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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신(金柱臣)
[생졸년] 1661년(현종 2)~1721년(경종 1) / 향년 60세
조선후기 영돈녕부사, 호위대장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하경(廈卿), 호는 수곡(壽谷)·세심재(洗心齋).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김남중(金南重)이고, 아버지는 생원 김일진(金一振)이다. 숙종의 장인이며, 박세당(朴世堂)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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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서지 국조인물고 속고1 국척(國戚)
수곡(壽谷) 김공(金公) 신도비명(神道碑銘) - 이광좌(李光佐)
저 멀리 태고(太古) 이래 후비(后妃)의 가문을 살펴보건대, 촉(蜀)ㆍ도(塗)ㆍ신(莘)ㆍ지(摯)1)에서 부덕(婦德)을 길러 성인의 배필이 되어 만세(萬世)에 경사를 남긴 것은 필시 그 이유가 있을 터인데, 시대가 요원하여 자세히 알 수 없고 후세로 내려와서 어진 후비로 일컬어진 자는 자신을 근신(勤愼)으로 견지하였다.
대체로 정숙과 근신은 효성과 우애에서 시작된 것이고 아름다움은 경술(經術)에서 나온 것인데, 임금과 후비의 사이에서 여유 작작하게 처신한 사람은 우리 경은공(慶恩公, 경은 부원군 김주신)이 아닌가 싶다. 공은 경주 김씨(慶州金氏)이고 시조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인데, 고려(高麗)로부터 지금까지 높은 벼슬아치와 유명한 사람이 줄줄이 나왔다.
김곤(金稇)이란 분이 우리 태조(太祖)를 보필하여 개국(開國)한 공로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고 제숙(齊肅)의 시호를 받았으며, 제숙의 손자 김종순(金從舜)은 깨끗한 덕망으로 저명하고 판한성부윤(判漢城府尹)을 지냈으며 공호(恭胡)의 시호를 받았고, 공호의 손자 김천령(金千齡)과 증손 김만균(金萬鈞)은 부자(父子)가 연이어 대과(大科)에 장원하였다.
김천령은 명성이 크게 났었고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지냈으며, 김만균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내고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과 월성 부원군(月城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종숙부(從叔父)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증(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김인령(金引齡)의 양자로 들어갔다.
월성군의 아들 김명원(金命元)은 목릉(穆陵, 선조(宣祖)) 때의 유명한 신하로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평난 공신(平難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경림 부원군(慶林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익(忠翼)인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김수렴(金守廉)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광해군(光海君) 때 정사가 문란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용히 살았는데, 뒤에 영의정(領議政) 오원군(鼇原君)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김남중(金南重)은 예조 판서(禮曹判書) 경천군(慶川君)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정효(貞孝)의 시호를 받았는데 장자(長者)로 일컬어졌으며, 아버지 김일진(金一振)은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으로 숨은 덕이 있었으나 불행하게 세상을 일찍 떠났는데, 공의 귀(貴)로 인해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추증받았다.
어머니 풍양 조씨(豊壤趙氏) 증(贈) 정경 부인(貞敬夫人)은 진사(進士) 증(贈)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조내양(趙來陽)의 딸로 포저 선생(浦渚先生)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의 손녀이자 충익공(忠翼公) 이시백(李時白)의 외손이다. 지극한 성품과 명철한 식견이 있었는데, 그 두 가지 미덕을 공이 이어받아 신축년(辛丑年, 1661년 현종 2년) 10월 4일에 태어났다.
공의 모습이 수려하였으므로 상을 보는 사람이 감탄하기를, ‘이 아이는 명인(名人)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가 매우 엄하게 가르쳤는데, 항상 ‘반드시 원대한 그릇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공은 효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어머니의 말씀을 신중히 받들어 뜻을 독실히 가지고 학문에 힘을 쏟았다. 일찍이 밤새도록 글을 읽다가 할아버지가 병이 날까 염려하자 곧바로 들리지 않게 소리를 낮추어 읽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백씨(伯氏) 진사공(進士公, 김성신(金聖臣)도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공이 정성을 다하여 궁핍한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장례(葬禮)를 유감없이 치르고 상례(喪禮)를 매우 신중히 지켰다. 부조로 들어온 것은 다른 곳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상사(喪事)로 들어온 것을 가산(家産)에 보태지 않는다.” 하고, 제기(祭器)를 남에게 빌리지 못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조상의 제사를 구차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공이 매우 야위어 건강이 위태롭자 숙부(叔父) 풍애공(楓崖公) 김필진(金必振)이 ‘약을 먹어 보양을 해야 한다.’고 권하였다. 공이 차마 그 말을 듣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니, 풍애공이 그의 독실한 효성에 감탄하여 억지로 권하지 못하였다. 공이 젊어서부터 이미 마음을 간직하여 자신을 성찰하고 조용히 살면서 밖에 잘 나가지 않았는데,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공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아무개는 장사(莊士)라고 하니, 한번 보고 싶다.”고 하였다.
처음으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공의 문하에 가 노닐었는데, 서계가 매우 존중하면서 말하기를, ‘아무개는 장차 대성(大成)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한번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나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금 과거를 보지 않다가 병자년(丙子年, 1696년 숙종 22년)에 비로소 힘써 나아가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공론이 여전히 그를 수석에 두지 않은 것을 애석해 하였다.
그때 시험의 주관자 최석정(崔錫鼎) 공이 전형(銓衡)을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장원서 별검(掌苑署別檢)으로 보임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699, 숙종 25) 여름에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로 승진하였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전직되었다.
경진년(庚辰年, 1700, 숙종 26)에 순안 현령(順安縣令)으로 나가 정사를 하되 밝게 살피고 엄하게 하기를 숭상하지 않았으나 은정과 위엄이 아울러 시행되어 관리들이 단속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는데, 임오년(壬午年, 1702, 숙종 28) 9월에 (따님이신) 우리 혜순 자경 헌열 대왕대비 전하(惠順慈敬獻烈大王大妃殿下, 인원왕후)께서 중전(中殿)의 자리에 오르자 공의 임소(任所)에서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임명하였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승진하여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는데, 그 사이에 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를 겸임하였다.
