丽君就笑着跟他说:“在香港也想继续吃这个药,请医生给处方笺。”奴阿铁普认为病症是因为感冒恶化引起肺炎,所以变成气喘。在病历卡写下“支气管气喘”,而且建议她“因为有异常,所以一定要去医院看病”。二天后,邓丽君回香港。在十八日下午三点过后,邓丽君打电话给泰国的奴阿铁普医生说:“身体好了,下次去的时候,请您再帮我检查。”
새해을 맞이하고는 등려군은 방안에서 영화나 또는 음악을 들으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계속해서 날마다 방안에서 16시간 이상을 보내기도 하였다. 문밖에는 통상 언제나 방해마세요 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청소하는 직원은 대체로 삼일마다 겨우 방에 들어가 한차례 청소를 하였다.
1월 5일 등려군은 奴阿铁普의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 매우 좋아졌어요." 라고 말을 하였고 의사는 말을 하였다" 당신은 종종 홍콩으로 돌아 가나요?"
등려군은 웃으며 의사에게 말을 하였다." 당신은 내가 아직도 누군지 모르시나요?"
의사가 대답을 하였다." 모르겠는데요 " 그때 등려군은 웃으며 그에게 말을 하였다:" 홍콩에서도 계속 이약을 먹으려 생각하는데,선생님이 처방전을 주시길 부탁합니다. " 奴阿铁普는 병의 원인이 감기가 악화되어서 폐렴을 일으켰고 , 그래서 천식이 되었다고 여겼다.
병력 카드에 "기관기 천식"이라고 썼으며 게다가 그녀에게 " 의심스러우니 반드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세요"라고 건의하였다.
2일뒤에 등려군은 홍콩으로 돌아갔다. 18일 오후 3시가 지나자,등려군은 태국의 奴阿铁普의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말을 하였다:
"몸이 좋아 졌어요. 다음에 가면, 당신이 다시 내 검사를 해 주세요" 라고 하였다.
등려군은 4월이 되자 또 태국의 치앙마이로 돌아 왔다.4월 12일 시내에서 한가롭게 거닐던 등려군은 鸡肉饭,薯片을 먹었고 다시 망고를 마셨다. 그리고는 약국에서 약을 샀으며 영어로 쓴 가격표를 그녀의 卡地尔(까르띠에)의 수첩 속에 넣어 두었다. 이 수첩은 원래 1979년 것이기에 날짜칸의 공백에 그녀가 붉은 펜으로 날짜를 썼기에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사용하였다.
4월 17일 梅宾饭店에 있던 등려군은 给奴阿铁普에게 전화를 걸어서 진찰하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방안에 들어서자 " 언제 왔나요?"
"2주전이에요" .스테판은 외출하여서 방에는 없었다.
등려군이 말을 하였다: "요즘 3,4일동안 내내 기침이 나와서 좀 걱정이 되어요."
그녀말에 의하면 홍콩에서도 약을 받아 먹었다고 하였다. 홍콩의 의사의 처방전을 보니 그녀는 다른 종류의 약을 먹고 있었다.
약을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그녀는 만일 발작할 때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에 하나를 위하여 5종의 약을 그녀에게 주었다.
만일 심한 천식이 생기면 숨을 쉴래도 숨을 내쉴 도리가 없을 거에요. 의사가 신신당부를 하자 그녀가 대답을 하였다.
" 괜찮아요" 이때 기침은 이미 만성이 되었기에 특별하게 물어 보았다:"담배를 이전에 피우지는 않았지요?"등소저가 대답하였다:"
피우지 않아요" 奴阿铁普가 마음에 특히 걸리는 것은 설령 등려군의 기침이 악화되었더라도, 스테판은 뜻밖에 아직도 담배를
너무나 많이 피고 있는 것이었다. 막을 문을 열려고 할때 등려군이 또 말을 하였다: "만일 또 몸이 불편하면 다시 오셔서 나를 살펴
주세요"
이것이 奴阿铁普이 들었던 마지막의 말이었다.
4월 30일 저녁에 등려군은 대만에 있는 동생과 약 한시간 동안 전화를 하였다. 동생이 누나에게 건강이 어떻지를 물었을때,그녀는 대답하였다:" 응 많이 좋아 졌어" 전화의 목소리는 매우 활기차게 들렸다. 등려군이 전화를 한 것은 장차 할 작업을 구상하려고 한것이다.
두사람은 아래의 대화를 하였다: "나는 다시 한번 새롭게 출발하려고 생각하여서, 먼저 스스로 작사한 노래를 중국어 음반으로 내려고 한다"."벌써 준비를 다 했어?""다했어"
등려군은 새로운 앨범을 출시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말을 하였고 게다가 앨범을 잘 녹음하고는 또한 음반을 홍보할 사진을 찍으려 한다고 하였다.그녀는 이런 일들을 홍콩의 宝丽金唱片公司에게 전해 달라고 하였다. 또한 약 3개월 전쯤에 이미 뮤지션(창작가수) 罗大佑와 같이 이야기를 하였는데,내가 쓴 가사들이 좋다고 하였고 때가 되면 가수罗大佑에게 곡 쓰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할것이라고 말하였다.
왜 "새롭게 출발한다"라는 말로 자기를 표현한 그이유는 음악 활동이 거의 멈추어진 상태이기 때문으로 또한 어느 날인가 방콕, 普吉岛(푸켓), 또는 치앙마이의 한 녹음실에서 할 생각이었다.
동생 등장희는 누나가 기침하는 것을 듣고는 걱정스러워 누나의 몸의 상태를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였다:"응 많이 좋아졌어"
그녀에게 "건조한 곳으로 가야 될것 같으니 치앙마이에 머물지 말고 프랑스로 가."라고 말도 하였다."너무 많이 이야기 하였으니 등장희는 말을 하였다:" 장거리 전화는 하지 말고 , 홍콩으로 돌아와서 다시 천천히 이야기 하기를 바래."
그러나 등려군은 오히려 대답하였다:" 태국에서 홍콩으로 돌아 가지 못해,나는 파리로 돌아가서 한동안 쉬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갈 생각이야." 등려군은 다음날 저녁에 또 다시 일본의 金牛座唱片公司에 전화를 걸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원래 5월말에 회사가 지불할 얼마간의 인세를 받을 수 있는 생각하였다. 오랫동안 치앙마이에 머물렀기에 지불할 돈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이후의 수입이 걱정되었다.
舟木는 전화로 그녀에게 새로운 노래의 제작은 멈춰서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는다고 하며 그녀에게 회의를 시작하자고 하였다.
등려군은 대답하였다: "만나서 이야기해요" " 다음주에 홍콩에서 만나면 좋겠어요!"
5월 4일 오후 5시가 지나서 언제나 처럼 호텔의 건너편 “拉塔那”에서 “鸡肉白汤面”을 다 먹고 난뒤,식당 주인 부인은 기침하는 등려군이 하얀색 작은 병을 입에 갖다 대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된거예요?" 그녀가 대답을 하였다.:"천식때문에요. 기침이 심하지는 않아요,게다가 기침이 오래 가지도 않아요." 등려군이 단지 매우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언제나 이곳에서 면을 먹었으나, 처음으로 등려군의 이런 모습을 보았기에 그 인상이 매우 깊었다.더욱 최근에는 거의 화장을 하지 않고 직접 호텔에서 나왔다.
5월 5일 정오 12시가 지난 뒤 14,15 층 담당하는 직원인 安彭·东秋格은 물을 방으로 가져 달라는 등소저의 전화를 받았다. 방으로 갖다 준뒤에, 등소저는 또 그에게 옷을 세탁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세탁을 맡기는 옷은 타이트스커트와 분홍색 긴소매 Jersey상의 이었다.
얼굴에는 화장을 하지 않은 약간 기침을 하는 등려군는 그에게 "고마워"라고 말을 하였다. 등려군은 이날 오후 데스크에 붉은 것과 분홍빛깔의 장미꽃을 대신 주문하여 주기를 요구하였고 호텔도 그녀가 흰 국화 그림 문양의 꽃병을 준비하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녀는 미국 아멕스 카드로 4 월분 계산서를 다 지불한 뒤에 등려군은 호텔직원에게 남아 있는 방값은 5월말에 체크아웃때 다시 함께 지불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녀의 수첩에는 영어로 "tip 80.00"라고 쓰고는 수첩에 다시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5월 6일 밤 6시경 티셔츠에다 와이셔츠를 입고 짧은 바지를 입은 등려군은 또 “拉塔那”에 갔다。식당 주인 부인은 그녀에게 "모두 다 팔렸어요" 라고 하였다. 그녀가 말을 하였다" 너무나 애석하네요!. 배가 너무 고파요"식당 주인 부인이 말을 하였다" 그럼 야시장에 가면 되요"
그녀가 대답하였다." 이집의 면이 먹고 싶어서 비교적 좋아요.! 라고 말을 하고는 식당을 나갔다. 등려군은 이틀 동안 매우 초췌하여 보였다.이전에는 늘 웃으며 등려군이 "사장님 부인이 끓여주는 것이 비교적 맛있어요;라고 하였는데 식당 주인이 그녀에게
" 다음에 당신이 오면 바로 끓여 놓지는 못해요" 말을 했을때, 그녀는 웃으면서 말을 하였다:" 그것은 당신에게 농담하는 것이에요!. 그러나 이날의 등려군은 정말로 농담할 기력이 전혀 없어 보였다.
5월 8일 새벽 6시 20분이 되자 15층의 당직자인威德·司库松彭은 그에게 아침식사를 보내게 하라는 등려군의 전화를 받았다.
언제나 아침식사할때 등려군은 늘 단 한 마디만을 하였다:"“杰克”(Jack)". 왜냐하면 :"“杰克”(Jack)가 바로 司库松彭의 영어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5분뒤에 방으로 보냈는데 방문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이미 열려 있었다.
등소저는 호텔이 그녀를 위하여 “TERESA·TENG”이라고 특별히 수를 놓은 욕의를 입고 있었으며 짙은 귤빛깔의 실크 머플러등을 목에 감고 있었다. 등소저는 늘 주문하는 조찬은 호텔에서 아침 일찍 막 구은 크림 머핀 한 판, 구아바, 바나나. 유자 등의 과일과 우유, 파인애플 쥬스,커피, 그리고 또 토스트, 젤리, 야자향 옥수수 스낵등이었다.
식사를 탁자에 늘어 놓던 司库松彭이 영어로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등소저는 태국어로 그에게 대답하였다:"沙百啼亚"
뜻은 매우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司库松彭은 등려군의 얼굴빛이 창백하다고 보았다. 결코 화장을 아직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몸이
불편한 것이 틀림없다고 느껴졌다. 2,3 일전 그녀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던 것을 보았는데 이때도 기침이 평사시 보다는 심한 것이 틀림없었다. 오른 손으로 목구멍을 누르며 왼손으로는 음식을 놓을 자리를 지시하였다. 이때 말하는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랐고, 조금은 목이 잠겼다. 커튼도 열지 않은 상태이었고 냉기가 매우 강하여서 인상이 깊게 남았다.
등려군은 탁자 곁에 있는 흔들 의자에 앉아 있었고, 다리를 쭉 펴서 발받침대에 놓아 두었다. 마주보이는 텔레비전이 마침 음악을 보내고 있었다. 司库松彭일 물었다:" 냉기가 이처럼 강한데 춥지 않아요?" 라고 하자, 그녀가 대답하였다:" 좀 찬 공기를 마시는 게 좋아요"
보통은 등려군은 스테판과 같이 함께 야시장을 갔었다. 그러나 이날은 밤이 되자, 스테판이 홀로 외출하였다.호텔 앞에 있는 “拉塔那”식당을 지날때, 식당 주인이 물었다:" 어디를 가세요?" 스테판이 손에万宝路( Marlboro)담배를 쥐고서 대답하였다:" 비디오 테이프를 사러 가요"
한 시간 뒤에 사고가 발생하였다.
대략 오후 5시 15분 경으로 15층 입구의 데스크 담당의 여직원이 왼쪽으로 바라 보니 등려군이 마침 이곳에서 비틀거리며 오고 있었는데
보니까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다.당황하여 일어난 여직원은 마침 데스크에 기대는 등려군을 맞이하였다.
"엄....마"
"엄마"
입으로 엄마를 부르던 등려군은 호흡이 고통스러운 모습이었고, 이상스런 급한 증상이 보였으며, 달려온 남자 직원은 등려군이 혀를 깨물까봐 숫가락을 그녀의 입안에 넣었다. 구급차를 부를 겨를도 없다고 여겨서 호텔의 작은 버스를 이용하려고 준비를 하였다.
15층에서 1층으로 휠체어를 이용하여 작은 버스로 옮겼으며, 호텔을 떠난 때는 등소저가 아직도 호흡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보통 병원 까지 가는데는 단지 10분 정도이었다. 그날은 차가 막혀서 약 30분의 시간이 걸렸다.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6시가 곧 지나버렸다.
치앙마이拉姆병원이 호텔에서 걸은 전화를 받은 때는 오후 5시 반쯤이었다. 듣기에 투숙객이 나오자 마자 기절하여서 이송한다고 하며 이미 매우 위중한 상태라고 하였다.이송중에 응급 상태 이었던 등려군은 2호실의 긴급치료실로 옮겨졌다. 병원도 곧바로 의사와 간호사를
소집하는 방송을 하였다. 등려군은 방을 나올때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그래서 병원에 응급으로 실려올때 하반신은 sheet 로 덮혀 있었다.
내과 의사皮尼多가 눈으로 검사를 할때 이미 생명의 흔적은 없었다. 몸을 만져보니 이미 차게 식었고, 손과 발에는 모두 이미 파랗게 되었다.동공 검사도 완전히 반응이 없었다. 심전도과 뇌파도 완전히 정지 상태이었다. 입 주변에는 많은 침이 흘러 나와있었다.
