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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 성녀는 관상생활에 대한 깊이 있는 체험과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서
수도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과 걸어야 할 ‘완덕의 길’을 제시하였다.
루터가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의 두려움에서 구원의 길을 찾는 방법 때문에 교회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면,
데레사 성녀는 인간의 의지와 신적 은총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완덕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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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515), 개종한 유대인 귀족 가정
6세(1521), (무슬림에 순교 당하러)오빠 로드리고와 가출
12세(1527), 어머니 돌아가심
15세(1530), 사춘기에 연애 소설에 푹 빠져, 보다 못한 아버지에 의해 결국 아구스티누스 수녀원에 보내짐
19세(1535), 강생 가르멜 수녀회 입회 - 성 예로니무스 서간(성녀 바울라, 에우스토치움)에 감화
-환자 돌보는 일을 함 - “하느님 제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습니다...저도 이 병에 걸려보고 싶습니다”
-은수자 전통을 잃어 버린 가르멜회에서 (남자?)사람과 어울리는 데 빠짐
21세(1537) 수도서원 - '제삼 기도 초보'란 (거둠)기도 교과서를 만나며 영성생활 전환기를 맞게 됨.
22-25세, 심한 열병으로 시골 요양 - 당시 신비체험에도 불구하고 이후 영적수련을 게을리 함
-세속적인 우정(귀족과 연애감정에 빠짐)
28세(1543), 신비 체험 - 아구스틴 고백록의 참회를 통해 영적 무기력에서 벗어남
39세(1554), 신비체험 - 매질 당하시는 예수님 상본
- “그때까지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후부터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
43세(1558), 신비체험 - '영적약혼'
45세(1560), 관상기도 체험 (심장의 '상처') - 조카와 함께 관상생활을 제안하나 수도회 장상에게 거절당함
- 자서전 '천주 자비의 글' (1562-1565년)
52세(1567), 개혁 가르멜 공동체 시작, 십자가의 요한 만남
- 후원: 개혁 프란치스코회 알칸타라 베드로, 예수회 보르지아, 도미니코회 루이지
- 육체적인 약함과 이로 인한 질병의 고통을 자신과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큰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승화
- 환자를 돌보는 행위 자체도 사회적 차원에서 하느님과 합치를 이루는데 도구로써 활용
- 저술: '완덕의 길', '영혼의 성'
57세(1572), 신비체험 - '영적 혼인'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
65세(1580), 맨발의 가르멜회 독립(완화 회칙 가르멜회로부터 분리)
67세(1582), 사망 - “주님!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
사후 40년(1622), 예수회 이냐시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톨릭 선교활동의 수호성인')와 함께 시성
- 1583년, '완덕의 길', '영적 보고서' 출판
- 1588년, 데레사 저작 전집 출판
- 17세기 정적주의 논쟁
- 데레사의 딸들 중 그녀의 정신을 성화(聖化)로 가장 잘 구현시킨 이는 리지외의 성녀 (소화)데레사(1873~1897)
- 1970, '교회 박사'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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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멜의 성인들]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윤주현
흔히 대(大)데레사로 부르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소화 데레사)와 더불어 한국 신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분이다.
13세기 팔레스타인의 카르멜 산 은수자들의 공동체에서 시작된 원 카르멜수도회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세 유럽을 휩쓴 여러 전쟁과 기아, 페스트로 말미암아 수도회의 회칙이 완화되는 과정을 겪으며 본래의 정신이 쇠퇴하는 시기를 맞게 된다.
이런 와중에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비 체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카르멜수도회를 창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던 개신교 종교개혁에 맞서 교회에 내적인 힘을 불어넣어 주고자 했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성녀는 살아생전에 스페인 내에 17개의 맨발카르멜수녀원을 창립했으며 맨발카르멜남자수도회도 창립했다.
1515년 3월 28일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난 데레사 성녀의 할아버지는 ‘스페인의 경주’라 할 수 있는 톨레도에서 성공한 유다인 상인이었다. 1400년대 말 스페인은 이슬람 제국을 몰아내고 이념적으로도 ‘가톨릭 신앙’을 기준으로 통일하려 했다. 이 때문에 유다인, 무슬림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을 해야 스페인에서 살 수 있었던 시절, ‘개종 유다인’ 집안이 성녀의 가문이다.
스페인 교회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인, 데레사 성녀가 유다인이었다니! 1970년대까지 스페인 사람들은 성녀가 유다인이란 역사적 사실을 숨기거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다인이란 혈통을 수치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거둠기도’로 영성생활에서 진일보하다
어린 시절의 성녀는 독실한 신앙인인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신심 깊은 어린이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6-7세 되던 해 성녀는 순교를 하려고 오빠 로드리고와 함께 무슬림들이 사는 곳을 향해 떠났다가 다행히 중간에 숙부에게 붙잡혀 귀가한 적이 있다.
사춘기에 들어선 14-15세 때에는 기사소설, 연애소설에 푹 빠져 지내며 사촌오빠들과 어울리는 가운데 신앙과는 좀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성녀의 아버지는 걱정이 되어 성녀를 근처의 아우구스티노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기숙사로 보내 교육을 받도록 했다. 성녀는 그곳에서 사감수녀들의 모범에 감화되어 다시 깊은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지병 때문에 살라망카 근처의 카스테야노스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큰언니 집에 머물면서 숙부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성녀는 그곳에서 본 「성 예로니모의 서간집」에 영향을 받아 수녀원에 갈 것을 결심한다.
1535년 11월 2일 아빌라의카르멜수녀원(통상 ‘강생수녀원’이라 부름)에 입회한 성녀는 1537년 11월 3일 수도서원을 했다. 성녀는 지병으로 수녀원을 잠시 떠나 살라망카 근처의 베세다스란 마을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때 근처 오르티고사에 있는 숙부의 집을 자주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삼 기도 초보」라는 당대의 기도 교과서를 만나며 영성생활의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 책은 오수나의 프란치스코라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제가 쓴 ‘거둠기도’ 교과서였다. 거둠기도는 인간 영혼의 주요 능력(지성, 기억, 의지)을 비롯해 모든 내적, 외적 감각들의 활동을 내면으로 거둬들여 영혼이 자신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과 더 깊은 사랑의 교감을 나누게 하는 기도이다. 이후 성녀는 거둠기도를 깊이 있게 실천하며 영성생활에서 진일보했다.
그 뒤 20년 동안 성녀는 카르멜 수도자로서 성심을 다해 수도생활에 정진했는데, 1554년 성주간에 수녀원에 있던 ‘채찍질 당하는 예수님 상’을 보면서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심을 크게 깨닫고 영성생활에서 한층 더 진보하게 된다. 또한 1558년 성령강림절에 ‘영적 약혼’의 은혜를 받으며 본격적인 신비체험과 더불어 영성생활의 정점에 더욱 가까이 나아갔다. 마침내 1572년에는 영성생활의 최고봉이라 할 ‘영적 결혼’에 도달하게 된다.
수도원 설립
이런 일련의 깊은 하느님 체험을 통해 성녀는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을 어떻게 값아드릴까 고심하며 특히 당시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위기에 빠진 교회를 영적으로 도우려고 복음의 정신을 철저히 사는 소수 정예 수녀로 이루어진 봉쇄수녀원을 창설하게 된다.
성녀는 당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자신이 처한 시대적 한계 속에서 여인으로서 할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의 교회적 선택으로, 철저한 봉쇄생활을 하는 수녀원을 설립한 것이다. 그 목적은 교회에 영적인 힘을 불어넣고 영혼들을 구원하려는 지극히 사도적, 선교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성녀의 정신은 1567년 신대륙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돌아온 프란치스코회 말도나도 신부와 만나면서 더욱 확장된다. 성녀는 하느님을 모른 채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으며, 그들을 위해서는 천의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다는 원의를 갖게 된 것이다.
영혼의 구원을 위한 성녀의 열정, 교회를 위한 열정은 그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져 20세기의 대표적 성인이라 할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소화 데레사)에게서 새롭게 표현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성녀는 이런 열정을 갖고 여성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를 보면서 맨발카르멜남자수도회의 창립도 주도했다. 이는 1567년 여름 살라망카에서 막 신학 공부를 마치고 사제품을 받은 십자가의 요한과 만나면서 구체화되었다. 1568년 가을 두루엘로에서 3명으로 시작한 맨발카르멜남자수도회는 그 뒤 급속도로 번창해 갔다.
탁월한 기도의 스승
시대를 초월해서 성녀가 보편교회에서 존경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도 그분이 탁월한 ‘기도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성녀의 영성은 한마디로 기도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녀는 완덕을 향하는 여정과 기도의 여정이 같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영성생활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녀의 가르침은 성녀가 쓴 주요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성녀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하고 나아가 자신의 기도생활을 상세히 전한 「자서전」과 카르멜 수녀들에게 기도생활, 영성생활과 관련해서 가르침을 전한 「완덕의 길」, 그리고 성녀의 영성생활이 총 집약된 「영혼의 성」 등을 집필했다. 이 모두 영성사에서 주옥같은 작품으로 손꼽히는 책들이다.
성녀는 「영혼의 성」에서 인간의 영혼을 ‘성(城)’에 비유하면서 영성생활을 내면의 성으로 들어가는 여정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이 여정을 크게 7개의 궁방(宮房)으로 나눠서 소개했다. 1-3궁방은 인간이 주도권을 쥐고 나아가는 단계라면, 4-7궁방은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나아가는 단계이다. 4궁방부터는 인간이 준비는 할 수 있되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들어갈 수 없고,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나아가게 되는 초자연적인 단계이다.
성녀가 자신의 여러 작품을 통해 가르친 기도의 단계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① 구송기도 ② 추리묵상기도 ③ 능동적 거둠기도 ④ 수동적 거둠기도 ⑤ 고요의 기도 ⑥ 능력들의 수면기도 ⑦ 합일의 기도.
2015년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500여 년이 지났지만 기도와 영성생활에 대한 성녀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어준다. 성녀의 탄생을 기념해 한국교회에도 성녀의 깊은 영성세계에 대한 폭넓은 소개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윤주현 베네딕토 - 가르멜수도회 수도 사제. 2001년 로마 테레시아눔에서 신학적 인간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스페인에서 카르멜 영성을 전공하고 아빌라신비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은총론」, 「교회론」, 「신학적 인간학」을 비롯해 가르멜 총서 시리즈 등 다양한 저서, 역서, 논문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2012년 7월호]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 왜 다시 성녀 데레사인가?
대 데레사, 하느님 체험하고 천상 길 뚫은 증거자
평화신문은 이번 호부터 윤주현 신부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을 연재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탄생 500주년을 앞두고 시작하는 이 기획 연재는 '영성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대 데레사 성녀의 영성을 더 쉽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 신자들 자신에게 필요한 영성의 길에 대해 배우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성녀 데레사 탄생 500주년
앞으로 1년 후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년)가 태어난 지 꼭 500주년이 됩니다. 그래서 성녀 데레사가 창립하신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비롯해 성녀의 고향인 스페인 교회는 4년 전부터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성녀 데레사의 영성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를 비롯해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으며 50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집중적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성녀는 1515년 3월 28일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성녀는 가톨릭교회 영성사에서 영성의 대가 중에 한 분으로 손꼽힙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27항, 1821항, 2704항, 2709항)에서 영성생활을 다룬 부분을 비롯해 교회 내에서 사용되는 영성과 관련된 여러 교과서들을 살펴보면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이 어김없이 약방의 감초처럼 소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는 신비가의 시대
우리와는 500년 가까운 세월을 거리에 두고 있는 성녀, 그것도 한국과는 정반대편에 있는 스페인 문화권에 속하는 여인. 도대체 성녀 데레사는 어떤 분이기에 사람들은 새삼 그분에 대해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 얘기하며 주목하는 걸까요? 일찍이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가운데 한 분이셨던 칼 라너 같은 경우, 21세기는 신비가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인류 문화 발전의 정점에 와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과학기술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 홍수처럼 밀려들어오는 온갖 문명의 이기들. 인문과학 역시 끊임없이 발전하는 가운데 인류의 정신문명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문명의 발전
그러나 그 모든 발전을 바라보며 인간 스스로 착각하며 속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발전이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착각, 그것이 인간 자신에게 궁극적인 존재 의의(意義)를 실현해 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인간 지성에 바탕을 둔 인문과학이 아무리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수평적인 차원만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의 존재가 본래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 또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하는 인간 존재의 핵심을 꿰뚫는 물음에 대해서는 전혀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철학을 비롯한 제반 인문과학은 인간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만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철학의 마지막 말은 인간과 세계의 근거로서의 신(神)에 대해, 그것도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비인격적인 신에 대해 아주 조금 말해줄 뿐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신자들이 믿고 고백하는 인격적인 사랑의 '하느님'이 빠져 있습니다.
과학기술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인간의 지향성
또한 과학문명의 진보를 인류의 발전과 섣불리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과학기술은 윤리적으로 볼 때 가치중립적(價値中立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의 틀을 완전히 바꿔놓은 인터넷만 해도 그렇습니다. 가상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는가,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는 인간의 정신 활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가상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는가에 따라 그것은 선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악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류 과학문명의 최고봉에 위치한 핵에너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래 인류를 책임질 에너지가 될지, 아니면 이 지구상에서 인류를 멸종시킬 함정이 될지는 전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 의지의 지향성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정신없이 발전해가는 과학문명과 인문과학의 파도 속에서 오히려 혼란스러워하며 삶의 방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강렬한 하느님 체험을 목말라하는 현대인
교회 내 상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은 2000년의 역사를 거치며 발전할 대로 발전했습니다. 머리만 커진 오늘의 현대인들, 그리고 신앙인 역시 하느님에 대해 얘기하는 수많은 책들을 바라보며 냉소(冷笑)짓고 무덤덤해 할 뿐입니다.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논리와 개념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호소력을 갖지 못합니다. 콜카타의 마더 데레사 같은 분이 물질문명과 무신론으로 팽배한 현대인들에게 존경 받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는 강력한 원천이 되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논리도 넘어서는 하느님에 대한 강렬한 체험과 삶 속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이 뒷받침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는 하느님을 체험한 위대한 성인을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그 성인이야말로 존재 자체로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으며 거기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이 어떤지를 몸소 살아내고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천상을 향한 안내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녀 데레사는 그 어떤 성인보다도 이 시대에 빛을 전해줄 수 있는 강렬한 하느님 체험의 소유자이자 천상을 향해 길을 뚫은 증거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천상을 향해 길을 뚫은 성녀 데레사
성녀 데레사는 어떤 인간적인 논리를 바탕으로 한 사상 체계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16세기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모든 면에서 약자로 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심금(心琴)을 울리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하느님을 향한 열절한 원의를 불사르게 만들어 줍니다. 아찔할 정도로 발전해가는 물질문명의 편안함 속에서 초월적인 가치를 망각하는 가운데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오늘 이 시대에 인간 존재의 핵(核)을 꿰뚫는 힘 있는 하느님 체험이야말로 현대인들에게 가장 호소력을 지닌 성녀 데레사의 가치가 아닐까 합니다. 필자는 이러한 성녀 데레사의 영적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들의 영성생활을 성찰하게 해주는 다양한 주제들을 약 1년간 나누고자 합니다. 성녀 데레사께서 여러분들의 영성생활의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 주길 바랍니다.
* 필자(윤주현 신부) 약력
▲ 1998년 수품(맨발 가르멜 수도회)
▲ 2001년 교황청 테레시아눔 대학원, 신학적 인간학 전공, 신학박사
▲ 2006년 아빌라 신비신학 대학원, 신비신학 및 가르멜 영성 전공
▲ 2007~2011년 아빌라 신비신학 대학원 교수
▲ 2012~현재 대전가톨릭대, 대전가톨릭교리신학원 교수
▲ 「가르멜 총서」와 「가르멜의 향기」 시리즈를 창간, 이를 통해 가르멜 영성 관련 다양한 저서와 역서를 출간. 교의신학 분야의 역서로 「은총론」, 「교회론」, 「신학적 인간학」이 있다.
[평화신문, 2014년 1월 5일, 윤주현 신부(맨발 가르멜 수도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 하느님 사랑에 대한 나만의 응답
흔히 성녀 데레사는 '영성의 대가'라고들 말합니다. 어느 특정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룬 사람을 대가(大家)라고 합니다. 영성의 대가인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반추하려면 무엇보다도 '영성'의 올바른 개념을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영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가장 유행하는 말이 있다면 그건 분명 이 '영성'이란 말일 겁니다. 사제 영성, 수도자 영성, 평신도 영성, 순교자 영성, 영성 심리, 매스컴 영성 등 도대체 교회에서 사용되는, 좀 있어 보인다 하는 말들은 죄다 '영성'이란 말과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아마 몇 퍼센트도 되지 않을 듯 싶습니다.
성삼위 하느님께 이르는 것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영성'은 인간의 행위를 유발하는 어떤 태도나 정신으로서 일종의 종교적, 윤리적 가치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영성' 하면 어떤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신 혹은 절대자를 믿는 사람이면 어떤 종교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영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영성뿐만 아니라 선(禪)의 영성, 불교도 영성, 유다교 영성, 회교도 영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협소한 의미에서 본다면, '영성'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신앙생활,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느님과 신자 간의 인격적인 관계성을 의미하며 그 관계에 바탕을 둔 생활양식을 의미합니다. '영성'(spiritualitas)이란 말은 '영(靈)'을 의미하는 라틴어 '스피리투스(spiritus)'와 그리스어 '프네우마(pneuma)'에서 유래합니다. 이러한 선상에서 성령(聖靈)을 '스피리투스 상투스(Spiritus Sanctus)'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통해 영성이 성령과도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계시 진리에 비춰볼 때, 진정한 의미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분을 통해서 성삼위 하느님께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성'에는 이런 일반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로마에서 영성신학으로 권위 있는 교황청 테레시아눔 대학원에서 40여년 이상 가르쳐 오신, 명강의로 유명한 라우다치 신부님은 '영성신학의 근본 주제들'이라는 과목을 가르치실 때 늘 다음과 같은 질문과 함께 첫 강의를 시작하곤 하십니다.
"여러분은 영성을 뭐라 생각하십니까?" 필자 역시 거의 20년 전 이 강의를 들을 당시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만, 저를 비롯해 대강의실에 꽉 들어찬 수많은 신부님, 수녀님들 가운데 그 누구도 이 신부님이 의도하신 답을 제대로 맞히진 못했습니다. 결국 신부님께서는 저희들의 대답을 종합하시며 다음의 한 마디로 영성의 핵심을 지적하셨습니다. 영성은 하느님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성을 표현한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 각자가 그분께 드리는 고유한 사랑의 표현 방식이라고.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참하고 예쁜 아가씨,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처럼 '엄친딸(완벽한 여성을 이르는 말)'이 있다고 합시다. 그 아가씨에게 반한 세 청년이 있습니다. 한 청년은 시인이고 다른 한 청년은 음악가이며 마지막 한 청년은 미술가입니다. 세 청년 모두 그 아가씨를 사랑합니다만, 저마다 사랑의 표현은 달랐습니다. 시인 청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주옥같은 시구(詩句)를 인용하며 심금을 울리는 편지를 써 보내 그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반면, 음악가 청년은 그녀를 생각하며 가끔씩 산책하다 떠오른 악상을 갖고 세레나데를 작곡해 어느 날 저녁 그 아가씨가 사는 집 창문가에서 그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미술가 청년은 그 아가씨의 초상화를 예쁘게 그려서 선물하는 것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시인, 음악가, 미술가 모두 그 아가씨를 사랑했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로 상황을 바꿔보기로 합시다. A라고 하는 신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당신을 돕는 것이라 하신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반면, B라고 하는 신자는 노래를 잘 부르는 자신의 능력을 봉헌하기 위해 본당 성가대에 들어가 매주 미사 때 성가로 주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C라고 하는 신자는 평소 성경 공부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당 성경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새로 입교한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침으로써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세 신자 모두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같지만, 그것을 표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세례 통해 영성의 바탕 마련
그러므로 영성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나만이 응답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사랑의 방식, 고유한 사랑의 색깔을 뜻합니다. 우리 각자는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모두 다릅니다. 태어난 곳도 다르고 자라난 가정환경도 다릅니다. 취향도 다르고 교육 정도도 다릅니다. 또한 하고 있는 일도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걸어온 삶의 역사가 다릅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나를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바로 이 모든 나 자신의 독특함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맺는 고유한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나만의 방식으로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통해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시작한 우리는 이미 잠재적으로 영성의 바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토대 위에 하느님에 대한 각자의 고유한 사랑의 방식을 갈고 닦으며 그분을 향한 고유한 사랑의 색깔을 곱게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영성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전이나 영성 서적들을 통해 만나는 성인들은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 나아가는가 하는 개괄적인 여정과 영성적인 원리에 대해 가르쳐주지만, 여러분은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성녀 데레사가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여러분 자신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만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걸어야 할 여러분만의 영성의 길입니다.
[평화신문, 2014년 1월 12일, 윤주현 신부(맨발 가르멜 수도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3) 성녀 데레사는 누구인가 ①
성 예로니모에 감화, 부모 몰래 수녀원 입회
대(大) 데레사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에 대해 나누기 전에 먼저 그분은 어떤 분이셨는가 하는 그분의 인물됨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이지 싶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성녀 데레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성녀가 두 분 계십니다. 한 분은 소화 데레사라 불리는 성녀로,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태어나 15살에 리지외 가르멜에 입회해 24살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한 분을 말합니다. 이 성녀의 정확한 수도명은 아기 예수와 성면의 데레사이십니다. 반면, 같은 이름을 쓰지만 소화 데레사보다 350여 년을 먼저 살았던 성녀가 계십니다. 이분은 스페인 사람으로 세계사에서 스페인의 황금시대라고 불린 16세기에 살았던 성녀입니다. 이분은 통상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라고 불리기도 하고 정확한 수도명을 따라 '예수의 성녀 데레사'라고 불리기도 하며 소화 데레사와 구분하기 위해 '대(大) 데레사'라 불리기도 합니다.
개종 유다인
성녀 데레사의 조국 스페인은 1492년 800년 간의 이슬람 통치를 몰아내고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통일함으로써 제국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당시 신앙이 달랐던 유다인, 아랍인들은 강제로 또는 자발적으로 개종함으로써 스페인에 통합됐습니다. 성녀 데레사의 집안은 본래 스페인의 경주라 할 수 있는 톨레도에서 성공한 유다계 상인 집안이자 유다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집안이었습니다. 성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유다인이라는 출신을 숨기고 주류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이달고'라는 하급 귀족 신분을 사서 가까스로 아빌라에 정착하게 됩니다. 성녀는 아빌라에서 1515년 3월 28일 그런 개종 유다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성녀 데레사의 아버지 알론소 산체스는 두 번 결혼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카타리나였는데 안타깝게도 두 남매를 낳은 지 얼마 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로부터 2년 후 산체스는 베아트리스라는 새로운 부인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부인으로부터 열 명의 자녀를 얻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다름 아닌 데레사였습니다.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성인전을 읽었으며 로사리오 기도를 비롯해 수녀 놀이를 즐겨 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녀는 어느 날 하느님을 위해 순교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빠 로드리게스와 함께 아랍 사람들이 산다고 생각했던 곳에 가서 순교하기 위해 가출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그 길목에서 숙부가 그 두 아이를 만나 데려옴으로써 이들의 무모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나 점점 커가면서 신앙만이 아니라 세속의 여러 가지 일들에 눈이 뜨기 시작한 성녀는 점점 신앙을 멀리했습니다. 어머니가 즐겨 보던 기사소설이나 연애소설에 탐닉했는가 하면, 사촌오빠들과 연애를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화장도 하고 치장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발달 심리학의 도움으로 그 또래의 소녀들이 당연히 그런 성장과정을 겪는다는 점을 아는 우리로서는 사춘기 소녀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받아들일 법하지만, 엄격한 가부장적 사회이자 철저한 종교 사회였던 16세기 당시 이런 성녀의 모습은 엇나가기 시작하는 소녀의 모습으로 보였을 겁니다. 그래서 이를 보다 못한 성녀의 아버지는 딸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소녀들을 위한 기숙학교로 데려가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원의 기숙학교 생활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로 성녀는 처음에 이 기숙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의 사감으로 있던 브리세뇨의 마리아 수녀님이 보인 거룩한 표양은 이내 감수성 많은 사춘기 소녀 데레사의 마음을 사로잡고 맙니다. 성녀는 이곳에서 규칙적인 신심생활을 통해 어린 시절 가졌던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되찾았으며 나중에는 수녀가 되겠다는 마음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성녀는 수녀가 돼도 아우구스티노 수녀회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절친한 친구가 가르멜 수녀원에 있어서, 만일 수녀가 된다면, '강생 수녀원'이라고 불린 가르멜 수녀원에 가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성녀는 그만 병이 나서 기숙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데레사를 큰 언니가 살던 살라망카 근처의 카스테야노라는 작은 마을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휴양을 하며 보내던 성녀는 가끔 그 근처의 오르티고사라는 곳에 사시던 숙부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숙부는 신심이 깊은 분이어서 그분의 서고에는 언제나 좋은 신심서적들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곳을 방문해서 숙부에게서 좋은 얘기도 듣고 쉬면서 무심결에 손에 잡힌 책을 보며 성녀는 그 책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성 예로니모가 쓴 편지 모음집으로 성녀는 그 책을 통해 성인의 열정에 깊이 감화됐고 그때부터 진지하게 수도자가 될 것을 고민하게 됩니다. 언니 집에서 쉬면서 몸을 추스른 성녀는 아빌라로 돌아와 얼마 후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벽에 가르멜 수녀원으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1535년 성녀의 나이 만 20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가르멜 수녀원 시절
그 후 성녀는 수련을 받고 1537년 서원을 발해 정식으로 가르멜 수녀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 다시 몸이 아파 성녀는 잠시 수녀원을 나와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베세다스라는 작은 마을에 머물며 치료를 했는데, 역시 이곳에서도 근처의 숙부 댁을 자주 들르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성녀의 기도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될 오수나의 프란치스코 신부가 쓴 「제삼 기도 초보」를 만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성녀는 '거둠 기도'에 심취했으며 이 기도를 약 20여 년간 실천하며 보다 깊은 신비 기도로 나아가기 위한 수련을 했습니다. 1539년 성녀는 아빌라로 돌아왔지만 병은 더욱 악화됐으며 결국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실신 상태에 있던 성녀가 죽은 줄 알고 장례를 치를 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난 성녀는 그 후에도 몇 년간 병약한 상태로 지내야 했습니다. [평화신문, 2014년 1월 26일, 윤주현 신부(맨발 가르멜 수도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4) 성녀 데레사는 누구인가 ②
16세기 교회에 영적 비전 제시한 선각자
영적 여정에 진일보하다
1553년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한 후 성녀는 20여 년 간 가르멜 수도자로서 정진했습니다. 특히 성녀의 기도생활에 도움을 준 것은 프란치스코의 오수나가 쓴 「제삼 기도 초보」였습니다. 그런 성녀의 영적 여정에 전환점이 된 사건은 1554년 사순절에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체험이었습니다. 수녀원 안에 있는 기둥에 묶여 고통 받으시는 예수님 동상을 바라보며 성녀는 인간을 향한, 아니 자신을 향한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깨우치며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분을 향해 일대 회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회심의 여정에 결정적인 방점을 찍은 것은, 그로부터 2년 후 예수회의 프라다노스 신부님과 영적 대화를 나눈 후 기도할 때였습니다. 당시 성녀가 고민했던 것은 과연 사람들과의 우정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방해가 되는가 하는 점이었는데, 젊은 시절 이 문제로 고심한 바 있던 성녀는 아직껏 인간적인 우정에 연연해하는 마음을 끊지 못했고 프라다노스 신부는 그런 데레사를 설득하다 지쳐 성녀에게 경당에 가서 '성령송가'를 바치게 했습니다. 그 권고에 따라 기도를 바치던 도중, 성녀는 특별한 신비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처음으로 신비적인 황홀경을 체험함과 동시에 주님의 신비적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성녀는 영적으로 큰 걸음을 걸으며 진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성녀가 받은 이 은총은 '영적 약혼'으로 불리는데, 이때부터 성녀는 하느님에 대한 더욱 많은 신비체험을 하게 됩니다.
남녀 맨발 가르멜의 설립자
이런 일련의 신비체험을 통해 성녀는 자신을 향한, 그리고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고 이제 그 사랑에 응답하고자 하는 원의를 키워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성녀는 기존의 가르멜 수녀원이 가진 해이한 수도생활 분위기를 일신함과 동시에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여인으로서 할 수 있는 당시의 한계 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성녀는 엄격한 봉쇄 수녀원을 창설해 온전한 관상생활에 전념함과 동시에 철저한 고행과 기도의 삶을 통해 개신교의 분열로 인해 홍역을 앓고 있던 교회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녀는 1562년 아빌라에 첫 번째 맨발 가르멜 수녀원을 창립하고 그 후 죽기까지 20년 동안 스페인 전역에 17개의 수녀원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가르멜 수녀들의 이상을 함께 공유하며 동시에 그런 영적 카리스마를 사도직을 통해 실제로 교회 안에서 구현할 수 있도록 남자 수도회를 창립했습니다. 1568년 메디나 델 캄포에서 인연을 맺은 십자가의 성 요한과의 만남은 이런 이상을 구체화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영성 저술가
1572년 성녀는 자신의 친정이라고 할 수 있는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커다란 은총을 받게 됩니다. 이를 소위 '영적 결혼'의 은총이라고 하는데 이는 앞서 말한 '영적 약혼'에 뒤이은 영적 단계로서 인간이 현세에서 도달할 수 있는 영적 여정의 최고봉을 의미합니다. 성녀는 1560년대 초반부터 수녀원 창립활동을 함과 동시에 그동안 자신이 받은 영적 은혜와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글로 소개함으로써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기도 여정에 동참하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같은 은혜를 받게 되길 고대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쓰게 된 첫 번째 작품이 한국어로 「천주 자비의 글」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자서전」입니다. 또한 성녀는 자신의 첫 번째 제자 그룹인 아빌라의 성 요셉 가르멜 수녀원 수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기 위해 「완덕의 길」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미 영적으로 완숙기에 접어든 1577년 「영혼의 성」을 썼는데, 이 작품은 성녀의 영성생활과 기도생활을 집대성한 걸작으로 꼽힙니다. 그밖에도 성녀는 다양한 소품들을 많이 집필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에는 금기시 되던 「아가서」를 묵상하고 해설하기도 했고, 자신의 신비체험을 시에 담아 표현하기도 했는가 하면, 영적 지도자나 자신을 심문했던 종교 재판소의 재판관들에게 자신의 영적 상태와 그간 자신이 걸어온 영적 여정에 대해 설명한 일련의 「영적 보고서」들도 작성했습니다.