특별히 호위 대장(扈衛大將)에 임명되어 비로소 임금을 알현하러 갈 때 내시(內侍)에게 이르기를, “처음으로 군부(君父)를 알현하는 자리니만큼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고 한참 버티다가 임금이 빨리 들어오라고 독촉하자 들어갔다. 겨울에 이르러 죄수(罪囚)를 재심(再審)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는데, 진퇴하는 것과 보고하는 바가 차분히 법도에 맞아 평소에 익힌 사람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을유년(乙酉年, 1705, 숙종 31)에 임금이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하는 데 정무(政務)가 방해되었으므로,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이 건의한 대로 임금이 열람하기에 편리하도록 승지가 문서의 중요한 대목에 표지를 붙여 올리면 공이 기록하여 가지고 가 올리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경우에는 공이 제거(提擧)로 연회를 관리하여 적은 경비로 일을 잘 치렀으므로 네 번이나 관작을 승진하고 안장과 말을 하사받았다. 연회에 사용하는 악장(樂章)이 대부분 빠지거나 뒤섞였는데, 공이 정리해 놓고 아악(雅樂)에 가까운 것을 선택하여 사용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710, 숙종 36)에 해적(海賊)이 침입하였다는 헛된 소문이 나돌았는데, 공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른바 해적이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이는 큰 해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왜인(倭人)들은 2백 년간 자주 해안을 침범하여 시험해 본 뒤에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침범하였고, 청인(淸人)은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부터 소소한 분쟁을 벌이다가 병자년(丙子年, 1636, 인조 14)에 이르러 비로소 병력을 동원하여 침략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성지(城地)를 탈취하려는 외적이 어찌 이유없이 하루아침에 침략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나라가 있는 대적(大敵)이 아니고 또 그들이 우리나라 경내(境內)에 한번도 발을 들여놓아 보지 않았습니다. 해외에 사는 그들이 어떻게 타국의 병력(兵力) 다소와 산천(山川) 형세를 자세히 알아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들어가듯이 일거에 서울을 침범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지금 장수를 명하여 출전(出戰)할 것은 생각지 않고 먼저 도성(都城)을 떠나는 것부터 논함으로써 안팎에 소요가 일어나고 있으니, 정말로 체통를 잃었습니다. 비록 천하의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없으나 지금의 형세로 논하건대, 2, 30년간은 별다른 우려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매우 수긍하였다.
공이 상방(尙方)을 관장한 뒤로 축적된 것이 매우 풍부해지자 임금에게 아뢰기를, “호위청(扈衛廳)의 군관(軍官)들이 모두 활을 잘 쏘고 있으나 활과 화살이 부족합니다. ≪한서(漢書)≫를 상고해 보면 상방검(尙方劍)이 있으니, 옛날에는 병기(兵器)도 상방에서 공급한 것 같습니다.
본원(本院)으로 하여금 활과 화살을 제작해 놓았다가 완급(緩急)에 따라 군관들에게 지급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두 곳의 상방이 모두 협소하고 허술한데다 어복(御服)을 별도로 보관한 곳도 없었는데, 공이 모두 다시 중건하고 별도로 면복각(冕服閣)을 지어 위치를 잘 어울리게 하였다.
공이 조정의 일에 대해 털끝만큼도 간여하지 않았으나 해적은 나라에 관계되는 바가 중대하였기 때문에 아뢰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이 백관보다 훨씬 상황을 제대로 꿰뚫었으니, 이러한 일로 보면 공의 흉중에 간직된 바를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복잡한 일을 정밀하게 처리하는 것에 있어서는 일에 따라 나타났다.
자전(慈殿)이 마마와 홍역을 앓자 임금이 공으로 하여금 금중(禁中)을 숙직하도록 하였다가 자전의 병환이 낫자 말, 전답, 노복을 하사하고 자제와 사위 중 한 명에게 벼슬을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약방(藥房)의 숙직을 오래도록 파하지 않자 공이 파할 것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송 인종(宋仁宗)이 병환이 나아 여이간(呂夷簡)을 불렀는데 이상하게 늦게 도착하였습니다.
그 뒤에 여이간이 대답하기를, ‘신이 말을 달려오면 인심이 놀라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천천히 온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숙직을 파하자고 요청한 것도 이러한 뜻에서였습니다.” 하니, 식자들이 더욱더 훌륭하게 여기었다.
경자년(庚子年, 1720, 숙종 46) 6월에 숙종(肅宗)의 병환이 위독하자 특명을 받아 입직(入直)하였다가 숙종이 승하하자 대신(大臣)들과 같이 염습(殮襲)에 참여하였으며, 자전이 편치 않아 그대로 숙직하였는데, 공의 병환이 심한 것을 경종(景宗)이 딱하게 여겨 집에 돌아가 요양하라고 명하였다.
경종이 또 공이 반년이나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내시를 보내어 고기를 먹도록 권하였으나 공은 부모의 상처럼 견지하면서 매우 슬퍼하였다. 그 이듬해 가을에 병환이 점차로 심해지자 임금이 어의(御醫)로 하여금 지켜 보도록 하였는데, 공은 여전히 세수하고 머리를 빗는 등 정신이 혼란하지 않았고 어의를 대할 적에는 반드시 모습을 단정히 하였는가 하면 사후(死後)의 일을 자세히 지시하였고, 국상(國喪)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여 흰색의 비단으로 염(殮)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관목(棺木)은 반드시 임금이 하사한 것을 사용하고 남들처럼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지 말라. 그리고 외부의 관원이 조금 후하게 부조한 것이나 여러 부처에서 장사를 치르기 전의 녹봉을 지급할 경우에는 모두 받지 말라.”고 하였다.
결국 이해 7월 24일에 향년 61세로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음(訃音)이 나가자 온 나라 사람들이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애도하면서 말하기를, “어진 국구(國舅)가 돌아가셨다.” 하였고, 임금은 매우 슬퍼하면서 곧바로 애도(哀悼)의 뜻을 표하는 하교를 내리고는 특별히 통곡하고 3일간 조회를 중지하였다.