심폐소생술의 구급 처치와 강심제 주사를 투입하고 심장 전기 제세동기 자극과 심장 맛사지를 하였도 전혀 생명을 회복할 도리가 없었다.
다른 의사의 확인 있은 뒤 이미 사망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외출하였던 스테판은 호텔로 돌아 온 것은 대체로 밤 6시반 경이었다.
업무 담당자 巴拉查가 긴장한채 그에게 말을 하였다:" 등소저가 지금 병원에 있어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놀란 스테판이 巴拉查에게 물었다.
" 매우 좋아 보지는 않아요. 의사가 당신에게 한 말을 하였다"
그에게 이미 사망하였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스테판은 입으로 " 또 생겼네:라고 하였다.
그는 다급하게 15층의 방으로 돌아 갔지만 한시간이 지나도록 스테판이 내려 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가 병원에 전화를 걸었는지를 알수는 없었지만 보기에 초조해 하며 병원으로 가려고 하는 모습이 결코 없었기에 로얄 스위트 룸 담당 직원인巴拉查이 할 수 없이 스테판에게
전화를 걸었다.
" 곧 병원으로 가보세요, 매우 위중해요"매우 사나운 스테판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말을 하였다:" 뭐가 위급해?,거짓말 이잖아!"
전화를 끊어 버린 스테판은 여전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별 도리가 없자, 巴拉查는 어쩔 수없이 방으로 가서 그에게 상태가 매우 긴급하니 빨리 병원에 가기를 부탁하였다.이미 마음이 흐트러진 스테판이 병원에 도착한 때는 밤 8시가 지났을 때이었다.
우는 목소리가 너무나 컸기에 병원의 직원들이 매우 놀랐다. 더욱이 유체를 인수하여서 안치할 때 스테판의 울음 소리가 특히나 컸었다.
원래 등려군의 치료를 돕던 주치의사奴阿铁普도 호텔의 연락을 받았고 밤 7시반에 병원에 도착하였다. 스테판은 정신없이 외쳤다:"
그녀는 아직도 죽지 않았어,빨리 奴阿铁普선생님을 불러 와요" 奴阿铁普가 스테판을 보자, 스테판은 큰 소리로 말을 하였다:"
이 병원 그다지 새롭지 않아 좋지 않아요" 奴阿铁普이 그에게 나지막히 말을 하였다." 아니에요, 이곳은 매우 좋은 병원이에요"
스테판은 유체 해부동의서에 " 해부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쓰고는 호텔로 돌아 왔다. 반드시 빨리 일어난 일을 등려군의 집 가족들에게
전해야만 하였다. 짐에서 검은 색 수첩을 찾았으나 보더라도 중국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전화로 “拉塔那”에게 사장님이 중국어를 볼 수 있는지를 물어 보게 하였다. 사장은 그에게 말하였다."등소저는 볼 수 없나요?"
스테판이 말을 하였다:" 등소저는 병이 났어요!" 매우 화가 나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후 호텔의 직원에게 中庭에서 손님의 수상을 보며 운명을 점쳐 주는 점술사를 올라오게 부탁하여서,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그에게 읽게 하여서 이를 듣고는 마침내 대만의 전화번호 2개와 홍콩의 전화 번호 1개를 호텔의 편지지에 써놓은 것을 찾았다.
치앙마이와 대묵은 단지 한시간의 시차만이 있었다. 치앙마이는 대만에 비해서 한 시간이 빨랐다. 그날은 등려군의 모든 집안 가족이 대북에 있었다. 하루 뒤인 5월 9일이 5년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 邓枢의 제삿날이었기에 온가족이 함께 성묘를 가려고 준비를 하였다. 대략 밤 10시쯤
대북 교외에 셋째오빠 집에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셋째 오빠의 부인인 朱莲이었다. 상대방은 스스로 스테판이라고 하였다.
" 매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나는 长禧와 이야기 하고 싶어요!"
"무슨 중요한 일예요?"
다시 질문을 받자 매우 화가 난 스테판은 대답하였다:" 당신에게 말할 수 없어요, 나에게 전화를 하세요"
《中央日报》에서 일을 하던 장남도 휴가를 신청하고 대북으로 가서 光复南路에 있는 어머니 집에 있었다. 朱莲이 전화를 걸어서 큰 시아주버니에게 , 长禧가 집에 있지 않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长禧가 외출하고 있어서 B·B·CALL 로 그에게 연락을 하였다.
연락을 받은 长禧는 집으로 전화를 다시 걸었다.
또한 그러나 스테판이 그를 찾는다는 말만 들었고, 무슨 이상한 일이 없었다.
长禧는 아마도 경범죄 따위의 일이지 않을까하는 추측을 하였다.!
집으로 돌아간 长禧는 남겨진 전화번호를 보고는 국제전화를 스테판에게 하였더니, 단지 그가 말하는 것을 듣기만 하였다:
"등려군이 없어요, 등려군이 없어요!"
长禧不太理解史帝芬的胡言乱语。重复确认之后大概是心脏异常引起的病痛,说明已经送到医院。史帝芬最后一句:
“她走了。”
惊讶的长禧打电话给三男说明实情,但还没有看到遗体,没有办法相信姐姐是否真的死了。兄弟们就打电话到清迈的医院及饭店确认,结果是个悲伤的答案。这件事必须告知母亲,但不知如何启口的长禧心情很凝重地告诉母亲。
赵素桂听完话,一滴泪也没流下来,因为她绝不相信女儿会死。赵素桂起身走回自己的房间,步伐沉重到听得见声音,嘴里还一直念着“不相信”。
九日凌晨一点左右,跑到“拉塔那”的史帝芬,望着邓丽君在天花板上写的字突然嚎啕大哭,吓一跳的老板问他怎么了,他也都不回答。驻足许久后史帝芬丧气地回饭店了。
长禧이 스테판의 말도 되지않는 소리를 그다지 알아 듣지 못하였다. 다시금 확인한 것은 대체로 심장이상으로 생겨난 통증으로 이미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설명하였다. 스테판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하였다:
'그녀는 죽었어요"
의아한 长禧는 셋째 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정을 이야기 하였다.그러나 유체를 보지 않았기에 누나가 정말로 사망하였는지를 믿을 방법이 없었다. 형제들은 치앙마이의 병원과 호텔로 전화를 걸어서 확인하였다. 결과적으로 슬픈 답변이었다. 이 일은 반드시 어머니에게 전하여야 했으나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 지 모르는 长禧는 마음이 매우 무거운 상태로 어머니에게 말을 하였다.
赵素桂는 말을 다 듣고는 단 한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딸아이가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절대로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赵素桂는 몸을 일으켜서 자기의 방으로 갔는데, 걸음걸이가 매우 무거워서 들릴 정도 이었다. 입으로는 여전히 내내 "믿지 못하겠어"라고
되뇌었다. 9일 새벽 1시경에“拉塔那”로 뛰어간 스테판은 등려군이 천장에 썼던 글짜를 보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울었다.
깜짝 놀란 식당주인이 그에게 어떻게 된것인지를 물었다. 그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말을 멈추고 난뒤 스테판은 풀이 죽어서 호텔로 갔다.
9일 새벽에 밤에 잠을 못이루었던 长禧와 셋째 오빠의 부인이 태국의 영사관으로 가서 비자를 신청하였다.보통은 2,3일의 수속이 걸리었으나 사안이 긴급하여서 특별히 허가를 받았다. 长禧는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서 말을 하였다:" 이미 비자를 받았으니 직접 태국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다시 연락 드릴께요."赵素桂는 여전히 이 일을 믿을 수 가 없었다. 그저 여전히 아연실색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또한 특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长禧네들은 “慈济功德会”의 두 직원과 함께 오후 비행기를 타고 태국으로 갔다.
공항에는 이미 많은 매체 기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홍콩에서 비행기를 갈아 탈때와,태국 방콕 공항에 도착하였들 때도 많은 매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치앙마이에 도착한 것은 이미 밤 9시가 많이 지나서 였다. 梅宾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테판은 초췌하게 보였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는 어제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다.
"바깥으로 과일을 사러 갔다가 호텔로 돌아 온뒤에 병원으로 실려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곧바로 병원으로 달려 갔지만 의사는 임종했다고 말을 하였다.의사에게 응급처치를 부탁하였으나................"
长禧네들은 병원으로 달려 갔다. 안치실에는 이미 꽃장식이 놓여 있었으며 향도 피워져 있었다. 또한 등소저의 사진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나 본인이 틀림없었다.의사는 사인이 "천식 악화로 일어난 호흡부전"이라고 말하였다.
만일 만성 천식이라면 유전이 가능성이 있지만 감기가 악화되어 일어난 천식일 수도 있다.만일 의심스러우면 부검할 수 도 있다고 하였다. 스테판은 이미"유체 부검 동의서"에 "절대 건드리지 말고, 부검할 수 없다"고 썼다,누나를 안치실에 놓아 두고는,长禧도 부검을 거절하였다. 사인은 이미 매우 분명하였기에 그대로 상처없이 누나를 모시고 돌아 갈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长禧는 拉姆병원을 관할하는 普宾区경찰국에 수속을 하러 갔다.9일이라고 쓰여져 있었고 기록상 사인은 "심장정지"라고 쓰여져 있다.그리고"拉姆병원에서 천식치료를 받았다"다는 기록이 있었다.
유체를 이송하는 수속을 다 한뒤에 또 전화를 항공회사에 걸었다.
长禧는 전화를 대북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께 걸었다.:" 상세한 일은 치앙마이에서 돌아간뒤에 다시 말할께요."
赵素桂의 심정은 슬프다기 보다는 차라리 회한의 느낌이 더 많았다.어쨰서 딸아이는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나? 어째서 스테판은 곁에 있지 않았나...........
3개월전의 설날의 일이었다. 대만으로 돌아간 등려군은 凯悦호텔에 머물렀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내내 기침을 하였기에 가족들도 매우 걱정을 하였다. 등려군이 가냘프게 설명을 하였다:" 지난해 센다이(仙台)에 갔을 때 감기에 걸렸고, 홍콩으로 돌아와서 또 에어콘이
고장이 나서 습기가 너무나 심하였기에 내내 기침이 멈추지 않아요."
그녀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듣자, 어머니와 형제들도 매우 심하다고 깨닫지 못했다. 집안에서도 천식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때때로 크리스마스 밤 이나 모임을 가질때 가끔 담배를 피우곤 하였으나. 평상시에는 절대로 담배를 피우지 않던 그녀를 모두들 좀 시간이 지나면 곧 좋아지리라고 여겼다.!
결과적으로 등려군은 천식이 악화되어서 세상을 떠났다. 赵素桂는 스테판에 대하여" 딸을 너에게 맡겼는데, 그녀가 병으로 쓰러지는 때
너라는 사람은 곁에도 없었다"는 원망이 가득 하였다.
凯悦 호텔에 머물던 등려군이 병이 들어 고열이 나며, 구토와 설사가 심하여 침대에서 일어날 기력 조차도 없을 때 스테판은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즉 스테판에게는 딸아이(등려군)위하여 염려할 마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등려군은 스테판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허락하였는데,가족들이 설령 이렇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여전히 스테판에 대하여 원망이 여전하였다.
매니저를 겸하였던 동생이 가장 슬퍼하였던 것은 천식이 치료될 수 있는 병으로 가벼웁기에 목숨을 잃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신변에 있을 수 없는 후회막급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가족들이 모두 애통해 하는 것이었다.
등려군이 치앙마이에서 하루동안 입원한 적이 있었다. 병력카드에는 기관지천식이라고 쓰여 있었다. 천식발작은 치료가 늦어지면은 사망할 수 있는데, 그러나 대부분 만성병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비교적 흔하였다.
拉姆병원의皮尼特 의사는 등려군의 사망은 단지 천식뿐만이 아니라 또한 약이 일으킨 부작용의 탓이라고 판단하였다.
등려군이 늘 가던 “拉塔那”에서 ,등려군이 기침을 할때 3그람의 흰색병을 흡입하는 약을 본것은 1994년 이전에는 보지못했던 것이다.
흡입식 기관지 확장약은 사용할때 입을 벌리고, 목구멍으로 깊숙히 넣고 약을 흡입하는 것으로 여러나라의 의료기관에서 만일 과도하게 사용하면,모두 다 명확하게 , 심장 부하가 너무나 커서 천식 사망이 일어날 수 있다는 조사 보고가 있다.
등소저의 유체를 검시한 의사는 약물 과용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뉴질란드에서는 1990년 8월 에는 흡입식 천식치료제의 사용을 금지한 뒤로 천식으로 사망한 사람수가 격감하였다.일본에서도 1994년 3월" 사용상의 주의"와" 과량 사용에 대한 예방"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등려군의 사망도 세계 여러 곳에서 보도가 되었다. 아시아 여러나라가 보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纽约时报:뉴욕 타임즈》도 모두 보도하였다. "아시아의 여자 대스타" 의 사망은 아쉽게 느껴졌다. 한때" 정신을 오염시킨다"고 하여서, 노래를 금지하였던 중국의,《中国青年报》도 일면에 보도를 하였다.북경대학에서도 등려군을 애도하는 간판을 세웠다. 중국의 최대 음반 회사 上海音乐图书公司는 西藏路의 매장에서, 등려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의 보도로 한번 전해지자,원래 10시에 겨우 열던 점포 앞에 이미 사람들로 가득 넘쳐 있었고,
매장내의 재고 400 여장의 CD가 전부 한꺼번에 팔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추가로 물건이 더 들어와 내내 11일간을 끝으로
CD가 약 천장,카세트 테이프가 약 6000 개가 팔려서 내내 다 팔려서 물건이 없게 되었다.