교회의 딸
20세기 중반에 활동하던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대표적 영성가인 프랑스 가르멜의 마리 에우젠 신부는 가르멜의 주요 성인들의 가르침을 집대성하는 가운데 가르멜 영성이 무엇인지 종합적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나는 하느님 뵙기를 원합니다」이며, 후반부는 「나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합니다. 이 두 제목은 가르멜 영성이라고 하는 가톨릭교회의 거대한 영적 산맥의 시조(始祖)인 성녀 데레사의 영성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죽기까지 성녀가 그토록 열망했던 것은 하느님을 뵙는 것이었습니다. 진리 자체이자 궁극적 사랑이신 하느님, 그분을 뵙는 것이야말로 성녀의 지상 과제였습니다. 이는 교회 역사상 수많은 성인성녀들을 비롯해 신학자들이 가르쳐 온 인간의 궁극적 소명인 지복직관(至福直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녀는 1582년 알바데토르메스 가르멜 수녀원에서 임종하면서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성녀가 살던 16세기는 유럽 전역에 가톨릭교회가 큰 위기를 겪고 있던 상황입니다. 그 난세에 성녀는 여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선택해 교회에 영적인 힘을 불어넣어줌으로써 내적인 쇄신을 이끌었습니다. 성녀는 수많은 신비체험을 하면서 언제나 그 체험이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지 염려했고 영적 지도자들의 지도를 따르며 그들을 통한 교회의 인도에 철저히 순명했습니다.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쓰면서도 단 한 줄의 글조차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불살라 버리겠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성녀는 죽을 때까지 온전히 교회의 딸이었고 교회를 위해 일생을 불살랐습니다. 수많은 이단이 판을 치던 16세기, 성녀 데레사는 시대의 징표를 읽고 교회에 영적 비전을 제시한 선각자였습니다. [평화신문, 2014년 2월 9일, 윤주현 신부(맨발 가르멜 수도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자서전」 : 하느님 자비에 관한 책
성녀 데레사의 영성을 이해하고 이를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함에 있어 기초 자료가 되는 것은 성녀가 우리에게 남겨준 영성 작품들입니다. 그 가운데 주요 작품으로 손꼽히는 「자서전」, 「완덕의 길」, 「영혼의 성」, 「서간집」에는 성녀의 영적 가르침을 구성하는 핵심 주제들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500년의 세월을 거리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녀 데레사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주는 작품으로 우리는 무엇보다 성녀가 자신의 삶에 대해 쓴 일종의 '고백록'인 「자서전」을 들 수 있습니다. 본래 이 작품은 성녀 데레사가 그간 자신이 받은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비체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몰라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자신을 지도했던 여러 사제들에게 자기 영혼의 사정을 내어 보임으로써,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에서 온 것인지의 여부를 확인받기 위해 작성한 일종의 영적 보고서를 모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작품의 초고는 대략 1560년에서 1562년 사이에 아빌라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당시 성녀의 영적 지도신부들 가운데 특히 예수회원들(세티나의 디에고 신부)과 도미니코 회원들(베드로 이바녜스 신부, 톨레도의 가르시아 신부)은 성녀가 쓴 이 글에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 전혀 없으며 영성생활에 유익한 많은 주제들을 담고 있다며 성녀를 격려하면서 원고를 좀 더 보완하도록 조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녀는 영적 지도신부들에게 순명하는 마음으로 원고를 보완해서 현재 우리가 보는 「자서전」을 1565년에 완성했습니다. 본래 작품의 원본에는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고, 이 작품을 비롯해 성녀 데레사의 주요 작품을 정리해서 처음으로 출판한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레온의 루이스 신부는 출판을 위해 이 작품에 「사모(師母), 예수의 데레사의 자서전과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베풀어주신 몇 가지 은혜들, 그분에 의해 직접 쓰였으며, 그분을 지도했던 고해사제에게 보낸 것」이란 다소 긴 제목을 붙인 바 있습니다. 성녀 데레사는 생의 말년에 이르러 이 원고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글」로 부르길 원했다고 합니다.
성녀가 「자서전」을 쓰게 된 동기
성녀 데레사가 이 책을 쓰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1) 성녀는 그간 자신이 받았던 하느님에 대한 신비체험을 정리하면서 하느님이 자신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알고 싶었고 또 그것을 교회 학자들로부터 검증받고 싶었습니다.
2) 성녀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알게 된 하느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자비의 하느님을 사랑하길 원했습니다.
3) 성녀는 이러한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비롯해 자신이 걸어온 영적 여정을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그들 역시 보다 깊이 하느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성장하길 원했습니다.
4) 성녀는 자신의 하느님 체험을 전함으로써, 당시 사람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심판관으로서의 무시무시한 하느님의 이미지를 일신(一新)하고자 했습니다.
「자서전」의 내용
성녀 데레사의 「자서전」은 전체가 40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음과 같이 구분해서 볼 수 있습니다.
1) 1~10장 : 이 부분에서 성녀는 진리를 찾고자 했던 자신의 유년기와 사춘기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를 향해 사막에서 여행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알아가는 여정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2) 11~22장 : 성녀는 이 부분에서 자신이 오랜 세월 실천해왔던 기도에 대해 가르치면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역시 참된 기도의 여정에 참여하도록 초대했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성녀는 기도의 초보 단계부터 초자연적인 관상 기도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상세한 설명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위해 성녀는 정원에 물을 주는 4가지 방식에 대한 비유를 소개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기도를 통해 인간 안에 작용하는지 가르쳤습니다.
3) 23~31장 : 성녀는 이 부분에서 기도를 통해 변화된 사람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성녀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변화된 자신의 삶과 이를 위해 자신이 했던 이탈의 노력 등을 소개하며 보다 높은 완덕의 절정을 향해 자신을 이끄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에 대해 전해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을 갖도록 독려했습니다.
4) 32~40장 : 성녀는 이 부분을 통해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비적인 은총은 자신이 아닌 교회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 고백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엄격한 봉쇄와 고행을 통해 철저히 복음을 살아가는 첫 번째 맨발 가르멜 수녀원의 창립 과정에 대해 전했습니다.
'영성'은 하느님의 관점에서 삶을 재해석하는 것
마지막으로 성녀 데레사의 「자서전」을 묵상하면서 이 기회에 여러분 역시 여러분의 삶의 역사 안에 발자취를 남기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묵상하도록 초대하고자 합니다. 성녀 데레사가 밝혔듯이, 「자서전」은 성녀가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가운데 삶의 여정 속에 역사하신 숨어 있는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를 읽으며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일찍이 2세기께 활동했던 교부 성 이레네오는 역사의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온 우주 만물이 하나로 수렴된다는 '수렴(收斂, recapi tulatio)' 사상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수렴은 비단 전 우주적인 차원에서 일어날 미래적 사건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이 순간 우리가 살아온 삶의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재해석하고 바라보는가에 따라 지금 새롭게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구원 사건이기도 합니다. '영성'은 우리 삶에 대한 재해석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어떤 것으로 채워졌건, 그 안에 좋은 체험만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 심지어 악(惡)에 대한 체험이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자비와 섭리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갖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고백록」에서 시간에 대해 설명하며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그리고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십시오." 성녀 데레사의 「자서전」이 여러분들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섭리로 이끄는 좋은 안내자가 되길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4년 2월 23일, 윤주현 신부(맨발 가르멜 수도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6) 성녀 데레사의 「완덕의 길」
기도, 기술이 아닌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만남
기도 교과서인 「완덕의 길」
성녀 데레사가 쓴 책 가운데 영성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교과서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신자들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으로 「완덕의 길」을 들 수 있습니다. 「완덕의 길」은 본래 성녀가 창립한 첫 번째 맨발 가르멜 수녀원인 성 요셉 수녀원의 수녀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썼습니다. 성녀는 1562년 이 작품을 썼는데, 기도뿐만 아니라 영성생활 전반에 대해 그리고 신비체험에 대해 거침없고 솔직한 문체로 소개했습니다.
더 나아가 성녀는 수녀들을 비롯해 평신도, 특히 여성들이 묵상기도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어려움을 줬던 당시 남성 중심의 교계제도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 여인들을 옹호하는 원색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당시 종교재판소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일종의 계엄령 체제하에서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검열했던 성녀의 영적지도 신부들은 성녀로 하여금 도발적인 내용들을 수정하고 문체도 다듬도록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약 3년간 다시 다듬어 1565년에 수정된 작품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완덕의 길」은 두 개의 작품으로 전해져 옵니다. 그리고 각각의 작품이 보관된 장소에 따라 구체적인 이름이 따라붙는데, 성녀가 처음 만든 「완덕의 길」은 스페인의 왕궁 도서관에 있고 그 왕궁이 있는 마을의 이름이 '에스코리알'이기 때문에 「완덕의 길」 에스코리알본(本)이라 부르고, 수정해 다시 만든 작품은 바야돌리드라는 대도시의 가르멜 수녀원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완덕의 길」 바야돌리드본(本)이라 부릅니다. 최민순 신부님을 통해 한국에 소개된 「완덕의 길」은 바야돌리드본입니다.
「완덕의 길」의 구성
「완덕의 길」은 42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크게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 1-18장: 기도를 위한 준비, 2) 19-26장: 일반적인 기도에 대해, 3) 27-42장: '주님의 기도'에 대한 해설. 무엇보다 성녀 데레사는 자신이 몸담고 살았던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자신이 여인으로서 사회적 약자였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통해 그 시대의 교회가 안고 있던 갈등과 분열에 대해 깊이 자각하고 혼신을 다해 응답함으로써 교회의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성녀가 이 작품을 통해 제시한 것은 복음을 철저하게 사는 것, 기도에 충실함으로써 주님을 섬기고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세상 구원을 이루시는 데에 밑거름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녀가 책을 쓰게 된 이유이자 주된 내용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닌 하느님과의 관계
이런 선상에서 우리는 성녀가 이 책을 쓰면서 기본 줄기로 삼은 몇 가지 주제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복음적 권고를 철저히 지키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생활입니다. 성녀는 기도생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정이며 이것이 곧 영성생활이 지향하는 완덕을 향한 여정이라고 봤습니다.
통상 이 책은 기도에 대한 성녀의 가르침이 담긴 교과서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신자들이 이 책을 읽어가면서 접하는 내용은 주로 신앙생활을 위한 기본 자세, 특히 덕행(德行)에 관한 것입니다. 성녀는 작품의 50% 이상을 할애해서 다양한 덕들에 대해 다뤘습니다. 이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으로, 성녀는 기도가 중요하지만 기도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며, 덕을 닦는 것이야말로 기도의 근본 바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신자들이 사이에 사적 계시 문제를 비롯해 특별한 치유 은사나 신비 현상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만, 이로 인해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비본질적(非本質的)인 것에 치우쳐서 잘못된 신앙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아닌가 염려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성녀 데레사는 단호했습니다. 절대 신비 현상이나 사적 계시 같은 것을 바라지도 말고 그것을 체험했다 할지라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며 그것이 완덕을 향한 여정에서 진보했다는 표식도 아님을 명심하라고. 그러면서 성녀는 「완덕의 길」에서 참된 기도, 즉 하느님과의 참된 만남과 대화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 청빈, 자아 인식, 이탈, 겸손, 순수한 사랑과 같은 덕목을 제시했습니다.
저는 적지 않은 신자들이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 좀 염려스럽습니다. 기도를 테크닉 차원에서 접근하면서 이런저런 기도 방법을 배워 열심히 수련만 하면 높은 기도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근본적으로 '기술'이나 '방법'이 아닙니다. 성녀 데레사가 말하는 기도는 그런 기술이 아니라 하느님과 맺는 '우정의 관계', '사랑의 관계'가 영글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단순히 어떤 기술을 터득하고 반복해서 수련함으로써 깊어지는 방법이 아니라, 두 인격(人格) 간의 만남으로 이해하고 하느님을 나의 유일무이한 사랑이자 벗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 관계에 충실하고 그럼으로써 이를 내 삶의 중심에 두고 끊임없이 키워가야 하는 소중한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건강한 기도생활의 바탕인 올바른 삶의 준비
성녀가 말한 완덕의 길은 기도 여정의 발전 단계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기도 여정의 발전은 올바른 신앙생활, 수덕생활을 바탕으로 합니다. 쉽게 말해, 기도만 많이 하고 고상한 생각과 신묘한 감정만 느낀다고 완덕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올바른 삶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더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관심을 갖고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 가진 것을 나눠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결국은 죽음 앞에서 다 놔야 할 이 세상 것에 너무 마음을 두지 않는 것, 하느님께서 주신 재물과 재능을 자기 것으로 생각지 말고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나누며 사는 것, 교회 어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상식이 통하는 '사람 냄새' 나는 건강한 인간성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이 정도만 돼도 완덕의 길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으며 기도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좋은 밑거름이 준비된 건강한 영혼이라고 성녀는 가르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녀는 신앙생활의 정점(頂點)인 완덕의 정상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대결심(一大決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이 목표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결의.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께 여러분의 삶의 중심 자리를 내어드리고 그분께 올인할 자세가 돼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성녀 데레사가 초대하는 완덕의 정상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평화신문, 2014년 3월 9일, 윤주현 신부(맨발 가르멜 수도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7) 성녀 데레사의 「영혼의 성」
하느님을 향한 내적 여정은 우리 모두의 소명
성녀 데레사의 작품 가운데 백미(白眉)인 「영혼의 성」
「영혼의 성」은 성녀의 영성 세계를 대변하는 최고 작품입니다. 성녀는 이 책을 1577년 6월 2일 톨레도 가르멜 수녀원에서 쓰기 시작해 그 해 12월 29일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여러 가지 복잡한 일에 얽혀 3개월간 펜을 잡지 못했으니, 성녀가 영성사(靈性史)에 길이 남을 이 걸작을 완성한 것은 3개월 동안이었습니다. 이 책은 본래 종교재판소에 고발당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자서전」을 안타까워하던 성녀에게 영적 지도신부인 맨발 가르멜회 소속 그라시안 신부가 권유함으로써 시작됐습니다. 성녀의 첫 번째 작품인 「자서전」이 만들어진 것은 1562~1965년으로 1577년에 쓰인 「영혼의 성」과는 12~15년의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성녀는 1572년 11월 18일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에서 영적 여정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혼'에 이르는 체험을 했으며,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교회에 대한 봉사를 모토로 하는 '남ㆍ녀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했습니다. '영적 결혼'을 체험한 지 5년이 지난 상태에서 「영혼의 성」을 썼다는 것은 성녀가 영성생활의 정상에 서서 그간의 영적 여정을 뒤돌아보며 영성생활 전체를 해설한 내용이 이 작품에 담겨 있음을 의미합니다.
내면의 성(城)에 비유된 인간의 영혼
흔히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신비가들은 그 신묘한 체험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 '상징'을 사용하거나 '시(詩)'에 담아 전하곤 했습니다. 성녀 데레사 역시 표현의 한계를 느끼며 자신의 신비 체험을 수많은 상징 속에 담아냈습니다. 성녀의 영성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근본 바탕이 되는 것은 인간, 그 중에서도 인간의 영적 부분인 '영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느님이 현존해 계신 곳이자 바로 그 하느님과 인간이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발전시켜감으로써 우리가 세례 때 받은 근본 성소인 '성화(聖化)' 또는 '신화(神化)'가 이뤄지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녀는 영성생활의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영혼'을 '다이아몬드', '구슬', '정원', '성'과 같은 상징에 담아 설명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城)'은 성녀가 가장 선호했던 상징 중 하나였습니다. 아빌라는 유럽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중세의 웅장한 성곽 전체가 가장 잘 보존된 도시입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50여 년 동안 아빌라 성을 보며 살았던 성녀에게 '성'은 영성생활을 설명해 주는 가장 자연스런 상징이었을 겁니다.
성의 중심에 현존해 계신 하느님
성녀는 '성'으로 상징되는 영혼 안에 성주(城主)이신 하느님이 사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성녀의 이런 설명은 교회가 가르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주(內住), 즉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영혼 안에 거하신다고 하는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녀의 이런 설명은 단순히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성녀가 오랜 신앙생활 동안 끊임없이 체험하고 느끼고 깨달은 바를 담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설명보다 권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내면의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세례를 받고 영성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여정은 무엇보다 성의 중심에 살고 계신 성주, 즉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성 안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들어가는 내적 여정(內的 旅程)을 말합니다.
성의 중심을 향해 있는 일곱 개의 방
성녀는 인간의 영혼을 '성'으로 설명하면서 그 성이 바깥쪽에서부터 크게 7개 지역으로 나뉜다고 상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인간이 세례를 받게 되면 이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며 그가 처음 들어가는 지역을 1궁방(宮房)이라 불렀습니다. 반면,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더 열심히 봉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안쪽에 있는 2궁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3궁방은 신앙생활에 있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들이 들어서는 곳입니다. 이 방은 인간이 노력해서 갈 수 있는 최고 지점입니다.
4궁방부터 7궁방까지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이 주도권을 쥐고 여정을 이끌어가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하느님의 은총이 많이 작용하며 인간은 그런 그분의 은총에 맡겨드리고 그분이 일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4궁방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온전히 죽어야 하며 하느님께 온전한 신뢰를 둬야 합니다. 5궁방부터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깊은 일치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6궁방에서는 그 일치가 한층 깊어지는데 성녀는 이 상태를 '영적 약혼'이라 불렀습니다. 이 궁방에서는 탈혼이나 현시 등 상당히 많은 신비 현상이 수반되기 때문에 흔히 신비 현상의 궁방이라고도 부릅니다.
7궁방은 삼위일체 하느님이 현존해 계신 방이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완전한 신비적인 일치가 이루어지는 방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이를 '영적 결혼'이라 불렀습니다. 이 단계는 교회가 가르치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자 성소인 '성인(聖人)'이 되는 상태이자 좀 더 전문적인 표현을 쓰자면 '참여(參與)로써 하느님처럼 되는 상태'입니다. 인간은 이 7궁방에 도달함으로써 세례 때 받은 근본성소인 '성성(聖性)'을 완전히 실현하게 됩니다.
'성성(聖性)'의 완성을 향해 초대받은 우리
인간 내면을 향한 성녀 데레사의 '성' 비유는 말 그대로 비유이자 상징입니다. 「영혼의 성」을 접한 독자들이 실제로 우리 영혼을 '성'으로 믿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정말이지 기가 막히곤 합니다. 물론 우리 영혼 안에 현존해 계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여정은 맞습니다만, 그것은 정확히 말해 하느님과 나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점점 무르익어가는 여정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두 연인이 처음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의 농도가 짙어가면서 둘 사이의 깊은 연대감이 형성되듯이, 세례를 통해 맺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밀도가 점점 깊어가는 여정이 우리 내면을 향한 여정이며 그 여정을 사랑의 농도에 준해서 7개의 단계로 구분한 것이 성녀가 「영혼의 성」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우리 영혼 안에 현존해 계신 하느님을 향한 내적 여정은 단지 소수의 엘리트들이나 걷는 길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성인이 되도록 불림 받았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성소는 우리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우리 각자에게 부여된 소명으로,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우리 존재의 근원이자 궁극적 목적이신 당신과 사랑으로 하나 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초대에 기꺼이 응답할 마음의 준비가 되셨습니까?
[평화신문, 2014년 3월 16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8) 성녀 데레사의 「창립사」
맨발 가르멜회 창립은 하느님 자비에 대한 응답
하느님 자비에 대한 응답의 역사인 「창립사」
성녀 데레사의 주요 작품 중에는 영성 서적뿐만 아니라 「창립사」라고 하는 역사서가 있습니다. 「창립사」의 주된 줄거리는 성녀 데레사가 창립한 남ㆍ녀 맨발 가르멜 수도원들의 창립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인간, 구체적으로는 성녀 데레사의 응답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녀 데레사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죄인인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고서 그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억누를 길이 없어, 세상을 향한 그분의 구원사업에 온전히 투신하고자 하는 원의를 품게 됩니다. 그 원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교회 봉사를 위해 남ㆍ녀 맨발 가르멜 수도원을 창립하는 일이었습니다.
16세기 중반 당시 유럽의 교회는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인해 분열돼 가고 있었으며 내ㆍ외적으로 상당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여인처럼,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시대적 제약 속에서 살아야 했던 성녀는 엄격한 봉쇄 수녀원을 세워 보다 깊이 있는 기도와 희생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고, 체험한 것을 남자 가르멜을 통해 교회에 나눔으로써 교회 쇄신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1562년부터 시작해 스페인에 17개의 맨발 가르멜 수녀원을 세웠으며, 1568년에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남자 맨발 가르멜을 창립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구체적인 창립 내용이 담긴 작품이 「창립사」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성녀의 영성이 어떻게 역사 안에서 구체화되고 꽃피어 갔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의 구조와 내용
「창립사」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두 번째 맨발 가르멜 수녀원 창립이 있기 직전인 1567년부터 마지막 수녀원 창립이 있었던 1582년까지 일어난 일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느 일정한 시기에 연속해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크게 네 시기에 걸쳐 다양한 장소에서 작성됐습니다.
작품의 전체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부: 서언~9장(1573년 살라망카에서 작성)-메디나, 말라곤 수녀원 창립 이야기. 2부: 10~19장(1574년 세고비아에서 작성)-바야돌리드, 두루엘로, 톨레도, 파스트라나, 살라망카 수녀원 창립 이야기. 3부: 20~27장(1576년 톨레도에서 작성)-알바, 세고비아, 베아스, 세비야, 카라바카 수녀원 창립 이야기. 4부: 28~31장(1580~1582년 해당 수녀원에서 작성)-비야누에바, 팔렌시아, 소리아, 부르고스 수녀원 창립 이야기.
현대인을 위한 기도의 가르침
「창립사」가 주로 가르멜 수도원ㆍ수녀원의 창립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이야기 곳곳에는 다양한 영성적 주제들도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4장부터 8장에서 성녀는 기도와 관련해 몇 가지 권고 사항을 전해주고 있는데, 이 가르침은 기도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는 「자서전」, 「완덕의 길」, 「영혼의 성」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성녀는 5장에서 완전한 기도의 본질에 대해 다루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처한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적절한 조언을 줬습니다.
예를 들어, 묵상기도 시간이나 성무일도 시간에 피치 못할 상황으로 인해 일해야 할 경우,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과연 기도를 궐해도 괜찮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 성녀는 몇 가지 중요한 식별 기준을 정해주었습니다. 만일 기도시간과 겹치는 그 일이 1) 교회 장상의 명에 따라 하는 일이며 2) 애덕 실천, 이웃을 위한 봉사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 일로 기도를 궐해도 괜찮다고 성녀는 가르쳤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핑계 삼아 자주 기도를 궐해서는 안 되겠지요. 여기서 성녀가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기도'와 교회 장상에 대한 '순명' 그리고 '애덕 실천'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럴 경우, 손으로는 일하지만 마음만은 하느님을 향하고 지속적으로 화살기도를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선상에서 우리는 성녀의 그 유명한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냄비들 가운데서도 현존해 계십니다."
필자 역시 신학생 시절, 신학교에서 수업 후에 수도원에 귀가해서 종종 주방 수사님을 도와드리며 묵상기도 시간과 주방 소임이 겹쳐서 고민할 때 성녀의 이 구절을 접하고는 말끔히 걱정을 털어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분주한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며 신앙생활, 기도생활을 해야 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성녀의 이 가르침은 좋은 지침이 되어 주리라 생각합니다.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어디서든지 사랑하고, 사랑하는 임을 늘 생각합니다."
열렬한 성체 신심이 반영된 수녀원 창립
「창립사」에는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만, '성체 신심'과 관련해서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성녀는 성체에 대한 신심이 남달랐습니다. 특히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인해 성체가 모독을 당하고 적지 않은 성당이 문을 닫아야 했던 상황에 대해 참으로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자신이 창립하는 가르멜 수녀원이 이런 위기 상황을 반전시키는 작은 주춧돌이 되기를 희망하며 그 수녀원 성당에서 성체가 온전히 흠숭받도록 했습니다.
성녀가 창립한 맨발 가르멜은 엄격한 봉쇄와 희생, 가난을 모토로 삼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도시에서 여러 부류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곤 했습니다. 성녀는 수녀원 창립을 위해 준비된 집에서 미사성제가 봉헌되는 것을 공식적인 '창립'으로 삼았으며, 창립에 반대하는 갖가지 음모에 맞서서 창립을 성공시키기 위해 통상 창립 멤버 수녀들을 데리고 야밤을 틈타서 준비된 수녀원에 들어가 꼭두새벽에 미사를 봉헌하곤 했습니다. 수녀원 창립이 매번 007작전을 방불케 했던 것이죠. 신비가였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을 지녔고 만유 위에 성체를 공경했던 성녀의 열정이 결합된 작전이 바로 가르멜 수녀원의 창립이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얼마나 성체 안에 숨어계신 주님을 열망하며 삶의 중심에 그분을 모시려 노력하고 있습니까? 500여 년 전 스페인의 한 여인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수녀원 창립을 감행했습니다. 과연 여러분에게는 그런 열정이 있습니까?
[평화신문, 2014년 3월 23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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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9) 성녀 데레사의 「서간집」
현실감각 동반된 올바른 영성의 길 제시
성녀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로 인도해주는「서간집」
지난 호까지 「자서전」, 「완덕의 길」, 「영혼의 성」과 같은 성녀 데레사의 주요 영성 작품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사실 그간 한국교회 신자들은 성녀의 이런 수준 높은 영성 서적들을 통해 지극히 추상적이고 영적으로만 묘사된 '신비가'로서의 성녀 데레사만을 접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성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탈혼 속에 보냈다거나 마치 구름 위를 걸어 다니는 반쯤 천사 모습을 한 사람처럼 그려져 왔던 게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특히 성녀 선종 이후, 바로크 시대를 풍미했던 문학적 환경 속에서 성녀를 지극히 천사적 존재로 부각시키거나 모든 면에서 어린 시절부터 특은을 입은 특별한 존재로 내세워 당시의 대중신심을 북돋우려 했던 작가들의 뻥튀기가 한몫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성녀의 모습은 가히 가관입니다. 몸뚱이도 없고 음식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는 그런 천사적 존재, 거의 언제나 공중 부양을 하며 늘 탈혼 속에서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천상만을 쳐다보는 모습이 우리가 성녀에 대해 갖는 대체적 이미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성녀 데레사에 대한 그런 잘못된 이미지를 한 방에 날려버릴 작품, 성녀 역시 우리와 같이 땅을 딛고 살았고 먹거리에 대해 걱정하고 질병으로 시달렸으며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고민한 평범한 인간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바로 성녀가 쓴 수많은 편지들입니다. 성녀의 편지들은 그간 우리가 생각했던 성녀 데레사에 대한 극단적 이상적 모습에다 현실적 모습을 가미함으로써 성녀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로 인도해 줍니다.
성녀의 속살을 보여주는 작품
일생 동안 성녀가 몇 통의 편지를 썼는지 정확히 집계하기는 어렵습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편지보다 그간 사라져버린 편지가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 편지 가운데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것들을 바탕으로 추정해 보건대, 학자들마다 약간의 견해 차이는 있지만, 성녀는 약 1만 통에서 1만 5000통 정도의 편지를 쓴 것으로 사료됩니다.
성녀의 인물됨을 비롯해 성녀의 영성을 이해하는 데 편지는 상당히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편지는 오랜 역사를 통해 인류가 활용해 온 가장 기본적 소통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는가, 그 편지를 통해 무슨 내용을 나눴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인품부터 성격, 습관, 인간관계, 그가 지향하는 가치관, 시기마다 그가 고민했던 문제, 앓았던 질병, 처리해야 했던 현안 등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요소가 종합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또한 편지에는 공식적 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그 사람의 속내가 가감 없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사람이 숨기고 싶은 인간관계, 치부까지도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한 마디로, 편지를 읽는 것은 그 사람의 속살을 보는 것과 진배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녀 데레사의 편지 모음집인 「서간집」은 그 글을 쓴 성녀의 입장에서 보면 잔인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그건 마치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만인(萬人)에게 내 메일함에 있는 모든 편지를 열어 보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그만큼 더 성녀 데레사의 실제 모습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만나게 됩니다.
편지의 수취인들과 그 내용
현재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성녀의 편지는 총 486통으로, 스페인의 몬테 가르멜로 출판사를 통해 「성녀 데레사의 서간집」이 나오기까지 수백 년에 걸쳐 우여곡절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486통 중에서도 성녀의 친필로 쓰인 원본은 250통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필사된 것입니다. 전해져 오는 성녀의 편지는 1546년부터 시작해서 선종한 해인 1582년까지 쓰인 것들이지만, 특히 편지 분량이 많은 시기는 성녀의 가르멜 수녀원 창립 활동이 본격화된 1567년부터 1582년까지입니다.
성녀가 쓴 편지의 수취인들을 그룹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족 구성원들에게 보낸 편지, 2. 맨발 가르멜 수사들에게 보낸 편지, 3. 맨발 가르멜 수녀들에게 보낸 편지(약 30여 명의 제자 수녀들). 4. 신학자들과 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약 24명의 신학자, 영성지도 신부 등), 5창립에 협력한 사람들(다양한 사회 계층에 속하는 약 27명).
성녀가 쓴 대부분의 편지에는 여타 다른 영성 작품들과 달리 어떤 가르침을 전하려는 의도가 전혀 묻어나지 않습니다. 다음은 편지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주제들입니다. 1. 성녀가 쓴 편지에는 무엇보다도 일상적인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성녀가 겪었던 질병, 고민했던 개인적 공동체적 문제, 가족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 성녀와 친분을 맺었던 다양한 사람들과의 내밀한 관계 등이 그렇습니다. 2. 우리는 편지를 통해 성녀가 몸담고 살던 당시 스페인을 비롯해 유럽에서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간접적으로 접하게 됩니다. 3. 무엇보다도 편지에는 성녀 데레사의 활동, 특히 창립 활동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게 하는 많은 구체적인 정보들이 있습니다. 4. 또한 편지 중에는 성녀의 생애와 관련된 직접적 자료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습니다.
현실 감각이 동반된 건강한 영성
성녀 데레사의 「서간집」은 우리로 하여금 '영성'에 대한 더욱 균형 잡힌 이해를 도모하게 해줍니다. 영성은 단순히 신비스럽고 추상적인 그 무엇인가를 두루뭉술한 어휘에 담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것이고 구체적 삶이자 역사입니다. 영성은 자신이 터한 삶의 자리, 자신과 맺는 수많은 사람,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풀어나가는 공동 자아실현의 길로서 건강한 인간적 바탕 위에 세워집니다. 그래서 영성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성녀 데레사의 「서간집」은 우리에게 현실 감각을 지닌 올바른 영성이 무엇인지 알려줄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4년 3월 30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0) 성녀 데레사 영성의 바탕인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과연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 탈혼 중에 예수님을 만나는 데레사 성녀. 아빌라에 있는 데레사 생가 색유리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일찍이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분이셨던 폰 발타사르는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라 대답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인류 구원을 향한 그분의 십자가 여정에 동참하는 사람, 바로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배우고 그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기까지 그분 뒤를 따르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신 유일하고 참된 순교자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과 더불어 죽고 부활하는 이,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분의 제자로서 그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 그분을 닮아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순교'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열망했던 최고의 영성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드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선물이라는 의식은 초세기 당시 신자들이 가졌던 보통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이 돼야 할 예수님
그러나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신앙'은 과연 어느 정도 밀도를 갖고 있을까요? 최근 어느 앙케이트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순위는 1건강 2자녀 3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신앙은 신자들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고, 어찌 보면 신앙을 취미생활과 거의 같은 등급에 두고 생활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제가 여기서 굳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가장 기본 바탕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기본이야말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익히 잘 아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제대로 놓여 있지 않을 때 그 위에 세워지게 될 건물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근본 정체성에 충실하고 그 정체성을 완전히 꽃피우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신앙생활이 지향하는 바이고 또 그것이 바로 영성생활입니다. 성인, 성녀들의 삶이 이런 근본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추상적이고 고차원적인 뜬구름 잡는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착각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교회가 가르쳐온 계시 진리를 충실히 믿고 고백했으며 자신들의 인간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온몸을 던져 그 진리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가르치고 고백해 온 모든 계시 진리의 중심에는 계시의 정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교회는 인류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됐으며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그리고 부활을 통해 역사 안에서 실현됐고 궁극적으로는 세말에 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영성 :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전망은 영성생활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세례를 통해 원죄로 부패된 죄인 상태에서 의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이와 동시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됨에 참여하며 그분과 더불어 성부의 공동 상속자로 그 품격이 고양됩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내주(內住)하시며 그와의 인격적 관계를 심화시켜 나가십니다.