삼전(三殿)에서도 각각 내시를 보내어 조문하고 호상(護喪)하였는데, 장례를 치를 때에도 그렇게 하였고 상례의 제물은 모두 관청에서 공급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동원(東園)의 황장목(黃腸木), 역칠(瀝漆), 단금(緞錦)과 수의(襚衣)로 쓸 어의(御衣)를 하사한 뒤 3년까지 녹봉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동궁으로 있던 지금 주상(主上)도 곧바로 조문하고 친히 빈렴(殯殮)에 참여하였다. 그해 9월 14일에 고양군(高陽郡) 서쪽 대자산(大慈山) 의정공(議政公, 김일진)의 묘소 오른쪽 손향(巽向)의 묘원에 장례를 치렀는데, 임금은 예관(禮官)과 내시(內侍)를 보내어 재차 제전(祭奠)을 드리고 여러 군에서는 제수를 제공하고 내수사(內需司)에서는 묘비(墓碑)와 묘각(墓閣)을 세웠다.
효간(孝簡)의 시호를 내리고 또 근래의 관례에 따라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과 법도대로 겸직을 추증하였으니, 시종 영광이 지극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온화하고 간결하며 풍채가 옥(玉)과 같아 일견(一見)에 단정한 인사임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이 화평하고 일에 임해 자상하였으며, 몸은 옷을 가누지 못할 것 같았으나 중심은 굳건하여 빼앗기 어려운 지조가 있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할아버지를 섬길 적에 공경과 사랑이 독실하였는데, 부드러운 목소리와 기쁜 얼굴이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였다. 할아버지가 궁하게 살아 기쁜 일이 드물었으나 공 때문에 항상 얼굴이 펴졌다. 공이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을 매우 애통하게 여겨 선친에 대한 말이 나오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고, 혹은 밤중에 흐느끼다가 큰소리로 탄식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글을 읽다가 고인(古人)이 효도하고 사모하는 대목에 이르면 오열(嗚咽)하며 끝까지 읽지 못하였다.
마음을 쏟아 추모하여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참배하고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마치 아버지를 본 것처럼 여기어 초상(初喪) 때처럼 슬퍼하였다. 자신의 생일에는 밤새도록 사모하고 잔치를 열거나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으며, 연회에 참석한 일도 드물었다. 분가(分家)할 적에 가산(家産)의 반을 종손(宗孫)에게 주어 제사를 후하게 지내도록 하고 그 반을 나누어 가지었다.
묘소에 관계되는 일이면 마음을 쏟아 경영하고 빈한하다고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묘막(墓幕)에다 ‘영사(永思)’란 편액(扁額)을 붙이고 달마다 한번씩 성묘하되, 말[馬]이 없으면 도보로 갔다. 이미 귀해지자 임금에게 진정(陳情)하기를, “신이 태어나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오직 자주 성묘를 해야만 지극한 애통을 달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히 자주 휴가를 요청하여 고을에 폐단을 끼칠 수 없으니, 일이 없을 때 사적으로 왕래하였으면 합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민망하게 여겨 윤허하였다. 여러 아들이 혹시 풍수설(風水說)을 믿어 다른 산으로 이장(移葬)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글을 지어 경계하였는데, 그 글에 ‘비록 길지에다 묘소를 썼더라도 대자산(大慈山)이 아니면 죽은 사람의 슬픔은 파리가 빨아먹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속옷 한 벌과 비단주머니 하나를 싸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준 것이다. 후일 나의 관 속에 넣어야 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 아버지를 잃어 상처가 깊고 또 빈한하여 어버이가 돌아가셨을 때 후히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으면 장복(章服) 이외에 비단은 사용하지 말라. 혹시 임금이 비단을 하사할 경우에는 몇 자[數尺]만 잘라 관 속에 넣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뒤에 그대로 따라 하였다.
풍애공(楓崖公, 김필진)을 아버지처럼 섬기었고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을 풍애공처럼 섬기어 안팎의 관직에 있을 때 영화롭게 봉양하여 그 기쁨을 다하였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고령에도 예절에 따라 상막(喪幕)을 지키면서 곡하니, 조문하는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형에게 두 고아(孤兒)가 있었는데, 지성으로 교육하고 어머니처럼 보살펴 주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으므로 종신토록 애통해 하였고 생각이 날 때마다 눈물을 흘렸는가 하면 그들의 아내를 자식처럼 여겨 한 집에 데리고 살았다. 일찍 과부가 된 큰누님을 잘 봉양하였고 일찍 죽은 막내 누이의 집안을 생전과 다름없이 보살펴 주었다.
당형(堂兄) 청풍공(淸風公) 김정신(金鼎臣)을 의지하고 섬기면서 매우 독실하게 존경하였다. 청풍공을 전송하거나 영접할 때 반드시 중문(中門)까지 나갔고 그의 집을 찾아갈 때에는 반드시 수레를 타지 않고 도보로 가서 종일토록 꿇어앉아 이야기하였으나 나태한 기색이 없었으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쭈어본 뒤에 하였다.
이를 미루어 빈한한 친족이나 친구가 있으면 서둘러 도와주었다. 그러나 범 문정공(范文正公, 송 인종(宋仁宗) 때의 범중엄(范仲淹))이 ‘종족을 돌봐주지 않으면 어떻게 지하에서 조상을 뵐 수 있겠는가?’라고 한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 대목을 세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감탄하였다. 이에 궁중에서 하사한 음식이나 여러 부처에서 나누어준 것은 모두 바깥 창고에다 넣어 두고 종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대체로 그의 독실한 효성과 순수한 행실이 끊임없이 충심에서 발로되어 종족에게 젖어들고 일세(一世)에 믿음을 주었다는 것을 속일 수 없다. 평소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경건하게 앉아 있었고 책상의 도서(圖書)도 정연하였다.
