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일도1동 제주감협 중앙지소 건물 3층. 육중한 방음문을 열자 쿵쿵 거리는 드럼소리가 가슴을 울린다. 마이크를 잡은 리더 싱어는 마치 라이브 공연이라도 하는 듯 혼신을 다해 김광석밴드의 ‘나무’를 열창한다.
나 푸른 한그루- 나무
넓은 하늘을- 늘 꿈꾸며
두팔을 벌려 온 세상을 이 내- 품에
가득 가득- 안아 보고파
30대에서 40대 초반으로 구성된 6명의 직장인들이 전기기타와 드럼을 연주하며 무아지경에 몰입해 있는 모습. 직장인밴드 ‘이루후제(IRUHUZE)'의 연습실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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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 한승규. 퍼커션을 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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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대학 시절부터 통기타 동아리 또는 밴드활동을 하며 평소 가깝게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이들 중 한명이 “우리 음악 한번 해볼까”라고 제안한 게 지난 2000년의 일이었다. 직장인으로서 바쁘게 살아가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음악에 대한 열망을 고이 간직해 왔던 터라 어려움 없이 그룹이 결성됐다.
“연주를 하는 동안에는 직장 일로 쌓였던 스트레스 등이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이만한 좋은 취미활동이 어디 있겠는가"
팀 리더인 한승규씨(41)의 말이다. 한씨는 이 팀의 맏형이다. 소방장비를 판매하는 '한라안전세상' 대표로 일하면서 팀에서 퍼커션을 맡고 있다.
그가
처음 악기를 다룬 건 고 1때다. 제주제일고 교악대에서 작은북을 쳤다. 그 후 그는 제주대에 진학해 5인조 보컬그룹 엔틀러를 결성한다. 드럼을 맡고 있는 현동관씨(39)와 베이스를 맡고 있는 김성일씨(38)도 엔틀러 3기와 4기 출신이다.
“모두들 평범한 직장인들이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밴드를 만들고 연습실까지 마련했다. 그동안 하고 싶은데 먹고 살기 바빠서 못했다. 꿈을 못버리고 있다가 여유가 조금 되니까 다시 시작한 거죠”
현동관씨는 “대학 때 밴드를 했었지만 사회생활에 치이다 보니 음악은 ‘노래방’이 전부가 돼버렸어요. 그러다가 의기투합한 거죠”라고 거들었다.
# 퇴근 후엔 연주하며 끼 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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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럼 현동관과 베이스
김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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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들도 다양하다. 베이스 김성일씨는 한라양계영농조합에 다닌다. 현동관씨는 콩나물 공장을 경영하고 있는 부친의 일을 돕고 있다. 보컬 김경남씨(39)는 IT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평소 웅장한 성량과 화음을 자랑하는 그는 최신 곡을 섭렵하는 노래방 최고의 가수다. 리더 기타 김덕진씨(32)와 건반 이광희씨(34)는 팀에 합류하기 이전에 나이트클럽에서 밴드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가족들이 반대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었으나 가족들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성원해주고 있다고 한다.
직장인밴드 이루후제는 삭막한 경쟁시대에 저항하는 몸부림처럼 노래하고 연주한다. 이들의 음악은 10대 취향 댄스음악들만 활개 치는 대중음악계 풍토에 대한 반동(反動)이기도 하다.
연습을 시작한 지 30여분이 지났을까. 땀에 흠뻑 젖은 김성일씨는 “기타를 잡으면 살아있음을 느낀다”며 “마음껏 음악을 할 수 있는 연주공간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이곳이 ‘자유의 공간’이다.
다만 직장인이라는 특성상 주말이나 밤늦은 시간이 주 연습시간이다. 평일 때는 개별연습을 하지만 일요일 밤에는 합주를 한다. “매주 모여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연습 후에 술 한잔 걸치면 피로가 저절로 풀린다”고 이광희씨는 말했다.
라이브공연을 하듯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부르고, 드럼을 두드리고, 전자기타를 뜯는 직장인 밴드 이루후제. 이들에게 음악은 직장생활의 비상구다. 연주를 하는 동안 그들은 자유를 온몸으로 만끽한다.
물론 비용부담도 만만치 않다. 현재 연습실 13평 공간은 연 임대료가 180만원. 게다가 초반에는 악기 구입도 공동으로 하다가 나중에 악기를 업그레이드 하면서 개인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비용 지출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한승규씨는 또 퍼커션을 더 배우기 위해 매달 한차례씩 경기도 일산에서 개인교습을 받곤한다.
# 사진작가
김영갑씨와의 만남
호기심에 발동해 베이스 기타를 치는 김성일씨에게 “진짜 평범한 사람이 기타를 좀 친다 싶은 수준까지 되려면 얼마나 걸리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기타는 한 1년만 하면 된다. 그 대신 매일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루후제 밴드는 그냥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이웃을 찾아다니며, 의미 있는 음악회를 열고 있다.
지난해 12월 팀 결성 후 ‘겨울로의 초대’라는 첫 정기공연을 가진 이루후제는 오는 26일 밤 7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루게릭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을 앓고 있는 사진작가 김영갑씨를 돕기위한 후원의 밤 콘서트를 마련한다.
사진작가 김영갑씨(48)는 20년째 제주의 산과 바다, 오름과 들판을 렌즈에 담아내고 있다. 섬의 매력에 홀려 1985년 단신으로 제주에 정착했다.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에서 폐교를 개조해 만든 ‘김영갑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 근육신경이 마비되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그는 “자연이 병을 치유할 수 있다”라고 믿으며 투병 중이다.
이번 공연에는 신촌블루스 멤버인 강허달림과 테러J, 도내 통기타 가수들이 가세한다.
# 이 다음까지도 영원히
팀명인 ‘이루후제’는 제주도 사투리 그대로 ‘이 다음까지도 영원히’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이 다음까지 여러분과 더불어 따뜻한 삶을 이끌어내는 제주 음악의 자존심을 지켜나가겠다는 각오다.
활력을 얻기 위해, 또는 왕년에 활동했던 그룹사운드 시절을 잊지 못해 음악을 택한 직장인들. 지극히 평범한 외모와 사생활을 가진 이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음악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첫 정기공연 포스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리더 한승규씨의 글이다.
“처음 드럼스틱을 잡던 날이 생각납니다. 열심히 한다는 칭찬보다는, 못한다고 화(?)를 당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기억들이 지금도 이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가 봅니다. 음악이 너무나 좋았고, 그저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우린 만났습니다.…(중략)…우리 팀 이름이 IRUHUZE(이루후제)이듯이 이 다음에도, 언제나 우린 항상 함께합니다. 우린 제주 밴드 음악의 자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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