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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과 아버지의 왕위 쟁탈전(충렬왕과 충선왕)
1297년(충렬왕 23)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가 샐을 마감했다. 세자는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의 정인 ‘무비(無比)’ 탓이라 여기고, 아버지 허락도없이 아버지의 여인과 측근들을 사로잡아 참수한다. 세자 왕원(王願: 훗날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충선왕(忠宣王,1275~1325)은 고려 제26대 왕으로 이름은 왕원(王願)이다. 1275년 고려에서 아버지 고려 제25대왕, 충렬왕과 어머니 몽골의 공주 출신 제국대장공주(元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3살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최초의 여몽(麗蒙) 혼혈왕자였다.
몽골에서는 칭기스칸 후손들은 ‘황금씨족(黃金氏族)’이라고 일컫는다. 충선왕은 원 황제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으니 원나라 황금씨족에 포함되었다. 쿠빌라이의 장손자이자 원나라 황위 계승 서열 1위 ‘카말라(몽골제국)’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부다시린)와의 혼인으로 부마(駙馬) 자격까지 얻었다. 3세에 세자에 책봉되어 정통성을 입증했다.
충선왕은 어린시절 몽골과 고려를 자주 왕래했다. 어느날 외할아버지 쿠빌라이가 충선왕을 침전으로 불렀다. 어린 충선왕은 중국 역사서 통감을 읽고있었다.
“통감을 읽고 있다고 하던데, 역대 제왕중에서 누가 제일 뛰어나더냐?”
“한(漢)나라의 고조(高祖: 劉邦, 기원전 247년~기원전 195년)와 당(唐)나라의 태종(太宗 李世民,598~649) 입니다.”
“한 고조와 당태종을 짐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제가 나이가 어려 잘 알지 못합니다.”
어린 충선왕은 할아버지의 질문에 재치 있게 대답했다.
● 아버지 여인을 참수한 아들 충선왕.
충선왕은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아버지 여인 ‘무비(無比)’탓으로 돌리고 분노했다.
“수령궁에 작약꽃이 활짝피었는데 공주가 한 송이를 꺾어 오게 하여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흐느껴 울었다.” “곧 병을 얻어 개성 현성사(賢聖寺)에서 죽으니 그 나이가 39세였다.” <고려사 열전 제국대장공주>
아버지 충렬왕은 궁녀 무비를 정말 아껴서 도라산(都羅山)으로 매 사냥을 갈때면 항상 데리고 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비를 도라산이라 불렀다. 왕의 총애가 크지자 무비에게 붙은 자들이 안밖에서 제 멋대로 포악하게 굴었으므로 세자기 이를 몹시 미워했다.
충선왕은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장례를 마치고, 원(元)으로 돌아간다. 아버지 충렬왕은 양위(讓位)를 선언한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충렬왕이 원에 양위를 요청하며 보낸 표문(表文)이 있다. “왕비가 먼저 세상을 떠나 마음이 애달픈 것이 심하였습니다. 나이가 들어 늙고 병이 번갈아 나니 하루 아침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다면 서무(書務)의 처리는 누가 맡겠습니까?” <고려사 세가 충렬왕 23년>
1297년 제국대장공주가 사망 시 충렬왕의 나이는 62세였다. 충렬왕의 양위는 진심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양위 표문을 작성한 정가신[鄭可臣,1224년(고종 11)~ 1298년(충렬왕 24)]은 훗날 자살을 한다. 부인 제국대장공주 사망 3년 전에 1294년 장인 쿠빌라이가 사망했다.
충렬왕은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 장인과 부인의 죽음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 쿠빌라이의 뒤를 이은 원나라 성종[成宗: 테무르(鐵穆耳]은 제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의 후비 소생이므로 공주가 아니라며, 정통성을 부인한다. 공주의 정통성이 부정되면 남편 충렬왕의 부마 지위도 부정된다.
21세의 충선왕은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밀직사(密直司). 감찰사(監察司) 및 중군(中軍)의 판사(判事)를 겸직했다. 일부 관리의 인사권을 쥐고 있었고, 왕에 버금가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충렬왕보다 충선왕(忠宣王,1275~1325)이 황금씨족으로 원나라와 더 밀접했다.
● 1298년 1월 고려 제26대 왕으로 충선왕이 즉위했다.
충선왕의 부인 계국대장공주가 황태후에게 못 살겠다며 편지를 썼다. 공주는 조비(趙妃: 충선왕의 제4비)가 왕의 사랑을 독찾이하는 것을 시샘해 편지를 써 원나라에 보내 황태후에게 전하게 하였다. 충선왕이 계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후에 부부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특히 충선왕이 조비만을 총애하는 것을 투기해서 원 황실에 편지를 썼던 것이다.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를 말렸지만 실패했다.