사람을 접할 때 노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공경으로 대하면서 말씀이 점잖고 자상하여 저속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는가 하면, 비록 다급한 상황을 당하여도 항상 차분하였고 비록 질병에 시달려도 나태한 적이 없었다. 지위가 높아지면서부터 두려워서 편안하지 않아 소심(小心)으로 근신한 지 20년이 되도록 하루같이 하였다.
5년간 교자를 타지 않다가 병환이 난 뒤로 교자를 탔으나 수행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고 다닐 때에 잡인을 물리치지 않았다. 대궐에 들어서면 숨을 죽이고 걸으면서 조금도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일찍이 자전(慈殿)의 병환을 살펴보러 들어갈 때 나이 어린 궁녀(宮女)가 전각의 대청에 서서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어린 궁녀의 동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부원군은 사람을 쳐다본 적이 없으니, 내가 서 있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궁중에서 미담(美談)으로 전해졌다. 집 사람에게 ‘궁중의 일은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발설하지 말라’고 통렬히 경계하고 항상 말하기를, “사적으로 뵈일 적에 더러 특별한 예우를 받는데, 이것만으로도 나의 수명을 재촉하기에 족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가끔 궁중의 하인을 보내어 병환을 묻고 약제를 하사하면 반드시 엎드려 맛을 보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으며, 하사한 물품이 상례(常例)에 지나칠 경우에는 오래도록 불안해 하였다. 선왕(先王, 숙종을 말함)이 10년이 넘도록 질병을 앓았는데, 날마다 조석으로 문안을 드렸고 기력이 쇠약해져도 여전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자, 임금이 매우 염려하여 날마다 문안하지 말라고 누차 말하였으나 끝내 변하지 않았다.
공이 오래 살지 못한 것은 거의 이로 인한 것이었다. 공적인 모임에서는 반드시 먼저 갔다가 나중에 나왔고, 관직에 임해서는 대체를 견지하여 작은 것들이 잘 거행되었다. 청탁을 사절하고 혐의스러운 일을 멀리 피하였으므로 집안이 물처럼 깨끗하였다. 측은한 마음으로 사람을 아끼어 인명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매우 경계하였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옛날 어떤 임금은 사람에게 죽일 놈이라고 욕설도 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관리가 감히 형벌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항상 분노로 인해 사람을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죄를 지은 자를 반드시 옥에 가두어 놓고 그 사람의 강약(强弱)과 빈부(貧富)를 천천히 살펴보고 나서 판결을 내렸다. 형조에 있을 때 어떤 관리를 심문하다가 종기가 위중하여 죽겠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연좌된 바가 죽을 죄가 아니다.” 하고 곧바로 방면하여 약을 주어 치료해 결국 살아났다.
그뒤에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가 살아나지 않을까 염려되어 며칠 동안 잠자리가 불편하였다.”고 하였다. 매양 죄수를 재심하여 보고할 때 애써 법을 낮게 적용하여 살아난 사람이 많았으며, 아래 노복에 이르기까지 자애와 포용을 베풀고 짐승도 그렇게 하였다.
일찍이 저술한 변론(辨論)에 ‘옛날에는 희생(犧牲)으로 쓸 소와 농경에 사용하는 소가 달랐다. 임금이 일이 있을 때 희생으로 쓸 소를 잡고 농경에 사용하는 소는 잡지 않았다. 고인(古人)이 금수(禽獸)에 있어서도 낳는 것을 보고 죽이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그것의 힘을 빌어 먹고 살면서 어떻게 차마 도살하여 그 고기를 먹는단 말인가? 이로 인해 고인이 농경에 사용하는 소를 잡아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어 종신토록 쇠고기를 먹지 않았고 개나 말이 죽어도 반드시 싸서 묻었다.
공의 가문이 본래 청빈(淸貧)하였다. 처음 왕실(王室)과 혼사를 정할 때 여관(女官)이 찾아와 부엌이 썰렁한 것을 보고 돌아가 임금에게 아뢰자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사대부(士大夫)는 빈한을 달게 여기는 것을 귀중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이미 귀(貴)해지자 가정의 일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봉양을 매우 간소하게 하였다.
항상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이천(伊川, 북송(北宋)의 학자 정이(程頤)의 호)이 말하기를, ‘자신을 봉양하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좋게 하려고 하는데, 이는 이미 자신이 좋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정말 격언(格言)이다. 몸과 마음이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도 저절로 감손된다.”고 하였다.
관복의 띠를 사람에게 빌려서 사용하고 임금이 하사한 초관(貂冠)을 10년간 바꾸지 않았다. 항상 사치를 금지하여 비록 부녀자라도 현란한 홍자색(紅紫色)의 옷을 입거나 기괴한 물건을 차지 못하도록 하였다. 무당과 여승을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하고 하인들을 엄중하게 단속하여 세력을 믿고 사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였다.
물건을 교환할 적에는 값을 따지지 않고 상대방이 이익이 있게끔 하였다. 안방을 사유(四留)로 명명(命名)하였는데, 이는 고인이 저술한 사유명(四留銘)의 의의를 취한 것이었다. 처음에 나라에서 하사한 집으로 이사갔을 때 이웃집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다가 이윽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살피지 않아 좋은 마을을 잃을 뻔하였다.”고 하였다.
평생 동안 글을 맛있는 고기처럼 좋아하여 매양 말하기를, “세상의 지극한 즐거움도 이와 바꿀 수 없다.”고 하였는데,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로부터 백가(百家)의 서적에 이르기까지 궁구하였다. 항상 새벽에 일어나 적어도 사서(四書) 몇십 장을 읽었는데, 목소리가 웅장하고 깨끗하여 구슬을 굴리는 것 같았다.
총명하여 한번 읽으면 다시는 잊어버리지 않았고 병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관청에 나갈 때도 책을 가지고 나갔다. ≪소학(小學)≫을 숙독(熟讀)하여 자신을 가다듬을 때 반드시 이를 기준으로 삼았고, 특히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매우 독실히 신봉하였다. 공이 비록 타고난 기질이 매우 아름다웠으나 글을 부지런히 읽어 힘을 얻은 것이 틀림없다.