이러한 인간의 영적 여정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그분의 공로로 인해 그가 의화됨으로써 시작되며 그가 걸어가는 구체적 여정 또한 참된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하느님과의 합일을 향한 길을 계시하신 그리스도를 뒤따르며 그분을 닮아가는 데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인간 구원과 성화 그리고 영적 여정의 절정인 하느님과의 합일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러므로 영성생활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 계시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켜 가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성'을 자신의 삶 속에서 얼마나 구현해 내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돼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성녀 데레사의 영적 가르침 역시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녀가 일생을 통해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이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켜 갔는가, 또 성녀에게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이며, 어떤 이미지로 다가왔는가, 영적 여정의 발전 단계에서 그리스도는 성녀에게 어떤 역할을 하셨는가 하는 점들이 성녀의 영성을 이해하게 해주는 핵심 주제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리스도'야말로 성녀 데레사의 영성, 그리고 그 영성이 담겨 있는 성녀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열어젖히는 핵심 열쇠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 호부터 여러 회를 할애해서 성녀의 영성을 이해하는 근본 바탕으로서 성녀의 생애와 영성 안에서 그분이 예수님과 맺었던 관계에 대해 조명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성녀 데레사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무엇보다 여러분 또한 그것을 거울삼아 여러분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성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오 복음 16장 15절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과연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단순히 주말에 성당에서 취미생활을 즐기기 위해 마지못해 만나야 할 거추장스러운 분은 아닌가요? 아니면 그저 추상적인 진리이신 분? 아니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3자는 아닙니까?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그분을 여러분들의 삶의 주인이요 내 모든 삶을, 사랑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가장 소중한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평화신문, 2014년 4월 6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1)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①
어린 시절 '주님의 기도'로 예수님과 첫 만남
성경과 교리서만으로도 성인(聖人)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는 우리가 주일 미사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 핵심 중의 핵심을 이룹니다. 신ㆍ구약 성경을 비롯해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가르치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인ㆍ성녀가 되는 데는 사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전해주는 성경 한 권과 그 진리를 풀어서 설명해 주는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이 담긴 교리서 한 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신심 깊은 겸손한 촌부(村夫)가 신학자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 가까이 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세 당시 사회 내에서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 성녀는 부모님 덕분에 글을 깨치고 어려서부터 적지 않은 신심 서적들을 읽고 실천하며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불태워갔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열정이 구체적으로는 강생하신 하느님, 즉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점점 깊어 갔습니다. 성녀 데레사가 성인이 된 것은 이러한 '초심'(初心)에 끝까지 충실했고 그렇게 그분과의 관계를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녀의 일생을 '예수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훑어보는 것은 성녀의 영성을 올바로 이해하게 해주는 틀입니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다
어린 시절 성녀가 처음 만난 대상은 예수님이라는 구체적인 한 인격이라기보다 조금은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추상적인 하느님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데레사가 접한 하느님은 무엇보다 우리를 훨씬 너머 저 세상에 계시며 광대무변하시고 모든 것에 침투해 계시며 전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은 아직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하느님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성녀는 부모님과 미사에 참례하면서 들은 신부님들의 강론과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벗이며 신랑으로서 무엇보다 강생을 통해 우리 곁에 오셨다는 진리를 들어서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하느님 개념을 전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서 배운 묵주기도 드리길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를 즐겨 읊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완덕의 길」 후반부에 보면 주님의 기도 해설이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성녀가 그 기도의 매 구절을 예수님과 연관지어 설명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성녀는 어린 시절부터 묵주기도를 하면서 주님의 기도에 익숙해졌고 이를 통해 그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을 조금씩 맛 들여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데레사는 이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강생하셔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신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 안에 각인시켜 갔습니다. 이렇듯 어린 시절에 아직 자아가 형성되기 전부터 가졌던 하느님에 대한 관념 그리고 주님의 기도를 통한 예수님과의 만남은 훗날 성녀의 영적 성장에 토대가 됐습니다.
예수님과 만나는 여정에서 성녀에게 도움이 된 또 다른 것으로 성모님 신심을 들 수 있습니다. 성녀의 어머니는 성녀가 어렸을 때부터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갖도록 자주 가르쳤습니다. 성모님 신심은 모든 그리스도교 영성에 중심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강생 교리로 인도해 주실 뿐 아니라 사실 강생 교의 자체이십니다. 그분의 '피앗'(fiat: 예)을 통해 오랫동안 인류가 고대해 오던 구세주께서 인간이 돼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느 현대 신학자는, 성모님이야말로 예수님과 관련된 교회의 가르침들을 보호하는 최고 수호자라고까지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은 어린 데레사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해준 좋은 환경이 돼줬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묵주기도, 더 나아가 성모님과 성인들에 대한 깊은 신심, 다양한 성인전에 대한 독서, 16세기 당시 스페인에 널리 퍼져 있던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성화들은 어린 데레사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강생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을 형성하게 해줬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린 데레사는 인간과는 먼 상당히 추상적인 하느님, 심판관이신 하느님에서 인간과 가까이 계신 하느님, 그래서 인간의 육(肉)을 취해 오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서기 시작했습니다.
'겟세마니의 예수님'을 사랑한 소녀 데레사
그러나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세상에 대한 관심, 인간적 애정에 대한 관심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성녀는 그만 냉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태를 극복하게 해준 것은 아버지로 인해 들어가게 된 아우구스티노 수녀원 기숙사에서의 신앙 체험이었습니다. 당시 그곳 사감 수녀님들의 모범적 신앙생활을 보면서 성녀는 점차 어린 시절의 거룩한 열정을 다시 키워가기 시작했고 막연하게나마 수녀가 되겠다는 원의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성녀는 점점 기도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특히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예수님 모습에 깊이 빠졌다고 합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마셔야 할 고통의 잔 앞에서 고뇌하며 피땀을 흘리시는 예수님, 그러나 성부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으며 그 잔을 받아 마신 예수님. 사춘기 소녀 데레사의 마음은 그렇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잦아들어 갔습니다. 성녀는 그렇게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맡긴 채 늘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을 묵상하며 잠들었다고 합니다(자서전 9,4). 그래서 성녀는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예수님의 수난 사화를 읽곤 했습니다(자서전 3,1).
이렇게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성녀에게는 추상적이고 멀리 계시던 하느님이 인격적인 하느님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인간 예수님께서 내면에서부터 자신을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점차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사춘기 소녀 데레사가 관계를 맺기 시작한 하느님은 예수님으로서 그분은 데레사에게서 모든 실존을 건 전인적 응답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당시까지 성녀의 삶에서 예수님이 신앙으로 받아들인 사실로서 객관적인 존재론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제는 체험되는 신앙이자 의미 충만한 신앙으로서 심리적인 차원에서도 성녀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4년 4월 13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2)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②
스무 살 때 그리스도의 정배로 거듭나다
수도성소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
사춘기 소녀 데레사는 아우구스티노 수녀원 기숙사에서 약 1년 반을 지내며 신앙의 열정을 회복했고, 사감 수녀들의 모범을 보며 수녀가 되고 싶은 막연한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병에 걸려 그만 기숙사 생활을 접어야 했고 아버님의 뜻에 따라 살라망카 근교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큰 언니 마리아의 집에서 휴양하게 됩니다. 그 근처에는 성녀의 숙부님이 사셨는데 성녀는 가끔 그곳에 가서 숙부님에게서 신앙과 관련된 유익한 얘기며 숙부님이 귀히 여기던 영성서적들을 뒤적여 보는 걸 낙으로 삼았습니다.
어느 날 그곳 서가를 뒤적이다가 성녀는 「성 예로니모의 서간집」을 읽으며 심금을 울리는 성인의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기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현명한 일인가?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가던 길을 멈춰서야 되겠는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던 데레사에게 수녀가 되겠다는 원의에 부담이 됐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굳센 결의를 다지며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도록 촉구하는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을 들으며 데레사는 그만 정신이 번쩍 뜨였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돼 성녀는 큰 용기를 얻어 아버지께 수녀가 되겠다는 원의를 말씀드리며 수도자로서의 첫걸음을 걷게 됩니다(자서전 3,7).
수도성소를 키우는 힘이 됐던 주님의 수난 묵상
이 사건 이후 성녀의 삶에서 예수님의 현존은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갔습니다. 어린 시절 막연한 추상적 진리이자 머나먼 당신으로 여겨졌던 하느님이 이제 살과 뼈를 가진 분, 즉 예수님 안에서 투영되어 드러났으며 그분이 자신을 원한다는 걸 성녀는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칠 당시 여성으로서 누군가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동시에 온전히 사랑받고 싶었던 원의를 이제 성녀는 사람이 아닌 육화 강생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데레사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아버지는 이내 딸의 수도성소를 반대하고 맙니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수도성소를 키워가는 데 있어 성녀에게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묵상'이었습니다(자서전 3,6). 이 시기를 거치며 성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구체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란 진실을 더욱 깊이 알아들었으며 결국 아버지의 반대에도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성녀는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정배로 받아들이다
이렇게 해서 성녀는 1535년 스무 살에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이때부터 성녀는 온전히 수도생활에 투신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성녀는 자신이 공적으로 발한 수도 서원을 '혼인 서약'으로 생각했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정배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는 점점 더 성녀의 인격 안에 깊이 뿌리내려갔습니다. 한 마디로 성녀는 수도생활을 그리스도와의 결혼생활로 이해하며 살았습니다.
훗날 성녀가 자주 자신의 허물에 대해 얘기하면서 인간적인 우정이 양심의 걸림돌이 되곤 했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성녀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결혼 관계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서 요구되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에 비춰봤을 때 인간적인 우정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영혼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만나다
이 시기에 성녀는 당대의 대표적 영성가 중 한 사람인 오수나 신부의 「제삼 기도 초보」라는 책을 접하게 됩니다. 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던 성녀는 치료를 위해 잠시 수녀원을 나와 베세다스라는 작은 마을에 살며 예전에 도움을 받았던 숙부님 댁에 가끔 들렀고 거기서 바로 그 책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 책은 당시 새로운 영성 운동 가운데 하나인 '거둠 기도' 방법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 영성 교과서였는데, 성녀는 이 책을 보면서 '거둠 기도'를 수련하는 가운데 더욱 깊은 영성 생활을 위한 도약을 하게 됩니다. 성녀는 이 기도를 통해 자기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이미 현존해 계신 그리스도를 감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처럼, 성녀는 그간 자기 바깥에서 주님을 찾아왔는데, 비로소 그분이 이미 자신 안에 거하고 계심을 깨달았으며 그때부터 자기 내면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성녀는 당시 자신의 기도가 어땠는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저는 제 안에 계시는 우리의 보화이시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 안에 현존시키려 애를 썼습니다"(자서전 4,7). 또한 당시 성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자 노력했습니다(자서전 11,9).
가장 힘쓸 바는 주님의 일생을 묵상함
성녀 데레사와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궤적을 따라가며 알 수 있듯이, 성녀가 예수님을 알아가고 사랑했던 데에는 근본적으로 '주님의 생애와 수난에 대한 묵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주제야말로 구원 역사의 정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는 데는 어떤 거창한 지식이나 신묘한 초자연적 체험이 필요치 않습니다. 성성(聖性)을 향한 길은 여러분 가까이, 아니 여러분 안에 이미 씨앗처럼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 이미 살고 계시는 주님을 느끼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 궁구(窮究)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준주성범」 1권 1장 1절의 말씀은 늘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신앙생활의 규범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니, 우리가 진정으로 광명을 받아 깨우칠 마음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생활과 행실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쓸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묵상함이다." [평화신문, 2014년 4월 20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3)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③
완덕, 성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여정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서 갈등
수도서원을 발한 후 중병을 앓았던 젊은 수녀 데레사는 점차 건강을 회복하면서 그간 겪었던 여러 가지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아빌라의 여러 계층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매력적이고 천성적으로 사교적인 데다 사람을 좋아했던 젊은 데레사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우정에 집착했습니다. 당시 성녀는 그렇게 사람들과의 우정에 집착한 나머지 자기 힘만으로는 그런 애정을 깨고 하느님께 온전히 사랑을 드릴 수 없다고 여기며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성녀는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 전인적인 응답을 요청하시는 주님의 신비로운 부르심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내적 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이런 성녀의 내적 고민은,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자신이 수도서원을 통해 맺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결혼으로 보고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배타적, 독점적 사랑을 주님께 드리지 못했다는 데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은 예수님과의 총체적 우정의 관계
그런데 어느 날 성녀는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던 어떤 사람과 만나 대화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첫 번째 현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성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엄한 얼굴로 나타나셔서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당신께 불만스러운 것인지 알려주셨습니다. 나는 육안으로 뵌 것보다도 더 똑똑히 영혼의 눈으로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무섭고 불안해서 다시는 그분과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자서전 7,6). 이 신비 체험 후 젊은 수녀 데레사의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방향이 더욱 확고해져 갔습니다. 성녀는 수도서원이 그 서원을 한 사람을 총체적으로 그리스도와 맺어준다는 진리를 깊이 알아들었습니다. 당시 성녀는 의식 속에서 현시를 통해 아주 분명히 감지했던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했습니다. “그런 대화는 나를 불편하게 한다.” 이렇듯 신심 깊은 영혼들의 신랑이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은 이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녀의 영성에서 더욱 명료해져 갔습니다.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하느님에 대한 추상적 관념 역시 모든 것을 보시는 그리스도, 당신께 모든 애정을 드리지 않아 화가 나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돼 갔습니다.
성녀에게 하느님의 구원은 영혼을 찾아오시는 ‘신랑’이자 ‘벗’으로서 그리스도 모습 아래 드러났습니다. 결국, 성녀는 이 그리스도 현시 체험을 통해 자신이 그분에게서 깊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자서전 7,18). 성녀는 종교가 단순히 어떤 이념이나 윤리 또는 완수해야 할 일련의 규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에 집중돼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신앙이란 예수님과의 총체적 우정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1554년 사순절의 회심
그러나 성녀의 삶에서 주님과의 관계에 더욱 획기적 전기를 마련해준 사건은 그보다 훨씬 이후인 성녀가 40세 되던 1554년 사순절에 있었습니다. 당시 성녀는 수녀원에서 사순절 예식에 사용하기 위해 구해 놓은 예수님 상(像)을 경당에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상처투성이인 예수님을 묘사한 성상(聖像)으로 인류를 위해 숱한 고통을 참아 견디며 밧줄에 묶인 채 채찍질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날 성녀는 이 성상을 바라보며 가슴 밑바닥부터 전율을 느끼고 영혼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녀는 예수님이 당하신 처절한 고통을 바라보며 우리를 향한, 아니 자신을 향한 주님의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을 깨우쳤으며 동시에 그런 사랑에 보답은커녕 그분을 잊은 채 배은망덕하며 살아온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대면했습니다. 그리고는 슬픔에 휩싸여 그 성상 발밑에 엎드려서 하염없이 회심의 눈물을 흘리며 더는 주님의 마음을 상해 드리지 않는 은총을 주십사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습니다. 통상 이 사건을 ‘1554년의 회심’이라 부르는데, 이때 성녀는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기존의 모든 것이 뒤집히는 체험을 하며 주님을 향한 여정에 전기를 맞게 됩니다. 그리고 수도자로 사는 삶에 더욱 철저히 투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는 회심 속에 있는 완덕
성녀의 삶을 따라가며 보게 되는 것 중에 하나는 주님을 향한 성녀의 여정이 강생하신 하느님, 즉 예수님을 끊임없이 알아가는 여정이자 그분을 향한 회심의 연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오로(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의 체험)를 비롯해 성 아우구스티노(밀라노에서 로마 13,13-14에 대한 체험) 같은 분 역시 주님과의 강렬한 만남을 체험하며 일대 회심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 이전과 이후의 여정을 보면 회심은 결코 일회적이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혼신을 다해 진리를 추구했고 진리이신 주님을 만난 후에도 여전히 더욱더 그분의 사랑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세상에 전하려 노력했습니다. 성녀 데레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분의 여정은 어린 시절부터 계속 이어져 왔고 1554년의 회심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이런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을 간파한 니사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에펙타시스’(epektasis)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는 한쪽 발을 디딘 상태에서 다른 쪽 발을 앞으로 내뻗는 자세를 표현한 그리스어로,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3장 12절(“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담고 있는 영성적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신자가 지향하는 ‘완덕’(完德)은 모든 면에서 완전한 성덕을 갖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신앙 여정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영성 생활은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이라고 합니다. 성성을 향한 목표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본성적 이기주의의 성향을 거슬러 오르지 않으면 세파에 밀려 어느새 우리의 삶은 저만치 떠내려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향해 매일 끊임없이 회심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했듯이 우리 또한 매일 우리의 출애굽을 감행해야 합니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4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4)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④
성령, 그리스도와 ‘영적 약혼’의 은혜 중재
예수님을 향한 결정적 회심인 영적 약혼
성녀는 1554년 사순절에 수난하시는 예수님 상을 보며 인류를 향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치고 크게 회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체험 이후에도 성녀가 완전히 회심한 것은 아닙니다. 성녀는 사람을 참 좋아했고 그들과의 우정이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필요하다고 합리화하며 그런 관계에 의존하고 애착했습니다.
그러던 중 1556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녀는 예수회 소속 프라다노스 신부에게 영적 지도를 받으며 이 문제에 대해 논쟁하게 됩니다. 당시 프라다노스 신부는 온전히 하느님께 마음을 두기 위해서는 그간 애착하고 있던 여러 우정을 포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성녀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녀는 우정이 갖는 유익한 점들을 들어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결국, 성녀를 설득하다 지친 프라다노스 신부는 성녀에게 「오소서, 창조주 성령님」 (Veni, Creator Spiritus), 즉 성령송가를 읊으면서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도록 명하게 됩니다. 자신은 이해받지 못했다고 여기며 불만스럽게 경당에 가서 성령송가를 바치던 성녀 데레사, 그런데 성녀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 성녀에게 결정적 회심의 은총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 이전에도 성녀는 여러 번 회심했고 특히 1554년 사순절 회심으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만, 1556년의 이 회심은 성녀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성녀 데레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순간이야말로 성녀가 완전히 하느님께 돌아서게 되는 결정적, 최종적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결정적 역할을 하신 분은 성삼위 가운데 특히 성령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고별사(요한 14,15-31)에서 여러 번 힘주어 가르치셨듯이, 성령께서는 궁극적으로 예수님 말씀과 행적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그분께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성녀에게 영적 약혼의 은혜를 중재해주신 분은 성령이시지만 그 은혜의 내용은 결국, 두 연인이 약혼(約婚)을 통해 서로 사랑을 약속하며 온전히 결합하고 미래를 함께하기 위해 뜻을 모으듯, 그렇게 예수님과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적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영적 약혼의 은혜를 받을 당시 성녀는 내면에서 신비스런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동시에 처음으로 탈혼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또한, 그때부터 성녀는 많은 신비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는 주님께서 당신의 예비 신부가 된 영혼에 잠깐씩이나마 천상 은혜를 맛보게 해주시고, 특히 신랑이신 당신을 엿보는 특은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성녀에 따르면, 이 단계는 6궁방으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영적 여정에서 가장 많은 신비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궁방을 소위 ‘신비체험의 궁방’이라 표현합니다.
신비 현상에 대한 올바른 식별
성녀 데레사는 일생 많은 신비 체험을 했습니다. 영적 약혼의 단계에서 특히 그러했는데 시기적으로 보면 1556년부터 시작해서 영적 결혼의 은총을 받은 1572년까지 집중적으로 이 체험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든지, 탈혼한다든가, 예수님의 모습을 마치 눈으로 보듯이 그렇게 본다든가,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기도 하고, 심장이 사랑의 불화살에 관통되는 체험 등이 이런 신비 체험에 속합니다. 또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비오 성인처럼 오상(五傷)을 받는 것도 이런 체험에 속합니다.
이 기회에 이런 신비 현상이 신앙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잠시나마 짚고 넘어갈까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우리가 사는 자연 본성적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에 기적 같은 현상으로 간주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가운데 자칫 신앙의 본질을 흐려버리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런 신비 현상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자주 신자들을 현혹하는 ‘사적 계시’ 문제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신비 현상과 사적 계시는 서로 다르지만, 사적 계시 또한 신비 현상을 수반하기 때문에 전문가의 식별이 요구됩니다.) 신자들은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 건강한 상식을 지녀야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자신의 신앙생활을 보호할 식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대전제로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할 부분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공적인 계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세말에 가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그 계시가 충만하게 완성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비 현상, 사적 계시, 심지어 성모님 발현까지 포함해서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은 예수님이라는 공적 계시를 부연해 설명해주는 차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계시를 권위 있게 설명하고 가르치는 주체는 지역 교회 내에서는 사도 계승의 직접적 후계자인 주교, 그리고 주교의 교도권을 일정 부분 위임받은 본당 신부입니다. 따라서 신비 현상, 사적 계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에 대한 식별을 교회 교도권의 해석에 맡겨야 하며 신자들은 그 가르침과 해석에 온전히 ‘순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비 현상, 사적 계시와 관련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식별 기준을 바탕으로 그 현상의 진위(眞僞)를 식별해야 합니다: ①신비체험, 사적 계시에 나타난 진리의 내용이 공적 계시에 부합하는가? ②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일치하는가? ③그것이 교도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그리고 그 체험을 한 사람이 교도권에 온전히 순명하는가? ④신비 체험, 사적 계시를 받은 사람이 모든 면에서 정상인가? (통계상 이 현상을 체험한 사람 중에 상당수는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음) ⑤신비 체험, 사적 계시가 참다운 영적 결실을 보게 하는가?
성녀 데레사를 비롯해 수많은 성인은 많은 신비 체험을 했음에도 그것에 전혀 무게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르쳤던 본질적인 것은 예수님, 그리고 교회에 대한 사랑과 순명, 신망애 삼덕 같은 가장 기본적인 지침들이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신앙의 기본기를 잘 연마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평화신문, 2014년 5월 11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5)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⑤
“오늘부터 네가 나의 신부(新婦)가 되리라”
영적 결혼 : 상흔을 간직한 예수님과의 일치
성녀 데레사가 영적 약혼의 은총을 받은 것은 1556년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습니다. 그 후 성녀가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인격적 관계의 완성인 영적 결혼에 이른 것은 16년이 지난 1572년 11월 18일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당시 성녀는 원장으로 봉사하고 있었으며 수도 공동체의 쇄신을 위해 십자가의 성 요한을 영적 지도 신부로 모시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십자가의 성 요한이 수녀원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성녀와 영적 담화를 나눴는데, 성녀는 그날 아침 미사 때 사제가 영하는 대제병을 쪼개 자신에게도 영해 준 게 매우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성인은 그 다음 날 미사 때 그런 것에 애착하지 말라며 대제병 조각 대신 다른 수녀들과 똑같이 소제병을 영해 주었습니다. 잔뜩 기대했던 성녀는 소제병을 영하고 나서 대제병 조각을 받지 못해 실망하면서 시무룩한 상태에서 영성체 후 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녀에게 나타나 상흔이 있는 오른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씀하시며 성녀를 위로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 못을 보아라. 이것은 오늘부터 네가 나의 신부가 되리라는 표시이다. …내 영예는 너의 것이고, 네 영예는 나의 것이다”(영적 보고서 35번). 성녀가 체험한 영성생활의 절정에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성녀는 그때야 비로소 그 예수님을 온전히 자신의 정배로 받아들이고 그분과 사랑으로 일치했습니다.
완덕 :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완성
성녀는 예수님과의 사랑 관계를 설명하면서 남녀 간 사랑의 관계를 표현하는 ‘맞선’, ‘약혼’, ‘결혼’ 같은 상징적 표현들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인격적 관계’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또 하나는 둘 사이의 심오한 관계를 담아낼 수 있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언어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성성(聖性)의 절정은 결코 불교나 힌두교처럼 비인격적인 절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인격적인 분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자 아들이신 하느님 그리고 거룩한 영이신 하느님, 이렇게 세 위격이자 동시에 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랜 불교, 유교 문화권 안에 있는 한국적 심성(心性)은 절대자를 위격적인 분이라기보다는 불교, 유교적인 차원에서 우주적인 절대 진리라고 하는 추상적 실재로 받아들이기 쉬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근본적 차이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두 종교의 신관(神觀)을 함부로 섞어버리면 범신론(汎神論)이라는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고 사랑과 자비, 용서를 베푸는 아버지 하느님이시자 우리 곁에 인간이 되어 오신 아들 하느님, 그리고 우리를 성화함으로써 본래 인간을 위해 영원으로부터 마련하신 계획을 완성하는 성령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각 위격과 더불어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이를 성숙시켜 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부터 교부들을 비롯해 여러 영성가들은 그 관계가 무르익어 완성되어 감에 따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남녀 간 사랑의 관계로 풀어서 설명해 왔습니다. 성녀가 자신의 영적 여정에서 도달한 ‘영적 약혼’과 ‘영적 결혼’ 역시 성녀 데레사만이 유일하게 독창적으로 체험하고 제시한 것은 아닙니다. 교부시대에 오리게네스 교부를 기점으로 니사의 그레고리오, 위 디오니시오를 비롯해 중세의 여러 신비가들(성 베르나르도, 복자 뤼스브뤽,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이 끊임없이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인간 간 사랑의 관계에서 ‘결혼’은 사랑을 완성하는 최상의 표현입니다. 거기에는 두 남녀 사이의 밀도 깊은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한, 두 존재 간의 완전한 일치의 상태가 담겨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의 토착화
교회의 여러 분야에서 소위 한국적 토양 위에 신앙을 토착화해야 한다며 ‘토착화(土着化)’를 화두로 내걸곤 하지만, 가톨릭 교회가 2000년간 목숨을 걸고 지켜온 신앙의 진리들을 변질시키는 토착화는 많은 영혼을 잘못된 진리의 길로 몰아갈 뿐입니다. 토착화는 ①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오는 불변의 신앙 진리들(삼위일체 하느님, 그리스도의 강생, 수난, 죽음, 부활 등)을 바탕으로 ②각 시대와 장소, 민족에게 소통 가능한 적절한 사고의 틀을 통해 그 신앙 진리들을 재해석해서 제시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요소 모두를 분명히 알아야 가능한 작업이며 무엇보다 두 요소 가운데 첫 번째 요소에 무게를 더욱 둬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와 전통이 짧은 한국교회의 경우 신앙의 진리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원천적 자료들(2000년 역사상 전해오는 교회 교도권의 문헌들, 교부 문헌들, 성인들과 신학자들의 작품 원전 등)이 극히 일부밖에 소개되지 못한 상황에서, 어설프게 한국적 사상들을 접목해서 이상한 개념들을 도출하고 거창한 수식어를 달아 표현한 개념들을 토착화 작업이라고 한다면, 필자는 그런 토착화에는 반대입니다. 신앙의 근본 진리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수용이 먼저입니다. 이런 선상에서 저는 성교회가 고백하는 하느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자 인격적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과 대화하고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장(場)이 바로 기도입니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할 때 모든 신앙생활이 뒤틀어지고 맙니다. 그럴듯한 불교 교리를 그리스도교 교리와 혼합하고 선(禪) 수행에 빠져 이상한 수행 방법을 기도에 접목해 그리스도교적 기도도, 선 수행도 아닌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많은 신흥 영성 운동이 범람하는 한국교회의 현 상황에서 늘 경계해야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18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6)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⑥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아들의 인성(人性)에 매료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지난 호까지 성녀 데레사가 일생을 통해 어떻게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를 성숙시켜 갔는지 살펴봤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녀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구체적으로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살펴봐야 할 점은 성녀가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하고 깊은 관계를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예수님 모습에 매료됐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녀가 쓴 주요 작품들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관련해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인성’이란 표현은 신학적인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두 가지 본성(本性)을 일컫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쉽게 말해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그분에 대한 기억을 간직했던 세대가 사라져가고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자 그분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일 뿐 실은 하느님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가 하면, 예수님은 지고지순한 하느님이지 우리처럼 천박한 피조물은 절대 아니라며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神性)만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생겨나 교회에 큰 물의를 빚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문제 때문에 초대 교회는 수백 년 동안 홍역을 앓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은 여러 보편 공의회를 통해 이 문제를 정리하고 ‘신경(信經)’에 담아 불변의 신앙교리로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형태가 소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의 골자(骨子)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과 관련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담겨 있는 고백 중에는 “성부와 한 본체”라는 표현과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성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다”는 말에는 우리와 본질적으로 똑같은 인간이시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시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본성(本性)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는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강생(降生)의 신비, 성부 하느님과 인류를 이어주는 중개자(仲介者)이신 그리스도 인격의 신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중개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이자 동시에 인간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올바른 영성의 기초인 인간 예수님에 대한 사랑
성녀 데레사는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두 가지 본성,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모두를 깊이 사랑했으며, 특히 그분의 인성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영성생활에서 왜 중요할까? 영성생활은 우리가 믿는 바를 실생활로 이어주는 장(場)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영성생활 이전에 선행되는 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잘못된 영성생활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신성만 인정하고 인성은 부인한다든지 그 반대로 인성만 받아들이고 신성을 부인하게 되면 왜곡된 영성생활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믿고 받아들여야 제대로 된 영성생활의 바탕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자명한 신앙생활의 진리를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의혹의 눈길로 바라봤던 사람들이 늘 있어 왔습니다. 성녀 데레사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당시 소위 열심하다는 영성가들 중에는 특히 예수님의 인성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심지어 부인하기까지 하면서 오직 그분의 신성에만 집중해서 그분과 관계를 맺고 기도수련을 하려 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은 순수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성화(聖化) 또는 신화(神化)되는 것은 그런 하느님을 닮아가기 위해 모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자 영혼을 악으로 인도하는 유혹자로 여기며 거부하고 폄하했으며 거기서 유래하는 모든 자연적인 욕구까지도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고 죄악시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영혼이 천상을 향해 진보하는 것은 이 썩어 없어질 헛된 육신에서 벗어나 천사와 같은 순수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역시 그런 부정한 육체를 취하신 인간의 모습은 참된 예수님이 아니라고 여기며 그분의 신성에만 집착했습니다.
성녀 데레사를 영적으로 지도했던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관상기도는 순수 영적인 것이라 기도에 진보하려면 모든 물질적인 형상을 배척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인성도 멀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잘못된 영성지도자들 때문에 한동안 헤매던 성녀는 그것이 뜬구름 잡는 잘못된 기도였다는 걸 깨달으면서 인간이신 그리스도께 돌아와 그분을 많이 사랑해드리고 일상의 삶 속에, 자기 영혼 안에 깊이 현존해계신 인간 예수님과 더 많은 교감을 나누고자 노력했습니다(자서전 22장).