유체는 치앙마이에서 TG636 비행기에 실려서 5월11일 밤 10시 50분에 대만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비행기가 시간을 어겨서 中正国际机场에 도착한 것은 그다음날 새벽이었다. 비행장은 약 200 여명의 매체직원들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며,또한 육해공 삼군 의장대도
영령을 맞이하려고 와 있었다. 운송되어서 안치소에 도착한 작은 관위에는 하얀 포가 덮혀 있었다. 가족과 정부 관리들이 향을 올린 뒤, 유체는 이송이 되어서 대북시 第一殡仪馆에 안치되었다. 赵素桂등은 가는 동안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날 대만 정부도 장례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대북의 중화텔레비전 방송국은 5월 13일 빈소를 설치하였다.이 방송국과 군은 매우 깊은 관계가 있었기에 언제나 군위문 공연을 하였던 등려군은 그 공헌으로 인하여 특별하게 이곳에 사람들이 참배할 빈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제단은 등려군이 좋아하는 자주빛의 천이 드리워 졌다. 등려군의 젊은 시절의 초상이 걸리고 또한 매우 많은 과일이 봉헌 되었다. 실내에는 끊임없이 그녀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첫날에는 약 3000 여명이 이곳에 와서 제단에 향을 올렸다. 한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초상을 향하여 염불을 외는 듯이 말을 하였다:"
설령 다른 세상으로 가더라도, 더 행복한 삶이 반드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나이 젊은 사람이건 아니면 늙은이건 제각기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모두다 얼굴에 남김없이 들어 내고 있었다.
5월 22일 "등려군소저 부고"를 공포하였고, 장례는 5월 28일 새벽에 民权东路第一殡仪馆의景行厅에서 거행한다고 공포하였다.
대만정부가 전력을 다하여 주도한 国葬은 蒋介石총통이 세상을 떠난 이래를 제외하고는 이같은 규모와 비교가 될만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할만 하였다. 정부는 국민 영예훈장인“华夏第一奖章”을 수여하였고 군측도 “陆海空军褒状”을 수여하였다。华夏第一奖章”을 예술인에게
수여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기타의 또 다른 侨务委员会가 수여한 “华光一等奖章”이 있었고、총통이 수여한 “褒扬令褒章”이 있었다。
그리고治丧委员会”의 명예 주임 위원장은 행정원장(국무총리 격) 连战이 담임하였다.
발인하는 날,대북의 거리는 새벽부터 무덥게 덥기 시작하였다. 원래 일기예보는 비가 온다고 하였으나 맞지 않아서 하늘에는 정말로 높디 높게 태양이 떠있었다.식장의 주변에는 새벽부터 팬들로 가득 차 있었다.이런 사람들은 몇시간이나 기다린 뒤에야 일반 팬들의 참배에 참가할 수 있었다.赵素桂이 식장에 온 것이 새벽 6시였다. 돌연 딸이 죽은 것에 대하여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던 개성이 강인한 그녀도, 식장에 걸려있는 장막,하얀 국화에 둘러싸인 영정사진을을 보고는 , 실제로 이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약 한시간 뒤에, 마침내 다시금 억누르지 못하고는 관 속에 누워있는 딸을 바라보며 대성 통곡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전 7시 반에 가족의 고별식이 시작되었다. 식장의 주위에는 4폭의 등려군 사진이 걸려있었다. 관 위에는 영정사진 속의 등려군이 마치 웃고 있는 것 같았고, 두손을 합장하며 마치 기도하는 듯한 자세 이었다.이것은 赵素桂가 골랐던 초상 사진이었다.
윗면에는 수정 불상이 반짝이고 있었다. 분홍색 치파오를 입은 유체의 오른편에는 수많은 상장과 훈장이 놓여 있었다.
8시가 지난 뒤 친구와 장례위원이 입장하여 추도의 뜻을 표했다.오후 8시 15분에 식장의 음악은 《我只在乎你》을 방송하였으며, 가족들은 영정사진을 향하여 두손을 합장하여 예를 표했다.
이어서 宋楚瑜、赵宁、친한 벗 何莉莉、등려군의 소속 회사의 일본金牛座唱片公司사장인舟木稔이 추도사를 하였다.
식장에 있는 사람들은 또한 등려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중국의 유명가수 王菲,와 등려군을 위하여 수많은 히트곡을 써주었던 荒木와 三木 작곡가도 있었다. 추도회의 끝부분으로 등려군이 작사한 노래가 소개가 되었는데 나중에 《星愿》으로 만들어진 노래이다。
星愿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작곡가 李寿全、童安格、李子恒의 세사람이 한 것이다. 장례식 2일전에야 비로소 완성하였다.
이 노래는 등려군과 노랫소리가 가장 비슷한 李宝琦가 불렀다. 이 테이프도 관속에 놓여 졌다.
9시 부터 11시 사의 공식 장례에 참여한 사람은 대만 뿐만 아니라 멀리 홍콩,일본, 동남아 여러 곳에서 온 팬들도 3 만여명이 되었다.
사람들 중에는 심지어 특히 체포될 위험을 무릎쓰고 북경에서 남몰래 건너온 사람도 있었다.식장에는 참배객에게 줄 3000 명분의《怀念专辑》이 다 나가 버렸다. 영정 사진과 같은 초상화를 이용하고 등소저의 싸인을 겉면에 쓰여져 있었다.
식장에서 준비하였던 10,000 송이의 꽃이 다 떨어진 뒤에 입구을 닫게 되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오히려 입장을 할 수 없게 된
패들이 화를 내며 외쳤다"어째서 우리를 입장시키지 않습니까?.참배객들은 말없이 줄을 따라서 전진을 하였다.
울고 있던 사람들은 매우 많았고 또한 길에 앉아서 우는 사람도 있었다.
11시가 넘어서 깃발을 관위에 덮는 의식이 진행되었다.총통부의 秘书长,국민당 중앙위원회秘书长이 몸소 관을 닫았으며 이뒤로 관 위에
中华民国 국기와 국민당 당기가 덮혀 졌다. 이것은 예술인으로서 최초로 받은 예우이었다. 의장대가 애도곡을 연주할 때 行政院长 连战,대만성장宋楚瑜이 향을 올리며 헌화를 하였다.
오전 11시 반에 군인들이 관을 어깨에 매고 영구차에 실고는 대북시 북쪽 약 50km떨어졌으며, 산을 의지하고 바다에 면한
金宝山墓园 으로 이동하였다.약 2시간의 거리로 이곳은 대만에서도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묘 곁에는 커다란 석비가 있는데 이것은 대만성 성장이 기증한 것으로, 등려군의 본명인 글짜에서 따온 것으로 석비에 금빛으로 “筠园”이라는 두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묘비명은 “爱国艺人邓丽筠小姐墓碑铭”;애국 예인 등려균 소저 묘비명 이라고 새겨져 있다.
오후 2시가 지난 뒤, 등려군의 목관은 3000 여명이 지켜 보는 가운데 묘원에 묻혔다. 중화텔레비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2 시까지 발인 의식을 실황 중계 방송을 하였다.대만 텔레비전은 낮 12시50분 부터 3시 10분까지 특별 프로그램으로 방송하였다. 길가에서 눈으로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하였던 많은 사람들은 30,000 여명이 넘었다.
장례 3일전에 스테판은 대북에 왔는데, 공항에서 기다리다 비행기로 다가온 张玉玲과 만났다.그날밤 그는 중화텔레비전 방송국에 있는 빈소에 가서, 100 송이의 붉은 장미를 가지고 가서 헌화 하였다.때 마침 셋째 오빠 长富를 만났는데 长富는 왼손으로 스테판의 가슴을 쥐고 오른 손으로는 그를 때릴 자세를 하였지만 스테판은 어떠한 반항의 뜻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강하게 만류를 하여서 아무런 일이 없었다.
凯悦호텔에 머물던 스테판은 长禧에게 전화를 걸어서 장례식에 참배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长禧는 그에게 대답하였다:
" 집안 식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 알려주겠다" 스테판은 화가 나 호텔에서 큰 소리를 치며 소란을 피웠다.
어머니 赵素桂도 스테판이 장례식에 참배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长禧는 오히려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망자의 뜻이 제일이니,누나의 뜻을 존중하여야 한다" 고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도 동의를 하였다. 그러나 장례 당일 마지막 까지 스테판의 나타나는 것을 끝내 보지 못했다. 长禧가 감정기복이 매우 큰 스테판이 한때의 꽁한 마음으로 인한 것으로 염려하여서 凯悦호텔의 직원에게 방안의 상태를 살펴보게 부탁하였다. 호텔직원이 아주 오랫동안 벨을 눌렀으나 전혀 대답이 없었다. 준비해 간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 가 보니 스테판은 이미 술에 대취하여서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등려군이 파리에서 스테판을 알았는데 이뒤로 함께 동거를 하는 것을 식구들은 결코 찬성하지 않았다. 스테판이 보기에 등소저를 정말로 잘 보살피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좀 등소저의 경제력에 빌붙어 보일 뿐이었다.1992년이 지난 뒤에 등려군은 스테판을 데리고 대만으로 돌아 왔었다.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그 사람과 어떻게 할 생각이냐? 혹시 결혼을 하려고 하니?" 그러나 등려군의 대답은 '절대로 될 수 없어요."이었다. 여러번 등소저는 스테판과 헤어지려고 생각하였지만 모두 다 스테판이 격렬하게 울고 불며 애원하여서 결과적으로 끝내 관계를 끊지 못했다.
등소저는 텔레비전 제작자 麦小姐와 홍콩에서 TNT제작 회사를 창립한 것이 1981년 이었으며, 이때는 赤柱(스탠리)에서 살던 6년전 일이었다. 등려군의 일정은 麦小姐가 관리를 하였다. 그러나 스테판과 사귀고 나서는 등려군은 일방적으로 그녀와의 거래를 끊어 버렸다.
왜냐하면 언제나 일을 하지 않는다며 비판하였기 때문으로 우선 스테판과 여행을 떠나 가버렸다. 스테판의 존재는 오랜 우정도 깨뜨려 버렸다.등려군은 음반회사에게 사진작가라고 불리우는 스테판에게 일을 주기를 바랬다.작품은 1994년 11월에 출시되는 《夜来香》싱글의 카바에 쓸것으로 이 사진은 치파오를 입은 사진이었다. 이 첫곡은 처음으로 일본어로 된 노래로 또한 등소저가 일본에서 만든 마지막의 노래이었다.그러나 스테판의 수준은 상업적인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회사는 등소저의 무리한 요구는 단지 이번만 들어 주기로 하였다.
金牛座의 직원은 등려군의 일정을 안배할 때 스테판의 개입하지 않기를 바랬다. 등려군이 우선 스테판과의 여행을 선택한 것이
경제적 곤란의 원인이 되었다. 가끔은 심지어 파리에서 물건을 사려고 할 때 가지고 있던 신용카드가 거의 한도를 넘어서 쓸 수 없었다.
스테판과의 교제는 등소저를 일을 멀리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옹색하게 되었다.이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마초를 피운다는 의혹조차 있었다. 1990년 1월 16일에 배우 胜新太郎가 특히 대마초로 당장 체포되었기 때문에 화제가 사라지지 않았다.
金牛座唱片公司의 舟木稔는,"등려군이 대마초를 피운다"는 들려오는 이 소식을 듣고는 , 프랑스인 스테판과 가깝게 지내기 때문 이라는 것을 알고는 마음에 의혹이 생격서 곧바로 프랑스로 달려갔다.개선문 근처의 카페에서 만났는데 두사람은 2층의 작은 방에서 이야기를 하였다.舟木는 대마초와 관련된 일을 물었다. 등소저는 말하였다:" 절대로 대마초를 피우지 않아요"
부디 절 믿어 주세요, 당신은 나를 믿지 못하나요?" 연이어 반복하여서 말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질문을 하였다:" 누가 말하였어요?"
등소저의 강한 부인에 대해 舟木는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등소저와 함께 일하였던 麦小姐도 매우 걱정을 하였기 때문에,프랑스로 달려 왔으나 등소저는 그녀와 만남을 거절하였다.
등려군이 치앙마이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현지의 매체는 등소저의 유체를 구급들것으로 옮기는 화면을 조금도 수정하지 않은채 방송하였는데, 영국의 로이터 통신사(路透社)도 유체 사진을 전세계에 내보냈다. 이는 클로즈업 한 상반신 사진이었다.
왼쪽 귀밑에 붉은 반점이 있었기에 수많은 추측이 일어 났었다. 등려군의 사인이 에이즈가 아닌가 또는 마약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홍콩과 대만의 매체가 흘렸다.심지어 대만 정계에서도 "모살설"이라는 추측도 일어 났었다.
拉姆병원에서의 기자회견에는,유언비어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약 50 여 매체들이 자리에 있었는데 ,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史梅特·汉古唐의사는 명확하게 대답하였다:" 범죄에 연류된 가능성은 없다. 100% 사인은 기관지 천식 발작으로 인한 것이다."
좣그 귀밑의 붉은 반점은 유체 보존을 위하여 福马林(formalin)를 주사하여서 생긴 반점이다.
1994년 12월 30일 입원한 병력챠트에는 에이즈의 검사란에는 "음성"이라고 기재 되어있다.에이즈에 관한 검사는 병원이 모든 환자에게
하는 일상적인 검사이었기에 또한 무슨 특별한 것은 없었다.
호텔에 보관된 여권도 수많은 추측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국적란에 "“BELIZE", 직업란에는"ARTIST"라고 쓰여져 있었기 떄문이었다.
출생지는"TAIWAN”,주소지는“HONG KONG”이라고 쓰여져 있었다。성명란에는“TENG LIYUN”;키는"165CM”。BELIZE는 카리브해에 면하여 있는데 이것은 서반구에서 가장 큰 산호섬이며 마야 문명유적으로 인하여 유면한 23만 여명의 인구가 있는 작은 나라이다.