사람에게 독서를 권할 때 반드시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먼저 권하면서 말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먼저 마음을 다스리고 성정(性情)을 함양해야 하니, 문장은 귀하게 여길 것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아이들은 뜻이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잡서(雜書)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먼저 ≪소학(小學)≫,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가르쳐 방향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자제를 엄하게 가르쳐 앞에서 떠들거나 웃지 못하게 하고 잘못이 있으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드시 자상하게 가르쳤고, 만약 고치지 못하면 더러 음식을 먹지 않고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였다.
항상 경계하기를, “학문은 스스로 힘써야지, 독촉하기를 기다릴 것이 뭐 있겠는가?”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고인(古人)의 글을 읽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면 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독서를 게을리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말하기를, “비록 달통한 호걸의 재주가 있더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라도 막힌 곳이 있을 것이다.” 하고, 몸가짐을 경건히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말하기를, “병통은 자신을 천하게 여기는 데 있다.
이 몸을 만금(萬金)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비록 묵중하더라도 물 속의 반석(盤石)처럼 안정되어야 쓸모가 있다. 들뜨고 조급한 것이 가장 몸과 마음을 해친다.” 하고, 세상의 시비에 대해서는 입밖에 꺼내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 후하게 하려고 애썼으나 사귀는 사람과 물처럼 담담하여 조금도 친밀하거나 소원한 바가 없었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각각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권하여 마지않았고, 사람에게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대면하여 말하였으나 반드시 화평한 얼굴로 말하고 노기띤 얼굴로 말하지 않았다.
공이 이미 학문을 축적하여 소득이 두터웠으므로 문장으로 발로된 바가 순수하고 왕성하며 간절하고 깊었다. 문집(文集) 열두 권이 있는데, 대부분 선대의 덕을 천명(闡明)하였고 기문(記聞), 산언(散言) 제편(諸編)은 명언(名言)이 많다. 일시의 거장(巨匠)들이 공의 글을 매우 아끼면서 ‘넉넉히 문단의 사표가 될 만하다.’고 말하였다.
아! 공과 같은 명망, 미덕, 규범, 박식으로 외척에 구애받아 조금도 당시에 시행해 보지 못하고 말았다. 어찌 문장만 그러하였겠는가? 그러나 겸허와 근신으로 시종 관철하여 위아래를 감동시킴으로써 넉넉히 후세의 법이 되었으니, 나라가 공에게 힘입은 바가 직책을 맡아 충성한 사람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격언에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멀리 뻗는다.’고 하였는데, 정말 맞는 말이다. 후세에 공을 보는 자들도 ‘근본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지, 괜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공의 휘(諱)는 주신(柱臣), 자(字)는 하경(廈卿), 호는 수곡(壽谷)이다. 부인 가림 부부인(嘉林府夫人) 조씨(趙氏)는 영평 현령(永平縣令) 조경창(趙景昌)의 딸이고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 조석형(趙錫馨)의 손녀이자 예조 참판(禮曹參判) 죽음공(竹陰公) 조희일(趙希逸)의 증손으로서, 단정하고 묵중하며 성실하였다.
시집가기 전에는 친척들이 효성스럽고 유순하다고 일컬었으며, 시집가자 시어머니가 거짓없이 사랑하고 공경하였다고 칭찬하였는가 하면 서자(庶子)와 서녀(庶女)들을 자신의 소생처럼 보살피고 풍애공(楓崖公)의 부인을 시어머니처럼 섬기었으니, 그 덕을 알 수 있다.
귀해지자 시종 한결같이 두려워하고 근신하였다. 공보다 1년 먼저 태어나 신해년(辛亥年, 1731, 영종 7) 9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애도하며 공의 상(喪)에 비례하여 부조를 내려 장례를 치루었다. 공이 2남 3녀를 낳았다.
큰아들은 전임 공조 참의(工曹參議) 김후연(金後衍)으로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효대(金孝大), 김형대(金亨大)이다. 둘째 아들 전임 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김구연(金九衍)은 공의 유언에 따라 당형(堂兄) 김개신(金介臣)의 후사(後嗣)로 들어가 풍애공의 제사를 끊기지 않게 하였는데, 1녀를 두었다.
큰딸은 금산 군수(錦山郡守) 이덕린(李德鄰)에게 시집가 아들이 없어 이후배(李厚培)를 양자로 들였고, 둘째 딸은 대왕대비(大王大妃, 인원왕후)이고, 셋째 딸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윤면교(尹勉敎)에게 시집가 2남 윤동욱(尹東旭), 윤동석(尹東晳)을 두었다. 공이 측실(側室)에게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가연(金可衍), 김내연(金乃衍)이고 딸은 구홍좌(具弘佐)에게 시집갔다.
나 이광좌는 공의 가문과 대대로 세의(世誼)가 있었지만 우연히 공의 얼굴만 보지 못하였는데, 내가 일찍이 장흥리(長興里)에 사는 청풍공을 찾아뵈었을 때 한쪽에 앉아 있는 어떤 사람에게서 풍기는 광채가 온 자리를 엄습하므로 내가 깜짝 놀라 물어보니, 청풍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나의 종제(從弟) 아무개를 모르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평소에 아는 사람처럼 공과 친밀해졌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공이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해지자 다시 사이가 뜸해졌으나 마음속으로 사모하였는데, 지금 어느새 33년이 되었고 공의 묘소에는 나무가 이미 무성하게 자랐다. 의리상 묘갈명을 사양할 수 없기에 삼가 행장을 근거로 위에처럼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삼한(三韓)의 씨족들 가운데에 공의 가문 한두 번째였도다. 선대의 뛰어난 공훈 쌓였는데 공에게 와서 또 크게 드러났도다. 이에 성녀(聖女)를 탄생하니 온 나라에 경사가 미쳤도다. 관저(關雎)의 교화가 시행되니 근본은 신국(莘國)에 추구한다네. 공에게 지성이 있으니 효성 자애가 넘쳐흘렀도다. 공에게 깊은 학문 있으니 시서(詩書)를 모두 다 보았도다.