그래서 성녀는 특히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성상, 성화, 상본을 기도생활에서 자주 활용하며 예수님의 모습을 자기 영혼 안에 각인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성부 하느님을 우리에게 계시해주는 분입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 되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성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셨고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시며 함께 음식을 드시고 병자를 치유하셨으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분의 모습은 신약성경에 충만히 소개돼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예수님과의 사랑의 대화이자 교감(交感)이라 한다면 신약성경은 최고의 기도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이신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사랑하고 있습니까? 지금 바로 성경을 펼쳐 그분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4년 5월 25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7)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⑦
예수 강생,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
그리스도 강생에 대한 성녀 데레사의 신심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녀 데레사의 예수님 사랑에는 그분의 인성(人性)에 대한 사랑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특히, 성녀 데레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에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성녀가 20살에 수도생활을 시작해서 약 30년 동안 살았던 가르멜 수녀원은 예수님의 ‘강생’을 기념하며 강생하신 예수님께 봉헌됐다고 해서 통상 ‘강생 수녀원’이라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성녀는 자신이 창립한 17개의 가르멜 수녀원 가운데 첫 번째로 세워진 아빌라의 맨발 가르멜 수녀원에 대해 설명하면서, 앞문에는 요셉 성인이 그리고 뒷문에는 성모님이 수문장으로 계시며 수녀원 안에는 강생하신 예수님께서 늘 현존해 계신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렇듯 성녀 데레사는 강생하신 예수님께 대한 신심이 남달랐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신 근본 이유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고 생각합니까?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2000년 교회 역사상 무수한 성인 성녀, 학자, 교회 어른들은 예수님 강생의 이유를 다양하게 설명하며 그 사건이 간직한 풍요로움을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 강생의 첫째 이유로 드는 것이 원죄(原罪: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죄)와 본죄(本罪: 각 개인이 지은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우리를 건져 올리기 위해서라고 하는 설명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강생에 대한 소극적 차원의 설명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상 적지 않은 교부들, 신학자들은 강생 사건에 담겨 있는 더욱 심오한 차원을 설명하고자 시도해 왔습니다. 중세의 둔스 스코투스 같은 분은, “만일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래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 했는가?” 하고 반문하며 강생의 이유를 오로지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차원에만 국한한다면 더 깊은 강생의 신비를 보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부터의 인류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서 더 원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우리 각자를 위해 실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
그러면 ‘하느님의 계획’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한 계획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 이유이자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기 이전에 영원으로부터 우리 각자를 위한 원대한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온 우주의 창조주이자 주인인 당신과 영원히 인격적인 친교를 나누는 지복(至福)의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합일’이 완전히 실현되는 상태,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궁극적인 삶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만일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를 위해 성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당신의 계획을 충만히 실현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충만히 실현돼 가는 과정을 전통적으로 인간의 ‘성화(聖化)’ 또는 ‘신화(神化)’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강생하신 것은 우리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리는 ‘구원’의 차원뿐만 아니라 천상(天上)을 향해 날아오르는 ‘성화’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처럼 되게 하려 함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충만히 실현하는 그리스도의 강생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느님 계획의 내용인 ‘하느님과의 합일’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인 특징을 갖습니다. 그 자체로 이미 두 인격 사이의 ‘만남’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합일은 인격 상호 간의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동등성(同等性)’을 전제로 합니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인격적 사랑의 합일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개와 사람이 이런 인격적 사랑의 일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합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인 면에서 볼 때 동등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한 절대자이시고 이 피조 세계 전체를 초월하는 영원한 분이지만, 인간은 한 줌 재로 돌아갈 썩어 없어지고 말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동등성’은 인격적인 합일을 언급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인간의 동등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느님과 동등해지기 위해 인간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쥐고 인간 차원으로 내려오실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자 그리스도의 ‘강생’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신 참된 의미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하느님께서 인간 편에까지 내려오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강생 사건은 모든 실재와 피조물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드러난 사건이자 인간의 구원과 성화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당신 자신이 지극히 충실하시다고 하는 진리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의 여정을 통해 이루어가야 할 소명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해될 수 있고, 우리는 그 심오한 신비를 예수님의 강생 사건 안에서 관상할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4년 6월 8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8)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⑧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영적 어린이’
아기 예수님에 대한 성녀 데레사의 신심
우리는 성녀 데레사가 예수님과 맺은 관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성녀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어떤 모습에 매료됐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성녀가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자신의 영성에 어떻게 통합시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녀 데레사의 영성에서 ‘아기 예수님’께 대한 신심은 특히 성녀가 지은 여러 편의 시(詩)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성부여, 당신 독생 성자를 저희에게 주소서. 그분이 오늘 세상에, 가난한 이 농장에 오셨다네.” (시 11번)
성녀는 이런 아기 예수님을 감탄의 눈길로 관상하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으며 그것도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있는 아주 작은 아기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손에 당신 목숨을 내어 맡기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신비와 역설 앞에서 성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되어 오신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손에 달려 있게 된 형국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왕좌에 대해 위협을 느낀 헤로데 왕은 어떻게든 그분을 찾아 죽이려 들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모님 태중에 있을 당시, 요셉 성인의 오해로 성모님과 파혼에 이르렀다면, 태중의 예수님은 성모님과 함께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처참히 돌아가고 마셨을 겁니다. 천상의 가장 높으신 분께서 허무에 불과한 우리들의 육신을 취하시고 우리 손에 당신 목숨을 맡기실 정도로 우리를 신뢰하시고 사랑하셨던 겁니다.
수난을 향한 여정의 출발점인 아기 예수님
그런데 성녀 데레사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신 순간부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향해 계셨다는 점에 대해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시를 통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분이 나면서부터 사람들은 그분을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은 악을 없애며 죽어 가셨습니다. …당신은 이렇듯 아무 죄도 없으신 아기를 보셨나요?” (시 13번)
성녀에 따르면, 예수님의 유아 시절은 그 자체로 독립된 신비가 아니라 ‘수난’을 향해 있는 신비입니다. 이는 성녀가 아기 예수님을 구원 역사의 핵심인 그분의 수난과 긴밀하게 연결 지어 묵상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성녀는 성탄 찬미가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시에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 속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통해 인류를 위해 천상 옥좌를 내던지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으며 동시에 언젠가 이루어질 수난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성녀에게 아기 예수님 모습은 ‘십자가’라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드러내는 출발점인 셈입니다.
영적 어린이 영성의 선구자
사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신학이나 영성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현대로 들어와 아기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성녀 데레사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이자 성녀 데레사의 영적 딸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완덕을 향한 영적 여정에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온전히 신뢰하며 그 품에 안겨 엄마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듯, 그렇게 하느님의 인도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신뢰’와 ‘의탁’을 통해 완덕의 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그분의 영성을 소위 ‘영적 어린이의 길’이라고 하는데, 아기 예수의 데레사는 아기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심에서부터 이 길에 대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성녀 소화 데레사보다 훨씬 이전에 먼저 ‘영적 어린이의 길’을 걸었고 가르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말하는 영성생활의 중반을 지나게 되면 인간이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에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영성생활에 진보할수록 인간이 가져야 하는 이 태도를 전문 용어로는 ‘신적 수동성(神的 受動性)’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용 의자에 앉아 있는 환자는 자기 힘만으로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환자 곁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그 환자의 의자를 밀어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럴 경우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의 어떤 큰 힘에 의해 자신이 인도되도록 동의하고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은총 작용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입니다. 즉,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느님께서 맘껏 사랑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적극적인 사랑에 대해 인간은 ‘수동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온전히 주도권을 쥐고 당신의 성화(聖化) 계획을 이루실 수 있도록 그분께 자기 자유를 내어드리는 유순한 태도를 말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비로소 우리를 위한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성생활의 전체 여정을 인간 영혼의 내면 중심에 현존해 계신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 비유하면서 이를 7개의 궁방으로 나눴습니다. 이 여정에서 4궁방부터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신비적인 단계’라고 하는데 이 단계부터는 하느님이 주도권을 쥐고 인간을 인도합니다. 따라서 4궁방부터는 인간이 온전히 자신에 죽고 하느님께 자신의 주도권을 내어드려야만, 다시 말해 아기 예수의 데레사가 말하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 ‘의탁’, ‘신뢰’가 있어야만 입성(入城)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상의 삶에서 얼마나 하느님께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리며 살고 있습니까? 혹시 자기 생각과 계획으로 꽉 차 있어 그분께서 건네시는 손길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여러분 각자를 향한 그분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그분의 손길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영적 어린이’가 되시길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4년 6월 15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9)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⑨
우리 가운데 거닐던 공생활 자체가 ‘구원사건’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성녀의 각별한 사랑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활동을 보려면 무엇보다도 그분께서 공생활 동안 하셨던 말씀과 행적에 주목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영성생활에서 주님의 인성(人性), 즉 ‘인간’이신 예수님께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공생활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났습니다.
우선, 성녀는 기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했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생애로 가끔 되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야말로 우리에게 온갖 선이 왔고 또 올 테니 말입니다.(자서전 13,13) 성녀에게 주님의 공생활은 이미 그 자체로 ‘구원 사건’입니다. 성녀는 성경을 읽고 강론을 통해 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예수님의 공생활이 갖는 깊은 의미를 알아갔습니다. 성녀는 특히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만나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을 비롯해 당신의 비유 중에 소개된 여러 인물, 예를 들어 막달레나, 사마리아 여인, 마르타, 마리아, 사도들, 돌아온 탕자, 태생 소경 등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각각의 인물이 지닌 의미와 교훈을 자신의 영성생활에 체화시키려 노력했습니다.
성녀는 또 공생활 동안 그리스도께서 하신 수많은 말씀을 기억하며 이를 자신의 여러 작품에 수없이 인용하곤 했습니다. 성녀는 공생활 동안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신 ‘스승(Maestro)’ 예수님의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권능을 통해 사람들이 앓고 있던 영적, 육체적 병을 고치는 가운데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동시에 말씀을 통해 권위 있게 가르치셨습니다. 성녀는 예수님께서 하신 스승으로서의 이 두 가지 모습을 보면서 복음서가 간직한 문자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보다 깊은 의미, 즉 영적 의미들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성녀가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주목한 그분의 각별한 모습 중에는 우리의 흥미를 끄는 대목도 있습니다. 성녀가 살던 16세기는 지극히 남성중심 사회이자 교회였으며 여성에 대한 차별을 넘어서 혐오가 만연하던 시대였습니다. 성녀는 그런 잘못된 시대정신을 거슬러서 여인들의 권리를 옹호했고 공생활 동안 늘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을 사모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여인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특별히 그들을 마음에 두셨던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근거를 찾았습니다. “주님, 세상을 거니셨을 때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여인들에게 호의를 베푸셨고 남자들보다 그 여인들 안에서 더 많은 사랑과 믿음을 발견하셨습니다.”(완덕의 길 4,1)
또한 성녀는 어느 신비체험 중에 예수님에게서 들은 말씀을 다음과 같이 가감 없이 전하기도 했습니다. “학자들과 남자들은 나와 사귈 줄 모른다. 나는 곤궁한 자로 오지만 그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단다. 그래서 내가 쉬고 또 내 것들을 나누기 위해 여인들을 찾아왔다.” 신부님, 수사님들을 비롯해 남자 신자들이 들으면 복장이 터질 일이지만, 교회를 구성하는 신자의 70~80%가 여성인 것을 고려하면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싶습니다.
오늘날에도 현재화되는 예수님의 공생활
성녀의 여러 작품에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언급이 산재해 있습니다. 성녀는 여러 현시 체험을 통해 관상한 주님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 거니시던 분”으로 소개하곤 했습니다. 이렇듯 성녀는 공생활을 통해 우리 가운데 거닐던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그분과 동시대에 함께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고 서운해 하진 않았습니다. 성녀는 자신이 몸담고 사는 이 현재를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예수님과 교감할 수 있는 구원의 순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거니시던 시대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저 웃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안에서 그분을 참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보였기 때문입니다.”(완덕의 길 61,3)
그렇습니다. 성녀가 꿰뚫어보았듯, 예수님의 공생활은 성사(聖事)를 통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연장됩니다. 그래서 성녀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성사들에 호소합니다. 당신께서 거기(성사)에 두신 효능을 발견할 때 싱싱한 믿음이 솟아납니다. 그는 우리의 상처를 외적으로 막을 뿐 아니라 그것을 온통 없애버리는 이 약, 이 효능 있는 향유를 우리에게 남겨 주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이런 현상은 그를 경탄해 마지않게 합니다.”(자서전 19,6)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러 성사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성녀는 2000년 전 역사의 어느 순간에 사셨던 예수님과 오늘을 사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그리스도 사이에서 이 둘을 하나로 이어주는 다리가 성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 공생활을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치부하지 않고 여전히 오늘도 신비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사건으로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녀가 묵상했던 신약성경의 여러 인물은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취해야 할 다양한 태도들을 미리 보여주는 예형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어느 때는 자신을 유다로 느꼈고, 어느 때는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던 사마리아 여인으로, 또 어느 때는 주님 곁에서 그분을 관상하던 라자로의 누이동생인 마리아로 자신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뿜는 광채에 휩싸인 바오로라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성녀는 신약성경의 인물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영적 진보를 위해 자신이 취해야 할 모습이 반영되어 드러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 또한 성녀와 같은 거룩한 원의를 갖는다면 그들을 바라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를 만나러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성숙시키기 위해 우리가 지녀야 할 올바른 태도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4년 6월 22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0)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⑩
“십자가에는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각별한 사랑
성녀 데레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중에서도 특히 그분의 수난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습니다. 성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이야말로 그분 생애의 정점에 있다는 것을 영적인 직감으로 간파했고 일생을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성녀는 강생하신 그리스도가 근본적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는 점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추구해야 할 완덕의 구체적인 모습이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처럼 변모(變貌)하는 데 있다면, 그가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덧입지 못한다면 이러한 성성(聖性)의 목표에는 절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모’라는 이 목표는 그분께서 받으신 수난과의 통교를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성녀 데레사의 영성에서 ‘구원하는 고통의 신비’는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녀가 자신의 여러 작품을 통해 사용한 용어들(고난, 고통, 수난, 십자가, 희생, 수고 등)은 이 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의 최종점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이 절대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녀 데레사 역시 부활을 향한 삶을 지향했지만, 이 현세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께 대한 근본적인 체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아졌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신 안에 이미 기쁨과 부활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는 십자가에 대한 체험을 의미합니다. 즉, 영성생활의 종착점으로서 부활의 영광을 지향해야 하지만 이 영광의 씨앗이 싹트게 하려면 그 보금자리인 십자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녀가 살고자 했고 또 가르친 십자가는 ‘영광스러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녀의 작품에는 십자가를 짊어지며 체험하게 되는 부활을 머금은 수난의 기쁨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음의 시는 그리스도 수난에 대한 성녀의 사랑을 잘 전해줍니다. “그에게 있어 십자가는 생명과 위로의 나무, 그리스도 천상을 향한 감미로운 길이라네.”(시 8번)
인간의 삶을 위해 예형이 되는 주님의 수난
성녀 데레사의 영성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담고 있는 의미는 다양합니다. 우선, 성녀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은 인간의 삶을 위한 예형(例型)이 됩니다. 이 수난의 빛 안에서 우리는 인간 삶에 대한 참된 이해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고통 속에 잠긴 인간의 삶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성찰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주님의 수난은 가장 처참한 고통 속에서도 결코 하느님은 부재(不在)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전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우리에게 힘이 되어 줍니다.
하느님은 결코 하늘 저편 먼 곳에서 팔짱을 끼고 관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삶과 역사의 소용돌이, 무엇보다 우리의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부분까지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친히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성녀는 십자가 수난의 신비를 간직한 그리스도의 인성을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게서 ‘인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역사에서 그분의 수난을 배제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인간적 요소 중 하나인 ‘죄’와 ‘고통’을 배제한 채 인간 구원을 말하는 오류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성녀는 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굳게 뿌리내린 상태에서 영적 여정을 걷도록 가르쳤으며, 그분의 인성이 갖는 가장 특징적인 모습으로 그분의 고통과 십자가를 들었습니다.
이런 선상에서 성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이야말로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감동적인 사건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이제 하느님의 사랑은 만질 수 있고 충만하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렇듯 십자가 위에서 수난하시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사랑을 목말라하며 그를 찾아 주저 없이 천상에서 내려오신 인류의 ‘신랑’이자 ‘사랑하는 임’이십니다. 그래서 성녀는 그런 예수님을 두고 자주 그런 애틋한 호칭으로 부르곤 했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찾아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선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위해 당신 자신을 ‘인간’의 모습 아래 그리고 더 나아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처참한 모습 아래 숨기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미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준주성범」에 나오는 다음의 권고를 귀 기울여 들으며 주님 수난의 신비를 우리 삶 속에 구현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십자가에는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고, 원수의 공격을 막는 방패가 있다. 십자가에는 천상의 아름다운 맛이 스며 있고, 마음의 힘이 있고, 영혼의 즐거움이 있고, 가장 높은 덕이 있고, 완전한 거룩함이 있다. 십자가가 아니면 영혼의 구원도 영생의 희망도 없다. 그러니 너는 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라. 그러면 영생의 길을 갈 것이다.”(준주성범 2권 12장 4절) [평화신문, 2014년 6월 29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1)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⑪
십자가는 온갖 은총 담고 있는 ‘보물창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성녀의 다양한 이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성녀 데레사의 영성과 기도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도 계속 그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성녀 데레사의 이해에는 다양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선 성녀는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주님 수난에 대한 역설적인 부분에 주목하는 가운데 그분의 수난 앞에서 놀라움과 당혹감을 자주 드러냈습니다. 다시 말해 수난하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님 안에서 참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며 신앙을 고백했던 백인대장의 태도(마르 15,39)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습니다.
또한 성녀는 루카 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 신자의 모델이자 우리를 앞서 가는 안내자요 수장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에 주목해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고통의 길 맨 앞에 서서 나아가시는 용맹하신 대장님, 이처럼 헌신적인 벗과 함께라면, 사람은 무엇이든 참아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의지, 우리의 힘이시며 벗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시는 일이 도무지 없습니다. 그분은 진실한 친구이십니다.”(자서전 22,6)
뿐만 아니라 성녀는 요한 복음이 전하는 주님의 수난 가운데 계시되는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서도 주목하며 이를 자신의 영성 안에 담아냈습니다. 성녀는 주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실 때면 언제나 영광스럽게 되신 육신을 통해 나타나신다는 점을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거의 늘 부활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거룩한 대제병에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실 때에도 같았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필요에 따라 어떤 때에는 십자가를 지신 모습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항상 부활하신 몸으로 발현하셨습니다.”(자서전 29,4)
회심의 원동력이 된 주님 수난에 대한 묵상
주님의 수난에 대한 깊은 묵상과 이를 자신의 영성생활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성녀에게는 많은 결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회심’입니다. 주님 수난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 갈수록 성녀는 더욱더 회심의 여정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성녀의 영적 여정에는 성성을 향한 큰 회심이 5번 있었습니다. 그 중 2~4번째 회심은 특히 주님의 수난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르멜 수도 성소를 놓고 고민할 때, 성녀는 인류를 향해 겪으신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며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기로 결심하며 수도 성소를 택하게 됩니다.(2번째 회심) 또한 수도 서원을 발한 후 한동안 기도를 놓았을 정도로 슬럼프에 빠져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 위기 상황을 극복하게 해 준 힘의 원천 역시 주님 수난에 대한 묵상이었습니다.(3번째 회심)
주님 수난에 대한 이해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4번째 회심으로 1554년 어느 축일에 있었던 체험을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성녀는 강생수녀원 경당에 모셔 놓은 기둥에 묶여 채찍질 당하며 피땀을 흘리던 예수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성상을 보며 마음이 산산 조각날 정도로 강렬한 주님 수난과 자비에 대해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상처가 말해 주는 헤아릴 길 없는 사랑에…저는 제 구세주 발밑에 엎드려 폭포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주님의 마음을 상해 드리지 않게 힘을 주십사고 애원하였습니다.” (자서전 9,1) 이렇듯 주님의 수난을 깊이 깨달은 시기들로부터 시작해서 성녀는 주님을 향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수난에 대한 깨달음에서 죄에 대한 자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묵상은 성녀를 죄에 대한 묵상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수난은 성녀가 본 죄의 개념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한 마디로, 인류의 죄, 우리의 죄, 아니 구체적으로는 나의 죄로 인해 주님께서 수난받고 돌아가셨음을 성녀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성녀에 따르면, 죄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좀 더 정확히 말해 그분의 수난을 통해 사랑의 대화를 건네시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선상에서 이제 죄는 기도의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성녀에게 있어서 기도는 “주님과의 우정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해 나가는 장(場)”(자서전 8,5)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그분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것이며 그 관계가 성장하지 못하도록 방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기도하지 않는 것 역시 성녀에게는 죄가 됩니다. 성녀에 따르면, 기도 없이는 절대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죄는 그분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그분으로부터 멀어지는 데 있습니다. 이렇듯 성녀에게 있어서 죄는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서 더 깊은 영성적인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혹여 신앙생활에 안주하거나 나태한 여러분의 모습이 보이거든, 자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온갖 은총을 담고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여러분에게 필요한 은총들을 선사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성녀 데레사처럼 새로운 회심의 여정으로 들어설 수 있는 지름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4년 7월 6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2)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⑫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삶의 상징이자 모델
하느님의 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도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성녀 데레사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지혜에 이르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인류가 지향하는 세속적인 위대함, 지혜, 자기만족과 같은 가치들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잘못된 관념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신앙의 이름으로 만들어 버린 ‘아성(我城)’,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하느님의 뜻을 가져다 포장해버린 잘못된 ‘우상(偶像)’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당시 사람 대부분을 비롯해 심지어 그분을 3년이나 따르며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마저 하느님은 너무 먼 당신으로 비쳤고 천상 옥좌에 좌정하신 하느님이 이 땅에 우리의 육신을 취하고 심지어 우리를 위해 모욕을 당하고, 잊히고, 멸시받는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워하며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는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이 온전히 드러나는 ‘역설(逆說)’입니다.
성녀 데레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관상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려면 주님의 삶, 더 나아가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받아들여 자신의 삶에 통합해야 한다는 신앙의 근본 진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자주 그리스도의 고통을 관상하기 위해 수난하시는 주님께 눈길을 돌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분의 고통이 자기 영혼 안에 새겨지도록 했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수난에 대해 묵상할 것인가?
주님의 수난에 대한 이런 끊임없는 묵상은 성녀로 하여금 이 수난을 특별한 형태로 재현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해 성녀는 「완덕의 길」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어떻게 자신의 기도생활에 적용해서 영적 진보를 위한 밑거름으로 사용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이 수고 중에 있거나 슬픔 가운데 있다면, 기둥에 묶여 수없이 고통받으시는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그분의 육신은 수많은 조각으로 갈가리 찢기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박해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분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분을 부인했습니다. 그분은 벗도 그 누구도 없이 홀로 돌아가십니다. 추위로 꽁꽁 어셨고 깊은 고독 속에 계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그분을 위로해 드릴 수 있습니다. 동산에 계신 그분, 십자가 위에 계신 그분, 또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십시오. 지극한 연민과 눈물이 가득 고인 아름다운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단지 여러분이 그분을 위로해주기 위해 그분과 함께 걷고 고개를 돌려 그분을 바라보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분께선 여러분의 고통을 위로해 주기 위해 당신의 고통일랑 잊어버리실 겁니다”(「완덕의 길」 42,5).
그리스도인의 근본 정체성
성녀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관상을 통해 십자가의 지혜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녀가 바라보고 이해한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할 삶의 상징이자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닮아야 할 근원적 모델이자 뒤따라야 할 모범이 되십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는 성녀가 성성(聖性)을 이루기 위해 했던 모든 수덕적인 노력을 떠받치는 근본 바탕이었습니다. 성녀가 가르치는 수덕(修德)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따르기(Sequela Christi)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녀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인류에게 참된 진리를 가르치시는 스승이시며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계시자이시고 인간의 삶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예형(例型)이시며 더 나아가 십자가의 여정 중에 우리를 동반하며 우리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는 참된 벗이십니다. 그래서 성녀가 간절히 바랐던 것은 “오직 하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하여 사랑의 길을 가느라고 맛 같은 것은 아예 바라지도, 빌지도 않을뿐더러 이승에서는 그런 것을 주시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영혼의 성」 4궁방 2장 10절).
20세기의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 중 한 사람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대답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수많은 개념을 바탕으로 다양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그리스도인의 역할 또한 분화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상 변치 않았던,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변치 않을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그분의 제자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근본 정체성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얼마나 이 신원 의식을 갖고 이를 삶 속에서 구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까? [평화신문, 2014년 7월 20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
(23)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⑬
부활하신 그리스도, 천상에서 누릴 지복 예시
장차 천상에서 누리게 될 지복을 예시하는 주님의 부활
지난 여러 지면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에 대한 성녀 데레사의 신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녀는 주님의 수난에 대한 애틋한 정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애정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부활 안에서 통합돼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이야말로 인류의 모든 죄를 넘어서 하느님의 사랑이 마침내 승리한 결정적 사건입니다. 인류는 이를 통해 구원됐으며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죽음 이후에 누리게 될 영복(永福)을 미리 앞당겨 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야말로 우리 인류가 장차 살게 될 미래의 삶을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성녀 데레사는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잘 알았고, 이 진리 안에서 자신의 영적 여정의 종착점을 보았습니다. 성녀는 1556년 ‘영적 약혼’의 은총을 받은 이후 임종할 때까지 수십 년간 그리스도에 대한 현시 체험을 했습니다. 그 체험에서 성녀가 만난 예수님은 주로 수난의 상흔(傷痕)을 간직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의 몸은 백옥같이 빛나는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광의 주님과의 만남은 성녀로 하여금 장차 천상에서 누리게 될 지복(至福)을 미리 맛보게 함으로써 기쁨으로 충만하게 했습니다. 그 때문에 성녀는 자연스레 탈혼(extasis)에 빠지곤 했습니다.
“임께서 당신 영광과 지존하심을 크나큰 빛 가운데 나타내시려 하실 적이면, 이 환시는 어떻게나 세차고 맹렬한지 어떤 영혼도 만일 하느님께서 자별하신 초자연적 도움으로 황홀경에나 탈혼으로 끌어들이지 않으신다면 도저히 감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자서전」 28,9).
동시에 부활의 주님에 대한 현시 체험은 성녀의 영혼 안에 그분을 더욱더 깊이 각인시키고 동시에 그분에 대한 사랑을 불타오르게 한 촉매제가 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초자연적인 현시를 통한 체험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 영혼 가장 깊은 곳에 거하시는 주님과의 교감을 통해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성녀는 자기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관상하곤 했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진 부활하신 주님과의 교감(交感)은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더욱더 심화시켜 주었고 이는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성녀의 영적 변모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피조물로부터의 이탈을 촉진하는 주님의 부활
부활하셔서 영광을 누리고 계신 예수님에 대한 황홀한 체험은 성녀 데레사로 하여금 덧없이 지나가는 이 세상 피조물들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이탈(離脫)의 정신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을 뵈온 후론, 물, 들판, 꽃, 향내, 음악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들을 볼 때면, 그것을 보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통상 제가 보는 것과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게는 그런 것들 때문에 걸음을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것들은 제게 쓰레기일 뿐입니다”(「영적 보고서」 1,18).
그러나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은 그분의 빛 안에서 피조물들이 지닌 가치를 새롭게 바라보고 끌어안아 더욱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성녀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여타 모든 피조물을 이해하는 기준이 됐습니다. 사도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성녀 역시 모든 피조물이 주님의 영광을 지향하며 그분 안에서 새롭게 통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모든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빛 아래서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선상에서 그리스도 신자는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를 오늘 여기서 새롭게 반복하는 가운데 그분의 부활을 앞당겨 체험하게 됩니다.
여타 그리스도의 신비들을 이해하는 기준인 부활
주님 부활에 대한 성녀의 신심에서 특기할 것은, 공생활을 비롯해 수난 등 주님의 생애와 관련한 신비체험에서 성녀는 언제나 영광스럽게 되신 육신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점입니다. 성녀는 ‘부활’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사건에 다가갔습니다. 복음사가들이 부활 사건에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뒤돌아보며 관상했듯이, 성녀 데레사 역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기점으로 여타 모든 그리스도의 신비(강생, 공생활, 수난, 죽음 등)를 이해했습니다. 이는 곧, 성녀가 그리스도와 맺는 인격적인 관계의 중심에 그분의 부활 사건이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성녀 데레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 여기 살아계시고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런 부활의 예수님은 성녀의 영성 생활에서 상당한 반향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쁘거든 부활하신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어떻게 무덤에서 나오셨는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을 기쁘게 해 줄 겁니다. 더 나아가, 얼마나 한 광채와 아름다움 그리고 위엄을 갖고 개선하셨는지,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상상해 보십시오!”(「완덕의 길」 42,4)
그러므로 우리도 성녀와 함께 우리들의 일상에서 주님 부활의 빛으로 피조물에 대한 이탈의 정신을, 주님을 향한 사랑을, 그리고 장차 천상에서 누리게 될 지복에 대한 희망을 키워나가야 하겠습니다. [평화신문, 2014년 7월 27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4)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⑭
‘천상 신랑’이신 예수님과 사랑으로 일치
예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다양한 상징들
한 사람이 다른 그 누군가와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는 그가 그 사람을 어떤 이미지로 바라보고 인식하는가 하는 점과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고백하는가 하는 것은 내가 그분과 맺고 있는 관계를 드러내는 시금석(試金石)과도 같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당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제자들에게 물어보신 바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이 물음은 2000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심리학의 도움에 힘입어 우리는 부부의 관계가 단순히 연인 관계 이상으로 다양한 관계를 내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엄마나 아빠가 돼 주기도 하며 오빠나 누이가 돼 주기도 합니다. 이런 다양한 관계를 교류하는 부부는 그만큼 풍요로운 인격적 관계를 누리며 이성적 매력이 다하더라도 변함없이 서로를 동반하며 건강한 부부 관계를 이루어갑니다.
하느님과 인간 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음 하느님을 알게 됐을 때 통상 우리는 그분을 단순히 추상적 진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무르익어 가면서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구체적 삶 속에 동반하시는 ‘벗’으로 받아들이며, 그분 말씀을 통해 진리의 길로 나아가면서 그분을 우리의 참된 ‘스승’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또한 이 관계가 무르익어가면서 이제 그분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며, 그분과의 깊은 사랑의 교감을 나누면서는 그분을 나의 ‘정배’로 고백하게 됩니다. 과연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신부되기 프로젝트
성녀 데레사는 예수님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녀는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 ‘스승’, ‘임금님’, ‘심판관’, ‘성자’ 등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과 풍부한 관계를 맺었다는 말입니다. 그중에서 젊은 시절부터 성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는 ‘신랑’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성녀는 자신의 작품 곳곳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신랑이라는 사실을 이미 대전제로 한 상태에서 그 신랑과 우리가 어떻게 더 깊은 사랑의 관계를 엮어갈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구구절절이 가르쳤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향한 성녀의 영적 가르침은 천상 신랑이신 예수님의 품격에 맞갖은 천상 신부 되기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상에서 성녀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영성생활의 궁극 목표가 다름 아닌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사랑으로 깊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목표를 ‘결혼’이라는 인간적인 상징으로 풀어 제시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우리가 누리게 될 일치는 남녀 간에 누리는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일치를 훨씬 초월합니다만, ‘결혼’이라는 비유 이상으로 이런 깊은 일치를 담아낼 수 없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 성녀는 이 비유를 바탕으로 우리가 하느님, 구체적으로는 예수님과 누리게 될 일치를 ‘영적 결혼’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신랑’으로 인식하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신부’라고 하는 인간 존재의 고상한 품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그리고 그분의 신부로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에 대해 성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금실이 좋은 여자는 남편이 근심할 때 슬픈 얼굴을 하고, 남편이 기뻐할 때 자기는 별로 그렇지 않더라도 기쁜 기색을 합니다.… 마음이 기쁘거들랑 부활하신 당신을 우러러보십시오. 무덤을 뛰쳐나오신 그 모습은 상상만 하여도 기쁨이 벅차올 것입니다”(「완덕의 길」 42,4). 이처럼 성녀가 소개하는 ‘천상 신랑’ 예수님과의 사랑의 길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면에서 그분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해주는 지름길입니다.