등려군은 1991년 7월 25 일에 이“A000374” 여권을 입수하였다.
“BELIZE"여권을 사용한 까닭은 이전의 여권 사건과 같은 성질의 문제이었다. 언제나 출입국을 하는 국제적 비지네스 사람들은 대사관에
비자 신청을 하는 시간을 아끼려고 중남미 몇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코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국적 시장의 존재가 있었는데
대체로 미국 1 만 달러면 살 수 있었다. 등려군은 BELIZE여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만으로 돌아 갈때 비자를 바꾸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고, 검증이 끝난 합법적 여권 이었다.더욱이 영국 연방에 속한 가맹국인 BELIZE여권은 같은 영국 식민지인 홍콩에 들어 갈때 매우 편리하였다.
모든 유언비어는 모두 다 날조와 무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적 가수라는 신분의 등려군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여전히
"첩보원 이었다는 설"이 유포되어 있다.이는 군측에 협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광스럽게 장례식에서 수많은 정치적 꾸밈이 보여졌다고 하였다.이런 추리의 보도를 한 곳은 거의 다 일본의 매체들이었다.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한번 보도 되자, 대만의《独家报导:독점 보도》는 그녀가 군측의 첩보원이라고 보도를 하였다. 전직 정보국의 고관 이었던谷正文이 "등려군은 첩보원"이라고 증언하였다. 이 보도는 특히 아시아 여러나라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으며,일본의《每日新闻》의 국제판 에서 보도한 것 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周刊宝石》도 단정적인 문장으로 "등려군은 20 년간
비밀 첩보원을 하였다"!! 라고 보도하였다.谷正文의 추측에 의하면, 등려군은 국가안전국의“第三处”에 속하였다는 것이었다.
만일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충격은 매우 커서,등려군에 대한 평가도 대대적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정보원? 이었나.나는 谷正文과 만나기 위하여 1995년 7월 24일 대만으로 갔었다.
대북시 永康거리. 장소에 가까이 가자 곧바로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래된 아파트이었다. 일층의 벨을 누르자 큰 목소리의 대답이 있었다. 이사람이 谷正文 본인이었다. 윗층으로 올라가니 열개의 문이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문 하나가 열렸다. 머리를 내밀며
谷正文이 말을 하였다:" 이곳이요. " 몸은 매우 건강하여 보였다. 정말로 이미 80 살이 넘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상상속의 정보국 관리하던 풍모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으나, 오히려 "좋은 할아버지" 의 자상한 느낌이 보였다.
1911년 5월 출생의 谷正文은 1935년 20 살때 정보국에 들어갔으며, 60살에 관직에서 少将으로 전역하였다.
谷正文이 소속된 정보국의 역사는 매우 깊었고 길었다. 장개석이 국민당 혁명군의 총사령관을 맡고 있을 때,북벌전선의 군사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1928년 심사부로 창립되어 시작된 부서이었다.1932년 일본이 상해를 침략하였때 특무조를 특무처로 개편하였다.
1937년에 이르러 또 다시 군통국(军统局(军事委员会调查统计局))으로 개편하였다.。전면적인 항일 전쟁을 위하여 매우 중시된 정보공작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 뒤로 또 다시 保密局(1946년)、情报局(1955년),마지막으로 1985년 군사 정보국으로 바꿨다.
국가 안전국은 1955년 설립이 되었고 국방회의에 속하였다. 내부에는 세분을 하여서 해외 정보, 대륙정보,첩보 대책(“对谍报”), 정보통신과 통신 감청의 5개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뒤로 1967년 2월 1일 총통 직할의 국가 안전회의의 소속기관이 되었다. 국가 안전국은 국내 정보기관과 치안 기관을 지도와 조정을 담당하게 되었다.역대의 국장은 모두 군인이었고, 上将급이상의 장군이 담당하였다. 대만의 “CIA”(美国中情局)혹은“TCIA”라고 불리웠다.그러나 CIA 와는 같지 않은 것은 행사권이 없다는 것이다.《独家报导》이 보도한 기사에 쓴 谷正文의 증언에 의하면,등려군은 “对谍报”의 제3처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谷正文는 항일전쟁시기에 산동성에서 대기할 때 유격부대원이었다.1941년 이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었다.
장개석이 대뮥에서 대만으로 쫓겨날때 국방부의保密局의 侦探组长을 담당하였다. 약 15년동안 공산주의자들의 간첩을 잡는것을 전문으로 하였다. 대만공산당이 1982년 창당하였을때 전쟁뒤에 비록 진압이 되었으나 계속 활동을 하였다. 정보국으로 바뀐뒤에 谷正文이 감찰실 주임을 담당하였다.
谷正文의 증언에 의한 등려군은 " 포섭되어 첩보원이 되었으며"그리고 명확히 '국가 안전국의 제3처의 관리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곧 소파에 앉아있는 건너편의 谷正文에게 질문을 하였다: 그에게 내가 스스로 등려군 본인과 인터뷰한 경위를 설명하였다.谷正文은 바로 의아해 하면서 설명하였다:"아! 그래요?" 우선 그에게 《周刊宝石》이 게재한 내용을 설명하였는데 그는 어떻게 인터뷰를 하였는지를 물었다.
" 한 중국인이 전화를 걸어와 이야기를 하였는데, 약 20분간 말을 하였는데,이것 뿐입니다."
"단지 20분요? 그 등려군은 국가 안전국 제3처 관리에 소속된 첩보원이라는 추측은 무슨 근거가 있나요?"
갑자기 중요한 것을 질문 받게 되자 谷正文 다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용히 말을 하였다:
"그 말은 묻지 않았나!. 만일 첩보원의 기사가 발간이 되면은 마땅히 누가 말한 것일 터인데!" 갑자기 아무런 말도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물어 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임무를 하였나요?"
결과를 대답하였다:" 몰라요" "그러나 기사의 근거는 당신이 증언한 것입니다, 군사 统治局 시절 때,등려군이 포섭되어서 정보국이 되지 않았나요? 당신도 그녀 자신을 보았지요! 오랫동안 말이 없던 谷正文는 약간 화가 나서 말을 하였다:" 무슨 统治局 이 있나, 나도 등려군을
보지는 못했다."
완전히 말이 맞지 않았다. 기사 속의 “情报局”을 “统治局”으로 잘 못 쓴것을 지적하는 것 같았다.
" 기사속에는 당신이 그녀를 보았다고 쓰여져 있잖아요? 그럼 당신이 정보국에서 그녀를 보지 않았지요?" 내가 이처럼 질문을 하자,그는 뜻밖에 의외의 대답을 하였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그녀를 본적이 있어요.만일 가까이에서 보왔던 것은 말하자면, 1960년 10월 경 동방호텔의 음악홀에서 그녀가 노래하는 것을 보았는데 단 한번 뿐이었습니다."
1960년의 등려군은 겨우 7살이었고 이것은 谷正文이 기사에서 언급한 "13살"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당신이 등려군의 아버지를 안다고 말하였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 아니요! 나는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던 적이 없어요"
도대체 어찌 된셈인가? 《周刊宝石》에서 "대만 사람중 谷氏가 말하였다" 라고 보도하였는데, 만일 직접 이 기사를 읽었다면 정말로
기자가 직접 인터뷰를 하였고,谷正文은 구체적인 증언을 하였던 것으로 믿게 하였다.
다시금 이 일에 대하여 물었는데 그는 인터뷰한 상세한 경위를 나에게 이야기 하였다.
"어느 날, 한 중국인 전화를 걸어와 스스로 그 잡지의 직원이라고 하였으며 이뒤로 약 20분간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独家报导》의 전화라면 너무나 짧지 않나요!"
간혹 웃음을 띠면서 대부분대충 말하고 넘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나 이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므슨 일을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또 질문을 하였다:" 그럼 어째서 당신의 이름을 써서 등려군이 첩보원이라는 증거로 삼았을 까요?"
" 그것은 그녀의 관위에 덮혀 있는 중화민국 국기와 국민당 당기를 보았기에 나는 그녀가 생전에 임무를 담당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가 있는 말이 아니예요! 기사에서는 당신이 포섭되었다는 내부증거 문건을 보았다고 말하였다고 제시되고 있어요"
谷正文는 얼굴에 조금은 곤혹스러워하며, 그러나 오래지 않아 말을 열어 말을 하였다:"나는 그 문건을 본적이 없어요,또한 기억속에 그녀가 첩보원이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만일 기사속에 이렇게 쓰여 있다먼 그것은 반듯이 기자가 스스로 제멋대로 쓴 내용입니다."
사실 谷正文 집을 방문하기전 2일 전에, 최초로 등려군이 첩보원이라고 보도한《独家报导》의 총편집장에 사정이 생겼다.
그것은 谷正文이 걸었던 전화는 등록되어 있는 일반 전화부에 있지 않았기에, 편집부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었다.결과적으로 총편집장의 전화이었다.그에게 谷正文에게 기사의 내용과 연관된 일을 설명들으러 가려고 한다는 것을 설명하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소개해 줄 수 있다고 하였으나, 함께 인터뷰를 가야 하기를 바랬다.그가 요구하는 것 때문에 나는 의심스러워 하게 되었다. 나는 좋다고 하자,
그는 내가 내일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다음날 약속된 시간에 따라서 전화를 걸고는 총편집부에 갔는데, 그는 谷正文이 이미 84세 이므로 마땅히 또한 낮잠을 자고 있기에 내게 밤에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 일이 너무 바쁘다고 말을 하였고 그래서 함께 인터뷰를 갈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다시 전화를 걸자 결과적으로 내일 10시 반에 谷正文 집으로 인터뷰를 가자는 것이었다. 총편집장는 다시 함께 가겠다고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날이 되자 오히려 총편집장의 종적을 보지 못하였다. 인터뷰가 일단락 지어 진뒤, 谷正文에게 《独家报导》의 총편집장의 일을 이야기 하자, 다시 전화를 걸어서 그와 이야기 하여서, 인터뷰를 이미 좀 빨리 할 수 있는 지를 끝낼 수 있는 지를 결정하였다.그는 대답을 하였다:" 알았습니다. 谷正文이 지난 일을 알아 맞추는 것을 들으면서 30분이 지났고 또 한시간이 흘렀으나 총편집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러 갔더니 결과적으로 여직원이 말을 하였다:"제가 그에게 돌려 주겠으니 들어 보세요 좀 기다리세요. 여직원은 또한 대답하였다:" 그는 없어요" . 내가 상대방의 대화를 보더니, 곁에 있는谷正文이 얼굴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또 다시 그에게 물었다: 등려군이 정보원이라는 증거가 있나요?
"증거는 없어요" 谷正文이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였다.이것이" 모든" 과정이었다. 결과적으로 《独家报导》의 총편집장은
여태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의 텔레비전방송국은 이뒤에 또 등려군이 첩보원이라 것을 보도하였다.나도 원래부터 알고 있던 텔레비전 직원이 이상의 상황을 설명하였는데, 그들은 여전히 이 보도를 하였다. 예컨데 1995년 10월 11일에 TBS방송국이 방송한 “情报空间J”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등려군 의혹의 사망의 진상"이라는 특집 주제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거의 20% 의 높은 시청률을 차지하였다. 이 뒤에, 프로그램에 따라서 인터뷰를 하러 간 宇崎가 《朝日艺能》(1995년 12월 7일자)의 잡지 속에서, "등려군은 국제첩보원으로 몰래 일본,홍콩,그리고 프랑스"에서
활약하였다고 선동하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었다. 宇崎는" 단독으로 전직 장군이었던 谷正文과 인터뷰를 하여서 성공리에 등려군이 첩보원이었다는 중요한 증거를 찾았다"고 소개하였다.宇崎가 물었다:" 교환조건( 여권취득)을 위하여서 특무 공작에 일하였나요?"
谷正文이 대답하였다:" 바로 그래요."" 연락하러 가는 사람으로 되거나 아니면 손으로 들고가 전달하는 공작이었어요."
또 단언하여 말을 하였는데 1979년 일어난 여권사건은 사실 국가 안전국이 일찍 부터 무엇이든 다 알고 있었어요, 그 여권은 사실 국가 안전국이 준것이에요" 윗글이 모두 다 허구이었다.
1996년 1월에 출판되었고 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방송된 "등려군 의혹사인의 진상"을 중심으로,"다시 종합하고 보완한 인터뷰"를
宇崎真,渡边也寸志이 《邓丽君的真实》(德间书店 발행)이라는 책으로 썼다.
이책도 谷正文이 주었던 증거를 가진 사람이 "대만의 늙은 장군이 말한 중대한 증언으로" 등려군은 30년간 첩보원을 하였나?"로 설명이 시작되는데,세번 발표된 《独家报导》의 기사에는 그 안에 宇崎가 이 내용을 들었기 때문에 谷正文을 방문하러 갔었다고 되어있다.
宇崎가 谷正文에게 물었다:
"등려군이 정말로 첩보원이었나요?" 谷正文이 대답하였다.
"
"그래요, 틀릴 수 가 없어요. 그녀는 국가안전국의 첩보원이에요." 《独家报导》과 같은 의견이에요. 谷正文의 의견에 따르면,
첩보원이 된 동기는 주된 것이 출국할때 반드시 필요한 국가안전국의 허가를 얻으려는 목적과 바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의 책임자가 말을 하였다: " 등려군이 쓸 수 있다고 여겨서 그녀에 대한 신상 조사를 하였으며 또 등려군과 관련된 문서를 가지고 있어요".
谷正文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매우 자신있게 등려군이 첩보원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사실이니까요. 만일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고발한다면, 그래요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이것은 谷正文과 인터뷰한 요점이다. 작가는 인터뷰한 결론을 이렇게 썼다.:" 谷正文의 증언은 상당한 구체성이 있어요.만일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알 도리가 없는..."
