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이르시길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라고 했다.
이는 불교 연기법의 핵심인 空性을 의미하는 말이다.
공성(空性)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불교의 중도(中道)를 이해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불교의 연기법을 단순히 현상적인 관계로만 인식하고 있다.
현상적인 관계란 곧 유위법(有爲法)을 말한다.
유위법이란 만유의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현상계를 말한다.
철학에서 말하는 양태론(樣態論)이다. 이에 반하여
공성(空性)이란 현상에 대한 <실재(實在)>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한다. 비록 언어로 표현되었지만(유위법),
그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위법으로 실재에 대한 것이다.
연기법의 인(因)과 연(緣)의 관계 문제는 부파불교 이전에도 이미
자이나교, 브라만, 상카 등등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의 핵심적인 내용을 보면 4가지 명제들로 분류할 수 있다.
이를 교학에서는 사구(四句)라 표현하기도 한다.
하나는, 결과란 원인 스스로의 표출이라는 것이다.
둘은, 그것 이외의 요소들(원인)에 의해 유발되었다는 것이고
셋은, 양자 모두라 하는 것이고
넷은, 둘 다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위의 세 번째는 앞의 두 명제를 수용하는 것이므로 반복된 것이고,
네 번째는 연기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논할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인(因)과 결과(果)를 말하는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과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이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사구(四句)는 일찍이 부처님이 사견(邪見)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고,
이은 《중론》에서도 부정하고 있지만
중생들이 긍정하는 잘못된 인식론적 견지를 파(破)하고
또한 연기의 공성(空性)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첫 번째의 명제 “결과란 원인 스스로의 표출이다.”라는 것은
아비담에서는 말하는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을 말한 것이고
두 번째 “이외의 요소들에 의해 유발되었다.”라는 것은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을 말한다.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이란 원인 안에 결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올챙이가 개구리가 된다면 말하면, 올챙이가 인(因)이 되고
개구리가 과(果)가 된다. 인중유과론이란 올챙이 안에 인(因)과
개구리라는 과(果)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면 어떻게 하나는 원인으로 기능하고
다른 하나는 결과로써 가능하겠는가?
한쪽에 해당하는 명제는 다른 쪽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양자에 대한 개념에 차이가 있어야 양자의 구별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차이가 없는 구별이 존재할 것이다.
말하자면 올챙이가 개구리와 차별이 없다면
어떻게 올챙이와 개구리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인중유과론을 수용하면 논리적으로 볼 때
모든 차별이 폐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우주 전체는 무색, 무차별의 덩어리로 무너지고 만다.
말하자면 인(因)과 과(果) 가 동일하다면 즉 차별이 없다면
사과 씨앗과 사과를 구별할 수 없고
다르다면 사과 씨앗에서 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철학에서 말하는 동일성(同一性)이 바로 인중유과론에 해당한다.
동일성이란 실체를 말한다. 하나의 물건 실체를 말한다면 하나일 뿐이지
두 개가 존재할 수 없다.
만일 두 개의 실체가 존재한다면 “실재(實在)”라는 명제가 성립될 수 없다.
실체론(實體論)적 관점에서 보면
속성이나 양태(樣態) 없는 실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태론(樣態論)의 관점에서는 실체가 전혀 없어도
모든 현상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양태론(樣態論)이란 현상계를 말한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속성은 있을 수 없고 속성 없는 실체도 있을 수 없다.
실체와 속성의 양자는 심지어 함께 있다고 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함께 있는) 경우 어떻게 우리가 그 양자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위의 예로 비유하면 올챙이가 개구리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실체론적 입장이 아니라
양태론적인 입장일 뿐이다. 이는 동일성(同一性)의 문제가 아니라
현상(양태론)으로서 본 것이다.
부분을 떠난 전체는 있을 수 없고, 전체를 떠난 부분은 없다.