성적 정체성에 따른 고유한 예수님 사랑
그러나 주님을 ‘신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처한 성(性) 정체성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열심한 여성 신자들은 남성으로 강생하신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 신자들이 남성이신 예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신랑’으로 여기는 것은 인간적인 조건상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남성, 여성 모두에게 존재의 근원이자 목표요 그 어떤 인간적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성적 조건상 남성은 그게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성의 세계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이 본성적인 혜택을 좀 더 누린다고들 합니다.
필자 역시 이 화두를 갖고 많은 고심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남성은 남성이 갖는 고유한 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그 나름의 지름길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영성생활의 목표를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는 것’,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 한다면, 남성으로 강생하셔서 느끼셨을 희로애락, 십자가 길을 걸으며 하셨을 고뇌를 그분과 같은 성을 공유하는 남성은 여성보다 본능적으로 더 직접 느끼고 그분과 동화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은 여성대로, 남성은 남성대로 고유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각자 주님을 향한 사랑의 길에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건은 얼마나 예수님을 내 사랑의 1순위로 받아들이고 관계를 맺는가 하는 점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을 여러분 인생의 가장 소중한 사랑으로 고백하며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평화신문, 2014년 8월 3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5)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⑮
예수 그리스도, 진정한 삶의 길 보여준 스승
예수님을 스승으로 고백하고 따른 성녀 데레사
성녀 데레사가 예수님과 더불어 맺었던 관계는 다양하고 풍요로웠습니다. 성녀는 예수님을 자신의 ‘신랑’으로서만이 아니라 ‘스승(Maestro)’으로 고백하고 따랐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이미 복음서, 특히 마르코 복음서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이 그리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만, 성녀에게 있어서 특이한 점은 이를 자신의 삶 속에서 독특한 영성적 색채로 승화시키고 실제적인 인격적 관계로 풀어냈다는 점입니다. 성녀에게 있어서 ‘스승’이란 말은 인간 예수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호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여정에서 그를 가장 잘 가르치고 인도해주는 참된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녀가 혼신을 기울여 노력했던 기도와 관련해서 보면, 복음서 곳곳에 나오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신자들이 매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할 중요한 가르침일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이 기도 가르침의 대상이자 목적이었습니다. 성녀는 이 점을 자신의 기도에 잘 통합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성녀에게 예수님은 ‘스승’이자 스승께서 가르치는 ‘내용 그 자체’이고 그 내용이 가르치는 ‘궁극적인 지향점’이기도 했습니다.
참된 지혜이신 천상의 스승 예수
무엇보다도 성녀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뿌리를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근본 사실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예수님을 ‘천상의 스승’, ‘지혜의 스승’, ‘신적 스승’이라 부르곤 했습니다. 성녀가 예수님을 스승으로 본 것은 그분이 온 우주 만물의 근원인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분의 인성(人性)을 통해 비로소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의 인간적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늘 인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특징짓는 측면 중에 하나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의 지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부의 영원한 지혜께서 우리를 위해 강생하심으로써 이 시간 안에서 우리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지혜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천상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참된 스승이자 지혜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천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스승’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다고 성녀는 보았습니다.
인류의 스승이신 인간 예수
이렇듯 인간이 되신 영원한 지혜인 예수님은 강생을 통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가르치십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의 인성이야말로 영원한 지혜께서 우리에게 이르기 위해 거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그래서 성녀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지혜는 나자렛 사람 예수 안에서 드러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으로 회자되곤 했습니다. 또한 이런 선상에서 성녀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영성생활을 통해 모든 면에서 닮아 가야 할 모델이자 사랑으로 온전히 일치해야 하는 궁극적인 대상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 행복의 일체이시요 구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성을 일부러 떠나다니, 그게 될 말입니까?… 길잡이, 어지신 예수님을 놓쳐 버릴 때, 바른길을 가늠하지 못하는 법… 주께서는 당신을 길이시라 말씀하십니다”(「영혼의 성」 6궁방 7장 6절). 인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을 즉시 만나게 해 주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요 하느님이신 예수님 안에 뿌리내릴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하느님 체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
성녀가 스승이신 예수님과 그분이 인류에게 전하는 가르침에 대해 말할 때 전제했던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계시’였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다는 의미에서 성녀는 그분을 유일하고 참된 스승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가르침의 내용은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분의 인격 자체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공간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 내면에 빛을 비춰주셔서 계시된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성녀는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 사건인 예수님을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존적인 삶의 차원에서 감지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이 예수님과 사랑으로 하나 되어 가는 과정은 단지 그분이 가르치신 말씀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럴 때 그는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며, 그렇게 영적으로 변화될 때 비로소 그분의 가르침을 충만히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녀가 이르고자 했던 완덕(完德)이란 스승이신 예수께서 가르치셨던 내용, 즉 그리스도의 신비를 머리로만이 아니라 삶을 통해 구현하고 그 신비와 하나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사람을 진리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참된 스승, 큰 어른의 존재가 아쉬운 오늘 한국 사회에서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여러분 인생의 참된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렵니까? 그분이야말로 여러분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보여줄 스승이 되어주실 겁니다. [평화신문, 2014년 8월 10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6)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16)
예수, 인류 구원의 정점이자 은총 세계의 왕
창조 세계와 구원 세계의 왕이신 예수님
성녀 데레사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받아들인 그분의 모습 가운데에는 ‘왕’ 또는 ‘임금님’이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지금이야 사회 체제가 완전히 달라져 중세처럼 절대 권력을 지닌 ‘왕’이라는 칭호가 전설 속의 용어로만 회자되나, 성녀 데레사가 살던 시대의 ‘왕’은 여전히 한 국가의 초석이자 통치의 주체로 국가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성녀는 가톨릭 세계의 수호자이자 맨발 가르멜회 창립의 적극적 후원자인 펠리페 2세로부터 진정한 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적 체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왕의 모습을 읽어내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녀는 ‘창조’와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왕’이란 칭호를 예수님께 부여했습니다. 성녀가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한 것은, 그분이 창조 세계의 왕이자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통치권을 갖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 나의 주님, 나의 임금님! 당신께서 갖추신 그 존엄하심을 나타낼 수 있다면! 당신이 가장 높으신 임금님이시라는 것은 주님 자체에 기인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자서전」 37장 6절).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성녀의 고백에는 일차적으로 그분을 ‘하느님’으로 흠숭했던 성녀의 깊은 신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녀는 구원 역사의 흐름 안에서 예수님이 ‘왕’이심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구원 역사의 정점에 서 계신 분으로 인류를 향한 하느님 계획의 완성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성녀는 예수님을 인류 구원의 정점이자 은총 세계의 ‘왕’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왕’의 모습을 창조 질서에서 드러나는 ‘왕’의 모습보다 훨씬 더 선호했습니다.
이런 개념들을 바탕으로 성녀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품위를 다음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하고 가르쳤습니다.
①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본 왕의 품위: 그분은 하느님이자 창조의 중개자로서 모든 만물의 주인이자 왕이 되십니다.
② 수난의 관점에서 본 영적인 왕의 품위: 예수님은 수난을 통해 성부께 순명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한에서 영적인 왕이 되십니다.
③ 부활의 관점에서 본 영적인 왕의 품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하심으로써 그 대가로 당신과 우리를 위해 부활의 영광을 얻어주셨다는 의미에서 영적인 왕이 되십니다. 죽음에 맞서 승리하신 주님께서는 창조 세계와 구원된 세계, 이 모든 세계의 왕이자 주님이 되십니다.
인간 내면세계의 왕이신 예수님
또한 성녀는 우리 영혼을 ‘성’ 또는 ‘궁궐’로 보고 예수님을 그 궁궐의 왕으로 보았습니다. “더없이 능하시고, 더없이 지혜로우시고, 더없이 깨끗하시고, 더없이 모든 복이 그득하신 임금님이 낙을 가지시는 곳의 그 궁이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게 느껴집니까?”(「영혼의 성」 1궁방 1장 1절). 그분은 영혼 안에 거하시는 가운데 인간을 아름답게 해주시는 당사자이시자 그 중심에서부터 당신을 향해 인간의 모든 능력들을 끌어들이는 분이십니다. 성녀는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내면 왕국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영혼의 집을 바탕으로 우리와 더불어 우정의 대화를 나누고자 하십니다. 이렇게 그분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 곧 기도이자 영성생활입니다. 예수님과의 우정은 인간 편에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분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녀 데레사는 바로 여기서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도움으로써 보상을 받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저는 보수 없이 임금님께 시중드는 헌신적인 용감한 기사를 본받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자서전」 15장 11절). 이렇듯 성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왕이신 그분의 품위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선상에서 성녀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그분의 십자가에 동참함으로써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도록 초대받았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위대하신 임금님의 신부인가 아닌가 이것부터 따집시다. 신부라면, 어느 여자가 그 남편이 당하는 치욕을 같이 당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명예고 불명예고 다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완덕의 길」 19장 2절).
그런데 그리스도의 수난은 부활 사건을 통해 충만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성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에서도 왕이신 그분의 품위를 발견했습니다. 즉, 성녀는 예수님께서 수난의 모욕을 참아 받으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 부활의 영광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을 보며 그분을 왕으로 고백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이미지는 앞서 살펴본 ‘신랑’의 이미지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창조 세계와 은총 세계의 왕이시라고 한다면, 그분을 ‘신랑’으로 모시는 우리는 이러한 그분과의 혼인적 관계 안에서 ‘왕’이신 그분의 품위를 나눠 받습니다. 그분이 왕이시면 우리는 그분의 정배인 ‘왕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곧 ‘왕비’로서의 우리 자신의 고귀한 품위를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은총 질서 안에서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성녀 데레사와 함께 예수님을 우리의 임금님으로 고백하며 우리를 당신의 왕비로 불러주심에 감사드려야겠습니다. [평화신문, 2014년 8월 17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7)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17)
그리스도, 여정의 벗이자 ‘사랑의 심판관’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녀 데레사가 바라본 예수님의 모습 중에는 ‘심판관’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이 모습은 지난주에 살펴본 ‘왕’이신 예수님의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물론 ‘심판관’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 하느님을 정의로운 심판관으로 공경하며 그분의 공평한 심판에 희망을 걸며 역경을 헤쳐 왔습니다. 고대로부터 ‘심판’은 임금이 자신의 통치를 실현하는 모습으로 간주됐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왕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는 과정에서 정의를 세우는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 이러한 하느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타민족에 대한 심판과 관련된 기대감으로 시작됐으며 하느님과의 계약에 불충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개별 인간의 윤리적 차원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세말에 하느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 하느님께서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시고 의인에게는 상급을, 악인에게는 영벌을 주시리라는 종말론적 주제와 깊이 연관되어 발전했습니다. 신약시대로 넘어와 이런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의 중심에는 하느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종말에 이르러 당신이 재림할 때 완전히 실현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재림 때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당신이 심판관으로서 모든 이들을 심판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심판은 다음과 같은 세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① 보상적 차원: 세상 종말에 하느님께서 완전한 정의에 준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말합니다. 즉, 그분은 선한 이들과 악한 이들에게 그에 맞는 정확한 갚음을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② 구별적 차원: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식별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각자가 일생 하느님께 드리던 응답 여하에 따라 스스로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는 말입니다. ③ 계시적 차원: 세상 종말에 하느님의 심판에 이르러 그간 숨겨진 사람들과 사건들의 가치가 분명하게 드러나리라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의 심판관으로 소개한 성녀 데레사
성녀 데레사에게 있어서 심판관이신 그리스도는 멀리 계신 심판관 또는 가까이 계신 심판관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녀는 심판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신 배필과 정담을 나누러 오시는 이 마당에서도 이토록 우러러 뵙기가 두렵거든 우리를 심판하러 오실 그 날에야 어떠하오니까? 자매들이여, 당신이 무섭게 호령하시며,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악마와 그 심부름꾼들을 위해 마련된 영원한 불 속으로 가라’ 하실 때에는 어떠하겠습니까?”(영혼의 성 6궁방 9장 5항). 이렇듯 성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멀리 계시며 동시에 우리 곁에 계신 심판관 예수님에 대해 우리가 지녀야 할 경외심과 신뢰를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성녀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벗이자 신랑으로서 우정을 나누기 위해 인간에게 다가오셨으며 세상 종말에는 우리 각자에게 이러한 당신의 태도에 대한 응답을 요구하실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심판관이십니다. 그러나 그 심판관은 우선적으로 인간이 걸어가야 하는 여정의 벗이자 동료이며 신랑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이런 모습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심판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어떠한 두려움도 일으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신뢰와 기쁨을 갖게 해줍니다. 만일 여기에 두려움이 끼어든다면, 그것은 혹여 사랑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일 뿐입니다. 성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관으로 고백할 때, 거기에는 세속적 심판관에게서 느끼는, 혹여 우리에게 벌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전혀 묻어 있지 않습니다. 성녀는 ‘심판관’이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성녀는 그리스도를 ‘사랑의 심판관’으로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향한 넘치는 하느님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녀에게 있어서 ‘심판’은 어떤 신적 규범과 관련된 인간의 응답에 대한 식별이라는 차원을 넘어,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성녀에 의하면, ‘심판관’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영성생활에서 우리들에게 하느님과의 우정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참된 벗이자 사랑이신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를 손상시키는 행동을 함으로써 그분 마음을 상해드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섬세한 사랑의 두려움을 갖게 해줍니다.
이승의 저녁에 사랑의 심판을 받을 우리들
성녀 데레사와 더불어 16세기의 대표적 신비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승의 저녁에 우리는 사랑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이승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는가, 더 많이 알았는가, 더 많은 업적을 이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더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는가가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가장 작은 자들을 돌보며 그들 안에 현존해 계신 주님을 얼마나 사랑해 드렸습니까? 주님은 그들 가운데서 여러분들의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평화신문, 2014년 8월 31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8) 성녀 데레사의 기도 가르침 ①
기도, 하느님과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
하느님과의 친밀한 우정의 나눔인 기도
성녀 데레사의 영성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기도’입니다. 그만큼 기도는 성녀 영성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녀에게 기도는 ‘성성(聖性)’을 향한 여정 그 자체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기원인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게 해주는 길이자 동시에 인간이 걸어가야 할 궁극적 목적인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루게 해주는 필수 도구입니다.
성녀는 완덕(完德)에 이르기 위해 인간이 걸어야 할 길과 기도의 여정을 동일시했습니다. 다시 말해, 성성에 이르는 길이 다름 아닌 기도의 정상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회심에서부터 성성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거쳐야 할 완덕의 단계들은 ‘기도 안에서’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성녀는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성성의 길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아니면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 수도 없고, 그분을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기도에 충실했는가, 기도를 통해 얼마나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였으며 그분 말씀에 응답했는가가 한 인간의 영적 진보의 정도를 가늠하는 시금석(試金石)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비밀은 성녀가 「자서전」(8,5)에서 전해주는 기도에 대한 정의에 잘 드러납니다. “나는 기도란 자기가 하느님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하느님과 단 둘이서 자주 이야기하면서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 맺음인 기도
성녀 데레사가 몸소 실천했고 우리에게 가르친 기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그 관계를 ‘우정’에 비유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우정’에 비유했을까?
성녀가 자신의 생애와 그 생애 동안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기억하며 쓴 「자서전」 초반부를 보면, 사춘기 시절부터 많은 친구들과 더불어 좋은 우정을 나눴다는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강생 수녀원에 들어간 후에도 훌륭한 인품을 가진 여러 사람들, 그리고 영성적으로나 학적으로 잘 준비된 신부님들과 좋은 영적 우정을 계속 맺었습니다. 성녀는 그런 우정들이 지닌 가치, 긍정적 측면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성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좋은 우정을 맺고 키워나갈 수 있는지를 체험적으로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건강한 인격적 관계를 맺는 측면에서 볼 때 성녀는 이미 본성적으로 준비가 잘 된 여인이었습니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이제 인격적 관계를 맺는 대상이 인간이 아닌 하느님으로 발전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격적인 분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인격적 관계 맺음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분이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며 세 위격 간에 서로 사랑하며 온전히 친교를 나누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세 위격 사이의 사랑이 넘쳐흘러 창조가 이루어졌고, 마침내 그 창조의 정점인 인간이 창조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특별한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란 말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DNA를 전수받아 아버지를 꼭 빼닮듯이, 그렇게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닮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우리 손으로 잡히지 않는 뜬구름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우리와 전혀 상관없이 머나먼 옥좌에 앉아 그저 우리를 관망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사랑스럽게 관심을 갖고 눈여겨보시며 섭리적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역사 안에 함께 동행하면서 그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등 그의 모든 삶의 굽이굽이에 함께하시며 그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그래서 마침내 당신이 약속하신 가나안 복지로 데려다 주시는 역사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시간인 기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분으로 꼽히는 성 토마스는 자신의 명저 「신학대전」 1부 50~55문항에서 다양한 개념들을 바탕으로 창조에 대해 설명한 다음, 마지막에 이렇게 반문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모든 것 중에 창조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개념에 대해 꼽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관계(relatio)’라고 그는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본래 사랑이 충만하신 나머지 그 사랑을 나눌 대상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조건 없이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하느님을 닮았다는 말이고 먼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건네신 그분께 사랑으로 응답해 드릴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존재의 신비를 깨닫게 되고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바로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건네신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듣는 시간이자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씀, 그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는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가 그저 우리가 갖고 싶은 것,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욕망을 실현해달라고 떼만 쓰는 시간이라면, 서낭당에 가서 물 한 그릇 떠놓고 비는 것과 뭐 그리 다르겠습니까?
진정한 기도는 우리를 내신 분을 알고 사랑하고 그 사랑에 응답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4년 9월 7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29) 성녀 데레사의 기도 가르침 ②
“마음의 눈을 뜨고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기도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대가답게 단순하면서도 쉬운 말로 기도가 무엇인지 그 핵심을 정확히 짚어줍니다. 성녀가 여러 작품에서 기도에 대해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녀는 「자서전」 13장 22절에서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추리 작용을 접어두고 구세주 곁에 머뭅시다. 만일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의 벗이 되어 있음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임께 아룁시다. 우리의 애절한 소망을 여쭈고 스스로 낮추며 임과 함께 즐깁시다. 또한 우리는 임 앞에 머물기에 천만부당한 자임을 잊지 맙시다. 영혼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될 때 비록 그것이 묵상의 시초일지라도 거기서 퍽 큰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심 문구는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의 벗이 되어 있음을 바라보도록 합시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지금 사랑 가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계시는데, 그걸 알아차리고 그런 시선을 던지고 계신 그분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행복합니다. 그처럼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최고의 사랑이자 내가 궁극적으로 늘 바라왔고 내 사랑이 영원히 머물, 바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이 지금 나를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을 상상하며 마음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며 결코 우리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십니다. 재롱을 떨며 놀고 있는 아이에게서 한시도 사랑의 눈길을 떼지 못하는 엄마처럼,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행복해하는 연인처럼,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그분을 바라보면 그만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기 위한 이탈의 정신
그런데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자신의 욕구와 필요에만 관심이 있는 영혼은 진심으로 남을 바라볼 줄 모릅니다. 그것은 마치 막달레나에게서 예수님의 무덤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요한과 베드로의 차이와 같습니다(요한 20,1-10).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었던 데 반해, 베드로는 보았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녀 데레사가 말하는 눈길은 사도 요한이 빈 무덤을 보고 믿었던 그 믿음의 눈길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녀 데레사가 말하는 기도는 하느님 아닌 그 이외의 것에서 눈을 떼어 우리의 눈길을 그분에게서 한시도 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녀는 「완덕의 길」 26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따님들이여, 여러분의 님께서는 여러분한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그분 앞에서 온갖 미운 짓 더러운 짓을 다해도 참아주시고 무슨 일이 있어도 여러분을 외면함이 없으시거늘, 밖의 것에서 눈을 떼어 몇 번이나 당신께 눈길을 돌리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도미니코 사비오 성인은 길을 걸을 때면 주위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더라도 절대 쳐다보지 않고 앞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걸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동료 수사가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천상에 가서 주님만을 바라보기 위해 세상 것에 눈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길을 가는데 애인이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여인들의 미모에만 빠져 바라본다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아마 예수님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3분 이상을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언니인 셀리나가 물었을 때, 소화 데레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건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주님의 시선을 마주함
그래서 성녀 데레사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도록” 권했습니다. 나를 바라보고 계신 분, 그리고 당신을 바라보도록 초대하는 분이 누구이신지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계속해서 사랑의 마음으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녀가 말하는 기도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성녀는 그분께 시선을 맞추도록 권고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신부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가 당신을 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당신께 눈길을 돌리는 것뿐, 당신 편에서 우리를 싫어하시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눈길을 주고받으며 교감하고 마음을 열어 정이 통하게 되면, 그분과 나는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일치하기 시작합니다. 그분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갈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것’은 그분을 향해 내 존재를 온전히 여는 것이자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동시에 그분에게 나를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한마디로, 기도는 그분을 바라보면서 삶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그분과 하나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더 진전되면 오히려 말은 사랑의 교감을 방해할 뿐입니다. 말을 멈추고 온 존재로 그분의 현존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그분과 충분히 깊은 교감을 느끼고 가슴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기도,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의 눈길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눈길과 마주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열어 그분과 사랑의 밀어(密語)를 나누시면 됩니다. [평화신문, 2014년 9월 21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30) 성녀 데레사의 기도 가르침 ③
“카리타스 = 하느님과의 우정 = 기도”
초자연적인 사랑이 성장하는 공간인 기도
성녀 데레사가 바라본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성녀는 기도를 “하느님과 단둘이서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자서전」 8,5)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성녀가 말한 ‘우정의 나눔’은 단순한 우정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정을 나누는 대상이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성녀 데레사 시대의 신학에 바탕을 마련해 준 성 토마스는 자신의 대표작인 「신학대전」 2부 2권 23문항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향주덕(믿음ㆍ희망ㆍ사랑) 가운데 하나이자 초자연적인 사랑인 ‘카리타스(caritas)’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으로 소개했습니다. “카리타스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이다.” 그러므로 성녀 데레사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과 성 토마스의 ‘카리타스’에 대한 정의 사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정’, 구체적으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이 바로 그렇습니다. 비록 3세기라는 시대적인 차이가 있지만, 성 토마스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을 초자연적 사랑, 즉 ‘카리타스’라고 정의했고, 그보다 3세기 후에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을 ‘기도’라고 보았습니다. 결국, 이 두 성인의 ‘사랑’과 ‘기도’에 대한 정의에 있어 공통분모인 ‘우정’ 개념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등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카리타스 = 하느님과의 우정 = 기도
하느님의 내리사랑과 인간의 상승적 사랑이 일치하는 장(場)
그런데 이 ‘카리타스’에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조건 없는 내리사랑(‘아가페’)과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영원함, 진리를 향한 상승적 사랑(‘에로스’)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카리타스’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상호 간의 인격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더해, 성 토마스는 둘 사이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더욱 깊이 표현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받아들인 ‘우정’ 개념을 덧붙였습니다.
이제 이러한 성 토마스의 ‘카리타스’에 대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우리는 성녀 데레사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우정의 나눔으로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내리사랑이 드러나고 인간이 간직한 하느님을 향한 신적 열망이 천상을 향해 불타오르는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그분과 사랑의 일치를 실현하는 공간입니다.
사랑의 밀도 차이를 드러내는 기도의 단계
주지하다시피,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에서 우리 영혼의 중심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7개의 방을 거쳐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각 방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결국은 하나의 방에서 좀 더 안쪽의 다른 방으로 갈수록 ‘하느님과 나 사이의 사랑’이 점점 더 깊어져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영혼이 커다란 성이고 그 성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데, 거기에 어떻게 들어가며 또 그 안에 있는 여러 방들은 구체적으로 어느 위치쯤에 있으며, 거기를 어떻게 거쳐야 성 한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고 묻습니다.
성녀가 말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하느님과 나 사이의 사랑의 관계의 밀도를 깊이 있게 해 나가라는 것이지 상징적인 것을 실제로 믿고 따르라는 게 아닙니다. 성 토마스 역시 「신학대전」 2부 2권에서 이 현세에서 천상을 향해 걷는 여정자인 인간이 여정에 진보하기 위해 해야 할 핵심적인 일은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의 관계의 밀도를 깊이 있게 해 나가는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선상에서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됩니다.
다시 말해, 성녀가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1궁방부터 7궁방까지 단계를 나누는 것은 실제로 그런 공간들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 사이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발전되어 가는 밀도의 정도가 그렇게 다르다는 말입니다.
먼저 사랑의 미소를 건네시는 하느님
그러므로 기도는 기본적으로 하느님과 나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우정’, ‘사랑’이라는 틀에서 그 관계를 봐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둘 것은, 이 관계에서 하느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시며 우리는 상대적으로 수동적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이 되셔서 우리 곁에 다가와 말을 건네고 사랑을 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폰 발타사르 같은 현대 신학자는 이러한 하느님의 주도권을 엄마와 아기 사이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는 스스로 미소 짓지 못합니다. 엄마가 먼저 그 아기에게 미소를 건네며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줄 때 그는 비로소 미소 지으며 세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간이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강생하시고 다가와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가운데 참된 사랑을 보여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곁에,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감지하는 일로, 그분께서 먼저 자신을 열어놓고 당신의 숨은 모습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사랑으로 초대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분의 현존을 받아들이며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응답해야 합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사랑의 체험이 없다면 기도는 피상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참선을 하고 단전호흡을 하는 등 별의별 좋은 방법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그건 준비 운동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그럼으로써 그분과 서로 인격적인 교감을 나누는 가운데 관계 속으로 엮여 들어가는 일입니다. [평화신문, 2014년 9월 28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31) 성녀 데레사의 기도 가르침 ④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 그것이 바로 기도”
기도는 주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
데레사 성녀가 가르치는 기도는 무엇보다 주님과 단둘이 머물러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두 연인이 서로만의 사랑의 시간을 나누고 싶어 하며 또 그래야 사랑이 깊어가듯, 하느님과의 사랑이 성장하려면 그분과 따로 단둘이 만나서 서로의 생각과 삶을 나누고 사랑을 전하고 받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해도 지속적으로 만나 대화하고 함께 밥을 먹고 술 한 잔이라도 주고받는 시간이 있어야 우정이 자랍니다. 우정은 생명과 같아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했던 예전의 추억은 있을지 몰라도 더 이상의 생생한 우정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친구 간에 그리고 연인 간에 지속적으로 함께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이 허락되지 않으면 우정과 사랑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이미 23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책에서 우정에 관해 이야기하며 분명히 지적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성숙해 가려면 매일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내야 하고 그 시간에 충실해야 합니다. 데레사 성녀 역시 이 점을 잘 간파했고 그래서 「자서전」(8,9)에서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내가 주님이 나와 함께 머무르시도록 약간의 고요와 시간을 대가로 드렸을 뿐인데 그같이 나를 참아 주셨으니, 그 누군들 신뢰심을 갖지 못할 리 있겠습니까? 더구나 때로는 내 마음을 거슬러 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척 힘든 노력을 치러야 했습니다.”
또한 「자서전」(9,9)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처럼 많은 눈물에 성심이 움직이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더 오랫동안 주님 곁에 머물게 되었고 위험스런 기회를 피하려는 소망이 커 가는 것을 마음에 느꼈습니다.”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영성생활의 고수(高手)가 되는 길
그러므로 기도의 첫걸음은 그분을 삶의 가치 목록에서 제일 첫째 순위에 두고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데 있습니다. 이는 기도의 가장 기본기입니다. 고수가 되는 지름길은 기본기를 잘 다지는 데 있습니다.
영성생활의 바탕은 기도에 있고 기도생활의 바탕은 매일 주님과 머물며 대화하고 사랑하기 위한 시간에 충실한 데 있습니다. 이 작업이 잘 되어야 영성생활에 진보하기 위한 내공이 깊어집니다. 무술의 고수가 되는 사람들의 비결 가운데 하나는 앞차기, 옆차기, 앞지르기 같은 기본 기술과 체력을 끊임없이 연마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야 이단 옆차기, 돌려차기 같은 고급 기술로 나아가는 바탕이 마련됩니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전투처럼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는 가장 쉬운 이 기도의 첫걸음마저 시작하기 어려운 상황이 현실입니다. 무한경쟁 시대 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들, 생존경쟁의 정글로 나갈 준비를 하는 학생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한밤중까지 그런 남편과 자녀들을 돌봐야 하는 주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너무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자칫 삶의 중심을 잃어버린 채 단지 생존 그 자체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근원은 어디에 있는지, 내 삶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지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잠시라도 좋습니다. 매일 일정 시간을 따로 할애해서 그분과 함께하며 여러분의 삶을 나누십시오. 삶의 구체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는 기쁨, 희망, 고통, 슬픔, 좌절, 근심, 죄를 나누고 무엇보다 여러분 존재의 가장 핵심인 사랑을 나누십시오. 그런 시간이 하루, 한 달, 일 년 쌓여갈 때 여러분의 삶은 주님과 함께 어우러지는 구원 역사가 될 것이며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일상 중에 끊임없이 마음 들어 올리기
혹여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가끔 화살기도를 하니까 굳이 기도 시간을 따로 할애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에 가장 우선적인 가치를 두지 않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그분과 만나는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 그 시간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분과의 관계는 결코 발전할 수 없습니다. 소중한 것은 진정 소중하게 다룰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물론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므로 기도시간에 대한 이 원칙을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분과 함께하고자 하는 그 지향을 갖고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기도할 기회는 많습니다. 세월은 변했어도 예나 지금이나 바빴던 것은 매한가지였나 봅니다.
데레사 성녀 역시 많은 수녀원을 창립하면서 바쁜 일상을 보내야 했고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기도문을 만들어 일상 중에 늘 되뇌며 주님과 교감하고자 했습니다.
그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나의 하느님, 나는 당신을 만유 위에 흠숭합니다. ② 제 마음 다해 당신을 사랑합니다. ③ 당신의 지복 안에서 기뻐합니다. ④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으시는 당신을 뵙기 원합니다. ⑤ 당신이 원하시는 것만을 원하게 하소서. ⑥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제게 알려주소서. 그리하면 저 그렇게 하리이다. ⑦ 저와 제가 가진 모든 것은 당신 것이오니, 당신 뜻대로 처분하소서. 아멘.”