설령 증언이 매우 구체적이라도,그러나 근거가 없다면, 단지 "가능성, 추정될 수 있다"는 것의 반복일 뿐이며,그 결과는 단지 일방적인 추론 일 뿐이었다.谷正文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을 하였다:" 등려군은 출국하기 위하여, 첩보원 신분의 편리함을 바랬을 것이다."그리고 등려군이 맨처음 출국한 것은 홍콩으로 갔던 것으로, 게다가 1967년 또는 1968년 무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등려군이 매처음 대만을 떠나 출국한 곳은 1969년 싱가포르로 갔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홍콩으로 간 때는 1970년이다.등려군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사실에 기반을 둔 자료이다. 사실과 맞지않는 언론이 만일 그사람도 구체성이 있고, 게다가 조금도 의심없다며 써내려 갔다면 , 너무나 설득력이 없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등려군의 의혹사망의 진상"이란 선정적인 말로 프로그램의 주제을 만들어서 방송하였고 게다가 2달 뒤에 책을 만들어서 발행하였으며,
여러번 유일한 증언을 한 谷正文을 이용하여서 아울러 "등려군은 첩보원이라는 의견을" 널리 퍼뜨렸다. 왜 谷正文는 또한 스스로
"첩보원이라는 의견"을 다시금 되살리려고 하였나.? 그래서 나는 다시 1996년 4월 29일에 대북에 가서 谷正文과 인터뷰를 하였다.
谷正文는 저번 첫 인터뷰를 할때와 마찬가지로 만면에 웃음을 띠고서 나를 맞이하여 주었다. 우선 질문한 것은"“《邓丽君的真实》이라는 책속에 제시된 내용이 당신이 어느 때 말한 것인가요?"
谷正文이 말을 하였다. 이 증언은 1995년 7월 23일에 전화가 와서, 24일에 대북시내의 호텔에서 인터뷰를 한 것 입니다.
또한 이것은 바로 내가 그와 인터뷰한 3일전 이었다. 어째서 동일한 사람에 대하여 동일한 주제로 인터뷰를 하였는데 결과가 이다지 며칠도 되지않았는데 180 도 같지 않은지,실제로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 할 수 가 없었다. ? 谷正文이 《邓丽君的真实》작가와 《独家报导》를 같은 설명을 하였지만 내가 인터뷰할 때는 결코 谷正文이 수일전에 말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나의문제는 대부분 반복하여서 같은 것을 질문하였다. 다만 중점은 바로 "등려군이 첩보원이라는 무슨 구체적 근거가 있는가?"
하는 것이고 예측된 결과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谷正文이 단지 여러번 대답하였다." 없어요" 만일 다시금 어떤 새로운 발견이 된다면 그때 그가 말을 하였다:" 국가 안전국의 사람이 와서 등려군의 일을 아는지 물었으나. 또한 매우 진지하게 묻지는 않았다. 설령 군측을 도왔다고 하더라도, 또한 첩보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邓丽君的真实》에서, 谷正文은 국가 안전국 제3처의 吴소장이 일찌기 자기를 찾아와서 등려군이 쓸만 한지를 의논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론상 谷正文의 소속된 정보국이 되었으며, 국가안전국과 합동으로 등려군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국가 안전국은 결코 정보국을 지휘할 입장이 아니었다.게다가 제3처는 결코 첩보원을 파견하는 부서가 아니었다. 이 임무를 담당하는 것은 제2처이다, 그에게 " 오로지 출국의 편리를 위하여 첩보원의 신분의 편리를 희망하였다"는 일과 진실은 부합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비자 취득은 교육부와 신문부에 신청하고, 계엄총사령부의 사상 검증을 거쳐서 외교부가 허가를 발급한 뒤, 법무부의 출입국 관리국이 비자를 발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谷正文이 말한 "출국에 절대 필요한 국가 안전국의 허가"라는 일도 정확하지 않았다.
만일 정말로 등려군이 첩보원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럼 "가짜 여권 사건"은 일어났을 수가 없었다.
谷正文은 또한 텔레비전 방송의 프로그램에서 " 그녀에게 정보국을 위하여 간첩활동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그녀는 보통의 첩보원이 아니다" 라고 말을 하였었다.게다가 谷正文이 하는 당시의 업무는 대만 공산당원 검거와 정보수집을 하는 업무로 결코 등려군에게 첩보 활동을 요구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럼 어째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근거가 없는 발언을 하였나? 谷正文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 텔레비전 방송국의 직원이 나에게 그녀가 첩보원이라고 말해주기를 부탁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정말로 텔레비전 방송국의 직원에게 부탁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 첩보원 설"의 진상이었다.
但是消息只要被报导一次就会深深的烙印在许多人的印象中,正所谓的“亡灵”经变本加厉后会成为更粗暴且违反常理以“暴戾”的型态出现。谷正文最初在《独家报导》中说的文章,之后成了“邓丽君==谍报员说”的唯一根据并且被广为流传。例如香港发行的《明报月刊》一九九四年四月号中,引用才出版二个月的《一代歌后邓丽君》之书,介绍“邓丽君==谍报员”之说,也是根据谷正文过去的证词而写成的文章。跟发生在日本的情形基本相同。
그러나 뉴스는 한번 보도가 되기만 하면은 곧 깊은 낙인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상속에 찍히게 되어서 때 마침 이른바 "망령"이 본래 모습보다 더 심하게 되어서 더 조악하고 상식에 어긋나는 잔혹한 형태로 나탄게 되었다. 谷正文이 처음으로 《独家报导》에서 말한 기사가 이후에는 ,
"등려군이 첩보원이라는 설"의 유일한 근거와 아울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예컨데 홍콩에서 발행된《明报月刊》의 1994년 4월호에서
인용하자 마자 2개월간의 《一代歌后邓丽君》이라는 책이 출반되었는데, "등려군이 첩보원이다"리는 설을 소개하였으며, 또한 谷正文이 과거에
말한 증언과 이를 썼던 기사의 근거이었다. 일본에서 발생된 정황과 기본적으로 같았다.
2004년 2월 6일 일본 후지 텔레비전 방송국의 "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인생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등려군을 방송하였다.
프로그램에서 화면은 등려군 일기 같은 것을 방송하였다. 게다가 일기속에 쓰여진 내용을 읽혀졌었다. 예컨데 그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었다
" 1981년 11 월 7일, 조금전 부터 지금까지 내내 반지낀 손가락을 바라보았는데, 밤에 그가 내게 구혼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등려군 일기에 ×××사건의 분노와 그날의 살육 상황에 대하여 쓰여져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등려군은 결코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중요한 것은 있지도 않은 일기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필적 조차도 같지 않은 글이었지만,
이렇게 방송이 되었다.
후지 텔레비전 방송국의 섭외부장은 어떻게 해명을 하였는가?
"나는 1996년 출판된 것에 따라서 신뢰도가 높은 평전《邓丽君的真实》이라는 책속에서 그녀를 일찌기 하나 하나 설명 되었던, 허용된 범위내에서 하였던 보도라고 여겼습니다"”《周刊新潮》2004년 2월 19일호
아예 이른바 《邓丽君的真实》같은 책속에는 쓰여진 등려군의 이야기가 없었다. 그 프로그램은 수십개의 근거를 가지고 하였지만 매우 분명한 잘못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의아하게 한 것은 등소저가 세상을 떠난 뒤 근 10여년이 지난 이때, 뜻밖에 이책을 "신뢰도가 매우 높은 평전"이라고 한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대만의 스캔들 보도 그리고 홍콩과 일본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등려군이 첩보원이다"는 설의 유일한 근거는
바로 谷正文의 증언이었으며 게다가 그 자신도 그것은 그러나 억측일 뿐이라고 인정하였었다.뿐만 아니라 매우 열심히 등려군이 첩보원이라는 설을 증언하였던 谷正文은 일찌기《独家报导》잡지에서 2년간 백색 테러와 연관된 연재를 하였으며, 이후로 "백색 테러 비밀 문서"를 모아서 책으로 펴냈었다. 책의 발행 출판사는 独家 출판사이었고, 이 출판사는 《独家报导》주간 잡지사와 같은 계열 회사이다.
여러번 유언비어로 알려졌던 첩보원 설은 등려군이 살아 있을 때의 완전한 단서를 찾지 못하였다.마땅히 매체가 날조하여 만든 내용임에 틀림이 없었다. 당연히 가족과 친구들도 매우 의심을 가졌지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마음에 많이 두지 않았다. 등려군이 세상을 떠난 뒤에 갑자기 이처럼 나온 谷正文의증언에 대하여 赵素桂가 말을 하였다:
"만일 딸이 정말로 첩보원이었다면, 그럼 30년이 되도록,나 엄마 조차도 몰랐다는 말이 되는데, 모든 해외 공연은 모두 다 내가 관리한 것으로,
정말로 국가 안전국과는 접촉이 없었다."
在一九八五年一月二十九日关键记者打电话讲了一个钟头,采访到人在新加坡的邓丽君的访谈之事,被刊登在《中国青年报》,又被国际媒体转载,关键记者在中国媒体一举成名。说到“越洋电话”就成了关键的代名词。“越洋电话”就是打电话到国外的意思。在当时的中国,用电话打到国外采访之事是非常罕见,更何况采访到的人是众多人民所关心的邓丽君。这件事在媒体界及一般社会大众之中,也引来了许多注目。
1985년 1월 29일에 关键기자가 전화를 걸어서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였는데, 싱가포르에 있던 등려군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인터뷰한 일이, 《中国青年报》에 실렸으며,또한 국제 매체에 실렸으며. 关键기자는 중국 매체에서 일거에 유명하게 되었다.
“越洋电话”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关键의 대명사가 되었다.“越洋电话”는 곧 외국에 전화를 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전화를 걸어서 외국과 인터뷰를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고,더욱이 하물며 인터뷰 대상인 사람이 아주 많은 인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등려군이었기에. 이 사건은 매스컴 세계와 일반 사회의 대중사이에서도 수 많은 주목을 불러 일으켰다.
关键은 1947년 6월 17일에 북경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关俊英은 북경시 朝阳区市政局长의 공산당원이었다. 关键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
곧바로 군대에 입대하여 통신원이 되었다. 1972년 북경시 건재공업국의 宣传科로 배치가 되었다. 또 다시 북경시修缮材料公司의 劳动者理论组
로 전근되었다. 1980년 2월에 《北京青年报》의 기자가 되었다.유명인사를 뒤 쫓는 일을 하던중, 성공리에 등려군을 인터뷰한 것은 그가 기자를 한지 5년째가 되던 때로, 37살때 차지한 신문 특종이었다.
이로 인하여 关键은 “先进记者”、“优秀青年记者”라고 불리웠다.
1986년 초에 关键은 일본 유학을 할 생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을 가는 것은 단지 학위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또한 직접 등려군과 연락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해 여름 그의 일본 신문기자 친구는 중국에 여행을 온 일본인을 그와 인사를 시켜 주었다.
설령 자비로 일본에 가더라도 공부를 할때를 위하여 그 일본 남자에게 그의 보증인 되어 주기를 부탁할 수 있었다.
“谍报员说”을 확대하였던《邓丽君的真实》 가운데에서도 关键이 나오지만, 수많은 거짓된 묘사가 실려 있었다.
예컨데 이 일본인은 사실상 "대만의 정보원이 일본인으로 귀화한 사람"이거나,"등려군이 이 정보원을 关键기자에게 추천하였다"등등을 지칭한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완전히 날조된 내용이었다.
关键는 1987년 1월 23일에 중국민항기를 타고서 成田공항에 도착하였는데, 마중을 나온 보증인은 그를 데리고 동경언어학교에 가서 등록하게 하였다. 그날 밤에 보증인의 横滨(요코하마)의 집에서 환영회를 열었다.
그는 처음에는 학교 기숙사에 있었으나, 같은 방 친구들이 모두 다 다른 나라 학생들이어서 마음놓고 공부를 할 수 없었기에
杉并区 本天沼에 있는 집으로 이사하여서 중국인들과 같이 살았다. 나중에 또 "어떤 이유"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다시 调布市 若叶町
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북경에 있던 36살의 아내와 11 살의 딸을 불러서 함께 살았다.
1988년이 되자, 关键은 전반기에는 일본어 공부를 하였지만, 후반기에는 반드시 선택을 하여야 하였다.
그것은 바로 평론가 양성 전문학교에 진학 할지, 아니면 대학에 갈 지를 결정하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 가능하다면 그는 미국에도 갈 생각이었다.
1988년 10월 동경지구 중국 유학생 학우회는 《新大陆》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편집부는 동경의 饭田桥에 있는 中日友好会馆
后乐寮 168호실에 있었다. 关键는 1989년 1월호부터 편집부 작업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언제나 스스로 원고를 썼었다.
이 잡지의 목적은 중국을 홍보하는 것과 유학생에게 볼 내용을 오직 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출판경비는 중국대사관의 교육부가 도와 주었다.
1989년 4월 중국 대륙에서는 胡耀邦이 사거하였기에 여러 곳에서 매우 많은 democratization를 요구하는 students운동이 발생되었다.
이시기의 关键는 마침 언어 학교를 졸업하고는 일본拓殖大学의 청강생이 되었다. 국내와 호응하기 위하여, 일본의 유학생들 중에서도
수많은 활동이 전개되었다. 后乐寮에 20 여명이 토론에 참가하러 모여서, democratization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关键는 이름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활동하는 주요한 멤버중 한명이었다.
이시기에 그도 유학생들이 5월 18일에 주도한 democratization을 지원하는 조직인"留学生团结联合会”에 나타났으며,
21일에 동경의 港区의 三河台公园에서 democratization을 위한 연대 집회를 거행하였다.
내걸은 구호는 “李鹏总理drop the reins of government”、“ democratism 만세”、“martial law실시 반대”이었다。
당초 예측은 단지 100 명이 참가할 것이었으나, 오히려 2500 여명이 오게 되었다.
