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제주작가회의에서 주최하는 4.3문학기행에 참가했다. 독자와 함께 한 이날 행사는 신산공원에서 출발하여 제주4.3공원 유해봉안관 참배를 하고, 해안동 잃어버린 마을 리생이를 마을 원로이신 강석진 씨의 소개로 돌아봤다. 다음은 광령리 무수천에서 고승완 작가와 대화를 가졌고 도평동 사라마을과 잃어버린 마을 왯뱅디, 흥용사를 거쳐 이호동 오도롱의 김성주 시인과의 대화와 도두봉에서 비행장을 향해 작년에 발굴한 영령들에 대한 제를 올리는 것으로 행사를 마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처참했던 상황에 60년이 지난 지금도 참담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지난주에 제주작가 봄호가 나왔는데, 행사장에서 한 권씩 나눠줬다. 특집 1은 ‘강정에서 길을 묻다’, 특집 2는 ‘시인 김명식의 삶과 문화’이다. 우선 그 중 뒤에서부터 시 8편을 골라 조팝나무꽃과 함께 올린다.
♧ 배고픈 식사 - 이민화 콩가루 풀어 넣은 얼갈이 배춧국 오래된 손님에게만 내놓는다며, 주인은 걸쭉한 입담만큼이나 사발 가득 국을 퍼준다 사발 속에 몽글몽글 맺혀있는 꽃망울 백일 된 내 아기가 게워놓은 흰 젖을 닮아 선뜻 수저를 들 수가 없다 젖꼭지가 헐도록 젖을 빨던 아기는 한동안 똥 싸는 걸 잊은 채 그 작은 입으로 먹은 것을 죄다 토해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한, 그런 어미를 위로하듯 젖가슴만 파고들던 나약한 봄날이었다 겨울을 견딘 얼갈이배추의 진한 풋내, 내 아기의 푸른똥 냄새가 난다 애써 외면했던 시간을 열고 비쩍 말랐던 젖이 핑그르르 돈다 수저를 들 수가 없다 내 아기가 게워놓은 한 무더기의 봄
♧ 생태계 - 현택훈 작은 벌레에겐 풀숲이 밀림이듯 우거진 당신 속에서 사는 나는 작은 벌레겠지요 당신 속을 다니고 가끔 멀리 있는 곳까지 날기에 나는 당신이라는 밀림에서 사는 무당벌레 되겠지요 나의 천적은 시간이라서 장대비처럼 내리는 시간 속에서 가랑잎 아래 겨우 몸을 숨기고서 선잠에 들곤 하겠지요 때론 더는 참지 못해 창틈까지 가서 하룻밤을 당신과 함께 하겠지요
♧ 아침 해를 저녁에 품다 - 양동림 저기 보이는가 시 바다가 시뻘겋게 산고를 겪으며 얼키설키 엉킨 탯줄을 하나하나 자르고 있는 저 장엄한 모습 고고苦苦를 버텨주는 고고지성呱呱之聲이 보이는가 보이는가 제 한 몸 불사르는 자식을 묵묵히 바라보며 애태우는 소리 아무도 바라보지 않아도 행여 더위에 지칠세라 찰랑찰랑 놀 지치는 소리 들리는가 세상을 원 없이 태우다 스러져가는 햇살을 품에 안고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붉게 상기된 얼굴을 감싸 안고 소리쳐 우는 저녁놀
♧ 아내 - 양원홍 안방 한자리를 차지한 TV 속에 서로 이름으로 불러주던 꽃말들 하나 둘 사라지더니 ‘여보’라는 말 속에 수만 가지 사연이 사라지더니 세상의 말들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신혼시절 혼수품 가구와 함께 낡아버린 중년 점점 말수가 줄어간다 말을 파는 대형마트가 생겼다 가끔은 신제품 세일기간에 맞춰 적당한 가격을 저울질 한다 ‘장미 같은 당신’이만 원 ‘에머랄드 보랏빛 흐르는 당신’오만 원 ‘달빛 따다 수놓은 하얀 미소 닮은 당신’십만 원 아내의 마흔 번째 생일선물을 골라 말의 껍데기를 살살 벗겨 귓속으로 불어넣고 아내 상단에 부착된 버튼을 꾸욱 누르면 달콤한 신혼비디오가 재생된다 침대에 떨어진 말들이 서로 어울리면서 TV 하단에는 유료채널이 추가된다 나는 초인종을 누를 때마다 켜지는 TV 속에 ‘아내’라는 말과 함께 산다
♧ 길 위에서 길을 잃다 - 장영춘 네비게이션 하나 믿고 고속도로 달린다 화살표 방향따라 굽은 길을 달리다가 뚝끊긴 기계 앞에서 미아가 되어버린 약속했던 시간 앞에 마음먼저 앞지르고 몇갈래 갈림길에 발동동 구르는 일 가끔씩 사는 일 또한 길 위에 길을 묻는.
♧ 밀양의 달 - 이애자 낙동강을 따라 밀양에 흘러들었습니다 공사 중인 보를 떠올리자 콩팥이 묵직합니다 저녁 밥 삽질한 것들이 막혀 고인 밤입니다 못 본 척 물구나무 선 사과나무 아래 보에 고인 것들을 시원하게 흘러 보내는 사이 열나흘 밀양의 달이 반사경을 비틉니다
♧ 겨울나무의 꿈 - 한희정 살그락 햇살에도 뼈마디가 아린 것이, 수은주 목줄 잡는 여러 날 한파에도 이 땅에 나무로 크는 우리아들 서 있다 휴학한 아들 녀석 한 학기 또 연기했네 두꺼운 안경너머 꽃눈 같은 글자 헤며 하얀 띠 질끈 묶고서 밑줄 긋기 바쁘다 꽃샘추위 길수록 봄은 더디 오겠지 툭하면 먹통 되는 휴대폰 메시지로 불현듯 빨간 하트가 송신되어 흐른다.
♧ 겨울 야누스 - 김진숙 하가리 연화정은 겨울 蓮의 누드화다 반쯤 잠긴 꽃대 사이로 비대칭의 무수한 뼈들 알몸의 무늬를 읽는 실루엣이 부시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지우는 일 한 톨 씨앗까지 소신공양 사리를 묻은 산란 후 연어들처럼 꿈을 이고 누운 노을. 얼마나 가벼워져야 빛의 지문을 그릴까 저 홀로 텃새 한 마리 그림자가 흔들릴 때 살얼음 생의 안쪽이 두 얼굴을 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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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
첫댓글 조팝꽃도 시도 시조도 참 좋다.
제 시는 수정해서 다시 보냈는데 어찌 수정되지않은 시가 올려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