여러분 역시 성녀와 함께 매일 이 기도문을 바치며 일상 중에 주님과 교감하시기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4년 10월 12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32) 성녀 데레사의 기도 가르침 ⑤
자신을 통째로 바치겠다는 ‘일대결심’ 촉구
총체적인 삶의 회심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기도
성녀 데레사에게 있어서 기도는 일상적인 삶과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성녀에게는 기도가 곧 삶이요 삶이 곧 기도였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자신을 완전히 투신하는 것이자 철저히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며 궁극적 사랑이신 하느님을 향해 순수한 사랑을 닦아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기도는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철저히 살고자 하는 결기(決氣) 서린 수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녀가 말하는 이 기도를 위해서는 삶 전체가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하는 총체적인 회심이 요구됩니다.
오래 전, 성배(聖杯)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다룬 「인디아나 존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 회심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익히 잘 알려진 영화라 내용에 대한 설명은 거두절미하고 영성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마지막 장면만 살펴보겠습니다.
성배를 찾기 위해 동굴로 들어간 인디아나 존스의 손에는 이 위험한 동굴을 통과할 수 있게 해주는 비결이 담긴 세 개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이렇습니다. “회개하는 자만이 통과하리라.” 주인공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회개하는 자는 주님께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는 무릎을 꿇는다는 답을 얻자마자 첫 번째 동굴에 들어가서 바로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래서 벽에서 갑자기 날아드는 창칼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으로 주인공은 두 번째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손에 갖고 있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 그 뒤를 따르는 자만이 나아가리라.” 주인공은 또 깊이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숨겨진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것을, 그것은 곧 ‘야훼’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째 동굴 바닥에 표시되어 있던 ‘야훼’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알파벳만을 발로 짚으며 갔습니다. 그 알파벳들이 적힌 벽돌 이외의 공간은 천 길 낭떠러지였습니다. 그는 오직 야훼 하느님의 이름에만 의지하며 그 난관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은 세 번째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주인공의 눈앞에는 천 길 낭떠러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곡 건너편 동굴에 성배가 있었습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세 번째 구절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길 - 사자의 머리에서 뛰어내릴 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리라.” 그는 이 구절이 뭔지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도약’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천 길 낭떠러지로 발을 내디디라는 의미였습니다. 뒤에서는 나치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아버지가 있었고 앞은 절벽, 결국 그는 하느님을 믿으며 그 천 길 낭떠러지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순간, 그의 발 앞에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이 다리를 건너 동굴로 들어가서 전설로 내려오는 성혈이 담긴 성배를 찾아 아버지를 구하게 됩니다. 주님을 향해 회심하는 것은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자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에 의지하며 매일 매 순간을 걷는 것이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가운데 천 길 낭떠러지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숨통은 그렇게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트입니다.
자신을 통째로 바치는 헌헌장부의 기상을 지녀야
성녀는 기도를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 가득한 대화로 보았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 존재의 핵심을 관통하는 가장 깊은 정수(精髓)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 존재에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랑의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생의 어느 한순간, 한 번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일생을 통해 매 순간 이 사랑을 지켜내고 키워나가기 위해 목숨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기도로, 완덕으로 불린 사람이 해야 할 수련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완덕의 길」에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면서 기도에 입문한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권고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너무나 많고 아직도 주시는 것이 많은데, 우리가 하찮은 것을 당신께 드리기로 결심할 때 통째로 다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꾸어주는 사람처럼 다시 받을 작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완덕의 길 23,1). 또한 이렇게도 가르쳤습니다. “용기를 내어 힘껏 싸워야 합니다. 무슨 일이 닥쳐오든 뒤로 물러서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마치 싸움터에 나간 사람처럼 자기 목숨을 살리려 하지 않고, 싸움을 하다가 죽지 않으면 다음번에 죽음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위의 책 23,5).
성녀는 소심한 여인들의 모습을 닭이 종종걸음을 걸으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빗대어 지적하면서, 아무리 여인일지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대장부처럼 살 수 있다고 권고하며 헌헌장부와 같은 기상을 갖고 큰 걸음을 걷도록 늘 힘주어 가르쳤습니다. 성녀는 또 이렇게 권했습니다. “이 임금님은 자기를 통째로 바치지 않는 자에게는 당신을 주시지 않습니다”(완덕의 길 16,4). 이 영적 여정에 입문한 사람들은 온전히 하느님을 소유하기 위해, 그분과 온전히 일치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설령 가다가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고 하는 큰 결심이 필요합니다. 성녀는 이를 ‘일대결심(一大決心)’이라 불렀습니다.
여러분 또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죽을 각오를 하고 성성(聖性)을 향해 걷겠다는 일대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향해 발원(發願)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요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찾아 떠나는 이 여정에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 그분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평화신문, 2014년 10월 19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33) 기도와 함께 닦아야 할 덕행 ① 순수한 사랑
순수한 사랑 · 영적 우정 키워야 기도 진보
기도에 동반되어야 할 덕행들
성녀 데레사는 기도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기도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덕행을 닦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진보를 위한 합당한 삶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신덕, 망덕, 애덕의 삶을 소홀히 살아가던 사람이 갑자기 기도를 한다고 잘 될 리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이 제대로 기도에 몰입할 수도 없습니다. 이기적인 사람, 세속에 집착하는 사람, 교만한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한 주제 파악을 제대로 못 한 사람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커다란 진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남의 험담을 일삼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뒤에서 남을 욕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기도하러 성당에 가기 전에 행실부터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기도 그 자체만으로 언급될 수 없고 그에 합당한 덕행이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한 삼각관계
성녀 데레사는 기도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순수한 사랑’을 지녀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기도의 진보를 염려한다면, 그 이전에 먼저 주위 사람들과 어떤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 참된 영적 우정은 ‘너’와 ‘나’ 사이에 언제나 ‘그리스도’의 자리를 준비해 놓습니다. 그리고 ‘너’와 더불어서 함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지향합니다. 따라서 세속에서의 사랑이 오직 ‘너’와 ‘나’만의 배타적인 관계라고 한다면, 영적 세계에서 진정한 ‘영적 우정’은 ‘너’와 ‘나’ 사이에 ‘그리스도’의 자리를 마련하는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함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함께 그리스도를 나누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진정 기도에 뜻을 둔 사람이 지향해야 할 올바른 ‘영적 우정’입니다.
기도의 장애물인 감각적 사랑
성녀는 사랑을 ‘감각적 사랑’과 ‘영신적 사랑’으로 나눴습니다. ‘감각적 사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우선 개인적으로 보면, 그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애착함으로써 주님께 드려야 할 마음의 자리를 빼앗기게 하는 것이 감각적 사랑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사제, 수도자, 평신도는 각자 자신의 신분에 맞는 ‘정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결’은 단순히 육체적인 동정만을 지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이며 지향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정결’은 ‘나누임 없는 마음’, ‘나누임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 누구 때문에 하느님께 가야 할 내 사랑이, 내 마음이 갈라져 있다면 정결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녀 데레사가 경계한 감각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감각적 사랑이 공동체 차원으로 확산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파벌적 사랑일 것입니다. 성녀는 이를 빗대어 ‘유다의 그림자’라고 할 만큼 증오했습니다. 나와 기질이 맞고 코드가 맞고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과만 관계를 맺고 챙겨주는 끼리끼리의 사랑, 그런 ‘이너 서클’에 들지 못한 사람은 소외시키고 배제하고 적수로 돌리고 심지어 없는 말을 만들어내서 모함하고 매장하는 것, 나와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들만이 주도권을 쥐어야 하고 우리 중심으로 공동체가 재편되길 바라는 것, 이 모두가 감각적인 사랑이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표출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녀는 공동체 안에서 이런 질 나쁜 사랑이 커갈수록 서로 불신, 오해, 분열을 조장함으로써 공동체를 파멸시킨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그런 일이 있거든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모두가 다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라며 호되게 야단쳤습니다.
기도의 진보를 돕는 영신적 사랑
이와 달리, 성녀가 권했던 ‘영신적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한 사람만이 아닌 모든 사람을 끌어안는 폭넓은 사랑이자 자신을 넘어서는 이타적인 사랑이고 헌헌장부(軒軒丈夫)의 사랑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진보하는 것을 크게 기뻐합니다. 또한 이 사랑은 사랑하는 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召命)을 실현하길 바라며 그래서 그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그가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자신을 실현하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그가 성인(聖人)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오직 이 일을 위해 혼신을 다해 기도하고 관심을 갖고 도와주고 힘이 되어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영혼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성화를 위해 무엇이 좋은가, 그가 닦는 덕에 무엇이 보탬이 되는가 하는 데 관심을 가지며, 그가 역경 중에 있을 때에는 인내를 갖고 그 상황을 잘 넘어섬으로써 공로를 쌓도록 격려하고 기도로 힘이 되어줍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런 참사랑을 손수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그렇게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사랑하고 함께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영신적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기도생활을 진단하려면 주위 사람들과 나누는 사랑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은 ‘감각적 사랑’과 ‘영신적 사랑’ 둘 중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평화신문, 2014년 10월 26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34) 기도와 함께 닦아야 할 덕행 ② ‘이탈’의 정신
내적 이탈, 성성을 향한 여정의 강력한 원동력
기도를 위한 필수 덕목인 ‘이탈’의 정신
성녀 데레사가 쓴 「완덕의 길」은 자신의 제자 수녀들을 비롯해 당시 많은 신자에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누기 위해서 만든 일종의 ‘기도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펼쳐보면 처음부터 중반에 이르기까지 기도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기도를 제대로 하기 위한 올바른 삶의 준비에 대해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녀는 기도가 삶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기도를 위해 닦아야 할 필수적인 덕목 중에 하나로 ‘이탈’(離脫)의 정신을 들 수 있습니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을 내 삶 안에, 내 마음 안에 받아들이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완덕의 길」 8장 전체를 할애해서 이 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만큼 이탈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기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성녀의 말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이탈…이것만 철저히 지키는 날엔 모든 것은 그 안에 다 있는 것입니다”(「완덕의 길」 8,1). 그보다 조금 뒤에서 성녀는 이렇게 힘주어 가르칩니다. “정을 떼지 않은 자, 건전하지 못한 자로 자처하여야 할 것이니 그는 영신의 자유를 가질 수 없고 오롯한 평화를 지닐 수 없는, 의사가 필요한 사람일 것입니다”(「완덕의 길」 8,3). 또한 성녀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조심을 게을리하여 내 뜻을 끊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 일을 살피지 않으면 별의별 일들이 생겨서 영신의 거룩한 자유를 박탈할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진토와 납덩이의 짐에 눌려 하느님께로 날아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완덕의 길」 10,1).
천상으로 데려갈 영적 날개인 거룩한 자유
성녀 데레사가 말하는 이탈은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뉩니다. ①“어떤 것이든 피조물에게는 우리 자신을 건네지 않는 것”, ②“오직 하느님만을 온전히 끌어안는 것”, ③“우리 자신을 남김없이 전부이신 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천상을 향해 날아가려는 영혼에게 이탈의 덕이 부족한 것은 치명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성(聖性)의 고지에 이르려면 ‘거룩한 자유’가 필요하고 이 자유를 통해 날갯짓해야 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나뭇가지나 봉우리에 앉아 세상이 주는 하찮은 먹이를 받아먹으며 즐기기만 한다면 날갯죽지의 힘도 빠지고 날아야 할 이유도 잊어버려 아예 날려고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경우, 욕구에 집착하는 것은 마치 빨대상어가 배에 들러붙어 있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나아가려 해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또 아무리 가는 실일지라도 새가 실에 묶여 있으면 결코 날아오를 수 없으니 절대 그 어느 것에도 애착하지 말고 매이지도 말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집착하고 매이는 것은 일차적으로 세상 것에, 사람들에게 마음을 뺏긴 내게 탓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세상 어느 것에도 빼앗기지 않도록 늘 마음을 부여잡고 살아야 합니다. 성녀 데레사는 그러기 위해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효과적인 방법을 권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효과적인 방법은 일체가 허무(虛無)요 모든 것이 무상(無常)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덧없는 것에서 정을 떼고, 다함이 없는 것에 정을 두는 일입니다. 이것이 변변치 못한 방법 같을지 몰라도 실천해나가다 보면 영혼을 아주 굳세게 만들 것입니다. 작고 작은 것에라도 행여 정을 붙일까 조심을 하고 힘써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십시오”(「완덕의 길」 10,2).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이탈
성녀 데레사는 이탈을 ‘외적 이탈’과 ‘내적 이탈’로 구분했습니다. ‘외적 이탈’은 제반 사물과 사람들에 대한 포기와 단절을 말하며 마음속까지 완전히 이탈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외면상으로는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성녀는 가르칩니다(「완덕의 길」 13,7). 그러나 이보다 성녀는 근본적으로 영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내적 이탈’을 더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외적 이탈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내적 자세이자 성성을 향한 여정의 강력한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이탈에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탈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가족을 떠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첩첩산중에서 면벽 수행을 한다 한들,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욕심으로부터 떠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수고는 허사일 뿐입니다. 세속의 온갖 허영과 욕심, 사라져 없어질 것들에 대한 애착을 끌어들이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도둑 중에 가장 무서운 도둑이 집안 도둑이며 그것이 자신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봉쇄 수도원에 살아도 그 누구보다 세속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세속 한가운데 살아도 자신으로부터 이탈하고 자신을 넘어선 사람, 주님만을 바라보며 마음의 봉쇄를 지키고 거룩한 자유를 키우는 사람은 성성의 길에서 확실한 도약대를 마련한 사람으로 그는 완덕의 산 정상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천상으로 날아가게 해 줄 영적 날개인 거룩한 자유가 꺾이지 않도록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보호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4년 11월 2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35) 기도와 함께 닦아야 할 덕행 ③ 겸손
겸손, 하느님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비책’
기도를 위한 필수 덕목인 겸손
기도를 위해 성녀 데레사가 꼽은 기본 덕목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성녀가 기도에 나아가고자 하는 이에게 권고한 ‘순수한 사랑’, ‘이탈’을 떠받치는 근본 바탕이 됩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참다운 애덕을 실천할 수 없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진심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하느님의 빛 안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 내 재능, 근본적으로 내 생명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생명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생명을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받았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의 이런 가난한 모습을 바라보고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할 줄 알고, 자신이 부족한 줄 알기 때문에 늘 지혜를 찾아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는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려는 진실한 사랑이 깃듭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진심으로 신뢰할 줄 압니다. 또한 우리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줄 알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 모든 사람 또한 하느님이 주신 선물임을 잘 알기에 애착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영혼 구원과 세상 구원을 위해 선용할 줄 압니다. 그래서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 2부에서 여러 가지 덕에 대해 설명하면서, 덕 중에 가장 큰 덕은 ‘애덕’이지만, 순서상 다른 모든 덕을 낳게 하는 그래서 덕 중에 가장 먼저 시작되는 덕은 ‘겸손’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렇듯 ‘겸손’은 모든 덕을 이끄는 첫 번째 덕이자 그 덕들을 감싸 안는 덕이기에 성덕의 ‘보물 상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비책인 겸손
성녀 데레사는 「완덕의 길」 16장에서 서양장기인 체스를 통해 ‘겸손’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무엇보다 성녀는 우리들의 영성 생활을 장기판에 비유했습니다. 장기판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진영과 여왕을 중심으로 한 진영이 서로 맞붙어 싸우게 되는데, 이는 곧 ‘수덕적인 전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은 하느님을, 여왕은 우리를 뜻합니다. 성녀는 이 전투에서 우리가 왕을 꼼짝 못 하게 만듦으로써 확실히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외통수’가 뭔지 그 비결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비결이란, 하느님과의 싸움에서 그분께 먼저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항복하는 사람에게 항복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께 항복하는 것이 다름 아닌 ‘겸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대항해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비책, 유일한 외통수는 바로 ‘겸손’이라고 성녀는 가르쳤습니다.
목계지덕(木鷄之德)의 지혜
고대 중국의 명저로 꼽히는 「장자」의 ‘달생(達生)’ 편을 보면 ‘목계지덕(木鷄之德)’이란 고사성어가 나옵니다. 옛날 중국의 어느 왕이 투계(鬪鷄: 닭싸움)를 몹시 좋아해서 뛰어난 싸움닭을 갖고 기성자란 당시 최고의 투계 사육사를 찾아가 그 닭을 최고의 투계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열흘이 지난 뒤 왕이 기성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닭이 충분히 싸울 만한가?” 기성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긴 하나 교만해서 아직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 교만을 떨치지 않는 한 최고의 투계라 할 수 없습니다.” 열흘 뒤 왕이 또 묻자 기성자는 다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교만함은 버렸지만 상대방의 소리와 그림자에도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진중함이 있어야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열흘이 지난 뒤 왕이 다시 묻자 그는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조급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그 공격적인 눈초리를 버려야 합니다.” 또 열흘이 지난 뒤 왕이 묻자 그제야 기성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소리를 질러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나무와 같은 목계(木鷄)가 되었습니다. 닭의 덕이 완전해졌기에 이제 다른 닭들은 그 모습만 봐도 도망갈 것입니다.”
목계처럼 완전히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의 능력을 목계지덕을 가졌다고 합니다. 장자가 이 고사에서 말하고자 하는 최고의 투계, 즉 최고의 싸움닭은 목계입니다. 목계가 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 자신이 제일이라는 교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자신이 최고라고 으스대는 사람이 배워야 하는 덕목입니다. 둘째, 남의 소리와 위협에 쉽게 반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쉽게 반응하고 화를 내는 사람이 배워야 하는 덕목입니다. 셋째,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인 눈초리를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 싸우고 경쟁하려고 하는 사람이 배워야 하는 덕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목계는 인간으로 말하자면 완전한 자아실현과 평정심을 이룬 사람의 모습입니다. 완덕(完德)에 이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목계지덕이란 곧 ‘겸손’, ‘유순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겸덕은 오랜 교회의 역사를 통해 많은 영성가들이 성성(聖性)에 이른 확실한 표지 가운데 하나로 꼽는 근본적인 덕입니다.
여러분이 성성의 길에 얼마나 진보했는지 알고 싶습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지 스스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평화신문, 2014년 11월 9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36) 기도의 단계 ①
기도 단계, ‘정원에 물을 주는 네 가지 방식’에 비유
영적 여정의 발전에 따른 다양한 기도 단계
이번 호부터는 성녀가 가르친 기도의 단계들에 대해 나눠볼까 합니다. 무엇보다 성녀는 ‘기도의 여정’과 ‘완덕을 향한 여정’이 서로 같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영적 여정의 단계에 대해 말하곤 했습니다.
성녀에 따르면 인간이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 걷는 여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뉩니다. 전반부는 인간이 덕을 닦고 공로를 쌓아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으로, 성녀의 표현을 빌리면 1궁방에서 3궁방까지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단계라 해서 이 영역을 ‘능동적 단계’ 또는 덕을 닦아 도달할 수 있다고 해서 ‘수덕적 단계’라고 합니다. 반면, 후반부는 인간이 준비는 하되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영역으로, 4궁방부터 7궁방까지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 영역에서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도권을 갖고 은총을 베푸십니다. 이 영역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하느님이 여정을 이끌어 가시기 때문에 ‘수동적 단계’, 또는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에 대한 다양한 신비 체험을 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신비적 단계’라고 부릅니다.
수덕적 단계, 신비적 단계에 상응해서 성녀는 기도의 단계를 제시했는데, 영성생활의 전반부로 수덕적 단계인 1궁방부터 3궁방에 머무는 영혼은 주로 자신의 힘과 노력을 바탕으로 능동적 기도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구송 기도, 추리 묵상 기도, 능동적 거둠 기도가 있습니다.
반면, 영성생활의 후반부인 4궁방에서 7궁방에 머무는 영혼은 하느님 은총에 힘입어 신비적 기도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수동적 거둠 기도, 고요의 기도, 능력들의 수면 기도, 합일의 기도(이 기도는 단순한 합일, 충만한 합일, 변모적 합일로 나뉩니다)가 있습니다.
1~3궁방: 수덕적 기도들
우선, 구송 기도는 이미 만들어진 기도문을 따라가는 가운데 입으로 그 경문을 읊으며 하는 기도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모르는 분들에게는 좋은 안내자가 되는 기도 방법입니다. 구송 기도는 비록 입으로 드리지만, 정신과 마음 역시 드리는 기도의 의미를 되새기며 묵상하는 가운데 해야 제대로 된 기도입니다.
추리 묵상 기도는 영혼의 세 가지 주요 능력인 지성, 기억, 의지를 활용해 신앙의 진리에 대해 성찰하고 추리하기도 하고 복음의 여러 이야기들을 상상해서 그 안에 들어가 예수님과 대화하고 교감을 나누는 기도입니다.
반면, 거둠 기도는 영혼의 주요 능력을 비롯해 오감을 영혼 안으로 거둬들이는 가운데, 많은 말이나 성찰 또는 상상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 현존해 계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고 바라보며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방법입니다.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기도 방법으로 성녀 데레사가 특히 좋아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권했던 효과적인 기도였습니다.
4~7궁방: 신비적 기도들
4궁방부터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신비적 기도들이 시작됩니다. 4궁방에 머무는 영혼은 수동적 거둠 기도, 고요의 기도, 능력들의 수면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5궁방에 머무는 영혼은 단순한 합일의 기도를, 6궁방에 머무는 영혼은 충만한 합일의 기도(이 단계를 ‘영적 약혼’이라 부릅니다)를, 7궁방에 도달한 영혼은 변모적 합일의 기도(이 단계를 ‘영적 결혼’이라 부릅니다)를 하게 됩니다.
신비적 단계에서 하는 기도들과 관련해서 성녀가 사용하는 용어들은 신자 여러분에게 조금은 전문적이고 낯선 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각 기도 단계를 설명하면서 좀 더 자세히 나누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기도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신비적 기도 단계에서는 영혼의 주요 능력인 지성과 기억의 활동이 줄어들게 되어 점점 고요해지고 마침내 잠을 자듯이 거의 정지하다시피 한다 해서 그 능력이 정지하는 정도가 깊어갈수록 수동적 거둠 기도, 고요의 기도, 능력들의 수면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 의지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더욱 더 불타올라 마침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온전히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한다고 해서 신비적 기도의 후반부 전체(5궁방~7궁방)는 합일의 기도로 불립니다.
정원에 물을 주는 네 가지 방식의 비유
성녀는 이러한 기도의 단계를 「자서전」 11~22장에서 ‘정원에 물을 주는 네 가지 방식’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단계가 낮을수록 인간이 기울이는 수고는 많은 데 비해 정원에 줄 수 있는 물의 양은 적으며, 단계가 높을수록 수고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양의 물을 정원에 댈 수 있습니다.
△ 1단계: 우물에서 손수 물을 길어서 대는 방식으로, 구송 기도·추리 묵상 기도·능동적 거둠 기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 2단계: 두레박을 단 도르래를 손잡이로 돌리면서 물을 길어서 대는 방식으로, 수동적 거둠 기도·고요의 기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 3단계: 도랑을 파서 시냇물을 끌어들여 물을 대는 방식으로, 능력들의 수면 기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 4단계: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통해 물을 대는 방식으로 합일의 기도(단순한 합일, 충만한 합일, 변모적 합일)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음 호부터는 각각의 영적 단계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평화신문, 2014년 11월 16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37) 기도의 단계 ② - 구송 기도
구송 기도, 쉽지만 높은 관상의 경지로 인도
관상 기도로 이어주는 구송 기도
성녀 데레사가 초대하는 기도의 여정 가운데 첫 번째 단계이자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기도로 ‘구송 기도(口誦 祈禱)’를 들 수 있습니다. 구송 기도는 말 그대로 입으로 읊으며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교회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일정한 기도문을 만들어 기회 될 때마다 그 기도문을 읊으며 드리도록 하는 기도는 모두 이 기도에 속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드리는 대표적인 구송 기도로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식사 전·후 기도, 묵주기도, 성무일도 등이 있으며 넓은 범주에서 본다면 미사 또한 구송 기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녀 데레사는 잘 드린 구송 기도야말로 수준 높은 기도가 될뿐더러 영혼을 높은 관상의 경지로 인도해주는 최상의 기도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성녀는 각 사람이 지닌 기질, 교육 정도, 영혼의 성숙 정도에 따라 각자에게 더 잘 맞는 기도 방법을 활용해서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갖도록 권했습니다. 특히 성녀는 무학문맹이지만 단순하면서도 쉬운 구송 기도를 통해 높은 관상의 경지까지 도달한 여러 경우를 들어 이 기도를 권했습니다.
성녀 데레사가 가르치는 구송 기도란?
무엇보다 성녀는 구송 기도를 함에 있어서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의식하도록 주문했습니다. 다시 말해, 성녀는 기도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늘 염두에 둬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로 대화 상대자인 하느님의 현존을 가슴 깊이 새기도록 권했습니다(「완덕의 길」 26,1). 성녀는 이 점이야말로 기도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서 기도의 효과는 얼마나 하느님을 기도 안에 현존시키고 거기에 머무는가에 달렸다고 보았습니다.
그다음으로 성녀는 주님 곁에 머물되 그분과 함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성녀는 여기서 무엇보다도 ‘주님을 바라보는 자세’를 핵심으로 꼽았습니다(「완덕의 길」 26,3). 성녀는 이런 근본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가운데 구송 기도를 드리되 묵상을 병행하도록 권했습니다. 이는 곧 구송 기도와 묵상 기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부분으로 결국 성녀는 구송 기도의 묵상 기도화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묵상 기도와 구송 기도의 구별이 입을 다물고 안 다물고 있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입으로 외면서 그 말씀을 다 알아듣고 하느님하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 그것이 곧 묵상 기도이면서 구송 기도인 것입니다”(「완덕의 길」 22,1). 그래서 성녀는 「완덕의 길」에서 구송 기도를 묵상 기도와 함께 묶어서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엄격하게 구송 기도만을 따로 떼어내서 설명하기보다는 묵상 기도의 틀 안에서 구송 기도를 함께 소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완덕의 길」 22,3).
기도는 양(量)의 문제가 아닌 질(質)의 문제
묵주기도는 대표적인 구송 기도 가운데 하나로 평소 신심 깊은 신자들 사이에서는 은연중에 누가 묵주기도를 더 많이 하나 하는 경쟁이 붙곤 합니다. 하루는 어느 시골 본당의 신심 깊은 A할머니께서 하루 종일 묵주알을 굴려 기도를 해서 100단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대단한 할머니셨습니다. 친구 B할머니에게 자신의 기도 능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A할머님은 이내 자신이 하루 만에 100단을 했다며 으스댔답니다. 그런데 웬걸, B할머님은 1,000단을 했다고 맞받아쳤지 뭡니까? 그 비결을 물었더니 묵주알을 굴리며 ‘성모송’을 한 번 읊은 다음에 이어서 성모송을 반복하지 않고 “아까 멩케로”를 9번 연발 날려서 시간을 엄청 단축하면서도 묵주기도를 10배나 많이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얘기를 듣고 있던 C할머님, 가관입니다. C할머님은 가소롭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며 자신은 5000단을 했다고 자랑했답니다. 그 비결을 물으니, 한꺼번에 5개의 묵주를 잡고 B할머님의 “아까 멩케로” 주문을 연발했다고 합니다. 설마, 그럴 리야! 라고들 하시겠지만, 보통의 신자들이 묵주기도에 대해 갖는 의식은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관총을 쏘듯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성모송을 읊으며 묵주알을 굴려서 1단이라도 더 많이 해야 공덕을 더 쌓고 그걸로 은총을 더 많이 받아낼 수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게 묵주기도를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가 반성해 볼 일입니다.
어떻게 묵주기도를 잘 할 것인가?
묵주기도를 빨리, 많이 한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각각의 신비를 묵상하며 그 신비에 대한 묵상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게 묵주기도의 핵심입니다. 50단 했다, 100단 했다고 하는 산술적인 기도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1단을 하더라도 얼마나 깊이 있게 주님 안에 머무르며 각각의 신비가 초대하는 구원 역사의 사건을 묵상하고 주님을 만났는가가 관건입니다. 스님들이 동안거, 하안거라 해서 도를 깨치기 위해 용맹정진하러 몇 달간 선방(禪房)에 들어가면서 책을 궤짝으로 싸들고 가지는 않습니다. 스승으로부터 ‘화두’가 되는 단어 한 글자만 받아서 몇 달을 그것과 목숨을 걸고 씨름해서 깨달음에 이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만나 사랑하는데 한 숨도 쉬지 않고 지껄일 필요는 없습니다.
구송 기도! 짧은 기도문이라도 온 마음을 다해 정성스레 드리면 충분히 깊은 관상 기도에 이를 수 있습니다. 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을 실어서 정성을 다해 천천히 성모송을 드리며 환희의 신비, 빛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 안에 푹 빠져 묵주알을 굴려보십시오. 어느새 기도의 고수가 되어 있는 여러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신문, 2014년 11월 23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57)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1) 주님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스페인 성지 순례를 갈 때 반드시 알아두고 가야할 성녀가 있다. 바로 아빌라의 테레사(Sta. Teresia Iesu de Avila, 축일 10.15)다. 이분은 동명의 소화 테레사와 구별하기 위해 대 테레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맨발의 가르멜회’ 창시자이자, ‘예수의 테레사’로 불려지는 성녀는 사실 ‘대 테레사’라는 이름에 못지않게 교회의 대 성녀이며, 큰 공적을 남긴 분이다.
테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스페인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신심이 두터운 귀족이었는데, 자녀들을 모두 가톨릭 정신에 입각해 교육시켰다. 테레사는 그 영향으로 일곱 살 때부터 네 살 위인 오빠 로드리고와 함께 성인전을 즐겨 읽었다. 이때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을 보고 감동하여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몰래 집을 나간 일도 있었다.
12세 때 어머니를 여읜 테레사는 성모상 앞에 꿇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성모님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했다. 이후 19세에는 성 히에로니무스가가 성녀 바울라와 성녀 에우스토치움에게 보낸 서간을 읽고 마침내 수녀가 될 것을 결심하고 아빌라에 있는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했다.
그녀는 처음에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아 모든 정성을 다해 소임에 임했다. 이 일을 통해 테레사는 말할 수 없는 감미로운 위로를 맛보았으며, 나중에는 자신도 돌보는 환자의 병에 걸렸으면 하고 원하게 될 정도였다.
기도가 허락이 되었음인지 테레사는 병석에 눕게 됐고, 이후 몸이 늘 허약했다. 그녀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었다. 완덕을 열망했던 그녀는 세속화된 수녀원을 바라보며 영적으로도 큰 고통을 받았다.
그러던 중 테레사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하다가 예수께서 매질을 당하시는 모습을 묘사한 상본을 보고, 자신의 냉담한 신앙을 깊이 부끄럽게 여겼다. 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고는 스스로의 영혼이 처한 한심스러운 처지를 깊이 느끼게 된다. 테레사는 이 시점에서 영적으로 크게 변화되게 된다. 고해사제의 명령에 의해 기록된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때까지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후부터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
‘나 자신 안의 예수의 생활’ 이것이 바로 유명한 테레사 신비 생활의 첫 출발점이다. 그녀의 학식은 깊은 것도 아니었지만 ‘영혼의 성’을 비롯한 그녀의 저서들은 지금까지 신비 신학의 기초로서 가톨릭 영성의 위대한 주춧돌이 되고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심오한 신비계의 진리를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그녀가 기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테레사 안에 계신 주님이 스스로 적으신 책이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안으로는 영(마음)을 신비계로 몰입함과 동시에 밖으로는 가르멜회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그 이유로 테레사는 많은 곤경을 겪기도 했지만, 하느님의 뜻은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일이 아니다. 마침내 테레사의 개혁 노력은 빛을 보기 시작했으며 각처에 있는 여자 수도원은 물론 남자 수도원에까지 큰 자극을 주게 된다.