이날 大阪、名古屋、仙台에서도 집회가 열렸으며, 전 일본에는 약 4000 명이 참가 하였다.
거의 모든 유학생 단체가 모두 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government를 반대하는 입장을 주장하였으며 그중에는 또 ×××을 지지하는 전단을 쓴 students도 있었는데, 격렬하게 비판을 한 글을 쓴 사람이 바로 关键이었다.
어떤 활동가는 시위하는 무리 가운데에서 그를 우연히 만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그가 "思想解放"을 하였다고 느낄수 있었다.
또한 일찍이 그가 매우 흥분하여서 대륙에서 최초로 등려군과 인터뷰를 한 일을 이야기한 것을 들었다고 하였지만 머리가 길고 야위고
말수가 적은 关键은 이 시위활동에 참가한 뒤부터, 그는 모든 democratization활동의 현장에서 사라지었다.
모월 모일 ×××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부터 내내 7월 동안 ,중국 공안이 유학생의 동향에 주의를 하기 시작하였다.关键는 처음 일본에 왔을 때 池袋,新宿에 있는 영화관에서 청소작업을 하였고 이 뒤로 또 다시 中东野의 파친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마지막에는 매주 홍콩 잡지《争鸣》、《动向》、《镜报》의 원고를 써주고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모두 다 북경의 political한 내막과 관련된 것을 쓴 것으로, “罗泳”등으로 나누어서 여러개의 같지 않은 필명으로 원고를 썼었다.
"모종의 이유"로 인하여서 调布市에서 이사하여 산 원인은 바로 뜻밖에 같이 사는 사람이 그가 대량으로 원고를 써서 홍콩으로 팩스를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关键는 단지 등려군을 한번 보았을 뿐인데. 1989년 10월 28일 아사히 텔레비전방송국이 "등려군 15주년 기념 특별 프로그램"을 녹화할 때 우연히 만났던 것이다. 기자의 신분으로 청중석에 나갔다. 그는 일본에 온뒤에 “关敏男”이라는 이름으로 음반 회사와 접촉을 하였다. 이 이름은 일찍이 대륙의《人民日报》의 해설원에게 제기하였던 적이 있었다.
关键은 일찍이 싱가포르의 등려군 집으로 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일본에 유학을 하고 있기에 경제적으로 곤란하니 도와 주기를 바란다고 썼었다.등소저는 이때문에 일찎이 남동생 长禧에게 "너는 关键라는 기자를 알고 있니?어떻게 하면 되겠니?"하고 물어 보았다. 그래서 미국돈 200 달러를 보내주었다.
关键이 갑자기 지금 등려군의 앞에 나타 났는데. 녹화하는 것을 보다가 곧 끝날때 다가가며 등려군을 불렀다.
등소저는 그의 이름을 듣자 모든 기억이 떠올랐는데, 일하는 직원이 조금은 곤혹스러워하는 등려군을 보고는 그를 제지하였다.
关键이 말을 하였다.: "함께 사진을 찍어도 좋은 가요?" 등려군이 거절을 하고 아울러 빠르게 떠나 가버렸다.
그녀가 불안하게 ×××사건 뒤에 아마도 또 정치적인 이용을 당할 까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짧은 접촉과 아울러 강한 거절을 당했던 关键은 등려군에 대한 관심이 급속하게 사라져 버렸다.
关键이 1988년 부터 1991년 까지 " 친지 방문"이라는 명분으로 모두 4차례 북경으로 돌아 갔으며 ,
北京市 副市长과 司法部 副部长등을 방문하였던 것을 포함하여, 매우 많은 인터뷰를 하였다.
4번째 북경으로 돌아 간것은 1991년 8월의 밤이었다. 关键은 9월 11일 오전《人民日报》대중부서에서 일하는 누나의 사무실로
달려 갔다.
누나에게 당내의 문서들을 꺼내와 빌려 주어서 보여 주기를 부탁하였다. 누나에게 500 부의 당내의 문서 자료를 꺼내오기를 부탁하였다. 시내의朝阳区의 집으로 보냈는데, 자료의 높이가 대체로 20 cm 정도이었다. 13일 오후 누나는 또 비밀등급의 자료 몇가지를 보내주었다. 오후에 关键는 西长安街饭店에서 일본기자와 만난 뒤에 함께 집으로 돌아 갔다.
그에게 자료를 안전하게 가지고 출국하는 것을 부탁하였다. 종이상자 내에 있는 자료는 머풀러로 싸여있었다. 깊은 밤이 되자 기자는 마침 자료를 복사하고 있었는데, 전력의 사용량 때문에 이상 한것이 발각되어서 북경시 국가 안전국이 방으로 뛰어 들어 왔다.복사는 이미 끝부분에 이르고 있었다. 모두 284 장을 인쇄하였다.
关键在九月十六日白天从某个在国家机构的女性友人那里拿到十多件的机密资料。约在晚上十点左右回到住宿的饭店。原来预定要在翌日回日本。晚上十一点多,房门被大声地敲着,突然开门进来的是北京市国家安全局的搜查员。搜查员照着纸上念:
“北京市人民检查分院批准北京市国家安全局合法执行拘提关键。”
搜查员出事搜查令后,为了找出“机密文件”、“秘密文件”开始搜房。关键全身颤抖不止,因为关键将被以“将国家机密非法提供给外国人士”、“间谍罪”被逮捕。被收押的秘密文件一共是五百四十三件。
第四次从日本返回北京也不是没有不安。关键在汪道涵访问日本时,曾在大谷东京饭店会面时,问到“回去没关系吗?”,得到的回答是“你没有任何问题吧”,所以关键就放心了。因为汪道涵就是成为党、政、军最高领袖江则民的前任上海市长,也被认定是接班人,更是对台湾的联络窗口“海峡两岸关系协会的会长”。关键相信有这么大“大人物”的保障
应该安全。
关键는 9월 16일 대낮에 국가기구에 있는 어느 여자 친구에게서 그곳의 10여건의 기밀 자료를 받았다.대체로 밤 10시 경에 숙소인 호텔로 돌아 왔다. 원래 예정은 다음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밤 11시가 지나서 방문이 큰소리가 나면서 두들겨 지더니,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들어온 것은 북경시 국가 안전국의 수사원이었다.
수사원들은 서류를 보면서 읽었다: "北京市 人民 检查分院은 北京市 国家安全局이 合法的으로 关键을 拘禁 执行할 것을 批准함。”
수사원들은 영장을 제시한 뒤에 “机密文件”、“秘密文件”을 찾기 위하여 방을 뒤지기 시작하였다.关键은 온몸을 떨었으나 멈출 수 가 없었는데, 关键이 " 국가 기밀 을 불법적으로 외국인사에게 제공함" " 간첩죄"등으로 체포되었기 때문이었다.
압수된 비밀문서는 모두 543 건이었다.
4번째 일본에서 북경으로 돌아 온것도 불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关键은 汪道涵이 일본을 방문하였을때 일찍이 大谷东京饭店에서 만났을 때 "돌아가도 괜찮나요?" 하고 물었더니, 얻었던 대답은 " 당신은 어떤 문제도 없어요 " 그래서 关键은 안심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汪道涵은 곧바로 당,정,군 최고 영수인 江则民의 전임 上海市장으로 또한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었고, 또한 대만에 대한 관련 창구인 "海峡两岸关系协会的会长" 이었다. 关键은 이같이 대단한 " 거물인사"의 반드시 안전하다는 보장을 믿었다.
被逮捕的关键四十四岁。提供内部资料的妹妹也同时被逮捕。一九九三年四月二十九日北京市中级人民法院作出判决。因非法将国家机密提供给外国人惩役十五年,褫夺公权三年,间谍罪惩役十年,褫夺公权五年。复数犯罪惩役二十年,褫夺公权五年。关键被送进北京第一监狱,关在十个人一间的牢房里。
因知名记者被逮捕而引发诸多揣测。于是中国共产党北京市委员会为了消除谣传,提高国家安全意识,不得已之下只好在《北京日报》(一九九三年五月十五日)上报导详细的事件内容。因为“他被逮捕,有很多人不明白原因而产生怀疑,造成诸多揣测”。因此在中国盛传他“是日本间谍”、“是台湾间谍”,报纸上写关键是受台湾国民党驻日间谍组织的请托回国。关键是因为认识了台湾的《中央日报》记者,然后被介绍给国民党海外工作委员会的驻日代表。回北京前一天,在东京新宿百货公司的咖啡厅二楼见面时,收取了五万日円。因此是接受“间谍组织”的要求,进行情报收集。
체포된 关键은 44살이었다. 내부 자료를 제공한 누나도 같이 체포되었다. 1994년 3월 29일 북경시 中级人民法院은 판결을 내렸다. 불법적으로 국가 기밀을 외국인에게 제공한 것으로 인하여 징역 15년, 公权박탈 3년, 간첩죄 징역 10년 ,公权박탈 5년 이었다. 복수 범죄는 징역 20년,공권 박탈 5년 이었다. 关键은 북경 第一监狱으로 이송되어서, 한방에 10명이 있는 감방에 갇혔다.
알려진 기자이기에 체포된 이후로 수많은 억측이 일어 났었다.그래서 중국 공산당 북경시 위원회는 유언 비어를 없애고,국가 안전 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北京日报》(1993년 5월 15일)에 상세한 사건 내용을 보도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 그가 체포되자 수많은 사람들은 원인을 잘 몰랐기에 의심이 생기며 많은 억측이 유발"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에서는 그가" 일본의 간첩이다", "대만의 간첩이다" 라고 널리 알려졌으며,신문에는 关键가 대만 국민당 주일 간첩조직의 청탁을 받고서 귀국한 것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关键은 대만의 《中央日报》기자를 알고 난 뒤 국민당 해외 공작 위원회의 주일 대표를 소개받았기 때문이었다.북경으로 돌아 오기 하루 전에 东京新宿의 백화점의 커피점 2충에서 만났을 때 5만 엔을 받았었다.이로 인하여 "간첩조직"의 요구를 받았고 정보 수집을 진행하였다는 것이었다.
当然,北京市国家安全局提供的“自白”是有夸大之处。例如说他是东京留学生组织的指导者以及拥有五个头衔,除了是《新大陆》的编辑以外都是假的。在《北京日报》头版上还刊载关键笑容满面,左手拿着许多一万日圆钞票的照片。这应该是被逮捕后拍的照片,理由是想造成关键是因为金钱目的而成为“间谍”的印象。
关键在这年九月十七日移监到北京市郊外的北京市第二监狱。然后就发现他的下颚长了恶性肿瘤,就“保外就医”。但被诊断为无法痊愈,为了接受治疗被允许假释。
回到社会上的关键找不到安定的工作。因为缺乏治疗费也曾求助日本友人,请他们寄钱。以捡破烂为生的他,有一天在废纸堆中发现混在里面的共产党中央的资料,关键就报告给旧时的长官。因为他想表示对党效忠的心意。长官就跟他说:“看来你已经洗心革面了。”过了不久,关键就离开人世。
以前关键工作过的《北京青年报》社内至今仍然忌讳谈及此“事件”。住在北京市内关键的妻子至今也沉默不语,当然她也不知道邓丽君对关键而言,在政治上的工作及任务相关的“后续”之事。
당연히 북경시 국가 안전국이 제공한 "자백" 은 지나 친 곳이 있었다.예컨데 그가 동경 유학생 조직의 지도자 이고 아울러 5개의 학위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나,《新大陆》의 편집이외에는 모두 다 거짓이었다.
《北京日报》 1면에 关键이 웃으면서 왼손에 수많은 1만엔 일본지폐를 들고 있는 사진을 게재하였다. 이것은 분명히 체포된 뒤에 찍은 사진이었다. 이유는 关键이 금전을 목적으로 간첩을 했다는 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되었다.
关键은 그해 9월 17일 북경시 교외에 있는 北京市第二监狱으로 이감이 되었다. 이뒤에 그의 턱에 악성 종양이 자라서, 곧 형무소 밖에서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진단을 받고는 완치할 방법이 없다고 하여서 치료를 위하여 가석방이 허락되었다.
사회로 돌아온 关键은 안정된 직장을 찾을 수 없었다. 치료비가 없었기에 또 일전에 일본인 친구들에게 돈을 부쳐달라고 도움을 구했다.고물을 주워서 살던 그는 어느날 폐지 더미 속에서
흩어져 있던 공산당 중앙의 자료를 발견하게 되는데.关键은 곧바로 옛날의 상관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당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는 마음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상관은 그에게 말을 하였다:'보아하니 너는 이미 마음을 씻고 깨끗해졌구나"
"머지 않아서, 关键은 세상을 떠났다.
이전에 关键이 일 했던 《北京青年报》사내에는 지금도 여전히 이"사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기피되고 있다.북경시내에 살고 있는 关键의 처자식은 지금도 말없이 묵묵히 지내고 있다.
당연히 그녀도 등려군과 关键의 처지에서 말하자면 정치적인 공작이나 임무의 관련의 “后续”의 은 알지 못한다.
三
和邓丽君曾订过婚但未能结婚的郭孔丞,于一九八六年七月二十三日在香港香格里拉饭店举行结婚典礼。结婚的对象是在银座高级俱乐部“皮罗波”工作的日本女人。
最后的情人史帝芬·保罗于邓小姐过世二年后的的一九九七年,在泰国清迈待了半年之久。有人看到他住在便宜的帕克怕卡饭店,用摩托车载着当地的女人在街上奔走。一九九八年向香港无线电视翡翠台(TVB)兜售邓丽君私人录影带画面,作成了“邓丽君 最后私密生活”的特别节目。每天播出十五分钟,连续播出九天。一九九八年、一九九九年回香港邓丽君的房子居住了约半年后又不见踪影。最后在二000 年确认到他回法国待了四个月。和邓家人的联络,从此就断讯了。
最初和招聘邓丽君计划有关的王兆国,于一九九0 年十一月成为中国共产党中央台湾工作办公室主任,国务院台湾事务办公室主任,是党与政府对台湾政策的负责人。二00 三年又升为全人代副委员长,于二00 四年召开“宪法改正案报告”。而贾春旺于一九九八年三月当上公安部长,二00 三年三月在全人代中被选为最高人民检察院院长。
등려군과 이미 약혼을 했으나 결혼을 하지 못했던 郭孔丞은 1986년 7월 23일에 홍콩의香格里拉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의 대상은 银座高级 클럽“皮罗波”에 일하는 일본여자이었다.