온갖 미덕이 근본 있으니 어디다 시행해도 되도다. 옥(玉)이 선 것처럼 빛났고 금정기[金精]처럼 순수했도다. 덕(德)을 베풀고 문(文)을 떨치니 보필에 무엇이 어렵겠나? 외척의 제약을 받았으나 어진 외척으로 이름났도다. 외척이 어질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곤 했도다. 몸가짐이 몹시 간소하니 간이(簡易)하고 근신(勤愼)도다. 도태된 경계를 아는지라 나라가 길이 힘입었도다.
한스럽다 말하지 말게나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나의 충성을 끝마쳤도다. 효도를 옮겨서 충성하니 효도의 종결을 지었도다. 대자산에 묻히려고 하니 남은 정성이 찬란하도다. 내가 명(銘)을 지어 새기니 찬란히 더 빛나리로다. <끝>
[註解]
1) 촉(蜀)ㆍ도(塗)ㆍ신(莘)ㆍ지(摯) : 고대 중국 후비(后妃)의 출신지. 촉(蜀)은 황제(黃帝)의 아들 창의(昌意)의 아내 촉산씨(蜀山氏) 딸
의 출생지이고, 도(塗)는 우(禹) 임금이 아내 도산씨(塗山氏)를 맞이한 곳이고, 신(莘)은 문왕(文王)의 아내 태사(太姒)의 출신지이고,
지(摯)는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의 출신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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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壽谷 金公 神道碑銘) - 李光佐
逖觀元古以來, 后妃家蜀、塗、莘、摯, 毓德配聖, 流萬世之慶者, 其必有所以, 而世遠不可詳, 降及後代, 號稱賢者, 惟斤斤自將。 若夫淑愼本乎孝悌, 懿美源於經術, 其於處日月之際也, 綽然有裕者, 其惟我慶恩公乎!
公慶州金氏, 祖新羅敬順王, 歷麗迄今, 簪組名德相望。 有諱稇佐我太祖開國, 封鷄林君, 諡曰齊肅。 其孫從舜, 以淸德顯判漢城府尹, 諡曰恭胡。 恭胡孫千齡、曾孫萬鈞, 仍父子擢大魁。 千齡有盛名, 弘文館直提學。 萬鈞司憲府大司憲、贈議政府領議政・月城府院君, 出後從叔父司憲府持平、贈議政府左贊成引齡。 月城之子曰命元, 穆陵朝名臣, 左議政, 策平難功, 封慶林府院君, 諡曰忠翼, 卽公高祖也。 曾祖諱守廉, 僉知中樞府事, 光海政亂, 棄官自靖, 後贈領議政、鼇原君。 祖諱南重, 禮曹判書、慶川君、贈左贊成, 諡曰貞孝, 以長德稱。 父諱一振, 成均生員, 有潛德, 不幸早世, 以公貴贈領議政。 配豐壤趙氏, 贈貞敬夫人, 成均進士、贈承政院左承旨來陽女, 浦渚先生文孝公翼之孫, 李忠翼公時白外孫也。 有至性明識, 兩美鍾于公, 以辛丑十月四日生。 氣貌秀異, 相之者歎曰 “此名人也。” 五歲而孤, 太碩人敎導甚嚴, 而常謂 “必遠大。” 公於孝慈天得也, 奉母訓惟謹, 篤志力學。 嘗通夜讀書, 太碩人憂其生疾, 卽低聲不使聞。 甲子, 太碩人沒, 伯氏進士公繼歿。 公竭誠御窮, 送終無少憾, 持喪甚謹。 賻襚, 不許他用曰 “君子不家於喪也。” 饋奠具, 不以于人曰 “享先, 不可苟也。” 毁甚凜凜, 叔父楓崖公必振爲微勸草木滋。 公不忍聞, 泫然而泣, 楓崖歎其篤孝, 不能强也。 公少已存心內省, 靜穆罕出, 玄石朴公世采謂人曰 “吾聞某莊士也, 願一見之。” 始從西溪朴公世堂遊。 西溪深加敬重曰 “某將大有成也。” 嘗一發解, 親沒不復應擧, 丙子始勉就, 登生員試一等, 公議猶病其不置首。 主司崔公錫鼎方掌銓, 卽補公掌苑署別檢。 己卯夏, 陞歸厚署別提, 轉司憲府監察、戶曹佐郞。 庚辰, 出順安縣令, 政不尙皎厲, 而恩威幷著, 吏戢民安。 壬午九月, 我惠順慈敬獻烈大王大妃殿下膺德選, 卽公所在拜敦寧府都正, 進領敦寧府事, 封慶恩府院君, 後先兼都摠府都摠管、尙衣院・掌樂院提調。 特拜扈衛大將, 公始進見謂中官曰 “初見君父, 不可無承旨、史官。” 相持久之, 上促召, 乃入。 至冬, 參覆囚, 進止奏對, 雍容中度, 如慣習者, 衆咸歎異之。 乙酉, 上久不豫, 萬幾妨攝養。 公錄柳眉巖希春請令承旨標識文簿肯綮, 俾上易省覽者, 袖箚陳之。 國有慶賀, 公輒以提擧管進宴禮, 費省而事辦, 用進爵受鞍馬之錫者四。 宴享樂章多缺錯, 公爲葺理, 擇其近雅者用之。 庚寅, 有海賊虛警, 公白上曰 “所謂海寇, 不知在何處, 非大寇可知。 