이는 테레사가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느님께선 테레사를 기꺼이 여기사 가끔 신비스러운 일이 그녀에게 일어나도록 허락해주셨다. 그런데 이러한 테레사의 신비 생활은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는 길이 아니고 가시덤불이 가로놓인 험악한 길이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녀에게 여실히 적용됐다. 고행, 겸손, 희생 등은 그녀가 평소에 지닌 십자가였다. 테레사는 그런 십자가를 열애했다. 이는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습니다”라고 한 그녀의 말이나, “테레사의 사랑을 받으려면 그녀를 학대하거나 또는 그녀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다”고 한 아빌라의 주교의 말에 비추어 알 수 있다.
테레사는 극기 수덕의 길을 걷는 도중 1582년 9월 2일, 67세에 중병을 얻어 병석에 눕고, 뒤이어 10월 4일 사랑하는 하늘의 배필을 만나 뵈러 영원한 길을 떠났다. 임종이 임박하자 그녀는 주님과 영원한 일치를 할 기회가 왔음을 즐겨 기뻐하며, 얼굴에 희색을 감출 수 없어 몇 번이나 “주님!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를 거듭 외치고 숨을 거두었다 한다. 1622년에 시성됐으며 1970년 교회박사로 선포되었다. [가톨릭신문, 2010년 11월 28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58)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2) 수많은 고통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하느님
루터가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을 때, 테레사는 6살이었다. 테레사는 이후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라나게 된다. 그런데 그녀도 훗날 교회 개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그녀의 선택은 루터가 선택한 ‘교회 밖에서의 개혁’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의 개혁’이었다. 테레사의 이러한 일이 어떻게 하느님의 형성 신비 안에서 이뤄졌는지 그 섭리의 역사를 들여다 보자.
사람은 기본적으로 내적으로 형성이 잘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미리 형성되도록 심어놓으신 그 어떤 신비를 잘 좇아야 한다. 그럴 때 최종적으로 형성하는 신적 신비 안에서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후에 이웃을 형성시키고, 사회를, 세계를, 우주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형성시킬 수 있다.
성녀의 내면 형성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심 깊은 부모님의 영향 속에서 자라난 그녀는 어린 시절에 성인전을 즐겨 읽는 등 하느님의 은총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기름진 내면을 가꾸어 나갔다. 실제로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성모님을 어머니로 받아들이겠다고 울며 기도할 정도로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영감을 많이 받았고, 그 영감을 자신의 내면에서 소화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형성하는 신적신비께서 아빌라의 테레사의 선형성을 완성시켜 나간 방법은 육체적 고통이었다. 그녀는 몸이 나약해 평생 동안 병마와 싸워야 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병을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건강하고 부유한 것만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병의 고통이 전적으로 악이고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 큰 기둥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인간이 지닌 나약성, 즉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고, 두 번째는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잠재력이다. 테레사 성녀는 이 두 가지의 성향을 정확히 이해하신 분이다.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신 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완벽해 지려고 하고, 늘 완벽한 삶을 꿈꾼다. 하지만 인간이 지닌 나약성과 한계를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야만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 질 수 있고, 진정한 완덕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로부터 힘을 받아서 생활을 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삶이라도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자신의 힘으로만 생활을 하면 언젠가 모든 것이 허무해 지고,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이제 테레사가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해야지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참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때 하느님께서 형성하는 신적신비께서 테레사에게 ‘책’을 연결해 주신다. 그렇게 테레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등을 읽고, 수녀원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수녀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완덕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테레사에게도 첫 번째 시험이 다가온다. 장상 수녀님께서 중병에 걸린 병자들을 간호하는 소임을 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임을 받은 것 자체가 하느님의 큰 은총이었다. 더욱 깊이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성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영원히 풀어야할 숙제가 하나 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나는 어떤 모습이냐?”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지금 나는 돈 좀 벌었다고,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우쭐한 모습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는 겸손한 모습인가.
아빌라의 테레사는 병자들을 간호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해, 또 이 사회에 대해 좀 더 깊이 깨닫게 된다. 당시의 의학 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별다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갔다. 이는 의학이 발달했다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주위에는 의술로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 수없이 많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삶을 원하는 만큼 꽃피우지 못한채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테레사는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환자들의 고통을 통해 테레사는 그 넘어설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이제 진정한 겸손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치유될 수 없는 수많은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면서 진정으로 매달릴 곳은 오직 우주를 형성하고, 세상을 형성하고, 이웃을 형성하고, 나 자신을 형성하는 하느님 한 분 뿐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5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59)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3)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 위해 ‘고통’ 청해
테레사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면서 단순히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이제 자신도 환자들과 같은 병에 걸리고 싶다는 기도를 바치게 된다. 대단히 높은 경지의 갈망이다.
테레사는 “하느님 제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습니다”라고 갈구했다. 그래서 “저도 이 병에 걸려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테레사가 보기에 환자들의 눈빛과 마음은 하느님께 대한 간절한 일치의 갈망을 담고 있었다. 또 하느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이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 환자들과 같은 뜨겁게 달궈진 마음을 갖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병에 걸려서 하느님 당신이 얼마나 귀한 분이신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떻게 그 환자들처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지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갈망은 은총을 불러온다. 은총의 결과가 갈망이기도 하지만, 그 갈망의 은총을 받아들이면 갈망은 더 큰 합치의 은총으로 이어진다.
이제 테레사에게는 그 은총의 첫 단초가 주어진다. 테레사의 영적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회심의 기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소위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다.
첫 번째 터닝 포인트는 성당에서 이뤄진다. 테레사는 기도 중이었다. 그때 테레사는 매질 당하시는 예수님의 상본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는 등 지금까지 해온 몇 가지 사랑 행위들은 그 매질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레사 자신이 이웃에게 베푼 사랑은 인류의 죄를 위해 인간에게 매질 당하는 그 사랑에 비하면 티끌보다도 작은 것이었다. 그 위대한 사랑 앞에서 테레사는 눈물을 펑펑 쏟는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기 위해 더 깊은 기도생활로 들어가게 된다.
두 번째 터닝 포인트는 책을 통해 왔다. 테레사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을 읽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의 참회를 보면서 진정한 감동을 받았으며, 이를 자신의 참회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체험은 테레사의 내면을 더욱더 깊은 형성의 신비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 두 가지 포인트는 바로 테레사 말년에 저술로 드러나는, 신비신학의 태동 기점이 된다.
아마도 이때가 한 30세 정도 되지 않았겠는가 추정된다. 그 열매는 약 17년 후에 나타난다. 47세 때 드디어 개혁 가르멜회인 ‘맨발의 가르멜회’(The Discalced [Barefooted] Carmelites)를 창설한다.
여기서 개혁 가르멜회라고 표현한 것은 기존에 가르멜회가 있었고, 그 가르멜회를 쇄신하고 넘어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레사의 맨발 가르멜회를 알기 위해선 우선 기존 가르멜회에 대해 알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가르멜회(Order of Our Lady of Mountain Carmel)는 계율이 엄격한 관상(觀想)수도회로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1열왕 17-19장)까지 소급된다.
가르멜 수도회의 순수 관상의 정신은 하느님과 직접적이고 내적인 삶의 체험을 무엇보다 선행시키며 중요하게 본다. 그 기원은 이렇다. 가르멜산은 하느님이 인간들을 당신께로 부르시는 산으로 예언자 엘리야가 이 산에서 늘 기도를 올렸다. 가르멜 수도회는 특별한 창설자가 없는데, 엘리야의 모범을 따라 가르멜산에 은수자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가르멜 수도회는 구약을 거쳐 신약에 이르면서 성서를 토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수도회 삶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다 1205년부터 1210년까지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성 알베르토(St. Albertus)에 의해 성 브로카르도(St. Brocardus) 수사에게 공동체 삶을 위한 첫 규칙서가 주어졌다. 이 규칙서는 1247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인준되었다.
하지만 13세기 이후 가르멜 수도회도 한때 규율이 해이되고 쇠퇴해 갔는데, 많은 이들이 초기 정신을 잊고 살기 시작했다. 이때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해 가르멜의 중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개혁된 수도회를 ‘맨발 가르멜회’라고 한다.
테레사는 17개의 수도원을 창설을 하고 저술을 남기는 등 왕성한 활동에 본격 나서게 된다. 오늘날 한국에 있는 가르멜회가 바로 이 테레사 성녀에 의한 ‘맨발 가르멜회’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12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0)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4) 육체적 나약함·고통으로 ‘합치의 신비’ 체험
47세에 수도원 개혁이라는 대장정을 시작한 테레사는 이후 67세까지 살면서 20여년 동안 17개의 남녀수도원을 창설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테레사의 저술 작업도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첫 발걸음은 소박했다. 지도 신부님은 고결한 영혼을 지닌 테레사에게 책 집필을 요청했고, 테레사는 이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체험을 담담히 기록해 나갔다. 그렇게 나온 것이 불후의 명저인 ‘완덕의 길’과 ‘영혼의 성’ 등이다.
이 과정에서도 테레사는 끊임없이 자신의 병과 싸워야 했다. 병은 평생 동안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테레사는 그렇게 병의 고통을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승화시켰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몸에 대해 불평한다. 나약함과 못남에 대해 불평한다. 나는 왜 키가 작을까. 나는 왜 코가 낮을까. 나는 왜 머리가 나쁠까….
자신의 약점이 사실은 장점으로 주어진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해 깨닫지 못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실수를 하시는 분이 아니다. 나를 지금 있는 모습으로 창조해주신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다. 이 깊은 섭리의 신비를 나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테레사는 육체적인 나약함과 이로 인한 질병의 고통을 하느님과의 깊은 합치를 이루는데 좋은 도구로써 사용했다. 이러한 조건들은 나 자신을 완성시키는데 있어서 장애물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내면 형성의 길이다.
이제 테레사의 이러한 내면형성은 상호형성으로 이어진다. 내면이 형성되면 이 형성의 신비는 곧 이웃으로 확장되고 파급된다. 테레사는 환자를 돌보는 행위 자체도 사회적 차원에서 하느님과 합치를 이루는데 도구로써 활용했다. 테레사는 자신의 나약함과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초자연적 생활을 한 것이다. 더 나아가 테레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수도원이라는 상황을 잘 적응해 나가며, 상황 형성을 했고, 이 상황 형성을 바탕으로 무한히 세계적인 차원으로 이해를 넓힘으로써 세계 형성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세계 형성이 바로 오늘날 모든 이들을 영성적 삶으로 이끌어 주는 저술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테레사는 이렇게 보석같은 삶을 살아감으로써 형성하는 신적신비의 뜻을 온전히 실현시킨 분이다.
하느님은 이처럼 육체적으로 나약한 한 인간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큰 그릇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이다. 문제는 그 하느님의 의지와 섭리에 우리가 얼마나 호응하느냐에 있다. 호응한다면 합치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고 불만족하며 건조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교회와 사회가 하느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혼란한 삶을 거듭하던 종교 분열 시기에 태어난 테레사는 탁한 구름과 공해를 깨끗이 벗기고 인간이 누구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하느님 당신께서는 어떤 분이신지를 종합적으로 깨닫고 공명적인 신앙의 삶을 살았다. 이런 분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따르고 배울 삶의 모델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테레사 이후 교회의 모습, 사회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해야할 몫도 크다. 우리는 테레사 성녀를 본받아 하느님 안에 합치하고 그 합치의 힘으로 교회와 사회를 더욱더 초월적으로 변형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러한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느님께 겸손하게 청해야 한다. 우리가 당신의 모상으로서 닮은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진정으로 신비신학의 절정에 이르셨던 분이다. 테레사는 그 체험한 것을 과학적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저술로 남겼다. 만약 테레사 성녀가 신비 체험을 설명하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신비의 언저리 조차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과연 테레사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체험했느냐 하는 문제다. 테레사 성녀의 영혼의 성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성녀가 말한 기도의 단계는 과연 무엇일까. 그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19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1)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5) ‘영혼의 성’에 들기위해 겸손 · 순종의 덕 필요
하느님 신비를 어설프게 설명하다 보면 자칫 단순화 시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특히 지극히 신비스런 내용을 담고 있는 테레사 성녀의 저술들을 쉽게 설명하다 보면 자칫 잘못된 내용을 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가 가진 한계를 감수하고서라도 성녀의 신비 체험을 가능한한 쉽게 설명해 보고자 한다.
테레사 성녀가 말한 ‘영혼의 성’을 보자. 우리는 영혼의 성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성 밖에서 살며 혼란과 번뇌 속에서 산다. 세상과 나를 해석하지도, 하느님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이 먹다 보면 어느때 깨달음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 우리는 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하느님의 품 안에서 쉬고 싶은 것이다.
이 영혼의 성에는 7개의 방이 있다. 소위 말하는 1궁방에서 7궁방까지의 방이 그것이다. 1궁방, 즉 첫 번째 방에는 독충과 벌레들이 득실거린다. 기도를 하려는데 파리가 나타나면 기도가 되겠는가. 성체조배를 하려는데 모기가 팔 위에 앉았다면 조배가 되겠는가. 이렇게 우리는 기도를 하고 하느님을 찾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독충과 벌레가 가득찬 마음으로는 올바른 기도에 정진할 수 없다. 여기서 독충과 벌레는 과거의 삶에서 습관화 되었던 많은 것들을 의미한다. 육신과 정신적인 무의식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어서 기도를 하기 어렵다. 이런 경우 영적 지도가 필요하다. 모기와 파리를 쫓는 방법을 알려줄 스승이 필요하다. 수영을 배우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쉽게 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훌륭한 수영 강사로부터 수영 기법을 배우면 자신감 있게 물 속에 뛰어들 수 있다.
테레사의 기도 9단계에서 이 상태가 바로 구성기도 1단계다. 이 단계에서 지도 방법은 극히 간단하다. 유치원 아이들이나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이 단계에선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칠 수 없다. 그냥 동화책을 많이 읽어 주고, 감성과 지성을 훈련하면 된다. 성당에 처음 온 예비신자에게는 신학적인 논쟁이 필요 없다. 처음에는 그냥 주요 기도문을 외우게 하고, 묵주기도 방법을 알려주고, 성경을 읽게 할 따름이다. 성경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영성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 주어도 알지 못한다.
자 이제 2궁방으로 넘어가 보자. 이 방에는 큰 독충이나 큰 벌레는 없다. 하지만 작은 독충과 작은 벌레들이 아직 남아 있다. 기도 덕분에 큰 벌레는 없어졌지만 아직 작은 벌레들은 남아 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갈등의 시기다. 기도를 하다보면 무릎이 아플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는 것 같지도 않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괜히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머리 아프게 살지 말고 옛날로 돌아가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살고 싶을 수도 있다. 듣기는 듣되 말할 수 없고, 알기는 하되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단계가 바로 이 단계다.
3궁방으로 들어가면 작은 벌레도 이제 어느 정도 제거 되어 있다. 마음의 평정이 어느 정도 이뤄진 상태다. 대죄는 모두 사라지고 아주 작은 소죄만이 남겨지게 된다. 그런데 과거에는 대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소죄 조차도 이제는 크게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소죄마저도 없애려 노력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희생을 바치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이를 위해 봉사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권태기도 이때 찾아온다. 어느 정도 육신적 정신적으로 활동적인 노력은 했지만, 비례적으로 영적인 성장 노력은 부족해 영적 진보가 이뤄지지 않다보니 지치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득도 별로 없어 보이고, 영적 성장을 위한 노력 자체가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3궁방까지 설명한 이 글을 읽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실제로 수행을 하다 보면 3궁방까지 들어가는데 1년이 걸릴 수도 있고, 3년이 걸릴 수도,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많은 신자들이 이 단계에서 더 이상의 영적 성장을 포기하게 된다. 열심한 마음으로 본당 사목회와 교회내 각종 단체들에서 봉사하다가, 지치게 되면 더 이상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주저앉게 된다. 여기에서 제일 필요로 하는 덕이 겸손의 덕과 순종의 덕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높은 가치를 보지 못하게 된다. 영혼이 메마르게 되면서 4궁방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된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는데….
4궁방이 여러분 앞에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4궁방은 어떤 모습일까.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26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2)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6) “하느님과의 맞선 자리에 초대합니다”
본당 사목회를 비롯해 각종 교회내 단체에서 봉사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열성적으로 일한다. 이들은 대부분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이들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 그냥 머무른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주어진 교회 직책은 그런대로 수행할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장님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 수 있다.
테레사 성녀가 말한 3궁방을 넘어, 4궁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4궁방에선 초자연적 기도가 가능해진다. 3궁방까지 지성과 이성과 기억, 인간적 의지를 가지고 기도를 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초자연적인 기도가 가능해진다. 여기서 초자연적 기도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는 은총의 신비를 바탕으로 하는 기도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의 노력으로 왔지만, 이젠 그 한계를 넘어설 때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능동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수동적 차원의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3궁방까지는 나 자신이 노력을 해서 물을 길어먹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직접 물통을 들고 수고스럽게 수 킬로미터 떨어진 우물까지 가서 물을 길어서 먹었다. 하지만 4궁방에서는 집까지 연결된 수돗물에 입만 대면 된다. 조금 다른 비유로 들자면,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젖과 비슷한 분유를 먹었다면, 이제는 직접 어머니의 가슴에 입을 대고 젖을 빨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수돗물이나 어머니의 젖이 그리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단계다. 그래서 일부는 직접 물을 길어도 마시고, 분유도 함께 먹어야 한다.
진정한 하느님과의 합치는 5궁방에서 구현된다. 이 단계에 대해 테레사 성녀는 기막힌 비유를 들었다. 하느님과 맞선을 보는 단계라는 것이다. 그동안 전화 통화만 하고, 글만 주고 받았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직접 보는 단계다. 그분을 직접 보게 되니 더욱 매력이 넘치는 분이다. 지금까지 느꼈던 사랑의 감정은 직접 얼굴을 보면서 한층 더 불타오르게 된다. 불교적 표현을 빌리자면 이 단계는 ‘일시적’ 해탈의 단계로 볼 수 있다.
맞선은 직접 만나는 것이다. 정식미팅(meeting, blind date)이다. 일반적으로 미팅을 할 때 우리는 처음에 정신적인 차원에서 한다. 어디 사느냐고 묻고,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묻고, 아버지는 무엇을 하는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파악한다. 이렇게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끝나고 마음이 끌리면 그 다음에는 정감어린 대화를 시작한다. 그렇게 정감으로 끌리고 나면 우리는 의지적으로 앞에 있는 미팅 대상자를 진정으로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A도 만나고 B, C, D 등 많은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A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B와 C, D를 만나는 시간을 줄이고 주로 A와 많이 만나게 된다. 온전히 A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게 된다. 지금까지 1~4궁방까지는 소위 펜팔과 전화 통화의 단계였다. 그 과정을 통해 상대방이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많은 좋은 것을 줬는데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따질때가 많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얼굴을 맞대고 정식으로 맞선을 보니, 그동안 상대방이 이야기 했던 것을 잘 알아들을 수 있다.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마음을 모두 열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중요한 문제가 있다. 맞선을 볼 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부모님과 함께 나간다. 앞에 있는 상대가 마음에 든다고 해도, 분별이 필요하다. 그 분별을 해 주는 분이 부모님이다. 여기서 부모님은 바로 영적 지도자다. 5궁방에서는 초자연적 기도 단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형성하는 신적 신비께서 주시는 여러 은총에 대해 잘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약함을 지니고 있고, 그 결과 잘못된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거짓된 환상을 보고 진정한 체험으로 착각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환시와 환청을 하느님의 계시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맞선에 나선 여성은 나이가 어리기에 자칫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부모님이 옆에 있어서 네가 선택한 A가 정말 바른 사람이다 라고 분별을 해 주어야만 딸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사기 결혼하는 사람(악마)은 나이어린 젊은 여성(영적 초심자)을 쉽게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삶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부모님까지 속이긴 힘들다. 부모님은 얼굴만 보고서도 “저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해 줄 수 있다. 물론 부모님의 판단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 지도를 받을 때 올바른 결혼을 할 확률은 높아진다.
자! 이제 맞선이 훌륭히 끝나면 무엇을 하는가. 약혼을 한다. 약혼 뒤에는 결혼을 한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2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3)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7) “영혼의 성에서 제2의 그리스도 삶을 살다”
5궁방에서 하느님과의 맞선 후,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면 의외의 현상이 찾아온다. 고통이 찾아온다. 당신 얼굴을 뵈옵는 그 환희의 신비 뒤에 고통의 신비가 따라온다. 그 고통의 신비를 뛰어 넘어야,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이라는 영광의 신비, 빛의 신비가 가능해 진다.
1∼4궁방까지도 물론 고통이 있었다. 희생과 봉사의 고통이 있었다. 하지만 5궁방에서의 고통은 그 차원이 다르다. 여기서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느끼시는 고통이다. 그 고통을 고스란히 내가 느낀다.
이 단계에서 만나는 또 다른 변화는 정신적 차원이 약해지고 영적인 차원이 강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진복팔단의 신비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 이제 과거의 독충과 벌레들이 빠져나가고 당신께서 주시는 것, 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다 보니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진리를 ‘오오!’하고 무릎을 탁 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그 밑바닥까지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사실 3궁방까지는 언제든지 다시 원래 있었던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태다. 하지만 5궁방에 들어오면 조금 안심을 할 수 있다. 한때 신앙에 심취했다는 사람도 3궁방 수준에 머물면 언제든지 다시 냉담할 수 있다. 5궁방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는 든든한 영혼을 갖추게 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전인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 다음, 6궁방으로 들어서게 되면 우리는 점차 약해지고 하느님이 강해진다. 주도권은 이제 하느님께 넘어간다. 나는 더 이상 말할 것이 별로 없다. 당신께서 주시는 것이 얼마나 좋고 신비스로운지 나는 다만 가만히 응시하고 만끽할 뿐이다. 세계를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이 6궁방의 신비를 체험하면 참으로 강해진다. 당신이 이끄시는 힘이 얼마나 센지,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합쳐도 당신의 힘에는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주위 사람들의 모함과 공격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게 된다. 하늘에서부터 오는 진정한 행복에 푹 빠져 있기 때문에, 모든 당신 가르침에 순응하고 순명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가르침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모함 때문에 목숨을 잃게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전혀 흔들림이 없게 된다. 순교자들이 목숨까지도 쉽게 내 놓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체험 때문이다. 이 6궁방에서 느끼는 행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일반적인 행복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제 하느님이 눈 앞에 늘 아른거린다. 결혼 초창기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옆에 없어도 늘 보이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군대에 가면, 여인의 마음은 애인과 군대에서 함께 훈련을 받는다. 사랑하는 남편이 직장에 가면 아내의 마음은 늘 남편과 함께 있다. 이렇게 이제는 하느님이 그냥 보이고, 그분이 계속 옆에서 말씀해 주신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 가지 놀라운 체험을 한다. 이곳에서 설명하기가 조금 조심스럽긴 하지만, 바로 죽음에 대한 원의다. 죽음을 원하게 된다. 하느님을 빨리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지복직관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 7궁방에 들어가면 이런 체험도 없어진다. 죽고 싶지 않고 더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하느님과 완전히 합치된 상태다. 단지 영(마음)으로만 하느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몸과 지성으로 완벽하게 하느님을 느낀다. 눈과 귀가 영적인 눈, 영혼의 귀가 된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적인 몸으로 음식을 섭취한다.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잠기게 된다. 나는 완전히 초월의 삶을 살게 된다. 과거의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 묶여있던 내가 하느님 능력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상태로 변화된다. 이 같은 영혼의 성 각 궁방을 테레사 성녀가 말한 기도 7단계로 나눠 보면, 구성 기도(1궁방)와 추리적 묵상(2궁방), 정감의 기도(3궁방), 단순함의 기도(4궁방), 일치의 기도(5궁방), 순응일치의 기도(6궁방), 완전히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변형 일치의 기도(7궁방)가 된다.
7궁방 변형 일치의 기도는 완전히 없어지는 무(無)이지만 동시에 초월(超越)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하느님을 닮은 제 2의 그리스도로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9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1)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생각하면 「가난」이 자연스럽게 우리 머리에 떠오르듯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를 언급하게되면 즉시 「기도」가 연상된다. 실로 아빌라의 데레사는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는 심오한 기도 체험과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완벽한 묘사 등으로 학계 뿐 아니라 교도권으로부터 기도신학의 탁월한 권위자로 인정되었고 「교회의 박사」로 선언된 분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데레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기도생활의 큰 귀감으며 출중한 스승이다. 기도할 줄 안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인 동시에 인간 협력의 결실이다. 따라서 「기도의 사람」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면서 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데레사는 어떻게 기도의 사람이 되었을까? 먼저 그녀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생애
데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아버지 알론소 산체스와 어머니 베아트리스 사이에서 열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신앙심 깊은 어머니로부터 기도를 배웠고 좋은 성모신심을 물려받았다. 데레사는 당시 귀족 자녀들이 하던 대로 아주 어릴때부터 읽기를 배웠다. 그녀는 형제들과 함께 성인전을 읽었고 그것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특히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 중엔 가슴 설레곤 하였다. 데레사가 겨우 일곱살 때 오빠 로드리고와 함께 순교의 열망 때문에 구걸하면서 무어인의 나라를 찾아나선 일이 있었다.
데레사는 나이가 좀 들면서 그녀의 마음에 어렸을 때부터 싹터오던 하느님게 대한 절대적 사랑의 소망이 점점 사라지고 어머니의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기사 소설을 읽는데 열중하였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몸단장하기에 바빴고 한편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멋진 기사가 나타나기를 꿈꾸었으며 「아빌라의 기사」라는 제목으로 서설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한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아버지 알론소는 그녀를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에 맡겨 그 연인으로부터 격리시켰다. 그 수도원에서 근 일년간 살면서 영원한 행복에 대한 소망이 싹트는 것을 느꼈으나 수도생활의 소명을 의식하진 못했다. 그녀는 중병에 걸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그녀의 나이 열 여덟 되던 1532년이었다. 그러나 1535년 11월 2일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생활을 선택하여 강생의 갈멜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이로써 데레사는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데레사의 기도생활의 발전에 중요 계기를 이루 누것은 숙부로부터 받은 한 권의 책을 읽게 되면서였다. 그 책은 오수나 수사가 쓴 묵상방법론 「초보의 제 삼부」였다. 오수나의 묵상 방법에 따라 열심히 잠심하였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신비체험을 하였다. 하느님은 그녀의 마음 속 깊이 그분의 현존을 느끼게 하시어 그분께 대한 사랑에 그녀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도록 이끌어 주셨다.
데레사는 수도원 응접실에서 소임을 하던 중 그녀의 아름다움과 기지있는 말솜씨에 매료된 귀족 한사람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인간적 욕구 사이에 헤매면서도 수도회 규칙을 충실히 준수하고 있으므로 수도생활의 본질적 조건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녀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과 세속을 향한 인간적 마음의 갈등 속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그러면서 약 일년 동안(1543~1544) 묵상기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내적인 싸움 중에 그녀의 고백 대로 「약」을 찾으면서 많은 영적 서적들을 읽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영적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고백록」을 읽는 순간 나는 내 이야기가 씌여진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나는 이 영예로운 성인에게 나를 도와주십사고 부탁했습니다』거의 같은 시기에 다른 하나의 사건이 그녀의 회심을 마무리짓도록 했다. 그것은 기도실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녀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영혼의 밑바닥부터 뒤흔들리는 듯한 강렬하고 경건한 열정을 느끼면서 한편 격심한 슬픔에 짓눌리면서 회환(悔恨)의 눈물을 금할 길 없었던 것이다.
충격적인 이 두 사건은 데레사를 그녀의 생애의 3단계로 들어서도록 하였다. 그녀의 영적 향상의 출발점은 이 두 사건을 통해 자신의 비참함을 마음속으로부터 자각한 데 있었다. 그녀는 묵상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한편 그녀는 여전히 세속적인 우정을 보존하고 있었기에 고독은 아직 불완전한 것이었고 또한 그녀가 받은 신비적 은혜에 대한 분별문제로 고민해야 했다. 그녀가 자신의 영적 상태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알기 위해서 충고를 얻으려고 결심했다. 교회의 가르침에 자신의 체험을 비추어보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식별력 있는 사제들을 찾아 고해성사를 보고 영적 상담을 하였다. 일부 사제들은 신비적인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적절히 조언해 주지 못했다. 그러나 세티나 디에고, 프라다노스 요한 등 예수회 신부들은 그녀 안에 성령이 활동하고 계심을 보증하면서 용기를 주었다.
데레사가 비약하는 데에 장애엿던 마지막 끈은 그녀의 회심으로부터 일년 이상이 지난 1556년 성령강림대축일에 끊기게 되었다. 『오소서 성령이여…』를 읊으면서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프라다노스 신부의 권고에 따라 묵상기도 후 그 시도를 시작하자 그녀는 탈혼 상태에 빠지면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이 최초로 경험한 탈혼이었다. 데레사는 이 체험으로 드디어 마지막 신비적 단계에 들어서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마흔 하나였다 .1559년 6월 29일 그녀는 최초로 그리스도를 보는 지적환시의 은혜를 받았다. 그후 그녀는 거듭 환시를 체험하면서 그리스도를 보았다., 내적으로 더욱 굳세어지고 불타는 듯한 하느님의 사랑에 싸여 이제는 그녀의 남은 평판 같은 것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1560년 4월 그녀가 신비적 상태에 있을 때 심장의 「상처」라 표현하는 은혜를 받았다. 즉 천사의 화살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는 듯한 체험이 몇 차례나 거듭 일어났던 것이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영적인 고통이었는데 육체도 어느 정도로 그리고 때로는 심한 정도로 아픔을 느꼈다. 이러한 특별한 표징은 가끔 여러 사람들 앞에서도 일어나곤 했는데 박해자들은 그녀가 심한 통증을 느끼는 것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여 그 빌미로 더욱 그녀를 괴롭혓다.
1560년 9월 어느날 데레사가 몇 명의 친구들과 대화하던 중 알칸타라의 베드로 수사가 개혁한 맨발의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생활 방법을 모방하여 가르멜의 원시 회칙을 지키는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자는 하나의 제안을 받았는데 그것이 그녀의 마음에 크게 와 닿았다. 그녀가 더 엄격한 생활을 소망해 오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 후 개혁 수도회 창립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데레사는 주변의 많은 반대와 큰 장애들로 인해 곤경을 겪었지만 불굴의 용기로 그것을 극복하여 결국 1567년 2월 가르멜회 총장 잔 밥티스타 로씨 신부로부터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창립 인가를 얻어냈다. 그리고 1568년 11월 28일엔 아비랄의 두루엘로에 남자 가르멜회 첫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그후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까지 15년 동안 끊임없는 개혁 활동을 하며 수도원을 세웠는데, 여자 수도원이 열일곱, 남자수도원이 열 다섯이나 되었다.
1572년 11월 16일에 데레사는 「영적 혼인」이라는 은혜를 받게 되는데 이로써 그녀는 신비적 여정의 마지막 단계로 넘어섰다. 여태까지 미완성이었던 그녀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이제 완결되어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데레사는 수도회 개혁자인 동시에 탁월한 신비신학자이며 훌륭한 영성가였다. 그것은 그녀가 쓴 저서들 안에 잘 나타나고 있다.