마지막의 애인인 스테판 파올로는 등소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1997년 ,태국 치앙마이에서 반년동안 머물렀다.
사람들은 그가 저렴한 帕克怕卡호텔에 머물며, 오토바이에 현지 여자를 태우고 거리를 분주히 돌아 다니는 것을 보았다. 1998년 홍콩의 无线电视翡翠台(TVB)에 등려군의 사생활 비디오 테이프 를 팔아서 "등려군 최후의 비밀스런 사생활"이라는 특별 프로그램을 제작하였다.
매일 15분씩 방송하였으며 연속으로 9일을 방송하였다. 1998년 1999년 홍콩으로 돌아 와서 등려군의 집에서 약 반년 동안 살았으나 종적을 보지는 못했다.마지막으로 2000년에는 그가 프랑스로 돌아 가서 4개월을 지냈다는 것이 확실하였다. 등려군 집식구와는 연락이 이때부터 끊어지게 되었다.
최초로 등려군 초청계획과 관련있는 王兆国은 1990년 11월에 중국 공산당 중앙 대만 공작 办公室主任, 국무원 대만 사무 办公室主任, 이 되었고 이것은 당과 정부의 대만 정책에 관한 책임자 이었다.
2003년 또다시 全人代副委员长로 승진되었고 2004년 “宪法改正案报告”를 하였다. 그리고 贾春旺은 1998년 3월에公安部长에 임명되었으며 2004년 全人代에서 最高人民检察院院长으로 피선되었다.
四
一九八九年八月底的香港和往年一样,每天都很热。二个月前发生的×××事件带给歌手邓丽君精神上很深的伤害。曾经决定要到中国办的演唱会,在×××广场上应该会有百万人欢喜聚集的样子,想像无数次的梦想因而破碎了。
“无法有唱歌的心情”
这句向工作人员说的话,道尽了“所有”邓丽君内心的写照。
1989년 8월 말 홍콩은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날마다 매우 뜨거웠다. 2개월전 발생한 ××× 사건은 가수 등려군에게 정신적으로 매우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일찌기 중국에 가서 콘서트를 하려고 결정하였으며, ××× 광장에서 백만 명의 사람이 모여서 기뻐하는 모습을 여러번 상상하였지만 부서져 버렸다.
" 노래할 마음이 있을 수 없었다"
이말은 일하는 동료에게 하였던 말로, 등려군의 내심을 말로서 " 모두 "다 그려냈다.
“常梦见从浅水湾上有很多tank 开过来”,就是PLA 的tank,轰隆隆的巨响朝自己住的赤柱传来。“很恐怖,我一定被他们盯上了。”说着此话的邓丽君对在大陆发生的事件,无法当作与己无关之事,参加支援democratization 演唱会,当×××事件发生后也一直在手臂上带丧章,所以认为自己已成为被中国监视的对象也不是不可思议之事。
取消六月份原本预定去日本宣传的行程,也是因处在这种精神不安定的状况下所致。但经过时间的流逝,邓丽君的情绪有了些和缓。金牛座唱片公司则安排十月去日本之前,让日本媒体到香港采访她的计划。
"늘 浅水湾에서 수많은 탱크들이 밀려오는 것을 꿈속에서 보았어요",즉 PLA(중국인민 해방군)의 탱크가 큰 소리를 울림이 자기가 사는 赤柱(스탠리)로 전해 왔어요.
"매우 무서웠어요. 나는 늘 그들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어요" 이말은 등려군이 대륙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자기와 무관한 일로 생각할 방법이 없어서,democratization를 지원하는 콘서트를 참가하였고, ××× 사건이 일어난 뒤에 내내 팔에 丧章을 두르고 있었기에 스스로 이미 중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6월에 원래는 일본에 가서 홍보를 할 일정을 취소한 것도 이런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하에 일어난 것 때문이었다.그러나 시간이 흘러 가자,등려군의 정서도 조금은 풀어지게 되었다.
金牛座唱片公司은 곧바로10월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일본매체가 홍콩으로 와서 그녀를 인터뷰하는 계획을 안배하였다.
出现在电视或杂志的采访团面前的邓丽君和平常一样,表情显得很安详。拍完照录完影的某个晚上,租来一条船,想在甲板上用餐。因为鱼虾的美味,随着也喝多了葡萄酒。原本带着墨镜用餐的邓小姐有些醉意之后,就干脆拿掉墨镜继续喝。不知道是谁说了“唱歌吧!”,起身而立的邓小姐开心地用手摸住两颊说:
“我想唱《香港》!”
这首曲子是抒情歌也包涵了邓丽君对香港的情愫。邓丽君清唱着这首歌,时而高高举起两手的食指,时而用手抚住胸前或脸上,兴致高昂地唱着。和往常她常常作的V 字型手势一样没有任何异状。
텔레비전 또는 잡지의 인터뷰 기자 앞에 모습을 들어낸 등려군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표정이 매우 침착해 보였다.
사진을 다 찍고 녹화도 다 마친 어느 날밤, 배 한척을 빌려서 갑판위에서 식사를 하려고 생각하였다. 생선과 새우가 맛이 좋았기에 이어서 포도주도 많이 마셨다.
원래는 선글래스를 쓰고 식사를 하는 등려군도 조금은 취기가 있은 뒤라, 호기 있게 선글래스를 벗고는 계속해서 마셨다.
누가 "노래해!" 라고 말을 하였는지는 몰랐지만 일어난 등려군은 즐겁게 손으로 양볼을 만지면서 말을 하였다:
"내가 《香港》을 부를게요!"
이노래는 서정적인 노래이면서 등려군이 홍콩에 대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등려군이 맑게 이 노래를 다 부르면서 때때로 양손의 식지를 높게 들거나 손으로 앞가슴이나 얼굴을 만지기도 하였고,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하였다. 평상시와 같이 그녀는 늘 V 자 형태의 손가락 모양을 짓는 등 어떤 이상도 없었다.
翌日,在浅水湾海边摄影的时候,邓丽君身穿黑洋装及白色外套,头上戴了一顶镶有黑边的草帽,手上拿着白丝质的披肩,面对镜头脸上挂着微笑。背景是以前的浅水湾酒店的大门。这个饭店有法国的里比艾拉式建筑物及意大利风格的庭园的遗迹,现在是一间餐厅。香港岛上的观光胜地。邓丽君的优雅刚好和这里的幽美空间融为一体。
在这家由贝尼秀拉饭店经营的欧式餐厅“阳台餐厅”,及后方有高楼大厦作背景的拍摄持续进行下。
“我不会将现在的心情忘记。”
다음날 浅水湾 해번에서 촬영할 때, 등려군은 검은 빛 양장과 흰 빛 외투를 입었고 머리에는 검은 빛 테두리가 있는 밀짚모자를 쓰고 손에는 흰 명주 망토를 손에 들고서 렌즈 앞에서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배경은 이전의 浅水湾호텔의 정문이었다.
이 호텔은 프랑스의 里比艾拉식 건축물과 이태리 스타일의 정원의 유적이 있으며 지금은 식당이다.
홍콩섬에서 관광 명승지이다. 등려군의 우아함은 때 마침 이곳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공간과 하나로 어우러 졌다.
이 건물에는 贝尼秀拉(peninsula) 호텔이 경영하는 유럽식 식당“阳台餐厅”이 있고 이어서 뒷쪽에는 고층 빌딩이 만드는 배경을 계속하여서 촬영을 하였다.
"나는 지금의 심정을 잊을 수 없어요"
她不是在向谁说此话而是在喃喃自语。×××事件成了悲伤记忆的……这就是日后贴在巴黎家中寝室的那一张照片当中所蕴涵的深意。移居到巴黎的邓小姐,每天一望到这张在浅水湾拍的相片,就想起要在×××办的百万人演唱会梦想无法实现而悔恨及愤怒。
邓丽君走到可以瞭望浅水湾海面的阳台上,一阵阵小波浪拍打着海岸边,脸上浮现着宁静微笑的她。终于把外套脱掉,轻轻地将披肩挂在左肩上。连续的快门声下刻画了许多永恒的瞬间。一九八九年的邓丽君被永远地纪录下来。
그녀는 누군가를 향하여 이말을 한것이 아니라 스스로 중얼댄 것이었다.
×××사건은 비참한 기억의...... 이것은 바로 나중에 파리의 집의 침실에 붙어 있던 한 장의 사진속에 함축되어 있는 깊은 뜻이 되었다.
파리로 이주한 등려군은 날마다 浅水湾에서 찍은 이 사진을 바라보며 ×××에서 하려던 백만인 콘서트를 꿈속에서 그리며 실현할 도리가 없어서 회한과 분노를 되새겼을 것이다.
등려군은 浅水湾의 바닷가를 바라 볼 수 있는 베란다로 달려갔는데, 간간히 작은 물결이 해안가를 부딪치고 있었고, 얼굴에 편안한 미소 짓던 그녀는, 마침내 외투를 벗고 가볍게 망토를 왼쪽 어깨에 둘렀다.
연속하여 터지는 경쾌한 샤타 소리는 수많은 영원한 순간을 새겼다.
1989년의 등려군은 영원히 아로새겨 졌다.
后记
후기
张玉玲 소저는 1995년 11월 발행된 등려군《星愿》앨범중에서 등소저의 유작을 낭독한 사람이다.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를 들으면, 청초하게 등소저에 대한 깊고도 도타운 사랑이 전달된다.
장소저에게 " 가장 깊이 새겨진 기억은?"하고 물으니, " 진정한 그리움은 없어요"이말은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녀는 또 말을 하였다" 그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 지금도 여전히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서,음악을 듣지 않거나 사진을 보지 않아요 " 속으로 쓸쓸한 감정을 들어내고 있었다.
장소저는 이처럼 말을 하였는데 이것은 등소저가 진심어린 말을 하지 못하고, 단지 그녀의 내심의 진정한 생각을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소저는 "어렸을 때 부터 유명해진 등려군은 정신적으로 매우 고단하였으나 그녀는 여전히 여리고 슬픈 면을 들어 낼 수가 없었기에 늘 매우 쾌활한 모습만 들어 냈지요"
일찌기 스튜어디스가 되었고 또한 같은 시대의 장소저 속마음은 등소저처럼 같은 감수성을 가졌다고 여겼다.
이것은 내가 1996년 대북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하였던 한 장면이었다.
我访问过非常多的人,但是没有一个人讲过邓小姐的坏话,这是邓小姐人格上高尚的特质。另外给人印象深刻的是对方若是工作上的对象她就会保持距离。就像张玉玲小姐说的一样,即使是好友她也未必会说出真心话。邓小姐的内心到底是如何呢?因此从中国、台湾的现代史去找寻,便成为我的采访重点了。
想写邓丽君是在确定要开始执笔写《歌屋 都春美》(文春文库)的时候,要回溯到一九九二年,到表参道上金牛座唱片公司和负责的工作人员提及此事,他们回答说因为本人很少来日本,很难采访。这是最开始的时候,从那时候开始经过了十三年。在一九九四年十月二十四日邓小姐还跟我说“明年在香港找个时间好好聊”。结果最后的采访是在日本那次简短的谈话。
나는 매우 많은 사람을 방문하였으나 등소저의 험담을 한 사람은 없었는데 이것은 등소저 인격에서 고상한 특질이다.
이밖에 사람들에게 주었던 깊은 인상은 상대방이 만일 일하는 대상자이라면 그녀는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마치 张玉玲 소저가 말한 것 같이 친한 친구인 그녀 조차도 진심을 말하려고 하지는 않은 것이다. 등소저의 속마음은 도대체 어떠하였을까? 그래서 중국부터 , 대만의 현대사를 찾아 보려고
하였는데 나의 인터뷰의 중요한 점이 되었다.등려군에 대하여 쓰려고 생각한 것은 《歌屋;카라오케 都春美; 미야코 하루미》(文春文库)를 쓰기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이었으며,
1992년 을 회고하려고 할때 表参道(오모테산도)에 있는 金牛座唱片公司에 가서 책임자와 이일을 이야기 할때, 그들은 등려군이 그다지 일본에 자주 오지 않기에 인터뷰 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로, 이때 부터 시작하여서 13 년이 지났다. 1994년 10월 24일 등소저는 또한 나에게 말을 하였다:" 내년에 홍콩에서 시간을 좀 내서 이야기를 나누지요".
결과적으로 마지막 인터뷰는 일본에서의 그 때 짧은 대담이었다.