그 존재와 본질이 상호 의존 관계로부터 도출되는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가 말하는 <관계>라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두 개의 항(項)을 관련시킴에 있어서 양자를 연결하기 때문에
(관계는) 그 두 항을 동일시 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연결되는 것이 둘이기 때문에 (관계는) 양자를 구분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서로 다르거나 서로 동일한 실체 사이에서는
관계라는 것이 얻어질 수 없다.
위 예에서 올챙이가 개구리가 같다면
올챙이를 개구리라 부르지 않을 것이고,
다르다면 또한 올챙이가 개구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할 수 '없음'으로 원인과 결과, 실체와 속성, 전체와 부분,
주체와 대상 등은 서로 의존해 있고,
연관되어 있다는 결론은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의 무엇(物自體)이 아니다.
무자성(無自性)이라는 의미다.
이는 상대적인 존재는 주관적인 것이며 비실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한 성질을 가진 부류나 범위,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이나 존재의 형식을 범주(範疇)라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범주란 수많은 개념과 장치(분별, 희론)이며,
이에 의해 <이성(理性)>은 <실재(實在)>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재>는 범주화되지 않고 상대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성>이란 실재를 오도(誤導)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 어떤 현상이건 그 어떤 지식 대상이건
이렇게 보면 보편적 상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상대성 즉 상호 의존성은 비실재의 표징이라는 것이 된다.
그래서 절대와 세속의 구별은 인식론적(주관적인) 것이지
존재론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존재의 본질을 보는 자는
모든 것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가 空性이라는 것은 실로 모든 것이 공성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연기를 보는 자는 나(여래)를 보는 것이며,
법을 보는 것이다.”라는 말의 참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중무과론(因中無果論)을 보자.
<인중무과론>이란 원인이 없이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스스로 결과를 내는 곧 자생(自生)이나,
절대자인 신의 힘으로 사물을 만들어 내는 것들을 의미한다.
자생(自生)이란 또 다른 의미는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생(自生)을 만일 논리적으로 볼 때 스스로 발생(自生)한다는 교리가
차별성을 철폐시켜 모든 원인을 하나로 응축시킨다는 의미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결과는 원인에 대해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원인과 결과는 완전히 달라서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것을 발생시킬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같다면 그 어떤 것이 아무 데서나 나타나야 한다.
예를 들면 인(因)과 과(果)가 다르다면 사과 씨앗에서 배가 열릴 수 있고,
원인과 결과가 같다면 사과 씨앗이면 씨앗이지
사과와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말은 차별성을 주장한다는 말로
이는 무관계성(無關係性)이나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절대적으로 다르다면 그 어떤 명제라도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주제에 대해 그 어떤 속성도 서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주체와 속성은 달라서 원인으로서의 주어(주체)와
결과로써의 술어(속성)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과관계를 변증법으로 보면 이러한 결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차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동일성을 수용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곧 中道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는 모든 명제는 자각되는 것이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고 하나의 명제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 반대되는 명제를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A는 B가 아니라는 명제에서 B를 부정한다고 해서
A를 수용하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A는 B는 아니지만
C, D, E가 아니라는 부정의 의미는 아니라는 의미다.
변증법의 원칙은 아무것도 그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상대적인 존재는 주관적(主觀的)인 것이며 비실재(非實在)이다.
범주(範疇)들이란 수많은 개념과 장치 즉 분별과 희론이며,
이에 의해 <이성(理性)>은 <실재(實在)>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지만 <실재>는 범주화되지 않고 상대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성>이란 실재를 오도(誤導)한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 어떤 현상이건 그 어떤 지식 대상이건 이렇게 보면
보편적 상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상대성 즉 상호 의존성은 비실재의 표징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절대와 세속의 구별은 인식론적(주관적인) 것이지
존재론적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도
“<이성>이란 지식의 겉모습만 제공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것”이라고 했다.
철학적 의식은 그 내적 역동성을 통해
즉 3단계의 변증법적 계기를 통해 그 결실에 도달한다.
그것은 독단론(見), 비판론(空性, 또는 歸謬法) 그리고 직관(반야)이다.
철학이 자연발생적으로나 사변적으로 사용될 때는 독단적으로 된다.