昔倭人二百年間頻來犯邊嘗試, 然後敢大擧, 淸人自丁卯生釁, 至丙子始擧兵。 自古爭城爭地之寇, 寧有一朝無端來者乎 旣非立國之大敵, 又不一投足於我境。 彼海外人, 何能明知他國兵力、山川險夷, 而一擧直擣京師, 如入無人之境乎 今不思命將出師, 先論去邠當否, 令中外騷擾, 誠爲失體。 天下事雖不可預度, 以今論之, 二三十年間恐無他憂。” 上深納之。 自公莅尙方, 畜積甚饒, 因言 “扈衛軍官皆善射, 所乏者弓箭。 據《漢史》有尙方劍, 古者兵器亦似出尙方。 請令本院措置弓箭, 緩急給軍官。” 上可之。 兩闕尙方皆狹且圮, 御服無別藏, 公幷改建, 別立冕服閣, 位置甚備。 公於一切朝廷事不涉絲毫, 海寇特以關係重, 故白之。 其言切中事情, 出群僚上, 若此類可以測公所存。 至如綜密精勤, 往往隨遇而見也。 慈聖患痘與疹, 輒命公直宿禁中。 比平復, 輒賜廏馬、田、僕, 命子婿中除官。 藥院直宿, 久不罷, 公請罷之, 且曰 “昔宋仁宗疾愈, 召呂夷簡, 怪其遲。 後對以 ‘奔馳, 恐驚人心。’ 今請罷直, 亦此意也。” 識者又多之。 庚子六月, 肅宗大漸, 用特命入直。 旣奉諱, 與諸大臣參襲斂。 因慈聖未寧仍在直, 景宗愍公病甚, 命還家調息。 又聞公茹素逾半年, 特遣中官勸肉, 公自持方喪, 哀戚殊甚。 明年秋, 疾轉劇, 上令御醫守視, 公猶盥櫛, 精神不爽, 對醫必整容飭, 後事纖悉, 以國哀未終, 命殯以縞素。 公嘗曰 “我死, 棺木必用君賜, 無得效人求己美。 外官賻送稍厚者及諸司葬前月俸, 幷毋受。” 竟以七月二十四日, 考終于正寢, 壽六十一。 訃出, 國人無貴賤咸嗟悼曰 “賢國舅亡矣。” 上震悼, 亟下隱卒之敎, 特擧哀, 撤朝三日。 三殿各遣中使弔孤護喪, 比葬亦然。 喪需皆官庀。 特賜東園黃腸、瀝漆、緞錦、襚以御衣, 給祿終三年。 今上時在潛邸, 卽日臨弔, 親視斂殯。 其九月十四日, 禮葬于高陽郡西大慈山議政公墓右巽向原。 上遣禮官、中使再致祭, 列郡供奠需, 內司樹碑表、起塚舍。 賜諡曰孝簡, 又用近例贈議政府領議政兼如法, 終始哀榮至矣。公天資溫粹簡潔, 儀度玉立, 一見可知爲端人正士也。 宅心愷悌, 處事詳盡, 身若不勝衣, 而其中貞介有難奪之操焉。 性旣至孝, 事太碩人愛敬篤摯, 婉聲愉色, 有足感動。 太碩人窮居鮮歡, 而以公故常多解顔。 公深痛蚤孤, 語及先故, 必涕泗, 或時中夜, 掩泣失聲長吁。 讀書至古人孝養哀慕處, 輒嗚咽不忍竟。 盡心追遠, 日晨起拜廟, 遇忌日, 僾然如見, 悲痛若喪初。 生朝愴慕終夕, 未嘗設酒讌, 不服華采, 罕與宴樂。 當析箸, 歸其半於宗子, 俾厚祠墓, 而分其餘。 凡係墓道事, 殫心經紀, 不以貧故少怠。 扁丙舍曰永思, 月一省墓, 無馬卽步往。 旣貴, 陳情曰 “臣生不識父顔, 惟頻省丘墓, 庶慰至痛。 顧不敢數乞暇, 遺弊郡邑, 請以無事日私自往來。” 上愍而許之。 慮諸子或信堪輿術別葬他山, 爲文戒之曰 “雖起塚牛眠之地, 山非大慈, 化者之悲, 無異蠅蚋之姑嘬。” 嘗封置一襦衣、一錦囊, 泣曰 “此吾母手中線。 異日宜置吾棺中。” 又曰 “吾幼孤創深, 且親喪, 貧不能厚送。 喪我, 非章服, 無得用文綺。 或荷恩賜, 斷數尺納棺內。” 後皆遵用。 事楓崖公如事嚴父, 旣沒, 事夫人如事楓崖, 榮奉中外, 盡其歡愉。 及喪, 竭誠斂葬, 年位旣高, 而守殯哭泣如禮, 弔者感歎。 兄有兩孤兒, 至誠敎育, 懇惻如慈母, 不幸早夭, 終身痛惜, 每念輒出涕, 子視其寡妻, 畜之於家。 伯娣早寡, 恩養甚備, 季妹早夭, 恤其家無間存亡。 事堂兄淸風公鼎臣, 依庇尊敬甚篤, 送延必於中門, 造其門必舍車徒, 終日語, 危坐無惰容, 有事必稟而行之。 推而及於周窮族、恤貧交如不及。 然深有感於范文正所謂 “不恤宗族, 何以見祖先”者, 三復噓唏。 俸賜饋遺, 諸司所分, 皆置外庫, 均分於宗族。 蓋其篤孝純行循循懇懇, 發乎衷誠, 浹于宗黨, 信於一世, 非可誣也。 平居, 整攝衣冠, 穆然終日, 几案圖書井如也。 接人, 無少長必恭敬, 發言端詳, 未嘗涉鄙俚。 雖當急遽倉卒, 常從容自持; 雖疾病困劣, 未嘗敢怠肆也。 自位崇地禁, 怵惕不寧, 小心謹畏, 二十年如一日。 不乘軒者五載, 病而後乃乘, 而騶率甚簡, 行不辟人。 入禁庭, 踧踖屛氣息, 略不轉眄。 嘗入診慈殿, 宮女年幼者, 立殿廡不避, 同列問故, 答曰 “府院君不曾擧眼, 露立何妨” 宮中傳爲美談。 痛戒家人, 宮中事雖微, 無敢或泄, 常曰 “私覿, 禮遇或殊異, 此足減吾年矣。” 時降掖隷問疾賜食, 必俯伏嘗之, 感極出涕, 寵錫有瘉常格, 卽蹙然不安者久之。 