到了一九九五年,已经收集了许多基本资料,但却发生了日本地下铁沙林事件。不得不将邓小姐的采访搁下(注:有田先生这十多年来几乎每天都要上各日本电视台节目作评论,是有名的评论家尤其是日本奥姆教的权威),开始每天忙碌的日子。就在五月九日的傍晚,我从日本NTV 电视台要去赤坂的TBS 电视台的途中,接到友人的电话跟我说:“邓丽君过世了”、“啊……骗人的吧”,朋友又说:“连遗体的画面都播出来了”,到了电视台立刻确认外电新闻,也请他们借我看遗体的画面,当时我感到很过分,但不得不接受事实。每天依然忙碌不已但是仍然到台北参加五月二十八日的葬礼。坐在最后面的歌手王菲脸上哀伤的表情令我印象非常深刻。
到了棺前要献花的时候,看到横躺着的邓小姐的脸庞,我不禁地流下泪。和邓小姐侄女站着谈话,她说姑姑曾说过:“在日本有人要把我写成书”,听到此话时内心不是高兴而是令我难过不已,因为邓小姐曾说过:“我往后人生的重点就是为了中国的和平自由而努力。”,她那种认真卖力的精神我竟然未能充分倾听及理解。虽然邓小姐曾接受过无数的采访,但是谈及有关中国politics 问题的采访对她而言,应该是新鲜的,并且是她乐意的,但不料她竟然迎接这突如其来的死亡。我内心充满了失落感,有时候会有“写不出来”的想法。但这是邓小姐曾说过的:“我的荣幸”的工作,若不想放弃只好一点一滴的前进,因为这是和邓小姐的约定。
1995년이 되자 이미 수많은 기본 자료는 수집이 끝났으나. 오히려 일본에서 지하철 샤린 가스 사건이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등소저의 인터뷰를 보류하였는데,( 주:有田 선생은 이 십여년 간 거의 날마다 여러 일본의 텔레비전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평론을 썼던 , 유명한 평론가이며 특히 일본의 옴 진리교에 권위자이다), 날마다 바쁜 날을 보내기 시작하엿다.
5월 9일 저녁무렵에 나는 일본 NTV 텔레비전방송국에서 赤坂에 있는 TBS텔레비전방송국으로 가는 도중에 친구의 전화를 받았는데 내게 말을 하였다:
" 등려군이 세상을 떠났어!, 아......거짓말 이지!, 친구가 또 말을 하였다:' 유체 화면 조차도 모두 다 방송되었어" 텔레비전 방송국에 가서 곧바로 외국 보도를 확인하였다.
또 그들에게 유체의 화면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때 나는 매우 긴장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날마다 여전히 바빴으나 여전히 대북으로 가서 5월 28일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가장 뒷줄에 앉아있던 가수王菲 얼굴에는 애상한 느낌이 내게 매우 깊게 인상을 새겨 주었다.
헌화를 하려고 관 앞으로 나아 가서 누워있는 등소저의 얼굴을 보고는 나는 흘러 내리는 눈물을 그칠 수 가 없었다. 등소저의 조카와 서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녀는 고모가 이렇게 말을 하였다고 하였다: 일본에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해 써서 책을 만들려고 한다" 이말을 들을 때 속으로는 기쁘지가 않았고 오히려 고통을 참기 어렵기만 하였다. 왜냐하면 등소저가 전에 이렇게 말을 하였다:" 나는 이후로 인생에서 목표는 중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노력할 것예요." 그녀의 이런 진지한 노력하는 정신이 내게 뜻밖에 충분하게 경청하여 이해가 되게 하지는 못했다.
비록 등소저가 일찍이 무수한 인터뷰를 하였지만. 중국politics 문제와 관련된 언급을 한 인터뷰는 그녀로서는 신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울러 그녀는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그녀는 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내심 쓸쓸함이 가득 차 있었고 때때로 쓸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 것은 등소저가 전에 말한 것인데: " 영광"스런 일입니다. 만일 아주 작은 전진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것은 등소저와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邓小姐过世时,金牛座唱片公司印制了邓小姐的年表,上面印有我要写邓小姐的书“将于近期发行”,甚至在邓丽君出道二十五周年纪念,一九九九年宝丽多唱片公司发行的精选辑的封带上也印有“有田芳生著《邓丽君 两个祖国(暂定)》 预计九九年发行”的消息。打算一口气写完它,但是从构想到完成花了十三年的理由是,无法决定整体架构所致,因为邓小姐的存在本身就是巨大无比。不是不写,是写不出来。如此的日子过了许久,后来接受作家服部真澄先生几次的架构建议,有了刺激及想写的意欲。
我边写着邓小姐的稿子,边看着书架。书架上放了许多邓小姐的照片,从年轻到熟年, 有空虚的表情,也有在巴黎住家那张珍贵的照片。她的签名、照片、录影带等资料环绕早我的四周,这种生活持续了好几年,就如同写都春美时一样,一天会听几小时的歌,所以我持续了每天听几小时邓小姐悠扬的歌声过日子。
若问自己是否有缺憾?那答案是“有的”。就是未能实现亲自将这本书交到邓小姐本人手里之事。而且也无法如愿地向养育她,最了解她的母亲赵素桂女士告知工作已经完成。因为母亲已于二00 四年十二月十八日享年七十八岁时辞世。是位非常安静又贤淑之人。
若是没有这位邓丽君口中的“最尊敬之人”,就不会有“歌手邓丽君”的存在。
등소저가 세상을 떠났을 때 金牛座唱片公司는 등소저의 연표를 인쇄하였다. 윗면에 내가 쓰고자 하는 등소저의 책이 " 가까운 시기에 발행한다:" 고 인쇄되어 있었고, 심지어 등려군 데뷰 25 주년 기념으로 1999년 宝丽多唱片公司가 발행한 정선 앨범의 띠지에도 " 有田芳生 저술《邓丽君 두개의 조국(暂定)》 99년 발행 예정”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일시에 책을 완성하려고 생각하였으나, 구상부터 완성까지 13년이나 허비하였던 이유는 구상을 전체적으로 결정할 수 밖에 없었던 탓이었다. 왜냐하면 등소저의 존재 그 자신은 비할 바 가 없이 매우 위대하였다.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없는 것이었다.이처럼 날짜만 많이 흘러 갔는데 나중에 작가인 服部真澄先가 몇차례 구상을 건의하였던 것을 받아 들였는데,
자극과 쓰고자 하는 의욕이 있었다.
나는 등소저의 원고를 쓰면서 서가를 바라 보기도 하였다. 서가에 놓여 있는 수많은 등소저의 사진은 어린 시절 부터 중년까지,공허한 표정도,파리의 집에 있던 그 진귀한 사진도 있었다.
그녀의 서명, 사진, 비디오 테이프 등 자료가 일치감치 나의 둘레를 에워싸고 있었고 이런 생활은 꽤 여러해 지속되었다. 마치 都春美의 이야기를 쓸때 , 날마다 몇시간이고 노래를 들었던 것처럼, 그래서 나는 날마다 몇시간이나 등소저의 유려한 노래를 들으며 날들을 보냈다.만일 스스로 안타까웠던 점이 있는지를 묻는 다면? 그 대답은 " 있다" 이다.
설령 이책을 등소저 본인에게 손으로 직접 전해 주지는 못하였지만.게다가 또한 그녀를 길러 주었고 가장 잘 이해하는 어머니 赵素桂여사에게 작업이 이미 다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대로 알릴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가 이미 2004년에 12월 18일에 향년 78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분은 매우 차분하고 현숙한 사람이었다.
만일 등려군이 말하던 "가장 존경하는 분"이 없었다면, 아마도 “歌手邓丽君”의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我曾于一九九八年七月十六、八日,二00 一年八月二十八日及二00 二年六月二十四日在台北采访赵素桂女士,加起来她足足和我聊了十多个钟头。原本计划作最后确认时于二00 四年十一月三日到台北想再见面,但因为身体不适只好作罢。
担任邓小姐秘书的弟弟长禧先生对我的采访可说是从头协助到结束。也感谢日本“养育之父”的舟木先生,及其工作人员们的证词才有采访的开端,尤其因舟木先生的协助,方便了许多的采访。
二000 年七月到北京采访时想和《北京青年报》的关键见面。因为他是中国第一位采访到邓小姐之人,但是当局有许多令人无法理解的回应,“不要查关键的事比较好喔!”“你想采访什么呢?”还接到中国共产党中央宣传部间接的忠告要“住手吧”。真的无法从命,本书的采访中最困难的一个就是和关键相关的事件。很想和到过日本留学的关键见面,但是已经无望了!而道出“邓丽君是谍报员”的谷正文先生如今病倒,也无法再和他交谈了。
나는 일찍이 1998년 7월 16일,8일 2001년 8월 28일과 2002년 6월 24일에 대북에서 赵素桂여사를 인터뷰를 하였는데,그녀가 나와 10 여시간이나 넘도록 더 하였다. 원래 계획은 마지막으로 2004년 11월 3일에 대북에서 다시 만날 생각을 하고 이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몸이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취소하였다.
등소저의 비서를 담당하였던 남동생 长禧는 나와의 인터뷰에 대하여 처음 부터 끝까지 협조적이었다고 말할수 있었다.
또한 일본의 "길러 준 아버지" 舟木에게 감사하였고, 그에 따라서 작업을 도와 준 사람들의 증언도 인터뷰 초기에 언급하였다. 특히 舟木의 협조로 많은 인터뷰가 쉽게 진행되었다.
2000년 7월에 북경에 가서 인터뷰할 때 《北京青年报》의 关键과 만날 생각을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등소저와 중국사람으로는 첫번쨰로 인터뷰를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으나, 당국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하게 하였는데," 关键의 일을 조사하지 마시오 그러는게 아마 좋을 것이오!"당신은 무엇을 인터뷰할 생각인가요?" 또한 중국 공산당 중앙 선전부의 간접적인 충고는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지시를 따를 방법이 없어서, 이책에서 인터뷰하는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로
关键과 연관된 일이었다. 일본에 유학생으로 왔던 关键과의 면담을 많이 생각하였지만 이미 바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등려군이 첩보원이다"이라고 말을 하였던 谷正文은 지금은 병으로 쓰러져 있어서 또한 그와 다시 이야기를 할 수 도 없게 되었다.
于日本NTV 电视台节目的“THE SUNDAY”中,曾到香港、台湾、清迈采访时受到相川弘隆、行方久司、屋良朝建先生们的照顾。在编集的过程中有文艺春秋第二出版局局长松井清人、次长吉永龙太、担任校阅的坂本文先生的鼎力支持。若是没有各位长期的协助,是无法写成此书的。我想有点大声地传达我现在的心情,谢谢!
我将于五月八日到台湾参加邓小姐逝世十周年的纪念活动,想在墓前献上此书。然后顺道到双亲邓枢先生及赵素桂女士墓前报告。金宝山苍郁的茂林环抱着邓小姐们的安息地, 想必此景将永世绿意盎然。
등소저의 마지막 애인 이었던 스테판 파올로와 홍콩에서 만났지만 그가 파리로 돌아 간 뒤에는 종적이 사라져 버렸다.
등소저 뿐만이 아니었고 그녀의 주위의 몇몇 개성이 많은 사람들의 종적 조차도 거짓처럼 바뀌었다.
각 단원의 제목은 등소저가 불렀던 노래속에서 골라 낸 것이며, 등장인물의 면면도 "인생의 계절" 속에서 다 표현하고 있었다.
집필하는 도중에 국회 도서관关西(칸사이) 分馆이 내가 중국어 자료를 찾는 것을 도와 주었던 大村纱惠子,와 해외 항공편에 대한 기록을 조사하는 것을 열심히 도와주었던
武田纯子의도움도 있었다.
언제나 성급하게 馆野雅子에게 중국어 자료 번역을 부탁하였고 인터뷰한 자료를 번역하였던 胡家雯과 郭丽兰과도 10년이나 왕래를 하였다.
일본 NTV 텔레비전 방송국 프로그램의 “THE SUNDAY”에서 일찍이 홍콩 타이완 치앙마이에 가서 인터뷰할 때 相川弘隆、行方久司、屋良朝建등의 도움을 받았다.
편집하는 동안 文艺春秋의 第二出版局 局长 松井清人,次长 吉永龙太、교열 담당자 坂本文의 뜨거운 도움이 있었다. 만일 이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책을 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좀 큰 소리로 현재의 나의 심정을 전달하고자 생각하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5월 8일에 대만에 가서 등소저 서세 10주년의 기념 활동에 참여하여, 묘 앞에 이책을 바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차례로 두 부모님 邓枢과 赵素桂의 묘 앞에도 갈 예정입니다. 金宝山의 울창한 숲은 등소저의 안식처를 둘러 싸고 있으며, 틀림없이 이 경관은 영원토록 푸른 이 뜻을 넘치게 하리라.
아리타요시후
2011년 4월 11일
金康顯 飜譯 完了
첫댓글 [DVD] 我的家在山的那一邊 사진 몇 컷 올려뒀습니다.
[사진모음] http://cafe.daum.net/loveteresa/_album/269
[私の家は山の向こう_テレサ.テン十年目の真実] 본문관련 사진 첨부
[작업공간] http://cafe.daum.net/loveteresa/46b/1113
[2편] http://cafe.daum.net/loveteresa/46b/1114
鄧麗君 我的家在山的那一邊
[제2장 1편] http://cafe.daum.net/loveteresa/46b/1138
본문 관련 사진이 완성됐습니다, (작업공간)
2011년 4월 11일
金康顯 飜譯 完了
드디어 등려군의 일생을 다 정리한 전기 번역이 다 마쳐졌네요
변함없는 카페에 대한 사랑으로 귀한 자료 만들어 주셨군요.
진심으로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第四章]은 소개된 곳을 찾기가 힘들군요, 3장의 어느 부분에 포함되어 있는지
어느 블로거가 올린 문장이 3장의 끝 부분과는 다른 내용이긴 합니다만 궁금하네요.. ;;
메일로 주신 번역이 제4장인 듯한데 지난 번에 작성한 鄧麗君 我的家在山的那一邊 (제5장 冬季里的向日葵)의
앞 부분이 아닌지요..?
我的家在山的那一边》(中文版)有田芳生著(续八: http://blog.sina.com.cn/s/blog_456dd27f0100j014.html
글 편집은 했는데 내용의 흐름을 맞춰 보느라 늦어지네요, 사진도 역시 그렇고요.. ;;
我的家在山的那一边》(中文版)有田芳生著(续四 : http://blog.sina.com.cn/s/blog_456dd27f0100j00d.htm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