이것은 갖가지 성격을 띤 사상체계로 표출된다.
그러나 이어서 독단론이 궁극적으로 모순에 이르게 되면
철학은 비판론적으로 된다. 여기서 이성의 허울과 無力性을 자각하게 된다.
이는 현상의 상대성과 비실재성에 대한 자각이다.
현상(적 사물)은 상호 의존적이기에 空 이다. 따라서 현상은 실재로서
의 실체성을 결여하고 있다. 즉 무자성(無自性)이라는 의미다.
비판론이 완성되면 결과적으로
<이성>의 사변적이고 개념적 기능을 없애버리게 된다.
그때 철학은 최고의 지적 직관에 이르게 되며
이것이 바로 반야(般若)이다.
여기서 지식(이성)과 그 대상(실체)이 일치하게 된다.
즉 不二의 상태가 된다. 이것을 空性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 또는 <절대>란
이중성을 결여한 것(즉 견해의 공성)이기 때문이다.
空性은 이중성, 상대성을 벗어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수의 《중론(中論)》를 주석한 인도의 중관파 고승
월칭(月稱:candrakiri)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다른 것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無이다.
따라서 자성 즉 독립적 존재는 없다. 그 스스로 존재하며
그 본질상 원인과 조건(緣)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현상은 조건 지어져 있다. 조건 지어진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
相依性 또는 사물들의 비절대적 본성은 그것(사물)들의 공성이다.』
우리가 사물이나 어떤 개념이나 관념을 이해할 때 의존하는 것은
이성(理性)과 사회적 관습이나 가치관이나 전통에 의존한다.
이를 통해서 현상계(양태론)를 이해하고 실재론으로 나아가고자 하려면
많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왜냐하면 실재란 곧 공성(空性)임으로
어떠한 상대성이나 범주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空性은 이중성, 상대성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최고의 지적 직관에 도달한 중관파의 변증법은
단순히 이론적 의식의 소산만은 아니다.
이는 실천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의 소산이기도 하다.
세속적 苦와 불안정성의 근본 원인은 무명인데
무명은 실재를 개념화하려는 경향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갖가지 사물들에 대해 그릇되게 파악하고서
우리는 어떤 사물에 대해 애착하기도 하고 혐오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용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탈이란 행위(業)와 악의 뿌리(번뇌)를 지멸(止滅) 시키는 것이다.
그것들(업과 번뇌)은 분별에서 일어나고
이것(분별)은 희론에서 일어난다. 희론은 공성을 앎으로써 사라진다.
개념을 사용하지 않은 직관적 지식으로서의 변증법을 통해
우리들은 앞으로 있게 될 苦를 초월하게 된다.
이 상태가 바로 우리가 도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최고선(至福)이다. 라고 했다.
@모든 현상(유위)이 현상이게끔 하는 특징(유위상)은
3가지가 있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유위법에는 발생(生) 소멸(滅)
그리고 상태의 변화(住異)가 수반된다는 말이다.
연기법에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라는 것의 주어는
”이것“과” 저것“이다. 이 명제가 성립되어야 생주이멸의 전개가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자성이라면 연기를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용수와 아리아제바의 말처럼
”발생(生)과 지속(住)과 소멸(滅)은 환상이나 꿈,
그리고 신기루와 같아서 설명할 수 없다.”라고 하면
연기법은 설명될 수가 없다.
연기법은 유위법이다. 생멸에 대해 이렇게 有爲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無爲도 역시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양자는 서로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처님은 “연기법을 알면 나(여래)를 보는 것이며,
나를 보는 것은 곧 법을 본다”라고 했다.
나를 보고 법을 본다는 것은 해탈이며 열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법의 명제들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이 말은 허황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법에 대한 이해는
『연기란 찰나적인 실체들이 출몰하는 일시적인,
연속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들의 상호 의존성 즉 物性 또는 실체성의 결여를 말한 것』으로
이렇게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 내에서 중관파의 결론인 동시에
불교의 인연법에 대한 바른 이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