데레사는 1582년 10월 4일 알바 드 도르메스 수도원에서 시편 50편을 읊고 묵상기도 속에 잠기면서 영혼을 하느님께 돌려드렸다. [가톨릭신문, 2000년 4월 30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2)
2.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성사 안에서 획기적이고 현저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녀는 영성 생활의 스승이며 가르멜의 개혁자로서 16세기 당시 교회안에서 뿐 아니라 사회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 후 지속적으로 그러했지만, 오늘도 저서를 통한 그녀의 영성적 가르침은 교회 안팎의 사람들에게 놀라운 관심을 끌고 있다. 과연 데레사의 카리스마는 어떠한 것이었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가?
1) 데레사는 가르멜 개혁자로서 원시 회칙의 정신을 따르는 남-녀 맨발 가르멜회를 창설하였다.
데레사는 당시 가르멜 수도회 생활 안에서 많은 문제점들을 발견하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것은 지나치게 인원이 많은 공동체 생활의 한계성(당시 공동체의 구성원이 보통 100여명이있는데 데레사는 개혁하면서 13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규정했음) 지참금 액수에 따른 수도자들의 생활 방식의 차별 대우, 수덕 생활에 적합치 못한 회칙의 완화 등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개혁 의도의 본질은 무엇보다 묵상기도와 관상기도를 강조한 원시 회칙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었다. 안일한 생활과 참된 묵상기도는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녀는 원시 회칙의 「엄격한 준수」라는 방법을 통해 수도회 전체의 기본이 될 목적인 완전성, 사랑의 완전성을 지향하고자 했다.
데레사는 1582년부터 그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끊임없는 개혁운동을 전개하면서 맨발의 여자 수도원 열 일곱, 남자 수도원 열 다섯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 수도회는 짧은 기간 내에 스페인 전역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에 퍼져나갔으며 오늘엔 오 대륙 전체에 맨발 가르멜회는 남자 수도원 660여 개, 여자 수도원 780여 개로 헤아려진다.
데레사의 개혁을 굳히기 위해 1580년 가르멜 관구들은 그 분리의 필요성을 인정받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각기 다른 총장과 회헌을 가지고 뚜렷이 구분되었고 마침내 완전히 두회로 분리되었다. 하나는 종전의 완화 회칙을 취하는 가르멜회(O.C.)였고 다른 하나는 데레사의 개혁의 정신을 따르는 맨발의 가르멜회라 불리는 수도회(O.C.D.)였다.
2) 데레사의 개혁활동은 가르멜 초기의 관상적 이상을 개혁하면서 동시에 사도적 임무를 재인식하도록 하였다.
데레사의 개혁은 단지 원시 회칙 실행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시대의 교회의 사명안에 가르멜의 영성을 재정립하는 일이었다. 데레사는 무엇보다 참된 의미의 설립자인 옛사부들의 정신에 고무되어 그들의 생활의 모습을 재현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개혁의 주요 기초를 묵상기도에 두엇으며 청빈도 초기 가르멜 은수자들의 모범을 택했다. 그리고 그들의 은둔생활의 전신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은 독수적(獨修的) 고독을 추구하는 은둔이 아니고 은둔적 공동생활이었다. 이같이 데레사는 가르멜의 관상적 이상(理想)을 실현하는 충실한 후계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러면서 언뜻 모순으로 오해될 수 있지만, 그것에서 분리될 수 없는 사도적 목적을 동시에 제시하고자 했다. 그녀는 딸들에게 자기성화에 힘쓸 것과 하느님의 봉사자들을 위해, 특히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길 원했는데, 그들의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사제들의 선교활동을 지탱시켜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사도적 목적을 지닌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참된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내적 필연성에서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활짝 꽃피는 것이다.
이같이 데레사가 개혁으로 가르멜에 끼친 새로운 영향은 사도적 임무를 명확히 규정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의식 표면에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던 임무를 바로 자각하고 명료화 한 것이다. 그것은 가르멜의 소명이 띠고 있는 사도적 풍요성의 재인식이며 구체적으로 수녀들에게는 관상적 모습으로, 수사들에게 있어서는 관상적인 것과 동시에 활동적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3) 데레사는 영성 생활의 스승으로서 교회 안팎에 큰 영향을 주었다.
데레사는 내적 회심 이전에도 주변의 사람들에게 참된 영적 스승으로서 영향을 끼쳤다. 강생 수도원 수녀들, 개혁 가르멜의 딸들, 많은 고해 신부들, 교구 및 수도회 사제들과 주교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다. 그녀에게 영향을 받아 내적 생활의 재생의 은혜를 받은 신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개혁의 정신을 일깨운 것도 데레사였다. 데레사는 그에게 하느님과 합일의 가장 높은 상태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과연 십자가의 요한은 그녀를 십비적 영역에서 권위자로 인정하여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고 조언을 따랐다.
데레사가 끼친 영향력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것으로 한정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개혁을 통해 당시 교회와 사회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이단 심문 때 교도권에 대한 성실한 존경과 진리의 추구 안에서 살아있는 건전한 정신의 자유와의 사이에 모순됨 없이 양립성이 가능함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녀는 당시 종교 개혁이 교회의 일치를 위협했고 여러 이설들이 혼란을 초래하여 그녀의 영성의 진가가 의심받기 쉬웠던 상황에서 자신의 저서와 증거적 실생활을 통하여 영혼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존의 사실과 교회에 대한 자녀로서의 복종의 중요성을 명백히 그러냈고, 또한 하느님과의 합일 위에 기초를 둔 사도직과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세례성사를 받은 이들의 초자연적 연대성을 강조하였다.
신대륙의 정복으로 스페인의 모험가들에 의한 전쟁, 살상, 노획물 등으로 흥분되어있던 사회 상황에 데레사는 하느님의 생명에로 향해져 있는 모든 인간들의 본래 소명을 강조하며 인종, 문화, 종교 여하를 막론하고 인간으로서 지닌 그들의 품위를 존중하도록 촉구하였다.
4) 데레사는 사후에 더욱 지대한 영향을 교회의 영성생활 뿐 아니라 사회의 문학에까지 미쳐왔다.
1583년 「완덕의 길」과 「영적 보고서」가 에보라에서 출판되면서 즉지 거듭 재판되었으며 데레사의 저작 전집이 1588년 살라망카에서 출판된 뒤 계속 판을 거듭했다. 16세기에 13판, 17세기에 125판, 18세기에 243판, 19세기에 269판 그리고 20세기엔 530판을 넘어섰다. 그녀의 저서는 유럽 대부분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오늘엔 한국어를 비롯하여 아시아 지역의 많은 언어들로 번역되어 있다.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서 데레사가 시성된 후 역대 교황들은 그녀의 가르침에 찬사를 보내면서 저서들을 읽고 그녀의 영성을 본받도록 권유하였다. 그리고 바오로 6세는 1970년 9월 27일 데레사를 「교회의 박사」로 선언하였다. 신학자들은 신비생활의 여러 문제를 식별하고 해명하기 위하여 데레사의 가르침을 참고했으며 그 권위를 존중하면서 따랐다. 특히 하느님과의 합일에 있어 최고봉에 이른 뛰어난 인식, 관상 기도의 단계에 대한 완벽한 묘사, 관상기도와 사랑의 완전함과의 상호관계 그리고 영혼의 생명과 관련되어 있는 삼위일체 신비의 생생한 전망 등을 데레사에게서 배웠던 것이다. 또한 17세기의 정적주의와 반 정적주의 논쟁 때에도 학자들은 데레사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반론과 맞섰다.
데레사의 영성은 성 프란치스코 드 살 등 많은 교회 학자들에게 뿐 아니라 파스칼, 리술리에 등 사회의 문학인들에게까지 영감을 주었으며 큰 영향을 미쳤다.
데레사의 딸들 중 그녀의 정신을 성화(聖化)로 가장 잘 구현시킨 이닌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1873~1897)이다.
19세기에 이어 20세기 내내 아빌라의 데레사의 영성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져갔다. 그것은 3천년기에 들어서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놀라운 심리학적 통찰과 자기 반성을 통해 내적인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고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며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녀와 친교를 이루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관상하며 사랑했는지를 상세히 묘사해 주는 데레사의 저서들은 오늘 심리학자들, 철학자들, 모든 종파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비그리스도인들이나 무신론자들에게까지 관심있게 읽혀지며 연구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0년 5월 7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3)
3. 데레사의 저서들
데레사는 탁월한 신비 철학자이며 뛰어난 영적 저술가였다.
그녀에게 회심과 기도의 발전에 주요 계기를 주었으며 때론 영적 무기력에서 벗어나도록 결정적 역할을 해준 몇 권의 주요 서적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오수나의 묵상 방법론 「초보의 제삼부」,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성 그레고리오의 「윤리학」, 라레도 베르나르딘의 「시온산의 등정」등이었다.
그러나 데레사의 영성은 그 영성가들의 사상을 종합해 좋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삶 안에서, 특히 기도 안에서 체험한 하느님 그리고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이었다. 물론 영성가들의 책으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자신의 체험을 확인 받긴 했지만 그녀의 가르침의 원천은 바로 하느님이셨던 것이다.
그녀의 영성을 담고있는 저서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으며 무슨 내용을 지녔는지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주요 저서들
▲ 자서전 ‘천주 자비의 글’
데레사는 이 책을 고해 사제이던 톨레도의 가르시아 신부의 명령에 의해서 1562년 저술하였으나 그 후 1565년까지 근 3년간 일부분을 추가하고 보완하여 완성시켰다. 데레사는 이 책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생애 안에서 받은 은총에 관해 묘사하고 있는데, 수도생활 특히 기도생활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체험한 영혼의 상태 변화를 중점적으로 설명한다. 즉 그녀의 묵상방법과 주님이 주신 신비로운 은총을 체험하는 자신의 삶의 모습을 고해신부에게 순명의자세로 진솔하게 쓰고 있다.
이 책은 뒷날 쓴 다른 저서들만큼 체계적이진 못하지만 그녀의 인간적, 심리적 변화와 영적성숙 과정을 살펴보도록 해준다. 대체로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제1부(1~10장)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회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기록한다.
제2부(11~22장)는 묵상 기도와 신비적 은혜에 관한 논술이다.
제3부(23~31장)는 그녀의 회심에서부터 하느님과 완전한 합일의 은혜에 이르기까지 여정의 기록이다.
제4부(32~40장)에서는 아빌라의 성 요셉 수도원의 창립과 그녀의 생애 전 과정에서 받은 여러 종류의 은총에 관해 기술한다.
▲ ‘완덕의 길’
이 책은 지도 사제 바네즈 신부의 권고로 1566년에 성 요셉 수도회 수녀들을 위해 쓰였다. 그 후 데레사는 모든 가르멜 수녀들을 대상으로 하여 1569년 수정 증보판을 출간했고 1576년에 다시 한 번 개정하였다.
이 책은 영적 스승이며 어머니로서 딸들에게 주는 영적 규범이라 할 수 있는 작품으로서, 개혁을 시작에서 끝까지 설명해 주고 있으며 개혁 수도원의 수녀들이 수행해야 할 기도의 방법과 수덕에 관해 혼신을 다 해 가르치고 있다. 데레사의 저서들 중 가장 수덕적인 이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제1부(1~25장)는 수도회 개혁의 이유와 목적, 수덕적 권고 그리고 묵상 기도 생활에 필요한 마음의 자세 등을 설명한다.
제2부(26~42장)는 묵상 기도, 신비적 여러단계, 주님의 기도 해설 등을 다룬다. 데레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관상의 길로 갈 수 있음을 가르친다.
▲ ‘창립사’
이것은 데레사의 수도회 창립 활동을 기록한 책으로 1574년 리팔다 신부의 요청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몇 차례 중단되었다가 그녀가 죽기 두 달 전 부르고스에서 완성되었다. 수도회의 창설자로서, 수녀원의 장상으로서 데레사가 열정적으로 살아가면서 체험했던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서술한 이 책은 그녀의 과감성과 예찌를 돋보이게 하며 다른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데레사는 딸들에게 교육과 양성에 도움되도록 그녀가 겪고 체험한 수많은 여행과 스페인 전역에 걸친 수도원 창립의 파란 만장한 역사 이야기를 영적 권고를 곁들여 기록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트리덴틴 공의회 이후 스페인 교회의 상황, 당시 필립 2세 통치하의 스페인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에 연관된 인물들을 엿볼 수 있다.
▲ ‘영혼의 성’
그라시안 신부의 명으로 1577년에 쓰인 이 책은 데레사 자신의 내적 체험을 묘사한 신비신학적 걸작으로 묵상 기도와 영성 생활에 대한 가르침을 종합하고 있다. 이 책에서 영혼이 묵상 기도 또는 하느님과의 친밀 관계를 이루는 영적 여정의 단계를 일곱 개의 궁방들로 구분된 성으로 비유되고 있다. 여섯 개의 궁방들은 하느님이 거주하시는 일곱째 궁방을 에워싸고 있다. 일곱째 궁방에 들어가기 앞서 영혼은 외부의 여섯 궁방들을 거쳐가야만 한다. 여기서 궁방들이라는 것은 물리적 장속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생생한 인격적 친교와 일치의 관계를 이루어 가는 점전적 단계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지막 궁방에 이르기 위한 몇 가지 전제 조건들이 있다. 친교의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의 생생한 현존,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수덕적 노력,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에 대한 책밍감 있는 응답으로서 변형 그리고 받은 은총과 실천적 응답이 기도 안에 갇혀 하느님의 이끄심에 끌려감 등이다.
(2) 소품들
▲ ‘영혼의 증언’
이것은 연속성이 없는 68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565년에 이르기까지 데레사가 받은 특수한 은혜와 영적 삶에 나타난 여러 현상들에 대해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 중 8개장은 데레사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고해 신부들에게 보낸 보고서들이다. 그녀의 생애와 영적 은혜에 대한 연구에 중요하다. 이것은 자서전의 보충적 연장이라 할 수 있다.
▲ ‘하느님 사랑에 관한 생각’
데레사는 이 책의 서론에서 그리스도께 나아가려는 수녀들과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저술했다고 밝힌다. 이것은 영혼이 갈망하는 평화를 주제로 하여 「아가」의 몇 구절을 해설한 것이다. 즉 유일한 참 평화는 하느님과의 합일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자필 원고는 남아있지 않고 몇 개의 미완성 사본만이 있다. 이단 심문시 저촉될 것을 염려하여 디에고 신부의 명령에 따라 데레사가 손수 원고를 소각시켰기 때문이다.
▲ ‘하느님께 대한 영혼의 외침’
데레사가 영성체 후 종이 쪽지에 급히 기록한 것들인데 하느님께 대한 사랑, 원의, 고뇌, 희망 등의 진실된 마음의 외침이다. 주님의 성체를 모신 후 영감을 받아 하느님께 바친 화살 기도인 것이다.
▲ ‘서간집’
데레사가 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서간들 중 457통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러 계층에 보낸 서간은 병을 위한 약 처방부터 시작해 부엌의 자질구레한 일, 수도원 개혁에 관한 여러가지 일, 영적 지도에 이르기까지 온갖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이 서간들은 데레사의 영성과 인품 뿐 아니라 당시 교회와 사회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귀중한 역사자료들이기도 하다.
그밖에도 수도회 개혁을 위해 쓴「회헌」, 교회법적 시찰을 수녀들이 영적으로 잘 이용할 수 있도록 주의와 조언을 주는 「수도원 시찰법」이 있다. 그리고 수도생활 중 여러 축일의 상황이나 특별한 기회에 데레사의 풍부한 감성을 드러내며 작성한 「시」, 교육 및 묵상자료가 될 수 있는 짧은 격언들을 기록한 「충고와 격언」, 수련자들의 교육을 위해 영적 영역의 주제를 선정하여 논쟁하고 답을 주는 「도전에 대한 응답」,「박해」등의 소품들이 있다. [가톨릭신문, 2000년 5월 21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4)
4. 데레사의 영적 가르침
데레사의 가르침은 그녀가 하느님과 합일해 가는 성숙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겪은 체험 내용으로 구성된다. 그녀는 교회의 권위의 지도에 의존하면서 성서나 성전에 근거하는 객관적 사실에 자신의 체험을 비추어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녀는 체계적 신학 지식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여겼기에 자신의 체험을 능력이 및는 범위에서 심리적 분석과 함께 묘사하여 지도 사제 및 신학자들에게 보고하면서 식별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녀는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예리한 관찰력과 천부적 표현 능력으로 훌륭히 분석해 냈다. 그녀는 초보적 첫 걸음에서부터 신비적 일치의 절정까지 단계들을 저서에서 체계적으로 서술하면서 하느님을 향한 여정의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교도권은 여러 차례 예찬하면서 공인하였다. 여기서 그녀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영적 가르침을 몇 가지 살펴본다.
1) 하느님의 현존의식
유년기부터 수도생활 초기까지 데레사는 하느님을 멀리 계신 분, 하느님 나라에 계시는 절대자라고 막연히 생각했으나 신비적 체험 후 하느님 현존 의식이 생동적이었다. 초보자로서 묵상시도를 시작했을 무렵 그녀는 자기 안에 하느님의 활동을 감지했으며 영적인 큰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 더욱 강한 하느님의 개입을 깨달았다. 그분은 바로 곁에서 아주 작은 마음의 움직임까지 들어주고 응답해주는 사람처럼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마침내 어느 날 하느님의 현존은 하나의 확신으로 그녀의 영혼에 다가왔다. 하느님의 현존은 마치 그릇과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의 관계와도 같이 느껴졌다.
하느님께 대한 신비적 인식은 그녀를 점진적인 자아인식에로 이끌어갔다. 그녀는 자신안에 무한한「부의궁전」에 비교될 만한 참된 내적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결국 그녀의 중심, 영혼의 가장 내밀한 장소, 바로 그곳에 하느님께서 머무시고 계시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다.
2)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남
하느님의 현존 체험은 삼위일체의 신비적 인식 안에 심화되어갔다. 이러한 풍요로움은 시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존의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인성을 제시하신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접촉으로 점차 완성되어 갔다. 그녀는 어느 날 묵상기도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곁에 계심을 느꼈다. 그것은 지적인 현시(現示)였다. 이것은 상상적 현시와는 대조적으로 영혼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에 그녀는 주님의 손만을 보았다. 며칠 후엔 그분의 얼굴을 그리고 드디어 인성 전체를 보았다. 상상적 현시와 지적 현시가 후에 번갈아 일어났는데 그녀의 생애의 마지막 무렵에는 후자가 더 많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었다. 데레사는 의심할 수 없는 참된 시현(示3現)을 체험하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3) 삼위일체의 내주(內主) 체험
그리스도의 현존의식과 체험은 그녀 안에 「한없이 부드러운 사랑」을 더욱 더 성장시키는 결심을 얻도록 했고 동시에 삼위일체의 현위 안으로 데레사를 맞아들이는 은총을 받도록 했다. 그녀는 성부의 품속에 감추어져 있는 성자를 보여주시는 시현을 보았다. 성자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성부께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녀는 이 진리를 체험으로써 확신하게 되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누린 후 데레사는 성삼위가 은총 상태의 영혼과 함께 계시다는 성서의 말씀을 자신 안에서 체험하였다. 그녀의 영혼이 물을 빨아들인 해면처럼 신성(神性)으로 잔뜩 부풀어 오른 듯했다. 그녀는 자신 안에 내재하시는 세 위격의 존재를 자신안에서 누렸다. 성삼위는 단순한 관상의 대상이나 사랑과 인식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그녀 안에서 활동하셨다. 그녀는 체계적 신학지식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체험에 따라 상세히 그리고 놀라우리 만큼 정확하게 그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4) 하느님과의 대화인 묵상기도
묵상기도는 데레사의 정의를 요약하면 「하느님과의 친밀한 우정의 나눔」이다. 그녀의 저서들은 모두 묵상기도에 관해 말하고 있다. 「자서전」은 그녀가 묵상기도를 통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간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완덕의 길」은 묵상기도의 훌륭한 교본이다. 「영혼의 성」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진보의 단계에 대응시켜 묵상기도의 심도를 묘사한 체험기이다.
데레사의 묵상기도는 크게 나누어 세 가지의 본질적인 요소로 구성된다. 하나는 믿으을 모으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의 세계에 대해 초연해야 함을 뜻한다. 묵상기도 중엔 보고 듣는 것에 정신이 흩어지지 않게 습관을 들여 고요중에 머무르도록 해야한다. 그녀는 이러한 기도의 자세를 거둠(잠심)이라고 했는데 영혼이 모든 능력을 거두어 들여 자기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같이 있는 것이다. 묵상의 둘째 요소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묵상기도에서 하느님은 현실적으로 우리 안에 존재하시고 우리가 그분 앞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묵상기도의 중심은 그리스도께 대한 영혼의 시선과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시선이다. 그녀가 말하는 하느님과 신앙인의 「시선」은 실제로 직접적인 개인적 관계, 상호간의 존재의 현실적인 사랑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묵상기도의 세 번째 요소는 하느님과 사랑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하느님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묵상기도의 형태는 두가지 습인데 그것은 단순한 대화의 모습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꾸밈없이 말씀드리는 것과 복음을 주제로 한 대화이다.
묵상기도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또 생각이 의지를 지배하는 것은 더욱 더 아니다. 영적 진보는 생각이나 추리를 많이 하는 데 있지 않고 얼마나 많이 사랑하느냐에 있기 땜누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묵상기도를 「많이 생각하는 일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5) 관상과 신비적 현상
데레사에게 묵상기도란 완전함에로 점차 인도해 가는 길이며 특별한 은총을 받은 이들에게는 신비적 일치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영혼의 성」에서 데레사는 발전 단계를 일곱 개의 방으로 구분하고 있다. 앞 단계의 궁방들에서 초심자들은 단순한 묵상, 잠심의 기도 상태에서 「고요함」이라는 묵상의 단계로 넘어가며 초자연적 관상에 들어선다. 초자연적 관상이라 자신의 여러 능력을 사용해서 영혼 안에 실제적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영혼이 합일하는 체험을 뜻한다. 먼저 하느님과 영혼의 단순한 만남에서부터 시작하여, 제 4,5궁방, 다음에 제 6궁방의 「혼약」그리고 드디어 완전한 신비적 합일인 「영적 결혼」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데레사는 그러한 신비적 은례가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과 그것을 잘못 이해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신묘한 은혜는 사랑의 성장과 덕 실천에, 교회를 위한 봉사에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곤경, 고통과의 대결에서 영적으로 힘있는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데레사는 하느님께서 모든 이를 같은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도 확실히 알고 있다.
신비적 상태의 본질 요소와 거기에서 부수되는 결과가 생기는 것을 혼동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식별해야 한다. 이상한 현상들이 때론 신경병적 증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수적 결과란 심리적, 신체적으로 일어나는 이상한 현상으로 황홀, 상승(上昇), 정신의 비상, 탈신(脫身), 희열 등 탈아(脫我) 현상이다. 데레사는 아직 완전하지 못한 영혼들을 회심케 하려는 목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로 탈아가 일어난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녀는 신비적 관상의 은혜를 바라는 것은 옳고 좋은 일이나 이상한 은례를 열망하지 않길 권한다. 데레사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가장 확실한 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하느님은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더구나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거룩한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를 그분의 손안에 맡깁시다』 [가톨릭신문, 2000년 6월 4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5)
데레사의 기도단계
데레사는 하느님이 보여주신 신비 체험에 따라 기도의 단계를 저서 「영혼의 성」에서 설명한다. 그녀는 영혼을 금강석이나 맑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궁성에 비유한다. 그 궁성엔 여러 방들이 있는데 그 중 제일 가운데 방에 하느님이 왕으로 좌정하고 계시다. 각자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 이 영혼의 성에 들어 갈 수 있으며 기도의 진보에 따라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갈 수 있고 6개의 방을 통과한 후 마침내 가장 중앙에 있는 제 7궁방에 도달하게 된다.
데레사의 체계적인 기도와 완성의 단계의 묘사에 이의를 제기하는 신학자들도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의 신비가들이 가르쳐온 기도의 성숙과 성성의 상승적 발전을 인정하면서도 그렇게 인위적으로 위계질서를 엄밀히 구분할 순 없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데레사는 저서들을 그녀의 시대에 봉쇄수도원의 수녀들을 위해서 상징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며 썼다. 그러므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성소가 각기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든지 제기된다. 분명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완성에 불렸으며 이 완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종 목표로서 최고의 사랑인 「하느님과의 일치」이다. 데레사는 그것을 상징적 용어로 영적 결혼이라 일컬은 것이다.
제1궁방의 영혼은 은총 지위에서 살지만 아직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착한 열망을 버릴 위험에 있는 기도의 초보 상태에 있다. 그는 아직 세속적인 것에서 이탈하지 못했으므로 물질적인 세계로부터 오는 유혹에 약하다. 세속적 유혹에서 오는 분심은 영혼의 중심에서 비추이는 빛을 약하게 만든다.
제2궁방에 들어가면 영혼으로 하여금 노력을 포기하도록 유혹하는 무미 건조함과 고난이 닥쳐온다. 사탄의 간계에 대항하기 위해 데레사는 이성, 기억, 믿음 등 영혼의 기능과 힘을 사용하라고 권한다. 주님은 이성의 빛 안에서 영혼에게 빛을 주신다. 명확하고 철저하며 선한 사고는 사탄의 거짓을 쫓아 버린다. 여기서 영혼은 묵상기도를 열심히 해야한다. 그러므로 이 단계의 기도의 특성은 추리적 묵상이다. 추리적 기도가 반성적인 기도의 형태이긴 하지만 그것은 추론이 아니라 사랑으로 끝나야 한다. 묵상기도란 하느님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그 하느님과 둘이서 자주 이야기하며 사귀는 친밀한 우정의 나눔이다. 지성을 많이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는 이들에게 데레사는 그리스도께 관해 묵상하고 그분과 대화할 것을 제안한다.
성실한 영혼은 세 번째 궁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에 들어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궁방에서 그들의 전 생애를 보낸다. 이 궁방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공간이 넓어서 미지근한 영혼부터 용감한 영혼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거처할 수 있다. 사람들이 더 깊이 들어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청년(마태 19, 16~26 참조)같이 계명을 지키고 의무를 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을 귀담아 들을 만큼 마음을 비우지 않기 때문이다.
제3궁방에서 영혼은 습득적 잠심기도라 부르는 수덕적 기도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다. 이 단계에서 영혼은 일상적인 은총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노력으로 마음을 한 곳에 모은 상태에서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 기도는 모든 기능이 집중 상태에서 하느님과 결합하는 매우 분명한 현존의식이다.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영혼이 자기 안에 하느님의 현존의식을 기르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려고 습관적으로 노력한다면 이런 유형의 기도는 발전될 수 있다고 데레사는 조언한다. 이 단계는 수덕적 단계에서 신비적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점으로, 묵상에서 사용된 추리는 이제 단순한 지적 응시와 사랑에 가득 찬 주의력으로 바뀌게 된다.
제4궁방의 영혼은 신비적 기도의 첫 유형인 고요의 기도의 단계에 이른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지성과 하느님과의 친밀한 결합에 있는 주입적 또는 수동적 잠심 기도로서 영혼은 하느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인식한다. 데레사는 기도의 진보를 위해 중요한 것은 많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많이 사랑하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고요의 기도는 의지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흠뻑 젖어 최고선으로서의 하느님과 일치하는 기도의 유형이다.
이러한 기도 중에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이 감겨지고 고요가 그리워지며 감각이나 바깥 사물들에 대한 관심은 약화되어 가는 반면에 영혼은 잃어 버렸던 힘을 되찾게 된다. 기억과 상상은 아직도 자유롭거나 해방된 상태이므로 그것들은 때때로 영혼을 산란케 하려고 위협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데레사는 하느님 앞에서 조용히 잠심해야 하며 자신을 그 사랑의 품속에 완전히 맡겨야 한다고 조언한다.
제5궁방에서 영혼은 일치의 기도로 들어가게 되는데 여기에 여러 정도의 차이가 있다. 단순 일치 기도에서 영혼의 모든 기능은 하느님 안에 잠심한다. 그리고 영혼이 자기 자신으로 향할 때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이 자기 안에 계심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다. 데레사가 말하는 일치는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서 이것이 그녀가 평생토록 소망했던 일이며 하느님께 간구했던 은총이다.
하느님과 일치에 이르게 되면 고행과 고독에 대한 열망은 강해지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 눈에 띌 때 못 견디게 슬퍼지며 혈육, 친구, 재산 등에 대한 애착에서 자유로워지고 영혼은 아주 큰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러한 일치에 도달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은 두 가지로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일치의 상태에 도달한 이가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절대 자신을 믿지 말고 자신의 영혼을 살펴 이웃 사랑과 겸손, 나날의 의무에 있어서 전진 혹은 퇴보했는지 주의 깊게 성찰해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느님이 영혼을 더욱 온전히 지배하게 되어 그것을 당신의 빛과 위로로 넘쳐흐르게 할 때 영혼은 탈혼적 일치의 기도를 체험하는데 이것은 제6궁방의 시작이고 「신비적 약혼」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느님과 일치하고 싶어하던 데레사는 자신의 갈망과 그 상태를 「약혼」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신비적 약혼」이란 한 영혼이 하느님과 결정적인 일치인 「신비적 결혼」에 도달하기 전에 그분께 대한 갈망과 고독 중에 겪게 되는 다양한 신비적 체험(시현, 말씀, 탈혼 등)에 대한 표현이다. 이러한 최고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영혼이 신비적이고 수동적인 정화로서 큰 시련과 고통을 겪는다. 이러한 고통과 시련 중에도 영혼이 초자연적 신앙을 견지하면서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신비적 결혼」이라는 행복에의 확신과 징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며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된다.
영혼이 제 7궁방에 들어가면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이 사람들이 하나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 21)라고 하신 청원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신비적 결혼」또는 「변형일치의 상태」이다. 데레사가 말하는 기도의 최고 단계인 「신비적 결혼」은 신앙으로 믿은 것을 영혼이 온몸으로 깨쳐 「본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제부터 성삼위가 이 차원에 도달한 영혼을 떠나지 않고 그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뚜렷이 의식할 수 있다.
이 단계의 영혼은 하느님과의 일치의 경지에 머무르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혼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게되며 앞으로 다시는 아래의 차원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을 떠나자마자 그 크나큰 은총을 잃게 되므로 작은 일에도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도록 꾸준히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신비적 결혼의 은총은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완전하게 실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형일치 안에서 영혼은 완전히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찾으며 고독과 고통받기를 열망하고 하느님의 뜻이 자신 안에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또한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한 큰 열의를 갖게 된다. 따라서 신비적 관상 기도의 절정은 사도적 열정으로 마무리된다. 데레사는 그것을 「마르타와 마리아가 함께 일하게 된다」고 표현한다. [가톨릭신문, 2000년 6월 11일]
첫댓글 !!!!.... 다 읽는 데에는 시력의 노동을 엄청 필료로 하는지라, 피정에 필요한 부분을 선택적으로
읽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나는대로 읽어야 하는 필료성을 절실히 느끼면서, 진짜 수고 하셨구요.
감사 합니다.
많은 도움 되겠습니다.
오 아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