先王違豫逾十年, 公日晨夕起居, 氣力銷盡, 猶不自卹, 上深念之, 命毋鎭日問安, 屢諭終不變, 其不能永年, 殆祟此也。 凡公會, 必先往後罷, 莅官, 能持大體, 而細目咸擧。 屛絶干囑, 避遠嫌疑, 門庭如水也。 愛人惻怛, 深戒濫殺, 嘗曰 “古者, 人君有不詈人以死, 況爲官吏敢濫刑殺人乎” 常恐乘怒傷人, 有罪者, 必先繫囚, 徐察其强弱飢飽乃決。 在西, 嘗訊治一吏, 聞瘡重殊死, 歎曰 “所坐非至死也。” 卽放出, 與藥治, 竟得全活。 後語人曰 “吾慮其不能活, 寢不安者數日矣。” 每覆囚論奏, 務從平反, 得傅生議者多。 下逮僮僕, 曲施仁恕, 以及於畜物亦然。 嘗著辨曰 “古者, 牲牛、耕牛不同。 君有故而殺者乃牲牛, 耕牛未嘗殺也。 古人於凡禽獸猶且見生而不忍見死, 況旣食力, 忍復殺之而食其肉乎以是知古人未嘗食耕牛也。” 因終身不食牛肉, 狗馬死, 必裹而埋之。 公家素淸貧。 初定大婚, 女官來視井臼蕭然, 歸以白上, 上笑曰 “士大夫固貧以爲貴。” 旣貴, 不恤家私, 自奉簡約甚。 常謂子弟曰 “伊川有言 ‘人於奉身者, 要好身與心, 已先不好。’, 是誠格言。 不徒身心不好, 福祿亦自減損也。” 品帶, 借於人, 賜貂, 數十年不易。 常禁止奢靡, 雖婦女無得服紅紫、炫燿奇衺物。 巫祝、尼媼, 禁不入門。 嚴束僮指, 無得怙勢侵人。 有所貿易, 令不計直, 常使利在人。 名其內寢曰四留, 蓋取義於古人《四留銘》也。 初入賜第, 隣家欲避去, 旣而喜曰 “吾不審, 幾失仁里也。” 平生嗜書如芻豢, 每謂 “世間至樂, 無以易此。” 窮究經史, 以及百家。 常曉起讀《四子》, 率不下數十板, 音韻弘深淸越, 如擊玉鳴球。 聰明, 一讀不復忘。 雖病不釋卷, 赴公衙亦用書自隨。 熟讀《小學》, 律己必準是, 尤喜《大易》, 敬信甚篤。 公雖生質甚美, 其得力在劬書亦審矣。 勸人讀書, 必先《心經》、《近思錄》曰 “士當先治心養性, 文辭不足貴也。” 又曰 “兒少志慮未定, 不宜斅雜書, 先授《小學》、《語》、《孟》, 使知所向可也。” 訓子弟嚴, 無敢喧笑於前, 有過不少假借。 然必諄諄誨化, 如不能改, 或不食自責。 常戒之曰 “爲學須自强, 何待督責” 又曰 “讀古人書, 而不能行其事, 焉用書爲” 見怠於讀書, 必曰 “雖有豪傑之通才, 苟不資於讀書, 必有一塞處。” 見持身不敬, 必曰 “病在自待賤。 若知是身非萬金所能易, 安有是也” 又曰 “人雖沈重, 安靜如水中盤石, 方有用。 浮露躁率最害身心。” 凡世之否臧, 使不得發口, 切戒之。 其待人, 務篤厚, 然所與交, 淡然如水, 略無甘壞。 與人言, 各就其所當爲者, 惓惓不置人。 有過必面言之, 然必和顔, 未嘗用厲色也。 公旣積學所得厚, 發爲文辭, 醇鬯而切深。 有文集十二卷闡明先德居多, 記聞、散言諸編多名言。 一時巨人咸深惜公文謂 “足以提衡” 噫! 以公之標望德美淸範弘識限于褒紀, 曾不能少施於當世。 豈獨文爲然哉雖然, 其謙虛斂約, 貫徹終始, 感孚上下, 足爲後世法, 國家之賴之, 宜不下於任職盡忠。 語曰 “根深者條達。” 信哉! 後之觀公者, 尙亦知其有所本, 非苟然而已也。
公諱柱臣, 字厦卿, 號壽谷。 配嘉林府夫人趙氏, 永平縣令景昌女, 翊衛司侍直錫馨孫, 禮曹參判竹陰公希逸曾孫。 端重誠一, 在室, 親黨稱孝順, 旣歸, 尊姑稱愛敬無僞, 撫諸庶如己出, 事楓崖夫人如先姑, 其德可知也。 及貴, 兢畏凜凜, 始終如一。 生先公一年, 辛亥九月十日終, 隱恤贈庀, 視公喪。 育二男三女 長後衍, 前任工曹參議, 有二男一女, 男孝大、亨大。 次九衍, 公遺命出後堂兄介臣, 以不絶楓崖公之祀, 前尙衣院僉正, 有一女。 女長適錦山郡守李德鄰, 有繼子厚培。 次大王大妃殿下。 季適義禁府都事尹勉敎, 有二子東旭、東晳。 側室二男可衍, 乃衍。 一女適具弘佐。
光佐於公有奕世好, 偶未識面。 嘗拜淸風公於長興里第, 有隅坐人符彩襲一座。 光佐驚問之, 淸風公曰 “君不識吾從弟某乎” 遂傾倒如平生。 未幾, 公受封, 因復間闊, 而心獨竊慕之。 今忽三十三年, 而公之墓木, 已成陰矣。 麗牲之文, 義不敢終辭, 謹就狀文序次。 銘曰。
三韓之族, 公世甲乙。 積累休光, 公又大發。 粤誕聖女, 流慶區域。 《關雎》之化, 推本莘國。 公有至性, 藹然孝慈。 公有邃學, 淹極書詩。 百美攸本, 奚施不宜瑩其玉立, 粹如金精。 布德振文, 何有贊邦閼于褒紀, 以賢戚名。 戚之不賢, 邦用顚墜。 公操至約, 惟簡惟畏。 汰者知戒, 國與永賴。 毋曰可憾! 奚其爲庸奉璧持盈, 畢此危忠。 孝以爲忠, 孝道之終。 歸必大慈, 炯炯餘誠。 我刻銘章, 有曜于光。
<끝>