궁궐문에 익명의 방이 붙었다. “조인규(趙仁規,1237~1308)의 처가 영험한 무당을 시켜 왕이 공주를 미워하고, 자기 딸만을 사랑하도록 저주하였다” <고려사 열전 계국대장공주>
이 소식을 들은 계국대장공주는 조인규와 그 처를 잡아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원(元)에 이 사건을 정식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조비(趙妃)는 계국대장공주보다 먼저 맞이한 충선왕의 정비(靜妃:西原侯 瑛의 딸)였다. 계국대장공주의 지시대로 조인규와 그 처를 옥에 가두고, 조인규의 아들 및 사위, 조비도 가두었다.
이 일을 조사하기 위해 원에서 파견된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결국 조비와 조인규는 원에 끌려가 심문을 받는다. 얼마뒤 원(元)은 충선왕에게 원으로 오라는 황명을 내린다. 충선왕의 환송식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원나라 사신이 충선왕의 왕의 직인을 빼앗아서 퇴위한 충렬왕에게 주었다.
아들 충선왕을 퇴위시키고, 아버지 충렬왕의 복위를 시킨다. 고려 역사상 최초 아버지와 아들이 왕위가 교체되었다. 충선왕은 1298년 1월 즉위해서 같은해 8월에 폐위되었다. 원에서는 충선왕의 폐위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천명망살(擅命亡煞 : 함부로 명령하고 망령되이 사람을 죽이다)” 충선왕이 원에게 고본고본하지 않고 밉보일 행동을 했다는 것이 폐위 이유이다.
충선왕은 즉위 후 30여 개의 개혁교서(改革敎書)를 발표했다. 인사행정 개정, 공신포상, 백성착취금지 등을 발표했다. 아버지 충렬왕의 측근 정치의 폐단으로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지자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망(流亡)을 했다. 국경을 넘어서 요동지방으로 원나라 본토로 유망을 하기까지 했다. 충선왕은 개혁을 통해 유망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관제(官制)는 원래 원나라가 고려에 요구해서 고려의 관제를 격하했다. 원의 관제 개편 요구에 충렬왕은 어쩔 수 없이 응했다. 그래서 상위 관청은 관제를 격하하고, 중하위 관청은 유지했다. 이러니 관부(官府)끼리 격이 맞지 않았다. 고려관제 서열이 꼬이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충선왕은 고려의 기형적인 관제를 개편하려했다. 이러한 개혁 조치들을 원에게 보고하거나 상의하지 않고 단행했다. 원의 입장에서 충선왕에 대한 통제가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 원은 충렬왕을 복위시킨 다음에도 계속 충렬왕을 견제했다. 아버지 충렬왕과 아들 충선왕은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충렬왕은 원과 거리를 두며 고려의 독립성을 확보하려 했다. 충선왕은 원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개혁을 단행하려 했다. 결국 두 국왕의 정치적 대립은 상당한 기간 동안 이어 진다.
● 충렬왕은 며느리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를 추진한다.
충선왕과 공주는 사실상 별거 상태였다. 충렬왕은 왕전(王琠,미상~1307)에게 좋은 옷을 입혀 여러 번 오가게하여 공주의 눈에 띄게 하였다. 공주가 개가 하면 아들 충선왕의 원 부마(駙馬) 지위를 잃을 것이고, 고려 국왕의 자격도 박탈 당한다. 충렬왕은 아들의 왕위를 차단하기 위해 공주의 개가를 추진했다.
1305년 공주의 개가를 허락받기 위해 충렬왕과 왕유소[王維紹, 미상~1307년(충렬왕 33)]는 원에 갔다. 왕유소는 충선왕이 평소 자식된 도리를 잃었고, 공주와도 잘 지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충렬왕이 이를 못 마땅히 여겨 서흥후 왕전(瑞興侯 王琠)을 후계자로 삼고자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원 황실에서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를 반대한다.
원 황실이 공주 개가를 반대한 이유는 서흥후 왕전은 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왕유소를 부자 사이를 이간질한다며 체포한다. 충렬왕은 충선왕이 쿠빌라이의 외손자이므로 충선왕을 이길 수는 없었다. 충선왕의 부마 자격을 박탈하려는 충렬왕의 계획은 실패했다.
충선왕은 폐위되고 10년 동안 원에 머물면서 인맥을 쌓았다. 1307년 원 황제 성종이 죽자 황위 다툼이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황위 쟁탈전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충선왕이 지지한 인물은 제7대 원 황제 무종(武宗,1281~1311)이었다. 원나라 무종과 인종(仁宗,1275~1320)이 아직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에 늘 충선왕과 함께 지내면서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고려사 세가 충선왕 즉위년>
충선왕을 호위하고 있던 군사들이 직접 내전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황위 싸움에 가담했다. 반면 충렬왕은 무종. 인종과 대립했던 세력을 지지했다. 원에서 내전이 끝난 다음 충선왕과 충렬왕의 입지가 극명하게 갈렸다. 원에서 세력을 키운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할 뻔했던 서흥후 왕전을 비롯한 반대파를 처형했다.
아버지 충렬왕은 측근 세력을 다 잃었다. 1308년 충렬왕은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충렬왕은 누워있을 때, 아들을 보고 싶어했다. ‘한번이라도 심양왕(충선왕)을 볼 것을 생각하였으나....글을 보내서 돌아올 것을 재촉했지만 하늘이 준 수명이 다했으니 어찌 서로 만날 수 있으랴’ <고려사 충렬왕 34년>
충선왕은 아버지의 죽음소식을 듣고, 급하게 돌아왔다. ‘충선왕이 원에서 유성처럼 빨리 길을 달려와 10여 일만에 도착하였다.’
<고려사절요 충렬왕 34년>
충선왕은 폐위된 지 10년 만에 1308년 복위된다. 충선왕의 전성기는 복위 1년 전 무종이 옹립 직후부터 시작된다. 원 황제는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책봉했다. 심양(瀋陽). 요양(遼陽) 지역의 지배권을 받았다. 그러면서 원의 여러 제왕 가운데 한명이 된다. 이때 충렬왕이 세상을 뜨자 고려 국왕이 되면서 심양왕을 겸하게 된다.
원에서는 어전회의를 통해 주요 정책을 결정한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케식(몽골어로 지배자를 위하여 창설된 친위대)이라고 부른다. 케식은 중요한 국사를 다루기 위해 모인 원나라 황족들이다. 충선왕은 케식의 일원으로서 원의 정책 결정에 참석하면서 원의 실력자가 되었다.
충선왕은 10년 전 실패했던 개혁을 1308년 다시 진행한다. 충선왕 복위 시기 원 간섭이 줄어 들었다. 얼마후 충선왕은 원으로 떠나 5년간 고려에 오지 않는다. 전지정치(傳旨政治)를 한다. 전지정치는 교지(敎旨)를 전해 국무를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원에서 전지를 통해 고려의 개혁을 추진한다.
고려에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개혁이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왕의 정책을 대행하는 관료들에 의해 문제가 발생한다. 권력이 집중되면서 자신이 피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측근 정치가 재현되었다. 소수 측근에 의해 운용된 인사권과 재정 개혁정책이 사적인 이해 관계가 개입되는 폐해가 발생했다.
충선왕의 전지 정치는 원활하지 못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계속 충선왕의 환국을 요구했다. 충선왕은 원의 황제, 황후, 황태자가 자신을 크게 총애하여 환국할 수 없다고 한다. 1312년 원 황실은 충선왕에게 고려로 환국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충선왕이 핑계를 대며 환국을 미루자 원은 고려 국왕과 심양왕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을 가한다.
결국 충선왕은 아들 강릉대군(충숙왕)에게 고려 양위를 한다. 충선왕은 고려가 아닌 원에 남는 것을 택한 것이다. 원에 남은 충선왕에게 원 황제는 관직 서열 1위 우승상을 제안할 정도로 승승 장구했다. 원에서 만권당(萬券堂)을 세웠다. 만권당은 성리학자들의 연구를 위해 세운 독서당(讀書堂)이다.
만권당의 수많은 한인 성리학자들을 후원했고, 권위가 있는 기관으로 성장했다. 고려 문신 이제현(李齊賢,1287~1367)을 만권당에 불러 원나라 성리학자들과 교유하게하여 고려에 성리학이 수용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충선왕과 막역했던 7대 황제 무종(武宗, 1281~1311)과 8대 인종이 사망했다.
원 9대 황제 영종(英宗,1326~1332)이 즉위했다.
영종은 충선왕과 반대 입장이었다. 충선왕은 티베트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티베트까지는 1만 5천리 약5,890㎞이다.
충선왕의 유배 시절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소달구지에 노숙하며 어렵게 반년이 되어서야 그 지역에 도달하여 보릿가루를 먹으며, 토굴에서 살고 있어 갖은 고생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익재집>
충선왕은 티베트에서 복귀 후 북경에서 사망했다. 힘이 있던 충선왕의 권력이 쇠락하면서 고려가 위기에 빠진다. 충선왕이 유배 간 사이에 고려라는 나라를 없애고 원의 한 지방으로 만들자는 책동이 발생한다. 책동을 일어킨 사람은 고려 사람(부원세력)이었고, 원 황실에서도 부원 세력의 주장을 가능하다고 여겼다. <끝>
출처 > blog.naver.com 피오나 호기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